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집 형님 /반숙자|

방아 찧으러 시골 다녀온 그이 손에 올망졸망 보따리가 많았습니다.
마루에 꺼내 놓고 보니 영락없는 시골 채소전입니다.
형님.
형님께서 바쁘신 추수일손 짬을 내어 봉지마다 정을 채워 넣으신 것을 알고는 왜 이렇게 마음이 훈훈해 오는지요.
까만 비닐 백에는 싱싱한 홍고추가 들어 있구요. 감자도 한 봉지, 호박순도 형님의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꼬옥 접혀 나왔습니다. 비료부대에 길다랗게 싸 넣으신 게 무언가 했더니 텃밭에다 기르시는 대파다발이었습니다. 파뿌리에 고물처럼 묻어 있는 흙내음을 맡으며 어쩐지 그 구수한 내음이 코에 익은 형님의 내음임을 기억합니다.
당신 곁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저는 참말이지 당신 앞에 철부지 사촌동서 그뿐인데 형님은 한결같이 이렇게 묵묵히 우애를 나누어 주시니 감읍하옵니다.
형님, 올해도 형님 댁 문전에는 등꽃이 아름답게 피었었나요.
슬하에 8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이제 시숙님과 내외분만 큰 집을 지키며 농사짓는 알뜰하시고 부지런하신 형님.
언젠가 5월이었습니다.
과수원 적과할 일꾼을 얻으러 나섰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마을로부터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에 전신이 나긋나긋 녹아나는 듯했습니다. 그 향내는 차츰차츰 짙어지더니 어느덧 발걸음이 형님 댁 바깥마당에 멈춰 있었어요.
그 넓은 기와지붕이 온통 초록빛 우산을 받쳐들고 연연한 보라빛 등꽃은 송이마다 환하게 연등(燃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님 내외분은 대문만 지쳐둔 채 들로 나가시고 중풍을 앓던 강아지가 뒷다리를 덜덜 떨며 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개 이야기가 생각나니 형님, 웃음이 절로 납니다.
식구도 없고 적적하시다며 잡곡 한 말 내다주고 사오신 강아지였지요. 제 또래의 고양이 한 마리와 한 그릇 밥을 먹으며 토실하게 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중풍이 일어 반신불수가 되었다구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내다버리라고 성화였지만 형님은 괘념치 않으시고 정성껏 돌보시더니 거의 1년 만에 건강을 회복했지요. 그때 내다버리라고 한 사람 중에 저도 한 몫 끼어 있었는데 미물의 생명까지 소중해 하시는 그 어지심이 보배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형님, 저는 뜰로 들어섰습니다. 하도 우스꽝스럽게 기어나오는 강아지를 보고 혼자 웃다가 꼬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 못할 짓을 한 듯 심히 부끄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숲을 이룬 등나무를 올려다 보았지요. 사랑방문 앞까지 치렁치렁 늘어선 등꽃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대문기둥을 의지해 서로 부둥켜 안고 새끼꼬듯 올라간 줄기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국어 사전에서 등나무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등(藤)나무 : 콩과에 딸린 전요성나무, 동양 특산이며 흔히 관상용으로 심음.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의문은 전요성이란 뜻이었습니다. 다시 사전을 폈지요.
전요성 : 스스로 바르게 서지 못하고 다른 물건에 감겨서 뻗어 올라가는 덩굴진 줄기.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형님.
부부는 모두 전요성나무처럼 서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애정으로 감겨 세월 속에 많은 꽃송이를 피우는 것을. 더구나 형님께서는 종가집 종부로서 봉제사 받들며 손아래 시동생들을 사촌까지 합하여 다섯 분을 거두셨고 온 집안 대소사에 여름철 등나무 그늘 같은 후덕함으로 한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신식살림 한답시고 가마솥을 없애버린 저를 위해 해마다 손수 큰 가마솥에 메주까지 쑤어 주시는 친정 어머님같은 당신이셨습니다.
형님, 이제는 서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시골서 40 평생을 살아온 제가 뒤늦게 서울살이를 하고 흠칫흠칫 놀라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은 저울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시장에도 상점에도 또한 가정에도 저울이 있습니다.
홍고추 몇 개도 저울에 올라가고 콩나물, 마늘 몇 톨까지 모두 저울에 올라 갑니다. 그리고 진짜냐 가짜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형님,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도 저울에 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물과 권력, 능력까지 철두철미 유용성에 의해 저울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파트의 평수가 곧 행복의 평수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도 많다고 합니다.
정작 제 무게로 달려야 할 사람의 목숨은 중량을 잃어가고 잡동사니가 판을 치는 현실이 근대화된 삶이라면 그냥 밭갈고 씨뿌리며 사는 일이 훨씬 사람답다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저도 저울을 좋아합니다. 항상 감정의 기복으로 평형을 잃고 사는 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준엄함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바람입니다. 저울처럼 제자리에, 영의 상태로 비울 수 있다면, 그렇게 반듯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푸성귀 한 다발, 쑥버무리 대접도 푸짐스럽던 형님의 그 넉넉함이 사무치게 그리워오는 요즘입니다.
두엄냄새까지 덤으로 따라온 형님의 선물을 받고 제가 이렇게 소생하는 것은 실은 저울에 달지 않은 그 마음 때문이란 걸 알아주세요.
형님, 오늘 저녁 식탁에는 손수 넣어주신 담북장을 올렸습니다. 예쁘게 빚어 파는 이곳 담북장보다 냄새며 담백함이 일품이군요. 조미료를 많이 넣어 입맛을 돋구는 식단보다는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형님의 솜씨가 진국입니다. 우리들의 사는 일도 그런 것 아닐까요.
형님, 도시의 밤이 깊어갑니다. 지금쯤 뒷동산 산제당 골짜기에 밤새가 울다 잠들겠지요. 고마우신 형님, 수확의 계절 아주버님과 함께 좋은 가을 맞이하소서

두레박 


金巢雲



12월 28일―, 피란 열차가 영등포를 떠나 사흘째 되는 날 첫 새벽에 경북 왜관역에 닿았다. 이미 그 전날 내 옆에 앉았던 어느 어머니의 품에서 난 지 백일 남짓한 어린아기 하나가 얼어죽었다.
왜관에 닿은 기차는 두 시간이 가고 세 시간이 지나도 떠날 생각을 않는다.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서 솥과 남비에다 쌀을 담아 밥들을 짓는다. 먹어야 산다는 이 절실한 상식이 에누리없이 전개되는 장면이다. 해가 지도록까지 진종일을 기차가 거기 머무는 동안에 밥을 지은 솥과 남비의 수효는 아마 5,6백으로 못다 헤었을 것이다. 역전에 우물 하나가 있었다. 별로 크지 않으나 깊이는 서너길 남짓― 워낙 많은 사람들이 길어 내는 통에 그래도 처음에는 맑던 물이 나중엔 시뻘건 황토물이 되었다. 그 시뻘건 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그런 피란 스케치가 아니다. 그날 이후 우물가에서 내가 본 슬픈 광경 하나가 염두를 떠나지 않는다.

처음 물을 길을 때 역 부근 민가에서 두레박을 빌려서 썼다. 얼마 안 되어서 서로 먼저 쓰겠다고 다투던 끝에 어느 사나이 손에 쥐어졌던 두레박줄이 미끄러져서 물 속에 떨어졌다.
그 사내는 "줄이 있어야 건지겠는데―" 하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더니 차가 움직일 때까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까짓 책임 추궁보다는 사람마다 물쓰기가 바쁜지라 두레박을 제 손으로 만들어 쓰게 되었다.

바케쯔에 줄을 단 것, 깡통에 구멍을 뚫어서 급조(急造)한 것, 남비 손잡이에다 끈을 맨 것, 별의별 두레박이 다 나왔다. 피란 가는 이들의 짐 속에서 웬 끈들은 그렇게 나오는 것인지, 승마줄, 보자기를 싸매었던 헝겊끈, 가다가는 어디서 생긴 것인지 전등에 쓰는 코우드며 철사들이 두레박 끈으로 등장했다.

한 가지 특색은, 제가 만든 두레박은 절대로 남에게 빌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레박 없는 이들이 열 번 스무 번 애걸복걸해도 물 한 바가지를 얻어 볼 수 없다. 할 수 없이 단념하거나, 제 손으로 두레박을 새로 만들거나―,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두레박도 역시 그 한 사람이 쓰고는 가져가 버린다.


나는 넋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어이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레박 하나만 있으면 만 사람이 쓰고도 남을 것이다. 떨어뜨릴 염려가 있다면 우물가에 있는 기둥에다 끈을 매어 두면 될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두레박 하나를 그 기둥에 매어 두고 "자 마음대로 쓰시오. 기차가 떠날 때면 내가 가져갑니다"고 한다면 이렇게 고생스럽게 수백 개의 두레박이 필요치 않을 것이요, 쓰는 이마다 속마음으로 '고마와라… 어느 분의 정성인고.' 하고 서로 감사하고 치사할 것이 아닌가. 비록 피란해 가는 암담한 고난 속에서라도 이 하루를 즐거운 피크닉처럼 지낼 수도 있으련마는―, 그러나 기적은 마침내 나타나지 않았고, 해가 저물도록 시뻘건 황토물을 저마다 제 두레박으로 길어 가는 슬픈 광경만이 질서 정연(?)하게 계속되었을 뿐이다.

뚜껑없는 화물차에 실려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 대개는 남의 신세를 입어야만 할 의지없는 피란민들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사정과 정곡이 비슷비슷하니 평소에 없던 인정도 이럴 때는 더한층 돈독해지는 것이 이를테면 상식이다.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절벽 같은 심정들―, 원수끼리 길을 가도 5,6일을 두고 동고 동락한다면 정이 통하련마는, 이 족속들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종들일까?… 그날 그 우물가에서 느낀 내 절망과 비애를 나는 일생이 다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부산서, 대구서, 피란 온 이들의 불평과 호소를 수없이 듣는다. 사실 인심도 야박하려니와 그러면 그 인심을 나무라는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앉았는지, 이런 소리를 응당 꺼려하는 이가 있으리라마는 그러나 수지오지 자웅(誰知烏之雌雄)이리오, 영남 사람이 서울로, 평양으로 피난을 갔다는 경우를 생각해 보아, 거기서는 이보다 더 나았으리라는 단정을 감히 나는 내리지 못한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의 합평

" 글 쓴 당사자는 왜 보고만 있었는가?"

