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 이정림
돌샘 이길옥추천 0조회 720.11.29 14:13댓글 0
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이정림 1. 체험의 재구성과 창조성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일상 생활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고 겪는 모든 일들이 수필의 소재가 되는 만큼 일상이 없으면 수필도 없다. 일상의 일들은 우리의 의식 과정을 통해 모두 체험으로 축적되고, 그 체험은 수필의 소재로서 동원되고 취택된다. 그러나 체험만 가지고는 수필이 될 수 없다. 수필이 체험으로만 구성된다면 논픽션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논픽션은 문학이 아니다. 거기에는 문예적인 향기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사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기는 하지만, 그 체험에 문예적인 요소를 더해야만 문학이 될 수 있다. 수필이 문예적인 산문이 되기 위해서는 비유나 상징 같은 표현상의 기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수필에 상상(想像, imagination)을 부여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역사가 기억에, 철학이 이성에 의지할 때, 문학은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상상은 실재하는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자기만의 창조적인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 상상이 한낱 공상(空想)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상상조차 사실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사실 체험에서 부족한 것,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감성적으로 유추해 보는 그 창조적 상상은 수필에 문예성을 부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필에 읽는 재미를 더해주게 된다. 공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 꽃들을 꺾을 수는 없다. 꺾을 수 없는 이유는 공원의 규칙일 수도 있고 자신의 도덕적인 양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약 그 꽃을 꺾는다면 누구에게 줄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 꽃을 받고 행복해 할 사람의 모습도 함께 떠올려 본다. 이런 상상은 작가 혼자만의 기쁨일 수도 있으나,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재미와 흥미를 준다. 상상이 체험의 한계성을 극복하며 그 체험을 재창조하게 될 때, 일상의 평범한 체험은 일약 문학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2. 수필에서 상상의 처리 영국의 조지프 에디슨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상은 감각적 체험을 심상으로 파악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 심상을 만들어 보고, 또한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상상은 사실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꾸밀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이라고 하였다. 소설이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 심상을 만들어보고, 또한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본질은 상상, 즉 허구이다. 그 허구가 어느 정도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해도 소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허구이기 때문에 그 허구 속에 내재된 실제마저도 허구로 간주되는 특성이 있다. 완전 허구이든 부분적인 허구이든 소설은 그 구성이 허구임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수필 속에 내재된 상상의 요소가 반드시 상상임을 밝혀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수필과 소설이 상상을 처리하는 수법에서 동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이다.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에는 '하나의 환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글이 소설이라면 이런 친절한 부제는 붙일 필요가 없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수필에서는 반드시 상상이 상상임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램이 아들딸을 앞에 놓고 증조 할머니와 큰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 떠난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눈앞에서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가 아니오, 당신의 아이도 아니오.(…)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트럼을 아버지라 부른다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오, (…) 그저 꿈이라오. 우리는 단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것에 불과할 뿐이오. 찰스 램은 다음 문장에 곧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상상이었음을 친절하게 밝힘으로써 독자의 혼란을 막아준다. "바로 잠을 깨 총각 신세인 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던 거다." 만약 이 글이 콩트라면 이런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리고 소설의 독자라면 이야기의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필에도 허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이 글을 수필에 허구를 도입하여 재미있게 체험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텍스트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글은 수필에서도 상상을 수용할 수는 있으나, 그 상상이 상상임을 밝힐 때 비로소 수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해주는 좋은 텍스트가 될 뿐이다. 