일반적으로 수필은 아주 쉽게 쓰는 글로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한 편의 수필을 써 보라고 하면 시보다도, 소설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이 수필입니다. 좋은 詩가 아니어도 詩는 詩일 수 있고, 좋은 小說이 아니어도 小說은 小說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隨筆은 隨筆이어야만 합니다. 아무 글이나 詩나 小說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냥 隨筆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수필에 대한 인식의 부족입니다. 그런 글은 그 글을 쓴 자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수필은 자신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수필은 형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그것이 마치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형식이 없다는 말 오히려 그것은 수필 쓰기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필 문장은 깔끔하고 간결하되 건조하지 않아야 하며 평이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되고, 정밀(精密)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문장에는 호흡, 즉 리듬감도 살아 있어야 하는데 리듬은 문장의 율동으로 자연스러운 호흡을 일컫는 말입니다.
수필에는 몇 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 특성이 바로 수필을 결정짓는 요소가 됩니다. 곧 수필이 무엇인가.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도 이 수필의 특성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지난번에 소개했던 '몽테뉴'의 <수상록>을 다시 한 번 보면서 수필의 특성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참고 글.1> 독자에게 <몽테뉴>(鄭鳳九 옮김)
여기 이 책은 아주 ①성실 정직한 책이다. 독자여, 책머리에서 당신에게 그 사실을 말 해 두지만, 나는 이 책 속에 ②내 가족적인 사사로운 일 밖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을 두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당신에게 대한 어떤 보탬이나 또는 내 영광을 위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마련은 내 힘에 넘치는 일이다. 나는 이 책을 내 친척들과 친구들의 쓸모의 보탬으로 드린다. 즉 그들이 나를 잃고 나서 (머지않아 그렇게 될 테니까) ③이 책에서 나의 타고난 기질의 그 어떤 특징을 생각해 낼 수 있게 하고, 또 이 책에 의하여 그들이 나에 관해서 지니고 있는 지식을 더욱 완전하고 더욱 생생한 것으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이 책이 세상 사람들의 호평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좀 더 자신을 분칠했을 것이고, 조심스러운 발자취로 스스로를 드러냈을 것이다. 나는 여러 분들이 이 책에서 나를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긴장도 기교도 없는 담백한 모습으로 보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왜냐하면 ④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내 결심이 생생하게 그대로 읽혀질 것이고, 또 내 타고난 외모도 독자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예절의 한도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여질 것이다. 만약 내가 아직껏 자유 관대한 자연의 최초의 법칙 밑에서 산다는 그런 민족들 속에서 생활한다면 틀림없이 나는 당신들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아주 기꺼이 완전하게 벗어붙인 나를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여, ⑤내 자신이 바로 내 책의 내용이다. 이렇게도 가볍고, 이렇게도 별 볼 일 없는 내용이니 당신이 당신의 한가한 시간을 사용할 만한 구실도 못된다. 그러면 안녕. 1580년 3월 1일. 드 몽테뉴.
(1) 수필은 산문 문학(散文文學)입니다. - 문학성
수필이야말로 대표적인 산문문학입니다. 그래서 산문 정신(散文精神)이 강한 글입니다. 소설이나 희곡이 조탁(彫琢)하여 만들어진 글이라고 한다면, 수필은 빚어내는 글입니다. 그래서 수필은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특성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 곧 생각, 체험, 느낌을 사실적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낸 글이라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위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말하듯 '내 가족적인 사사로운 일을 성실 정직하게 그려낸' 산문적 글이 수필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산문(散文/prose)이란 운문(시. 시조 등)에 대하여 운율(韻律)이나 정형(定型)에 의한 제약이 없는 보통 문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모든 문서류나 일상의 회화(會話)까지가 모두 산문에 속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문예용어로 산문문학을 뜻합니다. 지금의 소설·희곡·평론·수필·일기·서간·각종 논문·역사 등이 모두 산문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에서 산문은 역사·지지(地誌)·철학 등 주로 비 순문학적인 내용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였고, 시 뿐 아니라 희곡·평론·소설까지도 대부분 운문의 형식으로 서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산문 문학은 운문문학보다 많이 뒤떨어져, 고대 그리스는 BC 6세기, 유럽은 중세 후기에야 비로소 산문 문학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학 주류는 오히려 산문이며, 이것은 18세기 이후에 소설이 급격하게 발전한 영향 때문입니다.
