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의 전제
 
글을 쓰면서 무엇을 왜 쓰는가에 대해 착각하고 쓰는 일이 많다. 그것은 글을 쓰는 도중에 그 목적을 잠시 잃어버리고 쓰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올바르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다 보면 엉뚱한 글을 쓰게 된다. 처음에 쓰고자 하는 글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토끼를 그리게 된다.
글을 쓰려면 먼저 좋은 소재와 제재를 찾아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여 쓸 것인가를 정하고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의외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로서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수필만큼 쓰기가 어려운 글도 없다.
수필은 대개 A4지 2장을 그 양으로 하는데 적당한 기승전결의 구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서두에 쓰고자 하는 글의 내용과 목적을 간단명료하게 암시하는 도입 부문을 써야 한다. 간결하면서도 독자가 그 의도를 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서두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쓰게 되면 사전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곧 흥미를 잃게 된다.
 
따라서 도입 부문은 글을 쓰려고 하는 내용과 그 목적이 표출되어야 하고 간결하게 전제되어야 한다. 서두에 너무 긴 내용을 전제하면 독자가 다소 흥미는 느끼겠지만 이내 무엇을 쓰려는지 알게 되어 바로 싫증을 느끼게 되어 읽지 않게 된다. 따라서 도입부문은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요약한 글을 써야 하며 독자가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려는 동기 유발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내 싫증을 내고 읽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쓰려고 하는 것이 전제되면 그 전제된 것에 대하여 의미 부여를 하고 작가의 사상관이나 생각을 집약하여 쓰고 요약한 결론을 써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미 부여 부문을 과대하게 쓰거나 길게 쓰면 너무 문장의 구성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진다.
 
설명식의 글이 되어 아무 뜻이 없는 수필이 되고 인용을 많이 하거나 관련 자료를 많이 사용하면 좋은 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 많으면 백과사전이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글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수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수필 쓰기는 어렵다. 혹자들은 수필은 붓 가는 데로 쓰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수필만큼 쓰기가 어려운 글도 없다. 그래서 아무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어떤 글이나 다 쓰기가 어렵지만 매우 쓰기가 어려운 것이 수필이다. 너도나도 형식이 없는 글을 쓰고 모두 수필이라고 하지만 시나 소설을 제외한 모든 글을 수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수필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들은 비전문가가 쓴 글을 몇 줄만 읽어보아도 그 글이 어떤 글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은 잘못하면 서한문이나 일기가 되기 십상이고 잡문이 되기 쉽다. 수필 속에는 작가의 서정성과 미학이 있어야 하고 사상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인지 은은한 감칠맛과 작가의 품위가 살아서 숨쉬어야 한다. 아름다운 단어를 골라 써야 하고 표준어를 될 수 있는 한 써야 하며 쌍소리나 기호 숫자를 많이 섞어서 쓰는 것도 곤란하다고 본다.
 
또한 결론 부문을 쓰면서도 독자를 훈계하려고 하거나 교육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할 뿐이어야 하고 독자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교훈적인 말을 많이 쓰고 남의 좋은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하면 부끄러운 글이 되고 남의 글이 된다. 그 뜻도 잘 모르면서 필요치 않은 곳에 인용하면 오류를 범하게 되고 산만한 글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왜 쓸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고 쓰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제재를 올바르게 선택하여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 골라 쓰기를 해야 한다.
 
또한 자기 스스로를 높이거나 자랑하는 글을 쓰면 바보 같아 보이고 독자를 우롱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기 자랑을 하는 내용을 많이 쓰면 좋은 글이 되지 못한다.
 
객관적 입장에서 생각하고 파악하여야 하며 독자를 무섭게 보아야 하고 항상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한 이유는 글을 쓰는 사람보다 독자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쓰면서 혼자만 아는 체 하고 글을 쓴다든가 너무 길게 나열식으로 쓰면 식상하게 되여 독자가 절대로 읽지 않는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독자가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글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해 보면 수필 쓰기가 매우 어렵다. 모든 장르의 글이 다 어렵지만 A4지 2장에 작가의 사상관이나 우주관을 은은한 배경으로 깔고 적당한 구도를 유지하며 독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과 여유를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다 읽고 나서 참 잘 썼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하며 다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보려는 욕구가 많이 생겨나는 글일 수록 좋은 글이 된다. 그래서 수필 쓰기는 매우 어렵다.
 
수필뿐만 아니라 좋은 글은 아무나 쓸 수 없다. 항상 독자를 의식하고 써야 하지만 너무 치우치면 주체성 없는 글이 되고 무게가 없는 글이 된다. 따라서 적당한 공간과 간격이 유지되는 글을 써야 한다.
 
또한 너무 형식에 치우쳐 그것을 따르다 보면 뻔한 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앞에서 강조했듯이 무엇을 왜 쓰는가, 그리고 어디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구성하여 쓸 것인가를, 사전에 생각하고 써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딱딱한 중수필보다는 서정성이 있는 그리고 부드러움이 있는 모두에게 감흥을 줄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단어를 골라 써야 하고, 자기중심적 글보다는 독자 중심의 글이 더 좋은 글이 되며, 객관성 유지가 있는 글이 되어야 모두의 사랑을 받는 글이 된다.
 
그래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며 수필만큼 쓰기가 어려운 글이 없다. 
      
○ 무엇을 쓸 것인가의 사전계획을 수립하고 글을 쓴다.   

○ 좋은 소재와 제재 찾기를 우선하여
한다.   

○ 글쓰는 사람의 사상이나 철학, 우주관이 있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 기승전결의 구도가 없는 글은 서한문이나 일기장이
된다.   

○ 서정성과 미학이 있어야
한다.   

○ 독자를 훈계하려고 하거나 교육시키려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 자기의 의견만을 제시하는 선을 유지하고 해답은 독자에게
맡긴다.   

○ 글쓰기에서 자기를 높이면 그 반대가 되어 독자가 읽지
않는다.   

○ 때로는 독자가 더 많은 알고 있을 수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비표준어, 은어, 쌍소리, 기호, 숫자 같은 것은 되도록 삼간
다.  
 

○ 설명식의 글은 백과사전이 되기 쉽다.   

○ 일반적인 수필 쓰기의 분량을 지켜서(A4지 2장 내외)써야 한다.


 
 
 

문장은 간결하고 뜻이 분명해야 한다. 내용이 확실한 근거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주장이 분명한 글에서 말을 빙빙 돌리면 자신이 없어 보인다. 문장 끝을 돌린다는 것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중부정 문장은 자기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예1)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정말 고맙다.
예2) 그것은 신의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축복이었다.
예3) 더욱 지혜롭게 판단하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더욱 지혜롭게 판단하시기 바란다.
예4) 그런 일은 대학 연구소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대학 연구소가 적당하다.

