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다.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도 인간은 말할 수 없다. 숨이 멎으면 동시에 삶도 끝이 나므로,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를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 멈추면 죽음도 멈춘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타인을 통해서만 경험되고 이해되는 낯선 사건이 아닐까. 그래서 살아있는 인간에게 죽음은 늘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닐는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평생을 거쳐서 천착한 문학의 주제도 바로 '죽음'이었다. 그것은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죽음이 아니라 삶에서 경험하는 실재적인 죽음이다. 톨스토이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큰사진보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창비 관련사진보기
 
톨스토이에게 죽음은 삶과 연결된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은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고민케 한다. 톨스토이가 작품에서 죽음을 통해 그토록 삶의 진실을 보여주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톨스토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잘 담겨 있는 작품이다.

고위 관료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된다. 집수리를 하던 중 사다리에서 떨어져 옆구리를 다치고 점점 심해지는 통증으로 더 이상의 삶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죽음은 하루하루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아프기 전까지는 죽음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살아왔다. 그에게 죽음은 추상이 빚어낸 관념일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세상이 맞춰놓은 기준에 따라 단지 "열심히" 살았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사교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고상한 품위를 잃는 법이 없었다. 동료와 부하직원들은 "과시할 만한 성공"에 그를 존경했으며, 그런 주변의 시선은 이반 일리치를 항상 기쁘게 했다.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삶이었다.

하지만 병세가 점점 심해지고 이내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당도해 있음을 감지한다. 그제서야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전부 허울뿐인 거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가진 능력, 타인들에게서 받는 선망, 상류층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격 등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투병 생활을 하면서 이반 일리치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위선과 기만이었다. 병들어 죽어가는 그에게 사람들은 "치료만 잘한다면 곧 아주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둘러댔다.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생겨나는 것들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에 바빴다.

아내는 이반 일리치가 죽은 뒤 받게 될 연금액을 챙기고, 동료들은 공석이 될 그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몸이 아픈 이반 일리치는 무엇보다 가족과 친지, 동료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보살핌을 받고 싶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봐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하인 게라심은 달랐다. 그는 병든 이반 일리치의 몸을 닦고, 오물을 치우고, 죽을 떠먹이는 등 그를 정성으로 보살폈다. 여기에는 주인과 하인이라는 위계도 없었고, 인간의 '잘남'과 '못남'도 무용했다. 병들어 죽어가는 약한 인간과 그를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돕는 한 인간만이 존재했다. 그들은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대면할 뿐이었다.

이때 이반 일리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게라심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진실로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이반 일리치에게 게라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83쪽)

이렇게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톨스토이는 삶의 중요한 진실 하나를 건져 올린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을 향한 마음 즉 '연민' 하는 마음이다.

'연민'이란 인간을 끝내 병들어 소멸할 존재로 바라보면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가련한 존재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감정이다. 그것은 값싼 동정의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약함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인 것이다.

'연민'은 상대방의 성공이나 '잘남'을 전제로 성립되고 유지되는 관계에서 나오는 마음이 아닌, 인간의 실패와 '약함'을 끌어안고 품는, 한 차원 높은 삶의 방식이다. 이런 삶의 진실을 죽음에 가까이 가서야 깨닫지 말고 살면서 늘 기억해 두어야 한다고 톨스토이는 말하고 있다. 그것이 진실한 삶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모던걸 변동림과 천재 시인 이상의 뜨거운 사랑



1930년대 모던걸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유연애였다. 당시 자유연애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물론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신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던 오래된 풍습에 대한 반발이자,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던걸의 자유연애는 가히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의 찬미〉를 불러 인기 절정에 있던 가수 윤심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음을 비관해 연인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했다. 기생들 중에서도 당시 지식인들과 뜨거운 사랑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기사가 가끔씩 언론에 보도되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동지애적 사랑에 입각한 ‘붉은 연애’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비밀 아지트에서 ‘가짜 부부’ 행세를 하다가 진짜 부부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문학소녀 변동림(卞東琳, 1916~2004)도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과 뜨거운 연애를 한 모던걸이었다. 그녀는 이상(李箱, 1910~1937)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이모였다.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어릴 때 사고로 척추장애인이 되었는데, 경신고보 시절부터 미술반 활동을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YMCA에서 여는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에게 그림을,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구본웅은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각 〈얼굴 습작〉으로 특선한 뒤, 1928년 일본으로 그림 유학을 떠났다.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와 니혼(日本) 대학 미술과에서 기초 수업을 마친 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본과에 입학해 1934년 졸업했다. 그동안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여러 단체전에 참가했다.

