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여정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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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MJB(커피의 상표로 추정)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이십여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우체부)는 이따금 '하도롱'(hard-rolled paper. 다갈색 종이로서 봉투, 포장지를 만듦) 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도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감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옻칠을 한 듯 어두운 밤)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주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갑지(煙草匣紙 : 이해하기 곤란한 단어. 아시는 분은 보산에게 연락)-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벼쨍이가 한 마리 등잔에 올라 앉더니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음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을 기초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난계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나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조로 광음(光陰, 시간의 흐름)을 헤아리겠읍니까? 맥박소리가 이 방안을 방채 시계로 만들어버리고 장침과 단침(시계의 두 바늘)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 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회사(영화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곰 꿉니다. 그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천리(潟千里)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읍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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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철필로 군청빛 '모'를 심어갑니다. 불행한 인구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조밀한 인구가-.
내일은 진종일 화초만 보고 탈지선(脫脂線)에다 '알콜'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나 꿈자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사진 제판에 사용되는 인쇄법) 원색판 꿈 그림 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면 간단한 설명을 위하여 상쾌한 시를 지어서 7'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읍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철골전신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을 깨입니다. 하루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끄지 않고 잔 석유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끼 '단추'처럼 남아 있읍니다. 작야(어젯밤)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초인종)입니다. 지난밤의 체온을 방 안에 내어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퉁이에는 화단이 있읍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 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읍니다. 흰 봉선화도 붉게 물들까-조금 이상스러울 것 없이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빛 여주가 열렸읍니다. 당콩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빛을 배경으로 하는 일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 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읍니다. 농황색에 반영되어 '세실.B.데밀'(미국의 유명한 영화제작자로 <십계>, <삼손과 데릴라> 등 대형 스펙터클 영화를 잘 만든 사람)의 영화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치사(사치와 같은 말)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넷산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 '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가스' 입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읍니다. 객주집 아해에게 물어봅니다. '기상꽃'-기생화(妓生花)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진홍 비단꽃이 핀답니다.
선조가 지정하지 아니한 '조셋트'(우아한 여름 옷감) 치마에 '외스트민스터' 권연(영국담배 이름)을 감아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운한 '리그레추윙껌'(미국의 껌 이름)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기는 듯한 그 입맛 다시는 소리-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혜원(화가 신윤복의 호)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혹은 우리가 소년시대에 보던 떨떨 인력거에서 홍일산(붉은색 양산) 받은 지금은 지난날의 삽화인 기생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이 열렸읍니다. 호박꼬자리에 무 시루떡-그 훅훅 끼치는 구수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월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백년의 기반을 생각케 하는 넓적하고도 묵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너레숀'(generation)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비져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풍염(豊艶)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수척하여가는 이 몸에 조곰식 조곰식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모러스'한 용적에 향기가 없읍니다. 다만 세수비누에 한겹씩 한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육향(肉香)이 방 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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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 올라가는 초경(草俓;수풀로 덮인 지름길) 입구 모퉁이에 최XX송덕비와 또 XXXX아무개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妃)가 항공우편 '포스트'(우체통)처럼 서 있읍니다. 듣자니 그들은 다 아직도 생존하여 계시다 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교회가 보고 싶었읍니다. 그래서 '에루살렘' 성역을 수만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까지도 사랑하는 신 앞으로 회개하고 싶었읍니다. 발길이 찬송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갑니다. '포푸라' 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를 매어 놓았읍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읍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명한 동공을 들여다봅니다. '세루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오브라-드'(oblato;전분으로 만든 얇은 원형의 부편. 그냥 먹기 어려운 약을 싸는 데도 쓰임. 투명한 전분지.)로 싼 것 같이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도색(桃色;복숭아색)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삼정(三停;머리와 이마의 경계, 코끝, 턱끝 이 세 곳을 가리킴)과 오악(五岳;이마, 코, 턱, 좌우 관골)이 고르지 못한 빈상(貧相;가난한 관상)을 업수여기는 중입니다.