산문(散文)이란 영어의 프로즈(prose)에 해당되는 말로 프로즈의 어원은 라틴어의 프로루수스(prorusus)인데. 산문적이라고 하면, 어감이나 억양이 풍부하고 감정과 심상(心象)의 약동이 가득 찬 詩에 대하여, 무미건조하고 진부한 사물의 형용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산문정신(散文精神)이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시적(詩的) 감흥이나 낭만적 감각을 배제하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자유로운 산문으로 표현하려는 문학상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산 백과사전 참조>
<주의> 그렇다고 수필이 산문정신에 투철하다 하여 감정이 없는 글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필은 시의 장점과 소설의 장점을 다 갖춘 문학이라고 합니다만 수필은 시적 요소를 더 많이 갖춘 산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수필은 무형식(無形式)의 형식문학입니다. - 무형식성
수필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입니다. 시나 소설, 희곡 등에 비하여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은 내용 즉, 정서, 상상, 사상을 예술화하는 그릇이므로 어떤 장르이든 문학형식의 제약을 받게 되지만 수필은 비교적 제약을 덜 받고 자유롭게 써 갈 수가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구성이 없는 문학 장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필에선 그 구성마저도 의도적이고 계획적이기 보다 써 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구성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조화의 미와 작자의 체취와 멋을 드러내는 것이 수필이기에 형식이 있다는 타 문학 장르보다 그래서 오래 수필을 써 오신 분들이 오히려 오래 쓰면 쓸수록 더 쓰기 어려운 것이 수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식이 없는 것 같은데 가장 형식을 잘 갖춰진 문학이 수필이라는 것은 수필을 써 본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사실일 것입니다. 무형식이라는 말은 형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로서 설명, 논증, 서사, 묘사 등 문장의 모든 기술(記述) 양식을 자유로이 부려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수필은 고백적(告白的)인 자조문학(自助文學)입니다. - 자기 고백성
수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드러내기'입니다. 몽테뉴가 '완전하게 벗어 붙인 나'라고 한 '드러내기'입니다. 그런데 이 드러내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관한, '나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적으로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수필의 어려움이 있고, 수필의 맛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발가벗기'라고도 하는데 바로 모든 대중(독자) 앞에 나를 나신(裸身)으로 내보여야 하니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숨기거나 허위로 표현한다면 그건 수필의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②내 가족적인 사사로운 일' 과 '④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고 했듯이 수필은 곧 나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이요, 자조(自助)하는 문학입니다.
소설이나 희곡은 표현 뒤에 주제를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필은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허구(픽션)가 아닌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취미, 지식, 이상, 정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살아온 삶, 앞으로의 계획, 숨기고 싶은 습관까지도 솔직하게 노출시킵니다. 그래서 수필 쓰기는 자신의 삶과 인생을 진실의 거울 앞에 비춰 보이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실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보탬이나 덜어냄이 없이 숨김이나 치장함 없이 알몸이 되되 부끄럼 없이 고백하는 것,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았고, 도 앞으로는 어덯게 살려고 하는가?' 까지 숨김없이 드러내어 말하고, 속 마음을 열어보이는 문학이 수필입니다. 수필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은 곧 수필이 자기 고백적인 글이라는 의미이며, 또 자기를 비쳐보는 거울이라는 것이며, 자기의 깊은 사색과 철학과 인간학을 '마음'을 통해 여과하여 문자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필을 '고해성사(告解聖事)'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진실에 입각한 고백적 자조문학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필은 픽션이 아닌 '넌픽션'이라는 특징에 아주 큰 비중이 주어지는 것도 바로 이 고백적 자조문학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예문.1] 위태롭게 뛰어내려오는 그 아이도 나와 비슷한 처지인 조실부모한 고아로서 일곱 살 때부터 숙모님의 시중을 들어 가냘픈 손마디가 거칠었고 총명한 까만 눈은 학교의 문턱마저 까맣게 잊고 사는 불쌍한 아이였다.
오빠가 귀대하는 날 아침 숙모님을 대신하여 동리 아주머니들을 찾아다니며 동백의 씨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팔아 갚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했었다. 어렵게 번 몇 푼의 돈을 손에 꼭 쥐고 뱃머리를 향하여 달렸던 것이다. 눈물범벅이 된 어린 동생은 따스한 형제의 정을 건네주고는 바위에 주저 앉아 외로운 오빠의 처지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겹쳐가며 파도처럼 흐느꼈다. 가슴깊이 와 닿는 갸륵한 정의 전율을 느끼며 터지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두 고아의 가엾은 눈물을 보고 나룻배의 일행도 모두들 측은해 눈시울을 적셨다. 바다 저쪽 하얀 갈매기도 같이 울어주었다. 다시는 휴가를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 고동주의 수필 <동백의 씨> 중에서
수필 <동백의 씨>에서 우리는 작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를 몇 문장으로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조실부모 했고, 숙부님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군복무를 하고 있는데 휴가를 나온 것이고,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촌 여동생이 역시 숙부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고, 귀대하는데도 아무도 교통비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본 어린 소녀가 동네 아주머니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려 오빠의 손에 쥐어 주는 이야기를 통해 모든 정황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필 한 편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송두리째 벗겨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적인 글이라 하는 것입니다.
[자조 문학(自照文學)] ' 자조(自照)'란 스스로를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수필에서의 자기 고백성은 자신의 체험이나 사상, 느낌 등을 가식 없이 진솔하게 표출하는 고백적 문학으로 글쓴이의 내면적 심경이 투사되는 자기 고백적 문학인 까닭에 수필을 일러 자조(自照)문학이라 하는 것입니다.