예1)과 예2)는 자기 생각을 바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예3)은 자기 글에 자신이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며 예4)는 여운을 남기며 읽는 이에게 판단을 미루었다.

수식어를 피수식어 가까이 붙여 놓기

우리말은 관형어와 부사어가 다른 말을 꾸며 주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넉넉하게 해준다. 관형어가 체언을 꾸며 줄 때는 꾸며 주는 말(수식어)이 꾸밈 받는 말(피수식어) 바로 앞에 놓여서 관형어가 어떤 말을 꾸미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새 책'과 '학교 건물'이라는 단어에서 '새, 학교'가 그 다음에 오는 말을 꾸미고 있다. 부사어는 어느 특정한 말을 꾸며 주면서도 놓이는 위치가 자유롭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라는 문장에서 '다시'는 '돌아갔다'를 꾸며 주는 말인데도 아무 곳에나 옮겨 놓을 수 있다.

하지만 글에서 수식어가 피수식어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수식-피수식 관계가 모호해진다. 그러므로 논리를 펴는 글에서는 수식어를 덜 쓰는 것이 좋으며 수식어가 있을 때는 수식어를 피수식어 바로 앞에 놓아야 한다.

예1) 자동 커피 판매기 커피 자동 판매기

예2) 최근 법원의 보수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법원의 보수적인 최근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예3) 이런 경찰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경찰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예4) 하루에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수백만 원씩 쓴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하루에도 수백만 원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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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1. 어떤 모양이나 상태와 같이.

 

* 본 대로 / 느낀 대로 / 그린 대로 / 들은 대로 / 시키는 대로 / 아는 대로

 

2. (어미‘-는’뒤에 쓰여) 어떤 상태나 행동이 나타나는 그 즉시

 

* 집에 도착하는 대로 편지를 쓰다

* 내일 동이 트는 대로 떠나겠다.

* 여기선 아무 버스나 오는 대로 집어타도 돈암동까진 간다. 출처 : 박완서, 도시의 흉년

* 편지를 받는 대로 곧 오시오.

 

3. (어미 ‘-는’ 뒤에 쓰여) 어떤 상태나 행동이 나타나는 족족

 

* 기회 있는 대로 정리하는 메모

* 틈나는 대로 찾아보다

* 달라는 대로 다 주다

* 그는 급한 대로 대충 훑어보았다.

* 나는 그가 따라주는 대로 다 마셨다.

 

4. 어떤 상태가 매우 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

 

* 지칠 대로 지친 마음

* 약해질 대로 약해지다

* 그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 나는 친구를 골릴 대로 골려 주었다.

* 그의 신발은 해질 대로 해져서 더 신고 다닐 수 없었다.

 

5.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오다

* 들 수 있는 대로 들어라.

 

<데>

 

1. '장소'의 뜻을 나타내는 말.

 

* 의지할 데 없는 사람

* 예전에 가 본 데가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 지금 가는 데가 어디인데?

 

2. '일'이나 '것'의 뜻을 나타내는 말.

 

* 그 책을 다 읽는 데 삼 일이 걸렸다.

* 사람을 돕는 데에 애 어른이 어디 있겠습니까?

* 그 사람은 오직 졸업장을 따는 데 목적이 있는 듯 전공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3. '경우'의 뜻을 나타내는 말.

 

* 머리 아픈 데 먹는 약

* 이 그릇은 귀한 거라 손님을 대접하는 데나 쓴다.

* 이것도 다 써먹을 데가 있다.

 

 

즉, 대로 혹은 데로가 들어갈 자리에 즉시가 들어가서 알맞으면 대로

혹은 상태의 심함 정도를 나타냄은 대로.

 

그 외에는 데로.

 

=================================

 

그래도 어렵다.

그래도 그런대로(?) 상기 문장을 외워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모르면 그냥 둘 중의 하나를 붙잡고 쓸 수밖에 없겠지만

이왕이면 알고 쓰는 것이 더 아름다운 한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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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이대   -하근찬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깻바람이 날 일이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만 것이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갯마루에서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 건너 멀리 바라보이는 정거장에서 연기가 물씬물씬 피어오르며 삐익 기적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아들이 타고 내려올 기차는 점심때가 가까워 도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해가 이제 겨우 산등성이 위로 한 뼘 가량 떠올랐으니, 오정이 되려면 아직 차례 멀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연히 마음이 바빴다. 까짓것, 잠시 앉아 쉬면 뭐할 기고. 손가락으로 한쪽 콧구멍을 누르면서 팽! 마른 코를 풀어 던졌다. 그리고 휘청휘청 고갯길을 내려가는 것이다.

 내리막은 오르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고 팔을 흔들라치면 절로 굴러 내려가는 것이다. 만도는 오른쪽 팔만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왼쪽 팔은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있는 것이다. 삼대 독자가 죽다니 말이 되나. 살아서 돌아와야 일이 옳고말고. 그런데 병원에서 나온다하니 어디를 좀 다치기는 다친 모양이지만, 설마 나같이 이렇게사 되지 않았겠지. 만도는 왼쪽 조끼 주머니에 꽂힌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소맷자락 속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다. 그저 소맷자락만이 어깨 밑으로 덜렁 처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상 그쪽은 조끼 주머니 속에 꽂혀 있는 것이다. 볼기짝이나 장딴지 같은 데를 총알이 약간 스쳐갔을 따름이겠지. 나처럼 팔뚝 하나가 몽땅 달아날 지경이었다면 그 엄살스런 놈이 견뎌 냈을 턱이 없고말고.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하는 듯 그는 속으로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다.

 내리막길은 빨랐다. 벌써 고갯마루가 저만큼 높이 쳐다보이는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이제 들판이다. 내리막길을 쏘아 내려온 기운 그대로, 만도는 들길을 잰걸음 쳐 나가다가 개천 둑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었다. 한여름 장마철에는 들어설라치면 배꼽이 묻히는 수도 있었지마는 요즈막엔 무릎이 잠길 듯 말듯 한 물인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부터 물은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아져 갔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절로 잇속이 시려온다.

 만도는 물 기슭에 내려가서 쭈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 고의춤을 뜯어 헤쳤다. 오줌을 찌익 갈기는 것이다. 거울면처럼 맑은 물위에 오줌이 가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뿌우연 거품을 이루니 여기저기서 물고기 떼가 모여든다. 제법 엄지손가락만씩한 피리도 여러 마리다. 한 바가지 잡아서 회쳐 놓고 한잔 쭈욱 들이켰으면……. 군침이 목구멍에서 꿀꺽했다. 고기 떼를 향해서 마른 코를 팽팽 풀어 던지고, 그는 외나무다리를 조심히 디뎠다.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 다리였으나 아래로 몸을 내려다보면 제법 아찔했다. 그는 이 외나무다리를 퍽 조심한다.