옥수수밭은 일대 관병식(觀兵式;군대의 행진 등을 지켜보는 예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甲胄;갑옷과 투구)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carmine;연지벌레에서 뽑아 낸 홍색 안료) 빛 꼭구마(꼬고마;군졸이 벙거지에 꽂던 붉은 털)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읍니다. 장엄한 예포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소조(小鳥;작은새)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소리였읍니다. 그러면 옥수수밭에서 백, 황, 흑, 회, 또 백(모두 색), 가지 각색의 개가 퍽 여러 마리 열을 지어서 걸어 나옵니다. '센슈알'한 계절의 흥분이 이 '코삭크'(cossack; 카자흐의 영어식 이름. 카스피해의 북동쪽,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에 위치함) 관병식을 한층 더 화려하게 합니다.
산삼이 풀어져 흐르는 시내 징검다리 위에는 백채(白菜:하얀 야채) 씻은 자취가 있읍니다. 풋김치의 청신(淸新:푸릇푸릇하고 풋풋한)한 미각이 안약 '스마일'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그 화성암으로 반들반들한 징검다리 위에 삐뚜러진 N자로 쪼그리고 앉았노라면 시야에 물동이를 이고 주저하는 두 젊은 새악씨가 있읍니다. 나는 미안해서 일어나기는 났으면서도 일부러 마주 보면서 그리로 걸어갑니다. 스칩니다. '하도롱'빛 피부에서 푸성귀 내음새가 납니다. '코코아'빛 입술은 머루와 다래로 젖었읍니다. 나를 아니 보는 동공에는 정제된 창공이 '간쓰메'(통조림의 일본어)가 되어 있읍니다.
M백화점 '미소노'(1930년대 일제 화장품 이름) 화장품 '스위-트 껄'(sweet girl)이 신은 양말은 이 새악씨들의 피부색과 똑같은 소맥(밀)빛이었읍니다. 빼뜨름히 붙인 초유선형 모자 고양이 배에 '화-스너'(fastener;분리되어 있는 것을 잠그는 데 쓰는 기구의 총칭. 지퍼나 클립 등)를 장치한 갑붓한 '핸드빽'-이렇게 도회의 참신하다는 여성들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리고 새벽 '아스팔트'를 구르는 창백한 공장소녀들의 회충과 같은 손가락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 온갖 계급의 도회여인들 연약한 피부 위에는 그네들의 빈부를 묻지 않고 온갖 육중한 지문을 느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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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난하나마 무명같이 튼튼한 피부 위에 오점이 없고 '추잉껌' '초콜레이트' 대신에 응어리는 빼어먹고 달절지근한 꼬아리(꽈리)를 불며 숭굴숭굴한 이 시골 새악시들ㅇ르 더 나는 끔찍이 알고 싶습니다. 축복하여 주고 싶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습닏. 도회인의 교활한 시선이 수줍어서 수풀 사이로 숨어버리고 종소리의 여운만이 근처에 내음새처럼 남아서 배회하고 있읍니다. 혹 그것은 안식을 잃은 내 혼이 들은 바 환청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조밭 한복판에 높은 뽕나무가 있읍니다. 뽕 따는 새악시가 전공부처럼 높이 나무 위에 올랐읍니다. 순백의 가장 탐스러운 과실이 열렸읍니다. 둘이서는 나무에 오르고 하나이 나무 밑에서 다랭이를 채우고 있읍니다. 한두 잎만 따도 다랭이가 철철 넘는 민요의 무대면(舞臺面)입니다.
조이삭은 다 말라 죽었읍니다. '콜크'처럼 가벼운 이삭이 근심스럽게 고개를 숙였읍니다. 오- 비야 좀 오려무나 해면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싶어 죽겠읍니다. 그러나 하늘은 금한 듯이 구름이 없고 푸르고 맑고 또 부숭부숭하니 깊지 못한 뿌리의 SOS의 암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에 다다르겠읍니다.