(4) 수필은 독특한 개성(個性)의 문학입니다. - 창조성 수필만큼 개성이 강한 문학도 없습니다. 수필은 자기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본연인 문학입니다. <참고 글> 몽테뉴 수상록에서 '③'과 같이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얘기하는 것이요, 또 자기의 소신 있는 목소리 곧 주장과 주의 그리고 세계관, 새로운 발견, 자신만의 명상, 자기만의 습관, 자기 고유의 체취 등을 숨김없고 유감없이 드러내는 데에 수필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독자성과 체험의 세계, 정서의 세계를 자기만의 맛과 멋으로 펼쳐내는 것이 자기다운 수필을 쓰는 모습이요, 수필로서의 개성(個性)을 꽃피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살다 보면 많은 사건을 만들고, 또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과 만남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방향성과 인간애를 건져내는 것이 수필입니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사상의 중심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발전 시킨다는 것은 세계의 발전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가장 중시하면서 그 '나'를 통해 만인을 생각하는 것이 수필인 것입니다. 사실은 거기에 수필의 매력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몽테뉴는 위 <참고 글>의 '⑤내 자신이 바로 내 책의 내용'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문.2]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지명에 이르러 이제 연의 일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진흙 속의 세태 속에서도 내 삶의 기쁨을 연꽃처럼 피워낼 수 있을 것인지, 겨울 연지를 떠나오면서 자꾸자꾸 뒤돌아보는 것이다. - 신일수의 수필 <겨울 연지에서> 중에서
[예문.3] 나는 겨울에 벌거숭이가 된 나무들이 상록수보다 더 좋다. 상록수가 만약 잎이 진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보기 흉할까. 원체 그들의 가지는 빈약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잎이 다 지고 난 벌거숭이 나무들이 내놓은 하이얀 피부와 모든 것을 떨쳐 버린 밋밋한 가지들은 동양화의 여백 같은 여운을 준다. 그들의 생각은 깊디깊어 하늘로 뻗치고 일부분은 남가람에 적시우고 있었다. 남강 변의 겨울나무처럼 이 고장에서 뿌리내려 진실하게 살아가고 싶다. 담담히 살고 싶다. - 정목일 수필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 중에서
[예문.4] 떠오르는 해는 이제 내 몫이 아니다. 서녘 하늘을 아름답고도 장엄하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의 종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숱한 오류, 숱한 실패, 숱한 잘못, 이 후회와 부끄러움을 깨끗이 지워 버릴 수 있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다. 일흔 여섯 살의 지미 카터가 사랑과 봉사로 실패한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지워가듯이, 나 또한 이기(利己)의 너울을 벗고 타인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내민다면, 내 노년에서도 잿빛을 거두워 낼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저녁 해를 떠올린다. 그 낙조(落照)가 물들일 아름다운 저녁 노을, 그것은 내 마지막 욕심이자 꿈이 될 것이다. - 이정림의 수필 <저녁 노을> 중에서
<겨울 연지>에서 작가는 진흙 속과 같은 세상의 삶 속에서 자신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며, 거기다 아름다운 연꽃처럼 자신도 삶의 기쁨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자신을 수없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의 작가는 상록수보다 나목(裸木)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벗어버린 초라한 모습에서 오히려 동양화에서 보는 여백의 여유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을 견디는 힘은 깊고 깊은 뿌리의 힘이고, 또 불평없이 참아내는 진실함이라는 것입니다. 화려함보다 빈약함에서 작가는 더 여유와 풍요로움과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저녁 노을>의 작가는 지는 해를 보며 자신의 인생 종장을 생각합니다. 장엄한 저녁 노을을 보며 자신도 그런 종장의 삶을 욕심내 봅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지는 해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은 삶의 매 순간을 지극히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이와 같이 수필은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글입니다. 험난한 세상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워내고 싶어하는가 하면, 겨울 나목으로부터 인내와 진실을 배우며 그런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 하면,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하고싶어 하는 여자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수필이 얼마나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문학인가를 알게 됩니다. 뿐 아니라 독특한 개성은 창조성으로서 수필도 창작예술인 만큼 문학적 창조를 위한 고뇌와 진통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5) 수필은 아주 다양(多樣)한 제재(題材)의 문학(文學)입니다. - 광범성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무엇을 담든 필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풍물, 신변잡사와 보고 느낀 것 모두가 수필의 소재가 됩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수필'이란 문학작품으로 빚어낼 것인가 하는 것은 필자의 지식이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문장력 등 글 솜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 솜씨의 정도에 따라 문장이 아름다운 시적 수필이 될 수도 있고,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경쾌한 산문이 될 수도 있고, 진한 서정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게 하는 서정수필 또는 설득력이 있는 논리적 수필, 예리하게 비판정신이 돋보이는 비평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필은 우리의 삶이나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수필의 제재가 되며, 주변의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넓고 깊은 사상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소재들을 다 담을 수 있는 대단히 폭넓은 문학인 것입니다.