" 왜 두레박 하나를 만들어 기둥에 매어두지는 못했던가?"

 

*김소운 선생의 부기

" 실은 민가에서 두레박을 빌려온 것은 이 작자의 동행이었고 피란민들이 빠뜨린 두레박을 간신히 건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그것을 도로 우물가에 매어 둘 권리는 없었다." 

 

 

 

꽃신이라고 말하면 전승문화 기능보유자 갖바치가 만드는 비단 가죽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꽃신은 글자 그대로 꽃을 심는 신일 따름이다.

어머니는 여든을 사셨지만 아무도 임종을 못 했다. 혼자 가셨다는 점이 여지껏 마음에 걸린다. 사십구일재를 마치고 형제들은 어머니 손길이 남아 있는 물건을 하나씩 골라가지고 헤어졌다. 물러서 있다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어머니의 옥색 고무신 한 켤레를 나는 집어 들었다. 산 지 얼마 안 되는 새 신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신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끔히 닦아 놓기도 했으나 점점 눈길이 멀어져갔다. 하여간 십여 년을 그냥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3주기, 5주기, 10주기가 지나고서는 기일조차 제날을 기억하지 못한 해가 있었다. 자식의 마음도 별 수 없었다. 고무신의 옥색도 날아가고 균열이 생겼다. 위치도 잘 보이는 곳에서 잘 안 뵈는 선반 위로 옮겨졌다. 정년퇴직을 하고 시간의 틈새가 벌어졌다. 어느 날 생각이 문득 어머니의 옥색 고무신에 미치자 뜨락으로 들고 나왔다. 내가 누리고 사는 뜨락을 어머니는 살아 보지 못하였다. 이남으로 내려온 뒤 줄곧 안마당이 없거나 있어도 좁은 집에서만 살았다. 그래도 늘 꽃을 가꿨다. 큰 깡통이나 석유통에 꽃을 심어 볕을 따라다니며 넝쿨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되돌이키니 그것은 어머니의 대단한 정성이고 집착이었다. 몇 차례 집이 바뀌었어도 복숭아, 채송화, 분꽃, 옥잠화, 나팔꽃 따위를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꽃씨를 한 움큼씩 사 왔다. 담 그늘이 따라오지 못하는 볕 좋은 뜨락 가운데쯤 돌 위에 고무신을 올려놓고 흙을 담고 꽃씨를 묻었다. 이렇게 하여 꽃신이 된 것이다. 목련이 지고 나자 마침내 싹이 돋았다. 그 작은 연둣빛의 발견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무슨 꽃이 자라 올라 어떤 꽃을 피울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물을 너무 자주 주는 게 아녀요?”

집사람은 그것이 걱정이다. 꽃을 가꾸던 어머니 마음, 그 마음을 여름 내내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요즘엔 꽃을 가득 담은 꽃신이 나란히 꽃밭으로 걸어가는 꿈을 가끔 꾼다.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나무 집 형님 /반숙자|(서간수필)  (0) 2021.07.27
두레박 金巢雲 비평수필  (0) 2021.07.27
풍경과 바람/서정숙  (0) 2021.07.26
아름다운 간격 - 정목일  (0) 2021.07.26
나, 이대로 좋다 / 맹난자  (0) 2021.07.25

 

풍경과 바람 / 서정숙

 

 

 

풍경소리가 들린다. 그냥 스쳐가는 바람에도 풍경은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그래서 요즘은 집안에서도 바람의 속도를 짐작하곤 한다. 이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들르면서 선물로 주신 풍경을 현관 앞에 달아 놓은 것이다.

 

풍경이 우리 집에 걸리기 전에는 창 밖으로 보이는 소나무의 움직임을 보고 바람을 느꼈다. 집이 비교적 바깥의 소리와 단절이 잘되어 있어 앞산의 소나무를 보고 바람을 가늠할 대가 많았던 것이다.

 

바람은 그 때때마다 소나무를 만나는 방법이 다르다. 바람이 약하게 불 때는 나뭇가지가 한삼자락이 되어 너울너울 춤울 추는 듯이 보이고 강하게 불어대면 나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마구 흔들린다. 또 바람은 나무와 나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간지럼을 태우는 듯이 보일때도 있지만 , 가지를 사정없이 부러뜨릴때도 있다. 센바람이 고르게 불때는 스크럼을 짠 듯, 같은 방향으로 일렁거려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대는 내마음도 덩달아 나뭇가지를 따라 일렁인다.

 

그러나 요즘은 풍경소리가 바람을 먼저 알린다. 보는 것은 하던일을 멈추고 봐야 하지만, 듣는섯은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어 좋다. 보고 느끼는 것보다. 더 바르고 쉬운 것이 듣고 알아채는 일이다.

 

바람이 가볍게 불면 풍경의 몸체는 가만히 있고 거기에 달려있는 물고기 모양의 추만 움직이며 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따금 딩딩거리며 울리는 소리는 사찰에서 들었던 운치 있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바람이 좀 세게 불면 여운은 덜해도 소리에 힘이 있다. 바람이 아주 세찬 날은 풍경자체가 흔들려 여운이 있고 운치 있는 소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도 청아한 그소리에는 변함이 없다. 풍경이 중심을 잡지못할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부는날은 내마음도 산란해진다.

 

풍경은 바람이 있어야 움직이며 제 구실을 한다. 바람은 긑없이 풍경을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풍경과 바람의 관계를 지켜보자니 어머니가 풍경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소리가 듣기 좋을 때도 요란하게 들릴대도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바람은 무엇일까?

 

얼마전 어머니의 생신 날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자리를 함께한 자식보다 못 온 자식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대전에 사는 동생네가 사전에 기별도 없이 오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그 아들네 걱정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럴때는 옆에 있는 자식들은 아무 위안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맛없이 드셨고, 생일이 무슨 생일이냐며 한숨만 쉬셨다.그러 어머니의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옆에 있는 자식의 위로가 아니라 안 온 자식의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풍경이었다. 언제나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풍경이었다. 젊었을 때는 그 풍경을 울리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자식이 어머니 품안에 있을 때는 그 풍경을 울리는 바람은 아버지였다. 자식이 어머니 품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바람이었다. 술을 많이 드셨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하신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무렵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셨기에 맑고 고운소리를 들려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에 미풍도 되었다 태풍도 되었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에게 바람은 자식이었다. 육남매의 삶이 어디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있겠는가. 그 바람을 온몸으로 부대끼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어머니 당신이 자식을 움직이는 바람이길 바랬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정됭 있는 풍경이었을 뿐이다.

 

내 나이 쉰을 넘으니 나도 어느새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나에게 바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기븐일이 내 기쁨이 되었고, 그들의 고민은 나에게 거센 바람이 되어 돌어왔다. 그 바람은 내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면 나는 한동안 텅 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지내야만 했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세대에 비하면 자아와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풍경과 다르지 않으니 세상의 어미는 대체 무엇으로 분류될까.

 

늘 그 자리에 달려있는 풍경처럼 세상의 어미들도 그 자리에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소리를 내는 풍경처럼.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레박 金巢雲 비평수필  (0) 2021.07.27
꽃신/유경환 서정수필  (0) 2021.07.26
아름다운 간격 - 정목일  (0) 2021.07.26
나, 이대로 좋다 / 맹난자  (0) 2021.07.25
수필의 재발견  (0) 2021.07.25

 

아름다운 간격 - 정목일

 

 

깊은 산중의 고찰에 가 보면,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들어서 있을 때가 많다. 옛것과 새것이 뒤섞이고 건물들의 간격이 좁아졌다. 제한된 공간 속에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 간격이 맞지 않음을 느낀다. 건물의 배치는 여러 측면을 살폈을 것이다. 건축이나 그림을 그릴때에 적용되는 황금 비례를 염두에 둠은 물론이요, 건물과 건물의 간격, 산세와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산과 사찰, 인간과 자연 , 대웅전과 요사 등에 사색의 간격이 사라진 것은 아쉽기만 하다.

 

미국 서부 휴양 도시인 산타바바라에서 본 해안 풍경 중에 기억나는게 있다. 바닷가 식당 지붕에 새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펠리컨, 갈매기, 비둘기 수십 마리가 일직선으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유심히 본 것은 새들의 간격이었다. 덩치가 큰 펠리컨들이 앉은 간격과 갈매기, 비둘기가 앉은 간격이 몸의 크기와 정확하게 비례하고 있었다. 새들은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 내려앉아 있었다.