구본웅의 친척 후손인 중앙대학교 구광모 교수가 쓴 《우인상(友人像)과 여인상(女人像)》에 따르면, 이상과 구본웅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았고 신명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이 많았지만, 장애인인데다 몸까지 약해서 제대로 진급을 못하고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척추장애가 있는 구본웅을 ‘꼽추’라고 놀리며 따돌렸지만, 이상(당시에는 ‘김해경’이라는 본명 사용)은 존댓말을 쓰며 그를 따랐다. 이런 우정은 구본웅이 일본 미술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되었다.

구본웅은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935년, 이상의 얼굴을 캔버스에 그렸다. 이상이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하기 한 해 전이다. 구본웅이 이 〈친구의 초상〉을 그릴 때 이상은 이미 결핵3기로 접어들어 각혈이 심했다. 그런데도 이상은 계속 담배를 피웠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기생 금홍을 붙잡아두려고 차린 다방 ‘제비’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구본웅은 그런 이상이 식민지 청년의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이 초상화를 그렸고, 그래서 주인공의 얼굴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53cm, 1935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의 1900년 작 〈파이프를 문 남자〉와 1911년 작 〈자화상〉에서 붉은색 입술, 파이프, 담배연기, 배경 등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 고은은 《이상 평전》에서 “꼽추 구본웅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함께 파리 물랭루주의 난쟁이 화가를 방불케 하고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비유되기도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키가 큰 이상과 작은 구본웅이 함께 걸어가면 어린아이들이 쫓아다니며 놀렸고, 나이 든 사람들은 “곡마단패가 들어왔나 보네”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하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구본웅의 친구인 삽화가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 1903~1975)이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삽화가 전한다.

삽화가 이승만이 펜으로 그린 〈이상과 구본웅〉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초상화가 완성되고 얼마 후 이상은 제비다방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물장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카페 ‘츠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했으나 모두 경영에 실패했다. 이상은 큰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을 이렇게 탕진했고, 폐결핵이 점점 깊어 각혈이 심해졌다.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의 손에 자랐다. 계모 변동숙은 구본웅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스물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다. 그녀가 바로 변동림인데,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졌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상의 호적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에게 신혼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라고 돈을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기에 이상 혼자 일본으로 떠났다.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용모가 단정치 못한 조선인은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은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인 1937년 4월 17일,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변동림은 수필 〈월하의 마음〉에서 이상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 근대문학사의 천재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21세에 청상(靑孀)이 된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는 유실되었다. 훗날 변동림은 이상의 죽음에 대해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기상천외한 시 〈오감도〉
이상은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건축학도였다. 졸업 후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로 근무하면서, 훗날 화신백화점과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배웠다.

1933년 각혈이 시작되면서 총독부를 그만둔 그는 황해도 배천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했다. 양부였던 큰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많아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제비에는 이태준 · 박태원 · 김기림 등 당대의 문인들이 드나들었고, 이상은 1934년 그들이 주도하는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감도〉가 바로 이때의 작품이다.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 독자들은 학예면에 실린 ‘오감도(烏瞰圖)―시 제1호’라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삼인(十三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適當)하오.]