앞에서 들었던 [예문.1] <동백의 씨>는 끈끈한 혈육의 정, 추운 겨울 끝에 선혈같은 붉은 꽃을 피워내는 동백과 가난의 아픔을 제재로 삼은 것이요, [예문.2] <겨울 연지에서>는 더러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작가의 삶을 대비하여 의미화를 시킨 것이며, [예문.3] <남강 부근의 겨울 나무>는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겨울 나목의 힘인 뿌리와 삶의 진실을 제재로 삼은 것이며, [예문.4] <저녁 노을>은 저녁 노을과 인생의 황혼기를 대조하여 문학성을 살린 것으로 이처럼 수필은 여러 다양하고 광범한 제재를 망라하는 문학인 것입니다.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 이청준 선생은 말하기를, 글을 쓰는 일은 마치 '젖은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쩐지 개운치 않고 찌뿌둥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허구의 작품을 쓰는 소설가의 마음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자기를 드러내어 글을 써야 하는 수필가의 마음은 어쩌랴. 사람은 될수록 좋은 일은 자랑을 하고 싶어하고, 안 좋은 일은 감추려고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잘 제어를 못하는지 모른다.해서 이번에는 필자가 생각하는 수필을 죽이는 독소와 살리는 요소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수필을 죽이는 독소
.도덕성의 흠결
전술 한바와 같이 수필은 인격과 글 쓰기가 별개가 아니고 함께 가는 문학이다. 때문에 도덕성의 흠결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친일을 했던 수필가가 애국심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하자. 누가 공감을 해주겠는가. 부동산 투기를 일삼고 세금포탈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별호가 붙은 사람이 아무리 유려한 필치로 사회정의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도 공감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수필은 글따로 사람따로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자랑과 과시
자기 자랑과 과시는 결정적으로 수필을 죽이는 독소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치고 이 정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글들이 적지 않음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랑과 과시는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노골적으로 터놓고 거침없이 하는 경우와 안 그런 척 내숭을 떨면서 은근슬쩍 곁들이는 경우가 그것이다. 집안자랑을 포함해 자기와 가족자랑을 말함인데,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왜 실수담, 실패담이 성공을 거두는 작품이 많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성의 없이 쓴 글
빈약한 체험과 깊이없는 사색, 그리고 농필로 쓰여진 글이 문학성이 확보될 리 만무하다.이런 글은 자기 기망을 넘어 독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수필을 살리는 요소
. 개성이 넘치는 글
다른이가 미쳐 생각하지 않는 기발한 발상과, 독특한 소재을 택하여 자기화한 문장으로 글을 쓸 때, 생명있는 글이 된다.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특장 하나쯤은 개발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떤 전문가가 아니라 어느 방면에 남다른 소양을 지님을 말한다. 여기서 참고로 한가지를 언급하자면 평소 신변 이야기를 많이 쓴 작가로 알려진 박연구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수필 속에 꼭 한두가지 나만의 장치를 해 둔다.' 두말할 것도 없이 개성있는 글쓰기를 말함인데 음미할 대목이다.
주제와 소재의 일체화.긴밀화
수필을 쓸 때는 주제가 잘 살아나도록 소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 작품의 형상화와 의미화는 결국 그 정황에 들어맞는 소재와 문장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제와 소재는 마치 지휘관과 병사와의 관계로서, 일사불란하게 서로 조응되어야 하며 문장은 그 얼개가 아교칠과 같이 밀착되어야 한다.
. 꾸준한 자기 관리
인격 수련을 위해서 자기와 주변관리는 필수이다. 그리고 사색의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작가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와 여행과 사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는 것이 아니다.
자료출처-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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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수필을 썼을까, 과연 무엇을 나타내려 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썼는가를 한 번 예를 들어봅니다. 자료는 최원현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을 중심으로 한 [나의 수필론] - 내 그리움의 구체화, 형상화입니다.
[나의 수필론] - 내 그리움의 구체화, 형상화 - 최원현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을 중심으로 -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특히 우리 삶의 이야기를 사건화 시키고, 위기감을 부여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들이 산문문학이다.
그중 수필은 1인칭 문학으로써 허구가 아닌 실제 체험한 자기만의 이야기요, 설혹 직접적인 자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의미화 되다보면 나로 귀결되어 독자는 결국 나를 통해서만 나와 동화되고, 감동하고, 공감하게 된다.
내 수필의 주제는 그리움이다. 그리고 이 그리움은 두 개의 갈래로 분류된다. 하나는 구체화되지 못한 채 강물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는 이미지만의 그리움이고, 하나는 어린 날의 추억에서 발아(發芽)하여 현재라는 텃밭에서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정착된 공간을 확보한 상당히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그리움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相思花)처럼 현실화 될 수는 없으되 그렇다고 떨쳐버릴 수 없이 사고(思考)의 영역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이고, 후자는 현실 속에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구체적(사실적) 형상화도 내게 큰 이미지로 존재하면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형태의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독자에게도 형질은 나와 같으되 형상은 독자의 것으로 새롭게 구현되어 읽는 이의 몫이 되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려는 것이 내 수필적 의도이기도 하다.
어차피 삶이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고 반추되며 또 그 삶의 맛이나 향기도 독자나 작자의 개인차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삶이라도 렌즈의 초점을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맺히는 사상(事象)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한 곳에서의 체험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받는 느낌은 꼭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수필도 형상화(形象化)하고, 의미화(意味化)하고, 사실화(事實化)된 그리움의 실체들이 독자와 만났을 때 개인차 내지 환경에 따라 감동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필은 분명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1인칭 문학이다.
그러나 그 출발로부터 도착까지 사이에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나-독자-를 새롭게 포섭하고, 확충 하면서 함께 절대 공감하는 문학이 수필이기도 하다.