 

미국 서부 아리조나 사막을 여행할 때도 비슷한 풍경을 접했다. 바람이 불면 굴러가다가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사막의 풀이 있었다.  세시부래쉬  란 이름의 이 풀은 바람이 세게 불면 줄기가 부러져 날아가 죽은 듯이 있지만 비가 오면 살아나 13미터까지 뿌리를 내린다. 광막한 사막을 차지한 풀들은 바람에 날려가다가 멈춰진 곳에 자리를 잡아 자생하는 것인데도, 마치 사람들이 심어 놓은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영역과 간격을 유지하므로 공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활동 범위가 넓은 야수들은 그만큼 생존 영역이 넓어야 하며, 이 영역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생존 위협을 느낄수 밖에 없다. 종의 번식을 위해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것은 본능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고속도로 주행 중에 뒤차와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안전거리를 지켜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간격이 있어야 한다. 가로수들도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기에 쾌적감을 갖게 하지 않는가 

 

인간관계에도 간격이 있어야 한다. 너무 가까우면 싫증이 나게 마련이고 멀리 있으면 망각하기 쉽다. 이런 면에서 상대방과의 간격 유지는 삶의 슬기가 아닐수 없다. 간격은 떨어짐의 공허만이 아닌, 서로 간의 깊이와 이해와 자각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어떤 대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데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간격이 없으면 허물도 보이고취약점도 드러난다.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이해의 간격, 배려의 간격, 사색의 간격, 사랑의 간격이 필요한 것이다. 날이 저물고 저녁놀이 붉게 타고 있다. 사라지는 저녁놀이 아름다운 것은 하루라는 간격이 있어서일 것이다. 계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일 년의 간격이 있어서이고, 그대가 그리운 것은 볼 수가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필의 치열성과 여유

                                                                                                                  -정목일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의 수필이 삶의 절박성, 치열성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관조, 회고, 달관, 사유, 취미 등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삶의 치열성, 노동의 현장, 시대정신, 역사의식, 시회문제 등 실제로 삶과 직결 되는 문제와는 동 떨어진 주제와 소재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인다. 삶의 주제어가 지금, 여기, 오늘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지향의 회고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문학이다. ‘체험’이란 과거의 소산이기에 과거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시, 소설, 동화, 희곡 등에서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현장과 문제들을 펼치는 것과는 달리 수필에 있어선 현실 문제엔 관심조차 나타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실 문제를 분석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삶의 형태나 상황을 보여주지 못한다. 문제 해결의 의식과 작가의식, 시대정신의 결핍을 느낀다. 물론 자연 감상이나 신변잡사를 통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담으려는 소박한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노동의 땀 냄새, 일터의 현장과 애환, 삶의 치열성이 담긴 수필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수필은 본질적인 일을 외면한 채 취미, 산책, 회고 등에 빠져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담담하게 은근하게 다가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런 빛깔과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근원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피하려고 한다.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픽션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문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수필집에 정작 삶의 현장과 모습이 빠져 있음을 목격한다. 농경시대와 산업시대를 지나 정보시대에 살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고, 농경시대의 정서와 의식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지향적인 의식 체제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의 의식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산책이나, 회고조의 글이 아닌 본격적이고 치열한 문학형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삶의 주변문학이 아니라, 삶의 중심문학이 돼야 한다.

 

수필이 삶의 중심과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한가로운 취미나 여행, 혹은 회고조의 토로와 에피소드에 머물고 만다면 아무리 수필인구가 증가하고 발표되는 수필양이 많다고 할지라도 주변문학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분석하고 해결해 보려는 뜨거운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시, 소설, 희곡 등 픽션과는 달리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은 채 현실 문제를 과감하게 파헤친다거나 삶의 현장과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란 실로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분량에 있어서도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테마를 포용하기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수필이 삶의 핵심, 인간 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치열하고 뜨거운 작가정신을 투입해야 하며, 인생 산책과 한가한 토로 방식의 글쓰기에 대하여 재고해 보아야 한다.

 

평생 동안 꽃을 테마로 한 수필가, 한국미의 발견에 매달리는 수필가, 자신의 전문 테마에 일생을 건 수필가도 없지 않다. 또한 인생의 문제를 미시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한 걸음 비켜서서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보다 정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수필의 화법은 직접적이라기보다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현장과 현실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여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수필가가 보이지 않는다. 작업복 차림의 흙내 나고 땀에 저린 수필, 일터의 숨결과 긴박감이 느껴지는 수필, 오늘의 사회상과 이에 대한 고발, 정의와 부조리, 양심에 대한 가책과 고백, 삶의 생생한 기록과 현실 직시가 보이는 수필들이 나와 시대와 오늘을 증언하고 표현해 주어야 한다.

 

이제 수필은 삶의 주변부를 맴돌아선 안 된다. 삶의 심장을 느끼고 우리가 서 있는 현장, 오늘에 처한 현실의 중심에 서서 인간의 삶을 표현해야 한다.

취미나 여유나 산책 정도의 의식으로 수필을 쓸 때는 지났다. 그것은 아마추어문학 시대나 할 일이지 않은가. 이젠 수필은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대중적인 문학이 된지 오래다. 수필은 수필가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고학력 시대인 현대엔 모든 사람들이 수필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록화 한다. 인터넷이 글쓰기의 일상화, 수필의 생활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수필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독자적인 전문 세계와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와 치열한 작가정신, 탐구와 몰두의 땀이 요구된다. 시대와 현실의 한 복판에서 삶을 수용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신/유경환 서정수필  (0) 2021.07.26
풍경과 바람/서정숙  (0) 2021.07.26
나, 이대로 좋다 / 맹난자  (0) 2021.07.25
수필의 재발견  (0) 2021.07.25
강원국의 글쓰기  (0) 2021.03.07

 

이대로 좋다 맹난자

 

 

 

바람 부는 언덕에 선 채이대로 좋다.

눈앞에 펼쳐진 일망무재 발 아래의 삼계화택三界火宅에서 나 용케도 견디어왔다.

어느 대왕이 학자들에게 인간의 역사를 써오게 하자 그들은 수백 권의 저서를 기술하여 대왕께 올렸다백성들이 읽기에 분량이 너무 많으니 좀더 줄여보라고 지시했다대왕은 간추린 수십 권의 저서도 더 줄일 것을 요구했다이 같은 과정을 되풀이 한 뒤학자들은 마침내 합의점을 찾았다대왕께 올린 것은 커다란 종이에 쓰여진 글자 하나 ''였다그제서야 대왕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이다.

만약 누가 나더러 인간의 역사를 써 오라고 한다면 나 역시 ''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올릴 것이다그러나 그 고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성장을 거듭하고 성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의 일이다어느 심령술사가 내게 '당신은 전생에 해인사에서 수도하던 사람'이라고 했을 때갸우뚱하다가 정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공부하던 스님 세 분을 차례로 속가에서 만나게 된 인연 때문이다.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후원에서 담소를 나누던 세 분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뱀사蛇 자를 넣어 호를 나누어 가졌는데 세 분 모두 속퇴하여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청사 석도륜(미술평론가), 홍사 고은(시인). 백사 유충엽(명리학자)선생이다이분들과 인연이 닿아 인간의 운명과 주역에서 말하는 생사生死원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불교와 문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함께 한 시간들이 있었다첼리스트 조현진 씨를 데리고 정각사에 오신 석도륜 선생을 만난 것은 1960차례로 이분들을 만나면서 서로간의 친분관계를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로 깊은 불연佛緣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화수미제火水未濟의 인생길을 에둘러 여기까지 왔다.

인간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어떻게 해야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을 갖고 애를 태우던 중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석가의 말씀에 압도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요즈음엔 설법에도 등한한 편이다재액災厄으로부터 지켜달라고 법당에 가 엎드리지도 않는다가족의 영달과 복을 달라고 매달리지도 않는다아무 발원도 없이 그저 바람 부는 언덕에 나와 온몸으로 그걸 맞고 있다.

발원發願은 물론 좋은 것이다하나의 목표를 향한 에너지의 응집이며 자기 위안이기도 하다그러나 엄연한 인과因果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일밭이랑에 심어 놓지 않고 어찌 거둘게 없다고 탓하겠는가기도에 매달려 어찌 약속되지 않은 수확을 바라겠는가지은 게 없는지 나는 이 생에서 유복하기는 틀렸다그렇다고 내 생의 빈보貧報를 받지 않기 위해 복의 종자를 부지런히 심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마음속의 발원도 내려놓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린 듯 휑한 공동이 느껴진다.

요즈음 들어 더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나를 둘러싼 결핍된 사항과 부족한 것들에 대해 그 개선을 요구하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그대로 놓고 불편한대로 지낼만하다나는 지금 텅 빈 가슴으로 나목裸木처럼 서있다그 앞에 저항하지도 않고달아나려고도 하지 않으며 미련하달만큼 한 곳에 서서 맞을 것 다 맞고 싶다그리하여 정직한 댓가를 치루고 버릴 것은 버리며세상과의 관계맺음에서 홀가분해지고 싶다.

 

끌어 모아서 얽어매면한 칸의 초가집.

풀어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어느 선사의 시구처럼 허물어져 가는 한 칸의 조가집 같은 나.

언젠가는 본래의 들판으로 돌아가리.

바람 부는 언덕에 선 채나 이대로 좋다.

 

 

어떤 일탈 / 정재순

 

 

숙이네가 원당골에 가자고 한다. 꽃구경도 하고 점심도 지어 먹자고 해서 얼결에 그러자고 답했다. 여럿이 함께 어울린 적은 있지만 혼자 초대를 받기는 처음이다. 새초롬한 그녀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은근 걱정이 앞선다.

산기슭 숙이네 집에는 꽃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금낭화가 홍사초롱을 내건 화단에는, 라일락 향기에 취한 양귀비가 가녀린 몸매를 살랑인다. 지난밤 별이라도 내려왔을까, 키 작은 애기별꽃들이 오종종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금잔옥대는 청초한 각시붓꽃에게 입술을 내밀며 속살거린다. 나비 수백 마리를 뭉쳐놓은 것 같은 수국을 흔들면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오를 것만 같다.

곳곳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다. 지난겨울 지었다는 육각 정자며, 손수 일구었다는 텃밭이며, 눈이 가는 곳마다 숙이네 손길이 스며있다. 햇볕 환한 마당가에 항아리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세월을 발효시킨다. 어디서 구했는지 돌절구와 맷돌이 덩그마니 앉아 촌집 정취를 살린다. 주방 선반 위에는 색깔도 모양새도 각각인 질그릇이 투박한 멋을 부린다.

그녀가 살림과의 인연을 들려준다. 무겁거나 말거나 예쁘면 용서되는 숙이네가 아니던가. 방과 거실의 옷장이나 장식장은 그녀가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내다놓은 것을 가져왔다. 부엌의 그릇도 이웃이 버린 걸 말끔히 닦았다고 한다. 쓰윽 봐도 하나같이 쓸모 있다. 말하지 않았으면 감쪽같아서 새것인 줄 알겠다. 세상에, 숙이네가 이렇게 알뜰살뜰한 구석이 있었다니.

찻상 앞에 마주 앉는다. 국화차를 준비하는 그녀의 손놀림이 차분하다. 하나의 다기에서 우러난 차를 함께 마시자 둘의 마음이 향기로 젖어 든다. 그동안 속엣말을 드러내지 않더니 빗장을 열고 조금씩 풀어낸다.

