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나무/장석주

가끔 뒤란에 대추나무가 있던 옛집을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칸나꽃보다 작았다

대추나무는 병든 장기수(長期囚)처럼 영양실조의 기운을 보였다

연초록 잎은 이내 노랗게 변하고 열매는 볼품없었다

어느 해 이른 봄 어머니가 다섯 번째 아이를 해산한 뒤

외할머니는 붉은 태반을 대추나무 아래에 묻었다

이듬해는 붉게 잘 읽은 대추들이 가지가 휠 듯 주렁주렁 달렸다

 

 

버드나무 갱년기/장석주

 

 

금요일 저녁엔 영화 관람을 하고
일요일 아침엔 흰 셔츠를 입고 버드나무 성당엘 갑니다.
강의 서쪽에 살 땐 자꾸 눈물이 차올라
일없이 강가에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지요.
내 정수리께 새치가 생기고
당신의 쇄골은 아름답고 숭고했습니다.
약간의 몽상, 약간의 키스, 약간의 소금이
우리 자산이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당신은 슬픔의 슬하에 있는 아이들에게
기린과 중국 음식, 여수 밤바다가
사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냄비에서 꽁치와 바다가 함께 끓며 넘치던 계절,
바람을 방목하는 보리밭은 파랗고
삶이 삶을 살 수 있도록 놓아두는 동안
우리의 기쁨은 자주 증발했습니다.
그 많던 건달과 삼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칠흑 하늘에 내건 등불들도 다 꺼지고
버드나무 몇 그루를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숨은 꽃/장석주-

 

1
너……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랑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몽해항로 6-탁란/장석주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장석주 시인 약력>>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붉디붉은 호랑이』,『절벽』등.

*산문집 『 이 사람을 보라 』,『추억의 속도』,『강철로 된 책들』,『느림과 비움』,『책은 밥이다』,

『새벽예찬』,『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취서만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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