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변동림과 천재 시인 이상의 뜨거운 사랑



1930년대 모던걸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유연애였다. 당시 자유연애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물론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신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던 오래된 풍습에 대한 반발이자,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던걸의 자유연애는 가히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의 찬미〉를 불러 인기 절정에 있던 가수 윤심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음을 비관해 연인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했다. 기생들 중에서도 당시 지식인들과 뜨거운 사랑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기사가 가끔씩 언론에 보도되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동지애적 사랑에 입각한 ‘붉은 연애’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비밀 아지트에서 ‘가짜 부부’ 행세를 하다가 진짜 부부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문학소녀 변동림(卞東琳, 1916~2004)도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과 뜨거운 연애를 한 모던걸이었다. 그녀는 이상(李箱, 1910~1937)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이모였다.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어릴 때 사고로 척추장애인이 되었는데, 경신고보 시절부터 미술반 활동을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YMCA에서 여는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에게 그림을,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구본웅은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각 〈얼굴 습작〉으로 특선한 뒤, 1928년 일본으로 그림 유학을 떠났다.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와 니혼(日本) 대학 미술과에서 기초 수업을 마친 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본과에 입학해 1934년 졸업했다. 그동안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여러 단체전에 참가했다.

구본웅의 친척 후손인 중앙대학교 구광모 교수가 쓴 《우인상(友人像)과 여인상(女人像)》에 따르면, 이상과 구본웅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았고 신명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이 많았지만, 장애인인데다 몸까지 약해서 제대로 진급을 못하고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척추장애가 있는 구본웅을 ‘꼽추’라고 놀리며 따돌렸지만, 이상(당시에는 ‘김해경’이라는 본명 사용)은 존댓말을 쓰며 그를 따랐다. 이런 우정은 구본웅이 일본 미술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되었다.

구본웅은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935년, 이상의 얼굴을 캔버스에 그렸다. 이상이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하기 한 해 전이다. 구본웅이 이 〈친구의 초상〉을 그릴 때 이상은 이미 결핵3기로 접어들어 각혈이 심했다. 그런데도 이상은 계속 담배를 피웠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기생 금홍을 붙잡아두려고 차린 다방 ‘제비’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구본웅은 그런 이상이 식민지 청년의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이 초상화를 그렸고, 그래서 주인공의 얼굴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53cm, 1935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의 1900년 작 〈파이프를 문 남자〉와 1911년 작 〈자화상〉에서 붉은색 입술, 파이프, 담배연기, 배경 등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 고은은 《이상 평전》에서 “꼽추 구본웅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함께 파리 물랭루주의 난쟁이 화가를 방불케 하고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비유되기도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키가 큰 이상과 작은 구본웅이 함께 걸어가면 어린아이들이 쫓아다니며 놀렸고, 나이 든 사람들은 “곡마단패가 들어왔나 보네”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하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구본웅의 친구인 삽화가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 1903~1975)이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삽화가 전한다.

삽화가 이승만이 펜으로 그린 〈이상과 구본웅〉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초상화가 완성되고 얼마 후 이상은 제비다방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물장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카페 ‘츠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했으나 모두 경영에 실패했다. 이상은 큰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을 이렇게 탕진했고, 폐결핵이 점점 깊어 각혈이 심해졌다.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의 손에 자랐다. 계모 변동숙은 구본웅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스물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다. 그녀가 바로 변동림인데,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졌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상의 호적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에게 신혼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라고 돈을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기에 이상 혼자 일본으로 떠났다.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용모가 단정치 못한 조선인은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은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인 1937년 4월 17일,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변동림은 수필 〈월하의 마음〉에서 이상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 근대문학사의 천재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21세에 청상(靑孀)이 된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는 유실되었다. 훗날 변동림은 이상의 죽음에 대해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기상천외한 시 〈오감도〉
이상은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건축학도였다. 졸업 후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로 근무하면서, 훗날 화신백화점과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배웠다.

1933년 각혈이 시작되면서 총독부를 그만둔 그는 황해도 배천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했다. 양부였던 큰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많아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제비에는 이태준 · 박태원 · 김기림 등 당대의 문인들이 드나들었고, 이상은 1934년 그들이 주도하는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감도〉가 바로 이때의 작품이다.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 독자들은 학예면에 실린 ‘오감도(烏瞰圖)―시 제1호’라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삼인(十三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適當)하오.]

제1(第一)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2(第二)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3(第三)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시였다. 어떤 독자는 ‘막다른 골목길’이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을, 무서워하는 아해는 조선 민중을 상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어떤 독자는 이게 무슨 시냐며 혀를 찼다. 다음 날인 7월 27일에는 심산 노수현의 네 칸 만화와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기사 사이에 〈오감도〉 ‘제2호’와 ‘제3호’가 실렸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전날 고개를 끄덕였던 독자는 숨은 뜻을 찾기 위해 신문을 뚫어지게 바라봤고, 혀를 찼던 독자는 신문을 집어던졌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시를 모독하는 말장난”이라는 비난이 이어졌고, 이때부터 연재를 중단하라는 독자들과 30회까지 연재하겠다는 학예부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연재는 결국 8월 8일자에 15회를 싣고 중단되었다. 그만큼이라도 연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학예부장 상허 이태준의 뚝심 덕분이었다.

변동림과 김향안

변동림은 당시 자유연애라는 명목으로 ‘첩살이’를 하던 대부분의 모던걸들과는 달리, 이상의 ‘본처’였다. 그러나 이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7년 후, 자녀가 셋이나 있는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살림을 차렸다. 모던걸에게는 본처살이나 첩살이 같은 명분보다는 ‘불타는 사랑’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변동림이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하자 이복언니 변동숙은, 부인이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아예 인연을 끊겠다며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화가 김환기는 이렇게 이상에 이어 구본웅의 이모부가 되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근원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집 이름을 ‘수향산방(수화 김환기와 향안이 사는 집)’으로 바꿨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1978)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알리는 데 힘썼다.

김용준, 〈수향산방 전경〉, 종이에 수묵담채, 24×32cm, 1944년, 소장처 미상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