수필을 본격적으로 써온 지 20여년,. 그 동안 수필집도 내었고 작품도 꽤 많이 썼다. 그러나 아직도 '수필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하고 얼마큼이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쩌랴. 내 재주 없음인가, 아니면 워낙 수필이 그렇게 쓰기 어려운 장르의 문학이어서 인가 쉽게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수필을 수많은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 만남의 상황과 감동들이 '나'라는 대롱(관)을 통과하여 나오는 동안 형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맛깔스러움과 멋스러움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수필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글이 아니라 깨닫게 하는 글이다. 그래서 읽는 이가 맛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속으로 스며들며 가슴속에 물줄기를 내는 글, 그런 글이 수필이다.
나의 수필은 한 겨울의 꽁꽁 언 땅 밑 속으로 깊이깊이 흐르는 따스한 물줄기가 되고 싶다.
화려하기보다는 단정함을, 강하지 않으면서도 약하지는 않은,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들꽃 같은 모습에 나름의 향기를 가득 품은, 그래서 못 견디게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어쩌다 한 번씩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그런 수필이고 싶다.
사실 수필이란 거울을 보며 그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나'와 '나'의 만남일 수 있다. 허나 그 거울 속의 모습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조금은 색다른 만남이랄 수 있겠다.
자기의 생활이나 사상과 감정들을 글 솜씨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수필이라면 그 사람의 생활이나 사상이나 감정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남겨야 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작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아닐까.
재미없고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 신변잡기 같은 생활이야기를 이 바쁜 세상에 누가 무엇 하러 읽어줄 것인가. 최소한 읽는 이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읽은 이가 어느 정도의 맛과 멋은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구성과 표현을 치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평범 속에서 비법을 드러내는 글이 수필이라지 않는가.
가능한 한 어렵고 전문적인 표현보다는 쉽고 아름답고 친근감이 있는 순수한 우리말 표현을 애용하고, 강한 주장이나 제시보다는 내 생각을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펼쳐내어 읽는 이가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한 편의 글 속에서 작가 의 생각에 동화(同化)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세일 것 같다.
아이가 현관에 꽂아둔 마른 억새꽃 다발을 본다. 바람을 다스리기보다 다스림 당하며 살다 어느 날 아이의 손에 의해 내 집으로 옮겨진 억새꽃 다발처럼 무언가 사람도 생명이 떠난 후에라도 살았던 흔적은 남겨야 할 것 아니냐는 자기 각성이 하나의 숙제가 되어 가슴 한 쪽을 차지한다. 땀이 베인 저마다의 삶의 향기, 그게 나이 값이 아닐까. 수필 <나이 값> 중에서
수필 <나이 값>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장보다는 나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이끌어내 놓고 결론은 내가 아닌 읽는 이가 내리는 것처럼 하되 내 생각 쪽으로 슬쩍 유도함으로 거부감을 없애려 해 본 것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색에서 나오는 글이다. 그래서 사상과 철학,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우러져 읽는 이의 가슴속에 새로운 감동으로 와 닿을 때 그의 삶은 한여름 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등산길 돌샘에서 물 한 그릇을 들이켰을 때의 신선함과 상쾌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가슴을 때리며 울리는, 그리고 때로는 저 가슴 밑바닥까지를 시원케 해주는 생명의 감동이나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감동이 클 때 독자는 그걸 잊지 못하며 그것이 곧 문학성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수필의 문학성은 작가의 체험 곧 눈물, 고뇌, 슬픔, 아픔, 고통, 기쁨, 절망들이 작가에 의해서 인생의 통찰 내지 달관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으로써 잘 익은 포도주와 같이 읽는 이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지고, 감동되고, 동화될 때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 아니라 모든 문학이 다 그렇겠지만 수필은 특히 독자와 공유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나 논리적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의 체험과 지식, 나와 반대되는 사상이나 의견까지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엔 문장력이라는 기술적 수단이 우선되어야 하겠고 그것은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기본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찮은 자기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작품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특별한 글감이 되도록 기술적(뛰어난 문장력)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隨筆은 곧 作家'란 말을 쓴다. 수필가는 참다운 인격체가 되지 못하면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는 말인데 수필은 머리로 쓰는 글이 아니고 마음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얘기하되 자기의 인격, 품격, 지식, 연륜 등에 의해 재 조형(再造形)된 새 모습 그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느낌과 의미를 형상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수필의 생명인 체험과 진실이 읽는 이에게도 절대적으로 공감될 수 있을 때 '작가와 독자의 수필 속 여행' 곧 둘이서 함께 하는 체험여행이 공감의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수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를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수필은 전환을 많이 한다. 때로는 사건을 역순으로 도치시켜 전개해 가기도 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급작스런 전환을 시도하되 그 전환이 혼란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신선함을 줄 수 있게 한다. 물론 혼란의 우려도 없진 않겠지만 의미 있는 변화, 작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그런 극적 전환이 독자에게 전달될 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1) 새끼손가락 손톱 위에 백반 섞은 꽃잎을 얹으니 시릿한 감촉이 아릿아릿 전 해 오고 꽃내음이 더욱 짙다. (2) 비닐 끈으로 돌돌 싸고 실로 칭칭 감는데 아이가 켠 라디오에서 가야금 산조 가 흘러나온다. (3) 문득 원나라에 붙들려가 가야금을 타던 궁녀 생각이 떠오르며 어린 날의 향수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수필 <발뒤꿈치> 중에서
