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3월에,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다. 내가 군용기편에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 단신單身 서울에 들어온 것은, 비바람 음산한 3월 29일 저녁 때, 기약할 수 없는 스산한 마음을 안고 서울을 떠난 지 꼭 넉 달이 되어서였다. 나는 그 날, 멀리 으르렁거리는 포성을 들으며, 그 칠흑 같은 서울의 밤을 어느 낯모르는 민가에서 지새웠다.
다음 날은, 전쟁의 불길 속에 두고 간 우리 박물관의 피해를 조사하느라 여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조사 보고서를 써서 군용기편으로 부산에 부치고 나니, 겨우 마음의 여유가 생겨, 경복궁 뒤뜰에 있는 우리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문을 꼭 닫아두고 떠난 나의 서재, 독마다 가득히 담가 놓고 간 그 싱그러운 보쌈김치, 나는 이런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없어졌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마음은 빈 집에 홀로 두고 간 가엾은 우리 바둑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마른 잡초가 우거진 경복궁 옛 뜰은 전이나 다름없이 봄볕이 따스한데, 굶주린 고양이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다. 나는 집을 향해 마른 풀밭을 걸었다. 저만큼 우리 집에 해묵은 기왓골이 보일 무렵, 나는 야릇한 감상에 젖어, 고향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집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나의 시선은 우선 천천히, 다가오는 대청과 건넌방 쪽마루를 더듬었다. 그 때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쪽마루 위에, 두고 간 우리 바둑이가 납작하게 너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늘 즐겨 앉아 있던 그 자리에 ···. 바둑이는 자기를 버리고 간 매정스러운 주인의 빈 집을 지키다가 그만 굶주림에 지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휘 휘 휘요’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 이게 바로 기적이란 것인가? 말라비틀어진 물걸레 같은 바둑이의 시체가 머리를 번적 들고 나를 알아본 것이다. 바둑이는 비틀거리며 뛰어내려와 내 발밑에서 대굴대굴 굴렀다. 사뭇 미친 듯 했다. 나는 바둑이를 덥석 껴안았다.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바둑이는 그 슬픈 눈으로 내 눈길을 더듬으며, 그 마른입으로 내 볼을 마구 비벼댔다.
“오냐, 다시는 다시는 너를 두고 가지 않으마.”
나는 외치다시피 이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넉 달 전 우리가 서울을 떠날 때, 떨어지지 않으려는 바둑이한테 나는 “집 잘 보고 있거라. 곧 돌아올게, 응.” 하고 달래면서, 몇 말의 먹이와 함께 이웃집에다 맡겼었다. 그러나 그 후 며칠 못 가서, 이웃집마저 바둑이를 혼자 두고 피난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바둑이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넓은 고궁 속, 춥고 배고픈 한 겨우내, 공포만이 깃들이는 어둡고 외로운 밤들을 우리 바둑인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나는 바둑이를 안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텅 빈 서울거리엔 바둑이가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나는 밥을 지었다. 그러나 바둑이는 먹지 못했다. 굶주림에 지친 그 어린 창자는 아직 곡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틀이 지나서야 바둑인 겨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바둑이는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바둑이와 함께 텅 빈 경복궁 안의 인기척 없는 빈 집에서 지냈다. 바둑이가 없었던들 그 어둡고 무서운 밤들을 나는 아마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둑인 옛날 그대로, 방 안에는 못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어두운 방 안에 덩그러니 누워서 먼 포성을 들으며 뒤척이자면, 바둑인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 웅크리고 앉아 쌔근거렸다. 때때로 문을 열고 회중전등으로 얼굴을 비춰 주면, 바둑인 군화 위에 웅크린 채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좋아했다. 방석을 주어도 마다하고 군화 위에만 올라앉아 그 불편한 잠자리를 길들이던 바둑이… 그것은 아마도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그리운 주인의 체취를 맡으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겉으로는 다정한 체하면서도 막상 급할 때가 오면, 자기를 사지死地에 버리고 훌쩍 떠나는 주인이 못 미더워, 그 군화를 지키자는 것이었을까?
4월 하순 어느 날, 다시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밤새 우레 같은 포성이 쉴 사이 없었고, 시청 앞을 지나는 군용 차량들의 다급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저녁, 서울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 속, 산 너머로 섬광은 번뜩이는데, 피난민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바둑이는 그 동안 나와 함께 두 끼를 굶고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랐다. 이번만은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나는 바둑이를 안고, 최후의 철수 열차에 연결된 박물관 소개 화차에 올랐다. 가마니쪽에 환자를 뉘고 열차 겉으로 끄는 여인들의 처절한 모습, 태워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 아낙네들의 모습, 나는 바둑이를 꼭 안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우리는 이런 꼴을 당하는가?
기차는 그 밤에 떠나지 못했다. 수십 량의 소개 화차를 연결하느라 밤새도록 앞걸음질 뒷걸음질, 그동안에 날이 샌 것이다.
화차가 연결될 때마다 그 소리와 충격은 대단했다. 그때마다, 바둑인 한 번 덴 가슴이라 깜짝깜짝 놀랐다. 거기다, 가까워진 포성과 우레 쏟아지는 듯한 폭격소리가 더해지자, 바둑이는 이제 더는 그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또 한 번의 충격이 있자, 그 순간, 바둑인 놀란 토끼처럼 내 품을 벗어나서, 반쯤 열린 문틈으로 화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달려갔다. 나도 반사적으로 화차에서 뛰어내려 바둑이를 따라 달렸다. 숨이 턱에 차서 내가 지칠 무렵에야 바둑인 겨우 달리던 걸 멈추고는 발랑 누워서 용서를 빌었다.
나는 바둑일 허리에 끌어안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기관차는 아득히 먼데, 기적은 연거푸 울었다. 나는 또 뛰었다. 기차가 우리를 버리고 떠날까 봐, 기차가 달릴 철로 위를 되돌아 뛰었다. 내가 헐떡이며 기관차 앞에 닿았을 때 기관사는 이 판국에 강아지 한 마리가 다 무어냐고 고함을 쳤지만, 나는 사과할 겨를도, 기운도 없었다.
불쌍한 우리 바둑이를 또다시 이 사지에 버리고 떠날 수 없는 내 심정을 그가 알 까닭이 없었다.
최순우 전집5 단상·수필『한국미 산책』p256-260
최순우(1916~1984)
미술사학자, 작가. ‘한국국보전’ ‘한국미술5000전’ 등을 주관하며 한국의 미를 널리 알리는 데 공헌했다.
1945년부터 5년간 문학 동인지 『순수(純粹)』 주간 역임.
『최순우전집』(전 5권)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학고재, 1994)
・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최순우, 학고재, 2002)
※자료 詩
아지랑이가 있는 집
이향아
집에는 내 부끄러운 풍속이 있다
밥통 같은
간장종지 같은
요강단지 같은
집에는 부스러진 내 비늘이 있다
머리카락 같은
손톱 같은
살비듬 같은
집에는 내 아지랑이가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세어보는 색깔
집에는 슬픈 껍데기 얼룩진 콧물
그보다 치사한 인정이 있다
집에는 내 냄새가
고집이 있다
앉아서 돌이 되는 집념이 있다
이향아(본명 이영희)
1938년 충남 서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문단에 오른 후, 『별들은 강으로 갔다』, ,『캔버스에 세우는 나라』,등 시집 24권.『불씨』등 16권의 수필집,
『창작의 아름다움』등 8권의 문학이론서를 펴냄.
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상, 아시아기독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함.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먼 길 어디쯤 오려나. 한 뼘밖에 안 되는 그 길은 무한한 비밀을 숨긴 채 애를 태운다.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화초는 자기들만의 생의 비법이 있겠지. 꽃마다 화사함 뒤에 숨긴 은밀함이 있다. 그들의 신비한 몸짓과 향기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날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 옛날 엄마가 화초를 들고 쩔쩔매던 모습을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수도국산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저 멀리 월미도 앞바다까지 다 보인다. 흉내만 낸 집들이 게딱지같은 지붕을 이고 다닥다닥 붙어있다. 부모님은 전쟁 통에 강화로 부산으로 피란을 다니다 산동네에 둥지를 틀었다. 달빛이 쏟아지면 아이들이 몰려나와 숨바꼭질하느라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와글거렸다. 장대비가 퍼부을 때마다 변소에서 똥을 퍼 개천에 버리는 집도 있었다. 구린내가 온 마을을 적실 때마다 우리 가족은 대책도 없이 빨리 이사 가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컸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동치미 국물을 먹으며 겨울을 보냈다. 나는 달동네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쑥쑥 자랐다.
몇 년 전 형제들과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갔었다. 조명이 컴컴한 박물관에서는 금방이라도 엄마의 저녁밥 먹으라는 목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귓전에 달라붙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속이 불편한 이유는 뭘까. 아니, 가슴이 아려왔다가 맞다. 남루한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층 아파트가 즐비해서 신기루처럼 떠도는 도시에 갇힌 듯 방향감각을 잃었다. 윗집 복기네 아랫집 승규네를 끼고 골목골목 뛰어놀던 옛집을 어렴풋이 짚어 가지만 짐작만 해야 했다.
내화벽돌을 쌓는 아버지는 손재간이 뛰어나셨다. 사람만 좋아서 실속이 없었다. 전국을 내 집처럼 다니다 잊을 만하면 집에 오셨다. 노동의 땟국으로 절은 봉투는 빈약했다. 엄마는 거룩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감사하셨다. 소중한 돈은 삼남매를 위해 알뜰살뜰 들어갔다. 당신 뼈에 바람이 들락거리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자신의 몸을 위할 생각은 안 하셨다. 헛헛한 시간은 교회를 다니고 화초를 가꾸며 메우셨다. 난소에 자꾸 혹이 생겨 자궁을 모두 들어낸 후 꽃이 시들듯 쪼그라지셨다.
엄마는 결핍과 적막을 감당하시느라 꽃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엄마가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생각도 했었다. 시난고난 앓던 분이 그 무거운 화분을 들고 애면글면하던 이유를 이제야 안다. 그저 그런 화초들마저 새삼 돌아보며 경탄하는 나이가 되니 알겠다. 눈빛을 반짝이며 꽃과 마주하던 엄마의 모습이 육십여 년이 지나도 선연하다. 그리움 주위에 아픔이 공전하는 이유를, 그것을 깨닫다니 다된 나이에 철이 났다.
엄마는 육십에 먼 길을 떠나시고 나는 툭하면 울었다. 진작에 병원에 모시고 가 혈액검사만 했었더라도 수를 누리다 가셨을 것을. 앞서가신 발자취는 내 몸 곳곳에 깊이 새겨졌다. 이것저것 검사하며 나는 삶의 모순에 자주 빠진다.
실란은 금방이라도 꽃대가 쏘옥 올라올 것처럼 이파리만 이들이들하다. 베란다가 답답할까, 햇살이 부족한가. 아니면 조각난 바람에 감질난 것인가. 물을 자주 주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무슨 변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한 실란에게 눈총만 줄 일이 아니다. 급기야 화분을 거꾸로 들고 쏟았다. 둥근 뿌리들이 뒤엉켜 빽빽하다. 저들의 사랑은 얼마나 절절하기에 꼭 붙어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꽃필 때를 놓친단 말인가. 커다란 화분으로 옮기고 숨쉬기 편하도록 거리를 두었다. 자주 들여다보며 말을 걸고 이파리를 쓸어내렸다. 분갈이한 지 얼마 안 되어 꽃대 열 주가 나란히 올라온다. 아, 두근거리던 가슴이 곧 경건해졌다.
우리 가족은 산동네를 내려와 평지로 이사를 했다. 언젠가 무덥던 날 뜰엔 온통 흰 빛깔의 실란으로 눈이 부셨다. 꽃처럼 곱던 부모님, 손주들에게 꽃을 보여주시며 함께 웃던 그때가 절절하다. 물김치에 국수를 말아 먹고 수박을 잘라 먹던 그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부모님의 은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집을 늘렸다. 학교에 보내고 공부를 잘해 행복했다. 남편과 희희낙락 하는 사이 부모님은 늙고 돌아가셨다. 옹색하고 알뜰한 살림이 당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했었으니 실란 옆에 앉아 뜨거운 것이 위로 솟구친다.
실란의 꽃대가 수도 없이 올라와 꽃망울이 환하다. 꽃송이 속에는 암술과 수술이 가족처럼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이 핀 듯하다. 노란 꽃가루가 담뿍 붙어 통통한 아이들 머리통이 연상된다. 햇살이 퍼지면 여섯 개의 꽃잎이 별처럼 펼쳐진다. 엄마보다 훨씬 늙은 딸은 옛날 집이 생각나 그리움에 사무친다.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이라도 그것이 그렇게 허망할지라도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뿌듯하다. 엄마의 시간은 영원히 멈추어 있다. 엄마는 하늘 저편에서 꽃을 가꾸고 계실 게다. 하찮고 볼품없는 꽃을 애지중지 아끼고 그들의 아픔과 수고를 돌보고 계실 거라 믿는다.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다. 삶을 쥐락펴락하며 멋지게 살고자 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얽히고설킨 인생길을 빠져나왔더니 삶의 끄트머리다. 노을처럼 펼쳐진 길 위에서 엄마가 보여주신 고귀한 사랑을 답습하며 담대하게 걸어가련다.
선선한 바람이 인다. 더디게 올라와 애를 태우던 꽃잎이 쉬이 진다. 꽃잎 끝부터 도르르 말린 여섯 개의 꽃잎이 파리해져 간다. 만남과 헤어짐의 변화에 묵묵히 순응하는 실란의 몸짓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김 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묵직했다.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훅’하고 들이마셔 봤다.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갑자기 들어온,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산부인과병원 원장이다.표정으로 보아도 전혀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그는 매일 그렇게 햇빛을 받아 마신다고 했다.순간 내가 마셔버렸던 유리컵을 다시 바라보았다.컵은 다시 창가의 제자리로 가 있었지만 해가 없어졌으니 햇빛도 없다.그런데도 유리컵에 내가 채 마시지 못했던 몇 개의 햇빛 알갱이들이 남아 보석가루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그렇고 보면 햇빛도 포근히 안기거나 한곳에 담겨 쉬고 싶을 수도 있겠다.
태양에서 발산된 빛이 대기 속을 뚫고 내려와 발견한 한 작은 공간,거기 갇힌다기보다는 빠져든 순간,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그건 어머니의 품속 같이 안온할 수도 있고 태양으로부터 보내지던 순간의 보드랍고 따스한 느낌일 수도 있다.그 먼 거리를 달려와 이른 곳이 고작 작은 컵 속이라는 것이 화가 날 법도 하지만 땅으로 스며들어버리는 수많은 동료들을 보면서 그나마 그들과는 다른 곳에 이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빛은 초당 삼십만 킬로를 가니 태양에서 발산된 빛이 이곳에 닿는 데까진 약8분20초가 걸린 셈이다.그렇다고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이 아니다.만일 빛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었다면 어떨까.로켓이라면5개월을 가야 하는 거리요,비행기라면17년,소리였다고 하면15년이고,새마을호 기차라면114년,걸어서는4,270년이나 걸리는 거리다.
내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맛이 어때요?”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글쎄요.향긋한 것 같기도 하고...”내가 얼버무리자 마음이 상대에게로 가는 데는0.5초라더니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맛은 없을 거예요”해 버린다.그의 말은 참 사무적인데도 싫진 않다.사실 여기 무슨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어느 날 진료를 하다 물을 마신 컵을 마땅히 치울 곳도 없어 창가에 놔뒀다.그런데 햇빛이 창 안 깊숙이까지 들어오고 있었다.그 햇빛이 창가의 컵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도 보였다.순간 햇빛이 컵에 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보석가루 같은 빛의 알갱이,하나님의 선물이 지금 컵에 담기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컵을 들어 주욱 들이 마셔봤다.가슴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갑자기 빛이 들어간 가슴 속에서 반가운 악수소리가 막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바깥 나라는 어떠니?’서로 묻고 답하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그는 그렇게 햇빛받이 컵을 창가에 계속 놓아두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매일 햇빛을 받아 마시게 되었을 수 있다.어쩌면 나도 그랬을 수 있다.내가 전혀 부정적이 안 되는 것도 그와 같은 생각을 나도 일찍부터 하고 있었을 수 있고 아니더라도 그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가능한 데다 거기에 내가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손에 잡히는 것에만‘있다’라고 말한다.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잡히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다.정작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아주 큰 것도 작은 것도,아주 먼 곳도 가까운 곳도 볼 수 없는 게 우리 눈이고 들을 수 없는 게 우리 귀다.공기나 햇빛,바람의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보지도 못한다.그러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문득 김 원장이 내게 햇빛이라며 마셔보라고 한 건 보이지 않는 것도 보라는 특별한 마음 씀 같이 생각이 되었다.
