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책, 일생의 보약> 성석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태어났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감을 때까지 늘 산을 보아야 하는 곳에서 중학교 1학년 까지를 보내고 2학년 봄, 서울의 남쪽 관악산이 올려다보이는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담임 선생님은 미술 선생님이었는데 특별 활동 시간에 산악반을 맡고 있기도 했다. 매주 화요일 6교시, 일주일에 단 한 시간 활동하는 그 '특별'한 '활동'은 내 취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시간 내내 산과
학교 사이를 뛰어 오가는 산악반으로 정해졌다.
 3학년이 되면서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특별 활동을 선택할 기회가 왔다. 나는 산악반 활동의 경험에 비추어 되도록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특별 활동을 점찍었는데 그게 바로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은 특별 활동 시간의 첫날, 도서반이 할 일에 대해 아주 짧고 쉽게 설명해주셨다.
 ''여러분 곁에는 책이 있다. 그 책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고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가면 된다.''
 그리고 선생님은 본인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자리를 잡고 읽은 것으로 시범을 보여 주셨다. 나는 책을 고르러 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서  한자로 제목이 씌여 있어서 아이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책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책은 '한국고전문학전집' 같은 묵직한 제목 아래 편집된 수십권의 총서 가운데 한 권이었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고전 대부분이 그렇듯 책 표지는 사람의 손을 거의 거치지 않아서 깨끗했다. 지은이는 박지원, 내가 처음으로 펴든 대목은 '허생전'이었다.
 나이가 두자리 숫자가 되면서 무협지에 빠지기 시작해서 전학 오기 전 국내에 출간된 대부분의 무협지를 읽었다고 생각했던 내게, 한문 문장을 번역한 예스러운 문체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옆자리나 앞자리의 아이들이 읽고 있는 현대 소설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용 역시 익숙했다. 허생이라는 인물은 깊고 고요한 곳에 숨어 있으면서 실력을 쌓은 뒤에 일단 세상에 나갈 일이 생기자 한바탕 멋지게 세상을 뒤흔들어 놓고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 온다. 무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었다.
 
 '허생전' 다음에는 '호질', '양반전'도 있었다. 책이 꽤 두꺼웠으니 박지원의 저작 가운데 상당 부분 책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 속에 있는 주인공들은 내가 읽었던 수천 권의 무협지 속 주인공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무협지를 읽고 나면 주인공의 이름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없었는데, 박지원의 소설은 주인공이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지고 내가 주인공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했을지 자꾸만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한두 번 씹으면 단맛이 다 빠져 버리는 무협지와는 달리 그 책의 내용은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우러나왔다. 보석처럼 단단하고 품위 있는 문장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정신세계가 무슨 보약을 먹은 듯이 한층 더 넓어지고 수준이 높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도서관에서 단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도.중학교 3학년 1학기 특별 활동 시간에 나는 몇 백 년 전 글을 쓴 사람의 숨결이 글을 다리로 하여 건너와 느껴지는 경험을 처음 해 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척 채미있었다는 것이다. 읽으면 내 피와 살이 되는 고전, 맛있는 고전, 내가 재미를 들인 최초의 고전이 우리 조상이 쓴 것이라는 데서 나오는 뿌듯함까지 맛볼 수 있었다.
 3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특별 활동 시간은 없어졌다. 하지만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하지 않은 특별 활동 시간에 읽은 아주 특별한 그 책이 내 일생을 바꾸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 어떤 책을 계기로 인간의 정신문화, 그 높고 그윽한 세계에 닿고 그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것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행복을 안겨준다.

책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나서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드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길을 보여 준다. 책은 지구 상에서 인간이라는 종만이 알고 있는, 진정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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