 언젠가 한번, 읍에서 술이 꽤 되어가지고 흥청거리며 돌아오다가, 물에 굴러 떨어진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보았더라면 큰 웃음거리가 될 뻔했었다. 발목 하나를 약간 접쳤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이른 가을철이었기 때문에 옷을 벗어 둑에 널어놓고 말릴 수는 있었으나 여간 창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옷이 말짱 젖었다거나 옷이 마를 때까지 발가벗고 기다려야 한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팔뚝 하나가 몽땅 잘라져 나간 흉측한 몸뚱이를 하늘 앞에 드러내 놓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하는 수없이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얼굴만 내놓고 앉아 있었다. 물이 선뜩해서 아래턱이 덜덜거렸으나, 오그라 붙는 사타구니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곧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늘로 쳐들린 콧구멍이 연방 벌름거렸다.

 개천을 건너서 논두렁길을 한참 부지런히 걸어 가노라면 읍으로 들어가는 한길이 나선다. 도로변에 먼지를 부옇게 덮어 쓰고 도사리고 앉아 있는 초가집은 주막이다. 만도가 읍네 나올 때마다 꼭 한번씩 들르곤 하는 단골집인 것이다. 이 집 눈썹이 짙은 여편네와는 예사로 농을 주고받는 사이다.

 술방 문턱을 들어서며 만도가,

 "서방님 들어가신다."

 하면, 여편네는,

 아이 문둥아 어서 오느라."

 하는 것이 인사처럼 되어 있었다. 만도는 여간 언짢은 일이 있어도 이 여편네의 궁둥이 곁에 가서 앉으면 속이 절로 쑥 내려가는 것이었다.

 주막 앞을 지나치면서 만도는 술방 문을 열어 볼까 했으나, 방문 앞에 신이 여러 켤레 널려 있고, 방안에서 웃음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신작로에 나서면 금시 읍이었다. 만도는 읍 들머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정거장 쪽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거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진수가 돌아오는데 고등어나 한 손 사가지고 가야 될 거 아닌가, 싶어서였다. 장날은 아니었으나, 고깃전에는 없는 고기가 없었다. 이것을 살까 하면 저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사러 가면 또 그 옆의 것이 먹음직해 보이고 그것을 사러 가면 또 그 옆의 것이 먹음직해 보였다. 한참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결국은 고등어 한 손이었다. 그것을 달랑달랑 들고 정거장을 향해 가는데, 겨드랑 밑이 간질간질해 왔다. 그러나 한쪽밖에 없는 손에 고등어를 들었으니 참 딱했다. 어깻죽지를 연방 위아래로 움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거장 대합실에 들어선 만도는 먼저 벽에 걸린 시계부터 바라보았다.

 두시 이십분이었다. 벌써 두시 이십분이니 내가 잘못 보나?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보아도 시계는 틀림없는 두시 이십분이었다. 한쪽 걸상에 가서 궁둥이를 붙이면서도 곧장 미심쩍어 했다. 두시 이십분이라니, 그럼 벌써 점심때가 겨웠단 말인가? 말도 아닌 것이다. 자세히 보니 시계는 유리가 깨어졌고 먼지가 꺼멓게 앉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엉터리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보이소 지금 몇 싱교?"

 맞은편에 앉은 양복장이한테 물어 보았다.

 "열시 사십분이오."

 "예, 그렁교."

 만도는 고개를 굽실하고는 두 눈을 연방 껌벅거렸다. 열시 사십분이라, 보자 그럼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나마 남았구나. 그는 안심이 되는 듯 후유 숨을 내쉬었다. 궐련을 한 깨 빼물고 불을 댕겼다. 정거장 대합실에 와서 이렇게 도사리고 앉아 있노라면, 만도는 곧잘 생각키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등골을 찬 기운이 좍 스쳐 내려가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진 이끼 낀 나무토막 같은 팔뚝이 지금도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바로 이 정거장 마당에 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만도도 섞여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자기네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저 차를 타라면 탈 사람들이었다. 징용에 끌려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이삼년 옛날의 이야기인 것이다.

 북해도 탄광으로 갈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틀림없이 남양군도로 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만주로 가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만도는 북해도가 아니면 남양군도일 것이고, 거기도 아니면 만주겠지, 설마 저희들이 하늘 밖으로사 끌고 가겠느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들창코로 담배 연기를 푹푹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좀 덜 좋은 것은 마누라가 저쪽 변소 모퉁이 벚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한눈도 안 팔고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머니 속에 성냥을 두고도 옆사람에게 불을 빌리자고 하며 슬며시 돌아서 버리곤 했다. 플랫폼으로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마누라는 울 밖에 서서 수건으로 코를 눌러대고 있는 것이었다. 만도는 코허리가 찡했다. 기차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덜커덩!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덜 좋았다. 눈앞이 뿌우옇게 흐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정거장이 까맣게 멀어져 가고 차창 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휙휙 날라들자, 그만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처럼 큰 배에 몸을 실어 본 것은 더구나 처음이었다. 배 밑창에 엎드려서 꽥꽥 게워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만도는 그저 골이 좀 띵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러는 하루에 두 개씩 주는 뭉치밥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는 한꺼번에 하루 것을 뚝딱해도 시원찮았다. 모두 내릴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사흘째 되는 날 황혼 때였다. 제가끔 봇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만도도 호박덩이만한 보따리를 옆구리에 덜렁 찼다. 갑판 위에 올라가 보니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바닷물은 불에 녹은 쇠처럼 벌겋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막 태양이 물위로 뚝딱 떨어져가는 것이었다. 햇덩어리가 어쩌면 그렇게 크고 붉은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주황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산이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하도록 황홀한 광경에 모두들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만도는 어깨마루를 버쩍 들러 올리면서, 히야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숨막히는 더위와 강제 노동과 그리고, 잠자리만씩이나 한 모기 떼…….그런 것뿐이었다.