햇빛 마시기,참 그럴싸한 생각이지 않은가.내 안의 어두움을 밝혀줄 기회요,엄청난 살균력이 있다는 햇빛이니 그게 또 내 안 깊숙이 들어가면 거기 있으면 안 될 것들이 순식간에 괴멸되는 최고 유익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그러고 보니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게 햇빛이었는데 나는 그걸 너무 모른 체 하고 살아오지 않았나싶다.
너무 큰 은혜나 사랑에는 고마워할 줄도 미처 깨닫지도 못 하고 사는 게 사람이란다.그런 면에서 김 원장이 더욱 고맙다.그 고마움의 마음 표시로라도 나도 당장 내 방 창가에 가장 투명한 컵 하나를 놓아두어야겠다.그리고 거기 담긴 햇빛을 소중히 내 속 깊이로 들여보내 주리라.그것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밖에 되지 않을 지라도 내 삶 속엔 아주 작게라도 소중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것 같다.어쩌면 내 마음도 한결 깨끗해지고 생각도 정신도 맑아질지 모른다.
햇빛 마시기는 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다.바깥세상을 안 세상으로 들여보내기다.생각의 전환이다.마실 수 있는 것의 영역 확대다.새롭게 보기다.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아름답지 못하거나 바르지 못한 생각과 마음들이 들여보내진 햇빛으로 하여 씻기고 닦이고 다듬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컵을 준비하러 가는 내 마음도 창가의 햇빛보다 더 밝아진다.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내 안이 밝아지게 되면 세상도 조금 더 밝아질 게다.내 안의 어둠이 걷히면 거기 새로운 희망의 싹들이 마구 피어날 것 같다.
누름돌
최원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 지는 것이 있다.앞서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만 못한 분은 없다는 생각이다.눈에 보이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다.그 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날들은 분명 오늘의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과 조건의 세상살이를 하셨다.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그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몫을 아름답게 감당하셨던 것이다.
요즘의 나나 오늘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분들보다 어렵다고는 할 수 없겠고,특히 그분들이 처해 있던 시대는 지금에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였었다.그럼에도 묵묵히 보다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엄격하게 당신들 스스로를 절제하고 희생하셨다.그분들의 어느 한 삶도 결코 오늘의 우리만 못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저 잘났다는 표를 지나칠 만큼 서슴없이 해댄다.향기도 지나치면 역겨움이 되지 않던가.멋을 낸답시고 호화로운 옷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그런 모습이 부럽고 아름답게 보이기보단 거스르고 거들먹대는 모습으로 보인다.그러나 무명 적삼 내지 무명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어린 눈에도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던 앞 세대 어른들 모습은 지금에 생각해도 훨씬 더 아름답고 품위 있어 보이고 위엄 넘쳐 보인다.
강원도 정선엘 갔다.다들 냇가로 나간다고 해서 나도 따라 나갔는데 그곳에서 수석(壽石)을 한다고 했다.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저 돌일 뿐이었다.다들 의미를 부여한 돌 한 두 개씩을 가져가는데도 나만 빈손이다가 문득 어린 날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할머니께선 한 해에 한번쯤은 부러 냇가에 나가서 납작 동글 손바닥 만 한 돌멩이를 한 두 개씩 주워오셨다.그걸 무얼 하려느냐고 물으면 누름돌이라 했다.
누름돌,나는 그때 그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나중에 그 용도를 알게 되면서 부터는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다 냇가에 들러 그런 돌을 주어다 드리면 할머니께선 매우 좋아하셨다.그 어린 날이 생각나 뒤늦게 마음이 급해져 누름돌로 쓸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어쩌면 그건 순전히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겠지만 내 삶에도 그런 누름돌이 필요하단 생각도 했을 것 같다.
누름돌은 모나지 않게 반들반들 잘 깎인 돌이어야 한다.그걸 깨끗이 씻어 김치 수북한 김칫독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로 아주 서서히 내리누르며 숨을 죽여 김치 맛이 나게 해주는 돌이다.그런가 하면 조금 작은 것은 때로 밭에서 돌아와 저녁을 지을 때 돌확에 담긴 보리쌀을 쓱쓱싹싹 갈아내는 돌이기도 했다.그래서일까.그 돌은 어두운 부엌에서도 금방 알아볼 만큼 빛이 났다.밤낮 없는 할머니나 이모의 쓰임에 따라 더 닳고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다 나도 손에 쥐어보면 돌의 차가움이 아닌 왠지 모를 따스함이 감지되기도 했다.
요즘 내게 부쩍 그런 누름돌이나 돌확용 돌이 하나쯤 있었음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뭔가 모를 것들에 그냥 마음이 들떠있고 바람 부는 대로 휘둘리는 키 큰 풀잎처럼 좀처럼 내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렵다.이런 때 그런 누름돌 하나 가져다 독안의 김치 꾹 눌러주듯 내 마음도 눌러주었으면 싶다.거친 내 마음을 돌확에 넣고 확돌로 쉭쉭 갈아주었으면 좋겠다.그래서 스쳐가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에 주제넘은 욕심을 펴는 날카롭게 결로 깨진 돌 같은 감정들도 지그시 눌러주거나 갈아내 주었으면 싶다.아니다.그보다 짜고 맵고 너무나 차가워 시리기까지 한 김장독 안에서 보아주는 이 없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곰삭은 김치 맛을 만들어내는 누름돌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그렇게 생각해 보니 옛 어른들은 다 누름돌이거나 최소한 누름돌 하나씩 품고 사셨던 분들 같다.누가 가르쳐주지도 누가 그렇게 하라고 안 해도 아주 자연스럽게 누름돌이 되었고,또 상대를 자신의 누름돌로 인정도 해주었다.내뻗치는 기운도 억누르고,남의 드센 기운도 아름답게 받아 안는 희생과 사랑의 마음들이 서로 나눔으로 이해로 살아있었던 것 같다.그렇기에 그 어려운 삶의 현장,차마 견디어낼 수 없던 시대의 질곡에서도 아픔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으리라.
우리 집에선 그때 내가 정선에서 가져온 누름돌이 단단히 한 몫을 했다.베란다의 항아리 안에서일 때도 있고,오이지를 담글 때도 곧잘 사용했다.요즘이야 보리쌀을 갈아 밥 짓는 일은 없어졌으니 확돌이 될 일은 없지만 어쩌다 제 몫의 일이 없어 바닥에 놓여 있거나 항아리 뚜껑에 올라와 있어도 어린 날을 추억케 하면서 내 삶의 누름돌을 생각게 한다.
두 동강이 나버린 누름돌을 보며 안타까워하시던 외할머니 모습도 생각난다.단순히 못 쓰게 된 돌 하나가 아니었으리라.웃자라는 욕심에도 성급한 마음에도,서운함으로 파르르 떨리던 마음,시집살이 고된 삶의 눈물도 누름돌을 씻으며 삭이던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그래 설운 마음 꾸욱 누르고 누르고 하셨던 그 마음이 담겨있었을 텐데 깨져버리자 마음이 찢기는 안타까움과 헤어짐의 슬픔을 느끼셨을 것이다.내 나이도 이젠 들만큼 들었는데도 팔딱거리는 성미며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서는 당돌함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누름돌이 없어서일까.이제라도 그런 내 못된 성질을 꾹 눌러 놓을 수 있도록 누름돌 하나 잘 닦아 가슴에 품어야겠다.그게 나뿐이랴.부부간에도 서로 누름돌이 되어주는 것이 좋겠고,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지간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도 훨씬 더 밝아지고 마음 편하게 되지 않을까.김장을 처가에서 해와서인지,김치 냉장고 때문인지 지난겨울 내내 베란다 바닥에 누름돌이 하릴없이 놓여있었다.나도 그게 특별히 쓰일 데가 없어 그냥 본 체 만 체 했다.그러나 내일은 마침 집에 있게 되니 아내 몰래 저 두 개의 돌을 깨끗이 씻어 뚜껑 덮인 항아리 위에라도 올려놓아야겠다.그걸 보며 왠지 모르게 들떠있는 내 마음도 꾹 누르면서 말이다.아니다.그러기도 전에 정성껏 김장독에 올려놓던 할머니 모습이 먼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종소리
최원현
“대앵,대애애앵”종소리는 신기하게도 십리가 넘을 우리 집까지도 들려왔다.교회와 우리 집이 모두 조금 높은 곳에 위치했다 하더라도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동산도 두 개나 있건만 수요일 저녁만 되면 종소리는 어김없이 우리 집에까지 들려왔다.할머니는 먼 어두운 밤길은 다녀올 수 없기에 종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를 하시곤 했다.그렇게 중학교3년간을 들었던 종소리다.
막내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 화요일 저녁이었다.어머니 대신 나를 업어 키워 주신 분이다.몇 년 전부터 치매가 와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돌아가신 것이다.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이리 빨리 돌아가실 것 같진 않았었다.
하지만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뼈와 가죽만 남은 가느다란 몸매와 얼굴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앉아있는 것이라 할 정도로 똑같아 나를 놀라게 했다.나이가 들면 부모 모습이 된다더니 이모의 모습은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저렇게 똑같아질 수 있을까싶게 닮았다.할머니도 치매로 고생 하다 가셨다.할머니가 여든 일곱에 가셨는데 이모는 일흔 여덟에 가시니9년이나 빨리 가신 셈이다.
새벽 첫차로 이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내려갔다.성공한 세 아들의 문상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빈소에서 이모님과 마주했다. 10여 년 전에 찍었다는 소라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은 영정사진 속에서 이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원현이 왔냐?오느라 고생했다.”사진 속에서 이모는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지난 번 병원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어디서 오셨소?누구시요?”하던 이모였는데 오늘은 반갑게 알은 체를 하며 맞아주고 있다.
순간 어린 날 들었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허나 종소리가 들려올만한 곳은 없었다.그런데 이모가“요새도 교회 잘 댕기냐?”하시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세상 천지에 네 의지 될 만헌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교회로 너를 데꾸 갔단다.”이모는 웃는 얼굴 채로 조근조근 할머니 애기를 했다.그러고 보니 곱게 차려입은 모습도 외할머니 모습이다.참 정갈하신 분이었다.십리 황토 길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장에 다녀오셔도 어찌 걸음을 하셨는지 버선에 흙 한 점 튀지 않았고 결코 버선코를 넘어선 흙도 없었다.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했다.그러나 세월에 장사는 없다더니 연세 들어가며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렸다.그 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이모가 또 그 길까지 따라 걸었다.해서일까.내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로 장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괜찮다.봤으니 되얐다.잘 살어라.”이모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왜 종소리였을까.아마 이모도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멀리 퍼지는 종소리처럼 여운을 붙잡고 살았다 함일까.그렇다고 누가 그 그리움의 끈을 흔들어 종을 쳐 줄 것인가.그래도 종소리의 긴 여운은 내 남은 삶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잘 사냐?” “잘 살어라”할머니와 이모 두 분 모두의 한결같은 물음이고 순하디 순한 그분들만의 나에 대한 축복이고 소원이었다.나는 두 분의 목소리 여운을 내 가슴에도 울리고 있는 종소리로 들으며 두 분 바램의 의미 담긴 잘 사는 일을 남은 내 삶 동안 꼭 지켜가야 한다.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신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할머니는 평생 나만을 바라보며 사셨다.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어린 날에는 온갖 부러움 다 받으며 사셨지만 바람처럼 나다니시는 할아버지 만나 결혼 후에는 어렵게 어렵게만 사셨다.거기다 딸만 셋을 두신 것도 큰 서러움이셨을 텐데 큰딸 내외에 둘째 셋째 사위를 다 먼저 보내셨으니 그 참담한 가슴을 무엇으로 다독일 수 있었겠는가.그런 큰 딸이 홀로 남긴 세 살짜리의 유일한 피붙이인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시울은 한시도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조금만 더 철이 드는 걸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노래처럼 말씀 하셨던 그 걱정 속 할머니의 성화로 일찍 결혼을 했던 나는 다행히 남매를 두게 되었고 딸과 아들은 내게 다섯이나 되는 손주를 안겨 주었다.그 딸아이의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도 보고 가셨으니 당신의 모든 염려는 기우(杞憂)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 결혼식 날 돌아가셨다.결혼식을 막 마쳤는데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의 전보를 받았다.신혼여행 대신 상주가 되어5일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길에 함께 했다.멋쟁이셨던 할아버지,그러나 당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암울한 시대에 가장 평범한 삶으로 살다 가신 분이셨다.내게는 참으로 엄하셨다.행동거지 하나,사람의 도리 하나하나 어린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심어주셨다.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방향을 인도하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의 내게 대한 바램은 오직‘잘 살어라’였다.그‘잘’과‘살어라’의 의미를 아직까지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종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내 가슴 속을 울리고 있는 말씀이다.
이모는 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끈이었다.그 끈도 이젠 끊긴 것이다.그러고 보면 이젠 그때의 교회당 종소리도 요즘엔 들을 수 없다.그냥 시간 되면 교회도 알아서 가고 오라고 하지 않아도 갈 줄 안다.그러나 오라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계없이 종소리가 울리면 그 종소리의 의미를 생각했었고 한 번쯤 마음도 가다듬었던 옛날의 그 종소리,이모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까지도 내게 그 종소리를 상기시키셨는데 사실 이모님이 내게 들리던 마지막 종소리였던 것 같다.그 종소리마저 끊긴 지금 이제는 그 종소리의 여운으로나 살아야 할까.
소라 색 한복 저고리를 입고 고운 미소로 나를 보던 이모님,수요일 저녁이면 들려오던 종소리에 손 모으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할머니,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하라며 가르침 주시던 할아버지,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다 나를 바로 세워주던 종소리였다.그런데 긴 여운으로 들려오던 그 종소리조차 이젠 자꾸만 놓치는 것 같다.그런 나는 누구에게 얼마큼의 어떤 종소리가 되고 있을까.
숨어있는 향기
최원현
야,살았구나!
드디어 새 촉이 나왔구나,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2년쯤 된 것 같다.직장 동료들 몇이서 전라도 어딘가로 난을 캐러 간다고 하더니 춘란 몇 촉을 내게 주었다.
나는 원래 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까다롭다고 하는 난 기르기에 선뜻 나서고 싶지도 않아 어느 집이건 한두 분(盆)쯤은 있기 마련인 난 분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난이라고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아무리 야생란이라고는 해도 내가 평소에 보아 왔던 그런 난의 품위도 찾아볼 수 없었고,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잎은 과연 내가 이것을 살려낼 수 있을까 싶게 자신도 생기지 않았다.그러나 나도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에다 이 나이의 내 방에 난 분 하나 없다는 것도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고,남의 집에 갔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난의 신비롭던 꽃 모습이며,은은하게 풍겨나던 난향이 생각나 이 기회에 나도 한 번 시작해 볼까하는 호기도 생겼다.
꽃집에 들러 화분과 흙을 사고 그곳에서 일러준 대로 정성스레 심었다.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던 것이었는데 화분에 심어 놓으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게 해서 내 방에 난이 놓여지게 되었다.그런데 하나를 놓고 보니 너무 외로워 보인다.정을 붙이고 뿌리를 내릴 엄두조차 못낼 것만 같다.해서 평소 난을 좋아하시는 숙모님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더니 난을 나눠주시겠단다.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친걸음에 숙모님 댁에서 난 분 하나를 얻어다 함께 놔주었다.
한결 좋아 보인다.갑자기 방안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고,나도 제법 운치깨나 아는 선비 같아 보인다.
나는 그 때부터 난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
헌데 숙모님 댁에서 가져온 난은 이내 새 촉이 올라오고 잘 자라는데 야생 춘란은 늘 그대로다.혹시 뭔가 잘못 되었나 싶어 뿌리를 확인해 보면 뿌리가 매말라 있기도 했고,어떤 땐 뿌리가 거의 다 썩어 있기도 해서 이게 어떻게 살아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러면 그럴수록 그 난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아닌가.아내는 자기보다 난을 더 생각한다며 자기는 난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투정을 해댔지만 나는 그 난이 죽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내가 마음을 주면 줄수록 난은 더 몸살을 하는 것 같았다.더욱이 얼핏 보면 이미 죽은 것처럼 보여 식구들에게도 당부를 해 놓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밖에 내다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까지 겹쳐 나도 함께 앓기 시작했다.
그런 난이 죽지 않고 끈질기게 나와 함께 목숨 지키기를 하더니 오늘 이렇게 산을 들어올리는 감격으로 새 촉을 틔워 올린 것이다.
