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가로나비 (너비x.넓이x
가사 (가사일x
가새표, 가위표 (엑스표x
갈가리 (갈갈이x
갈겨쓰다(날려x
갑. 성냥갑 ( 곽x
강강술래 (수월래x
강퍅하다 (팍x
개다리소반 (밥상x
거추장스럽다 (거치x
거치적거리다. 걸리적거리다 (걸그적x
건더기 (데x
걷어붙이다 (부치x
검은색. 검정 (검정색x
게거품 (개x
겸상 (맞x
겹질리다 (겹지르x
고깔 (꼬x
고수레 (래x
곤두박이다 (박히x
골칫거리 (치꺼리x
곯아떨어지다(골아x
곰기다 (곪x
곱사등이 (꼽x
곱슬머리. 고수머리
괜스레 (괜시리x
괴나리봇짐 (개나리x
구둣주걱 (구두x
구레나룻 (나루x
구시렁거리다. 구시렁대다 (궁시렁x
구태여 (구태어x
군더더기 (군더덕지x
굼닐다 (굽x
굼벵이 (뱅x
귀걸이. 귀고리
귀때기 (귓대x
귀이개 (귀후비개x
그뜩이 (히x
기다랗다 (길다x
까슬까슬 (실x
깔끄럽다(까끄x
깔때기 (깔대x
깜빡이 (박x
깜장. 껌정
깡그리 (싸그리x
깡충깡충 (총x
꺼림하다, 깨름하다 (꺼름x
꼬락서니 (꼬라지x
꼼꼼히 (이x
꼽사리 (곱x
꼽추 (곱x
꽃봉오리 (우x
끄트머리 (끝x
끗발 (끝x

<ㄴ>
나무라다 (래x
나부랭이. 너부렁이 (나부랑x
나지막하다. 나지막이 (나즈x 히x
낙락장송 (낙낙x
난들. 나인들 (낸x
날갯죽지 (날개쭉x
날파람둥이 (바람x
내리꽂다 (내려x
넌지시 (즈x
널브러지다 (부x
널빤지 (판x
널찍하다 (넓직x
네댓 (너x
노란색. 노랑 (노랑색x
노른자 (란x
놀놀하다 (놀롤x
놀래다 (놀래키다x
농지거리 (짓x
놔두다 (냅두x
뇌졸중 (증x
누비옷 (빔x
눌어붙다 (늘x 눌러x
느지감치 (즈x
느지막이 (즈x
늘 (늘상x
늘그막 (늙으x
늙수그레하다 (늙그수레x
늴리리 (닐x

<ㄷ>
다디달다 (달디x
단출하다 (촐x
대증요법 (중x
덤불 (풀x
덤터기 (테x
도떼기시장 (돗데기x
도리어. 되레 (되려x
돌멩이 (맹x
돼먹지 않다 (되x
되뇌다 (되뇌이x
두더지 (쥐x
두루마리 (말이x
두루뭉술하다. 두리뭉실하다 (두루뭉실x
둘러싸이다 (쌓x
둘러업다 (들쳐x
뒤꼍 (뒤안x
뒤치다꺼리 (닥거리x
물을 들이켜다 (키다x
딴기적다 (쩍x
딸내미. 아들내미 (래x
땡추 (초x
떠버리 (떠벌이x
뜨물. 쌀뜨물 (뜸x

<ㅁ>
마수걸이 (마거리x
막냇동생 (내x
마구간 (굿x
마수걸이 (마거리x
망측하다 (칙x
머리끄덩이 (댕x
먼지떨이 (털x. 털이개x
멋쩍다 (적x
며칟날 (칠x
모자라다 (자르x
목돈 (몫x
목메다 (메이x
묏자리. 묫자리 (묘자리x
무동, 목말을 타다 (무등x
무르다 (물x
무르팍 (무릎팍x
문지르다 (질x
뭉그적거리다. 뭉그적대다 (뭉기x. 밍기x
뭉크러지다. 물크러지다 (뭉클어x
미장이(쟁x
미주알고주알 (메x
밀어붙이다 (부치x
밑동 (둥x

<ㅂ>
반말지거리 (짓x
반짇고리 (짓x
발부리 (뿌x
방방곡곡 (곳x
밭뙈기 (때x
배냇저고리 (베x
번번이 (히x
보퉁이 (통x
복슬복슬 (실x
부기 (붓기x
부스스하다 (부시시x
부좃돈.부조금 (부줏x
부추기다 (키x
붓두껍 (붓뚜껑x
비뚜로 (루x
비럭질 (비렁뱅이질x
비비다 (부비다x
비사치기 (차x 비석x
빈번히 (이x
빈털터리 (털이x
빨간색. 빨강 (빨강색x
빼쏘다 (빼박다x

<ㅅ>
사글세 (삭월x
사주단자 (지x
산봉우리 (오x
살코기 (고x
살쾡이. 삵 (괭x
새침데기 (떼x
샛별 (새벽x
생일빔 (생일옷x
설거지 (겆이x
소곤거리다. 소곤소곤 (근x
소맷귀 (소매깃x
손목시계 (팔목x
수군거리다 (수근x
수두룩하다 (수둑x
수북이 (히x
숙맥 (쑥x
스라소니 (시라x
시답다. 시답지 않다 (시덥x
시리다 (시렵x
시시닥, 시시덕거리다
시쳇말(그 시대 유행하는 말) (시셋x
실낱같은 희망 (날x
실쭉하다 (죽x
십상이다 (쉽x
싸라기. 금싸라기 (래x
싸전 (쌀x
싹수 (싸가지x
쌉쌀하다 (살x
씀바귀 (쓴나물x

<ㅇ>
아귀 맞추다 (아구x
아기 (애x
아등바등 (둥x
안줏거리 (주꺼리x
알나리깔나리 (얼레리꼴레리x
알맹이 (멩x
애걔걔 (개x
애굣덩어리 (교x
애면글면 (먼x
얘깃거리 (기꺼x
어렵사리 (살이x
어리바리 (버x
어물쩍 (쩡x
어우러지다 (울러x 울어x
어중되다 (어중띠다x
어질병 (어질머리x
어쭙잖다 (줍x
억지 (어거지x
얻다. 얻다가 (어따가x
얼루기 (얼룩이x
엉큼하다 (응큼x
에구머니나 (그x
엔간하다 (엥x
여봐란듯이 (보x
여태껏 (여지껏x
연륙교 (연육x
예부터. 예로부터 (옛x
예삿일 (사x
예스럽다 (옛x
오곡백과 (백화x
오도카니
오뚝하다 (똑x
오라비 (래x
옴츠러지다. 움츠러지다
왜가리 (외x
요컨대 (데x
우레 (우뢰x
욱신거리다 (x
욱여넣다 (우겨x
운용의 묘 (운영x
움큼 (웅큼x
으레
으름장 (어름x
으스름. 어스름 (어스럼x
으스스 (시시x
이지러지다 (이즈x
인두겁 (두껍x
인마 (임마x

<ㅈ>
자투리 (짜투리x
장롱 (농x
재떨이 (털x
저지르다 (질르x
접질리다 (접지르x
정화수 (한x 안x
젖히다. 제치다 (끼x
조홧속 (화x
족집게 (쪽x
졸리다 (립x
좋을는지 (좋을른지x
주쳇덩어리 (바가지x
즉효 (직x
지르밟다 (즈려x 지려x
진드기 (찐x
진득이 (히x
집적.찝쩍거리다/대다 (찝적x
집터 (집자리x
짓무르다 (짓물다x
짜깁기 (집x
짭짤하다 (짭잘x
짱알거리다 (쨍알x
쩨쩨하다 (째x
찌꺼기 (끄러기x

<ㅊ>
차양 (채x
착잡하다. 잡착하다
채신머리없다 (체x
천생 (천상x
천장 (정x
철석같다 (썩x
첫새벽 (신새벽x
쳐부수다 (부시x
●`쳐`와 `처`의 구별
(쳐: 치어(위로) / 처: 마구, 많이)
쳐: 쳐부수다, 쳐주다, 쳐내려오다, 쳐다보다. 쳐내다
처: 처지다, 처대다, 처박히다, 처먹다, 처넣다, 처박다