 섬에다가 비행장을 닦는 것이었다. 모기에게 물려 혹이 된 자리를 벅벅 긁으며,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무릅쓰고,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을 허물어 내고, 흙을 나르고 하기란, 고향에서 농사일에 뼈가 굳어진 몸에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음식도 이내 변하곤 해서 도저히 견디어 낼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병까지 돌았다. 일을 하다가도 벌떡 자빠지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만도는 아침저녁으로 약간씩 설사를 했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물도 차츰 입에 맞아갔고, 고된 일도 날이 감에 따라 몸에 배어드는 것이었다. 밤에 날개를 차며 몰려드는 모기떼만 아니면 그냥저냥 배겨내겠는데, 정말 그놈의 모기들만은 질색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처럼 험난하던 산과 산 틈바구니에 비행장을 다듬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허나 일은 그것으로는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벅찬 일이 닥치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비행기가 날아들면서부터 일은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산허리에 굴을 파들어 가는 것이었다. 비행기를 집어 넣을 굴이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다 굴속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다이너마이트 튀는 소리가 산을 흔들어댔다. 앵앵앵 하고 공습경보가 나면 일을 하던 손을 놓고 모두가 굴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비행기가 돌아갈 때까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근 한 시간 가까이나 엎드려 있어야 하는 때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그래서 더러는 공습이 있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때로는 공습 경보의 사이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일을 계속하는 수도 있었다.

 그럴때는 모두 큰 손해를 보았다고 야단들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사이렌이 미처 불기 전에 비행기가 산등성이를 넘어 달려드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 질겁을 하는 것이었다. 가장 많은 손해를 입는 것도 그런 경우였다. 만도가 한쪽 팔뚝을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런 때의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굴 속에서 바위를 허물어 내고 있었다. 바위 틈서리에 구멍을 뚫어서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는 하는 것이었다. 장치가 다 되면 모두 바깥으로 나가고, 한 사람만 남아서 불을 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뛰어나와야 되었다. 만도가 불을 당기는 차례였다. 모두 바깥으로 나가 버린 다음 그는 성냥을 꺼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기분이 께름직했다. 모기에게 물린 자리가 자꾸 쑥쑥 쑤시는 것이다. 걱즉걱즉 긁어댔으나 도무지 시원한 맛이 없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성냥을 득 그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불은 이내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성냥 알맹이 네 개째에서 겨우 심지에 불이 당겨졌다. 심지에 불이 붙는 것을 보자 그는 얼른 몸을 굴 밖으로 날렸다. 바깥으로 막 나서려는 때였다.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사나운 바람이 귓전을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만도는 정신이 아찔했다. 공습이었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넘어 달려든 비행기가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한 대가 뒤따라 날라드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그만 넋을 잃고 굴 안으로 도로 달려들었다. 달려들어가서 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팍 엎드러져 버리고 말았다. 고 순간이었다. 꽝! 굴 안이 미어지는 듯하면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만도의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만도가 어렴풋이 눈을 떠 보니, 바로 거기 눈 앞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뚝이 하나 놓여있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져서, 마치 이끼 낀 나무 토막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만도는 그것이 자기의 어깨에 붙어 있던 것인 줄을 알자, 그만 으아! 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재차 눈을 땠을 때는 그는 폭삭한 담요 속에 누워 있었고, 한쪽 어깻죽지가 못 견디게 쿡쿡 쑤셔댔다. 절단 수술(切斷手術)은 이미 끝난 뒤였다.

 

 꽤액 --- 기차 소리였다.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오는가 보았다. 만도는 앉았던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서며, 옆에 놓아두었던 고등어를 집어들었다. 기적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대합실 밖으로 뛰어나가 홈이 잘 보이는 울타리 쪽으로 가서 발돋움을 하였다. 째랑째랑 하고 종이 울자, 한참만에 차는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기관차의 옆구리에서는 김이 픽픽 풍겨 나왔다. 만도의 얼굴은 바짝 긴장되었다. 시꺼먼 열차 속에서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꽤 많은 손님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만도의 두 눈은 곧장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띠지 않았다. 저 쪽 출찰구로 밀려가는 사람의 물결 속에, 두 개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절룩거리며 걸어 나가는 상이 군인이 있었으나, 만도는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기차에서 내릴 사람은 모두 내렸는가 보다. 이제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플랫폼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놈이 거짓으로 편지를 띄웠을 리는 없을 건데……. 만도는 자꾸 가슴이 떨렸다. 이상한 일이다, 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히 뒤에서.

 "아부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만도는 깜짝 놀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만도의 두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입은 딱 벌어졌다. 틀림없는 아들이었으나, 옛날과 같은 진수는 아니었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눈앞이 노오래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저 멍멍하기만 하다가, 코허리가 찡해지면서 두 눈에 뜨거운 것이 핑 도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놈아!"

 만도의 입술에서 모지게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고등어를 든 손이 불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기 무슨 꼴이고, 이기."

 "아부지!"

 "이놈아, 이놈아……"

 만도의 들창코가 크게 벌름거리다가 훌쩍 물코를 들이마셨다. 진수의 두 눈에서는 어느 결에 눈물이 꾀죄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도는 모든 게 진수의 잘못이기나 한 듯 험한 얼굴로,

 "가자, 어서!"

 무뚝뚝한 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 가는 것이었다. 진수는 입술에 내려와 묻는 짭짤한 것을 혀끝으로 날름 핥아 버리면서, 절름절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앞장 서 가는 만도는 뒤따라오는 진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눈을 파는 법도 없었다. 무겁디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이따금 끙끙거리면서 부지런히 걸어만 가는 것이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걷는 진수가 성한 사람의, 게다가 부지런히 걷는 걸음을 당해 낼 수는 도저히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씩 뒤지기 시작한 것이, 그만 작은 소리로 불러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진수는 목구멍을 왈칵 넘어오려는 뜨거운 기운을 꾹 참노라고 어금니를 야물게 깨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개의 지팡이와 한 개의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대는 것이었다. 앞서 간 만도는 주막집 앞에 이르자, 비로소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진수는 오다가 나무 밑에 서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지팡이는 땅바닥에 던져 놓고, 한쪽 손으로는 볼일을 보고, 한쪽 손으로는 나무 둥치를 감싸 안고 있는 모양이 을씨년스럽기 이를데 없는 꼬락서니였다. 만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음! 하고 신음 소리 비슷한 무거운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술방 앞으로 가서 방문을 왈칵 잡아당겼다.

 기역자판 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속옷을 뒤집어 까고 이를 잡고 있던 여편네가 킥하고 웃으며 후닥딱 옷섶을 여몄다. 그러나 만도는 웃지를 않았다. 방 문턱을 넘어서며도 서방님 들어가신다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마 이처럼 무뚝한 얼굴을 하고 이 술방에 들어서기란 처음일 것이다. 여편네가 멋도 모르고,

 "오늘은 서방님 아닌가배."

 하고 킬킬 웃었으나, 만도는 으음! 또 무거운 신음 소리를 했을 뿐 도시 기분을 내지 않았다. 기역자판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기가 바쁘게,

 "빨리 빨리."

 재촉을 하였다.

 "핫다나, 어지간히도 바쁜가배."

 "빨리 꼬빼기로 한 사발 달라니까구마."

 "오늘은 와 이카노?"