그 동안 몇 개의 난 분이 늘었다.그런 중에도 나는 그 춘란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그러다가 얼마 전 난을 파는 곳에서 우리 집의 난 이야기를 했더니 난의 생김새를 묻고는 그런 난은 일 이 천원이면 한 줌씩 준다면서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애지중지 마음을 써 주었던 난이 그토록 값싸고 흔한 것이며,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정성을 쏟았구나 하는 후회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잘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만일에 내가 처음부터 난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면 그런 난을 준다고 받기나 했겠으며,설혹 받았다고 해도 그토록 정성을 쏟을 수 있었겠는가.결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함께 앓으며 목숨을 지켜줄 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세상이기에 좋아 보이면 우선 얼마짜리냐고 묻는 요즘 사회이지만 생명엔 귀천이 있을 수 없는 것,비록 한 포기 난일지라도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섭리와 은총이 내려진 생물체요,어쩌면 인간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엔 더 아름다운 피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그 때 앞으로 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어떤 것이 좋고 귀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나도 필시 그 좋은 것,일반적으로 누구나가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들 쪽으로만 눈을 돌리고 그렇지 않은 것에선 자연스럽게 발을 돌릴 것이 아닌가,그리고는 그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릴 것이다.
물론 난은 꽃을 보기 위함이니 나중에 내가 그처럼 정성을 쏟았던 난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이 없어서 몹시 속이 상할런 지도 모른다.아니 그것보다 어쩌면 꽃조차 피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그러나 두 해가 넘는 동안의 내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인내하며 참으로 힘겹게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드디어는 하늘 문을 여는 감격으로 장하게 촉을 틔워 살아 있음의 의미를 내게 보여준 난에게서 고마움과 안쓰러움과 감동을 함께 안는다.거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자 난의 감격,환호,기쁨,보람이 정말 하늘에 닿는 충만함으로 내게 향해진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집안 어른 한 분의 별명이'섰다'였다.별명이 하도 이상하여 왜'섰다'라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로 얼굴들을 쳐다보며 기다렸다는 듯 배를 움켜쥐곤 웃어댄다.
얘기인 즉,그 할아버지가 일곱 살 때까지 일어서지를 못했단다.그래서 영영 서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방안에서'섰다'하는 소리가 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바라보니 일곱 살짜리가 열린 방문 고리를 붙잡고 일어서서 다리를 덜덜 떨며 저 혼자서 일어섰다고 환성을 지르더라는 것이다.그때부터 다리에 힘이 오르기 시작하여 곧 걷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별명이 그 날 이후로'섰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옛날에 들었던 그'섰다 할아버지'의 감격이 어쩌면 저 춘란의 감격이 아닐까 싶다.이제부터 저 난도 섰다 할아버지처럼 다른 난에 뒤지지 않고 쑥쑥 자라 오를 것 같고,뿌리도 화분에 가득하도록 튼실하게 차오를 것 같다.
지금 당장 성과가 없다고,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없다고 쉽게 자포자기 해 버리고,또 쉽게 저버리고 마는 이 시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신선하고 맑게 들려오는 한 소리인가.
난 분을 여리게 볕이 들 수 있는 쪽으로 옮겨주며'어느 난도 가지지 못할 너만의 꽃을 피워다오'가만히 속삭여 본다.
꽃도 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제껏 맡아보지 못했던 솔향기,풀내음들이 몰려와 춘란을 감싸고,방안엔 때 아니게 피지 않은 난에서 나는 난향이 가득 차는 것 같다.
향기는 꼭 꽃에서만 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람에게서도 품향이 나타나듯 어쩌면 가장 향기로운 것은 꽃을 속으로 머금고 있을 때의 숭고한 정성스러움에서 나는 것은 아닐까. (1994)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최원현
하늘과 바다가 반가운 포옹을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그 품안에서 빠져 나온 푸른 숲,그리고 하얀 옷에 오렌지색 모자를 쓴 건물들이 쪽빛 바다에 내리다 반사되는 햇살을 받아 여유롭게 빛나고 있었다.빛과 색이 수줍은 듯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였다.
내게 통영은 이상스러우리 만큼 그리움을 일으키는 곳이었다.통제영(統制營)이라는 크고 엄숙한 느낌보다도 바다와 섬 그리고 섬 만한 산과 항구가 마치 모태 속 여덟 달 아기의 방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대개의 어항이 주는 음습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가을 하늘처럼 맑고,청렴 고결한 선비 같은 품위를 자아내는 도시,그래서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미항으로 불려왔나 보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남망산엘 올라보고 싶었다.중턱에 서있다는 청마의 시비도 보고 싶고,저 한산대첩의 현장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있을 충무공 상 앞에서 나도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싶었다.그러면 내 삶에도 어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았다.
역사는 말이 없다지만 아니었다.통영에 오면 무수한 목소리들이 들렸다.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수많은 말들이었다.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이 피안의 모랫벌처럼 밀려들게도 하고,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보면 이 땅에서 살다간 이들의 애환이 몽실몽실 솜구름처럼 피어오르기도 했다.
미명의 아침이었다.바다의 일출을 보고자 했는데 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아니 섬 뒤로 부끄러운 듯 사알짝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이내 둥실 몸을 드러낸다.순식간에 누리의 바다가 온통 황금빛이 되어 버린다.통영의 일출은 망망한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장엄하지 않으면서도 긴 여운의 감동을 오래도록 가슴에 남게 하는 그런 해 떠오름이었다.
남망산(南望山)에 올랐다.높지도 낮지도 않게,바다와 섬과 도시에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꼭 어울리는 키와 덩치로 자리한 산,얼핏 고래의 등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산은 살아있었다.수필 작가인 이곳K시장의 사랑과 꿈과 열정이 도시의 곳곳에서 살아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숨결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이곳 남망산인 것 같다.시민회관이 그렇고,작은 오솔길 하나에서도 정성스런 마음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남망산 조각공원은 국내작가5명에 외국작가1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그들은 그랑블루(Grand Blue)라는 통영의 자연환경에 맞는 주제로 자신의 작품이 설치될 수 있도록 직접 설치될 장소와 주변환경을 검토하고,거기에 맞는 작품의 내용과 크기와 재료를 결정하는 심포지엄 형식을 통해 이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꿈꾸는 듯한 쪽빛 바다와 군데군데 떠있는 섬들의 어울림은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흥겨움,그리고 명상적 태도의 통일된 공감대로 승화시켜 내고자 함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브론즈와 스텐레스 스틸을 소재로 한<허공의 중심>이란 제목의 우리 나라 작가 작품이었다.나신(裸身)의 남성상을 다섯 단계로 설치하였는데 삶과 죽음,영혼과 육체,정신과 물질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등 이원론적 사고(思考)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해 내고자 하는 인간의 고귀한 염원을 나타낸 인체조각이었다.강한 이미지의 나신 남성상(男性像)에서는 태초의 에덴과 같은 원초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생명력은 생겨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았으며,특히 삶에서 죽음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인간이 신 앞에서 생명에 대해선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인정케 하고 있었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랑스 작가의 나무와 고무와 모터를 소재로 한<잃어버린 조화>라는 작품이었다.움직인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단순한 반복 동작은 주제도 없는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움직임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있었다.곧 인간의 삶은 이런 무의미한 반복 동작일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한 것으로 모터의 동력에 의해 연결된 여러 토막의 통나무가 움직임으로 인간 행위와 삶의 의미를 곰 새겨보게 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분재,시간과 공간을 체험케 하는 입방체의 공간,인체라는 소우주를 통해 초자연적인 우주의 원리와 생명력 및 영원의 활력을 표상하고 있는<출산>,음(-)과 양(+)의 균형 속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을 통해 명상할 수 있게 하는<망산>등은 삶과 죽음이란 대 주제를 자연적 지리적 환경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게 함으로서 크게는 남망산 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 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의 초점은 역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자리였다.가만히 보면 통영은 우리 나라 모형의 축소판이다.수군통제사가 수군을 통제 훈련하던 것처럼 삼면의 바다가 통영으로 모이고 통영에서 다시 나래를 편 물결은 태평양을 향해 더 힘차게 퍼져나가듯 통영은 세계로 세계로 한국을 빛내갈 힘의 발원지였다.
그래서일까.통영이 낳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 박경리는 그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의 시작에서 자신의 고향 통영을 이렇게 그려놓았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그러니 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청마(靑馬)의 시비 앞에 섰다.그의 시 깃발이 바다를 등에 업고 새겨져 있다.통영에는 청마가 살면서 거닐었던 거리와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보내던 우체국이며,호심 커피숍 등 추억이 깃든 곳들이 많다.물론 지금엔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지만 그 자리엔 가지 못하더라도 통영에 오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결,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시비 앞에 서니 더욱 그가 그립다.새로 세운 청마문학관에 가면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큼이라도 채울 수 있을까.
청마는 그랬다.
"여기엘 오면 나도 어부가 되고싶다/그리하여 저 대해(大海)의 심산유곡으로 헤치고 나아가/억센 그들과 맞싸우며 그들을 모조리 잡아 비끌어오고 싶다"(청마의 시 어시장에서)고...
사람들이 통영에 오면 그리움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 같다.
언젠가 젖먹이 아이와 한참을 놀아주고 나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그런데 차를 타고 얼마동안을 간 곳이었는데 내 몸에서 아기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아기를 안고 놀았던 사이에 아기냄새가 몸에 배었나보다.
통영은 예향이다.그것은 산자수려함뿐 아니라 그곳을 빛내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그곳을 통해 맑고 깨끗한 성정에 젖었고 또 그렇게 청명한 사람이 되어 그의 주위까지도 청정하게 만들었다.겨우내 얼어 있다 봄이 가까워지면 얼음장 밑으로 녹아 흐르는 산골 물 같은 맑고 시원함이 너른 바다에서도 느껴지는 곳,비록 통영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잠시 안아주었던 아기에게서 배어나던 아기 냄새처럼.내게서도 분명 통영냄새가 솔솔 풍겨 날 것 같다.
함께 있어도 그리운 곳,하물며 떠나가면 오죽 더하랴.고향도 아니면서 이만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건 아름다운 풍정만은 아닐 것 같다.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다음 번에 오게 될 때는 나도 오렌지색 모자를 쓰고 올까보다.그럼 더욱 정감이 넘치지 않을까.마지막 둘러보기인 해저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망산 위에 머물던 낮 해가 통영을 둘러본 느낌이 어떠냐는 듯 환한 웃음 가득 우리를 내려다 보고있다.
애향작품집《통영의 향기》(2001.7.교음사)
저녁 노을
최원현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저녁 노을은 반가운 충격이었다.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분명 홍시 빛이었다.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30년도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든다.
고등학교2학년 때,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신다.커다란 장도감이었다.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려운데 누군가 갖다드린 모양이다.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것이다.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헌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은 것이 안타까워하시다가 보여라도 주겠다며 다음 해 내가 내려갔을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쌀벌레가 묻어 있고,역겨운 신 냄새까지 났다.그러나 그런 냄새까지도 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니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로 왔다.눈물이 핑 돌았다.할머니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 마루에 걸려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외쳐댔지만 목소리는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그 날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그러나 할머니는 아니 계신다.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할머니가 받아들인 순리를 이제 내가 받아들일 차례가 된 것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수필과 비평》2002.4.5월호
잡초 뽑기
최원현
요즘 들어 나는 때 아닌 잡초 뽑기에 시달리고 있다.하룻밤 자고나면 여기저기에 자리잡아버린 잡초들이다.이놈들은 싹 터서 자라는 기간조차 없이 어딘 가로부터 불쑥 날아 들어와 터를 잡아버린 놈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운영하고 있는 문학사이트에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광고물들인데 어찌나 교묘한 방법을 쓰는지 막아낼 길이 없다.내 역량으로는 오로지 하나씩 열어서 제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소홀하면 제목만으로도 낯 뜨거운 음란 광고물들로 게시판이 온통 도배가 되어버린다.주인 모르게 침입하여 나 몰라라 자리를 잡아버리는 아주 고약한 놈들로 도저히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어쩌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분들께 큰 실례를 하게 될 일이다.
나는 제대로 농사를 지어보지 못해서인지 잡초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땅에게는 잡초가 있을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잡초라 하는 것이지 그게 만일 어느 땐가 요긴하게 소용되면 특별재배라도 해야 될 테고 잡초란 이름 대신 분명 어울리는 좋은 이름을 붙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하기야 우리가 잡초라 부르는 것들만으로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든 이도 보았다.그러나 이침이고 저녁이고 틈만 나면 들어가 없애야하는 내 문학의 방 온갖 광고물들은 정말 미운 잡초라 조금의 동정도 주고 싶지 않다.
우리네 논에 흔하던 물피.물달개비.쇠털골.밭뚝외풀.방동사니.바람하늘지기.마디꽃,그런가 하면 밭에 성하던 바랭이.뚝새풀.돌피.강아지풀.쇠비름.반하.갈퀴덩굴.명아주 등은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초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쓸모없다 해서 무심히 넘겨서 그렇지 조금만 정을 담고 눈여겨보면 그 아름다움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언젠가 미시령 휴게소 뒷산 능선을 오른 적이 있다.그곳에 피어있던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그들을 누가 잡초라 하랴.그러나 그들이 우리들 밭에 있다면 그걸 아름답다며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잡초가 산이나 들에 있다면 아무도 그들을 잡초라 하며 나무라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 분위기에 따라 칭찬도 받고 시인이 라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시로 노래하기도 하리라.그런데 사람이 자기 영역에 특별히 무언가를 기르려 터 잡아놓은 곳에서 불청객이 피어오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그러고 보면 사람이건 풀꽃이건 제자리서 제 할일을 할 때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아니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곧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잡초란 이름은 참으로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표현이요 그 한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말인 것 같다.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면 바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제거 대상이 된다.지나침과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듯 자기 자리가 아니면 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잡초로부터 배운다.
전에 꽃씨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화분에 직접 심었는데 싹이 나지 않았다.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주 작은 싹이 하나 올라왔다.한데 조금 자라고 보니 그건 잡초였다.꽃씨는 안 나고 섞여있던 잡초 씨만 발아했던 것이다.그러나 뽑아버리지 않고 두었더니 거기서도 꽃이 피었다.나는 잡초로가 아니라 화초로 자라게 해 주었다.이름도 모르지만 하얀 아주 작은 꽃을 오랫동안 피워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그래서일까 잡초라면 끈질긴 생명력부터 연상 된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일을 별로 해 보질 못했다.중학교를 마치자 바로 서울로 올라와버린 때문도 있겠지만 약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억척스럽지도 못했고,또 특별히 그런 일을 해야 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고작 아이들과 함께 땔나무를 하러 가거나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퇴비감을 준비하는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시원스레 해내지 못해 그 또한 늘 남의 도움을 받기 일수였다.
그런데 팔자에 없는 잡초 뽑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안 그래도 사이트에 큰 문제가 생겨 거금을 들여 게시판13개를 몽땅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이러니 아무래도 다시 기술자의 신세를 져야 할 모양이다.어릴 때도 땔나무나 퇴비 숙제조차 남의 도움을 받아 하곤 했는데 지금에도 그래야 할 모양이다.
문득 게으른 농사꾼네 밭에 잡초가 무성하다는 말이 생각나 또 한번 나를 부끄럽게 한다.결국 내가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 빠지고 만다.그러나 속이 상한다고 해서 하루만 걸러도 다음 날에 몇 배로 더 힘이 드는 작업을 해야만 할 테니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입장을 바꿔서도 생각을 해 본다.저들은 이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것일까?그것이 저들의 생존 방법일까?그렇다면 내가 너무 심한 것일까?하지만 둘이 함께 살 수는 없잖은가.그게 운명 아닌가.그런데도 삶의 현장은 여전히 잡초와 곡식의 함께 삶터이다.곡식에겐 잘 자라게 조건을 만들어주고 잡초는 제거를 기본으로 한다.그래도 모두 없애지는 못하니 결국은 공존하는 셈이 된다.
다시 컴퓨터를 켠다.잡초 뽑기를 해야 한다.그나마 손을 안 대고 놔두고 있으면 필시 저들은 대단히 힘 있는 존재들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저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저희들 일을 하고 말리라.그렇다면 그것이 지는 것이든 그냥 포용하는 것이든 차라리 저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까.세상이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공존의 장임을 어쩌랴.