현실과 과거, 과거와 현실이 교류되면서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이미지를 주고자 한 시도이다. 독자를 끌어들일 수 없는 글은 아무리 잘 된 글이라고 자신이 평가해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결코 좋은 글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쓰는 것이 '붓 가는 대로'인 것처럼 읽히는 것은 물 흐르듯이 되어야 하는 것이 수필이기에 문장의 원숙이 선행되어야 하고, 자신의 삶과 인생이면서도 일상성이 아닌 전문성으로 사건마다 독자적 구성력을 확보함으로써 표현상 전환을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쉬운 글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쉽다는 것이 아무나 아무렇게나 쓰는 글도 수필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필의 매력 중 가장 큰 매력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접근하여 시나 소설이나 희곡의 장르를 벗어나면 수필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수필이라면 어떻게들 받아들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사실 그대로 문장화해 놓아야 한다는 진솔성을 사람들은 너무 무시하고 사는 것 같다. 또 하나 읽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생각한 대로 이해하면 되는 글이라는 점에서 수필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가야 할 이유가 없이 내 식으로 읽고 내 식으로 이해하면서 내 수준에서 감동하고 만족해 할 수도 있는 글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이 독자에게 주는 목적성, 이를테면 수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수필은 인간의 심성 깊이 스며드는 글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할까라는 데도 의견이 모아질 수 있으리라. 나의 이야기이지만 내 이야기만이 아닌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요, 나 외에는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체험의 글감을 재미와 호기심과 감동이 어우러진 내용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도 수필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1) 삶이란 막히면 돌아가야 하고 아니면 넘어야 하는 것, 그리우면 그 그리운 곳으로 찾아 가면 된다지만 갈 수도 없고, 가 봐야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은 어디 가서 채운단 말인가. (2) 밖으로 나와 파랗고 맑은 하늘을 향해 어머니! 하고 가만히 불러본다. (3) 어머니가 하늘빛 웃음을 띄고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만 같다. (4) 제법 선명한 얼굴 모습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에 유난히 정이 가득한 것 같다. (5)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어쩜 어머니도 이런 맑은 하늘빛을 참 좋아 하셨을 것만 같다. (6) 어머니는 이젠 맑은 하늘빛으로 내 곁에 있으시려나 보다. - 수필 <어머니의 눈> 중에서-
마치 물이 어름이 되고, 어름이 녹아 수증기가 되고, 그것이 식어 다시 물이 되는 것처럼 수필가는 'H2O'라는 사실적 근거 곧 체험을 상황과 필요에 따라 어름으로, 수증기로, 물로 형상화시키는 사람이다.
지금의 삶과 어머니, 어머니와 하늘, 그리고 그리움 그것들은 담을 수 없는 무형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수필가는 그것을 담는 방법을 안다. 바로 작가의 가슴에 담아 독자의 가슴에 담아 줌으로써 동질의 체험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어쩔 수 없는 자기의 이야기 내지는 자기로 연결되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사랑하거나 미워해야 가능한 것이요, 좋은 수필을 쓰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일 때 좋은 작품은 태어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는 좋은 수필도 씌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이 곧 작가'인 것 아니겠는가.
수필은 일상생활에 대한 단편적 기록일 수도 있고, 일상에서 얻게 된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서술한 글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꼭 어떤 구조적 격식에 맞아야 하거나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을 쓰고자 하면 첫째 왜 글을 쓰려 하는가, 둘째 무엇을 쓸 것인가, 셋째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랜 동안 수필을 써 온 사람도 그렇고, 수필을 처음 써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 자체가 즐겁기만 하고 행복한 작업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글쓰기란 '창작'이기 때문입니다. 창작은 없는 것을 새롭게 탄생 시키는 것으로 분만의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수필이라고 해서 내용이 평이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지만 그만큼 내용이 다양할 수 있고, 글의 성격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수필도 있고, 과학적인 수필도 있고, 음악이나 미술이나 건축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들어있는 수필도 있습니다. 따라서 수필의 내용은 시나 소설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나 비중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보다 많은 직.간접적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적 체험을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겪고, 느끼고, 얻어진 체험들이 수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수필을 40대 이후의 문학이라고 했던 것도 풍부한 인생의 경험을 위시해서 많은 지식을 갖게 되는 40대 이후쯤 되어야 비로소 인생의 의미가 배인 한 편의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만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수필의 소재는 참으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심각합니다. 소재가 널려 있는 것 같다가도 막상 글감으로 선택하여 써보려 하면 눈에도 손에도 잡혀주지를 않는 게 글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좋은 수필을 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많은 경험적 지식을 얻으려면 폭 넓고 무게 있는 독서가 필요하겠지요? 전문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학, 예술, 종교, 과학 할 것 없이 많은 독서를 하면 그것들이 값진 수필의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도 있습니다. 무조건 읽는 것보다는 좋은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데 좋은 책 고르는 것이 또한 쉽지 않지요. 