 여편네가 쳐주는 술사발을 받아 들며, 만도는 휴유 ---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얼른 사발로 가져갔다. 꿀꿀꿀, 잘도 넘어가는 것이다. 그 큰 사발을 단숨에 말려 버리고는, 도로 여편네 눈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렇게 거들빼기로 석 잔을 해치우고사 으으윽! 하고 개트림을 하였다. 여편네가 눈을 휘둥굴해 가지고 혀를 내둘렀다. 빈 속에 술을 그처럼 때려 마시고 보니, 금새 눈두덩이 확확 달아오르고, 귀뿌리가 발갛게 익어 갔다. 술기가 얼큰하게 돌자, 이제 좀 속이 풀리는 성 싶어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진수는 이마에 땀을 척척 흘리면서 다 와 가고 있었다.

 "진수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리 들어와 보래."

 "…………."

 진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다가와서 방 문턱에 걸터앉으니까, 여편네가 보고,

 "방으로 좀 들어오이소."

 하였다.

 "여기 좋심더."

 그는 수세미 같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코 언저리를 싹싹 닦아냈다.

 "마 아무데서나 묵어라. 저 --- 국수 한 그릇 말아 주소."

 "야."

 "꼬빼기로 잘 좀 ……. 참지름도 치소, 알았능교?"

 "야아."

 여편네는 코로 히죽 웃으면서 만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는, 소쿠리에서 삶은 국수 두 뭉텅이를 집어 들었다.

 진수가 국수를 훌훌 끌어 넣고 있을 때, 여편네는 만도의 귓전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아들이가?"

 만도는 고개를 약간 앞뒤로 끄덕거렸을 뿐, 좋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진수가 국물을 훌쩍 들어마시고 나자, 만도는,

 "한 그릇 더 묵을래?"

 하였다.

 "아니 예."

 "한 그릇 더 묵지 와."

 "고만 묵을랍니더."

 진수는 입술을 싹 닦으며 뿌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막을 나선 그들 부자는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아까와 같이 만도가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수를 앞세웠다. 지팡이를 짚고 찌긋둥찌긋둥 앞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뚝이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느럿느럿 따라가는 것이다. 손에 매달린 고등어가 대구 달랑달랑 춤을 추었다. 너무 급하게 들어마셔서 그런지, 만도의 뱃속에서는 우글우글 술이 끓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콧구멍으로 더운 숨을 훅훅 내불어 보니 정신이 아른해서 역시 좋았다.

 "진수야!"

 "예."

 "니 우째다가 그래 됐노?"

 "전쟁하다가 이래 안 됐심니꼬. 수류탄 쪼가리에 맞았심더."

 "수류탄 쪼가리에?"

 "예."

 "음."

 "얼른 낫지 않고 막 썩어 들어가기 땜에 군의관이 짤라 버립디더. 병원에서예. 아부지!"

 "와?"

 "이래 가지고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

 "……"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왜 못 살아."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놓니, 첫째 걸어댕기기에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야야. 안 그렇다. 걸어댕기기만 하면 뭐하노, 손을 지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러까예?"

 "그렇다니,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대겠나, 그제?"

 "예"

 진수는 아버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만도는 돌아보는 아들의 얼굴을 향해 지긋이 웃어주었다. 술을 마시고 나면 이내 오줌이 마려워지는 것이다. 만도는 길가에 아무데나 쭈그리고 앉아서 고기 묶음을 입에 물려고 하였다. 그것을 본 진수는,

 "아부지, 그 고등어 이리 주소,"

 하였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 몸으로 물건을 손에 든 채 소변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진수는 저만큼 떨어져 서서 지팡이를 한쪽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 고등어를 들고 있었다. 볼일을 다 본 만도는 얼른 가서 아들의 손에서 고등어를 다시 받아 든다.

 개천 둑에 이르렀다.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그 시냇물이다. 진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물은 그렇게 깊은 것 같지 않지만, 밑바닥이 모래흙이어서 지팡이를 짚고 건너가기가 만만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외나무다리는 도저히 건너갈 재주가 없고……. 진수는 하는 수 없이 둑에 퍼지고 앉아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만도는 잠시 멀뚱히 서서 아들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진수야, 그만두고, 자아 업자."하는 것이었다.

 "업고 건느면 일이 다 되는 거 아니가. 자아, 이거 받아라."

 고등어 묶음을 진수 앞으로 민다.

 "……."

 진수는 퍽 난처해 하면서, 못 이기는 듯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만도는 등허리를 아들 앞에 갖다 대고, 하나밖에 없는 팔을 뒤로 버쩍 내밀며,

 "자아, 어서!"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아버지의 등허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혔다. 만도는 팔뚝을 뒤로 돌리면서,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팔로 내 목을 감아야 될 끼다."

 했다. 진수는 무척 황송한 듯 한쪽 눈을 찍 감으면서, 고등어와 지팡이를 든 두 팔로 아버지의 굵은 목줄기를 부둥켜안았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외나무다리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며 만도는 속으로,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들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고, 아버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 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하고 중얼거렸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텅 빈 충만  

 

 

       법정 

 

 

오늘 오후 큰절에 우편물을 챙기러 내려갔다가 황선 스님이 거처하는 다향산방(茶香山房)에 들렀었다. 내가 이 방에 가끔 들르는 것은, 방 주인의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과 아무 장식도 없는 빈 벽과 텅 빈 방이 좋아서이다.

 

이 방에는 어떤 방에나 걸려 있음직한 달력도 없고 휴지통도 없으며, 책상도 없이 한 장의 방석이 화로 곁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방 한쪽 구석에는 항시 화병에 한두 송이의 꽃이 조촐하게 꽂혀 있고, 꽃이 없을 때는 까치밥 같은 빨간 나무 열매가 까맣게 칠한 받침대 위에 놓여 있곤 했었다.

 

물론 방 이름이 다향산방이므로 차가 있고 차도구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들 또한 눈에 띄지 않는 벽장 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이 방 주인이 하는 일은 관음전(觀音殿)에서 하루 네 차례씩 올리는 사중(寺中)기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아주 힘든 소임이다. 이런 힘든 소임을 1천일 동안 한 차례 무난히 마쳤고, 작년부터 두 번째 다시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중에는 산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하는 질서를 스스로 굳게 지키고 있다.

 

송광사에서 5, 6년에 걸쳐 도량을 일신하는 중창불사를 별다른 어려움과 장애 없이 원만히 진행하게 된 것도, 그 이면에는 이 방 주인과 같은 청정한 스님의 기도의 공이 크게 뒷받침되었으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런데 오늘 이 방에 이변이 생겼다. 방안에 화로도 꽃병도 출입문 위에 걸려 있던 이 방의 편액도 보이지 않았다. 빈 방에 덩그러니 방석 한 장과 조그마한 탁상시계가 한쪽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방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새로운 각오로 정진하고 싶은 그런 심경임을 말 없는 가운데서도 능히 읽을 수 있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속담이 있지만, 중의 사정은 중이 훤히 안다. 너절한 데서 훨훨 벗어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다.