두 소년이 고무신을 벗어들고 시냇물에 발을 잠가 고기를 잡습니다. 지상의 원한이 스며 흐르는 정맥- 그 불길하고 독한 물에 어떤 어족이 살고 있는지- 시내는 대지의 신열을 뚫고 벌판 기울어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읍니다. 그것은 가을의 풍설(風說)입니다.
가을이 올 터인데 와도 좋으냐고 쏘근쏘근하지 않습니까. 조이삭이 초례청 신부가 절할 때 나는 소리같이 부수수 구깁니다. 노회한 바람이 조잎새에게 난숙(欄熟;너무 익음)을 최촉(催促;재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의 마음은 푸르고 초조하고 어립니다.
조밭을 어지러뜨린 자는 누구냐- 기왕 한될 조여든- 그런 마음으로 그랬나요 몹시 어지러뜨려 놓았읍니다. 누에-호호(戶戶;집집)에 누에게 있읍니다. 조이삭보다도 굵직한 누에가 삽시간에 뽕잎을 먹습니다. 이 건강한 미각은 왕후와 같이 지존스러우며 치사(侈奢;사치와 같은 말)스럽습니다. 새악시들은 뽕심부름하는 것으로 몸의 마지막 광영을 삼습니다. 그러나 뽕이 떨어졌읍니다. 온갖 폐백이 동이 난 것과 같이 새악시들의 정열은 허둥지둥하는 것입니다.
야음을 타서 새악시들은 경장(輕裝;가볍게 입음)으로 나섭니다. 얼굴의 홍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뽕나무에 우승배가 놓여 있읍니다. 그리로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조밭을 짓밟습니다. 자외선에 맛있게 끄실른 새악시들의 발이 그대로 조이삭을 무찌르고 '스크람'(srcum)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닿을 지성이 천고마비 잠실(누에가 있는 방) 안에있는 성스러운 귀족가축들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코렛트'부인(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콜렛트)의 '빈묘'(牝猫;암코양이. 작품 제목)를 생각케 하는 말캉말캉한 '로맨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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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학교 곁집 길가에서 들여다 보이는 방에 틀이 떠들고 있읍니다. 편발처녀(머리를 땋아내린 처녀)가 맨발로 기계를 건드리고 있읍니다. 그러면 기계는 허리를 스치는 가느다란 실이 간지럽다는 듯이 깔깔깔깔 대소하는 것입니다. 웃으며 지근대이며 명산 XX 명주가 짜여나오니 열대자수건이 성묘갈 때 입을 때때를 만들고 시집살이 설움을 씻어주고 또 꿈과 꿈을 말소하는 쓰레받기도 되고-이렇게 실없는 내 환희(幻戱)입니다.
담배가게 곁방 안에는 오늘 황혼을 미리 가져다 놓았읍니다. 침침한 몇 '가론'(gallon)의 공기 속에 생생한 침엽수가 울창합니다. 황혼에만 사는 이민 같은 이국초목에는 순백의 갸름한 열매가 무수히 열렸읍니다. 고치-귀화한 '마리아'들이 최신지혜의 과실을 단려(端麗:단정하고 아름다운)한 맵시로 따고 있읍니다. 그 아들의 불행한 최후를 슬퍼하며'크리스마스 츄리'를 헐어 들어가는 '피에다'(Pieta:예수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상) 화폭 전도입니다.