성격이 예민한 탓이었을까. 말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거늘, 밤을 지새운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단다. 정작 막말을 쏟아낸 자는 기억조차 못 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숨이 가쁘고 심장을 찌르는 고통에 병원을 찾아갔으나 병명은 알 길이 없었다. 용하다 소문난 곳을 수없이 두드리고, 온갖 요법을 써 봐도 후련한 답을 얻지 못했단다. 부족한 데라곤 없어 보였건만, 다 버리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릴까 마음도 먹었단다.

숙이네를 보다 못한 남편이 이곳에 촌집을 마련했다. 소심한 아내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남편을 생각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엔 엄두도 못 냈지만, 징그러운 벌레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이 갔다. 달이 차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꽃밭을 가꾸고 텃밭도 일구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동안 원하는 무언가가 자꾸 만들어졌다. 아하! 이런 게 삶이구나 싶더란다.

뭐든 땅에 심기만하면 햇살과 비바람이 키워냈다. 감나무 잎이 눈곱만해질 즈음 호박씨를 묻어놓았더니 싹이 돋아났다. 연이어 넝쿨이 번지고 엄지손가락만 한 호박이 달렸다. 땅에 뿌리를 내린 것들과 교감하면서 그녀의 표정은 한결 부드럽고 환해졌다. 차츰 마음자리의 어둠까지 깨웠다.

맨 처음 허락 없이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원당골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단다. 본데없는 치들로 여겨져 말을 피했었다. 그런데도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과 말을 섞다 보니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 이제는 원당골에 도착하면 아예 마당을 열어 놓는다. 차 한 잔 대접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속이 개운하단다.

저 평온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찬찬이 짚어보았을 것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고 경계하는 세상과 다투다 보면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도 한다. 밉다고 세상을 짓밟을 수도 패대기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보다 느리면 어떻고 덜 가지면 어떠랴. 욕심을 채우는 길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길을 찾았다니 반가운 일이다.

시장 끼가 슬슬 돈다. 숙이네가 목에 무명수건을 질끈 묶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따라나선다. 발을 감싼 다홍색 고무신이 신명을 낸다. 예닐곱 평 텃밭에 생전 처음 보는 새하얀 감자 꽃이 정겹다. 가지 꽃은 노란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고, 블루베리도 머루 빛으로 영글어간다. 밭두렁에 가죽나무가 발그레한 새순들을 내밀고 있다. 방풍나물과 상추를 한잎 두잎 따다 보니 어느새 바구니가 찬다.

된장찌개와 가죽 순으로 전 굽는 내음에 식욕이 돋는다. 쟁반에 음식을 담고 온갖 야채를 올리자 밥상이 풍성하다. 손수 가꾸고 거둔 것을 한 입 넣으니 자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김장김치의 아삭하고 시원한 맛을 걸쳐 잡곡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다.

배가 부르면 여유가 아니던가. 마당으로 나가니 바람이 머리칼을 흔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잘 다듬어진 꽃 마당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텃밭을 지그시 바라본다. 포만감 위에 더해지는 안빈낙도. 그래, 이것이 그녀가 되살아난 이유구나.

누구에게나 마음 놓을 자리가 있을 것이다. 소는 풀밭이 나비는 꽃이, 긴 여행에 지친 이는 따뜻한 아랫목이 그러할 터이다. 뭇별, 들꽃, 산들바람이 어루만져 주는 곳, 어느새 나도 마음 내려앉을 자리를 꿈꾸고 있다.

 

바다의 기별 / 김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리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닫는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너머의 밀물과 썰물이 이 내륙 하천을 깊이 품어서 숭어 떼들이 수면 위로 치솟고 호기심 많은 바다의 새들이 거기까지 물을 따라 갯벌을 쑤신다. 그 작은 물줄기는 바다의 추억으로 젖어서 겨우 기신기신 흐른다. 보이지 않는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서정주「격포우중」에서)와도 같이 젖어서 질퍽거린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들 바다로 돌아가고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날아가면 빈약한 물줄기는 낮게 내려 앉아 겨우 이어가는데,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자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 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라는 글자 밑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라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 부엉이 같이 말을 걸 수 없는 동물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

물가에서 돌아온 밤에 램프 밑에 앉아서 당신의 정맥에 관하여 적는다.

그해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고 빗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산 것들의 몸 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 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횐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백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몸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정맥이 숨어드는 죽지 밑에서 겨드랑 살은 접히고 포개져서 작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이 찻잔을 잡느라고, 책갈피를 넘기느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느라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당신의 겨드랑 골은 열리고 또 닫혀서 때때로 그 안쪽이 들여다보일 듯했지만, 그 어두운 골 안쪽을 당신의 살 속을 파고 들어간 정맥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사라진 정맥의 뒤 소식은 아득히 먼 나라의 풍문처럼 희미해서 닿을 수 없었다. 정맥의 저쪽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별도 오지 않았는데, 내륙의 작은 하천에 바다의 조짐들과 바다의 소금기가 와 닿듯이, 희미한 소금기 한 둘이 얼핏 스쳐오는 듯도 싶었고 아무런 냄새도 와 닿지 않는 듯도 싶었다. 환청(幻聽)이나 환시(幻視)처럼 냄새에도 환후(幻嗅)라는 것이 있어서 헛것에 코를 대고 숨을 빨아들이는 미망이 없지 않을 것인데, 헛것인가 하고 몸을 돌릴 때, 여름 장마의 습기 속으로 번지는 그 종잡을 수 없는 소금기는 멀리서 가늘게, 그러나 날카롭게 찌르며 다가오는 듯도 했다. 내 살아 있는 몸 앞에서 ‘너’는 그렇게 가깝고 또 멀었으며, 그렇게 절박하고 또 모호했으며 희미한 저쪽에서 뚜렷했다.

‘너’가 이인칭인지 삼인칭인지 또는 무인칭인지 알 수 없는 날엔 혼자서 동물원으로 간다. 동물들은 모두 다 제 똥과 오줌과 제 몸의 냄새를 풍긴다. 기린이나 얼룩말이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볼 때, 그 망막에 비치는 세계의 내용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기린의 눈의 안쪽으로 나의 시선을 들이밀 수가 없다. 올빼미의 눈과 독수리의 눈에 비치는 나를 나는 감지하지 못한다. 늙은 독수리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철망 밖을 내다본다. 백곰은 하루 종일 철망 안쪽을 오락가락한다. 그의 앞발은 무겁고 그의 엉덩이는 늘어져 있다. 백곰은 앞발을 터벅터벅 내딛어, 몸을 흔들며 철망 안을 서성거린다. 코를 철망에 비비면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백곰의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백곰의 동작은 대낮의 몽유(夢遊)처럼 보였다. 철망에 쓸려서 해진 콧구멍으로 피를 흘리면서, 백곰은 돌아오고 또 돌아간다. 수사자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저편으로 돌아누워 있다. 갈기가 흘려내려 바닥에 닿았고 돌아누운 옆구리를 벌떡거리며 숨을 쉰다. 귀 기울이면 사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숨은 바람처럼 사자의 콧구멍으로 몰려 들어갔다가 다시 쏟아져 나온다. 숨이 드나들 때, 창자가 ‘가르릉’ 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늙은 사자의 숨소리는 불균형하고 숨쉬는 옆구리는 힘들어 보인다. 코끼리 발바닥은 발가락 다섯 개가 한 덩어리로 붙어 있고, 붙은 발가락에 제가끔 발톱이 박혀 있다. 공룡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발가락 다섯 개는 분화되지 않았다. 코끼리는 그 들러붙은 발바닥으로 둔중하게 땅을 딛는다. 다시 억겁의 세월이 지나야 코끼리의 발가락은 갈라지는 것인지, 발가락은 갈라짐의 먼 흔적들을 지닌 채 들러붙어 있다.

‘사랑’의 메모장에 왜 동물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항목 안에 써놓아야 할 단어들이었다. 동물원에서 코끼리 발바닥과 기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너’는 이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임을 안다. ‘너’가 삼인칭으로 다가오는 날엔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을 보러 간다.

다시 ‘사랑’의 메모장을 연다. ‘시선’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강’이라는 단어도 적혀 있다. ‘시선’을 적은 날은 봄이었고, ‘강’을 적은 날은 가을이었다. 봄에서 가을 사이에는 아무런 메모도 없었다. 메모가 없는 날들이 편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시선’ 밑에는 ‘건너가기’라고 적혀 있고, ‘강’ 밑에는 또 ‘혈관’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농수로’도 있고, ‘링거주사’도 보인다. 불쌍해서 버리고 싶은 단어들인데, 버려지지가 않는다.

내가 당신과 마주앉아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고,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당신의 시선은 내 얼굴을 뚫고 들어와 몸속으로 스미는 듯했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이끌려, 건너와서 내게 닿는 당신의 시선에 경악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으로 당신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닿을 때, 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나와 코끼리 발바닥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을 느꼈다. 그것이 환각이었을까? 환각이기도 했겠지만, 살아 있는 생명 속으로 그처럼 확실하고 절박하게 밀려들어온 사태가 환각일 리도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다시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숙일 때, 당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에서 햇빛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당신의 먼 변방에 주저앉은 나는 당신의 겨드랑 밑으로 숨어드는 푸른 정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당신의 푸른 정맥은, 낮게 또 멀리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다. 나는 나주 남평의 드들강을 생각했다. 드들강은 넓고 고요하다. 들에 낮에 깔려 다가오는 강은 강가에 앉은 자의 몸속을 지나서 흘렀다. 저녁이면 노을이 풀리는 강물은 붉게 빛났고, 강물이 실어오는 노을과 어둠이 몸속으로 스몄다. 당신의 겨드랑 속으로 사라지는 당신의 정맥이 저녁 무렵의 강물처럼 닥쳐올 시간의 빛깔들을 실어서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오기를 나는 그 강가에서 꿈꾸었던 것인데, 그때 내 마음의 풍경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을 기다리고 또 받아내는 곡릉천과도 같았을 것이다. 곡릉천은 살아서 작동되는 물줄기로 먼 바다와 이어져 있다.