초생달 (승x
초주검 (죽음x
촉촉이 (히x
총부리 (뿌x
총총히 (이x
추스르다 (스리x 슬르x
치고받다 (박x
치다꺼리 (닥거리x
치르다 (루x
칠흑 (흙x
칩떠보다 (치떠x
코방아 (콧x
콧방울 (망x
쿵더쿵 (덕x
퀴퀴하다 (퀘퀘x
터지다 (튿어x
토사곽란 (광x
통째 (채x
트림 (름x

<ㅍ>
파리하다 (릿x
파투 (파토x
편평히. 평평히 (평편x
평안 감사 (평양x
푸르스름하다 (퍼x
푿소 (풋x
풍뎅이 (댕x

<ㅎ>
하루거리 (걸이x
하릴없다 (할일없다x
하마터면 (트x
하여튼
한가락하다 (닥x
해쓱하다. 핼쑥하다 (핼쓱x
해코지 (꼬x
햅쌀 (햇x
허룩하다. 헙수룩하다 (허수룩x
헌칠하다. 훤칠하다
헝겊 (겁x
헝클어지다 (크러x
헹가래 (행x
호래자식 (호로x
횡격막. 가로막 (횡경막x
후덥지근. 후텁지근하다
후드득후드득 (후두둑x
흉측하다 (칙x
흐리멍덩하다 (텅x
흙받기 (받이x
흥부가 (흥보x
흩뜨리다 (흐트x
희끄무레하다 (히x
희끗희끗. 힐끗힐끗 (히x
희읍스름하다 (희끄x
희한하다 (희안x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지 않는 반딧불이” / 박일천  (0) 2021.08.18
석류, 다시 붉다  (0) 2021.08.18
이명(耳鳴)/피 귀 자  (0) 2021.07.29
태양이 없는 그림 / 이정림  (0) 2021.07.28
같이, 같은  (0) 2021.07.27

이명(耳鳴)/피 귀 자

 

찌익-찍 찌익-찍 바닥을 긁는 듯한 저 소리의 근원은 무엇일까.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잊을 만하면 들리는 찌익-찍 찌익-찍 북핵(北核).쿵쾅대는 저 소리.바람인가.

바람인가 보다.

바람이 일어선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는 바람만 존재하는 듯 전깃줄이 윙윙 운다.

아니, 보일러가 돈다.

그도 아니면 냉장고 모터 소리인가.

보리를 잡기 위해 집안을 헤집지만 고요한 밤, 식구는 잠들었고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등을 붙이고 눕자 하루치 피로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긴다.

꿈이런가.

바람이 귓속으로 휘감긴다.

들릴 듯 말 듯 은밀하던 소리가 점점 커진다.

성폭력. 다시 벌떡 일어나 집안에 소리가 날만한 곳을 찾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비슷한 소리는 없다.

누웠다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하자 잠은 저만치 달아나 버리고 시시각각 예민한 촉수가 돋아난다.

수많은 도르래가 돌아간다.

하늘이 암갈색으로 물들고 두꺼운 구름이 몰려온다.

모래먼지가 입안에서 서걱거리고 숨이 턱턱 막힌다.

폭우에 들풀이 일어나듯, 어둠을 삼킨 검은 파도가 밀려온 듯 갑자기 강렬한 폭발음이 귀를 때린다.

고막이 찢어질 듯 거대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총기난사.

순간 거대한 소리는 숨어버리고 드러누우면 또다시 소리가 소리를 부르고 소리에 갇혀 누웠다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우주 저편에서 메아리치며 다가오는 지진 해일의 소리가 이럴까.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 거대한 소리의 근원이 바로 귓속이라니!

7.9⁰ 지진. 몸이 산화하여 산산조각이 나버릴 듯 자지러졌다.

바닥이 흔들흔들 움직인다.

믿을 수가 없다.

귓속에서 이런 소리가 나다니.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와 귓바퀴를 움켜쥐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몸부림을 쳤다.

어쩌면 좋으랴.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온몸에 비늘이 돋고 고통스러운 전율이 등줄기를 가로지른다.

끝없는 넓이로 서 있는 벽 앞에서 벽이 흡수된다.

넓디넓던 세상이 대통 속처럼 좁아진 듯 귀가 먹먹하다.

귀머거리가 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혼란 속에서 마음은 바람에 너덜거리는 헝겊조각.

머리는 깨질 듯 아파오고 잠자리는 난장판이다.

살인.

수없이 병원 문을 두드렸다.

산뜻한 이유는 어디에서도 밝혀지지 않는다.

늙어가면서도 노화의 일종일 수 있다는 말은 인정하기가 싫은 이 아이러니.

일상의 소리를 듣고 생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노화라니.

이런 종류의 노화도 있다는 말인가.

이상기후.

바쁜 낮에는 자취 없이 사라졌다가 등을 붙이는 순간 찾아오는 불청객 때문에 밤이 두렵고 괴롭다.

소멸하든가 파괴하는 것 외엔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감마저 앞선다.

햇빛 따사한 계절이 다시 돌아올까.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 사람이 상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테러.

참다봇해 인터폰을 들자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윗집 아주머니에게 무슨 말을 보태랴.

터져 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만다.

형제를 키우다 보니 뛰어다니고 의자를 끌어당기며 장난치는 소리였나 보다.

예측할 수 없는 불협화음 사이에서 남자애들의 자지러지는 괴성까지 코러스를 넣는다.

이명(耳鳴)이 이명(異鳴)일까.

이명(異鳴)이 이명(耳鳴)일까.

이명의 고통으로 충혈된 눈 위로 아침이 밝아온다.

 

[출처] (좋은 수필) 이명(耳鳴)(피귀자)|작성자 성민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류, 다시 붉다  (0) 2021.08.18
바른말  (0) 2021.08.02
태양이 없는 그림 / 이정림  (0) 2021.07.28
같이, 같은  (0) 2021.07.27
구두/조일희  (0) 2021.07.27