좋은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겐 모범이 될 수 있는 좋은 수필을 많이 읽으라고 권해 주지만 그 좋은 수필의 기준, 좋은 수필집이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수필가 윤모촌은 이에 대해 '문장에 재질(才質)이 있어도, 모범이 될만한 글을 읽지 않으면 만권의 책을 읽어도 글다운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이 몸에 배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격과 같다.' (수필문학의 이해/미리내/23쪽) 고 했습니다만 좋은 글이 담겨있는 좋은 책을 고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베스트 셀러라고 해서 다 좋은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이고, 추천을 받아 본인이 몇 편을 읽어보고 결정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둘째는 많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생각은 글쓰기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니겠습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커피를 맛있게 타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아주 맛깔스럽게 타서 먹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맛이 없게 타서 자기도 먹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처럼 글쓰기도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글의 주제나 방향이 달라져 버릴 수 있고, 좋은 글, 그렇지 못한 글로 판가름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수필은 문학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을 중시합니다. 수필적 생각은 느낀 바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구성(構成)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느낌에서 출발하며, 그 느낌이 예술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느낌만으로 문학이나 수필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구상(構想)하는 능력과 노력이 필요한데 여기에 문학적 상상이 필요하게 되며 그 상상이 바로 생각인 것입니다. 많이 생각한다는 것은 설계를 오래 꼼꼼이 잘 한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소재를 만나면 수필은 시작되지만 소재를 만난 충동만으로 생각의 과정 없이 쓰여진 수필은 좋은 수필이 되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얻은 재료(지식)를 갖고 생각을 통해 설계를 하고 그것을 무언가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곧 수필로 써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했더라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냥 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무엇을 수필로 쓸 것인가?
첫째, 내가 아는 것을 쓰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직접 겪은 경험, 책에서 읽은 간접적 체험,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깨달은 것, 그런 모든 것이 바로 수필로 쓸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게 된 것, 내가 아는 것들을 남이 읽어도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共感)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설익은 밥처럼 되게 해선 안되고, 뜸이 잘 들어 반찬이 없어도 맨밥으로 먹어도 아주 맛있는 밥처럼, 여과 할 것은 여과하고, 농축할 것은 농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재료를 준비했다고 해서 보기도 좋고 맛있는 음식이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필요한 재료, 내가 만들고 싶은 음식에 꼭 들어가야 할 재료를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 생각한 것을 쓰는 것입니다. 생각되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한 생각이면 훨씬 진보적이고 발전적이고 거기에 상상력까지 추가된 획기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생각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 누군가에게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할 때, 누구에게 무엇을 지시할 때 그 때마다 쓰는 글의 형태가 각기 다른 것처럼 글의 재료를 얼마큼 어떻게 사용하여 어떤 순서로 글을 쓸까 하는 심사 숙고가 필요합니다. 생각을 쓰되 정리된 생각을 쓰고, 생각을 쓰되 일방적이지 않게 쓰고, 생각을 쓰되 공감할 수 있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써보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써보다 보면 거기서도 또 새로운 감을 잡게 됩니다. 생각으로는 잘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서보면 잘 되지 않는 게 글쓰기입니다. 또 표현력이 풍부한 사람은 그래도 비교적 쉽게 문장을 풀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주 힘이 듭니다. 몇 배의 훈련이 필요하고, 그 훈련도 더욱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수필은 단 한 번에 글 한편을 써내는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빚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타고난 재질이 있거나 많은 훈련을 하고도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아주 오랜 동안 머리 속에서, 가슴속에서 수없이 한 편의 수필이라는 집을 이리 짓고 저리 지으며 만들고 허무는 반복 속에서 이제 되었다 싶을 때 비로소 펜을 들고 써내려 가는 것이지 그냥 단번에 자, 지금부터 쓰자! 하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생각입니다. 상상력까지 추가된 거듭 생각하기, 그래서 걸림도 막힘도 없이 술술 풀려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써보기의 많은 훈련이 좋은 수필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접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수필을 썼을까요? 과연 무엇을 나타내려 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썼는가를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 여기서 예로 들 내용은 제가 문예지에 발표했던 <나의 수필론>인데 함께 다시 생각해 보는 자료로 활용코자 합니다.
수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쉽게, 아무나 쓸 수 있는 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생각이고, 또 이러한 생각이 수필문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수필문학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프랑스의 박물학자요 계몽사상가인 '뷔퐁'은 "글은 곧 사람이다"라고 했고, 독일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쓴 글은 똑같다"라고 하여 작가가 곧 글이요, 글이 곧 작가라고 했다. 수필은 특히 작가 자신의 체험적인 사실 이야기다. 그래서 작가의 개성은 작품의 개성이 되고, 작가의 철학과 사상은 작가의 인격과 품위로 글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수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필 쓰기에 임하는 작가의 자세는 어떤가가 매우 중요해 진다.
무엇보다도 수필에 대한 오해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한 편의 수필을 낳기 위한 수필 쓰는 자세는 운동 선수가 경기에 임하는 마음 이상으fh 수필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그러면 수필을 쓰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지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본다.