내 빈곤한 ‘사랑’의 메모장은 거기서 끝나 있다. 더 이상의 단어는 적혀 있지 않다. ‘관능’이라고 연필로 썼다가 지워버린 흔적이 있다. 아마도, 닿아지지 않는 관능의 슬픔으로 그 글자들을 지웠을 것이다. 너의 관능과 나의 관능 사이의 거리를 들여다보면서 그 두 글자를 지우개로 뭉개버렸을 것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경과 바람/서정숙  (0) 2021.07.26
아름다운 간격 - 정목일  (0) 2021.07.26
수필의 재발견  (0) 2021.07.25
강원국의 글쓰기  (0) 2021.03.07
대추 한 알  (0) 2021.02.06

제1장 낯 익히기

 

○ 수필의 전제

- 수필은 붓 가는데로 쓰는 글이 아니다.

달관된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 된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편안하게 풀어낼 때,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것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 수필은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한 글이다.

- 수필은 신변잡기가 아니다. 수필은 우리 삶을 의미화 하는 문학이다.

의미화하지 않은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하나일 뿐이다.

생활의 의미화, 그것이 곧 수필이고, 수필이 곧 삶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 수필은 시도 아니요, 소설도 아니다. 수필은 산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예적인 산문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시적인 이미지와 소설적인 이야기와 희곡적인 대화를 모두 수용한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넘쳐서는 안된다.

- 수필은 재미를 추구하는 글이 아니다. 재미로만 따진다면 수필은 소설을 따를 수가 없다. 수필의 재미는 결코 원색적이거나 말초적이지 않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갖는 고유한 품격이다. 향기가 있되 진하지 않고, 소리가 있되 요란하지 않으며, 아름다움이 있되 천박하지 않은 글, 이것이 바로 수필이다.

 

○ 수필의 본질

- 사실의 체험 :

수필의 소재는 바로 현실세계에서 작자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 체험이다.

체험에는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이 있다., 간접체험에는 상상도 포함된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그 상상이 상상임이 밝혀져야만 한다. 문학은 진실을 캐내는 작업이다. 소설은 허구를 통해서 캐내지만 수필은 실제 삶에서 진실을 캐낸다. 삶이 없으면 수필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매우 실존적인 문학이다.

- 1인칭 문학 :

소설은 작가가 내세운 등장인물이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3인칭 문학이다.

그러나 수필은 자신이 독자와 직접 대화하는 1인칭 문학이다.

 

○ 수필의 성격

- 개인수필 :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진솔하게 풀어나가는 고백적인 글이다.

- 비평수필 :

개인수필이 자신을 조용히 관조하는 글이라면, 비평수필은 공동의 선을 위해 시비나 선악을 가리는 글이다. 비평수필이 문예성을 가지려면 비평 조차 수필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수필적’이라함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어야 하고, 공격적이기보다는 느낌의 여운으로써 비평의 날카로움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다. (김소운의 ‘두레박’)

- 사회수필 :

글속에 시사성을 담는 수필을 말한다. 시사성은 어디까지나 문예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문예성이 약하면 사회비평적인 칼럼이 되고 만다. (김영만의 ‘로열 박스’)

 

○ 수필의 종류

- 수필을 크게 나누면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눈다

- 경수필은 작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인 성격이 있고, 중수필은 작저의 체험을 배제한 객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 경수필 : 서정수필, 서사수필, 서간수필, 기행수필, 철학수필이 있다.

* 서정수필 : 개인적 신변에서 정서를 추출해내는 수필로서 문장은 부드럽고 표현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표현이란 치장에 치중하는 미문이 아니라, 작자의 신선한 의식에서 찾아낸 독창적 표현이다. 서정수필에서 시적인 상징과 비유도 빌려 쓰나 지나치면 산문에서 멀어진다.(유경환의 ‘꽃신‘)

* 서사수필 : 사실(사건)에 충실한 글이다. 서정수필과 철학수필이 느낌과 사상을 중심으로 한다면 서사수필은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그렇다고 사실기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서사에 정서가 따라야만 수필이 될 수 있다.(윤형두 ‘콩과 액운’)

* 서간수필 : 편지형식을 빌려 쓰는 수필이다. 편지가 곧 서간수필이 될 수는 없다. 개인 간의 사신이라도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는 편지라면 서간수필이 될 수 있다. (반숙자, ‘등나무 형님’)

* 기행수필 :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다르다. 세세한 일정, 친절한 길안내, 안내 책자에 살 붙인 것 같은 관광지 소개, 백과사전에 있는 지식의 나열은 기행수필이 될 수 없다. 기행문의 3요소는 체험, 감상, 여정이다. 체험과 여정만 있으면 기행 수필이 될 수 없다. 여행지에서 자기만이 느낀 감상을 주제로 끌어내야 한다. 기행수필은 지식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송규호의 ‘삼도내의 돌탑’)

* 철학수필 : 서정수필이 主情수필이라면, 철학수필은 主知수필이다. 감성보다는 지성이 主가 되는 수필이고, 정서의 아름다움을 탐닉하기 보다 주제의 철학성을 중시하는 수필이다. 서정수필이 정서의 아름다움에 비중을 두는 섬세한 글이라면, 철학수필은 사유의 깊이에 더 비중을 두는 무게 있는 글이다.(고봉진의 ‘마침표’)

- 중수필 : 경수필이 작자의 신변적 체험에서 소재를 찾는 가벼운 수필이라면, 중수필은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문제에서 소재를 찾는 무거운 수필이다. 그러므로 경수필이 주관적 이라면 중수필은 객관적이다. 중수필에는 작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작자의 철학과 사상만 드 러날 뿐이다.(김시헌의 ‘연애’)

 

○ 수필의 상상

- 수필의 상상은 허구가 아니다.(김영만의 ‘와석삼제)

 病을 손님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병과 화해하는 과정을 매우 특이하고 신선한 수법으로 처리한 상상의 글이다. (윤혜숙의 ‘노을 지는 강’ - 단종의 아픔을 상상으로 처리)

 

제2장 표현하기

 

○ 수필의 언어

- 수필은 자기 고백적 문학으로써 언어의 선택은 자연히 소설보다 신중을 기하게 된다.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에 작중인물의 설정에 따라 언어가 선택된다. 즉, 인물의 학력, 출신, 교양, 직업 등에 따라 자유로운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 언어는 곧 작자의 품격과 상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인용문이 아닌 한 비속어를 사용해서는 않된다. 지문에서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은 지역방언과 사회방언이 있다.

(양반계급과 상민계급의 말, 농민과 어민의 말, 기술계통의 용어 등)

 

○ 수필의 문장

- 간결해야 한다.

- 소박해야 한다.

소박하다는 것은 아름답기 위해 일부러 꾸미지 않는 것을 뜻한다.

- 평이해야 한다. 일부러 어렵고 현학적인 말을 과시하거나 잘 쓰지 않는 古語를 찾아 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 文章三易 = 보기 쉽고, 알기 쉽고, 읽기 쉬운 문장

- 글을 어렵게 쓰는 필자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문장수련이 덜 된 사람이다. 그도 아니라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인 양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 수필의 美文

- 수필에서 가장 경계해야 랄 것은 바로 미문이다.

미문이란 미사여구로 쓰여진 문장을 말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진실이 가려 지고 희석되어 버린다. 너무 꾸민 인상을 주지 않도록 퇴고에서 걷어내야 한다. 지나친 기교는 문장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지나친 수식은 문장의 미숙을 나타낸다.

 

○ 수필의 표현

- 비유법 :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이 있다.

※ 박목월은 문장에서 비유는 독약과 같다고 했다. 분량이 지나치면 문장을 그르치고 비속해지며, 반대로 인색하면 구체성과 문장의 맛을 잃는다는 뜻이다.

* 직유법 - ~처럼, ~같이

* 은유법 - ~처럼, ~같이 같은 매개체가 없이 느낌을 돌려 간접적으로 표현

* 의인법 - 사물을 사람으로 비유

- 강조법 : 열거법, 과장법, 영탄법이 있다.

* 수필에서는 감정을 여과시켜야 하므로 영탄법을 잘 쓰지 않는다. 꼭 자신의 기쁨 환희 등의 감정을 여과없이 전달해야 할 때만 쓴다.

- 변화법 : 설의법, 인용법, 반어법이 있다.

* 수필은 거의 지문으로 풀어나가는 글로써 단조롭기 쉬운데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법이 변화법이다.

* 설의법 - 독자에게 의문을 던짐으로 주의를 끌어오는 효과

* 인용법 - 자신의 생각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글이나 명구, 잠언, 속담을 빌려 쓴다.

* 반어법 - 본래의 뜻과 반대되는 뜻으로 써서 숨은 뜻을 강조하는 표현 으로 독자도 작자와 함께 그 풍자의 맛을 즐기게 하는 매력이 있다.(김진악의 ‘어떤 선생님’)

 

○ 수필의 감정

- 미움, 슬품, 기쁨같은 감정을 원색적으로 드러내지 말라

- 소설이라면 실감나게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수필은 작자인 나의 시각에서 글을 쓰므로 작자의 인격이 전적으로 직접적으로 글 속에 노출되는 언어의 선택과 더불어 감정처리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 수필문장에서는 미움, 증오, 분노, 슬픔, 기쁨 같은 감정이 원색적으로 드러나면 품위를 잃는다. 퍼져 앉아 대성통곡하는 모습은 속이 시원해서 좋지만 눈물 한 방울이 눈가를 적시며 슬픔을 참는 모습에는 절제의 아 름다움이 있다.

- 외롭고 슬프고 고독할수록 ‘외로움’, ‘슬픔’, ‘고독’이라는 말을 삼가야 한다. 원색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전편에 슬픔과 고독이 절절하게 배어 나오도록 쓰는 것이 뛰어난 묘사법이다.

- 수필에서의 절제는 생명과도 같아. 수필은 절제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구축하는 품위 있는 글이 된다.

○ 수필의 소재

- 소재는 다양하다, 다만 같은 소재라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지나쳐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 평범한 것 보다 남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글감으로 삼아야 가치가 있다. (정목일의 ‘아름다운 간격’, 서정숙의 ‘풍경과 바람’)

 

제3장 마무리하기

 

○ 수필의 서두

- “느낌의 현재”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 느낌의 현재란 그 글을 쓰고자 한 동기, 바로 그 정서의 시발점을 말한다.