태양이 없는 그림 / 이정림  
 
 
 얼룩동사리는 매우 부성애(父性愛)가 강한 민물고기다. 흔히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놈보다 암놈이 새끼에 대한 사랑이 깊은 법인데, 이 물고기는 의외로 그 반대다.
얼룩동사리는 수놈이 먼저 집을 짓고 암놈을 기다린다. 집이라야 수초(水草)로 엉성하게 고치처럼 얽은 것인데, 그 곳은 신혼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암놈의 알을 받기 위한 둥지인 셈이다.
집을 다 지으면, 부지런히 지나가는 암놈들을 유혹한다. 물고기들도 제 눈에 들지 않으면 응할 생각이 없는지 어떤 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힁허케 가 버린다. 또 어떤 놈은 마지못해 응하는 아가씨처럼 도도한 몸짓으로 집을 한바퀴 둘러본다. 장만한 아파트가 몇 평이나 되나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알을 낳아도 될 만큼 안전한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안전도 검사에서 불합격을 놓은 암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고, 다행히 집이 마음에 든 놈은 거기에다 산란(産卵)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지체 없이 떠나 버린다. 어미라고 해서 모두 모성애가 강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수놈은 떠나 버린 암놈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 오직 종종 보존에만 관심이 있어서 새끼가 부화될 때까지 지성으로 돌본다. 지느러미를 흔들어 산소를 공급해 주기도 하고, 외적이 나타나면 용감하게 싸워 물리치기도 한다. 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모습은 정말 아버지같이 믿음직스럽고 감동적이다.
수놈은 스무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알이 부화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그 숱한 알에서 새끼들이 터져 나오고, 하나 둘 알둥지를 떠나고 나면, 마침내 기진하여 숨을 거둔다.
텅 빈 알둥지 앞에서 눈을 껌벅이며 죽어가는 얼룩동사리의 모습을 화면에서 보다가, 그만 가슴이 뭉클해 왔다. 자식을 위해 끝없이 헌신하다가 생을 마치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 땅의 아버지들은 작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옛날, 한 집안을 떵떵 울리던 위엄은 사라지고, 가정 한 귀퉁이에서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들이 요즘 바깥에서 배회하고 있다. 아버지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어도 여전히 생계의 책임을 혼자 짊어져야 했던 고달픈 아버지들이 회사에서 무더기로 감원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들은 그러고 싶어도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내의 눈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니면 지하도 맨바닥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달려온 숨 가쁜 세월,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였다면, 그들은 아마 일찌감치 그 고된 삶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가는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를 가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뱉고 싶은 말도, 모두 버리고 참았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는 좀생원이 되었어도, 그런 비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상사(上司)의 모욕적인 말도 저녁때 한잔 술로 풀어 내면 귀는 다시 깨끗해졌다. 내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아이들만 잘 기를 수 있다면 아비의 자존심 따위가 무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버지들이 의욕을 상실했다.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육체를 지탱케 해주는 것은 의욕이요 희망인데,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드는 것은 무기력일 뿐이다.
무기력은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이젠 더 이상 체면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무료배급소에서 밥을 타 먹는 두 손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뿐이다.
요즘 아이들의 그림에서는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태양은 아버지를 상징하는데, 그려도 귀퉁이에 조그맣게 그린다고들 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도화지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많이 그렸었다. 그때 아버지들은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다. 아이들이 다시 도화지에 커다랗게 태양을 그릴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지금 서울의 아스팔트 위에서는 얼룩동사리들이 숨져 가고 있다. 맨바닥에 누워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잠들어 있는 그 모습에서, 나는 이 시대의 불운한 태양들을 본다.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른말  (0) 2021.08.02
이명(耳鳴)/피 귀 자  (0) 2021.07.29
같이, 같은  (0) 2021.07.27
구두/조일희  (0) 2021.07.27
구두 계용묵  (0) 2021.07.27

같이, 처럼은 앞말과 붙여쓰기→앵두같이 붉은 색, 앵두처럼 붉은색

같은은 앞말가 띄어쓰기→앵 은 붉은색


안녕하십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같이, 처럼’을 체언 뒤에 올 때 ‘어떤 상황이나 행동 따위와 다름이 없이’를 나타내는 조사로 제시하고 있으므로 ‘앵두같이 붉은 색/앵두처럼 붉은색’으로 붙여 표기합니다. 다만, ‘같은’은 형용사 ‘같다’의 활용형이므로 ‘앵두 같은 붉은색’으로 띄어 표기한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같이' 띄어쓰기? '같이'가 부사로 쓰일 경우에는 띄어 쓰고, 조사로 쓰일 경우에는 앞말과 붙여 쓴다.

 

같이
(붙) 그림같이 아름답다(체언 뒤).
(띄)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
(띄) 나와 같이 놀자(함께).

'같이'가 부사로 쓰일 경우에는 띄어 쓰고, 조사로 쓰일 경우에는 앞말과 붙여 쓴다.

같이 [가치] Ⅰ. 부사로 쓰일 경우에는 띄어 쓴다.
《주로 격조사 ‘와 / 과’ 다음에 쓰여》
①서로 함께. ¶ 나와 ∼ 가자 / 여럿이 ∼ 식사를 하다.
②서로 다름이 없이. ¶ 내가 하는 것과 ∼ 하면 된다.
③바로 그대로. ¶ 예상한 바와 ∼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Ⅱ. 조사로 쓰일 경우에는 붙여 쓴다.
①《명사나 대명사에 붙어》 ‘비슷하게’, ‘…처럼’의 뜻을 나타냄.
¶ 눈∼ 흰 목련화 / 얼음∼ 차다 / 소∼ 일만 하는 머슴.
②《때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에 붙어》 그 때를 강조함.
¶ 새벽∼ 떠났다 / 매일∼ 지각하다.

* 단, ‘같다’, '같은'은 ‘형용사’이므로 앞말에 띄어 쓴다는 점에 유의한다.

배우 같은(띄) / 배우같이(붙) / 배우와 같이(띄)
너같이 바보V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

<이렇게 이해해도 좋을 듯...>
'이 같은'의 '같은'은 '같다'의 활용형이고 조사가 아니다. '같이'는 조사로 처리하면서 '같은'을 조사로 처리하지 않는 이유는 '같은'에 '같다'의 의미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이 '같다'의 활용형임을 의미한다.

      천사 같은 마음씨 ← 마음씨가 천사와 같다.

활용형이 조사로 굳어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이런 경우에는 의미의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부터'는 옛말 '븥-+-어'에서 온 것인데 원래 '의지하다, 근거하다'를 뜻하다가 조사가 되면서 '출발지'를 나타내는 말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이같이'의 '같이'의 경우도 '동일하다'의 의미에서 조사 '처럼'의 의미로 바뀌었다. "이같이 좋을 수가?"를 "이처럼 좋을 수가?"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것도 '같이'의 의미가 변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같은'의 경우는 이런 의미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조사로 처리하지 않는다.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명(耳鳴)/피 귀 자  (0) 2021.07.29
태양이 없는 그림 / 이정림  (0) 2021.07.28
구두/조일희  (0) 2021.07.27
구두 계용묵  (0) 2021.07.27
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 이정림  (0) 2021.07.27

구두/조일희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한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가 솔직히 탐이 났다. 나와 어울리는지, 잘 맞는지 생각지도 않은 채 덥석 구두를 신고 첫길을 따라나섰다. 새 구두가 편해지기까지는 조율의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맞춘 듯 편안한 신발도 있겠지만, 구두 뒷축과 발꿈치가 부대껴 상처가 나는 구두도 있다. 서둘러 떠난 첫길 초입부터 구두는 까탈을 부렸다. 뒤꿈치가 까지고 선홍색 피가 맺히는 날이 자주 생겼다. 시간이 지나도 새 구두는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사랑이 결핍된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그의 상처의 시원始原은 알고 있었지만, 상처를 보듬기엔 내 마음의 소沼가 깊지 않았다. 그 사람 또한 내 아픔의 원천인 빈곤한 친정에 대해 마음을 나누기보다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서로의 이기利己로 택한 삶 속에서 사랑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었다. 그는 돌개바람처럼 밖으로 나돌며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술로 채웠고, 외로움으로 하루를 채운 나는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허허로운 거리를 걸었다.

 

 아침이 오면 세상의 찌꺼기가 묻은 그의 구두를 솔로 털어내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정성스레 닦았다. 그러다 보면 서걱거리는 우리 사이도 윤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언제부턴가 그의 구두 끝이 바깥을 향했다. 밖으로 새는 건 그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내 얼굴에서 어두운 기미라도 보이는 날이면 그는 상처를 들킨 짐승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술로 보내는 날이 달포 해포 이어지며 그는 휘뚝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정신이 아득해져도 틀어진 구두를 바로잡으러 열심히 구두를 닦았다. 걸을 줄 모르는 앉은뱅이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그의 구두를 만지고 또 만졌다. 언젠가 제 모양으로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 실날같은 희망을 품고서. 어쩌면 구두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인연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 흔들리는 마음을 닦듯 매일 구두를 닦았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남편의 구두는 밖을 헤매고 있었다. 소파에 기댄 채 설핏 잠이든 모양이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전화기 속 낯선 남자가 일러준 유희의 골목을 서너 바뀌 돌고 나서야 지하주차장 입구에 퍼져 있는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푸푸거리며 자고 있는 그를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뒤돌아서서 나오고 싶었다. 시시포스 형벌처럼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이 두렵고,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또 무서웠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보이지 않던 그의 구두가 희미하게 보였다. 찌그러진 구두를 옆에 벗어두고 잠들어 있는 그는 신발만 벗어 놓은 게 아니었다. 자존감과 체면까지 어두운 바닥에 내던져버린 거였다. 그 순간, 벗어던진 건 구두가 아니라 나와 아이구나, 저 구두처럼 우리는 차가운 바닥에 내던져 있구나, 나를 눌렀던 어둠의 실체가 섬광처럼 보였다.

