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한라산이 보고 싶어져, 배낭을 짊어지고 훌쩍

영실(靈室)로 떠났다. 제주 특산 식물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그곳에 가서 그놈들과 조우하기 위해서….

지난 태풍은 특히 한라산 서부지역을 강타해서

나무들과 바위틈 식물들의 잎에 생채기를 남겨   

금년의 단풍은 그렇게 기대할 수 없겠다.


작년에 보았던 진범을 못 잡은 대신, 골짜기에

꼭꼭 숨어 바람을 피했던 이 한라돌쩌귀를 만났고,

환히 피어난 한라구절초와 마구 뜯겨 뒤늦게 꽃을

피운 제주황기, 바위 아래 몸을 숨긴 제주달구지풀,

꼭 한 포기 꽃을 피운 섬잔대를 만날 수 있었다.


 

한라돌쩌귀는 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45~10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세 갈래로

갈라진다. 9월에 자주색 꽃이 총상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골돌과를 맺으며, 한라산에 분포한다.

본토의 투구꽃과 비슷한데, 모양이 조금 다르다.



 

♧ 돌쩌귀 사랑 - 정일근


울고 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을 내고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이 되고 나는 문짝의 수짝이 되어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 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 같은 사랑 한 번 해 보자



 

♧ 한라산 백록담 - 김윤자


먼발치에서 당신을 보고 간 한 여인이

다시 그리움 안고 와

하루의 역사를 온전히 쌓고 갑니다.

영실코스 가파른 절벽길을 숨이 멎도록 걸어오르며

오백나한의 기암 속에 망자로 선다해도

나는 진정 행복하여서

당신 그 넓은 품에 뒹굴어도 보고

병풍바위 지나, 구상나무 숲길 지나

선작지왓 고산의 너른 평원을 가로지르며

오월의 꽃불로 일어서는 철쭉꽃 축제의 물결에

지친 육신이 일어서고

노루샘 약수로, 혼미한 영혼이 일어서고

윗세오름봉에 거룩한 당신이 보일 때

발보다 눈이 앞서 달려가

당신을 사랑한 낮달이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하늘에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걸고 왔습니다.

어리목코스 하산 길에서

당신의 따슨 숨결로 키운 노루도 만나고

제주 바다 위, 순결한 해무와

무한한 자유로 용솟음치는 운해의 설경도 만나고

해가 지기 전 어서 가라고

숨 가쁜 음계로 깔아놓은 나무 계단을

잘박잘박 걸어 내려오며

당신만큼 용감해지리라 다짐하였습니다. 



 

♧ 그 여름의 선물 - 임영준


청춘의 한 자락

한라의 가슴 영실에

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얼음 같은 계곡물에 몸을 담근 채

수많은 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인생 별거 아니라 했다

사랑, 반짝하는 별똥별이라 했다

그리고 카르페디엠

두고두고 내리받은 선물이 되었다

나를 밝히는 빛이 되었다

그 여름 한라에 쏟아진 별들은

아직도 나를 벌렁벌렁 들뜨게 하며

유혹의 암시를 보내고 있다


 

♧ 한라산 까마귀 - 한도훈


뻐꾹채 엉겅퀴 도채비운장이

백록담 멧부리로 나란히 줄 서고

산그림자 사이로 얼굴 빼꼼 내밀다

빙애기 채가듯 똥소리기 발톱에 채인

생채기 난 햇살이라

한라산 까마귀떼

갈보름에 휘날리는 검은 날개로

머리 풀어헤친 여인상이 뚜렷한

한라산 꼭대기며

신선(神仙)의 집, 영실기암을 휘저으면

멀리 서귀포 바당으로부터

안개꽃은 시샘으로 피어올라

윗세오름 노리샘 언저리

주목나무숲 너덜바위에

한무데기 한숨 따위 부려놓으라


 

한라산 까마귀 서늘한 이망생이에

와들락와들락 삼족오(三足烏)가 새겨지면

숨비소리 비바리 사랑으로

천년의 이끼

만년의 이끼 청동거울을 닦으라

벌거벗은 태양을 인두로 지져

가슴 떨리게 하면

비룽비룽 흐르는 용천수는

불로불사야약(不老不死藥)으로

호루종일 쏟아지는 정방폭포가 되고

흰사슴 징검징검 백록담을 걸을 때

갈래죽으로 움푹 떠

설문대할망 스란치마 속에 쏟아붓고

똥소레기 부리로 콕콕 쪼아 만든

성산일출봉이며 산방산을 불러 모아

해마다 봄이면

호꼼 진달래꽃 영쿨로 춤추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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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채비운장 : 산수국에 대한 제주도 방언

★ 빙애기 : 병아리에 대한 제주도 방언

★ 똥소리기 : 솔개의 제주도 방언

★ 갈보름 : 서풍에 대한 제주도 방언

★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방언

★ 노리 : 노루에 대한 제주도 방언

★ 이망생이 : 이마에 대한 제주도 방언

★ 와들락와들락 : 와당탕와당탕의 제주도 방언

★ 숨비소리 : 해녀들이 잠수를 끝내고 나와서 내지르는 숨소리.

★ 비바리 : 처녀의 제주도 방언

★ 비룽비룽 : 구멍이 송송이라는 제주도 방언

★ 호루 : 하루의 제주도 방언

★ 갈래죽 : 흙을 파는 삽에 대한 제주도 방언

★ 설문대할망 : 한라산을 만든 할머니

★ 똥소레기 : 독수리의 제주도 방언

★ 호꼼 : 조금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

★ 영쿨 : 넝쿨의 제주도 방언

 

 

♧ 저항령 투구꽃 - 장승진

 

저항령 통해 황철봉 가는 길

우툴두툴 돌들 참 많네

계곡물에 잠긴 길을

돌에게 묻고 나무에게 물어

마침내 올라 앉은 봉우리

노오란 돌채송화 작은 꽃송이

절정의 바람은 흔들리네

엉겨붙은 바위들의 고요한 주검

검버섯 돋아나듯 세월만 살아

쉽사리 구원을 말하지 않네


하산 길에 몇 번이나 넘어지며 보았네

칠부능선 그늘 속

투구꽃들 모여 앉아

그 절정의 침묵을 지키는 걸

잠시도 투구를 벗지 않는 걸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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