(예) 오늘로 어머니 가신 지 일주일이다.(반숙자의 ‘외롭게 한 죄’)

자정이 지난 것 같다(이종만의 ‘아우성’)

선홍색 피가 주르르 복부를 타고 흐른다.(한향순의 ‘사혈’)

너무도 무상하다.(한인애의 ‘그리움’)

처음보는 엄청난 황토물이다(강길수의 ‘태풍’)

 

○ 수필의 구성

- 직렬구성, 병렬구성, 연역적 구성, 귀납적 구성

 

○ 수필의 문단

- 문단구성이 안되면, 생각은 꿰지 않은 구슬과 같다.

 

○ 수필의 결미 : 생각의 여운을 미진처럼 남겨두라.

- 김수봉의 ‘이별연습’, 백임현의 ‘아름다운 강북’, 유선진의 ‘네 이웃이 눈에 보일 때’

- 유동림의 ‘씨앗 2’, 황태섭의 ‘석별’, 서길원의 ‘잃어버린 것은’,

- 김한석의 ‘인력거’

 

○ 수필의 제목

- 주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짧게 붙이는 것이 좋다.

 

○ 수필의 퇴고 : 문장에서 일필휘지란 없다

- 형용사나 부사를 너무 써서 가볍지 않은가?

- 이 단어는 꼭 맞는가?

- 문장은 문법(맞춤법)에 맞게 쓰였는가?

- 표준어인가?

- 비속어가 아닌가?

- 이 말이 꼭 필요한가?

- 외국어식 표현은 아닌가?

- 없는 말을 만들어 쓴 것은 아닌가?

- 더 줄이면 이해가 않되는가?

-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않되는가?

- 문단은 제대로 구성했나?

- 글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지 않았나?

- 구성과 시제에 혼란은 없나?

- 문맥의 흐름에 끈김이 없나?

- 복합문이 계속되어 호흡이 길어지지 않나?

- 붙여써야 할 문장을 짧게 끊어서 흐름이 막히지 않았나?

- ‘그런데’, ‘그러나’, ‘그래서’와 같은 접속사를 남용하지 않았는가?

- 외국어처럼‘ 나는’이라는 말이 많지 않나?

- 문장부호와 띄어쓰기는 제대로 되었나?

 

부록 : 글쓰기의 기초

 

○ 글쓰기와 친해지기

- 덮어 놓고 그냥 써 보라.

 

○ 문장의 실제 :

‘ 문장이 안된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 주어와 서술어 사이는 너무 멀지 않아야 한다.

- 수식어는 수식되는 말 가까이에 놓아야 한다.

- 중복되는 말을 피하라.

- 겹말을 피하라.

- 피동형으로 만들지 마라.

좋은 수필을 논하기 위해서는 문장에 대한 언급이 빠질 수 없다. 수필은 비교적 짧은 산문이기 때문에 문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수필가 개인이 갖고 있는 혹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수필이다. 2013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을 읽어보며 좋은 수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각 수필이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과 문장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선작을 살펴보고자 한다.

 

윙-, 윙-, 윙-, 삐---. 한줄 소리가 바늘처럼 뇌리를 뚫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대며 이 밤을 지새울 작정인가 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소리를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옮긴다.

 

첫 문장부터 청각적인 이미지가 눈을 사로잡는다. 이 수필의 제목은 「이명耳鳴」으로 작가 개인이 직접 겪었던 증상을 글로 서술한 것이다. 소리가 귀 안을 가득 메우는 과정을 작가는 감각적인 문장을 사용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바늘처럼 뇌리를 뚫고 지나간다.’는 표현은 다소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대는 누군가’를 상상해내면서 작가는 신선한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감각적인 비유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다.

 

숲이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 잠시 웅크리고 있는 시간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고요하다. 먼지하나 일어나지 않는 숲의 적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길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겨 놓는다. 풀들이 몸에 부딪힌다. 조용하면 더 뚜렷해지는 소리일까. 스윽-, 신경을 곤두세운 소리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지금 나는 불청객처럼 흘러들어 숲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다. 찌르르-, 찌르레기가 울고, 매앰 맴-, 끼르끼르-, 매미, 귀뚜라미가 사방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둘러보아도 그들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귀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소리들은 마지막 문장과 같이 형체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글 속에서 소리는 부딪히는 풀, 고요를 깨뜨리는 찌르레기, 매미, 귀뚜라미로 형상화 되고 있다.

[출처] 수필의 재발견 / 이정림|작성자 장미숙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간격 - 정목일  (0) 2021.07.26
나, 이대로 좋다 / 맹난자  (0) 2021.07.25
강원국의 글쓰기  (0) 2021.03.07
대추 한 알  (0) 2021.02.06
장석주  (0) 2021.02.06

강원국의 글쓰기

 

글 쓰는 동기

먼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상이다.

세 번째는 모방이다. 베껴 쓰기

네 번째는 성장이다.

마지막 동기는 글을 잘 쓰면 멋있다는 점이다.

 

프로는 아리송한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좋은 문장을 만나면 메모하고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는 유심히 관찰한다. 프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쓰는 습관이 있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은 학습, 연습, 습관이다. 단순 무식하게 반복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글쓰기 트랙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글쓰기를 일상이 일부로,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쓰다 보면 술술 풀릴 때가 반드시 온다. 어둠이 지나면 대명천지가 나타난다. 손은 놓고 있지만 생각은 붙들고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갈고닦으면 주제가 명료해지고 글의 구성이 체계적으로 잡히는 돈오의 순간이 온다.

단어를 떠올리는 것도 좋다. 쓰다 막히면 이런 단어를 떠올린다. 풀어서 말하면(설명)왜냐하면(이유)이를테면(예시)정리하면(요약)만약(가정)빗대면(비유) 차이점과 공통점(비교) 거듭 말하면(반복) 미루어 보건데(유추) 중요한 것은(강조) 구분하면(분류) ~에 따르면(인용) 정의하면(규정) 수치는(통계) 기억에는 (일화) 나열하면(열거) 등 이런 단어를 책상에 붙여 놓고 막힐 때마다 죽 훑어보는 것이다.

 

2장 남과 다른 글은 어디서 나오는가.

 

어떻게 창의성을 키울까.

첫 번째가 융합이다. 이현현상 두 가지 사실이나 아이디어를 하나의 아이디어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창의적 생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두 번째는 숙고이다. 통상 사유라고 말하는 생각의 형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시를 읽거나 써보면 좋다.

세 번째는 감성이다.

네 번째는 연결이다.

다섯 번째는 직관이다.

 

창의적 글감을 찾으려면 흔한 방법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려면 어린아이나 여행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지구에 처음 온 외계인처럼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창의적인 글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유쾌함도 중요하다. 1만 시간이 들어가야 나오는 게 창의성이다.

 

-아는 게 없으면 보는 것으로 쓴다.

글쓰기에는 관심, 관찰, 관계라는 ‘3이 필요하다. 관점도 추가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사롭게 넘기지 말고 면밀하게 봐야한다. 내일이라고 생각하고 유심히 봐야한다. 호기심과 의문, 문제의식을 가지고 봐야 한다. 남들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책이건 뉴스건 사물이건 사람이건 말이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궁금해지고, 파면 팔수록 더 깊이가 느껴지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관찰은 고유한 느낌과 독창적인 생각을 만드는 출발점이다.

 

관찰의 단계

1단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글로 옮겨보는 것이다. 이른바 묘사다.

2단계는 느낌을 말하는 단계다. 감상을 쓰는 것이다. 느낀 점을 쓰는 것이다.

3단계는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다.

4단계는 내 주관과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비판하는 단계다. 귀납법: 구체적 사실에서 일반적 사실을 이끌어 내는 것. 경험을 해석한다. 연역법: 일반적 사실에서 구체적 사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원리를 증명한다.

5단계는 나를 보는 것이다. 양심과 정의감,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양심이 있다.

마지막은 없던 세계를 창조하는 단계다. 그 너머를 보는 것이다. (문학에 필요한 눈)

네 개의 눈이 필요하다. 육안은 사물을 본다. 지안은 생각을 본다. 심안은 느낌을 본다. 영안은 너머를 본다. 원숭이를 육안은 단지 구경한다. 지안은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을 떠올린다. 심안은 갇힌 원숭이를 불쌍하게 여긴다. 영안은 원숭이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한다.

기본은 저안에 글감이 있다고 확신하며 보는 것이다. 사랑스럽게 애지중지하며 봐야 한다. 처음 본 것처럼 낯설게 본다. 휑한 눈빛으로 멍하게 관조한다. 본 것에서 다른 무언가를 유추하고 연상해 볼 수도 있다. 은유와 직유, 알레고리는 여기서 나온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본다. 다시 말해서 개념과 관점을 갖고 본다.

이밖에도 파고들기, 되새기기, 크게 보기, 꼬리 물기, 합해보기, 넓혀 보기, 맺어보기, 톺아보기, 나눠 보기, 견줘 보기, 해보기 등이다.

 

-독서, 토론, 학습, 태도

글을 쓰기에 앞서 키워드가 들어 있는 칼럼 한두 편을 읽는다. 동영상 강의를 한두 편 듣는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관련된 책의 목차를 본다.

글을 쓰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만들어 내는 도구

첫째가 독서다. 독서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다. 책을 읽다보면 내 생각이 정리된다. 남의 생각을 빌려 자기 생각을 만드는 게 독서다.

둘째, 토론 역시 생각을 만드는 필수 도구다.

셋째, 학습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학습이다.

끝으로, 메모다.

 

-글쓰기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

당신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주변의 일상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잃어버린 감정을 찾아서

글을 쓰려면 자신이 마음,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수치심을 드러낸 글이 깨달음을 쓴 글보다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슬픔이 기쁨만 못하지 않다. 아니 몇 배 윗길이다.

감정을 풍부하게 느끼는 것과 내 감정 상태를 잘 아는 것. 내 감정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느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내 감정을 서술해 봐야 한다.

글은 먹기 거북한 현미밥처럼 까칠하고, 처음 가본 비포장도로처럼 때론 불친절할 필요도 있다. 천천히 읽어야 읽히는 글, 어디서도 본적 없는 낯선 글, 그래서 불편하고 긴장하게 하는 글처럼 말이다. 이런 글은 독자에게 스스로 추측하는 즐거움을 준다.