 

 허방다리를 짚고 살았다는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두려움을 먹고사는 어둑서니처럼 나는 긴 세월을 두려움과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살았다. 육신의 안락함을 위해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살았다. 후회의 눈물이 마른 가슴으로 흘러내렸지만 누굴 탓하랴. 화려한 구두를 신은 건 나의 선택이었거늘. 구두끈을 묶은 것도 나였으니 푸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십여 년을 끌고 다니느라 구겨지고 금이 간 구두를 벗어던졌다. 지난 세월이 어제 일인 양 스쳐 지나간다. 어울리지도 않은 구두를 신고 언틀먼틀 길을? 부단히 걸어왔다. 억지로 구겨 넣은 발은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어 여기저기 흉터투성이였다. 뒤돌아보니 디뎠던 자리마다 퍼런 발자국이 선명하다. 우묵하게 패인 자국에 거무스레한 어둠만이 담겨 있었다.

 

 어느덧 상처는 단단한 옹이가 되고 여문 옹이에서 용기라는 싹도 움텄다. 살아온 세월을 톺아보면 가끔 상처가 꽃으로도 보인다. 이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보냈던 날을 평온하게 보낸다. 쌓였던 아픔을 조금씩 밖으로 드러내자 뾰족한 상처의 편린들이 쏟아진다. 가시처럼 콕콕 찌르던 아픔은 희망을 쓰는 촉이 되어 어설프게나마 글 마당을 거닐게도 한다.

 

 하루해가 저문다. 노을빛 저녁 풍경 속으로 사붓사붓 걸어가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낡지만 편안한 구두 한 켤레로 남아도 좋을 인생길이다.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양이 없는 그림 / 이정림  (0) 2021.07.28
같이, 같은  (0) 2021.07.27
구두 계용묵  (0) 2021.07.27
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 이정림  (0) 2021.07.27
쫓겨난 아담/유치환 (유치진은 그작가 (형)  (0) 2021.07.27
구두


     계용묵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귀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으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큼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번 힐끗 돌아다 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락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 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한참 석양 놀이 내려퍼지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 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부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휑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나로서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작자 : 계용묵(桂鎔默 19-4-1961) 소설가.
형식 : 경수필. 희곡적 수필
성격 : 희극적. 감상적. 서사적. 신변 잡기적
표현 : 간결한 문장에 의성어를 적절하게 구사하여 긴장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했다. 희곡적 사건에다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사건의 배경과 필자의 소신을 진술하는 구성을 보인다. 구두의 '징'이라는 금속성의, 비인간적인 것의 상징성과 인간의 감정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재 : 구두
주제 : 인간관계가 왜곡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과 세심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세태 개탄.
구성 :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 이정림

돌샘 이길옥추천 0조회 720.11.29 14:13댓글 0

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이정림


1. 체험의 재구성과 창조성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일상 생활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고 겪는 모든 일들이 수필의 소재가 되는 만큼 일상이 없으면 수필도 없다. 일상의 일들은 우리의 의식 과정을 통해 모두 체험으로 축적되고, 그 체험은 수필의 소재로서 동원되고 취택된다.

그러나 체험만 가지고는 수필이 될 수 없다. 수필이 체험으로만 구성된다면 논픽션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논픽션은 문학이 아니다. 거기에는 문예적인 향기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사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기는 하지만, 그 체험에 문예적인 요소를 더해야만 문학이 될 수 있다. 수필이 문예적인 산문이 되기 위해서는 비유나 상징 같은 표현상의 기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수필에 상상(想像, imagination)을 부여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역사가 기억에, 철학이 이성에 의지할 때, 문학은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상상은 실재하는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자기만의 창조적인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 상상이 한낱 공상(空想)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상상조차 사실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사실 체험에서 부족한 것,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감성적으로 유추해 보는 그 창조적 상상은 수필에 문예성을 부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필에 읽는 재미를 더해주게 된다.

공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 꽃들을 꺾을 수는 없다. 꺾을 수 없는 이유는 공원의 규칙일 수도 있고 자신의 도덕적인 양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약 그 꽃을 꺾는다면 누구에게 줄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 꽃을 받고 행복해 할 사람의 모습도 함께 떠올려 본다. 이런 상상은 작가 혼자만의 기쁨일 수도 있으나,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재미와 흥미를 준다. 상상이 체험의 한계성을 극복하며 그 체험을 재창조하게 될 때, 일상의 평범한 체험은 일약 문학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2. 수필에서 상상의 처리
영국의 조지프 에디슨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상은 감각적 체험을 심상으로 파악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 심상을 만들어 보고, 또한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상상은 사실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꾸밀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이라고 하였다.

소설이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 심상을 만들어보고, 또한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본질은 상상, 즉 허구이다. 그 허구가 어느 정도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해도 소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허구이기 때문에 그 허구 속에 내재된 실제마저도 허구로 간주되는 특성이 있다.

완전 허구이든 부분적인 허구이든 소설은 그 구성이 허구임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수필 속에 내재된 상상의 요소가 반드시 상상임을 밝혀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수필과 소설이 상상을 처리하는 수법에서 동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이다.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에는 '하나의 환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글이 소설이라면 이런 친절한 부제는 붙일 필요가 없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수필에서는 반드시 상상이 상상임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램이 아들딸을 앞에 놓고 증조 할머니와 큰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 떠난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눈앞에서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가 아니오, 당신의 아이도 아니오.(…)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트럼을 아버지라 부른다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오, (…) 그저 꿈이라오. 우리는 단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것에 불과할 뿐이오.

찰스 램은 다음 문장에 곧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상상이었음을 친절하게 밝힘으로써 독자의 혼란을 막아준다. "바로 잠을 깨 총각 신세인 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던 거다."

만약 이 글이 콩트라면 이런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리고 소설의 독자라면 이야기의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필에도 허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이 글을 수필에 허구를 도입하여 재미있게 체험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텍스트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글은 수필에서도 상상을 수용할 수는 있으나, 그 상상이 상상임을 밝힐 때 비로소 수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해주는 좋은 텍스트가 될 뿐이다.

우리는 김동인(金東仁)의 <수정 비둘기>를 수필로 분류한다. 이 글의 주인공은 "무거운 병에 시달린 외로운 젊은이"이다. 이 3인칭 젊은이가 어떤 집 앞에서 열두세 살 난 소녀를 만나 대화체로 이야기를 건네고, "소녀의 맑고 아름다운 눈에 감격"되어 자기 시계 줄에서 수정으로 새긴 비둘기를 떼어 소녀에게 주는 과정을 소설적인 수법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다분히 콩트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마지막 두 문장이 이 글을 수필로 간주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있던 나는, 한번 기지개를 하고 일어났다. 바야흐로 무르익은 봄날, 곳은 모란봉 중턱에 있는 어느 조용한 곳이었다.

