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어 선생 노릇을 35년간 하면서 초창기에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란 수필을, 뒤에 가서는 ‘인연’이란 수필을 가르치면서 수필의 참맛을 들였다. 적어도 5개 반 이상의 학급을 담당하면서 같은 단원을 여러 번 답습하면 싫증날 법도 하지만 비유가 많은 ‘수필’이란 수필은 씹을수록 맛있는 고기처럼 즐길 수 있었고, 구성이 돋보이는 ‘인연’ 역시 감수성이 예민한 고3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피천득 선생의 문학세계는 시보다 오히려 수필을 통해 진수가 드러나는데, 일상의 정감을 섬세한 필체로 그려 산문화된 서정시처럼 곱고 아름답다. 그의 대표작인 ‘인연’을 비롯하여 ‘수필’, ‘은전 한 닢’ 등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루 사랑을 받고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그제 오후 한라수목원에 갔다가 붉게 피어있는 제주도의 상징인 참꽃을 찍었는데, 피천득 선생의 수필 ‘봄’과 ‘오월’과 함께 싣는다.



 

♧ 봄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天痴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이러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렇게 읊은 시인도 있다. 이들은 사치스런 사람들이다. 나 같은 범속한 사람들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띠우고 하늘을 바라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어는 것 같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 발자취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젊음을 다시 가져 보게 하는 것은 봄이다.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난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헤어진 애인이 여자라면 뚱뚱해졌거나, 말라 바스라졌거나 둘 중이요, 남자라면 낡은 털 재킷이 축 늘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빛이 혼탁해졌을 것이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지나간 날의 애인에게서 환멸을 느껴도, 누구나 잃어버린 젊음에게서는 안타까운 미련을 가진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이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 못하다.


 인생은 40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40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퍼센트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40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40년이라면 인생을 짧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면 그리 짧은 편도 아니다.


 

 '나비 앞장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나비는 작년에 왔던 나비는 아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지만 그 제비는 몇 놈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키츠가 들은 나이팅게일은 4천 년 전 루스가 이역 강냉이 밭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듣던 새는 아니다. 그가 젊었기 때문에 불사조라는 화려한 말을 써 본 것이다. 나비와 나이팅게일의 생명보다는 인생은 몇 갑절 길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이 아니다. 더구나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것이다.


 녹 슬은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황궁에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 오는 봄!  



 

♧ 5월 - 피천득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5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5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5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5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 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5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6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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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생활인의 철학과 사색이 담긴 수필을 많이 쓰신 이양하(李敭河) 선생의 수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1980년대까지 ‘신록예찬’과 ‘페이터의 산문’, 그 이후에는 ‘나무’가 실려 학생들에게 나무와 우리 인간의 비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자연과 어울려 사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수필가이자 시인, 영문학자(1904~1963)로 활동하며 ‘영한사전’, ‘한미 대사전’을 편찬하였다. ‘이양하 수필집’과 시집 ‘마음과 풍경’이 있다.


 병꽃나무는 쌍떡잎식물 꼭두서니목 인동과의 낙엽관목 병꽃나무는 5∼6월에 피고 9월에 열매가 익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옆 일본과 중국에서도 분포한다고 써 있다. 개발을 했는지 화관이 처음부터 끝까지 백색인 흰병꽃, 꽃받침 열편의 길이가 5.0∼6.5㎜인 좀병꽃, 처음에는 꽃이 백색이고 통부만 적색이던 것이 전체가 적색으로 되는 색병꽃, 화관이 백록색이고 통부 겉에 붉은빛이 돌며 안쪽 순판을 따라 누른빛이 도는 것을 삼색병꽃이라 한다.



 

♠ 나무 - 이양하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滿足)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處地)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 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義理)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쟁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厚待)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薄待)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多幸)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不幸)해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同情)하고 공감(共感)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一生)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禱)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嚴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理由)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 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自己) 소용(所用)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怨望)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리어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材木)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孤獨)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 불교(佛敎)의 소위(所謂) 윤회설(輪回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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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기아난  

 

♧ 거룩한 본능 - 김규련

 

 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둁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 들이기도 한다. 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첩첩 산중의 마을이다.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老松)의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럽다. 붉은 주둥이와 긴 목, 새하얀 털로 덮인 날개 밑으로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 마을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황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은 그 황새가 길조(吉鳥)라고 믿고,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년엔 찻길이 뚫리겠지, 올해는 꼭 전기가 들어오겠지 하고.....