독자는 불편한 글을 좋아한다. 편안한 글에서는 아무런 감흥이나 자극을 얻지 못한다.

좋은 글 잘 쓴 글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포장하지도 않을뿐더러 남이 눈치 보지 않고, 남이 기대하는 것을 좇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和而不同 상태다.

 

-재미없는 글은 왜 쓰는가.

재미는 글의 첫 번째 요건이다. 글과 함께 노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써야 한다. 이렇게 글과 놀다 보면 재미가 커진다.

첫째, 교훈이 있다. 깨달음은 짜릿한 재미를 안겨준다.

둘째, 갈등이 있다. 대립과 갈등, 긴장은 재밌는 이야기의 기본이다. 혼자 하는 갈등은 할까 말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인다. 보수와 진보, 이상과 현실, 변화와 안정, 명분과 실리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한다.

셋째, 시련이 있다.

넷째, 행복한 결말이다.

 

생각이 잘 나는 15가지

글쓰기에 필요한 생각 여섯 가지: 지식, 해석, 경험, 느낌, 상상, 통찰이다.

첫째, 지식이다.

둘째, 해석이다. 사물이나 사안에 관한 자기 의견이나 판단이다.

셋째, 경험이다. 겪은 것이 소재가 된다. 내 경험은 일화이고 남의 경험은 사례이다.

넷째,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면서 느끼는 감각이다.

다섯째, 상상이다. 호기심을 통해 얻어진다.

여섯째, 통찰이다. 일종의 깨달음이다. 통상 사유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직관, 혜안이라고도 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즉 양심과 도덕, 삶에 관한 고민이다. 통찰과 성찰은 가장 어려운 생각이다. 문학 글쓰기는 공상, 상상을 하며 없던 생각을 만들어 낸다.

생각은 두 종류다. 처음 든 생각과 다듬어진 생각이다. 글을 잘 쓰려면 둘 다 필요하다.

생각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다. 남의 생각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3기를 갖춰야 한다.

첫 번째는 기본이다.

두 번째는 기둥이다. 생각, 자료, 퇴고

세 번째는 기술이다. 간결하게 써라. 두괄식으로 써라. 단문으로 써라. 부사 사용을 자제하라. 구체적으로 써라. 정확하게 써라. 한 문단에는 하나의 내용만 써라. 수식어나 접속사를 남용하지 마라. 동의어 반복하지 마라. 명료하게 써라.

생각이다. 문제는 지혜. 결국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지혜라는 이름의 생각이다. 지혜는 스스로 키우고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매일 주제를 정해 생각해야한다. 하루에 하나씩 내 생각을 정리해 보자.

 

-당신의 공감 수준은

마음이 사람을 향하면 공감, 사물을 향하면 호기심, 사건을 향하면 문제의식, 미래를 향하면 통찰, 나를 향하면 성찰이 된다. 이 가운데 하나는 공감이다.

그 다음이 호기심이다.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공감능력은 정서적 공감능력, 역지사지하는 이성적 공감능력, 사회적 공감능력이다.

공감능력이 풍부한 사람의 글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쓰려는 대상에 눈높이를 맞춘다. 감탄, 환호, 비탄, 위무, 격려, 칭찬, 감사가 풍성하다.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대상이 처한 상황을 기대하는 바가 파악됐으면 그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스스로 연탄재가 되어보고, 꽃이 돼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모방하자

남의 글을 읽다 보면 나는 이렇게 써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런 아이디어는 남의 글을 볼 때 잘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쓴 글은 참고한 글과 다른 글이 된다. 인용이 아니다,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원천이요, 가장 훌륭한 학습 방법이다. 원본에서 착상을 빌려와 창조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모방에도 두 갈래가 있다. 형식을 빌려 쓸 수도 있고 내용을 베낄 수도 있다. 글이 어떤 요소로 구성돼 있는지 분석한 후 일화나 인용, 이론, 사례 등의 구성요소를 대체한다. 내용 베낄 때는 영감만 얻어 와야 한다.

인용도 일종의 모방이다. 자신이 완벽하게 소화한 것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인용은 남의 권위를 빌려 오는 효과가 있다.

인터넷과 책에서 열심히 자료를 찾는다.

좋은 표현도 얻는다. 자료를 찾다 보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많이 만난다. 메모해뒀다가 적절히 변형해서 쓰기도 한다. 자료에 의지하면 쓰지 못할 글이 없다.

글쓰기 자료 찾기  자료를 찾는다(수집)주제에서 벗어난 것을 버린다(선택) 남은 것을 관련 있는 것끼리 묶는다.(분류) 묶은 것 중에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나눈다(구분 가장 중요한 것을 글 전체 또는 문단의 주제문이다 소 주제문으로 쓰고 나머지는 주제문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쓴다(활용)

 

3장 쓸수록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구성요소를 알면 글이 써진다.

글의 설득력과 논리는 순서에서 나온다. 칼럼은 현상-진단-해법 대부분의 글은 사실- 느낌을 기본 틀로 활용한다.

 

나만의 문체가 있는가

문체를 결정짓는 요인은 많다. 문장 길이존대의 정도수사법 사용 빈도문단 안에서 문장 배열장문과 단문 혼합 비율 어투 등 다양하다.

자신의 문체를 만들려면 많이 쓰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다. 그리고 진솔하게 써야 한다. 자기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쓸 때 문체가 만들어진다. 문체는 자신의 성격이고 기질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또한 글을 고치면서 문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가급적 단문으로 쓴다. 접속부사, 정도부사 사용을 자제한다. 우리말을 쓴다. 결론을 앞에 쓴다. 문체는 글쓴이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어휘력이 문제라고요?

글은 단어의 나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적절한 단어를 내 머리에서 뽑아내는 과정이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문단을 만들고 문단이 모여 글이 한편 완성된다. 어휘력이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다.

먼저 다양한 어휘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의미와 뉘앙스 차이를 알아야 한다. 이왕이면 품격 있고 생생한 단어를 쓰는게 좋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가 아니면 더욱 좋다.

연상해서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많아야 한다. 처음 떠오른 것으로 쓰면 독창적인 글은 나오지 않는다.

 

어휘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어휘력을 높이겠다는 각성이 먼저다.

둘째, 단어를 유념해 글을 읽는 것이다.

셋째, 글을 쓸 때 국어사전을 가까이 한다.

넷째, 자기만의 단어장을 만들어보자. 자신만의 뜻으로 단어를 정의해 보는 것도 좋다. 단어의 본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체험에서 나온 의미로 규정해보는 것이다.

다섯째 단어의 어원에 관심을 가져 보자.

여섯째, 키워드 중심으로 글을 써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휘는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다. 더욱 뚜렷하게 해주거나 흐릿하게 한다. 어휘를 잘 선택하되 의미를 왜곡해선 안 된다.

 

-좋은 문장 쓰는 법

첫째, 단문으로 쓰는 것이다. 잘 쓴 문장의 기본 조간은 좋은 내용과 쉬운 이해다. 단문과 장문을 섞어 쓰는 게 좋다. 7 3이나 8 2로 어우러져 리듬감 있는 글이 바람직하다.

둘째, 문장성분 간 호응은 필수다.

셋째, 수식어는 절제한다. 수식어를 써야하는 경우에는 피수식어 가까이 쓰는 게 좋다. 최대한 붙여 써야 오해가 없다.

넷째, 주어에 신경 쓴다.

다섯째, 피동문은 가급적 피한다.

여섯째, 수사법에 관심을 갖는다. 대구법과 은유법이 중요하다. 좋은 문장은 대구, 대조, 반복, 비유, 직유가 많다.

일곱째, 어미를 다양하게 써보자.

여덟째, 동사형 문장을 쓴다.

끝으로, 문장을 쓰고 나면 소리 내어 읽어보자.

독서보다 빠른 방법은 필사이다. 책이나 영화 대사 가운데 멋있는 말을 뽑아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 보라. 암기는 더욱 강력하다. 멋진 문장을 암송해보자.

 

-표현의 기술

표현력이 좋다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다양한 표현이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이다.

표현력이 좋은 사람은 서술어도 다양하게 쓴다. 평서형만 쓰지 않고, 의문형, 감탄형, 청유형, 명령형을 쓴다. 서술어가 변화무쌍해야 글이 지루하지 않다.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 도구를 활용해 보자. 이를테면 정의, 비교, 대조, 분류, 구분, 분석, 종합, 비유, 가정, 유추, 입증, 예시, 강조, 일화, 인용, 요약, 해석, 묘사, 서사, 단계, 열거 같은 표현 도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비교와 대조다. 비교는 유사점을 대조는 차이점을 가지고 설명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이 비교와 대조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동양과 현재를 대비해본다.

비유는 비교의 일종이지만 그것보다 한 수 위다. 비유는 우회하는 넛지(nudge). 글에서 넛지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한다.

분류와 분석도 많이 쓴다.

구조, 대조, 열거도 유용한 틀이다.

표현의 마지막 단계는 수사법의 수사다. 상징의 차원이 높을수록 글의 수준이 올라간다. 설명적이고 직설적이기보다는 함축적이고 우회적일수록 좋다.

반전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억양법) 비틀어라(역설법, 반어법) 나열하고 반복하라 (반복법) 상징을 써라(환유법, 제유법) 점차 강도나 수위를 높이거나 낮춰라(점층법, 점강법) 사물과 풍경을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라라(활유법, 의인법) 속담을 활용하라(풍유법)의성어, 의태어를 많이 구사하라(의성법, 의태법) 빗대어 표현하라(직유법, 은유법)

수사법은 직유와 은유가 대표적이다. 은유는 직유보다 은밀하다. ‘A B이다

은유의 확장으로 환유와 제유도 있다. 이 역시 상징과 큰 차이가 없다. 환유는 대상의 속성과 특징을 들어 대상 전체를 나타낸다. (왕관=왕위, =장군, 청와대=권부, 백의천사=간호사) 제유는 대상의 일부로 대상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 =음식, =무력)

 

-문법 공부에 하루만 투자해보라.

글쓰기의 기본은 문법이다. 함의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

국어 문법은 크게 세 파트다.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이다. 글쓰기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통사론이다. 글쓰기는 문장성분이 조금 더 어울리게 관계를 맺어 나가는 과정이다.