학교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고 생도들은 글을 배우고 있읍니다. 그들은 열심히 간단한 산술을 놓아 그들의 정직과 순박을 지혜와 교활로 환산하고 있읍니다. 탄식할 이식산(利息算:이자 계산)이 아니겠읍니까. 족보를 찢어 버린 것과 같은 흰 나비 두어 마리 백묵내음새 나는 화단 위에서 번복(飜覆:고치거나 바꾸는 일)이 무상합니다. 또 연식 '테니스'공의 마개 뽑는 소리가 음향의 흔적이 되어서는 등고선의 각점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읍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읍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홍모(紅毛:붉은 머리)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활동사진을 보고 난 다음에 맛보는 담백한 허무-장주(莊周:장자)의 호접몽이 이러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동글납짝한 머리가 그대로 '카메라'가 되어 피곤한 '따불렌즈'(double lens:이중렌즈)로나마 몇 번이나 이 옥수수 무르익어가는 초추(初秋:초가을)의 정경을 촬영하였으며 영사하였던가-'후래슈빽'(flashback:영화에서 과거의 회상 장면을 말함)으로 흐르는 엷은 애수-도회에 남아 있는 몇 고독한 '팬'에게 보내는 단장(斷腸:애를 끊는)의 '스틸'(still:영화 중의 한 장면을 보통 사진기로 찍어 확대 인화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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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읍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생을 적어 내려갈 편전지(便箋紙;편지지)-'스크린'이 박모(薄暮;땅거미) 속에서 '바이오그래피'(biography;전기)의 예비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주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봅니다. 사투리의 합창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棧橋;부두에서 선박에 걸쳐놓아 화물을 싣고 부리거나 선객이 오르내리게 된 다리. 지금부터는 활동사진의 내용입니다.)가 나타납니다. 평양 모란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태서(泰西;'서양'의 옛날식 표기)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産과 頁로 결합된, 해독불가한 한자)色이 없읍니다. 십분 휴식시간에 조합이사의 통역부(통역 딸린) 연설이 있었읍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읍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멋지죠? 어두운 영화관 안에 불 밝힌 금연등을 구름 속에 든 달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폿트'(spotlight)도 비쳤읍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이곳 촌민들은 XX행자동차 '헷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읍니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강단(降壇:단상에서 내려옴)하였읍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읍니다.-물론 나도 그 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읍니다만-.
밤 열한시나 지나서 영화감상의 밤은 '해피엔드'였읍니다. 조합원들과 영사기사는 이 촌 유일의 음식점에서 위로회를 열었읍니다. 나는 객사로 돌아와서 죽어가는 등잔심지를 돋우고 독서를 시작하였읍니다. 그것은 이웃방에 묻고 계신 노신사께서 내 나타(懶楕:게으름)와 우울을 훈계하는 뜻으로 빌려주신 고우다 로한 (辛田露伴) 박사의 지은 바 <人의 道>라는 진서(珍書:귀중한 책)입니다. 개가 멀리서 끊일 사이 없이 이어 짖어댑니다. 그윽한 '하이칼라' 방향(芳香:꽃다운 향기, 좋은 냄새)을 못 잊어 군중은 아직도 헤여지지 않았나 봅니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나왔읍니다. 버래(벌레)가 무도회의 창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와짝 요란스럽습니다. 아지 못하는 노방(路傍:길가)의 인(人)을 사색하는 도회인적인 향수가 있읍니다. 신간잡지의 표지와 같이 신선한 여인들- '넥타이'와 동갑인 신사들 그리고 창백한 여러 동무들-나를 기다리지 않는 고향- 도회에 내 나체의 말씀을 번안하여 보내주고 싶습니다. 잠- 성경을 채자(採字:좋은 글을 가려뽑다, 인쇄하기 위해 활자를 뽑다)하다가 엎질러 버린 인쇄직공이 아무렇게나 주워담은 지리멸렬한 활자의 꿈 나도 갈갈이 찢어진 사도가 되어서 세 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굶는 가족을 모른다고 그립니다.
근심이 나를 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내가 갑문(閘門;수문)을 열면 폐허가 된 이 육신으로 근심의 조수가 스며들어 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메소이스트' 병마개를 아직 뽑지는 않습니다. 근심은 나를 싸고 돌며 그리는 동안에 이 육신은 풍마우세(風磨雨洗;바람에 닦이고 비에 씻겨나감)로 저절로 다 말라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밤의 슬픈 공기를 원고지 위에 깔고 창백한 동무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부고도 동봉하였습니다.