《한국수필》에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문학에게 길을 묻다》등 13권이 있으며,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및 여러 교재에 작품이 실려 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들 속에서 속이 손질한 닭처럼 텅 빈 것을 느꼈다다시 칼을 들어 위를 건드릴 때 사료들이 쏟아졌다. 모래주머니를 왼손으로 집고 나머지 내장을 긁어내자 자궁만이 남았다. 자궁 안에서 반쯤 이지러진 노른자들이 번뜩였다. 5촉 알전구처럼 노른자들은 내장 아래서 고요했다. 싱크대에서 흐르는 물이 내장 안의 피를 좇아 함께 파고들었다. 노른자 같은 달빛 아래 서로 속삭이던 그 날로 2년이 지나서 알전구 아래 남편의 얼굴은 주름이 깊어져 있었다. 닭이 울고, 새벽하늘에 어둑한 푸른빛만 남을 때, 흐린 눈 사이에서 남편의 몸에 셔츠와 재킷이 차례로 덮였다. 눈을 비비는 경자 씨를 향해 남편의 작은 눈이 싱긋 휘어졌다. 소두방만한 손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릴 때 경자 씨는 포근함을 느꼈다. 왜 깼어, 좀 더 자. 이따 시다애 올 때 도시락만 챙겨줘. 재단사가 된 이후로 남편은 시다 시절보다 일찍 일어나 정신없이 일했다. 부용읍을 떠나자는 꿈은 남편과 경자 씨 품에서 토실토실 자라났다. 그날 아침에 지갑을 만지작거리다 큰 맘 먹고 쇠고기를 사러 가는 길에 미용실 원장이 여우에 쫓기는 닭처럼 급하게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대학병원 응급실 앞이었다. 시다가 울먹이며 사모님, 이라고 손을 잡고 이끌었다. 자전거를 타고 원단을 살피러 가는 도중에 갑자기 트럭이 끼어들었다고 했다. 의사가 고개를 저을 때 경자 씨는 무릎 아래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깨를 잡는 손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 사이 속에서 경자 씨는 자신의 속이 손질한 닭처럼 텅 빈 것을 느꼈다. 상복을 다시 꺼내입을 때 그 속은 닭뼈보다 고요했다네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딘다고, 라는 말을 삼키고 경자 씨는 닭을 든 채 유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닭살이 목에서 피어났다. 남편의 탈상을 마치고 2년 후에 경자 씨는 요강을 안은 어머니를 보고 목 뒤로 닭살이 만개하는 것을 느꼈다. 오라비의 직장에 전화를 걸었을 때, 퇴직 한지 한 달 됐다며 무역회사 경리가 딱딱하게 뱉었다. 고모가 씁쓸한 눈길로 전화기를 부여잡은 조카와 요강을 붙든 올케를 번갈아 보았다. 어머니는 경자 씨가 안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어머니의 눈에 경자 씨는 맏언니였고 종년이었으며 어머니였다. 매일 욕을 들어가며 똥 묻은 벽을 닦은 걸레를 빠는 날이 이어졌고, 밤마다 마시는 소주는 어느새 한 병이 되었다. 두 늙은이의 코 고는 소리 사이를 피해 경자 씨는 겨울에도 평상 위에 요를 깔았다. 적막이 치밀하게 차오를 때 부용역에서 상행선을 타는 모습이 그려졌다. 기차 안에서 남편이 손짓을 했다. 요 위에서 뒤척일 때 품이 그리워 악문 윗니와 아랫니사이로 울음만 닭똥처럼 흘렀다. 다음 해 상복을 다시 꺼내 입을 때, 경자 씨의 안은 살 깨끗하게 바른 닭뼈보다 고요했다.
다시금 침묵이 닭집에 가득 찼다. 유진은 찐득한 평상에 손을 비볐다. 혼자서 이불을 덮고 있을 때 가볍게 사라지던 질문이 경자 씨의 입을 거쳐 나올 때 끈끈하게 붙었다. 경자 씨의 눈을 향해 유진은 눈을 들지 못했다.
“저 학교에서 여기로 올 때, 되게 막막했어요. 부모님도 교수님도 기회라고 하는데, 확신이 안 섰어요. 선배들 모두가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거든요. 오고 나서도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요. 여기 처음 왔을 때, 남은 시루떡 먹고는 할 게 없어서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흰 연기가 불이 꺼진 형광등 아래를 스치다가 쓱 사라지는데, 담배를 다 피니까 그 연기마저도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이모네 닭장 안의 닭이 길게 울었어요, 딱 한 줄로. 그 소리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 같았어요. 여기로 온 지 어느새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순간하면 생각하면 그 첫날처럼 담배가 땡기고, 한 대 딱 피면 연필이 검지와 중지손가락에 딱 붙는 거예요. 그렇게 막막한 순간들이 맛있게 다가오는 것을 잊지 않으려면, 적막에 관한 시 한 줄이 있어야 해요.”
그런거니, 라며 경자 씨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도마로 눈을 돌렸다. 우리 삶엔 시 한 줄이 있어야 해요, 라고 진 선생의 작은 입이 열렸었다. 5년 전 읍사무소에서 개설된 문화강좌에서 창작아카데미 소개문을 소리내어 읽을 때, ‘시(詩)’는 입 안에서 뾰족하고 높게 솟았다. 가장 먼저 서류를 접수하고 오랜만에 필사 노트를 펼쳤다. 진 선생은 파마를 먹인 긴 머리에 양장을 입고 들어왔는데, 고등학교 때 진로용지에 서툴게 적었던 ‘나의 장래희망’와 흡사해 경자 씨는 흠칫했다. 진 선생은 매번 마이크를 경자 씨를 향해 들이밀었고, 발끝과 말문은 언제나 더듬거렸다. 그러나 거창하게 시작한 창작아카데미는 말이 창작이지 무료 한글교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학교도 못 다녔다는 노인들에게 가갸거겨를 쓰고, 받침을 잃어버린 문장들에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진 선생은 교탁에서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한 표정을 머금은 진 선생을 도우며 둘은 4월 말까지 바빴다.
직유와 은유에 간신히 이른 5월께에, 경자 씨는 진 선생의 뾰족구두가 읍사무소 주차장으로 향할 때 불쑥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머, 경자 씨,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시장하시죠, 오늘 저녁이라도 대접해드릴까 하고. 닭 내장처럼 삐져나온 시장 골목을 지나 부용닭집 앞에서 들어섰을 때 경자 씨는 아차, 싶었다. 먼지 묻은 아크릴 간판과 닭똥내 나는 바닥에 진 선생이 눈썹을 찌푸렸다. 빈 닭장마저 조심하며 진 선생은 겨우 평상으로 올라왔다. 진 선생을 안방 아랫목에 앉히고 경자 씨는 닭도리탕을 슴슴하게 끓여 상을 차렸다. 닭고기 맛이 깊다며 술이 당긴다고 진 선생이 농담을 던졌는데 경자 씨는 슬리퍼를 걸치고 부리나케 점빵으로 향했다. 식사로 시작한 읍사무소 불평은 소주 반병이 사라지자 산불처럼 일었다. 가벼운 반주만 걸치기로 했는데 평상에 소주병이 차례로 늘어났다. 짙은 소주 냄새 속에서 진 선생이 심야라디오방송처럼 속삭였다. 경자언니 봤을 때 느꼈어요. 뭔가 딱 느껴지는 게 있어요. 역시 고등학교 때 백일장을 그렇게 많이 휩쓸어서 그랬구나. 정말 아까워, 이런 인재가 여기 있는데. 서울로 왔으면 대박일텐데. 지방이라도 늦깎이라도 기회는 열려있대요. 그날 밤 경자 씨는 진 선생이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골 때까지 홀로 술잔을 들이키며 엷은 미소를 멈추지 못했다.
유진은 닭을 바르는 경자 씨의 얼굴을 읽었다. 그 고요함이 언뜻 평상 위에서 '사슴'을 천천히 넘기는 모습과 흡사했다. 유진은 경자 씨의 허리께에 묶인 앞치마끈을 향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일할 때 이모의 칼질은 단정하네요. 벗겨내고 드러내는 살갗과 근육 앞에서 저는 분명 주저했을텐데, 청년예술인 회의장에서 서 있듯이. 저는 담배와 술로 제 주저함을 한번에 토막 내고 싶었는데, 언제나 손에 상처만 입히면서 썩어있는 것 같아요. 홀로 있는 시간마다 단숨에 쓰러져 썩어가는 느낌, 이모도 알고 있나요? 전 그때마다 고무통에 담긴 닭처럼 꺽꺽댔어요. 그 시간을 펜으로 잡아 가르면, 시 한 줄이 가지런히 드러날까요?
도마 위에서 방금 무슨말 했니, 라는 말이 들렸다. 유진은 경자 씨의 칼이 가볍게 닭을 절반 가르는 것을 보았다.
“별 거 아니에요. 닭도리탕 할 때 어떻게 하면 맛있어요?”
닭을 토막 내던 손이 멈췄다. 잘라낸 타원형의 닭가슴살에서 진 선생의 큰 두 눈이 떠올랐다. 유진이 방금 꺼낸 말을 똑같이 읊으며 진 선생이 닭집으로 들어왔었다. 닭을 잡는 내내 진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히 경자 씨의 손놀림을 보았다. 보리는 진 선생 발치로 붙으려다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의 헛발질에 박스로 몸을 말았다. 발라낸 닭을 봉지에 싸서 건네줬을 때, 진 선생은 들어올 때 말한 질문을 반복하며 한 마디 더 붙였다. 기왕이면 우리 집에 와서 닭도리탕 만드는 법 좀 알려주면 좋겠어요. 진 선생의 아반떼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렀고 낡은 빌라 아파트 안은 꼼꼼하게 손질한 닭처럼 단출했다.
경자 씨는 닭다리에 간신히 손을 대었다. 부드럽게 미끈거리는 이 감촉이 처음으로 진 선생의 머리를 쓸었을 때와 비슷했다. 그날 밤 진 선생은 술상 앞에서 경자 씨의 짧은 단발을 향해 먼저 손을 뻗었다. 오직 나만 언니를 인정해. 언니는 고생 많이 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세상 모든 아픔에 민감한 거야.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에 손을 뻗다가 멈칫댔을 때, 진 선생의 크고 하얀 손이 경자 씨의 낡은 도마 같은 손을 가져갔다. 서로의 머리를 쓸던 손이 멈췄을 때, 그녀가 귓불 가까이 숨을 뱉었다. 경자 언니도 시인이 될 거야. 시인은 시인을 알아보고, 시인이라고 부르거든. 닭 돌보고, 잡고, 요리하는 게 다 한 권의 시 쓰는 일인 걸. 뜨거운 숨소리가 닫히고 나서 경자 씨는 병든 암탉이 기침하듯 중얼거렸다. 난 그냥 고졸이어요, 선생님. 무슨 소리야, 언니가 얼마나 은유를 잘 하는데. 내가 언니 노트 딱 펼치고 말했잖아. '닭집 아래 울음은 도마자국마다 피었다' 그거 아무나 쓰는 거 아니라고. 부용읍에 갇혀있기 아까운 사람이야. 진 선생의 기다란 손가락 10개가 경자 씨의 양손을 힘 있게 감쌀 때, 진 선생의 맑은 눈과 경자 씨의 눈이 마주했다. 갑작스럽게 입술에서 뜨거운 것이 피어, 경자 씨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소주 냄새를 피우며 널브러진 진 선생을 보며 한참 동안 가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흡사 가슴 속에 커다란 식칼이 휙 떨어져 자국을 내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경자 씨는 코를 고는 진 선생 몸에 이불을 얹고 문을 열었다. 빌라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다음 날 가게를 간신히 열었지만 경자 씨는 읍사무소를 향해 고개만 돌려도 뺨이 화끈거렸다. 결국 노트는 은유 몇 줄을 삼킨 채 그대로 책장에서 긴 잠을 잤다. 한 달 후에 진 선생은 수업을 마치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며 미용실 원장이 닭집에 와서 달걀을 살 때 조잘거렸다. 경자 씨는 그날 저녁 가게를 닫고 나서 필사 노트에 적힌 자신의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다가 덮어버렸다.
경자 씨는 다시 천천히 도마를 보았다. 삼나무 결 아래로 칼집들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칼을 내려놓자 닭의 형태를 어설프게 갖춘 고기조각들이 거리를 둔 채 오롯이 누워 있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이 칼과 솔에 남은 닭피를 하수구로 끌었다. 경자 씨는 왼손으로 벽에 달린 검은 비닐봉지를 잡아당겼다. 닭고기들을 쓸어담고 유진을 향해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봉지 손잡이에 맺힌 수돗물 몇 방울이 아래로 흐르다 맨 밑에서 맺혔다. 유진이 양 손을 모아 봉지를 받을 때, 봉지에 맺힌 물이 바닥에 떨어져 바닥에 자국을 냈다. 가느다란 두 손목이 살짝 흔들렸다.
“생각보다 무겁지? 좋은 놈이라서 그래.”
유진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닭을 받아든 그녀는 경자 씨의 그림자에서 앞치마 그림자가 슬그머니 빠져나와 벽에 박힌 못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유진이 그 앞치마에 손을 대고 싶다고 생각할 때, 짙은 담배 냄새와 늙은 수컷의 냄새가 섞이며 물씬 다가왔다. 등산복을 입은 사내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 백숙용 다섯 마리를 주문하고 그들은 평상 위에 걸터앉아 껄껄대었다.
경자 씨는 허겁지겁 다시 앞치마를 챙겨 입었다. 유진은 몸을 세우며 매달린 보리를 박스 아래 내려놓았다. 사내들은 새로 들어설 건물이 부용시장 서문 앞인지 남문 쪽인지 두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진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갈 때 경자 씨가 닭 한 마리의 몸에 칼을 꽂으면서 소리를 높였다.
“유진아, 닭도리탕 할 땐 간 많이 잡지 말고, 슴슴하게 해.” 닭을 사러 오던 이들은 혼자 또는 가족과 상행선을 탔다어느새 하늘은 짙어져가는 닭벼슬색으로 풀어졌다. 늘어진 구름이 서서히 밀렸고 바람이 시장 골목 안쪽을 따라 흐르며 닭똥내를 훔쳤다. 경자 씨는 평상에 앉은 채 기지개를 펴고 왼손으로 어깨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피곤은 매일 새롭고 규칙적이었다. 석양 속에서 닭들은 정물화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적막만이 경자 씨 옆에 기대어 천천히 어깨를 비볐다.
홀로 닭집을 지키는 내내 부용읍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엄마 심부름으로 닭을 사러 온 애들은 어느 사이 홀로, 또는 부모와 같이 부용역에서 상행선을 탔다. 빚을 안고 돌아오던 이들도 찢어진 지로용지처럼 종적을 감췄다. 참 오래도 닭들과 함께 남아 있었구나, 라며 입술이 멋대로 달싹거렸다. 떠난 이들은 많았는데 정작 나만 닭처럼 남았네. 눈가에서 시큰한 게 올라와 경자 씨는 소매를 들었다. 길 건너 소음이 멈추더니 닭 몇 놈이 꼬꼬댁, 우는 소리가 고막에 닿았다. 안채로 들어가 필사 노트를 꺼냈다. 닭 우는 소리가 닭장 사이에서 삐죽거릴 때 노트 표지서 남편이 죽기 전날 밤 품 안에서 속삭이던 소리가 맴돌았다. 이전에 당신 고모님 입원하셨을 때 기억나? 당신 혼자 가게 지킬 때, 왠지 걱정 돼 일 끝나자마자 닭집 앞에서 서 있었는데. 도마에 식칼을 놓고 당신이 평상에 걸터앉는데, 닭들은 한 놈도 울지 않고, 고개 숙인 당신이 중얼거렸지.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때 생각했네, 당신은 내게 귀한 사람이라고. 지금 이렇게 있어줘서 고맙네.
당신 보내고 헛헛하게 살았지요. 난 이곳을 뜨지도 못했고, 시 한 줄 손대기도 힘드네요. 앞으로 적막과 엎치락뒤치락하며 견디겠죠. 팔자가 사나운 년, 이라는 말이 이제 실감이 가요. 시 한 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늙어가는 머리로 남아 있는게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네요. 이 한 줄만 내 속에 깊게 남았네요. 경자 씨는 얼룩진 소매를 간신히 내렸다.
보리가 몸을 세우고 꼬리를 흔들었다. 늘어진 닭장 그림자 사이로 훨씬 늘어진 치마 그림자가 짙게 펼쳐졌다. 유진의 목소리가 먼저 닭집으로 들어왔다. 빨간 국물이 잔뜩 묻은 치마를 털며 유진이 더듬거렸다.
“이모, 말씀한대로 슴슴하게 간 잡았는데요. 저랑 같이 드실래요? 저 혼자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이모가 잡아준 닭이고, 제가 요리했는데, 그럼 우리가 함께 만든 거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혼자 먹기에 너무 큰놈으로 주셨어요.”
유진의 눈이 경자 씨의 눈 안에서 반짝였다. 유진의 눈 안에서 부용닭집은 고요하게 빛이 났다. 부용닭집 안으로 들어온 두 눈동자에서 경자 씨는 문득 오늘의 적막함이 노을빛에 섞여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자 씨의 두 눈이 노을 건너편 낮달처럼 슬그머니 휘었다.