 

속을 모르는 남들은 갑작스런 변화를 보고 이 무슨 변덕인가 할지 모르지만, 본인으로서는 안일한 일상과 타성의 늪에서 뛰쳐나와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그의 소망은, 부모 형제를 떨쳐버리고 집을 나올 때의 그 출가정신에 이어진다. 출가란 살던 집을 등지고 나온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에 차지 않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이요, 거듭거듭 떨치고 일어남이다.

 

그런 출가정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칼을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칼날이 무디어지면 칼로서의 기능은 끝난다. 칼이 칼일 수 있는 것은 그 날이 퍼렇게 서 있을 때 한해서이다. 누구를 상하게 하는 칼날이 아니라, 버릇과 타성과 번뇌를 가차 없이 절단하는 반야검(般若劍), 즉 지혜의 칼날이다.

 

서슬 푸른 그 칼날을 지니지 않으면, 타인은 그만두고라도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다향산방의 주인은 나보다는 너그러운 편이다. 나 같으면 편액을 걸어두었던 그 못까지도 배버리고 그 자국마저 종이로 바르고 나서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언젠가 마음이 변해서 다시 그 자리에 편액을 거는 일이 있더라도, 한번 마음이 내켰을 때는 철저하게 치우고 없애야 한다.

 

그때 그 심경으로 치우고 없애는 그 일이 바로 그날의 삶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이런 결심이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날 그때의 그 결단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이런 비장한 결단 없이는 일상적인 타성과 잘못 길들여진 수렁에서 헤어날 기약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줄 것인가. 오로지 내가 내 인생을 한층한층 쌓아갈 뿐이다.

 

선종사(禪宗史)를 보면 방거사(龐居士)라는 특이한 선자(禪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살다 간 재가신자(在家信者)인데, 마조(馬祖: 중국의 위대한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어록(語錄)이 전해질 만큼 뛰어난 삶을 살았다.

 

그는 원래 엄청난 재산을 지닌 소문난 부호였다. 그런데 어떤 충격을 받고 그랬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어느 날 자신의 전 재산을 배에 싣고 바다에 나가 미련 없이 버린다. 어떤 문헌에는 바다가 아니고 동정호(洞庭湖)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전 재산을 바다에 버리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에게 ‘원수’가 된 재산을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결심을 단행한다.

 

살던 저택을 버리고 조그만 오막살이로 옮겨 앉는다. 대조리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이으면서 딸과 함께 평생 동안 수도생활을 한다.

 

있던 재산 다 버리고 궁상맞게 대조리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는 그의 행동을, 세상에서는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라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진짜로 전개된다. 삶의 가치 척도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어록에는 이런 게송(詩)이 실려 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지만

나는 순간의 고요를 즐긴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고요 속에 본래의 내 모습 드러난다.

 

또 다름과 같이 읊기도 했다.

 

탐욕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보시요,

어리석음 없는 것이 진정한 좌선.

성내지 않음이 진정한 지계(持戒)

잡념 없음이 진정한 구도다.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연 따라 거리낌 없이 사니

모두가 함께 반야선(般若船)을 탄다.

 

며칠 전 여수 오동도로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현정이네 집에 들렀었다. 거실에 있는 오디오 장치를 볼 때마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오디오는 당초 현정이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우리 방에 설치해 준 것인데 한 일 년쯤 듣다가 예의 그 ‘변덕’이 일어나 되돌려준 것이다. 인편에 들려오기를, 처음 이 오디오를 울 방에 설치해 주고 나서는 그렇게 흐뭇해하고 좋아했는데, 되돌아오자 몹시 서운해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 오디오 말고도 산에 살면서 두 차례나 치워 없앤 적이 있다. 음악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더미가, 소유의 더미가 싫어서였다. 치워버릴 때는 애써 모았던 음반까지도 깡그리 없애버린다.

 

일단 없애버려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맨 먼저 찾아오는 사람한테 (물론 그가 낯선 사람이 아닐 경우) 그날로 가져가라고 큰절 일꾼을 시켜 비워서 내려 보낸다. 그가 음악을 이해하건 안하건 그건 내게 상관이 없다. 그가 가져가겠다고 하면 주어버리는 것으로써 내 일은 끝난다.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으면 내 감성에 물기가 없고 녹이 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때부터 하나 또 들여놔볼까 하는 생각이 일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밖에 나가 알아본다. 될 수 있으면 면적을 작게 차지하면서도 산방의 분수에 넘치지 않은 것으로 고른다. 다시 필요해서 들여놓을 때라도 그 전에 주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 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렇게 홀가분한 것으로써 내 삶의 내용을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손수 사들인 것은 선뜻 남에게 주어버릴 수 있지만, 큰 맘 먹고 선물해준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되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오디오를 설치할 때 나는 1년만 듣고 보내겠다고 미리 이야기해 두었었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 <89 . 3>

 

 

침묵의 숲이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다. 뒤꼍 고목나무에서는 먹이를 찾느라고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자주 들리고, 산비둘기들의 구우 구우 거리는 소리가 서럽게 서럽게 들려오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숲을 찾아오는 저 휘파람새. 할미새가 뜰에 내려와 까불까불 가벼운 몸짓으로 인사를 한다. 저 아래 골짝이에서부터 안개처럼 뽀얗게 새 움이 터서 밀물처럼 산허리로 올라오고 있다.

 

머지않아 숲에서는 수런수런 신록의 문이 열리리라. 그때는 나도 숲에 들어가 한그루 정정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들처럼 새 움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면서 연둣빛 물감을 풀어내고 싶다.

 

가려둔 속뜰을 꽃처럼 활짝 열어 보이고 싶다.

 

허허, 이 봄날이 나를 흔들려고 하네.

 

귀는 항시 듣던 소리를 즐거워하고 눈은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한다는 말은 그럴 법하다. 음악을 듣더라도 귀에 익은 곡만을 즐겨 듣고, 새 것을 찾아 눈은 구경거리의 발길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귀는 좀 보수적이고 눈은 제법 진보적인 셈.