 

 그런데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군이 그 황새를 보고 총(銃)을 쏜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 모였다. 밀렵꾼은 도망을 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 며칠 뒤였다. 밤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紙窓)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혔다. 그런데 조금은 귀에 익은 황새의 울음소리. 탁탁탁 타르르 탁탁. 사랑방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도리는 듯한 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말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 밤, 밤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앗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지 않은가. 총 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인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의 짝한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려고 저마다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어 부서지도록 울어댔다. 탁탁탁 타르르 탁탁 그날 밤엔 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질 않았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奇異)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靈物)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鳥類)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愛情)이 별스러운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本能)이라 했다. 그러나 하찮은 그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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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멀구슬나무 꽃

 

 ♧ 무소유(無所有) - 법정(法頂)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地上)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요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 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초를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事例)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無所有史)로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物量)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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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에 오는 추위라는 크리스마스이브에

KBS에서 방송된 ‘80일간의 약속, 나누면

천사가 됩니다’에서 고생하는 가수들과

아나운서를 보면서 정말 이웃 사랑의 힘이

크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오후 7시10분부터 75분 동안 경복궁에서 열린

생방송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진과 학생들이

펼친 공연 중 특히 스타킹만 신은 어린이들은

그나마 율동으로 추위를 이기는 것 같았다.


매번 성탄절과 연말연시에 보는 일들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런대로 이 험한

세상이 돌아가는구나 싶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괴감에 몸이 자꾸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 크리스마스의 기도 - 임영준


하루하루 소박한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은총보다는

안온한 내일을 열어주소서


아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바라는 선물을 베풀어

평생을 행복한 산타클로스의

기억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홀로 지새는 청춘들에게

어울리는 사랑이 찾아들어

오색 빛 열정으로 찬란한

성탄의 밤이 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건대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핍박받는 이들에게

한줄기 빛살이라도 내려

구원을 실현하여 주소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소서

 

 

 

 

♧ 크리스마스 캐럴 - 오양심


가시밭길이다

동서남쪽이 사라지고 북쪽만 보인다, 홀로 된 별

하나가 나보다 먼저 화석이 된 눈동자로 땅을 내

려다 본다, 세상을 떼어 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가 없다


바람은 허허로운 등짝을 때리고, 기세 꺾인 별빛도

그림자처럼 희미하다, 빛바랜 꽃잎의 수를 세다가

잠을 자고 싶다, 밤이 낮이 되고, 밤낮이 환해져서

어스름달밤이 되어도 좋다는 걸 이제 알았다, 캄캄

한 잠을 자고 싶다


대낮에도, 해저녁에도, 한 밤중에도, 새벽에도, 지상

에서 모든 것들이 들림을 당하는 날에도, 속박에서

벗어나는 개벽의 날에도, 마침내 이 땅이 적색에서

백색으로 거성이 되는 날에도, 내가 잠만 자다가 환

장을 한 날에도, 종지부를 찍는 날에도, 캄캄한 것들

이 아는 체를 하는 날에도


눈물을 부추기는 비바람 속에서 내가 막막하다가, 제

정신이 번쩍 든다, 하늘에서 밧줄 하나 내 몸속에

들어온다, 지상으로 나 있는 가시밭길을 지나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 크리스마스 선물 - (宵火)고은영 


막 감동의 하이얀 장미 한 무더기가

수줍은 가슴에 미소로 안기더라


겨울의 벌판

서러운 내 형편에

그것은 따뜻한 빛으로 다가온 황홀경


떨리는 촉수들이

동짓달 위에 일제히 일어서고

싱싱한 것들로부터 전이되는 행복

갑자기 뭉툭한 어떤 것의 전율

목이 멘다


아, 사랑은 이렇게 따뜻한 것이구나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을

화인 하나

가슴 아리게 와 박힌다



 

♧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위한 사랑의 기도 - 이채

 

성탄의 종소리

온 누리의 축복으로 울려 퍼질 때

미움과 미움은

용서의 강물로 흐르게 하시고

마음과 마음은

기쁨의 합창으로 메아리치게 하소서


하늘의 은총

지상의 눈꽃으로 피어날 때

욕심과 불만은

눈처럼 하얗게, 가볍게 하시고

행복과 행복이

감사의 꽃으로 찬란하게 하소서


평화의 메세지

온누리의 숭고한 빛으로 은혜로울 때

스스로 비우고 낮아지는

겸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비로소 화합으로 하나 되는 세상

사랑과 사랑으로 가슴 벅찬 희망이게 하소서



 

♧ 크리스마스에 드리는 기도 - 김의중


올 크리스마스엔

창가에 촛불하나 켜 놓으렵니다.