그러나 3인칭으로 끌어오던 이 글이 결미에서 일인칭인 "나"로 끝을 맺었다고 해서 이 글을 수필로 분류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소설에서도 주인공을 "나"라는 일인칭으로 내세울 수가 있는데, 그럴 때 일인칭인 "나"는 작가와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정 비둘기>를 수필로 분류한다고 한다면, 수필에서는 상상이 상상임을 밝혀야 한다는 이론에 부합될 수 있는 좋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또 하나 예문으로 들만한 글로는 김상용(金尙鎔)의 <그믐날>이다. 이 글 역시 "심성이 원래 지기를 좋아해서 빚을 진 것은 아닌" '그'라는 3인칭이 주인공으로 되어 있다. 외상값을 독촉하는 빚쟁이들에게 "그는 '그믐'이란 안질 환자의 파리채로 빚쟁이들을 쫓아버렸"지만, 그 그믐날이 온다 해도 빚을 갚을 만한 뾰족한 기적이 생길 리가 없다. 그래서 늦게까지 다방에 죽치고 있다가 귀가해보니 뜻밖에도 50원이라는 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전에 꾸어준 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구세주를 만난 듯 그 50원을 가지고 한밤중에 호기 있게 빚쟁이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 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에겐 지금 공복도 피로도 없다. 포도를 울리는 그의 낡은 구두는 개선 장군
의 발굽보다 우렁차다.(…)
"문 열우" 하고 또 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
"내요. 돈 받으소. 아까 왔더라는 걸. 어∼ 마침 친구에게 붙들려서…. 하하, 친구에게 붙들리면 어쩔 수가 없거든…."/ "그렇습죠! 하하!"(…)
"어∼한데 사람이란 준다는 날은 줘야지! 그렇지 않소. 어∼ 한데, 모두 얼마더라…."
S상점의 셈을 마치고 다시 개선 장군의 말굽소리를 내며 그는 다음 상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태준(李泰俊)은 이 글을 수필로 보며 "그라 하였으나 아마 자기임에 틀림없을 것"(이태준, ≪문장강화≫ 서울, 범우사, 1995, p. 137)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했던 1940년대 지식인들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한 심중일 뿐, 이 글의 내용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글을 전개해나가는 수법과 주인공의 성격이 매우 소설적이어서 오히려 콩트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

수필의 다양한 표현 수법의 일환으로 3인칭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는 있으나, 수필의 본질에서 이탈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3인칭이 작가 자신임을 밝히는 장치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김상용의 <그믐날>을 수필로 분류하는 당위성은 매우 희박할 수밖에 없다.


3. 작품의 실례
이제 본인의 수필 중에서 상상의 요소가 크게 차지하는 작품을 실례로 들어볼까 한다.
어느 날 버스를 탔더니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이 승강구에 붙어 있었다. 그 전단 속에는 실종된 사람의 사진이 한쪽에 들어 있었는데, 흔한 명함판 사진이 아니라 빨간 달리아 꽃들이 성큼 피어 있는 화단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흰 벽돌을 비스듬히 세워 화단을 만든 그 소박한 마당이었다.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을 본 내 객관적인 사실과 체험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나는 이 사진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본 것이다.

이 사진을 찍었던 어느 해 봄, 어쩌면 사진 속의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화단
에 꽃씨를 심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종삽을 들고 채송화와 나팔꽃 같은 순박한 꽃씨를 흙 속에 묻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질 그의 화단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으리라. 그리고 그 옆에서 잔시중을 들고 있던 그의 아내는 고운 흙에 촉촉이 물을 뿌리면서, 행복이란 결코 크고 화려한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봄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 드디어 그들의 화단에는 다투듯 꽃들이 피어났다. 이른 봄 정성어린 손길로 심었던 씨앗들이 그 가정에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남자는 작은 사진기를 가지고 그 꽃들 앞에서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었으리라. 처음에는 꽃보다 예쁜 자기 아이들을 화단 앞에 세웠을 것이다. 다음에는 그 아이들을 양팔에 안은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찍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그 자신도 사진이 찍고 싶어졌을까. 그는 배우처럼 멋진 포즈를 취하고 꽃 앞에 섰다. 하늘을 쳐다보면 더 멋있지 않을까. 팔을 늘어뜨리기보다는 팔짱을 끼는 편이 더 근사해 보이겠지. 그렇게 남자는 자기 연출을 하면서 화단 앞에 섰고,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렌즈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남편이 아닌 행복을 찍었을 것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그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고 전단 속의 사진은 그렇게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실종(失踪)>(1992)

이런 상상은 사진 속의 남자가 단순히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멍에에서 탈출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래성을 찾으러 가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그리고 현대는 우리의 도덕성과 신뢰성은 물론, 진실과 사랑마저도 상실토록 부추기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정녕 실종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미를 도출하고 있다. 상상이 간단한 체험에 작가적인 호기심과 주제를 부여하면서 <실종(失踪)>이라는 무거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때 국가적인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많은 가장들이 실직을 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를 떠돌며 노숙자의 신세로 전락을 한 일이 있었다. 이 기막힌 현실을 글로 형상화하기에는 내 개인적인 체험은 너무도 빈약하였다. 그래서 나는 상상이라는 수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심중을 헤아려 보았다.

아버지들은 그러고 싶어도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내의 눈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니면 지하도 맨바닥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달려온 숨가쁜 세월,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였다면, 그들은 아마 일찌감치 그 고된 삶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가는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를 가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뱉고 싶은 말도, 모두 버리고 참았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는 좀생원이 되었어도, 그런 비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상사(上司)의 모욕적인 말도 저녁때 한잔 술로 풀어내면 귀는 다시 깨끗해졌다. 내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아이들만 잘 기를 수 있다면 아비의 자존심 따위가 무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버지들이 의욕을 상실했다.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육체를 지탱케 해주는 것은 의욕이요 희망인데,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드는 것은 무기력일 뿐이다. 무기력은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이젠 더 이상 체면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무료배급소에서 밥을 타 먹는 두 손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뿐이다.


―<태양이 없는 그림>(1998)

이 <태양이 없는 그림>은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하루아침에 가정이 붕괴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어 가는 삭막한 현실을 상상의 수법을 통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 글이다. 이 글에서 상상은 극한적인 현실을 문예적으로 승화시키는 또 하나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결미
우리의 체험 세계는 매우 한정적이고 빈약하다. 그래서 수필은 재미가 없다고들 말한다. 소설처럼 마음껏 또 재미있게 이야기를 꾸며댈 수 있다면 그런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수필과 소설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으로 수필은 그 돌파구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은 수필의 한계성을 극복시켜 줄 수 있는 좋은 표현 수단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에서 상상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이라는 본질을 편협하게 해석한 때문이다. 수필이 체험의 문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체험의 기록만은 더욱 아님으로 우리는 그 표현 기법의 다양성에 대해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체험은 허구가 아니다. 수필 속의 상상은 그 체험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수필의 상상은 허구가 아니다. 상상이 수필의 본질에서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상상은 수필에서 창조성을 지니는 매우 매력적인 표현 수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4)

● 필자 소개 : 이정림(李正林)
『수필문예』로 등단(1974)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1976)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강사(2002∼2003)

계간『에세이 21』 발행인 겸 편집인
한겨레문화센터 수필 강좌 출강
마포평생학습관 수필 강좌 출강

수필집 『당신은 타인이어라』(1986, 범우사)
『산길이 보이는 창』(1991, 범우사)
『숨어 있는 나무』(2000, 범우사)
수필선집 『하얀 진달래』(1999, 선우미디어)
4인수필집 『시간의 대장장이』(2006, 선우미디어)
평론집 『한국수필평론』(1998, 범우사)
『한국수필평론』개정판(2002, 범우사)
이론서 『인생의 재발견-수필 쓰기』(2007. 랜덤하우스코리아)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조일희  (0) 2021.07.27
구두 계용묵  (0) 2021.07.27
쫓겨난 아담/유치환 (유치진은 그작가 (형)  (0) 2021.07.27
등나무 집 형님 /반숙자|(서간수필)  (0) 2021.07.27
두레박 金巢雲 비평수필  (0) 2021.07.27

쫓겨난 아담

 

 