첫째, 수필은 단순한 신변잡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금아 피천득은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라고 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그냥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사유(思惟)와 철학을 줄 수 있는 체험을 골라내어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이다.
둘째, 수필의 눈 곧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은 일상성에 대한 사랑이다.'(김열규) 라고 했다. '수필의 눈'으로 바라볼 때 평범한 삶의 전개(사건)도 문예화 되는 것이다. 수필의 눈이란 평범한 일상에 의미의 옷을 입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조로운 일상적 평범을 극복하고, 전혀 새로운 모습(사실)을 찾아내는 것, 끊임없는 새로운 발견이 바로 수필의 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할 때와 사랑하지 않을 때의 차이는 엄청나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보이는 것은 달라지게 된다. 수필의 눈은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셋째,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철학적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신이 쓰는 것이 수필이다. 어찌 생각하면 참 멋적은 일이고, 매우 부담스러운 작업이 될 수 있다. 수필은 자신의 진솔한 삶과 삶의 철학이 녹아있는 것인 만큼 자신을 객관적으로 크고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진지한 철학적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바른 문장 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글과 사람이 하나이기를 요구하는 문학이 수필이다. 따라서 문장의 수련 못지 않게 인격의 수련이 함께 요구되며, 품위 있는 문장이 되어야 품격을 갖춘 수필이 된다. 자신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이 수필인 만큼 감정을 충분히 여과해 내고, 천박하거나 경박한 표현을 삼가 하며, 정확한 맞춤법, 문장 표현법에 맞게 쓰는 훈련이 우선되어야 한다. 문학을 위한 수업이란,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문학 뿐 아니라 역사. 문화. 종교. 철학 등의 전문서적을 통해 폭넓은 체험을 확보하고 이것을 자신의 삶과 연계하여 인생의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쓰고자 하는 욕망과 완성에 대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작품은 작가정신, 곧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작가적 욕망과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문학적 고뇌와 작품을 향한 지극한 정성과 노력의 결과여야 한다. 수필은 쉽게 씌어지는 글,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완전히 벗고 , 15매 내외 분량의 수필 한 편 속에 작가의 인생과 철학을 다 담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여섯째, 수필은 생활과 예술의 조화(합주)이다. '문학이란 평범한 일들의 관현악 편곡이다.'(T.N.와일더)라고 했다. 수많은 평범한 일들이 놀랄만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 문학성 높은 수필이 되게 하는 것 , 곧 평범한 생활이 예술이 되도록 적당한 '어우르기'와 적당한 '드러내기'의 합주로 화음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합창이나 합주에서 자기 소리가 너무 커져도 안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되는 것처럼 동시에 듣는 자요 연주자가 되는 조화의 문학이 수필 쓰기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몇 가지 사항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리를 확보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수필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인생 , 나만의 삶을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어놓는 일이다. 나를 평가받는 일이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를 내어놓는 일이다 . 그런데 아무렇게나 내놓을 수 있는가. 내 명예요, 내 자존심이 아닌가. -------------------------------- -------------------------------- [과제] 위에서 든 예문들의 전문을 구해 읽어 보도록 하세요.
<동백의 씨>(고동주) <겨울 연지에서>(신일수)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정목일) <저녁노을>(이정림), <돼지가 웃은 이야기>(강호형) <바다 위의 하늘에서>(신영복)
그리고 위 6편의 전문을 읽고 본 강좌에서 제시한 내용과 자신의 느낌을 정리해 보도록 합시다. 느낌은 http://essaykorea.net <게시판>이나 <나도작가>에 올려 서로의 의견을 나눠 봅시다 -------------------------------------------------------------- ^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 하세요 -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너무 결과에만 급급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하되 그 과정이 즐거울 수 있어야 행복한 글쓰기가 될 수 있겠지요? 내가 지금보다 정리된 형태로, 그리고 나의 생각을 받는 이에게 보다 감동적이게 전할 수 있도록 투자하는 나의 이 시간들이 바로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는 게 중요할 겁니다.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엄마가 책상에 앉아 책을 볼 때나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더랍니다.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엄마가 쓴 글이라며 읽어주고, 활자화 된 걸 보여주면 얼마나 더 좋아할까요? 우리는 소박한 꿈을 갖고 글쓰기를 공부합니다. 목표가 너무 거창해 지면 마음이 조급해 지고 불안해 지지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 새삼스러운 말은 아니지요? 모두들 행복하시고, 이 글쓰기가 또한 그 행복에 더 맛난 조미료가 되었음 합니다. 동영상입니다. 보고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장 행복한 자세로요.
결과보다 과정을
낚시를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잡은 고기를 집에 가져가지 않고 다시 물 속으로 돌려 보내주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애초부터 낚시의 이유가 기를 써서라도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잡는 순간까지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진정으로 기쁜 것은 고기가 잡혔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기를 잡기까지의 과정, 미끼를 끼고 찌를 계속 쳐다보면서 오랜 시간 참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콜럼버스를 가장 기쁘게 했던 것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몇 년간을 바닷속에서 헤매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대견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다가올 결과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지 말고 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보태어나가는 과정 속에 자신의 애정을 불어 넣으십시오.
그렇게 순간순간에 충실 한다면 좋은 결과도 그대의 그 아름다운 과정을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