타는 촛불로, 밤새워

시간의 의미를 헤아려보며

메마른 가슴 외로운 눈물로 적시어

작은 소망의 기도를 드리렵니다.


용서하소서!

내가 가졌던 탐욕을....

남에 대해 편협하며, 이기적이며

마땅히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태만함까지....

다른 무엇보다 진실하지 못했음을....


마음을 열고

새로운 눈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녹색의 작은 별

우리가 사는 아름다운세계

이 땅에 사는 누구나

맑은 영혼과 따뜻한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기아와 질병과 전쟁이 없는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

크리스마스에 오신 이의 마음처럼

녹아 내리는 이 촛불이

소망의 빛이 되어

우리 가슴을 채우게 하소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메모 :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현대문학』, 2008년 4월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도종환 시인의 ‘나의 삶 나의 시’를 매주 연재합니다. 도종환 시인이 써 온 시들 가운데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들을 골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 놓을 예정입니다. 시인의 오랜 지기인 판화가 이철수씨가 채색 그림으로 시인의 연재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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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마음] 모든 확전 논리는 슬프고 끔찍하다
한겨레
»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생때같은 희생자나 연평도 주민들의 아득한 삶보다 앞서는 내용들은 고장난 자주포, 국방장관 경질, 대통령의 확전 자제 발언 논란, 정치적 이해관계 따위이다. 무자비한 보복이나 화끈한 선제공격 주장에 이르면 온몸이 저리다.

 

확전을 주장하는 논의들은 모두 헛되고 참담하다. 그 안에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어디에도 없다. 전시의 군 지휘 벙커처럼 되로 주고 말로 갚는다는 ‘비례성의 원칙’만 홀로 도드라진다. 확전을 우려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봉건시대 서자처럼 주눅들고 홀대받는다. 무자비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들이 눈 부라리며 하는 말의 요지는 ‘누가 몰라서 그러느냐. 지금은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이다. 내가 보기엔 모르는 것 같다. 확전 때 얼마나 많은 인간의 생명이 헛되이 스러져 가는지를.

 

1994년 북핵 위기 때 한반도는 구체적으로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갔다. 당시 미국의 전쟁 시뮬레이션 자료에 따르면 개전 일주일 안에 군병력 100만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사상자 수는 500만명이었다. 훗날 역사책에 두번째 한국전쟁의 해로 기록되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니 실제로 그런 정도의 천문학적인 인명손실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생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수백만명의 무고한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그 전쟁이 지키려고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국가의 품격이나 자존심, 단호한 응징, 힘의 우위 과시를 위해 무수한 목숨을 제물로 삼아도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끔찍하고 어리석은가.

 

급작스런 사고나 돌연사와 관련된 대개의 죽음은 무고하고 비통하다. 그런 죽음은 망자와 관련 있는 최소 5명 이상의 그림자 죽음을 동반한다. 자식이, 연인이, 부모가, 친구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는 순간, 그들과 깊은 관계에 있던 남아 있는 이들의 삶도 온전하지 못하게 된다. 죽지 않았으되 죽음 같은 고통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모든 죽음은 무고하고 비통하다. 그러므로 전쟁에서의 모든 죽음 뒤에는 반드시 그림자 죽음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민간인 100만명을 포함해 적어도 20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실종됐다. 그림자 죽음까지 합하면 1000만 가까운 숫자다.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핏빛 후유증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적어도 100년 정도 걸려야 치유가 가능한 한국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국가안보의 최종 목적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다음이다.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하고 있는 한 정치분석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 중 하나로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 된다’는 대북관을 꼽는다. 북한이라는 호전적 적대세력과 대치한 상황에서 국가지도자로서 적절한 발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략 전술적 차원에서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과 관련해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둔 국가지도자로서 김대중의 철학을 나는 존경하고 지지한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연평도에 남아 있는 반려동물들의 생사를 걱정하는 일부 젊은이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철부지로 매도당한다. 한가하다는 것이다. 티베트 승려는 봄철 수행기간에 바깥출입이 완전 통제된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라서 밖에 나섰다가 무심코 발로 밟아 생명체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제3자의 처지에서는 종교적 과민반응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윽박지르거나 무시하는 집단들의 선택이, 언제나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한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심도 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유통되는 모든 확전 논리는 슬프고 두렵고 끔찍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트위터 @mindjj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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