1)성천:평안남도 성천군의 군청 소재지.
2)MJB:커피의 일종.
3)체전부:우편 집배원.
4)하도롱:hard―rolled paper. 다갈색의 종이로서 봉투, 포장지를 만듦. 여 기서는 다갈색 편지 봉투에 쓰인 내용을 말함.
5)한난계:온도를 재는 기계.
6)조밀한 인구:비망록에 쓰인 글씨들.
7)그라비아:gravure. 사진 제판에 응용하는 凹판 인쇄법.
8) 요비링:초인종의 일본어. 李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불러내는 기능으로 요비링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9)꼭두서니 빛:꼭두서니풀을 원료로 하여 만든 빨간 물감 빛. 꼭두서니는 풀 이름.
10)여주:박과에 딸린 한해살이 덩굴풀. 여름·가을에 노란꽃이 피고, 길고 둥근 열매는 붉노랗게 익는다.
11)세피아:sepia. 암갈색. 주로 수채화에 쓰이는 産頁料(안료)
12)세실·B·데밀:미국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1881~1959). 대형 스펙터클
영화를 잘 만들었음. 「십계」·「삼손과 데릴라」 등을 제작. 안소니 퀸의 장인.
13) 조셋트:지금의 쉬펀과 비슷한 우아한 여름 옷감.
14)외스트민스터 卷煙:웨스트민스트 卷煙. 영국의 良質(양질)의 紙卷煙(지 권연)
15)리그레추윙껌:리그레추잉검. 미국의 껌 이름.
16)蕙園:조선 후기의 풍속화가인 申潤福(신윤복·1758~?)의 호. 작품은 주 로 妓女(기녀)·巫俗(무속)·술집의 색정적인 장면 등을 그려, 인간주의적 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엿보임.
17)호박꼬자리:호박을 썰어서 말린 것.
18)제너레숀:generation. 世代(세대).
19)오브라―드:oblato. 전분으로 만든 얇은 원형의 簿片(부편). 그냥 먹기 어려운 약을 싸는 데도 쓰임. 투명한 전분지.
20)三停:머리와 이마의 경계(上停), 코끝(中停), 턱끝(下停).
21)五岳:이마·코·턱, 좌우 관골.
22)갑위:갑옷과 투구.
23)카―마인:carmine. 카아민을 잘못 발음한 것. 연지벌레에서 뽑아 낸 紅色(홍색) 안료.
24)꼭구마:원표기는 「꼬꼬마」, 군졸이 벙거지에 꽂던 붉은 털.
25)코삭크:Cossack. 카자흐(Kazakh)의 영어식 이름. 카스피 해의 북동쪽,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에 위치함.
26)간쓰메:통조림의 일본어.
27)미소노:1930년 무렵의 일제 화장품 이름.
28)화―스너:fastener. 분리되어 있는 것을 잠그는 데 쓰는 기구의 총칭. 지퍼·클립·척 등
29)꼬아리:꽈리
30)스크람:scrum. 여럿이 팔을 꽉 끼고 뭉치는 것.
31)코렛트 夫人:Sidonie Gabrielle Colette(1873~1954). 프랑스의 여류 소 설가. 정확한 발음은 콜레트. 「클로디느 이야기」·「방랑하는 여인」·「 지지」·「암고양이」 등이 있음.
32)빈묘:암고양이. 여기서는 코레트 여사의 작품명.
33)편발處女:머리를 땋아 내린 처녀.
34)가론:gallon. 용량의 단위.
35)피에다:Pieta. 예수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像(상).
36)따불렌즈:double lens. 二重(이중) 렌즈.
37)후래슈빽:flashback. 영화에서 과거의 회상 장면을 말함.
38)스틸:still. 영화 중의 한 장면을 보통 사진기로 찍어 확대·인화한 사 진. 선전용으로 쓰임.
39)바이오그래피:biography. 傳記(전기).