 

재작년이던가 여름날에 있었던 일이다. 날씨가 화창하여 밀린 빨래를 해치웠었다. 성미가 비교적 급한 나는 빨래를 하더라도 그날로 풀을 먹여 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찜찜해서 심기가 홀가분하지 않다. 그날도 여름 옷가지를 빨아 다리고 나서 노곤해진 몸으로 마루에 누워 쉬려던 참이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서까래 끝에 열린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로 돌아누워 산봉우리에 눈을 주었다. 갑자기 산이 달리 보였다. 하! 이것 봐라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이번에는 가랑이 사이로 산을 내다보았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 동무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던 그런 모습으로.

 

그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늘은 호수가 되고 산은 호수에 잠긴 그림자가 되었다. 바로보면 굴곡이 심한 산의 능선이 거꾸로 보니 훨씬 유장하게 보였다. 그리고 숲의 빛깔은 원색이 낱낱이 분해되어 멀고 가까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일어서서 바로 보다가 다시 거꾸로 보기를 되풀이했었다.

 

이러한 동작을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필시 미친 중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아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 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그러나,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새로운 면을, 아름다운 비밀을 찾아낼 수가 있다. 우리들이 시들하게 생각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할지라도 선입견에서 벗어나 맑고 따뜻한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시들한 관계의 뜰에 생기가 돌 것이다.

 

내 눈이 열리면 그 눈으로 보는 세상도 열리는 법이니까.

 

인도의 신비가이며 철학자. 그리고 구루인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법을 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보는 일은 어떤 철학도, 선생도 필요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에게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당신이 그냥 보면 된다 」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허심탄회 빈 마음으로 바라는 것. 남의 눈을 빌 것 없이 자기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대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어디서 나오는 무슨 차는 맛이 좋고, 어디 차는 맛이 시원치 않다고. 물론 기호에 따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차맛에 어떤 표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형편없는 찻감만 아니라면 한잔의 차를 통해 삶에 대한 잔잔한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요는 그 차가 지닌 특성을 알맞게 우릴 때 바로 그  차맛>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인격에 고정된 어떤 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지닌 좋은 덕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는 내게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한동안 나는 그 희한한 광경을 혼자서만 즐길 수 없어 내 산거(山居)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보여 주었었다. 나이 많은 노스님이건 어린 사미승이건, 신사와 숙녀를 가릴것 없이 나는 마치 숙달된 조교처럼 그들 앞에서 앞산을 거꾸로 내다보는 동작을 해 보였다. 그러면 그들도 천진한 어린이가 되어 거꾸로 내다보면서 좋아라 했다.

 

 

이렇다 할 구경거리가 없는 산이라 사물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통해 함께 즐기곤 했었다. 좀 점잖지 못한 동작이긴 하지만, 여럿이서 그런 놀이를 하고 있을 때의 광경 또한 볼만한 것이었다. 이런 산중 아니고야 무두가 점잔만 뻬는 이 세상 어디에서 그런 동작을 지을 수 있겠는가.

 

지난 3월 서울에 갔을때, 가톨릭 신자인 데레사의 인도로 어떤 수도원을 찾아간 일이 있다. 수도원이라고 하면 번듯한 건물에 담장이 높고 으레 수위실이 있을 것을 연상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그 수도원은 동네 끝 야산 아래 있는 조그만 초가집이었다.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산 9리 밤가시골, 학생들 가슴에 다는 명패만 한 크기의 문패. '예수의 작은 자매회'라고 빛이 바랜 나무 쪽에 씌어 있었다. 그 문패처럼 이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작은 수도원일 것이다. 마을 집을 사서 들어왔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여느 민가나 다름이 없었다.

 

성당은 대청마루, 아무 장식도 없고 벽에 붙인 조그만 감실과 그 아래 켜져있는 호롱불. 재래식 밥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제대祭臺로 쓰이는 것인가. 불란서에서 왔다는 수녀님 두 분과 수련수녀까지 합해서 열 사람도 채 안 되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주인과 나그네가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구수한 냉이국과 김치에 맛있는 공양을 했다. 처음 찾아간 나그네에게도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집이었다. 이곳 자매들은 마을에 일손이 바빠지면 밭에 나가 일을 거든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맙고 가까운 이웃이 되는 모양이다. 조그마한 초가에서 항상 웃음이 넘치는 걸 보고 수도희의 이름 그대로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로구나 싶었다.

 

아마 초기 교회가 이와 같았으리라 신라 때 일선군 모례네 집을 절로 만들었을 때도 이랬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교회나 사원은 그 건물만 하더라도 얼마나 호화롭고 비대해졌는가 건물과 기구가 비대해진 만큼 그 종교가 지닌 본래의 기능이 순수하게 이행되고 있을까. 혹시나 선민의식에 도취, 수도자와 시민들 사이가 물에 기름 돌듯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산의 밤가시골 초가집 수도원에서 오늘의 교회와 사원을 바라보는 「눈」을 나는 그날의 선물로 받아왔다.

 

가난하고 소탈하고 그러면서도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자매들이 있음이, 겉치레로 속이 비어있는 오늘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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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식보다 자기에게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쫓아 저마다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것 같다.

흑백사진처럼 아무런 동요나 주장이 없을 것 같은 무채색 돌담 위로 드문드문 뜰 안의 나무들이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그 돌담 틈새 사이로 하루를 탁발하는 달팽이가 둥글게 몸을 말아 먼 시간을 끌어당긴다. 발맘발맘 엄마 등에 업혀 동네 마실 가던 길, 새척지근한 속살 내음 귀뺨으로 핥았던 어머니 따뜻한 등이 그립다.

담장 앞에 정물처럼 한 노인이 앉아있다. 바닥에 납작 웅크린, 소 눈망울같이 순한 자기 집을 꼭 빼닮았다. 주름진 손등이 꼼지락거릴 때마다 이 마을의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는 역사책 같다. 천천히 가야 보인다고, 느린 것이 멀리 가는 힘이라고, 쉬운 것이 오래 가는 법이라고 불립문자처럼 사투리로 삶을 일러줄 것 같다.

햇살이 눈부셨지만 시간이 멈춘 듯하다. 침묵과 정적으로 길게 늘어진 돌담길을 새뜻한 바람 한 줄기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모퉁이를 돌아 나온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한 번쯤 여기 담벼락에 쉬었다가 다시 제 갈 길로 가는 듯하다. 모든 생명과 에너지, 그리고 시인의 영혼도 이 바람이 키웠을 것이다.

예천의 금당실 마을이다. 금당길, 배나무길, 구장터길, 나무지게길, 은행나무길, 고택길, 고인돌길 등 이름도 예쁜 이정표가 수백 년의 고택을 끌어안고 있다. 돌담과 토담이 서로 이웃하며 나지막한 자세로 저마다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 곳에나 시선을 돌려도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는 휴식 같은 존재가 바로 이곳이다.