지난 가을 서울에 갔을 때, 어떤 소간(所幹)으로 신촌 이화대학을 찾아가 본 일이 있다. 그 부근은 내가 연전(延專)에 다닐 때 많이 걸은 곳이지만 근 30년 전 일이라 그 당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래야 볼 수 없을 만큼이나 변했고, 다만 이대 앞 기차 터널이 그때 그 터널이거니 하고 겨우 짐작이 갈 뿐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대도 거기에 서지 않았고 아현동을 넘어와서는 집 한 채 없는 산골짜기였다. 마침 이대를 찾아간 때는 오후 네 시경의 하교 시간이어서 버스를 내려 교문에 이르니 갖은 복색을 한 이제 한창 청춘이 꽃피는 젊은이들이 책이며 가방들을 들고 제각기 재잘대며 쏟아져 나오는 판이었다. 이 숱한 젊은 여인들! 모두 알맹이가 꽉꽉 충실하여 있는 젊음의 향취와 빛깔! 이제 피어나는 젊은 여인이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인가? 더구나 그들의 어딘지 지식에 충족스런 듯한 모습과 빛나는 검은 눈매들을 볼 때 흡사 백화요란(百花燎亂)한 꽃동산에나 들어온 거와 같은 황홀함에 발을 멈추고는 못내 감탄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 자신 말 못할 서글픔 속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내가 그 꽃 같은 청춘에는 참렬(參列)할 수 없는, 이제야 선망(羨望)도 미칠 길 없는 포기된 자신을 다시 고쳐보는 허무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구내를 들어서니 자욱한 수풀에 에워있는 정결한 건물들 ─ 철따라 우짖는 새 울음소리도 바람 소리도 창으로 들려오리라. 이렇게 한적 속에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그 청춘들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행복한 전당에서도 이미 쫓겨나지 않았는가? 돌아보아 내게도 그러한 황홀스런 청춘이 있었으리라. 30년 전 ─ 그러나 반드시 있었을 것임에도 틀림없건만 아예 없던 것만 같다. 너무나도 소홀히 써버린 그 회한이 또한 가만히 가슴을 헤집고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입맛 쓴 회한과 허무감을 느끼며 돌아나오려니 문전 가까이 이미 낙엽진 높다란 한목(寒木) 위에 펼쳐 있는 푸른 하늘, 그 하늘이 마음 깊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거기에 무한한 안심과 위자(慰藉)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문득 이 아래를 무수히 지나다닌 그 젊은이들도 나와 같이 저 하늘의 푸름에 마음이 끌릴 것인가고 생각이 미치는 것이었다. 아니리라 ─ 아니리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네들 청춘은 자신들 안에 너무나도 많은 고운 것들로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미처 외부엔 눈이 팔릴 겨를이 없지 않겠는가? 파아란 하늘이라든가 무한이라든가 종교 같은 것에 마음이 끌리고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것은 이미 자신에게서 자신을 잃은 인생, 오후의 석양에 이르른 그때가 아니겠는가?

사회 : 고맙습니다. 그럼 먼저 우연하게도 청마의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시단의 후배이기도 한 유경환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유경환 :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를 패러디해서 말한다면 ‘상실하였으므로 아름다웠노라’가 사회자께서 맨 처음 주문하신 이 글의 주제라고 봅니다. 그러한 자기 주장을 전개한 글이지요. ‘포기된 자신’, ‘쫓겨나지 않았는가’, ‘소홀히 써버린 회한’, ‘자신을 잃은 인생’, ‘오후의 석양’ 이런 다섯 가지 표현 속에 전부 상실이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청춘,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아쉬움, 그러니까 청춘 예찬 플러스 부러움, 청춘 허송 플러스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춘을 알차게 지내라는 교훈성이 숨은 메시지도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진식 : 이 글은 삶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이대 학생과 50대 초반의 자신, 젊음이 갖고 있는 생명력과 늙어감으로써 비로소 다가오는 푸른 하늘, 거기서 느끼게 되는 철학적인 종교적인 느낌, 그런 것들의 명암, 즉 삶의 명암을 대비시켜 그것을 주제로 삼았다고 봅니다. 저는 유치환 선생님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1963년에 부산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이분은 두어 시간을 같이 앉아 있어도 서너 마디 밖에 하시지 않는 과묵한 분입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내내 좌절의 인생을 사신 분인데, 이 글에서 그러한 자신의 불우한 과거, 즉 자신의 젊은날의 지나간 삶을 다듬지 않고 너무 많이 노출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 그러니까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이 글이 ‘좌절의 회한이다’라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말해도 동의하십니까?

김진식 : 예, 그렇습니다.

정선모 : 저는 이 글의 제목에 주제가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쫓겨난 아담’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가버린 젊음에 대한 회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회한으로 끝내지 않고 ‘하늘’, ‘종교’, ‘무한’이라는 단어를 써서 그것으로 상징되는 영원을 위한 희구,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글이라고 봅니다. ‘충족’, ‘충실’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했고, ‘행복’, ‘황홀스런 청춘’ 등의 낱말로 젊음을 표현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회한을 나타내는 ‘쫓겨난’, ‘회한’, ‘허무감’, ‘자신을 잃은’이라는 낱말을 대비시켜서 자기의 심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 : 그런 점에서는 아까 유선생님과 비슷하군요. 유선생님은 대체로 상실의 미를 전제하면서 거기에 회고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이 동시에 있다고 하셨구요, 지금 정선생님은 회한과 희구, 그러니까 과거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을 동시에 축약했다는 말씀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세 분 말씀이 모두 과거에 대한 아픔을 되새기면서도 그것을 미화했다는 것에는 일치했습니다. 그러면 이 밖에 이 글의 주제에 대한 시각이 다른 회원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또 이 글의 제목에 ‘아담’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런 성경적 단어를 꼭 써야했는지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선모 : 조금 전 이 글의 주제를 말할 때 저도 그 제목에 주목을 했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이 글에 나오는 것이 여자대학이거든요, 그리고 또 이 글의 중간 부분에 ‘선망도 미칠 길 없는’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그러니까 젊음이라는 말속에 의욕, 패기, 꿈, 이런 것뿐만 아니라 이성에 대한 개념도 포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젊음이 가질 수 있는 사랑, 그것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이브’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아담’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김시헌 : 유치환 선생은 탐미적이었고 또 생명에 대한 시를 잘 쓰셨습니다. 그분이 이대에 와서 아름답고 생명까지도 발랄한 듯한 청년들을 바라보았을 때 이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자기에게서는 물러갔고 이미 모두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그 대신 위안을 찾습니다. 그것이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젊을 때는 그것도 감각적이고 충동적이고 탐미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영원이나 종교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까 관조기에 와서 이 작가가 자기 위안의 대상을 찾고 있는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임순 : 이 글의 배경이 된 시기가 바로 제가 학교에 다닐 때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글 제목에 왜 ‘아담’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일까 생각해 볼 때 제 생각에는 여자대학이라는 특수성에서 이분이 느낀 것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에 남자대학에 가면 ‘쫓겨난 이브’ 같은 심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인간으로서의 회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으로서의 회고적인 느낌, 그것을 여자대학에 가서 느끼고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지요. 아까 김시헌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분의 시를 보면 탐미적인 요소가 많고, 생명에 대해 굉장히 강렬한 글을 쓰시지 않습니까. 젊음을 잃었고 아담과 이브의 낙원에서도 쫓겨났지만, 다시 파란 하늘이라든가 무한, 종교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에 이상향을 제시한 글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절망을 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쫓겨난 아담은 그래도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을 강조한 글, 그러니까 생명력을 한층 더 불어넣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역시 상실은 생성을 뜻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전체 유치환 문학에서 이 글이 갖는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분의 4권의 수필집을 보면 이분의 수필에 산문시적인 구성이 많습니다. 단상이나 단편 같은 장르를 활용해서 시적인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유경환  : 흔히 시 ‘깃발’을 유치환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유치환 문학과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문학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 욕심 같아서는 시만 쓰고 수필은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도 해봅니다. 아까 사회자께서도 시적인 산문이다, 시적인 기운이 감돈다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얘기할 여지가 없습니다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목 위에 펼쳐 있는 푸른 하늘’이라는 표현은 시적 표현의 변형이지 산문 정신에는 어긋납니다. 산문 어법이나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지요. 또 하나, 젊음을 꽃으로 비교했는데 이것이 성숙하고 세련된 발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것도 완전한 시인의 시적 발상입니다. 여대생이라는 이미지와 꽃이라는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수법을 쓰고, 거기에 ‘여인’, ‘청춘’, ‘무르익은’ 그런 말들이 꽃에 대한 비유로 등장합니다. 만일 이분이 단순히 30년 전의 상실된 자아를 찾고자 했다면 자신이 다닌 연세대학에 가서 얼마든지 상실된 젊음을  재발견하려고 노력했을 것인데 구태여 여자대학에 가서 젊음이라는 것을 재발견하려는 형식을 취했다는 것은 젊음과 꽃에 대한 비유를 여대생에게 둔다고 하는 의도적인 뜻, 즉 시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이 글의 뒷부분에 가면 ‘그 젊은이들도 나와 같이 저 하늘의 푸르름에 마음이 끌릴 것인가… 아니리라… 많은 고운 것들로 충족되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젊어서는 마음에 빈자리가 없기 때문에 종교나 무한, 푸른 하늘, 영원 같은 것에 눈을 돌릴 수 없고, 그런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은 훨씬 나이를 먹어서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느끼는 것, 즉 인생에서 큰 결실을 얻지 못했고, 자아를 상실한 것 같고, 세월을 낭비한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이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다. 그 나이를, 그 과정을 지나봐야 종교나 무한, 영원 같은 것에 마음을 두는, 즉 비로소 인생을 다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 글은 그런 뜻으로 자기 합리화를 구한, 그런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글이 시로 쓰여지지 않고 산문으로 쓰여진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회  : 결국 시적인 이미지를 산문으로 형상화했는데 미흡했다는 말씀이지요. 산문이 시보다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정선모  : 이분의 여러 시집의 서두라든가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수필집 서문에 작품활동에 대한 본인의 자세를 밝힌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시인이 일부러 시를 낳으려고 애를 써야 되겠는가, 시라는 것은 저절로 고여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시와 산문의 엄격한 구별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분은 표현 방식이 시가 맞으면 시로 썼고, 산문적인 표현이 어울리면 산문으로 썼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웅장하고 남성적이고 힘찬 표현 방식이 어울릴 때 시로 쓴 것이고, 산문은 감상이나 정감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산문 형식으로 쓴 것이지요.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감상적이며 생활 속에서 느끼는 단상들인데, 이런 것이 인간의 면모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인이 밝혔습니다. 이 ‘쫓겨난 아담’은 비교적 소품에 속하지만 상실과 영원에 대한 희구가 이 글에서 잘 표현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산문의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넓은 의미의 이분의 문학 속에서도 이 글은 산문적 요소가 충분하기 때문에 비교적 수준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회 : 요컨대 단편적이고 잠언 적인 정감을 표현하는데 유리한 형식이 산문이고, 웅장하고 남성적인 정감은 이분이 시로 표현했다는 말씀입니까?