제1(第一)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2(第二)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3(第三)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시였다. 어떤 독자는 ‘막다른 골목길’이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을, 무서워하는 아해는 조선 민중을 상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어떤 독자는 이게 무슨 시냐며 혀를 찼다. 다음 날인 7월 27일에는 심산 노수현의 네 칸 만화와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기사 사이에 〈오감도〉 ‘제2호’와 ‘제3호’가 실렸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전날 고개를 끄덕였던 독자는 숨은 뜻을 찾기 위해 신문을 뚫어지게 바라봤고, 혀를 찼던 독자는 신문을 집어던졌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시를 모독하는 말장난”이라는 비난이 이어졌고, 이때부터 연재를 중단하라는 독자들과 30회까지 연재하겠다는 학예부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연재는 결국 8월 8일자에 15회를 싣고 중단되었다. 그만큼이라도 연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학예부장 상허 이태준의 뚝심 덕분이었다.

변동림과 김향안

변동림은 당시 자유연애라는 명목으로 ‘첩살이’를 하던 대부분의 모던걸들과는 달리, 이상의 ‘본처’였다. 그러나 이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7년 후, 자녀가 셋이나 있는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살림을 차렸다. 모던걸에게는 본처살이나 첩살이 같은 명분보다는 ‘불타는 사랑’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변동림이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하자 이복언니 변동숙은, 부인이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아예 인연을 끊겠다며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화가 김환기는 이렇게 이상에 이어 구본웅의 이모부가 되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근원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집 이름을 ‘수향산방(수화 김환기와 향안이 사는 집)’으로 바꿨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1978)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알리는 데 힘썼다.

김용준, 〈수향산방 전경〉, 종이에 수묵담채, 24×32cm, 1944년, 소장처 미상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불교]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인 () 간접적인 원인인 () 아울러 이르는 .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이요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꽃을 키운다고 할 때 씨앗은 인(因)이요 땅이나 물은 연(緣)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인(因)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습니다 봉선화를 심으면 봉선화가 피고 목화를 심으면 목화가 피고 제비꽃을 심으면 제비꽃이 피니까요

그러나 연(緣)은 다릅니다 좋은 땅인가, 나쁜 땅인가 물을 많이 주느냐, 적게 주느냐에 따라서 꽃이 활짝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하며 심지어 아예 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연에 인(因)과 연(緣)이 있듯이 운명에도 운(運)과 명(命)이 있습니다 운(運)은 태어날 때 받는 것이라 어쩔수 없는 것이고 명(命)은 태어날 때부터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라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운(運)이 좋은 사람도 있고 운(運)이 나쁜 사람도 있으나 명(命)이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은 없지요

노력여하에 따라 운(運)이 좋은 사람이 운(運)이 나쁜 사람보다 어려울 수도 있고 운(運)이 나쁜 사람이 운(運)이 좋은 사람보다 쉬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앞 날을 약간 예측 할 수는 있지만 모두 예측 할 수는 없습니다 명(命)을 따라 미래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운명(運命)을 쫒아서는 안 되고 숙명(宿命)을 쫒아야 합니다.

운명(運命)은 가야 할 "길"이요 숙명(宿命)은 가야 할 "곳"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숙명이 있습니다 받은 운(運)과 만들어 가는 명(命)으로 숙명(宿命)에 이르러야 합니다 결코 떠밀리거나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으나 가야할 "길"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길은 많습니다 반드시 곧고 넓고 반듯한 길을 찾으십시오


’22년 봄

수필창작 강의내용

 

8 차   시: 알레고리Allegory와 순수서정

강의 날짜: 2022년 4월 26일 화요일

강의 방식: 비대면(언텍트)으로 강의

강     사: 권 희 돈(청주대 명예교수)

 

# 알레고리Allegory - 표면적인 이야기나 묘사 뒤에 어떤 정신적, 도덕적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비유. 우의 풍유로 불리기도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독재 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은 소설.

 

〓 1교시: 알레고리적 비유의 수필 두 편

 

플루트 연주자/피천득

 

바통을 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찬란한 존재다. 토스카니니 같은 지휘자 밑에서 플루트를 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다 지휘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콘서트 마스터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 있어서는 멤버가 된다는 것만도 참으로 행복된 일이다. 그리고 각자의 맡은 바 기능이 전체 효과에 종합적으로 기여된다는 것은 의의 깊은 일이다. 서로 없어서는 안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내’가 아니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자기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할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음(無音)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구 팀의 외야수(外野手)와 같이 무대 뒤에 서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나는 좋아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스켈소’의 악장 속에 있는 트리오 섹션에도, 둔한 콘트라베이스를 쩔쩔매게 하는 빠른 대목이 있다. 나는 이런 유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스 연주자를 부러워한다. 