우리는 김동인(金東仁)의 <수정 비둘기>를 수필로 분류한다. 이 글의 주인공은 "무거운 병에 시달린 외로운 젊은이"이다. 이 3인칭 젊은이가 어떤 집 앞에서 열두세 살 난 소녀를 만나 대화체로 이야기를 건네고, "소녀의 맑고 아름다운 눈에 감격"되어 자기 시계 줄에서 수정으로 새긴 비둘기를 떼어 소녀에게 주는 과정을 소설적인 수법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다분히 콩트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마지막 두 문장이 이 글을 수필로 간주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있던 나는, 한번 기지개를 하고 일어났다. 바야흐로 무르익은 봄날, 곳은 모란봉 중턱에 있는 어느 조용한 곳이었다. 그러나 3인칭으로 끌어오던 이 글이 결미에서 일인칭인 "나"로 끝을 맺었다고 해서 이 글을 수필로 분류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소설에서도 주인공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내세울 수가 있는데, 그럴 때 일인칭인 "나"는 작가와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정 비둘기>를 수필로 분류한다고 한다면, 수필에서는 상상이 상상임을 밝혀야 한다는 이론에 부합될 수 있는 좋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또 하나 예문으로 들만한 글로는 김상용(金尙鎔)의 <그믐날>이다. 이 글 역시 "심성이 원래 지기를 좋아해서 빚을 진 것은 아닌" '그'라는 3인칭이 주인공으로 되어 있다. 외상값을 독촉하는 빚쟁이들에게 "그는 '그믐'이란 안질 환자의 파리채로 빚쟁이들을 쫓아버렸"지만, 그 그믐날이 온다 해도 빚을 갚을 만한 뾰족한 기적이 생길 리가 없다. 그래서 늦게까지 다방에 죽치고 있다가 귀가해보니 뜻밖에도 50원이라는 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전에 꾸어준 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구세주를 만난 듯 그 50원을 가지고 한밤중에 호기 있게 빚쟁이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 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에겐 지금 공복도 피로도 없다. 포도를 울리는 그의 낡은 구두는 개선 장군 의 발굽보다 우렁차다.(…) "문 열우" 하고 또 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 "내요. 돈 받으소. 아까 왔더라는 걸. 어∼ 마침 친구에게 붙들려서…. 하하, 친구에게 붙들리면 어쩔 수가 없거든…."/ "그렇습죠! 하하!"(…) "어∼한데 사람이란 준다는 날은 줘야지! 그렇지 않소. 어∼ 한데, 모두 얼마더라…." S상점의 셈을 마치고 다시 개선 장군의 말굽소리를 내며 그는 다음 상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태준(李泰俊)은 이 글을 수필로 보며 "그라 하였으나 아마 자기임에 틀림없을 것"(이태준, ≪문장강화≫ 서울, 범우사, 1995, p. 137)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했던 1940년대 지식인들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한 심중일 뿐, 이 글의 내용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글을 전개해나가는 수법과 주인공의 성격이 매우 소설적이어서 오히려 콩트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 수필의 다양한 표현 수법의 일환으로 3인칭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는 있으나, 수필의 본질에서 이탈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3인칭이 작가 자신임을 밝히는 장치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김상용의 <그믐날>을 수필로 분류하는 당위성은 매우 희박할 수밖에 없다. 3. 작품의 실례 이제 본인의 수필 중에서 상상의 요소가 크게 차지하는 작품을 실례로 들어볼까 한다. 어느 날 버스를 탔더니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이 승강구에 붙어 있었다. 그 전단 속에는 실종된 사람의 사진이 한쪽에 들어 있었는데, 흔한 명함판 사진이 아니라 빨간 달리아 꽃들이 성큼 피어 있는 화단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흰 벽돌을 비스듬히 세워 화단을 만든 그 소박한 마당이었다.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을 본 내 객관적인 사실과 체험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나는 이 사진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본 것이다. 이 사진을 찍었던 어느 해 봄, 어쩌면 사진 속의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화단 에 꽃씨를 심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종삽을 들고 채송화와 나팔꽃 같은 순박한 꽃씨를 흙 속에 묻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질 그의 화단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으리라. 그리고 그 옆에서 잔시중을 들고 있던 그의 아내는 고운 흙에 촉촉이 물을 뿌리면서, 행복이란 결코 크고 화려한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봄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 드디어 그들의 화단에는 다투듯 꽃들이 피어났다. 이른 봄 정성어린 손길로 심었던 씨앗들이 그 가정에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남자는 작은 사진기를 가지고 그 꽃들 앞에서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었으리라. 처음에는 꽃보다 예쁜 자기 아이들을 화단 앞에 세웠을 것이다. 다음에는 그 아이들을 양팔에 안은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찍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그 자신도 사진이 찍고 싶어졌을까. 그는 배우처럼 멋진 포즈를 취하고 꽃 앞에 섰다. 하늘을 쳐다보면 더 멋있지 않을까. 팔을 늘어뜨리기보다는 팔짱을 끼는 편이 더 근사해 보이겠지. 