정선모 : 그렇습니다.

김진식  : 청마의 시에도 산문적인 기법을 사용해서 완성한 것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 ‘선한 나무’입니다. ‘진실로 현실은 한 그루 나무를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 빠개어 육신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 소리 생길 리 있으랴.’ 이것은 완전히 산문 형식을 빈 산문시입니다. 이렇게 청마의 시는 산문적인 색채가 강하고 그의 평론이나 서간문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이영도 여사에게 보낸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에 비해서 이분이 수필이라고 쓴 글들은 오히려 시가 잘 안 될 때 그냥 쉽게 내던지듯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사회 : 청마 수필 연구가 몇 분의 논문 가운데 참고할 만한 것이 있어서 잠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남송우 씨는 ‘청마 산문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논문 속에서 청마의 수필은 단상, 일기, 여행기, 칼럼, 자연 예찬, 서한 등 여섯 가지이다 라고 했고, ‘청마 산문의 숨결’이라는 논문 속에서 박철석 씨는 청마의 수필을 크게 단상적인 것과 칼럼적인 것으로 양분했습니다. 칼럼을 2대 지주의 하나로 한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또 조연현 선생은 ‘청마의 문학과 인간’에서 『예루살렘의 닭』 같은 데서는 잠언과 산문을 구별하기가 힘들 만큼 혼합상태에 들어가 있었다고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시헌 :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나를 두고 의지의 시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나를 잘못 본 것이다. ‘바위’ 같은 시를 보고 바위 같은 의지, 불변, 그런 것을 내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줄 알지만 난 사실 그 반대이다. 나는 늘 불안해 하고 흔들리고 방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정지시키고 바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작 평론가들은 자기를 의지의 시인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진권  : 저는 이 글을 읽고 공감이 별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포기된 자신’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이든 남자가 여대에 가서 아름다운 처녀애들을 보고 나는 이제 저런 애들과 연애도 한 번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그런 말을 쓴 것인지, 혹시 그렇다 해도 이제 쉰이 남짓한 남자의 표현으로서 ‘포기된 자신’이라는 것에 공감이 안가는 것입니다. 다소 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또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저는 오히려 대학에 다닐 때 푸른 하늘이라든지 무한, 종교, 영원, 그런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생각하기도 싫어지고 잊혀지기도 했는데, 이 글에서 보면 저하고는 거꾸로입니다. 이 글에서는 젊은애들은 속이 다른 것으로 차 있기 때문에 파아란 하늘이라든지 무한, 종교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자신을 잃은 오후의 인생, 50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공감이 안 가는 것입니다. 또 젊은애들이 자신들 안에 너무나 ‘많은 고운 것들’이 충족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파란 하늘이나 그런 것들은 ‘많은 고운 것들’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저는 잘 몰라서 공감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회 : 그러니까 이미지를 다양하게 구사했는데 통일된 것을 얻지 못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정진권 : 물론 수필이라는 것이 각자 자기의 체험을 쓰는 것이지만 저하고는 그 체험이 달라서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사회 :  젊은 측에서 한 번 말씀해보시지요.

최순희 : 지금까지 여기서 작고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다루었는데 그런 것들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저는 상당히 이 글에서 공감대가 많았습니다. 지금 정선생님의 말씀대로 파란 하늘이나 무한, 종교 같은 것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서 젊은 시절에 더 많이 탐구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그 문장을 따로 떼어내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외적인 다른 것을 보는 눈 같은 것, 외적인 다른 것에 대한 관심 정도로 뭉뚱그려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잖습니까. 자신이 언제 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는가 할 때, 꽃놀이에 관심이 없어지고 단풍놀이에 더 관심이 있어질 때라는 말 말입니다. 이 글에는 그런 인생의 흐름이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거기에 공감을 하며 읽었습니다. 나이를 먹어 가는 사람이 젊은이들을 볼 때, 즉 나이 든 남자 분이 여자대학에 가서 여대생들을 보며 거기서 느끼는 쓸쓸함, 그런 것에 공감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러했습니다.

 