 

전원 교향악 제3악장에는 농부의 춤과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서투른 바순이 제때 나오지를 못하고 뒤늦게야 따라나오는 대목이 몇 번 있다. 이 우스운 음절을 연주할 때는 바순 연주자의 기쁨을 나는 안다.       

 

팀파니스트가 되는 것도 좋다. 하이든 교향곡 94번의 서두가 연주되는 동안은 카운터 뒤에 있는 약방 주인같이 서 있다가, 청중이 경악하도록 갑자기 북을 두들기는 순간이 오면 그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자기를 향하여 힘차게 손을 흔드는 지휘자를 쳐다볼 때, 그는 자못 무상(無上)의 환희를 느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공책에 줄치는 작은 자로 교향악단을 지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토스카니니가 아니라도 어떤 존경받는 지휘자 밑에서 무명(無名)의 플루트 연주자가 되고 싶은 때는 가끔 있었다.

 

〓 이해 및 감상의 길잡이 

         
# 알레고리Allegory - 표면적인 이야기나 묘사 뒤에 어떤 정신적, 도덕적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비유. 우의 풍유로 불리기도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독재 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은 소설.

                           

# 주제: 전체의 조화를 위한 구성원의 역할의 중요성

 

# 피천득: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와 아름다움의 느낌과 기쁨을  잘 포착하여 특유의 우아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의 서정의 세계는 간결하고 다정다감하고 섬세하다.

 

# 플루트 연주자: 오케스트라에서 비록 플루트 연주자의 역할이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전체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플루트 연주자는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여 사회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보통의 사람들을 나타내는 비유. 작가가 이 글을 쓴 1960년대나 오늘날과 같은 혼란의 시대에도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는 명수필

 

 

                       도하청장(淘河靑莊)/정민

 

박지원의 '담연정기(澹然亭記)'에 도하(淘河)와 청장(靑莊)이란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둘 다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새다. 먹이를 취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도하는 사다새다. 펠리컨의 종류다. 도(淘)는 일렁인다는 뜻이니, 도하는 진흙과 뻘을 부리로 헤집고, 부평과 마름 같은 물풀을 뒤적이며 쉴 새 없이 물고기를 찾아다닌다. 허둥지둥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종일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늘 굶주린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다. 이 새는 맑고 깨끗한 물가에 날개를 접은 채 붙박이로 서 있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좀체 옮기는 법이 없다. 물고기가 멋모르고 앞을 지나가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날름 잡아먹는다.

 

도하는 죽을 고생을 해도 늘 허기를 면치 못한다. 청장은 한가로우면서도 굶주리는 법이 없다.

연암은 이 두 가지 새에 대해 설명한 후, 이것을 세상에서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에 견주었다.

권력이든 명예든 쟁취의 대상이 되어서는 내 손에 들어오는 법이 없다. 갖고자 애쓸수록 멀어진다. 담백한 태도로 신중함을 지키고,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이 밤낮 악착스레 얻으려 애쓰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들을 저절로 이룬다.

박지원에게 이 설명을 듣고 이덕무는 청장이란 새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자신의 당호를 당장 청장관(靑莊館)으로 고쳤다. 신천옹, 하늘을 믿고 작위하지 않는 청장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없어도 그만이다. 조금이면 만족한다. 그런 마음속에 넉넉함이 절로 깃든다. 아등바등 욕심만 부리면 먹을 것도 못 얻고 제 몸만 더럽힌다.

 

〓 이해 및 감상의 길잡이 

         
# 알레고리Allegory - 표면적인 이야기나 묘사 뒤에 어떤 정신적, 도덕적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비유. 우의 풍유로 불리기도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독재 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은 소설.