유진이 씩 웃으며 얼른 몸만 오라고 재촉했다. 맞은편 미닫이문이 한 번에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자 씨는 신발에 두 발을 담았다. 문을 나설 때 닭 한 마리가 갑자기 길게 울더니, 닭 우는 소리가 닭장마다 이어졌다. 목이 꺾인 크레인 그림자 사이로 맞은편 빈 닭장 안의 햇볕도 길게 울었다. 보리가 몸을 일으켜 컹컹 짖었다. 개의 울음에 닭 울음의 끝자락이 섞여 석양 아래를 거닐었고 부용닭집 입간판 네온사인이 비척이며 천천히 등을 깜빡거렸다. 네온빛 ‘부용닭’에서 ‘집’이 깜빡거리더니 완연하게 ‘부용닭집’을 비추었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은유처럼 느껴져, 경자 씨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목에서 피어난 웃음이 닭장 사이로 흩어지다 낮달처럼 휘어지며 사라졌다. 앞집 미닫이문 그림자 사이로 경자 씨의 그림자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펜 놓게 될까 두려웠던 삶 더욱 정진해 좋은 작품 쓸 터 당선 통보 전화를 받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산월기(山月記)’였습니다. 나카지마 아쓰시가 다시 해석한, 달밤에 시를 읊으며 장원급제한 친구에게 시인의 꿈을 울먹이던 창백한 호랑이는 스무살부터 제 마음을 깊게 찔렀습니다. 언젠가 펜을 놓고 산속에서 범으로 말라비틀어질까 두려웠던 제 삶은, 간신히 사람으로 남아 펜을 잡을 허락을 얻은 기분입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는 드문드문 닭집들이 남아 있습니다. 닭똥내와 파리 속에서 닭이 어떻게 닭고기가 되는지 궁금해하는 더벅머리를 두고 닭집 주인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꼼꼼히 글을 읽어주신 블로그 이웃들과 모임 사람들, 동한 형, 이근형, 정호, 이경호, 동원씨와 신철씨, 강봉호 사장님, 광섭이 형, 진영 누나, 제오, 아카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포기하지 않은 두분, 제 가능성을 잊지 않아주시고 지난(持難)한 자학을 꾸짖어주신 안도현 선생님과 스물아홉해 동안 문제 많은 아들이 작가가 될 거라 굳게 믿어온, 제 어머니 소채남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살아가겠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이휘빈 ▲1989년 전북 전주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전 전북중앙신문 편집기자 ▲전주 산책자
닭 잡는 과정의 구체적 묘사 삶으로 승화되는 지점 놀라워한때 시인이 되기를 꿈꿨던 닭집 여자가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 쇠락한 가게, 속절없이 늙어가는 나이, 그 속에서 삶을 삶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삶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소설의 묘사는 놀랍다. 닭을 잡는 과정의 구체적인 디테일이 놀랍기도 하지만, 그 묘사가 우리 모두의 누추한, 그러나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삶으로 승화되는 지점이 더욱 그러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거대한 은유 같아지는 지점. 삶도, 시도, 적요도.
최종심에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이론이 없었다. 다만 닭집 여자에 비해 시인에 관한 묘사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이 아쉬웠다.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농촌 생활의 살림살이들을 다루고 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시사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도 있고, 전통적인 농촌의 정서를 다룬 작품도 많았다. 농촌은 늘 우리 모두의 마음의 고향이라 그 풍경을 잔잔하게 다룬 작품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고, 또 따듯하게 한다. 어머니의 임신과 소의 출산을 겹쳐서 다룬 ‘소’는 굉장히 오래된 농촌 풍경을 다루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사랑방 얘기처럼 따듯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래된 이야기로만 머문 건 아닌지 하는 지적이 있었다. 조류독감 사태를 다룬 ‘하얀 거짓말’은 시사성이 주는 이야기의 힘이 있기는 하지만 소설적인 구성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역시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닭’도 결말이 흐지부지했다는 느낌이 짙었다.
농민신문사 신춘문예이니만큼 농촌의 삶이 배경이 되는 소설이 많이 투고가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상상력이 농촌이라는 무대로만 국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신춘문예가 농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더군다나 농민소설을 뽑기 위한 신춘문예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내년에는 새로운 감각의 소설들이 많이 투고되기를 기대해본다.
사진=김도웅 기자
이순원 소설가(왼쪽), 김인숙 소설가(오른쪽).
[신춘문예-단편소설 심사평]
이휘빈씨.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소감]
홀로 닭집을 지키는 내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소음 사이로 닭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보리의 컹컹거리는 헛짖음이 경자 씨 발치서 맴돌았다. 크레인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완연하게 기울었다. 사내들이 땅값과 시세로 옥신각신 하다가 받은 닭을 들고 나간 후에 다른 단골들이 대문을 넘었다. 닭도리탕과 백숙을 주문받는 내내 공사장 소음은 바람에 죽은 파리처럼 고요했다. 싱크대 안의 13개의 닭 머리 위로 파리 몇 마리가 꿈틀댔다. 싱크대에 남은 닭피 냄새가 남아 진하게 풀어졌다. 경자 씨는 남은 닭털과 버릴 부위를 비닐봉지에 따로 담았다. 파리 몇 놈이 닭머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기웃거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닥을 기었다.
요강을 안은 어머니를 보고 목 뒤로 만개하는 닭살을 느꼈다
경자 씨는 내가 오늘 왜 이럴까, 되뇌며 작은 칼로 닭 안의 기름기를 겨눴다. 갈비뼈 쪽은 엄나무 가시처럼 날카로웠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번잡한 잡내와 똥내가 풍기는 창자가 삐죽거렸다. 칼질을 멈추고 솔을 들었다. 기름기는 인연보다는 쉽게 떨어질 것이었다. 결혼 할 때 시가 측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오라비의 손을 잡고 온 어머니는 육개장 한 그릇을 비우고 재수 없는 년은 넘어져도 가시밭에 구른다며 이죽거렸다. 고모가 어머니를 이끌고 사라졌고 오라비는 담배 한 대 태우고는 화투를 든 패거리에 붙었다. 탈상을 끝내고 얇실한 통장잔고와 남편의 빚을 받고 나서 경자 씨는 젖은 자국이 남은 필사 노트를 꽉 쥔 채 골방에 잠겨 있었다. 고모의 독촉에 겨우 닭집으로 돌아 왔을 때 손님들 사이로 섞인 소문은 조류인플루엔자보다 빨랐다. 남편 잡아먹을 상이라는 말이 어디서 퍼졌는지 근원은 희미했다. 경자 씨는 늙은 고모가 평상에서 화투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묵묵히 닭 목을 치고 배를 갈랐다. 눈알 빠진 닭대가리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깃털들이 드럼통 배출구에서 쌓일 때마다 경자 씨는 담담히 양 팔에 힘을 주었다. 힘을 쏟고 난 뒤 닭집 안은 어둑한 빈 방처럼 한갓졌다. 소주 반병이 비워지면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가 흐르다 흐느낌에 밟혔다.
경자 씨는 벗겨낸 닭 속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기름기가 벗겨진 닭 안에 수돗물이 파고들어 형광등 아래 맑아 보였다. 물기를 털어내고 닭을 다시 도마 위로 올렸다. 날갯죽지와 가슴 사이에 칼날이 스칠 때마다 흰 속살이 촉촉하게 피어났다. 유진이 천장에서 부엌께로 눈을 돌렸다.
“제가 시를 쓰는 것보다 이모 일하시는 모습이 왠지 시 쓰는 것 같네요.”
“시인이라서 그런지 말이 듣기 참 좋네.”
“학교에서 배웠는데 노동의 과정에서 문학의 영감이 확 피어오르는 거래요. 그래서 시는 일상에서 일하며 쓰여야 마음으로 스민대요.”
“그럼 김 시인도 닭 좀 몇 번 잡으면 시 금방 쓰겠네. 오늘부터 배워볼래?”
경자 씨의 흐흐, 하는 웃음에 유진의 목소리가 허둥대며 높아졌다.
“물론 많은 작가들이 자연이나 일상 노동에 대해서 소재를 얻죠. 근데 이모, 저는 더 다른 걸로 쓸 거예요. 진짜 특별한 거죠, 딱 한줄이라도 충만한 거니까.”
유진의 긴 쌍꺼풀이 길게 깜빡였다.
“저는 적막에 대해서 쓸 거예요.”
경자 씨는 급하게 침을 삼켰다. 적막, 이 들릴 때 코끝에서 비린내가 소나기구름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몸 깊은 곳에서 피어났다. 고모네 닭집에 온 날부터 피어나는 구역질 앞에서 파리하게 질린 날이면 고모는 주전자에 황기를 넣고 불을 올렸다. 황기 우린 물은 알싸하고 역했지만 일단 넘기면 구역질이 몸 깊은 곳에서 희미해지곤 했다. 마지막으로 마신 황기물이 알싸하게 떠올랐다. 어머니의 첫 기일에, 술에 취해 오래비의 얼굴을 한 사내가 닭집 앞에서 비틀거렸다. 어미 잡아먹은 잡년이라고 소리를 지르던 그 사내는 시장통에서 쫓겨났다. 그날 밤 부용닭집 정문엔 망치 자국이, 돈통엔 떼어낸 자국이, 바닥엔 술냄새가 배인 가래자국만이 남았다. 그 자국들 사이에서 마신 황기 우린 물도 언제나 영특했다. 적막, 이라는 단어에 당장 황기 우린 물을 들이켜고 싶었지만 그저 침을 한 번 더 삼켰다.
“어떻게 적막에 대해 쓰려고?”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도중에 갑자기 트럭이 끼어들었다
일러스트=이철원
닭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경자 씨는 기울였던 허리를 펴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사흘 내내 팔린 닭 한 마리가 없었다. 가을이 어느덧 깊어졌는데 파리들은 여전히 닭집 안에서 우글거렸다. 파리채를 들었을 때, 상자 안에서 보리가 몸을 세우고 컹컹 짖다가 경자 씨와 눈을 마주치자 그대로 빤히 바라보았다. 이것도 결국 힘들구나, 경자 씨는 보리의 누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보리는 몸을 낮추고 박스 아래 앉아 낑낑대었다.
파리채 휘두르는 소리가 멈췄을 때 쇠가 쇠를 때리는 소리가 부용닭집 앞을 다시 휘저었다. 경자 씨는 길 건너 크레인이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 때 또 소름이 목부터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부용, 새로운 도약이라는 슬로건이 붙은 철책이 언젠가 쓰러져 닭집을 덮칠 것 같았다. 한번은 옆집 미용실에서 영양펌을 받을 때 입을 열었다. 저기 건너편의 신축상가요, 소음이 어찌나 센지. 난 저거만 보면 언제 확 무너질 것 같기도 해요. 자네도 참, 별 것도 아닌 거에 신경쓰는 거 여전하네. 미용실 원장은 껌을 씹은 채 주말 드라마 재방송에 눈을 떼지 않았다. 경자 씨는 그때 여성지 안쪽의 부동산 광고를 읽고는 그대로 덮어버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눈도 벌게져 있는 것 같아 주름이 박힌 눈가를 훑었다. 2년 전부터 부용시장의 땅을 가진 사람들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 동네에 건물이라도 들어와야 부동산이 오른다는 말에 모두 눈이 벌게져 있었다. 번호판에 서울과 경기권 도시가 적혀 있는 차가 시장 주차장에 멈출 때 소문은 사람들 사이를 힐끔거리고 소곤거렸다. 경자 씨네 닭이 제대로 울지 않는 다는 푸념은 뻥튀기 되는 소문들 사이를 비집지 못했다. 홀로 양계장 안의 병 걸린 닭이 된 것 같았다. 결국 경자 씨는 영양펌을 마치고 원장이 내준 생강차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날 장사를 마치고 셔터를 내리는 내내 오래 묵은 감기처럼 붙은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붙었다.
칠이 벗겨진 ‘부용닭집’ 입간판이 분홍색 네온 빛으로 ‘부용닭’을 어둑한 바닥에 쓰다가 사라지며 흔들렸다. 시월의 바람이 시장골목을 시어머니의 손매처럼 우악스럽게 할퀴다가 잦아들었다. 잦아든 바람 사이로 닭장 안의 닭털 몇 개가 아스팔트 위로 흩어졌다. 닭장 아래는 닭똥과 깃과 깨진 알과 쌀겨들이 섞여, 흡사 닭과 땅을 한꺼번에 실은 것 같았다. 주방 안쪽 빈 닭장들이 가게 안에서 먼지만 품었고 주방 안엔 닭털 뽑는 드럼통과 솥단지가 눌어붙어 있었다. 맞은편 부용약재상 미닫이 문 쪽에 놓인 빈 닭장 위에 고양이 몇 놈이 식빵처럼 앉아 닭장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고양이들은 언제나 맞은편으로 슬그머니 녹아들어 서로끼리 몸을 붙여 앉거나 핥아주었다. 경자 씨는 보리를 흘겨보았다. 5년 전에 들인 보리는 남편처럼 순해서 외상 잘 안 갚는 여편네들이 찾아와도 꼬리를 살랑거렸다. 분명 고양이가 코끝까지 와도 짖기는커녕 늘어져 하품이나 할 녀석이었다. 경자 씨는 보리를 향해 야, 야 라고 소리쳤지만 보리는 꼬리 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경자 씨는 고양이들의 눈을 보며 이것들이 낡은 집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시장 북쪽 외곽에 있는 부용닭집은 부용시장의 북문 끝에 있는 닭집이었다. 30년 전만 해도 매일 해질 때면 애어른 할 것 없이 손가락으로 닭장을 향해 손을 뻗었고 금성세탁기를 분해해서 만든 닭털 뽑는 드럼통에선 닭털들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복날이 다가오면 닭털들이 배출구를 막아 부지깽이로 긁어내도 깃들은 돈뭉치처럼 굴러 나왔다. 경자 씨는 고양이들이 앉은 자리에 놓인 부지깽이가 크레인 그림자에 삼켜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앞집에 햇살이 조그맣게 눌러앉아 그림자만 뒤틀며 뭉그적댔다. 그 안에서 고양이들 중 어린 두 놈이 닭집 앞으로 슬금거렸다. 오늘도 닭장 안의 어느 놈도 고양이를 향해 울지 않았다. 경자 씨는 찐득거리는 평상에 핸드폰을 두고 파리채를 집었다. 공중으로 휘두르는 파리채 소리에도 고양이들도 공사장 소음도 우두커니였다.
갑자기 깔깔거리는 소리에 고양이들이 부리나케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사진기 셔터 소리가 경자 씨 귀에 박혔다. 나 저렇게 닭이 큰 줄 몰랐어, 하고 누군가 호들갑을 떨었다. 오래 끓은 보리차색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애 둘이 쪼그려 앉아 닭장 앞으로 핸드폰을 겨누고 있었다. 2년 전에 서울에서 힐링캠프인가 한다며 트레일러를 이끈 방송사 팀이 온 이후로 주말마다 젊은이들이 쏟아졌다. 대부분 시장 안쪽에서 여배우 셋이 살던 안채를 구경하며 깔깔대었는데, 시간이 남으면 시장을 돌며 금속 작대기에 핸드폰을 붙이고 셔터소리를 내었다. 셀카봉이라는 그 작대기는 전등 빛을 받으면 번쩍거렸고 그 위에서 간혹 플래시가 터져 나오면 경자 씨는 견딜 수 없었다. 계모임 사람들에게 불평을 해봐도 해결책은 뚜렷하지 않았다. 결국 작년에 플래시로 계속 닭장을 찍어대다가 닭장을 툭툭 치던 계집애에게 한소리 던져보기도 했다. 시장상인연합회장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요새것들이 다 그렇잖은가, 사장님이 좀 참으소. 어쨌건 시장에 사람이 많아야 이문이 붙고, 그래야 닭집도 잘 되지 않겄소. 그때 경자 씨는 말대꾸 하고 싶은 마음을 솔에 뿌리며 주문한 닭을 조용히 문질렀었다. 작년 이후로 젊은 축이 닭을 주문한 일도 전혀 없었다.
계집애들의 조잘거림이 멀어진 뒤에 앞집 자물쇠가 덜컹였다. 성기고 긴 파마머리를 한 여자가 넝마 같은 치마를 걸친 채 열쇠를 잡고 있었다. 경자 씨가 평상에서 일어나 맞은편을 보자, 여자가 황급히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눈매가 거무스름하고 얼굴 표면이 잔뜩 일어나 있었다. 자네 요새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네, 경자 씨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여자의 귀에 꽂혔다. 여자의 주근깨 많은 뺨이 살짝 붉어졌다.
