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집 형님 /반숙자|
방아 찧으러 시골 다녀온 그이 손에 올망졸망 보따리가 많았습니다. 마루에 꺼내 놓고 보니 영락없는 시골 채소전입니다. 형님. 형님께서 바쁘신 추수일손 짬을 내어 봉지마다 정을 채워 넣으신 것을 알고는 왜 이렇게 마음이 훈훈해 오는지요. 까만 비닐 백에는 싱싱한 홍고추가 들어 있구요. 감자도 한 봉지, 호박순도 형님의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꼬옥 접혀 나왔습니다. 비료부대에 길다랗게 싸 넣으신 게 무언가 했더니 텃밭에다 기르시는 대파다발이었습니다. 파뿌리에 고물처럼 묻어 있는 흙내음을 맡으며 어쩐지 그 구수한 내음이 코에 익은 형님의 내음임을 기억합니다. 당신 곁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저는 참말이지 당신 앞에 철부지 사촌동서 그뿐인데 형님은 한결같이 이렇게 묵묵히 우애를 나누어 주시니 감읍하옵니다. 형님, 올해도 형님 댁 문전에는 등꽃이 아름답게 피었었나요. 슬하에 8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이제 시숙님과 내외분만 큰 집을 지키며 농사짓는 알뜰하시고 부지런하신 형님. 언젠가 5월이었습니다. 과수원 적과할 일꾼을 얻으러 나섰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마을로부터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에 전신이 나긋나긋 녹아나는 듯했습니다. 그 향내는 차츰차츰 짙어지더니 어느덧 발걸음이 형님 댁 바깥마당에 멈춰 있었어요. 그 넓은 기와지붕이 온통 초록빛 우산을 받쳐들고 연연한 보라빛 등꽃은 송이마다 환하게 연등(燃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님 내외분은 대문만 지쳐둔 채 들로 나가시고 중풍을 앓던 강아지가 뒷다리를 덜덜 떨며 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개 이야기가 생각나니 형님, 웃음이 절로 납니다. 식구도 없고 적적하시다며 잡곡 한 말 내다주고 사오신 강아지였지요. 제 또래의 고양이 한 마리와 한 그릇 밥을 먹으며 토실하게 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중풍이 일어 반신불수가 되었다구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내다버리라고 성화였지만 형님은 괘념치 않으시고 정성껏 돌보시더니 거의 1년 만에 건강을 회복했지요. 그때 내다버리라고 한 사람 중에 저도 한 몫 끼어 있었는데 미물의 생명까지 소중해 하시는 그 어지심이 보배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형님, 저는 뜰로 들어섰습니다. 하도 우스꽝스럽게 기어나오는 강아지를 보고 혼자 웃다가 꼬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 못할 짓을 한 듯 심히 부끄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숲을 이룬 등나무를 올려다 보았지요. 사랑방문 앞까지 치렁치렁 늘어선 등꽃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대문기둥을 의지해 서로 부둥켜 안고 새끼꼬듯 올라간 줄기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국어 사전에서 등나무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등(藤)나무 : 콩과에 딸린 전요성나무, 동양 특산이며 흔히 관상용으로 심음.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의문은 전요성이란 뜻이었습니다. 다시 사전을 폈지요. 전요성 : 스스로 바르게 서지 못하고 다른 물건에 감겨서 뻗어 올라가는 덩굴진 줄기.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형님. 부부는 모두 전요성나무처럼 서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애정으로 감겨 세월 속에 많은 꽃송이를 피우는 것을. 더구나 형님께서는 종가집 종부로서 봉제사 받들며 손아래 시동생들을 사촌까지 합하여 다섯 분을 거두셨고 온 집안 대소사에 여름철 등나무 그늘 같은 후덕함으로 한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신식살림 한답시고 가마솥을 없애버린 저를 위해 해마다 손수 큰 가마솥에 메주까지 쑤어 주시는 친정 어머님같은 당신이셨습니다. 형님, 이제는 서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시골서 40 평생을 살아온 제가 뒤늦게 서울살이를 하고 흠칫흠칫 놀라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은 저울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시장에도 상점에도 또한 가정에도 저울이 있습니다. 홍고추 몇 개도 저울에 올라가고 콩나물, 마늘 몇 톨까지 모두 저울에 올라 갑니다. 그리고 진짜냐 가짜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형님,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도 저울에 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물과 권력, 능력까지 철두철미 유용성에 의해 저울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파트의 평수가 곧 행복의 평수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도 많다고 합니다. 정작 제 무게로 달려야 할 사람의 목숨은 중량을 잃어가고 잡동사니가 판을 치는 현실이 근대화된 삶이라면 그냥 밭갈고 씨뿌리며 사는 일이 훨씬 사람답다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저도 저울을 좋아합니다. 항상 감정의 기복으로 평형을 잃고 사는 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준엄함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바람입니다. 저울처럼 제자리에, 영의 상태로 비울 수 있다면, 그렇게 반듯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푸성귀 한 다발, 쑥버무리 대접도 푸짐스럽던 형님의 그 넉넉함이 사무치게 그리워오는 요즘입니다. 두엄냄새까지 덤으로 따라온 형님의 선물을 받고 제가 이렇게 소생하는 것은 실은 저울에 달지 않은 그 마음 때문이란 걸 알아주세요. 형님, 오늘 저녁 식탁에는 손수 넣어주신 담북장을 올렸습니다. 예쁘게 빚어 파는 이곳 담북장보다 냄새며 담백함이 일품이군요. 조미료를 많이 넣어 입맛을 돋구는 식단보다는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형님의 솜씨가 진국입니다. 우리들의 사는 일도 그런 것 아닐까요. 형님, 도시의 밤이 깊어갑니다. 지금쯤 뒷동산 산제당 골짜기에 밤새가 울다 잠들겠지요. 고마우신 형님, 수확의 계절 아주버님과 함께 좋은 가을 맞이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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