                           

# 주제: 세상 사람들이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

 

# 정 민: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 교수, 박지원과 정약용을 합하면 무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이덕무에 대하여 조사해 보세요.

 

# 도하청장: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를 도하와 청장이라는 새의 습성에 비유하여, 해오라기가 먹이를 구하듯 담백함과 신중함의 태도를 지닐 것을 강조함.

 

 

# 도하라는 새와 청장이라는 새에 대하여 찾아 보시오. 

 

〓 2교시: 순수 서정 수필 한 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슈낙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人跡)은 끊어져 거의 일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궁성, 그래서, 벽은 헐어서 흙이 떨어지고, 어느 문설주의 삭은 나무 위에 거의 판독(判讀)하기 어려운 문자를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될 때. 그 곳에 씌었으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너의 소행(所行)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혹은 하나의 허언(虛言), 혹은 하나의 치희(稚戱), 이제는 벌써 그 많은 죄상을 기억 속에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애를 태우신 것이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鐵柵)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憤怒), 그의 괴로움에 찬 포효,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의 미친 듯한 순환(循環),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歌曲).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대의 동무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하여 그가 이제는 우러러볼 만한 사람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이요, 혹은 돈이 많은 공장주의 몸으로서,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操縱)하는 한 시인(詩人)밖에 못되었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그러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고요한 음악. 그것은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에, 모래자갈을 고요히 밟고 지나가는 사람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곡절의 쾌활한 소성(笑聲)은 귀를 간질이는데,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어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의 밤이 되려 하는 즈음에,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떤 예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 찬란하고도 은성(殷盛)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 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십 오 세의 약년으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는 누워 있음."이라 쓴 묘지명을 읽을 때, 아, 그는 어렸을 적의 단짝 동무의 한 사람. 날이면 날마다 언제나 도회의 집과 집의 흥미 없는 등걸만 보고 사는 시꺼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첫길인 어느 촌 주막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거리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살거리는 음성이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 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낄 것이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蒼鷺). 추수 후의 텅 빈 밭과 밭. 

  어렸을 적에 산 일이 있던 조그만 지방에, 많은 세월을 경과한 후에 다시 들렀을 때. 아무도 이제는 당신을 아는 이 없고, 일찍이 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옥사들이 늘어 있으며, 당신의 본가이던 집 속에는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왕자같이 놀랍던 아카시아 수풀은 베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랏빛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은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흘러 다니는 가극단의 여배우들. 줄에서 세 번째 떨어진 광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는 손가락이 때 묻은 서류 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 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白雪) −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 이해 및 감상의 길잡이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누구나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작은 슬픔의 편린들, 삶의 허무감에서 피어오르는 우수를 서정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서정적 언어라 함은 슬픔의 편린들 회상하며 향기와 음향, 감촉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의미이다

                           

#  작품을 쓰기 위한 재료가 다양할수록 그 재료들을 취사선택하여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기가 용이하다. 집을 지을 때 건축재료를 미리 준비해놓아야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을 쓸 때에도 작품에 필요한 재료를 충분히 모아놓아야 작품을 잘 쓸 수 있다. 모든 재료는 지나간 것들이다. 인간은 지나간 것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아름답게 보는 속성을 지녔다. 지나간 것은 모두 우리의 뇌 속에 숨어 있다. 과거에 보거나 들은 모든 사건들은 뇌의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마치 어둔 하늘에서 별이 튀어나오듯이. 그러므로  뇌 속에 숨어 있는 것을 꺼내내어 모아놓는 것이 문학적 글을 쓰고자 하는 이의 일차적인 노력이다.(KHD)

 

 

# 안톤체홉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고 몇 개의 재료들을 동원했는지를 적어보고, 그 재료들을 어떻게 작품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시오.(1교시)

 

# 그런 다음 우리에게 그리운 것들, 우리를 갈라놓은 것들,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들, 죽어도 잊지 못하는 것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하여 수필을 써 보시오.  