그렇게 남자는 자기 연출을 하면서 화단 앞에 섰고,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렌즈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남편이 아닌 행복을 찍었을 것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그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고 전단 속의 사진은 그렇게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실종(失踪)>(1992) 이런 상상은 사진 속의 남자가 단순히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멍에에서 탈출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래성을 찾으러 가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그리고 현대는 우리의 도덕성과 신뢰성은 물론, 진실과 사랑마저도 상실토록 부추기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정녕 실종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미를 도출하고 있다. 상상이 간단한 체험에 작가적인 호기심과 주제를 부여하면서 <실종(失踪)>이라는 무거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때 국가적인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많은 가장들이 실직을 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를 떠돌며 노숙자의 신세로 전락을 한 일이 있었다. 이 기막힌 현실을 글로 형상화하기에는 내 개인적인 체험은 너무도 빈약하였다. 그래서 나는 상상이라는 수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심중을 헤아려 보았다. 아버지들은 그러고 싶어도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내의 눈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니면 지하도 맨바닥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달려온 숨가쁜 세월,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였다면, 그들은 아마 일찌감치 그 고된 삶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가는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를 가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뱉고 싶은 말도, 모두 버리고 참았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는 좀생원이 되었어도, 그런 비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상사(上司)의 모욕적인 말도 저녁때 한잔 술로 풀어내면 귀는 다시 깨끗해졌다. 내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아이들만 잘 기를 수 있다면 아비의 자존심 따위가 무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버지들이 의욕을 상실했다.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육체를 지탱케 해주는 것은 의욕이요 희망인데,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드는 것은 무기력일 뿐이다. 무기력은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이젠 더 이상 체면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무료배급소에서 밥을 타 먹는 두 손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뿐이다. ―<태양이 없는 그림>(1998) 이 <태양이 없는 그림>은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하루아침에 가정이 붕괴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어 가는 삭막한 현실을 상상의 수법을 통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 글이다. 이 글에서 상상은 극한적인 현실을 문예적으로 승화시키는 또 하나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결미 우리의 체험 세계는 매우 한정적이고 빈약하다. 그래서 수필은 재미가 없다고들 말한다. 소설처럼 마음껏 또 재미있게 이야기를 꾸며댈 수 있다면 그런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수필과 소설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으로 수필은 그 돌파구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은 수필의 한계성을 극복시켜 줄 수 있는 좋은 표현 수단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에서 상상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이라는 본질을 편협하게 해석한 때문이다. 수필이 체험의 문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체험의 기록만은 더욱 아님으로 우리는 그 표현 기법의 다양성에 대해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체험은 허구가 아니다. 수필 속의 상상은 그 체험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수필의 상상은 허구가 아니다. 상상이 수필의 본질에서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상상은 수필에서 창조성을 지니는 매우 매력적인 표현 수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4) ● 필자 소개 : 이정림(李正林) 『수필문예』로 등단(1974)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1976)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강사(2002∼2003) 계간『에세이 21』 발행인 겸 편집인 한겨레문화센터 수필 강좌 출강 마포평생학습관 수필 강좌 출강 수필집 『당신은 타인이어라』(1986, 범우사) 『산길이 보이는 창』(1991, 범우사) 『숨어 있는 나무』(2000, 범우사) 수필선집 『하얀 진달래』(1999, 선우미디어) 4인수필집 『시간의 대장장이』(2006, 선우미디어) 평론집 『한국수필평론』(1998, 범우사) 『한국수필평론』개정판(2002, 범우사) 이론서 『인생의 재발견-수필 쓰기』(2007. 랜덤하우스코리아) |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조일희 (0) | 2021.07.27 |
---|---|
구두 계용묵 (0) | 2021.07.27 |
쫓겨난 아담/유치환 (유치진은 그작가 (형) (0) | 2021.07.27 |
등나무 집 형님 /반숙자|(서간수필) (0) | 2021.07.27 |
두레박 金巢雲 비평수필 (0) | 2021.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