글쓰기가 관계를 맺어 새끼를 치거나 연결을 통해 가지를 뻗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새끼치기나 가지 뻗기를 하는데 핵심도구가 바로 조사와 어미다. 논리적으로 탄탄하고 수사적으로 매끈하면 좋은 글이다.

글쓰기야 말로 조사와 어미를 얼마나 잘 쓰느냐의 승부라고 생각한다.

조사에는 격조사, 보조사, 접속조사가 있다. 주격조사(, ), 목적격조사(, ) 서술격조사(이다) 보격조사(~이 되다, ~가 아니다) 관형격조사(). 부사격조사(에게, 에서, 으로, 처럼) 호격조사(, ) 인용격조사(라고, )가 격 조사다. 보조사는 도/역시(포함), (단독), 까지(한정), 마저/조차(극단). /(차이),부터(시작) 등 다양하다. 접속조사는 와/과 하고,  이랑 등이 있다.

어미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연결 어미와 종결어미만 주목하면 된다. 종결어미에는 평서형, 의문형, 감탄형, 명령형, 청유형이 있다.

것이다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될 것이다.’ ‘있는 것이다.’ 한다,’ ‘된다,’ ‘있다 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 꼭 써야 할 때는 것이다만 쓰지 말고 점이다’ ‘사실이다와 번갈아가며 써 보자.

우리말에 부사는 성분부사와 문장부사가 있다. 성분부사는 문장 안의 일부 성분을 꾸며주며, 문장부사는 문장 전체를 꾸민다. 성상부사(매우, 열심히, 가끔, 가까이)지시부사(이리, 저리) 부정부사(, ) 상징부사(의성어, 의태어)가 있다. 성상부사는 다시 정도부사(매우, 대단히)상태부사(열심히, 깨끗이)시간부사(가끔, 자주) 장소부사(가까이, 멀리)로 나뉜다.

정도부사는 안 쓸수록 좋다. ‘매우, 대단히, 아주 등은 글의 품위와 신뢰를 떨어뜨린다. 상징부사(의성어, 의태어)를 많이 쓰면 글이 생생하다. 현장감과 생동감을 준다.

문장부사는양태부사접속부사 두 가지밖에 없다. 양태부사 ( 과연, 어찌, 설마, 하물며, 결코, 조금도, 제발, 정말, 머름지기, 응당, 설령, 실로, 아마도, 부디, 만일, 가령)

접속부사는 가급적 자제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런데)

순접: 게다가, 더욱이, 더구나, 아울러,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점에서, 어쩌면, 하물며, 이처럼, 이같이 바로

역접: 하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반면에, 도리어, 오히려, 반대로

인과: 따라서, 그러니까, 그리하여, 그렇기 때문에, 그러면, 그러니, 급기야, 마침내, 왜냐하면

전환: 다른 한편, 그렇기는 해도, 다만, 바꿔 말하면

보완: , , 말하자면, 예를 들면, 일례로, 사실상, 예컨대, 덧붙여,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냐하면, 이를테면, 다시 말하면

종결: 끝으로, 결국, 결론적으로, 마지막으로, 요컨대, 결과적으로, 분명한 것은, 종합하면

우리말 품사는 아홉 가지(명사, 대명사, 형용사, 부사, 동사, 관형사, 조사, 감탄사, 수사).

동사형 문장을 주로 쓴다. 동사형 글은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기가 느껴진다.

심리동사: 좋다, 나쁘다, 즐겁다, 싫다.

지각동사 : 보다, 듣다, 맡다, 느끼다.

인지동사: 알다, 모르다

기원동사: 원하다 바라다.

경험동사 : 알다, 느끼다, 깨닫다.

이동동사: 가다, 오다, 다니다, 나가다.

수행동사 : 말하다, 명령하다, 제안하다, 주장하다, 단언하다, 수혜동사: 주다, 받다, 드리다, 얻다, 잃다.

결론은 동사를 다양하게 많이 쓰자는 얘기다.

 

-내가 몰입하는 여섯 가지 사례

첫째, 간절할 때다.

둘째, 위기감 조성이다.

셋째, 마감 시한을 정해놓는 것도 방법이다.

넷째, 관심 분야를 갖는다.

다섯째, 글과 노는 것이다.

아크로스틱: 삼행시의 외국버전

연상되는 단어쓰기 가을 하면 떠오르는 단어쓰기

이야기 이어쓰기, 아는 이야기 결론 바꿔 쓰기, 주어진 단어 넣어 글쓰기, 광고 문안쓰기, 광고 패러디하기, 장면 그림보고 느낌쓰기, 반박문쓰기, 영화보고 줄거리 쓰기, 영화드라마 리뷰쓰기, 노래 가사쓰기

여섯째, 프로페셔널을 지향한다.

 

글은 기억과 상상의 산물

글의 재료는 두 군데서 나온다. 상기와 상상이다.

내가 사용하는 기억력 향상 방법은

첫째, 반복이다.

둘째, 말해보기다.

셋째, 그리기다.

넷째, 적용이다.

다섯째, 반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이다.

기억 못지않게 상상력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당연한 것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상상력은 여기서 나온다. 엉뚱한 생각이나 공상, 망상을 즐겨 보자.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상상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동원하여 머릿속에 그려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상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해 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상상이라는 본연의 듯에 가장 충실한, 말 그대로 상상이다. 미래를 꿰뚫어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흐니 통찰 혹은 혜안이라고도 한다.

 

-뇌과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며 얻은 글쓰기 팁

글쓰기에서 주목해야 할 영역은 미지의 창이다. 나는 알고 있지만 독자가 모르는 부분이다.

글쓰기 아는 것, 쉬운 것부터 쓰기 시작한다.

 

4장 실제로 글은 어떻게 쓰는 가

 

-글의 시작과 마무리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일화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시작과 끝을 일거에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수미상관이다. 시작과 끝의 대구이다.

평범하고 담백한 시작도 가능하다.

핵심 개념을 정의 내리는 것으로 출발할 수도 있다.

뜬금없는 시작, 예상 밖의 시작도 좋다.

하고자 하는 말은 복선을 깔아주는 방법도 있다.

또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서 시작할 수도 있다. 473

 

마무리할 때

첫째, 내가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둘째, 글의 시작과 얼마나 일관성이 있나

셋째, 길게 쓰려는 충동을 억제한다.

넷째, 기발하게 끝내고 싶은 욕심을 자제한다.

다섯째, 흐지부지 끝내고 싶은 유혹을 물리친다.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거나 전체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뜻밖의 반전을 꾀할 수는 없는지 고민한다.

제안하거나 호소, 당부하면서 끝낸다.

향후 과제, 전망,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기대감을 표시함으로써 시야를 미래로 확장한다.

개인적 약속, 다짐을 하며 마무리 한다.

남의 말이나 통계 등을 인용하면서 무난하게 마친다.

격언, 명언, 경구, 속담과 같은 아포리즘을 활용한다.

시작 부분을 가져와 수미상관으로 맺는다.

질문함으로써 독자에게 결론을 맡긴다.

연설문의 경우 행복, 행운, 건강, 건승을 기원하는 덕담을 한다.

 

-묘사는 눈에 그려지게, 귀에 쟁쟁하게

거창한 것이나 관념적인 것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쓰자.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오감을 상호 교차해서 사용하면 글쓰기 훈련에 도움이 된다.

 

-일단 써라

 

학교에서는 글을 쓸 때 먼저 개요부터 짜라고 가르친다.

첫 줄부터 쓰는 사람도 있다.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문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일필휘지하라는 주문도 있다.

전체 구성은 신경 쓰지 말고 오직 한 문단에만 집중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쓴다. 모든 문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 그 하나를 향해 나아간다.

글에 꼭 들어갔으면 하는 문장이나 단어를 두서없이 채집한다. 그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본다.

 

-말해보고 써라

 

-글쓰기는 스토리텔링이다

첫째는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매일 겪는 일상 중에서 재미 의미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잡아내 보자.

이야기가 준비되면, 그다음은 배열이다.

글감이 마땅찮으면 우화를 찾아보자.

 

-쓰지 말고 고쳐라

전체 구조부터 본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드러났는지, 설득력이 있는지, 흐름은 매끄러운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한다. 컴퓨터에서 보고, 출력해서 종이로도 보고, 소리 내 읽어도 본다. 먼저 빠진 것이 없는지 본다. 다음으로, 뺄 것이 없는지 본다. 빼도 되는 것은 무조건 뺀다. ////의 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했다-생각했다.

공부를 했다-공부했다. 합의가 됐다 합의됐다. 경제의 민주화-경제민주화

마지막으로, 순서를 바꿀 것은 없는지 살펴본다.

오류를 잡아낸다. 첫째 맞춤법 오류를 잡아낸다. 둘째, 사실의 오류를 잡아낸다. 셋재, 문장의 오류, 즉 비문을 잡아낸다. 넷째, 논리의 오류를 잡아낸다.

 

퇴고 체크리스트

문장을 더 자를 순 없는가.

뺄 것은 없는가.

더 맞는 단어는 없는가.

반복되는 단어는 없는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없는가.

인명, 지명, 연도 외래어 오류는 없는가.

문장과 문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가.

주어-술어, 목적어-술어 호응은 맞는가.

, 하고/하며 전후의 문구는 대등한가.

수식어와 피수식어 관계는 적절한가.

주어와 목적어 누락은 없는가.

서술어는 간략하고 다양한가.

불필요한 피동형은 없는가.

어색한 조사와 어미 사용은 없는가.

문장과, 문단 순서를 바꿀 곳은 없는가.

상투적 표현은 없는가.

부연 설명이 필요한 곳은 없는가.

각 문단은 그자체로 완결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드러났는가.

독자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책을 쓰자

 

독자는 세 가지를 원한다. 재미와 효용과 감동이다.

 

-함께 쓰자.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이대로 좋다 / 맹난자  (0) 2021.07.25
수필의 재발견  (0) 2021.07.25
대추 한 알  (0) 2021.02.06
장석주  (0) 2021.02.06
[장석주의 시각] 외로움, 그 흔한 질병  (0) 2021.02.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