 

# 안톤 슈낙과 크누트 함순에 대하여 찾아 보시오.

 

 

〓 2교시: 공적 담론의 수필

 

 간송 전형필, 『훈민정음해례본』을 구하다/이충렬

 

  밤에 빗소리가 들렸는데 아침 하늘은 맑았다. 좋은 징조이려나. 전형필은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상을 물리고, 돈을 준비해 한남서림으로 갔다. 김태준이 한 시에 나타나면 이순황을 오후 기차에 태워 내려가게 할 생각이었다. 여름 날씨가 더워서인가, 기다림에 땀이 나서인가. 전형필은 연신 부채질을 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하루가 여삼추(如三秋)가 아니라, 일각이 여삼추로 흘렀다.

  저만치 말끔히 정장을 하고 안국동 쪽에서 걸어오는 김태준의 모습이 보였다. 전형필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 뛰쳐나가서는 김태준의 손을 붙잡고 한남서림으로 들어왔다. “간송! 일전에 얘기했지만, 안동에서 『훈민정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직접 확인해 봤더니 진본이 틀림없었소. 그러나 앞의 두 장은 연산군 때 언문 탄압을 피하느라 찢어진걸 저와 소유자가 복원을 했소이다. 간송이 구입하시면 좋을 것 같아 알려 드리려고 했소만….”  

  김태준은 이순황이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훈민정음』이라니! 정말 놀랍고 반갑구려. 천태산인이 직접 확인까지 하셨다니 진위는 따져 볼 것도 없고…. 큰 경사요, 경사!”

  전형필은 이제 『훈민정음』이 거의 다 들어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유주가 얼마를 말씀하셨소?”

  전형필이 조심스럽게 묻자, 김태준이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값이 좀 샙니다.”

  김태준이 망설이자 전형필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 원을 달랍니다.”

  김태준은 너무 큰 액수를 말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전형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전형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태산인,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 채라도 부족하오.”

  김태준은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전형필의 표정을 살폈다. 전형필이 눈짓을 하자 이순황이 보자기 두 개를 전형필에게 건넸다. 전형필은 그중 천 원이 담긴 보자기를 김태준에게 밀었다.

  “이건 『훈민정음』 값이 아니라, 천태산인께 드리는 사례요. 제가 성의로 천 원을 준비했소.”

  김태준은 놀란 눈빛으로 전형필을 바라봤다. 사례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려는데, 전형필이 말을 이었다.

  “『훈민정음』 값으로는 만 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그러나 제 입장이 있고 또 남의 이목도 있으니, 『훈민정음』을 인수하는 건 여기 이순황 선생이 맡아 주실 겁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김태준은 만 원이라는 소리에 다시 한번 놀랐다. 전형필의 배포가 남다르고, 부르는 값이 낮아도 정당한 값을 계산해서 치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만 원이라니! 『훈민정음』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그로서는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큰돈이라, 할 말을 잊은 채 한동안 전형필을 바라보았다.

  “간송의 후덕한 인품에 감탄할 뿐이오. 사례비로 천 원은 너무 큰돈이지만,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여의치 못하니 염치 불고하고 받겠소. 그리고 나중에라도 어디서 나왔는지 소문이 나지 않게 해 주시면 고맙겠소. 나도 간송이 구입하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소.”

  “천태산인,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시국이 매우 엄중하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존재는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습니다. 훗날 조선이 해방되면 그때 세상에 내놓겠지만, 그때도 출처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소.”

  “맞아요. 간송의 판단이 정확하오. 지금은 이 책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지만, 해방이 되면 조선의 보물이 될 게요. 그때까지 간송이 잘 간직해 주시오.”

  “고맙소, 천태산인. 그 와중에도 내가 『훈민정음』을 찾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이렇게 연결해 주셨구려.”

  전형필은 김태준의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태준도 전형필의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간송께 정말 고맙소. 내가 다시 일경(日警)에 붙잡히게 되더라도, 이 일은 끝까지 함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번에는 김태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전형필이 어떤 모험을 하고 있는지.