40)幸田露伴博士:고우다 로한(1867~
이상의 수필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집니다. 1935년 9월 27일에서 10월 11일까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했습니다. 1935년 여름 한 달간 평안남도 성천에서 머물렀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잘 아는 <권태>도 이 시기에 같은 성천을 배경으로 쓴 작품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형'이라는 사람, 소설가 정인택으로 보입니다.-
한국문학의 돌연변이, 한국 문학사의 이단아, 근대문학의 마침표이자 현대문학의 시작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 한국 최고의 모더니스트, 한국의 보들레르. ‘이상’을 수식하는 말들을 살펴보면 ‘이상’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입니다. 친구였던 시인 ‘김기림’은 그의 죽음이 한국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고까지 이야기했는데요,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하지 않나요? 얼마나 천재였는지 말이에요. 그의 작품들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너무 앞서갔던 것일까요? 서양 철학자 ‘니체’도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며, 자신의 책이 당대에 읽히지 않는 것을 보며 한탄했었는데 ‘이상’도 그랬을까요? 저는 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친절하게 독자를 배려하는 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글이 잘 읽히고 좋은 글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글쓰기 강의에서든 독자를 고려해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글도 있습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불친절한 글, 독자에게 “너 날 이해할 수 있겠어?” 하며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글이 있습니다. 많은 글들이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과는 다르게 이런 글들은 오만하게도 독자를 자기가 선택합니다. 오직 간택 받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글. ‘이상’은 그런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처럼 선택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이죠. 아무튼 이상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오늘 이상의 두 번째 사랑, ‘권순옥’과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쪼금이라도 이상을 이해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처럼 똑똑한 척, 잘난 척하는 지식인 남자들이 가장 매력 없어 하는 여자는 바로 자기와 닮은꼴일 겁니다. ‘이상’은 그런 신여성들을 ‘눈 가리고 아웅의 천재’, ‘석녀’, ‘한개 요물’이라며 가혹하리만큼 공개적으로 매도했는데요, 흥미롭게도 신여성이었던 ‘권순옥’에 대해서만큼은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그녀는 고리키 전집을 모두 독파할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언변에도 막힘이 없어 당시 내로라하는 작가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습니다. ‘이상’이 ‘권순옥’을 처음 만났던 것은 다방 ‘제비’문을 닫고 인사동에 ‘쓰루’라는 다방을 개업했을 때였습니다. ‘이상’은 ‘금홍’을 대신해 다방을 운영해줄 여급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엔젤’이라는 다방에서 자신과 말이 잘 통해 눈여겨봤던 여성을 스카우트했는데, 그녀가 바로 ‘권순옥’이었습니다. ‘이상’은 ‘권순옥’이 ‘금홍’에게 부족한 지적인 면을 채워주고, 어쩌면 자신의 ‘날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권순옥’은 이상에게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삶의 태도와 천재적인 면모가 비슷해 ‘D.H 로렌스의 모조품’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데, ‘이상’은 진심으로 감격해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권순옥’의 교양을 칭찬하며 추켜세웠는데요, 나중엔 너무 칭찬을 해서 친구 ‘정인택’에게 빼앗기게 생겼다며 후회할 정도로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권순옥’도 비범한 ‘이상’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금홍’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실망하게 됩니다. ‘이상’은 ‘순옥’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금홍’을 더욱 격렬하게 끌어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데, 바깥에서 바람피우고 집에 들어오면 배우자에게 더 잘하게 된다는데 그런 심리였을까요? 어쨌든 ‘이상’은 ‘순옥’을 마음에 품고 동경하면서도 아편 같은 ‘금홍’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핵 환자가 섹스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라고 하는데 ‘이상’은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갉아먹으면서도 ‘금홍’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상’의 걱정대로 친구였던 소설가 ‘정인택’은 친구의 애인이었던 ‘순옥’을 좋아하게 됩니다. 