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 4. 수필의 특성(3)

(6) 수필은 해학성(諧謔性)과 비평정신(批評精神)이 높은 문학(文學)입니다.

수필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힘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이 냉철히 판단하는 비평정신이 있고,
미래를 향해 방향을 제시해 주는 유익한 지표도 담겨 있어야 합니다.
유머, 지혜와 위트, 비판정신을 함께 수용하는 수필이야말로 타 문학이 감히 능가할 수 없는
수필만의 영역이요 또한 본질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요즘 들어 수필에 있어서 '재미'를 많이 강조하는데
이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해학(諧謔)인 것입니다.
시나 소설이 '낯설게 하기'를 통해 독자를 끌어들이듯이 수필에서의 해학과 비평정신은 농축과
상징의 시나 상상력이란 이름으로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불러오는 소설의 맛에서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맛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수필의 문학성에서 품위있는 해학과 비평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문.5]
" 저 돼지 눈웃음을 치는 쌍판 좀 보게. 꼭 쥔(주인) 마누라 소싯적 같으네 그랴".
부실한 치아 때문에 입에 든 머리고기가 부담스러워 공들여 우물거리는 다른 노인과는 달리,
가장 기력이 있어 보이는 충청도 말씨의 노인이다.
말이야 짐짓 좌중에게 동의를 구하는 척 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려온 농지꺼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주모다.
" 앗따, 왜 조용한가 했더니 인제야 시작이구먼? 저 웬수```".
그러나 말과는 달리 주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 저걸 보라니께? 닮아두 쬐금만 닮은 게 아니구 아주 판에다 박았다니께".
다른 노인들의 얼굴에도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돈다.
" 저 돼지가 어떤 돼지인줄 알구 하는 소리유?"
" 어떤 돼진 어떤 돼지여. 홀애비 돼지길래 과부 집에 와서 선웃음 치고 있지 ```.
돼지두 당신처럼 과부라면 사죽을 못쓰는 줄 아는 가베?"
"저게 처녀 돼지라우. 처녀두 보통 처년가? 꼭 가둬 기른 숫처녀지```."
노인들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럴 듯도 하다고 동의하는 노인도 있었다.
- 강호형의 수필 <돼지가 웃은 이야기> 중에서


위의 수필에서 우리는 읽어가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박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 호쾌한 느낌을 주게 하는 해학성은 수필에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해학이 있는 수필은 독자에게 한껏 수필의 맛을 더욱 잘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요즘 수필이 너무 신변잡기적이고 너무 일상적이란 비판을 많이 듣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서 힘을 느끼게 하는 비평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수필에서 비평 정신이 너무 강해 버리면 오히려 수필의 맛을 떨어뜨리지만
적당한 비평이 들어있는 수필은 한결 작품을 생동감 있게 해 줍니다.


[예문.6]
트로이의 목마 앞에서 오딧세이의 장대한 서사시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에페소의 유적지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화려한 열정을 상상하기도 하다가
문득 유럽의 신화와 역사에 젖어있는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화를 읽기 전에 먼저 그리스의 신화를 읽어야 했던 학창시절이 회상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식민지 땅에 드리우고 있는 자조(自嘲)와 패배주의에 매몰된 채
도도한 서풍(西風)의 세례를 받아온 근대사의 유역(流域)을 반성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남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인 문화에 최대한으로 겸손한 자세로 다가갈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가난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곳에서 삶을 꾸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와 노력의 결정(結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교되거나 평가되기 이전에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쉽게 관여하려는 것은 오만과 무지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일구어온 인류의 귀중한 자산을 훼손하는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시원히 떠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 떠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과거를 짐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지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한 오만과 무지가 낳고 있는 안타까움입니다.
특히 세계화라는 도도한 이데올로기가 도처에 그 예봉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만날 때 더욱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지구촌의 시대로 단정하고 서둘러 세계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에 나서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숨막히는 산업사회의 질곡 속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하여 떠나온 관광객들의 경우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화 논리의 전령(傳令)이 되고 있거나 질곡의 외연(外延)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돌아옴(歸)입니다.
정직한 귀향이며 겸손한 만남입니다.
나 자신으로 돌아옴이며 타인 에 대한 겸손한 이해입니다.
이 정직한 귀향과 겸손한 이해가 없는 한 서로 다른 세계가 평화롭고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20세기의 아픈 과거를 떠나 새로운 세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 신영복의 수필 <바다 위의 하늘에서> 중에서


위의 글처럼 충분한 자기 비판과 비평이 있어도 수필로서의 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비판과 비평이 수필에선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비평 곧 자성(自省) 및 자조(自照)로
독자에게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필에서 해학(諧謔)과 비평(批評)은
우리가 오독오독 약간 뼈가 씹히는 고기를 먹는 맛처럼 수필의 맛을 더해 주게 되며,
독자는 이러한 맛을 상당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7) 수필은 완숙을 향해 나아가는 문학(文學)입니다.


수필은 무르익은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문학의 그릇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도달한 삶(인생)의 경지에 따라 수필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수필은 글이 곧 자신(삶과 인생)이므로 작가와 작품은 하나이며,
또 내용은 작가의 삶이요 체험으로 일체이며 동일시됩니다.

그렇기에 수필가의 품격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작가인 수필가가 품고있는 사상이나 그만의 인품 그리고 그가 지닌 유머와 위트가
수필에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만의 다양한 체험과 전문적인 지식, 인간애 등이 바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수필가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수필을 쓰고자 하면
먼저 이러한 품격을 갖추기 위해 부단한 인격의 도야와 훌륭한 인생연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수필을 만났다는 것은 곧 좋은 인간을 만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수필의 경지는 바로 인생의 경지를 뜻하게 되며,
인생의 성숙도 내지 완숙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문학이 수필입니다.
그러나 수필이 완성의 문학은 아닙니다.
인간이 완전해 질 수는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성숙하고 완숙되도록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그 나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기에
수필은 깨달으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구도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참고 글>에서 몽테뉴가
'나를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긴장도 기교도 없는 담백한 모습으로 보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고
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문학이 수필인 것입니다.


'리취'는 <문학형태의 연구>라는 그의 저서에서 에세이의 특질로 세가지를 들어 정의 했습니다.

(1) 작자가 강력하게 작품속에 들어가는 것,
(2) 산문으로 씌어지는 것,
(3) 반드시 예술적인 것 인데
이 중에서도 반드시 예술로서의 형태를 갖추어 독자의 상상력과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이것만이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기 위한 여지의 짧은 산문 저작물과 에세이를 구별하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뿐아니라 수필가는 시대적인 정서를 잘 파악하여
그 시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의 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귀로도 보아야 하고,
눈으로도 들어야 하며,
가슴으로, 마음으로 듣고 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늘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철학과 인생관과 비전과 사랑과 희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은
좋은 수필을 쓰는 전제 조건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바라보되 따스한 가슴을 열고 정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아가같은 맑은 눈으로 사실을 사실로, 진실을 진실로 바라보는 것은
수필가의 눈과 마음이 시인과 소설가와 비평가의 눈과 마음을
함께 가져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사랑의 쉼터 4050
글쓴이 : 정소향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