반년 전에 김유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 여자는 언제나 느지막이 부용약재상 간판이 달린 문을 서투르게 열었다. 유진이 온 후 감초와 황기 냄새를 풍기던 빈 약재상에서 향초 타는 냄새가 가끔 닭집으로 은은히 스몄다. 작년에 부용시장상인연합회장은 전체회의에서 타 지역시장의 청년활동 연계를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앞으로 인근 도시의 예술하는 청년들을 들여 시장 활성화로 수익을 올리자고 마른 목소리를 높였다. 읍장이 앞자리에서 박수를 치자 뒷줄까지 박수가 이어졌다. 점심으로 나오는 국수와 편육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미용실 원장은 꿈도 크다고 대놓고 깔깔댔다. 웃음 끝에서 경자 씨는 그래도 5년 동안 묵어왔던 먼지와 감초 냄새 사이로 사람 냄새가 섞이겠구나, 라는 생각에 궁금증과 함께 살이 잘 오른 닭을 눈여겨보았다. 페인트질로 약재 냄새를 지우던 건장한 도예공은 이웃에 인사드린다며 컵 두 개를 내밀었는데 막상 들어온 사람은 닭 한 마리 못 잡아봤을 비쩍 마른 아가씨였다. 그녀가 김유진이었다. 그녀는 재킷 어깨 앉은 파리를 황급히 털어내곤 창백한 얼굴로 랩이 덮여 있는 시루떡을 건넸다. 다음 날 튀긴 닭을 들고 문을 두드렸을 때 김유진이 비척이며 나왔다. 빈 바닥에 소주 한 병이 구르고 있었다.
얼마 못 버티고 나가겠구나, 하던 생각은 사흘 만에 사라졌다. 유진은 파리에 질색하면서도 어린 보리처럼 조심스럽고 가깝게 다가왔다. 다음 날엔 해장 잘 되는 국밥집을 묻더니 사흘 지나서는 믹스커피와 머그컵을 챙겨왔다. 닭집 문턱에서 보리가 신발께에 붙으면 대뜸 껴안고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무엇보다 경자 씨의 느린 말씨 속에서 유진의 말은 통통 튀었다. 있죠, 경자 이모, 저는 사실 시인이에요. 재잘대던 유진의 말 중에 가장 먼저 또렷하게 들린 단어였다. 시인, 이라는 단어에 경자 씨는 중학교 시절이 뒤통수부터 번져왔다. 문예부 교실 바닥에 깔린 구겨지고 찢어진 원고지 사이에서 펜촉에 펜을 담가 필사(筆寫)를 하던 시간들이 어느새 깔렸다. 선생님이 목소리를 낮추며 ‘백석’이라 적힌 노트를 살그머니 열 때, ‘흰 바람벽이 있어’를 옮겨적는 펜이 사각거리는 가운데서 어린 마음이 조용히 밝아졌다.
그러나 밝은 소개와는 무색하게 닭집에서건 시장 골목에서건 유진이 받는 전화는 교열 교정의 독촉이었다. 작가님, 일단 글을 보내줘야 교열을 보죠! 도자기만 급한 줄 아세요? 그냥 멋대로 하나 써 놓으라고요? 아니 그렇게 저 계속 시킬 거면 돈을 더 주던가요! 닭집 문을 닫을 때 들려오는 유진의 짜증섞인 목소리는 벽을 타고 흘렀다. 봄날 밤에 유난히도 잠이 안와 문을 열었는데 정문 앞에서 쭈그린 그림자가 있었다. 유진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 사이서 훌쩍였다. 나 이제 집에 갈래, 집에 가면 안돼? 경자 씨는 앞집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다시 누웠다가 밖으로 나왔다. 미닫이문 앞에서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꽁초 네 개에 운동화 자국이 짙었다.
경자 씨는 평상에 놓인 ‘사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전부 유진이 빌려준 것이었다. 이전에 읽은 시인들을 띄엄띄엄 말했을 때, 핸드폰 화면에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더니 사흘 후 책들을 챙겨왔었다. 전부 자기 꺼니 편하게 보라며 싱긋 웃는 유진의 얼굴이, 그때만큼은 어엿한 시인으로 보였다. 백석과 윤동주와 김종삼이 나란히 벽에 기대있었다. 하긴 숨어서 시 읽는 세상은 멀리 갔지, 경자 씨가 홀로 중얼거리는 도중에 기침소리가 들렸다. 백숙용 닭이 얼마냐고 묻던 할머니는 가격을 듣더니 얼굴을 찡그리고는 켜켜이 쌓여 있는 계란판으로 눈을 돌렸다. 특란 두 판을 집고 꼬깃꼬깃한 1만 8천원이 몸빼바지서 나왔다. 경자 씨는 주방 찬장을 열고 지폐를 손으로 펴서 티비 옆 종이상자에 담았다.
하품을 길게 한다 해도 시간이 짧아지지는 않았지만 빳빳한 입간판 그림자가 조금 더 동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람에 다시 입간판이 몸을 비틀다 멈췄다. 경자 씨는 황급히 닭장 앞의 벽돌 네 개를 들어 입간판 다리에 힘을 보냈다. 가게 앞에 놓인 선반에 계란판을 보았을 때, 플라스틱 덮개 위에 파리 두 마리가 누워 있어 휴지로 훔쳐내었다. 구월만 해도 파리가 5월의 꽃들처럼 우글거리며 사람과 닭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는데, 바람이 불 때면 순식간에 널브러졌다. 평상 위에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마저 빼앗아' 라며 장필순의 목소리가 흘렀다. 평상을 더듬어 전화를 받았다. 미용실 원장의 목소리가 저녁에 아들과 외식하기로 했다며 다음에 들러 닭을 보겠다고 요란하게 사과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보리가 몇 번 짖다 몸을 뉘였다. 닭장의 사료는 여전히 가득했다. 더깨 묻은 사료통을 보며 경자 씨는 헛헛함이 명치 아래서 고개를 세우는 것을 느꼈다. 자리를 비우고 시장 안에서 국수라도 빨리 해치울까 했지만 닭장 안에서 모이 쪼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그만두었다. 건너편에서 둔탁한 소리가 다시 들렸다. 공사현장 쪽에서 누군가의 고함과 엔진소리가 섞이며 넘어왔다. 가게 안으로 파리 날개가 허공을 헤매는 소리가 멈췄다. 닭들은 두리번거리며 푸드덕댔고 보리가 다시 낑낑대었다. 그 때 넝마 같은 치마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저 공사 때문에 한 줄도 못쓰겠더라구요.”
쓰게 웃는 유진을 향해 경자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왼손에 든 믹스커피 두 개를 흔들었다. 안방서 컵을 챙기고 전기포트 전원을 꽂는 동안 유진은 평상에 엉덩이를 얹고 달려드는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그컵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 분말 향기로 뜨거운 물이 담기고 나서 유진이 입을 열었다.
“뭐가 들어오기에 저렇게 크게 짓는대요? 병원?”
“병원이면 차라리 좋겠네. 종합상가라는데, 왜 시장 바로 앞에 상가를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정미미용실 원장님은 이제 땅값 더 오를 거라며 좋아하시던데.”
경자 씨는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머그컵과 커피를 물었다. 유진은 머그컵을 꼭 잡고 양 발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사실 전 싫어요. 저 소리 때문에 잠깐 눈 붙이던 낮잠도 못 자겠고. 좀 이상한 말인데, 담배도 못 우피겠어요. 제가 일이 막히면 부용닭집 닭 우는 소리에 맞춰서 담배 한 대만 딱 무는데, 그 땐 담배연기가 굉장히 맛있거든요. 그런데 공사 이후로는 줄담배를 피워도 맛있는 느낌이 살지 않아요. 맛있는 걸 입에 넣어야 글이 쑥 나올 텐데.”
“나도 지금 사흘 째 공쳤다니까. 닭들도 울지도 않고. 때 되면 우는 게 닭인데 도통 알 수가 없네.”
유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공사장 소리에 망가지는 것이 부용닭집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경자 씨는 유진이 갑자기 예뻐 보였다. 자신의 허기가 머뭇거리는 것도, 유진이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다 저 신축공사 탓이라는 생각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거 확 밀어야겠네, 우리 김 시인 글 쓰는 거 망치는 저 못된 크레인.”
유진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이어 유진은 부용시장 가을 호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도예공과 네일샵의 새 상품 소개를 왜 자신이 전담하며 고통받는지 길게 늘어놓았다. 경자 씨의 커피가 완연히 싸늘해진 후에 유진이 붙인 엉덩이를 떼었다. 경자 씨는 시집들을 들어 유진에게 건넸다.
“그래도 담배 좀 줄이고, 술도 이제 줄여. 젊다고 막 들이키다 탈난다.”
“저 공사만 안하면 당장이라도 줄일게요. 정말 일할 맛이 안나요. 맛없이 죽어가는 기분이에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라면서도 경자 씨의 턱끝은 위아래로 움직였다. 두 여자 다 땅으로 눈길을 내렸다. 들어갈게요, 라며 넝마같은 치마가 멀어졌다. 밥 꼭 챙겨먹고, 경자 씨의 말에 유진의 등이 잠깐 멈칫하다 미닫이문을 열었다.
“경자 이모, 닭 한 마리 얼마에요?”
삼십 분 뒤에 다시 들어선 유진의 말에 경자 씨의 눈이 커졌다. 유진의 양손이 입고 있는 치맛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맛있는 닭 한 마리 먹으면 좋은 글 한편 딱 나올 것 같아서요.”
경자 씨는 유진의 얼굴 대신 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유진의 손은 손톱마다 파란 나비가 붙어 있었다. 물집이라곤 오른손에 검지와 중지손가락에 혹처럼 박혀 있었다. 유진의 오른손이 치마를 더욱 꽉 쥐었다.
“사실 이때까지 닭을 요리해 본적이 없어요. 백숙은 얼마나 걸려요? 삼십 분이면 돼요?”
“정말 닭을 사겠다고?”
유진의 당황한 표정을 읽으며 경자 씨는 당황했다. 요즘 경자 씨의 닭을 사는 사람들은 옛 단골이 아니면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얼굴 검은 네팔 청년들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닭 한 마리는 야무지게 잡을 두 손을 가지고 있었다. 유진의 손은 그에 비해 칼이나 놓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었다. 나비 붙은 손톱에 칼이라도 박히면 어쩌려고, 경자 씨의 지레걱정에 답하듯 유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자 씨의 눈이 유진의 손에서 눈으로, 그리고 닭장으로 차례로 옮겨갔다. 몸을 일으켜 바짝 마른 고무장갑을 들었다.
“혼자 먹을 거면 백숙보단 닭도리탕이 낫지.”
닭장 위칸에는 오골계들이, 아래칸에는 장닭들이 담겨 있었다. 볏을 잘린 닭들은 경자 씨와 눈을 마주치자 싸늘해졌다. 개중에 몇 마리가 침묵을 못 참고 푸드덕거렸다. 유진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얼마냐고 물었다.
“위칸이 만 이천원, 아래칸이 만 원. 어떤 걸로 할지 골라봐.”
유진의 눈길이 닭장 위칸과 아래칸을 오가며 아랫입술에 앞니를 살짝 박았다. 처음 닭을 고르던 소년 소녀들이 만들던 얼굴이었다. 경자 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얘는 집에 들어가 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노트에 뭔가를 적겠지, 닭이 고프면 배달을 부를 테고. 지난달에 경자 씨가 문을 두드렸을 때, 초에 비친 유진의 그림자가 허리를 낫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유진아, 라는 말에 엄마, 왜 연락도 없이 와 라는 짜증이 새어나오더니, 안방 문이 확 열렸다. 유진이 당황해서 경자 씨를 맞이할 때, 의자 밑에서 치킨브랜드 포장지가 바스락거렸었다. 양념치킨처럼 붉어진 뺨으로 이모네 닭집이 닫혀 있어서, 라며 쩔쩔매던 유진 앞에서 경자 씨는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유진의 눈길은 여전히 닭에 꽂혀 있었다. 아랫입술에 박힌 앞니가 안으로 들어갔다. 경자 씨가 고무장갑 위쪽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유진이 지갑에서 만원을 꺼냈다.
“만원인데 만 이천원 같은 걸로 한 마리요.”
경자 씨는 만 원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아래칸 닭장 문을 잡았다. 문을 열 때 닭들은 재빨리 바깥으로 붙었다. 문 앞에서 닭똥 부스러기와 깃이 퍼드덕거렸다. 유진의 동그란 눈이 짙은 닭 냄새에 감겼다. 경자 씨의 손에 걸린 암탉은 갈색이라기보다는 젖은 피가 햇볕에 오래 말라붙은 색 같았다. 닭을 집을 때 경자 씨는 닭의 다리 근육이 버둥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깥으로 뻗대는 닭털은 따뜻했다. 닭의 목이 허공에서 까닥거렸다. 목을 잡을 때 갑자기 경자 씨는 등 뒤에서 뭔가가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살짝 떨었다. 국민학교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성기는 것 같았다. 난 닭 못 잡는다, 닭 좀 잡아 오너라. 경자 씨는 거꾸로 들린 닭의 목에서 어릴 적 자신의 손이 부들거리며 나타나는 것 같았다. 이것아, 빨리 잡으라니까, 니 오래비 굶는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닭의 신음소리처럼 부들거리고 간헐적이었다. 다시 목을 쥔 경자 씨는 살짝 눈썹사이를 구겼다. 항문에서 똥이 비실대며 쏟아지고 있었다. 경자 씨는 빈 닭장 위 선반에서 긴 식칼을 꺼내 닭의 가슴께를 찔렀다. 닭이 높은 비명을 낳는 동안 닭장 안은 푸드덕거림도 없었다. 널브러진 닭을 고무통에 던지자, 닭의 마지막 비명이 통 속에서 꺽꺽대며 새어 나왔다. 고무통 옆 솥단지에서 뜨거운 물을 바가지로 담고 드럼에 물을 붓는 동안 유진의 얼굴이 고무통으로 향해 있었다. 경자 씨는 고무통에서 닭을 꺼내 드럼통 안으로 던지고 손때로 검게 빛나는 스위치를 올렸다. 덜컹거리며 드럼통이 소음을 뿜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양 손으로 깍지를 끼었다.
모터 소리 아래서 경자 씨는 수도꼭지를 열어 칼 위로 핏물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닭다리를 먹은 것은 오라비와 어머니였고 경자 씨는 목을 꼭꼭 씹었다. 오도독 하는 소리가 밤새 목에 붙는 것 같아 경자 씨는 등 돌린 어머니의 등에 손을 뻗다가 주저했었다. 바람 소리도 없는 밤에 어머니의 등은 표정이 없어서 더 두려웠다. 오랜만에 닭 잡을 때 이 기억이 붙는가, 어째서 이렇게 끈질긴 것인가. 경자 씨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새어나와 모터 소리 사이로 스며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유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드럼통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죽네요, 닭도…….”
유진이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일 때 보리가 치마 위로 앞발을 올리며 낑낑대었다. 유진은 보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지만 두 눈은 여전히 드럼통에 꽂혀있었다. 경자 씨는 스위치를 끄고 닭을 꺼냈다. 털이 반쯤 지워져 있는 닭은 먼지투성이 공 같았다. 대롱거리는 두 눈알을 떼어 싱크대 안에 던지곤 경자 씨는 솥을 열었다. 털 하나 없는 솥 안에서 수증기가 화투치는 사내들 방에 고여 있는 담배연기처럼 한꺼번에 쏟아졌다. 닭을 집어넣고 솥뚜껑을 닫자, 수증기는 가을 밤 도둑고양이처럼 재빠르게 사라졌다. 유진이 보리 머리에 손을 떼며 닭털이 묻은 신발을 보았다.
“이렇게 닭 잡는지 전혀 몰랐어요. 칼이 쑥 들어가는 것도, 기계에 들어가는 것도. 책에선 목 꺾는 것만 나왔는데.”
“책이나 방송하고는 완전 다르지. 그래도 옛날 보다는 나은거야. 목 꺾고 털 일일이 뽑는 거, 더 지독해.”
경자 씨의 가라앉은 대답이 천천히 유진의 턱을 붙들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유진은 발끝을 모았다. 경자 씨는 유진의 발끝에서 5년 전 읍사무소 문화교실에 앉아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때가 떠올랐다. 교탁 앞에 꽂힌 마이크에서 진 선생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시 한 줄이 나를 바꾸고, 주변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우리 어머님들, 시 하면 어떤 거 생각나세요? 저기 뒷줄의 단발머리 어머님, 마지막으로 읽은 시가 언제였어요? 첫 번째로 쥔 마이크 앞에서 경자 씨는 솥 안의 닭처럼 땀을 많이 흘렸다. 진 선생의 마이크가 남편 가진 여자들에 차례로 멀어지고 나서도 경자 씨의 두 발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곱게 모여있었다.
젖은 닭을 다시 드럼통에 넣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오골계 몇 마리가 푸드덕댔다. 드럼통 위에서 떨어진 파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경자 씨의 혀가 좁게 열린 입술 아래서 들썩였다. 사흘 공쳤다고 손이 벌써부터 헛헛하면 안되는데. 스위치를 내리고 나서 닭을 꺼내 놓으니 대가리부터 발까지 말갛게 분홍빛 살갗이 피어 있었다. 여전히 질린 얼굴로 앉은 유진이 경자 씨는 다시금 안쓰러웠다.
“막상 보려니까 힘들지? 집에 가 있어. 가져다 줄 테니.”