사대부 집안의 육면체 사괴석 담장도 있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고 사모관처럼 기와로 지붕을 얹은 토석담도 있다. 이엉을 용마루로 얹어놓은 토담은 마치 꿈틀거리며 비를 몰고 오는 용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막사발 민초들처럼 그냥 둥글둥글한 막돌을 주워다 쌓은 강담을 보면 마음도, 세상도 덩달아 둥글어지는 것 같아 정이 간다.

둥근 것들은 순하다. 벽돌처럼 각을 세워 모서리를 만들지도 않고, 콘크리트처럼 바람 한 줄기 샐 틈도 없는 장벽이 되지도 않는다. 그 구멍 숭숭한 틈새 사이로 바람이 들랑거리고, 애벌레는 둥지를 만들고, 소나기를 피해서 찾아든 나비의 처마가 된다. 그 틈이 있어 세상은 따뜻해지고 구석까지도 햇살이 환하게 들어올 수 있다. 경계이면서도 경계가 아닌 창호지 같은 돌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청유형의 완곡어법일 것 같다.

돌담에 귀를 대면 또랑또랑한 새벽 계곡물 소리, 초저녁별들의 반짝이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각기 다른 모양들이 짝을 이루어 구성된 돌담. 서로 잡아주고, 받쳐주고, 어깨를 맞대어야 태풍에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을 그들은 안다. 접착제 하나 없이도 비바람에 흔들림 없는 천년 돌담이 되기 위해서는 돌을 쌓는 하나하나에 정성과 기도밖에 없었겠다.

사람들이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커지면서 점점 담이 높아지고 견고해졌다.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구불구불했던 길도 반듯하고 넓어지기 시작했다. 크고, 곧고, 각지고, 단단한 부피를 가진 것들을 앞세워 낡고 오래된 돌담은 자꾸 허물어 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그만큼 높아져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마음도 드러내지 않는다. 시멘트 회반죽으로 바늘구멍 하나 없는 담장은 더 이상 바람도, 나비도 찾지 않고 둥근 보름달은 자꾸 도망만 다닌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사회는 시간이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고, 어떻게든 이겨야 하고, 무엇이든 뺏어와야만 하는 경쟁 시대에는 속도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낮은 것은 들키기 쉽고, 울퉁불퉁한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좁은 것은 불편하고 오래된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속도가 빠르면 그만큼 시간을 아껴 저축이라도 해두는 것처럼 ‘오늘’을 허둥대며 살고 있다.

부수는 것이 선(善)이라도 된 양 무조건 새로운 것만을 쫓아가는 세상에 금당실 마을은 그런 점에서 특별난 곳이다. 이곳에 오래된 돌담길은 어쩌면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 하나의 작업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오래된 것과 새것, 비싼 것과 싼 것, 편리와 불편, 중심과 가장자리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둥글고 순하게 보는 눈을 가질 때 진정 내가 귀해지고 소중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곳에서는 빠르게 걷는 사람이 없다. 간혹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보이지만 그들 나이에는 뜀박질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오히려 여유로운 일이다. 돌담길은 느림이다. 눈과 귀를 열어두고 천천히 걸어야만 보인다. 돌담길에 느낌표로 머물고 있으니 그 속에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그리워하는 것, 바쁘게 사느라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숨겨져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껴둔 비점을 찍듯 돌담에 손을 얹어본다. 과거를 입고 현재를 거닐 듯 돌담길이 지난 시간을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것 같다. 나를 들여다보는 내가 보이고, 숨 가쁘게 살아가는 내 일상에 잠시 여유라는 쉼표를 툭! 찍는다.

*금당실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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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콩깍지는 눈에 '씌는' 것

중앙일보

입력 2013.11.22 00:10

업데이트 2013.11.22 00:10

지면보기지면 정보

(자두지작갱 녹시이위즙 기재부하연 두재부중읍 본시동근생 상전하태급 : 콩을 쪄 국 만들고 콩자반 걸러 즙으로 하려는데, 콩대는 솥 아래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 본디 한 뿌리에서 났건만, 지지고 볶는 것이 어찌 이리도 급한가.)’ 조식(曹植·192~232)이 지은 ‘칠보시(七步詩)’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편에 나온다.

는 콩깍지, 콩대를 가리킨다. 

를 콩깍지로 번역한 것이 더러 보이는데, 콩대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콩깍지는 콩을 털어내고 남은 껍질이고, 콩대는 콩을 다 떨어내고 남은 부분을 이른다. 콩대는 불이 잘 붙어 땔감으로 쓴다. 형이 동생을 좨치는 것을 콩대를 태워서 콩을 찐다는 상황에 빗댄 것이 절묘하다.

 콩깍지와 관련해 많이 쓰이는 표현이 있다. 바로 “걔가 그렇게 한 걸 보면 틀림없이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거지”처럼 눈에 콩깍지가 ‘씌웠는지, 씌었는지, 씐 건지, 씌인 건지’ 어떻게 무엇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엔가 홀려 제정신을 잃을 만큼 홀딱 빠져들 경우에 흔히 이렇게 표현한다. 홑따옴표 안의 네 가지 표현 중에는 어떤 것이 맞을까.

 ‘씌우다’는 ‘쓰다’의 사동사이므로 누가 내 눈에 콩깍지를 씌우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내 눈이 그것에 덮여 가려지는 것이므로 ‘씌웠는지’는 틀린다. ‘씌다’는 이미 그 자체로 피동형이다. ‘씌이다’는 ‘씌다’의 이중피동형이므로 마찬가지로 맞지 않다. 그리고 무엇이 눈에 덮이거나 가려지는 상황이므로 ‘눈에 콩깍지가 씌다/씌었다’로 적는 것이 바르다. 즉 ‘씌었는지/씐 건지’만이 맞게 쓴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거지”에서 ‘씌인’은 ‘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내가 책 제목으로 이것을 선택한 것은 말 그대로 콩깍지가 씌워서 그랬다네”의 ‘씌워서’는 ‘씌어서’로 고쳐야 옳다. ‘씌다’의 형태를 분석하면 ‘쓰이다’이지만 눈에 콩깍지가 덮여 가려지는 상황에는 ‘쓰이다’가 아닌 원형 ‘씌다’를 그대로 사용하고 이를

권태


이상


1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 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두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 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 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한다.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민절 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 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울 황원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 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너머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3
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뎅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뎅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 왔으니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씨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 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 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기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알 길이 없다.


4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뎅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워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되돌아가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 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넝쿨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했으면 좋을까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 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은 중의 웅뎅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러지를 먹겠지.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뎅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뎅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뎅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 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렀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 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둘른 베, 두렝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도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 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데기씩 누어 놓았다. 아--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자기 부패 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뎅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 떼가 준동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 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벌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 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 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자. 웅뎅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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