  마침내 전형필 앞에 놓인 『훈민정음』!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해례본이었다. 전형필은 밤이 새도록 『훈민정음』을 읽고 또 읽었다.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발굴된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전형필이 수집을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성취한 대발굴이었기에, 눈물을 흘리다가는 웃었고, 웃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새벽 동이 틀 무렵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갈무리했다.

  전형필은 『훈민정음』을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6·25 전쟁 당시 피란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오랜 기다림과 우여곡절 끝에 발굴되었고,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와중에도 무사히 지켜진 『훈민정음』! 1956년 통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전형필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손수 한 장 한 장 해체해서 사진을 찍게 했다. 이렇게 출판된 『훈민정음』 영인본을 통해 많은 학자가 체계적으로 한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전형필에 의해 발굴되고 지켜지고 세상에 알려진 『훈민정음』은, 1962년 12월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UNESCO)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전형필이 살아 있었다면 춤을 추며 기뻐했을 일이다.      

 

 

 

한글 창제의 원리 동영상

https://youtu.be/yqHFLDgQBcs

 

한남서림: 일제 강점기에 고서·고서화를 취급하는 서점. 인쇄소를 겸했으나 재정난으로 간송 전형필에게 인수되었고 이후 국내 주요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투자를 많이 했던 곳이다.

김태준: 국문학자(1905~1949). 호는 천태산인. 저서로 『조선 한문학사』, 『조선 소설사』 등이 있다.

하루가 여삼추: 하루가 3년과 같다는 뜻으로, 짧은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각: 아주 짧은 시간.    

언문: ‘한글’을 이르던 말

시국: 현재 놓여 있는 나라 안팎의 형편이나 상황.

엄중하다: 보통 있는 일로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다.    

일경: 일본 경찰

성취하다: 목적한 바를 이루다.    

갈무리하다: 물건 따위를 잘 정리하거나 간수하다.

수장하다: 거두어 깊이 간직하다.    

영인본: 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

 

안동본은 일제 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李容準)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이용준이 발견하고 김태준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했다.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을 떠올렸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 원을 찾아와 1천 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앞서 해례본의 앞쪽 두 장이 찢겨나갔다고 언급했는데, 2000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관련되어 있던 인물들이 소유주 몰래 팔아먹기 위해(!) 일부러 찢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박종덕(2006년) - 훈민정음해례본의 유출에 대한 연구 《한국어학》 31호, 김주원(2005년) - 훈민정음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호.)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해례본을 훔쳐갔던 것. 이용준이 해례본과 《매월당집》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 있는 《매월당집》 역시 해례본과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져 있다. 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써 경성 콤그룹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으며,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의 공산주의 행적은 따로 평가하더라도 영원히 묻혀 버릴 뻔했던 해례본을 공개한 공적은 인정해야 한다. 소유주인 광산 김씨 문중에서는 이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으며 후일의 인터뷰에서도 빼앗겨서 억울하다고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종택 서고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거나 6.25 중 없어져 버렸거나 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유권을 주장한 광산 김씨 종택과 그들의 의뢰를 받아 해례본이 광산 김씨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종택에 이것만큼 귀한 책들이 몇권 더 있다고 주장했으나 10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다. 이용준, 김태준이 아니었으면 해례본은 공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 억울하면 광산 김씨 문중이 간송 미술관에 소유권에 기한 소유물 반환소송을 걸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입수경로를 확실히는 말하지 못하는 듯하다.

 

** 간송 전형필, 그 이후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한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들켰다면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은 당연지사였기 때문.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기고,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였다. 지금까지 해례본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간송 선생의 노력 덕이며, 1956년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다고 한다. 내놓은 것뿐만이 아니라 책을 한 장 한 장 해체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원본은 간송 미술관에서 보관되고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날이 적어 직접 보기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어차피 내용은 원본 사진을 찍어서 만든 영인본이 따로 있는데다, 현 시점에서는 전부 공개되어 있어서 한글 연구를 위해서 굳이 원본을 볼 필요성은 없다. 보존을 위해서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이며 아주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실물로 보기가 굉장히 힘들다. 2014년 3월 말부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열리는 간송 문화전에 원본이 전시된 적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고려청자와 함께 다른 전시물과 다르게 손을 유리대고 볼 정도로 가까이 볼 수 없으며 약 1미터 이상 떨어져야 볼 수 있다.