보리가 유진의 운동화에 발을 올렸다. 젖힌 유진의 고개가 기름때가 묻은 천장을 훑었다. 아니에요, 라는 말에 이어진 침묵이 닭집 안에서 눌어붙었다.
경자 씨는 오른손으로 싱크대 오른편에 놓인 커다란 삼나무 도마를 싱크대로 가져와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남편이 들고 온 자신의 첫 도마였다. 고모가 양복집에서 사람 올 거라고 해 호리호리한 양복쟁이를 생각 생각했는데, 막상 러닝셔츠만 걸치고 닭집으로 찾아온 상고머리 사내의 팔근육은 불끈거렸다. 세비로 양복점에서 왔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사내는 도마와 땀 맺힌 이마를 끌고 왔다. 고모는 잠깐 나가셨어요, 라는 스무 살 경자 씨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싱크대에 도마를 올려놓았다. 사장님 심부름입니다, 라며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컵에 담긴 냉수와 안부를 묻는 대화가 오간 뒤 그는 텅 빈 컵을 내밀었다. 곧 계모임에서 돌아온 고모는 경자 씨와 사내를 번갈아 흘겨보았다. 저녁에 자전거를 끌고 가던 그가 닭집 앞에서 고모를 향해 다시 몸을 숙였고 앞으로 치마 태우지 말고 다림질 잘 하셔, 라는 퉁바리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녁을 비울 때 고모는 사내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요를 펼칠 때까지 꼬치꼬치 묻고 급기야 허리를 몇 번이고 찔렀다.
선반에서 꺼낸 중(重)식칼이 번뜩였다. 나무도마 위에 닭을 올려놓고 모가지를 치자 눈이 텅 빈 닭의 대가리가 싱크대 안으로 처박혔다. 닭 왼쪽 종아리에 칼집을 내자 피가 닭다리를 타고 흘렀다. 경자 씨는 닭 왼쪽 발을 잡고 돌아보았다. 닭발 잘 먹니, 유진의 눈이 경자 씨의 어깨에서 고무장화로 향했다. 그건 안 주셔도 괜찮아요, 라며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경자 씨는 묵묵히 닭 오른쪽 종아리에 칼날을 넣었다. 세 갈래로 벌어진 발이 차례로 부딪쳤다. 물때가 낀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방울들이 앞치마에 튀었다. 경자 씨는 닭 머리와 닭발을 씻어 소쿠리에 나눠담고 칼을 들었다. 다시 닭의 앞가슴에 칼날이 스며들었다. 흠집이 확연히 피었을 때 식칼이 닭의 항문에서 아랫배로 쑥 들어갔다. 피가 닭가슴을 타고 잘린 목 사이로 흐르다 싱크대 아래서 가라앉았다. 번들거리는 껍질에 엄지를 넣고 칼을 들이밀 때 경자 씨는 남편과 처음으로 같이 보낸 밤을 떠올랐다. 시내 다방서 경리일 하는 여고 친구들과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깔깔거렸는데 화장실 가는 길에 상고머리 사내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어, 세비로 양복점. 부용닭집이시군요. 사내 옆에 있던 스포츠머리가 눈을 찡긋거렸다. 형규 아는 분이시구나. 우리도 세 명인데, 괜찮다면 저희랑 맥주 한 병씩 하시겠습니까. 여섯 명의 웃음소리와 함께 노오란 샹들리에 불빛이 번들거리며 흔들렸다.
맥주 반잔에 속이 울렁거려 다방에서 나와 달을 보는데 사내도 삶은 대추 같은 얼굴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빨개지셨네요. 네, 술 잘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달빛 아래 읍으로 걷는 내내 경자 씨는 사내가 강원도에서 홀로 내려왔다는 것과 양복을 입은 남자들을 동경했다는 것을 들었다. 양복 만들다 보면, 저도 언젠가 한 벌 지어 입을 것 같아서요. 전 닭 많이 잡아도 닭처럼 될 생각은 없는데요. 그날 처음으로 경자 씨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입에 담았다. 묵묵히 듣던 사내는 닭집 앞에서 환한 달빛 아래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가 시는 잘 모릅니다만, 이건 외우고 있습니다. 며칠 뒤 경자 씨는 그 시가 모든 이발소에 밀레의 만종 모사품과 함께 붙은, 프랜차이즈 같은 시라는 것을 알았지만, 달빛 아래 상고머리 푸슈킨은 그날 밤부터 가슴이 헛헛할 때마다 들어왔다.
봄을 알리는 기척이 옹골지다. 보도블록이나 콘크리트 틈새에서 겨울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환한 등을 지천으로 켜 놓고 어서 봄 마중 나오라고 납작한 손을 흔든다. 방긋거리는 노란색 길을 따라 걷노라니 어둑했던 동면(冬眠)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마음이 상쾌하니 꽃들의 환대에 가벼운 답례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 싶다.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할까. 아님 엎드려 입을 맞출까. 생뚱맞은 예의에 민들레도 어색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에게 다 내주는 자연의 섭리가 언제 이렇다 할 생색을 냈던가. 어디든 내려앉으면 내 자리 내 집이니 저리도 평온한 얼굴인 것을. 너른 들이나 막다른 골목 어느 귀퉁이에서도 해맑게 피는 민들레. 우아한 향기와 반듯한 자리를 탐내지 않음은 본시 소박한 민초의 천부적 태생일까, 아님 다스려 쌓아 온 내공일까. 비바람을 친구인 양 맞아 주고 무수한 발길에 밟히면서도 아직 더 밟힐 일에 초연한 민들레. 그런 자세는 사실 어떤 힘에서 나오는지 수월찮이 세속에 물든 나는 연륜에 걸 맞는 인격을 좀 배우기 위해서라도 그 순수한 성향을 꼭 알아내고 싶다.
땅에 딱지처럼 붙은 민들레에게 다가가 일단 키를 낮추어 보니 미세한 꽃술 속에 나름 소우주가 들어 있다. 모두 모두 제자리에서 가만가만 노래하는 화음이 들린다. 초대받길 원하는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풀꽃나라 노란 성문(城門)이 열린다. 환영하는 팡파르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의 범속한 것들이 익숙한 틀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쓴다. 여러 지체(肢體) 중 가슴 하나가 마땅히 버려야 할 한 움큼을 절대로 못 내주겠다는 듯 꽉 쥐고 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조종하는 본질을 본다는 것��� 칼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어려운 심리학을 모르더라도 무의식으로 잠재한 인격 형성에 있어 가치 있는 발전이고 반전이 될 것 같다.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되는가 하면 어느새 이율배반적인 속물근성으로 버무려지고 한 낮 태양 아래 훤히 보이는 자신을 거부하고 싶은 실리에 약삭빠른 또 다른 조악한 두뇌의 지시가 스멀거린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 안에 팽팽하게 맞서 존재하는 이분법, 반기를 든 그 무엇이 영 마뜩찮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잴 수 없을 만큼 멀다는 걸 알겠다.
장막이 없는 나라에서적나라하게 드러난 초라한 것들이 웅성거린다. 육중한 몸을 싣고 다니던 신발마저 벗어 버리니 발바닥을 간질이는 폭신한 풀이 시원하다. 밤이면 은하수가 냇물에 얼비치는 청정(淸淨)나라.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 축제 마당에서 두 팔을 벌리자 확 트인 땅, 그 자유의 날개가 축배의 잔을 들잔다. 분명 새로운 세상, 어느 여행지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신선한 곳, 일단 지상권이 없으니 주민센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집도 빌딩도 없으니 흙 자체가 보석이다. 민들레의 천성을 알겠다. 일찍이 소유를 벗어난 경지를 터득한 고로 사심의 꼭대기는 절대 모를 꽃이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민들레나라 성문을 나왔다. '본초강복'에 거론된 민들레가 입을 한번 떼겠단다.
"나는 여러해살이풀. 각처의 들이나 길가 또는 근처에 흔하게 살고 있어요. 국화과로 서 잎자루에는 날개가 없지만, 잎은 깊게 갈라지고, 가장자리에 거친 톱니가 있어요. 줄기 는 없고, 잎은 밑동에서 나와 방석처럼 옆으로 퍼지면서 이른 봄 풀잎 사이의 중심부에서 꽃대를 밀어 올리죠. 그 끝에서 노란�� 꽃을, 가만, 지금부터가 중요한 제 모습입니다. 한 송이씩 질서 있게 하늘 보고 피죠. 꽃이 진 자리에서 흰 솜털이 달린 씨앗의 날개가 돋아 나 하얗고 둥근 모양으로 부풀어요. 이는 갓털이라 합니다. 며칠 머물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죠. 머물던 자리는 돌아보지 않아요. 밟혀서 짓이겨지는 만큼 가벼이 씨를 뿌려야 하는 제 숙명을 아시겠죠? 잎을 자르면 흰 즙액이 나오지만, 어린잎은 여러분 식탁에 올라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하게 미각을 돋우기도 해요. 한방에서 포공영(蒲公英)이라 하여 땅 위 로 올라온 전초(全草)가 약재로 쓰여요. 너무 흔한 저지만 이제라도 꼼꼼하게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일, 식물나라에 국적을 둔 자칭 촌스런 민들레라 하더니 일목요연하게 소개를 잘했지 싶어 박수를 쳐야겠다. 짝짝짝, 분명 자생력이 강한 식물로 추위도 잘 견디는 풀이다. 가상하고 의미 있는 특징은 풀잎의 숫자만큼 꽃대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늦가을에 풀밭을 살펴본 적이 있다. 민들레가 억지춘양 피어 있었다. 꽃의 소임이 가상하여 여러 날 눈을 맞추었건만 며칠 후 민들레는 하얀 이불을 덮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 아! 민들레는 돋아난 풀잎이 몇 개 인지 잊지 않았구나, 겨울 문턱에서도 애썼던 거구나. 그게 마지막 꽃대였구나. 한때 허망한 세월을 좇던 세월이 있었다. 돌담에 기대선 소박한 해바라기보다는 울타리에 불붙는 화려한 장미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뜻한 바를 이루고자 외국으로 떠나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동생이 줄줄이 있는 집안 장녀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꿈이었다. 꿈꾼 후에 엄연한 현실일 뿐인 텅 빈 공간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비참한 법이다. 희망이 소등된 캄캄한 세상. 삶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은 지성에 더하여 지혜가 필요하다. 봄이었던 그해도 민들레는 저마다의 길손을 반겼지만, 가당찮은 꿈으로 부푼 내 동공에 보일 리 만무였다. 무심히 밟았으니 매지구름 속 허무 외에 무엇을 보았겠는가. 지극히 보편적인 곳에 타당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자맥질하는 흙탕물 속에서는 깨닫지 못한다. 죽을 만큼 외로운 방황도 곁을 내주지 않는 아집 때문에 더 오래 헤매는 법이다. 둥글둥글 묻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촉을 틔웠다. 민들레를 좋아해도 괜찮을 값을 제대로 치른 것일까.
유목민의 삶터가 초원이듯 민들레는 해님처럼 맞아 주는 어머니 같은 꽃, 변방으로 내몰린 이방인을 위한 사랑의 꽃이 분명하다. 줄기는 없지만 훌훌 날아가 앉은 자리에 여린 꽃대를 끙끙 밀어 올리는 민초의 힘. 세상 어느 등보다 밝아서 사심이 없고 키도 작지만, 자존심이 깐깐한 소신 있는 꽃이다. 홀연히 떠나는 날이 축제의 날이요, 앉는 곳이 그의 영토다. 긴 방황 중에 만난 민들레의 처방전은 지상권을 주장하며 누워 잘 평수에 급급했던 욕심까지도 제 영토에 고이 묻어 주었다. 내 삶이 완성되어 떠나야 할 날에도 어쩌면 갓털을 앞세워야 발길을 떼지 싶다.
환한 등을 따라 걷는다. 노란 촉수는 어디만큼 가야 둥글게 충전될까. 허공을 떠다니던 하얀 기우를 뿌리로 내린 것인지 언 땅을 파 보면 민들레 뿌리는 옹 골지게 박혀 있다. 틈새를 비집는 자생력으로 버들가지의 물오르는 소리도 맨 먼저 듣고 마중 나갔을 것이다. 그 수고의 꽃을 피워 놓고 어서 봄 마중 나오라고 재촉하지 않던가, 사실 민초나라 민들레에게 무엇 하나 베푼 것도 없는데, 봄소식에다 꽃등까지 너무 고마워서 미안할 뿐이다. 갓털이 날아가는 궤도에 저공으로 나는 비행기조차 없는 이유를 알겠다. 천성이 그러하니 가는 길이 제 길이요, 내려앉는 곳이 민들레 영토라고 식물나라 수장이 땅! 땅! 땅! 명명했을 것이다. 올봄에도 꽃등축제가 열린다는 초대장이 조만간 날아들 것이다. 민들레는 초록빛 선상(線上)에 핀 노란 아리아. 그 들녘으로 사뿐히 걸어 나갈 그날이 기다려진다.
시댁 마루에 앉아 건너편에 있는 과수원을 바라본다. 가을걷이 끝낸 들녘을 넘어 사과나무 열매가 내 눈길과 마주치자 빨갛게 웃는다. 태양과 태풍을 인내하고 실하게 살 오른 사과는 저리도 밀도 높게 달려있다. 몇 해 전 시어머님의 거친 손을 빌어 논에서 과수원으로 거듭난 곳이다 자갈논을 뒤집어 과수원을 만들겠다고 어머님이 말했을 때 자식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도회지살이가 무슨 대수라고 입버릇처럼 '바쁘다'고 하면서 몸은커녕 마음조차도 ‘사서고생' 이라고 후원하지 않던 자식들이었다. 쓴 입술만 보탰던 자식들이 지금은 둘러 앉아 ’달고나 맛나고나' 농익은 과육을 씹는다. 고랑마다 어머님 골타고 흐르던 땀이 자양분되어 푸석한 땅심을 녹녹히 만들어 놓은 탓이리라
봄볕이 추임새를 넣을 때마다 사과나무 겨드랑에서 사과꽃이 돋는다.봄이오는 소리는 봄을 향해 귀를 열어 놓은 것들이 먼저 듣는다. 겨울채비로 단단히 여며 놓았던 창호지 속에서 동면하던 꽃잎이 기지개를 켜고, 헛간구석에서 무료하던 어머님의 노란 장화도 무릎을 세운다. 곁눈질하면서 살짝살짝 벙글던 사과꽃이 뭉게뭉게 꽃구름으로 피고 마침내 꽃잔치가 벌어지면 어머님은 전화를 하신다. ‘댕겨 가그라’ 무뚝뚝한 어머님의 가장 살가운 표현이다. 손자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꽃 좋아하는 며느리에게 이토록 고운 꽃잔치를 보여주고 싶기도 한 것이다.
꽃은 정작 어머님이 더 좋아하셨는지도 모른다. 과수원을 일구고 첫 꽃을 피운 때였다. 시댁에서의 잠자리가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으로 솔솔 새어들어 오는 바람에 코끝이 시렸고, 뒤란 대숲에서 바람 이는 소리에 잠들기 힘들었서 뒤척거리다 그만 마루로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마루 끝에 오도카니 어머님 앉아 있었다. 환한 달빛에 투영된 어머님의 옆얼굴은 새댁같이 수줍어 보였다. ‘아가 이리 와서 앉거라’ 어머님은 과수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사과꽃이 만발한 과수원은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로 달빛이 켜켜이 배어들고 있었다. ‘참 좋구나’ ‘참 좋다’ 어머님은 연신 그렇게 되뇌는 것이었다. 장부처럼 드세기만 하던 어머님에게서 애잔한 여심을 엿본 날이었다. 어머님과 마루에 앉아 달빛에 젖는 사과 꽃을 오래오래 바라본 유정한 봄밤이었다.
한량같이 밖으로만 떠도는 남편, 조롱조롱한 다섯 아이들과 호랑이 시부모를 수발하며 과수원까지 돌보는 일은 어머니 가슴에 숯덩이를 얹고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고된 생활은 자연히 입이 굳고 마음도 단단해져서 구부리기보다 부러지기가 쉬웠던 모양이다. 어머님의 언어는 투박하기만 하다. 허투루 말을 내뱉지도 않지만, 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두었다가 한 번에 뭉뚱그려서 툭 내뱉고 만다. 속내는 그렇지 않다지만 여리고 어설픈 며느리는 가슴이 베이기 일쑤여서 시댁 다녀오는 일은 내게도 가슴에 돌덩이를 얹는 일이었다.
어머님은 무장아찌 하나 달랑 놓고 밥 한 그릇 달게 비우는 담백한 사람이다. 고단한 육신을 내려놓는 일도 그처럼 담백했다. 매일 새벽 벗 삼았던 미명의 배웅만 허락했다. 건너편 아짐이 “영천댁아 자노? 웬 늦잠인감 ? 하며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 때 벌써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입버릇처럼 잠든 듯이 고스란히.... 주인을 잃은 과수원은 휘청거렸다. 과수원을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계절 바뀔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당숙모의 성화를 들어야 했는데, 올해는 친척뻘 되는 아재가 맡았다.