새침하면서도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나눈다 한들 말이 잘 통했기 때문에 그런 지적인 면에 많은 문인들이 사랑에 빠졌는데요, 후에는 소설가 ‘박태원’까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정인택’은 신문사에서 퇴근하기 바쁘게 ‘쓰루’로 와서 번 돈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하숙비까지 밀려가며 애정 공세를 펼치자 ‘순옥’도 점점 마음을 열게 되는데요, 이때 ‘이상’과 ‘순옥’의 관계가 애매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홍이’ 때문에 공개적으로 ‘순옥’을 자신의 애인이라고 밝힐 수도 없었던 ‘이상’은 ‘정인택’의 적극적인 구애 행위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 스스로도 ‘금홍이’ 때문에 새 사랑을 시작하기 부담스러웠기에 ‘순옥’에게 적극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인택’이 괴로운 심경에 자살 기도를 합니다. 목숨이 경각에 붙어있는 걸 ‘이상’이 발견해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살려내는데요, 이를 계기로 ‘순옥’은 ‘정인택’에게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금홍’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보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건 사내를 선택한 것이죠. ‘이상’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고 심지어 사회까지 봐줬지만,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인택’이 사경을 헤맬 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놈이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술주정을 했다는 걸 보면요. 그렇게 ‘순옥’도 ‘금홍’도 떠나가자 ‘이상’은 또 골방에서 몇 날 며칠을 술 마시고 잠만 잤습니다. 그러다가 또 ‘쓰루’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는데요, 이어서 명동에 ‘69’라는 다방을 개업했지만, 상호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하루 만에 허가가 취소됩니다. 당시 청소부로 일하던 동생의 봉급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살다가 친구 구본웅의 소개로 ‘변동림’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세 번째 사랑이 시작되는데요, 이것은 다음 영상에서 다루겠습니다. 추가로 ‘이상’이 죽은 뒤 ‘권순옥’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6.25전쟁 직후 남편 ‘정인택’과 함께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얼마 후 ‘정인택’이 병으로 죽게 됩니다. 북에서 홀로 두 딸을 키우다가 극적으로 ‘박태원’을 만나는데요, 객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가웠던 것인지, 동병상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박태원’과 재혼하게 됩니다. ‘박태원’은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기 전날 밤 술을 함께 마실 정도로 친한 친구였는데요, 그럼 ‘권순옥’은 ‘이상’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정인택’, ‘박태원’ 둘 모두와 결혼한 셈이 되겠네요. 아무튼 ‘권순옥’은 ‘박태원’이 말년에 뇌출혈로 전신 마비가 오고 백내장으로 실명해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그를 대신해 원고를 작성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명 산천은 밝아오느냐’, ‘갑오농민전쟁’입니다. 여기까지가 비록 문인은 아니었지만 1930년대 모더니즘의 주역이었던 세 남자, ‘이상’, ‘정인택’, ‘박태원’과 아주 묘한 인연으로 얽혀 기꺼이 그들의 뮤즈가 되어준 여인. ‘권순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문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어찌 보면 사치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쪽에서는 많은 이들이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시기이니까요. 그렇지만 1930년대 경성은 황홀하고 멋진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자본주의로 인해 지금과 같이 무분별한 소비와 향락적인 유흥문화가 만연했으니까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은 그런 경성의 이중성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적응해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목숨을 걸 만큼 대단한 용기를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죠. ‘이상’을 비롯해 1930년대 모더니즘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시대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새롭고 화려한 것들, 즉 모던한 것들만 추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당시의 삶을 왜곡하고, 그들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우울한 시기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일상적 삶을 영위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과몰입해 평범했던 그들의 삶을 ‘시대’와 ‘민족’이라는 잣대로 거칠게 재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마치 200년 뒤 통일이 된 다음, 후손들이 지금 우리 시대를 분단의 아픔으로 얼룩진 우울한 시대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요.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영상은 ‘홍지화’의 ‘한국 문단의 스캔들’을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내일의 국어 이야기는 이상의 마지막 사랑, ‘변동림’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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