 

 

 

 

 

 

 

 

 

 

 

 

 

 

  간송 전형필                                      천태산인 김태준

 

 

 

<맛있는 책, 일생의 보약> 성석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태어났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감을 때까지 늘 산을 보아야 하는 곳에서 중학교 1학년 까지를 보내고 2학년 봄, 서울의 남쪽 관악산이 올려다보이는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담임 선생님은 미술 선생님이었는데 특별 활동 시간에 산악반을 맡고 있기도 했다. 매주 화요일 6교시, 일주일에 단 한 시간 활동하는 그 '특별'한 '활동'은 내 취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시간 내내 산과
학교 사이를 뛰어 오가는 산악반으로 정해졌다.
 3학년이 되면서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특별 활동을 선택할 기회가 왔다. 나는 산악반 활동의 경험에 비추어 되도록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특별 활동을 점찍었는데 그게 바로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은 특별 활동 시간의 첫날, 도서반이 할 일에 대해 아주 짧고 쉽게 설명해주셨다.
 ''여러분 곁에는 책이 있다. 그 책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고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가면 된다.''
 그리고 선생님은 본인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자리를 잡고 읽은 것으로 시범을 보여 주셨다. 나는 책을 고르러 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서  한자로 제목이 씌여 있어서 아이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책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책은 '한국고전문학전집' 같은 묵직한 제목 아래 편집된 수십권의 총서 가운데 한 권이었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고전 대부분이 그렇듯 책 표지는 사람의 손을 거의 거치지 않아서 깨끗했다. 지은이는 박지원, 내가 처음으로 펴든 대목은 '허생전'이었다.
 나이가 두자리 숫자가 되면서 무협지에 빠지기 시작해서 전학 오기 전 국내에 출간된 대부분의 무협지를 읽었다고 생각했던 내게, 한문 문장을 번역한 예스러운 문체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옆자리나 앞자리의 아이들이 읽고 있는 현대 소설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용 역시 익숙했다. 허생이라는 인물은 깊고 고요한 곳에 숨어 있으면서 실력을 쌓은 뒤에 일단 세상에 나갈 일이 생기자 한바탕 멋지게 세상을 뒤흔들어 놓고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 온다. 무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었다.
 
 '허생전' 다음에는 '호질', '양반전'도 있었다. 책이 꽤 두꺼웠으니 박지원의 저작 가운데 상당 부분 책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 속에 있는 주인공들은 내가 읽었던 수천 권의 무협지 속 주인공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무협지를 읽고 나면 주인공의 이름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없었는데, 박지원의 소설은 주인공이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지고 내가 주인공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했을지 자꾸만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한두 번 씹으면 단맛이 다 빠져 버리는 무협지와는 달리 그 책의 내용은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우러나왔다. 보석처럼 단단하고 품위 있는 문장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정신세계가 무슨 보약을 먹은 듯이 한층 더 넓어지고 수준이 높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도서관에서 단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도.중학교 3학년 1학기 특별 활동 시간에 나는 몇 백 년 전 글을 쓴 사람의 숨결이 글을 다리로 하여 건너와 느껴지는 경험을 처음 해 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척 채미있었다는 것이다. 읽으면 내 피와 살이 되는 고전, 맛있는 고전, 내가 재미를 들인 최초의 고전이 우리 조상이 쓴 것이라는 데서 나오는 뿌듯함까지 맛볼 수 있었다.
 3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특별 활동 시간은 없어졌다. 하지만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하지 않은 특별 활동 시간에 읽은 아주 특별한 그 책이 내 일생을 바꾸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 어떤 책을 계기로 인간의 정신문화, 그 높고 그윽한 세계에 닿고 그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것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행복을 안겨준다.

책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나서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드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길을 보여 준다. 책은 지구 상에서 인간이라는 종만이 알고 있는, 진정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