과수원에 내려놓았던 시선을 거두어 맞은편 느티나무를 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나는 언제나 두 번 인사를 한다. 첫 번째 인사는 아버님을 향한 문안이고, 두 번째는 느티나무의 오래도록 안녕을 위해서이다. ‘여기 수령700년에 이르도록 이 자리 지켜선 느티여 그대 푸른 그늘에 안길 때면 푸른 꿈 푸른 가슴 서로 얽혀서 만년을 가도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인연 맺으려 하노라!’ 누군가 새 석판에 새겨놓은 아름다운 구절은 읽노라면 정말로 이 느티나무와 아름다운 인연의 가지를 늘려가고 싶다. 느티나무의 나이테는 이 마을 사람들의 전설이다.
지금은 느티나무 주변으로 벤치도 만들어 놓고, 꽃도 심어 멋진 쉼터를 만들어 놓았지만, 예전에 그곳은 대나무 평상 아래 늘 아버님의 흰 고무신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아버님은 안경 낀 지식 청년으로 이 동네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남보다 앞선 의식 탓에 겪어야 했던 방황의 세월은 너무도 길었었나보다. 아버님은 언제나 ‘부재중(不在中)’ 이었다. 서울에 작은 각시가 있다고도 하고 노름판에서 전답을 날렸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들에게 보여 지는 것일 뿐 어머니에게 있어서 아버님은 언제나 여집합을 이루고 계셨다. 집안의 대소사를 이야기 할 때 언제나 ‘니 아버지 오시면’ 하며 아버님의 자리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평생 타지로만 떠돌다 남루해진 영혼만 가지고 내려왔어도 묵묵히 받아준 건 이 느티나무였다. 고향에 돌아온 후 아버님은 늘 느티나무 아래 있었다. 아버님의 푸른 꿈 푸른 가슴도 여기에 내려 놓으셨을까?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먼눈으로 바라보면 느티나무 아래 아버님의 흰 적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버님의 시선은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다. 쇠잔한 육신은 느티나무 아래 붙박아 두고 자유로운 마음을 멀리멀리 보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평상 아래 반듯이 벗어놓은 흰 고무신은 그 빛깔이 너무 희어서 시골의 진흙땅과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버님은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셨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민망해하며 말씀을 낮추라고 해도 ‘ 존대해서 빰 맞는 법 없다’ 고 짧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님을 뵌 날도 느티나무 아래서이다. 이미 병색이 깊은 얼굴이었는데, 자꾸 달아나려는 눈빛을 겨우 붙잡아 나에게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멈추고 싶어도 의지대로 제동 걸리지 않는 해소기침처럼 아버님의 삶도 쿨럭거렸다. 아버님에게 있어서 ‘아내’는 탯줄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어머님 떠난 뒤, 자주 가물거리던 의식을 끈을 놔 버리고 아내의 탯줄을 잡기로 작정한 것처럼 곧장 어머님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떠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사신 두 분이 내 시선 속으로 들어와 일체를 이룬다. 빈가지만 남은 겨울과수원에 삭풍이 불면, 아버님의 느티나무를 건너오면서 데워진 바람이 사과나무를 흔들고 지나간다. 어머님의 과수원이 꽃을 피우느라 꿈틀거리면, 아버님의 느티나무도 응원의 초록을 내민다.
퇴적된 시간이 거름 되어 사과와 느티나무는 비로소 연리목(連理木)이 된 것이다.
마루에 앉은 채 나는 오랜만에 인사를 올린다. 두 분 잘 계시지요?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한다.
시골집 대문 안에 들어서자 텃밭에서 푸성귀를 솎아내던 시어머니께서 흙 묻은 손을 털고 일어서며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신다. 가끔 다녀가는 자식들이 적적함을 밀어내는 말동무이리라. 이것저것 물어보며 세상 밖 이야기에 귀 기울이신다. 밭에서 솎은 어린 배추로 얼갈이김치를 담고 챙겨간 찬거리로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귀뚜라미 소리에 이끌려 그이와 함께 개울가로 나갔다.
동구 밖을 지나 갈대가 사운거리는 둑길을 따라 걸었다. 동산 너머로 열나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벼들이 그득 찬 들녘은 달빛에 젖어 희붐하다. 내 키보다 큰 갈대들은 냇둑 위에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다. 갈대밭 언저리로 작은 불빛 하나가 깜박거리다 사라진다. 잘못 보았을까. 내 눈을 의심하기도 전에 또 다른 등불이 환하게 내 곁으로 다가온다. ‘와아, 반딧불이다.’ 파리한 불빛이 보일 듯 말 듯 여기저기 떠다닌다. 손으로 잡으려 발돋움해도 어느새 저만치 날아간다.
내 초록의 날에 잡으려면 날아가는 꿈처럼 반딧불이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밤하늘에 등불을 켜고 날기 위하여, 반딧불이는 물속이나 땅 밑에서 일 년 가까이 애벌레로 살아간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반딧불이 애벌레처럼 움츠리며 지낸 적이 있다. 취직이 되지 않아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꿈은 구겨진 일기장에서 졸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 저녁나절에나 문틈으로 햇살 한 자락 들이밀던 단칸방에서 시간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빛의 건너편에서 누런 벽지에 그려진 문살 그림자를 세며 하루를 건너갔다. 피 끓는 젊음이 매일 일 없이 지낸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행이었다.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부엌에서 밥을 지으시며
“저 하나 보고 애면글면 갈쳤구만. 허구 헌 날 방구석 신세라니…….”
방문 틈으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였다. 어렵사리 가르친 딸이 밥벌이도 못 하고 빈둥거릴 때 당신 속은 새까맣게 숯덩이가 되었으리라.
날마다 놀기도 민망하여 용돈이라도 벌려고 수예점 문을 두드려 수틀 속에 명주실로 동양자수를 놓아 갖다 주면, 손에 들어오는 것은 라면값 정도였다. 보기에 딱했던지 이웃집 아저씨가 일자리를 소개해 줘서 시오리를 걸어서 작은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장이라고 한 사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사정이 좋지 않으니 다음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오는 내 등 뒤엔 서글픔이 매달렸다. 하릴없이 골목을 왔다 갔다 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동네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하나둘 보내줘 과외를 하며 백수 시절을 견뎌냈다.
요즈음 청년들도 일자리가 없어 아르바이트하고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취업 준비하느라, 가로등 불빛을 세며 그림자처럼 살아간다고 한다. 얼마 전 지인 아들도 몇 년째 임용고시에 도전했는데, 또 떨어졌다는 말을 전하며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낙담하는 그 모습에 오래전 방구석에서 뒤척이던 내가 떠올라 콧날이 시큰거렸다. 푸릇한 날에 햇빛 속에서 엽록소를 생성하지 못하고, 응달에서 누렇게 시들어가는 나뭇잎처럼. 청춘의 뒤안길에서 눅눅한 어둠 속을 느릿느릿 기어가는 나는 한 마리 애벌레에 불과했다.
검은 밤의 한가운데를 삼 년을 서성거리다가 드디어 조각방에서 벗어났다. 기다리던 발령을 받고 교단에 서게 되었다. 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열정을 다해 가르쳤다. 집에 가면 소꼴을 베느라 숙제할 시간이 없는 아이들이 교실에 남으면 같이 공부했다. 산 그림자가 유리창에 살금살금 걸어올 때까지 산골 아이들과 환경도 꾸미고 풍금 치며 노래도 불렀다. 간간이 간식거리를 챙겨주면 쑥스러워 머리를 긁적이던 순박한 산골 애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세상의 그늘에서 애벌레처럼 웅크리지 않았다면, 아이들을 향한 그 많은 정이 샘처럼 솟아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딧불이가 하늘에 오르는 날을 기다리며 암흑 속에서 등불을 준비하듯이. 오랜 기다림은 내 가슴에 끝없는 도전과 열정을 심어 주었다. 시간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가도 무언가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움을 찾아 떠난다. 덧없이 흘러간 초록의 날을 되찾아 오려는 듯이.
개울가로 불빛 하나 호로록 날아간다. 갈대밭 곳곳에 파리한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나타났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반딧불이가 등불을 어디에 매달고 다닐까. 어릴 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나 잡아 봐라.’ 약을 올리듯 불빛은 멀어져갔다. 가까스로 한 마리를 손안에 넣었다. 반딧불이를 조심스레 땅 위에 내려놓고 스마트폰 불빛에 비쳐 보았다. 죽은 척하고 검은색 벌레는 가만히 있었다. 뒤집어서 불빛이 어디서 나오는지 살펴보았다. 머리에서 빛이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검붉은 배아래 쪽에 담황색 야광등을 달고 있다. 몸길이는 새끼손가락 한마디쯤 될까. 그 작은 몸에 발광체를 달고 날아올라 밤하늘에 빛을 뿌리다니 경이로웠다. 반딧불이를 살며시 집어 날려 보냈다. 푸르스름한 빛을 깜박이며 날아가다 고맙다는 듯, 급히 선회하여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 사라졌다.
슬픈 발광發光이다. 반딧불이는 오랫동안 암흑 속에 머물다가 우화하여 불을 밝히고 날지만, 열흘 뒤면 풀숲 어딘가에 쓰러져 생의 종말을 맞으리라. 반딧불이는 다른 풀벌레처럼 울지 않는다. 울음이 아니라 등불을 켜기 위하여 이슬만 먹고 몸을 가볍게 한다. 자신을 비워 어둠을 뚫고 하늘을 비행한다. 풀벌레들이 지상에서 시끄럽게 울 때 그는 조용히 세상을 빛으로 밝힌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반딧불이의 초월적 힘이다.
흙탕물이 굽이치는 동안 말갛게 가라앉듯이, 이끼 낀 마음도 흐르는 세월에 닦여져 반딧불이가 먹는 이슬처럼 투명해질 수는 없을까. 비워진 가슴에 맑은 샘물이 고이면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으리. 반딧불이가 여느 풀벌레처럼 울지 않고 생의 마지막을 빛으로 밝히듯이, 내 삶의 끝자락도 환하게 사랑의 등불을 켜다가 스러졌으면.
반딧불이가 너울너울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떠간다. 빛의 경계 너머에서 움츠리던 내 젊은 날의 꿈이, 깊어가는 내생의 가을에 별이 되어 날아간다.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그리는 흑백 그림들도 올려다보고, 도글도글 떠 있는 밤하늘 별도 헤아렸다. 알 수 없는 그리움도 꽃그늘에서 키웠다.
첫 생리혈 같은 부끄러운, 첫 키스처럼 달콤한, 연인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운, 엄마 품처럼 포근한, 구름처럼 떠도는 그리움… 숱한 설렘을 불러일으켜 준 곳.
그곳에 서면 대지며 자연의 활기찬 흐름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걸기도 했다. 와락, 덮쳐오는 감성에 세포 하나하나까지 꿈틀거렸다. 살짝만 건드려도 펑! 터져버릴 듯, 몸이 달뜬 석류가 제 몸을 확 열어젖히면 처음 첫날들의 감각이 가득 차올라 내 하루도 붉었다. 중년에 막 올라버린 내게 ‘첫’의 감각들이라니.
석류나무는 갈수록 품이 넓어지고 열매도 풍성해졌다. 가지가 하늘에 닿을 듯 치솟고 무성한 잎은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진딧물이 제 혈관을 갉아대도 마냥 싱그러웠다. 유월이면 종 모양의 꽃자루가 이파리 수만큼이나 주렁주렁 열렸다. 그 종 끝에 진한 주홍빛 꽃이 화르르 피어오르면 홍등을 밝힌 듯 마당이 환해졌다. 붉은 꽃이 꽃자루에서 떨어지면 한 시절이 하나의 열매로 완성되었다.
해마다 석류는 촘촘한 볕 속에서 열여섯 소녀의 볼처럼 탱글탱글 영글었다, 선들선들 갈바람이 일면 주체할 수 없는 빠알간 몸을 화락 열어젖혔다. 알알이 박힌 투명하고 붉은 알! 알! 알!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알, 세상 모든 것을 품어 꽉 찬 붉은 세계는 보기만 해도 충만감을 주었다.
육아, 살림, 가게, 십여 년간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라도 몸을 누일 틈이 없었다. 주말에는 시골 시집에 가서 일을 돕다가 일요일 늦게서야 돌아왔다. 피로에 쌓인 몸은 둘째고 마음이 점점 피폐해졌다. 더 버티면 영혼조차 스러지고 말 것 같았다. 가게 일에서 손을 뗐다.
집안일을 느슨하게 해가며 오지랖을 넓혔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라는 존재로 환한 삶을 살고 싶었다. 미련이 남은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과 도서관을 오갔고, 문화센터며 독서 모임에도 나갔다. 사람 사이의 관계망도 넓혔다. 답답해지면 집을 박차고 나왔다. 며칠씩 산하를 돌아다니며 자유를 즐겼다. 감성이 넘쳐난 내 생의 봄날이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다. 몇 해 전부터 석류나무는 열매를 제대로 달지 못했다. 빈 꽃자루가 마당을 뒹굴었고, 겨우 맺힌 예닐곱 개는 한쪽이 썩다가 저 혼자 툭 떨어졌다. 수확물이 없으니 효용도 미적 가치도 자연스레 줄었다. 한겨울, 때에 찌든 채 굽은 허리로 엉거주춤 서 있는 몰골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이제는 잘라버리자는 말이 남편 입에서 잦았다. 푸르게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내게 위안을 주었으므로 나는 그냥 두자고 했다. 옥신각신하다가 과실수 전지하듯 듬성듬성 가지를 잘랐다. 다음 해는 단발머리처럼 일정하게 베어냈다. 하지만 아직 멀쩡하다는 시위라도 하듯 석류나무는 곁가지를 쑥쑥 늘렸다. 더는 무용하다며 남편은 옆집 아저씨까지 불러와 허리께까지 싹둑 잘라버렸다.
갱년기에 들어선 내게 우울증이 찾아들었다. 두 딸이 떠나버린 휑한 공간에 짙은 허무가 똬리를 틀었다. 가지 끝에 새싹이 눈을 내밀어도, 나뭇잎이 갈바람에 휘날려도 감성은 깨어나지 않았다. 문학도 더는 나를 지탱해주지 못했고 어떤 잠언도 가슴까지 닿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시큰둥했다. 낮에는 축 늘어진 채 집안에서만 뒹굴었고, 밤이면 무언가를 찾듯 동네를 배회했다.
보아주는 이 없으니 몸단장도 하지 않았다. 푸석한 머리, 누렇게 뜬 얼굴, 흐릿한 눈동자, 목이 늘어진 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복, 거울에 비춰보면 추레한 석류나무 한 그루가 어정쩡 서 있었다. 이런 나를 남편은 농담 삼아 할멈이라 불렀다. 더는 붉은 월경도 열정도 없는 나를 여자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골방, 깊은 적막 속에 몸을 웅크렸다. 몸에 밴 습관이 요동쳤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필름을 되감듯 살아온 과정을 하나하나 재생해보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목, 살아왔지만 내 삶이 아닌 듯한 시간, 몽유병 환자처럼 제자리를 맴돌던 미로… 그 안에 내가 있었다.
몸을 한껏 웅크린 사이, 무수한 잔가지들이 나도 모르게 잘렸다. 자르고 쳐내도 손톱처럼 다시 자라던 것들, 곳곳마다 불쑥 솟아나던 잡다한 생각들이었다. 석류나무 전지하듯 누가 그 많던 욕망의 가지들은 잘라낸 것일까.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닫혀 버린 생리혈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하늘이 달아오른다. 반 토막이 난 몸에 거무스름한 혹들이 잔뜩 붙어 고사할 것 같던 석류나무, 뿌리 깊은 곳에서 있는 힘껏 물기를 빨아올리고 있는가, 더위 속에서도 품을 넓혀간다. 땅의 기운이 자신을 놓아버릴 때까지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내겠다는 듯, 붉은 꽃망울을 늘려간다. 꽃등을 밝힌 듯 다시 마당이 환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죽을 때까지 지켜내고 싶은 것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족할 것이다. 삶을 펄럭이게 하던 책과 문학의 깃대를 단단히 잡는다. 책장에 꽂힌 무수한 영혼들의 눈빛이 내게 쏟아진다. 생의 나날이 한 줌 다할 때까지 붉게 살라며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문을 열고 나가 석류나무 아래 선다. 잔가지 한 가닥 당겨 생기 물씬한 나뭇잎을 만진다. 무성한 잎 사이에서 꽃망울 슬쩍 고갤 내민다. 솔솔 바람이 뺨을 스친다. 다시 붉은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