사회 : 제가 보기에 수필이다, 시다 해서 장르의 차별성은 현격하지만 그 이미지의 구사는 상당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깃발’에 나오는 이미지와 이 수필에 나오는 ‘파란 하늘’, 또 ‘나는 고독하지 않다’의 첫 줄이 ‘오늘도 나는 나의 생명이 누리고 있는 저 무궁의 푸른 하늘을 보고’로 시작되는데 쓰는 차이는 있지만, 이미지는 공동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경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경환  : 시적 표현이라든가 시적 기교, 시적 구성에서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 않고 생략이 됩니다. 그런 기법으로 시가 쓰여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쓰여진 시를 통해서 유치환 문학을 감지할 때는 한 차원 높은 유치환 문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문으로 구체화시키고 노출시켜 놓으니까 모든 것이 다 드러나 그의 문학이 평가절하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쉽고 섭섭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아까도 유치환의 시만 존재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문 구사 방법과 시적 구사 방법에는 차이가 있고 일치하지 못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김진식 : 구조적으로 저는 사회자가 말씀하신 것에 공감을 하는 편입니다. 시에는 대구(對句)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 이 글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신촌 대학가, 젊은이들의 아름다움, 여학생들의 생명력 등을 말하며 자기의 회한과 허무감을 피력했고, 자연과의 교감, 새 소리, 바람 소리 그런 것의 상대로 30년 전의 자기, 또 ‘한목의 푸른 하늘’의 상대로 ‘무한한 안심과 위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런 상대적 접근은 청마의 시 ‘바위’나 ‘울릉도’ 등에서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즉 긍정과 부정, 명암을 교차시키는 그 수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지금 토론을 하다 보니 우리가 제3제에서 토론할 부분도 이미 상당히 나오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제안한 것이 이 글의 기교와 구성 문제였습니다. 먼저 약정한 분들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정선모 : 이 글의 구성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단순 구성입니다. 여자대학에 가서 보고 느끼는 부분이 첫번째 부분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전형적인 수필의 형식을 취했다고 봅니다. 기교 면을 보면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아현동을 넘어와서는 집 한 채 없는 산골짜기였다’ 도 이해는 하지만 어색한 문장이었고, 첫 단락의 끝부분에 나오는 ‘참렬할 수 없는’, ‘미칠 길 없는’, ‘포기된 자신을 다시 고쳐보는’ 등의 중복 문장 때문에 의미가 선명하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또 이 글의 마지막에 ‘마음에 끌리고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것은…’도 ‘마음에~ 마음에’가 중복되어 오히려 그 의미가 더 애매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그리고’, ‘그리고는’, ‘그러한’, ‘그러나’ 등의 접속사가 남발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많이 퇴고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쉽게 써 내려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김진식 :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이 여기에 해당이 되겠습니다. 즉 구조적으로 이 글은 명암이 상호 의존적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글 쓴 의도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 글의 문장구성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청마가 시에서는 무척 엄격하고 퇴고도 많이 하는데 산문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 도입 부분과 끝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산만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쓰고 싶은 푸른 하늘, 영혼, 종교 같은 허무의지를 쓰기 위해서 어법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유경환 : 이 글은 200자 원고지 6장 정도의 분량입니다. 짧은 수필이지만 문단을 4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단 구성의 기본 공식, 즉 기, 승, 전, 결을 정확히 맞추어 썼습니다. ‘기’에 해당하는 것이 이대라는 무대 설정이고, ‘승’에 해당하는 것이 여대생을 보고 황홀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소홀히 써버린 그 회한이고,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 역시 나이가 들어야 인생을 알 수 있다고 쓴 부분입니다. 기승전결의 문단 형식에 딱 들어맞는 구성입니다. 기교 면에서 이 글을 보면 이 글은 당시의 문장 스타일로 보면 무척 깔끔한 글입니다만 오늘날의 문장 기준으로 보면 토씨를 생략할 부분이 많습니다. 또 이 글 가운데 표현에서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가정법을 쓴 부분입니다. 자기가 지금 이대 교정에 들어와 있는데 ‘들려오리라’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발상이고 산문정신에는 어긋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진권 : 유경환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집 한 채 없는 산골짜기였다’가 서두이고, 끝부분 ‘파란 하늘이라든가…’부터가 결에 해당됩니다. 또 표현에서 ‘검은 눈매’라는 말이 나오는데, ‘눈매’라는 것은 부드럽다든지 싸늘하다든지 하는 수식어를 받는 말이지 검다든가 빨갛다든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끝부분에 ‘그네들 청춘은 자신들 안에 너무나도 많은 고운 것들로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에서 ‘것들로’는 ‘것들이’로 되어야 문법이 맞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지요.

이응백  : 유경환 선생님이나 정진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글은 4단계로 나뉘어져 좋습니다. 또 ‘검은 눈매’라는 표현은 나는 정선생님과는 반대로 그 당시의 순수함이 살아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목’이라는 단어는 갑작스럽게 갖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위의 분위기로는 한목의 캠퍼스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또 ‘파아란’은 ‘파란’이라고 해야 합니다. 요즈음 철자에는 장음이 없습니다.

구양근 : 제가 여대에 있기 때문인지 저는 모처럼 아주 감명 깊게 이 글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오빠 같은 느낌이 들더니 이제는 아버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읽고 쓸쓸했습니다. 석양을 등진 노신사의 모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구성과 기교 면에서 이 글을 볼 때는 너무 짧다는 느낌입니다. 또 지금 우리에게 맞지 않는 생소한 단어, ‘소간’이라든지 ‘참렬’, ‘위자’ 같은 것들이 나와서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공덕룡 : 이 정도로 하나의 작품이다, 수필이다 할 수가 없습니다. 역시 유치환 선생은 시가 좋습니다. 지금 몇 분이 이 글이 기승전결의 공식에 맞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물론 그렇게 갖다 붙이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한 문단이 너무 길어서 답답한 느낌이 드는 곳이 많고, ‘소간’이니 뭐니 하는 어휘의 선택도 이상하고 어색한 표현이 많습니다. 나는 역시 다시 유치환 선생의 시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송규호 : 문장에서 아까 어느 분이 너무 어려운 말이 많다고 하셨는데 그런  단어는 그 당시로서는 보통 사용되던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문장이 길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한 문장의 길이에 대해서 저도 가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한 문장이 아무리 길어도 200자 원고 용지 4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 다음에 여러분의 고견을 한번 듣고 싶습니다. 저는 이 글의 맨 끝 대목이 마음에 듭니다. ‘황혼의 나이가 되어 보니 인간이 너무 아름다운 것만 쫓다가 이 나이가 된 것 같다, 너희들도 내 나이가 되어 보아라. 이 마음을 알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회 : 시간이 어느덧 80여 분이 지났습니다. 우송 선생님께서 이 글의 종합적인 인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김태길 : 종합적이랄 것도 없습니다만, 나는 유치환 선생이 우리 나라 문학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선입견을 떠나 우리보다 조금 먼저 사신 분의 수필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은 이분이 시인의 주관으로 이대 캠퍼스를 보고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냉철한 관찰 속에서 학생들의 마음 속이라든가 그런 것을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시인의 주관으로 상상하고 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좋게 말하면 순진무구한 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잇살이나 먹어 가지고 여대 캠퍼스에 가서 나는 이제 저런 아이들과 연애도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쓰는 것이 무척 쑥스러운데, 그런 것을 쓴 것을 보면 어린애 같은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쁘게 말한다면 유치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같은 것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 사회자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글에서 ‘한목’이나 ‘푸르름’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청마가 이 글을 쓸 때가 어떤 분과 열렬할 때라서 정서적으로 그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숫자상의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 이제 합평회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약정하신 세 분의 말씀을 대강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글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상실의 미, 좌절의 회한과 희구, 강렬한 탐미의식과 생명의식이 배어 있는 수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다음 이분의 전체 문학에서 이 수필을 조명하는 시각에서는 대체로 시적인 이미지의 구사가 있었다, 이 산문은 그의 시보다는 못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시와 산문의 기능이 적절히 교차되었고, 이미지를 공용해서 상당한 기교가 보이는 작품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성과 기교 면에 대한 토론에서는 중복과 애매한 어법, 접속사의 남발, 어법의 잉여, 토씨의 과용, 산만, 퇴고의 미비 등의 단점을 지적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전형적인 구성이고 기승전결을 잘 갖춘 좋은 구성이었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오늘 이 합평을 하기 전, 맨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제까지 많은 시인들의 수필을 가지고 토론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시인의 좋은 수필을 몇 분 더 골라본 뒤에 시인들이 쓰는 수필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 종합적으로 여러분과 토론, 합평할 날을 가져볼까 합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그리운 님 보고지고'는 '보고지고'라는 동일표현이 계속 나타나므로 반복법이 되지만 '형은 tv를 보고 나는 책을 읽었다.'에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와 같이 동일 문장성분이 앞 뒤에 나타나므로 이는 대구법이 지만 반복법은 될 수 없다고.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 계용묵  (0) 2021.07.27
수필의 체험과 상상에 대하여 / 이정림  (0) 2021.07.27
등나무 집 형님 /반숙자|(서간수필)  (0) 2021.07.27
두레박 金巢雲 비평수필  (0) 2021.07.27
꽃신/유경환 서정수필  (0) 2021.07.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