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란
주영순
먼 길 어디쯤 오려나. 한 뼘밖에 안 되는 그 길은 무한한 비밀을 숨긴 채 애를 태운다.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화초는 자기들만의 생의 비법이 있겠지. 꽃마다 화사함 뒤에 숨긴 은밀함이 있다. 그들의 신비한 몸짓과 향기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날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 옛날 엄마가 화초를 들고 쩔쩔매던 모습을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수도국산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저 멀리 월미도 앞바다까지 다 보인다. 흉내만 낸 집들이 게딱지같은 지붕을 이고 다닥다닥 붙어있다. 부모님은 전쟁 통에 강화로 부산으로 피란을 다니다 산동네에 둥지를 틀었다. 달빛이 쏟아지면 아이들이 몰려나와 숨바꼭질하느라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와글거렸다. 장대비가 퍼부을 때마다 변소에서 똥을 퍼 개천에 버리는 집도 있었다. 구린내가 온 마을을 적실 때마다 우리 가족은 대책도 없이 빨리 이사 가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컸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동치미 국물을 먹으며 겨울을 보냈다. 나는 달동네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쑥쑥 자랐다.
몇 년 전 형제들과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갔었다. 조명이 컴컴한 박물관에서는 금방이라도 엄마의 저녁밥 먹으라는 목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귓전에 달라붙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속이 불편한 이유는 뭘까. 아니, 가슴이 아려왔다가 맞다. 남루한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층 아파트가 즐비해서 신기루처럼 떠도는 도시에 갇힌 듯 방향감각을 잃었다. 윗집 복기네 아랫집 승규네를 끼고 골목골목 뛰어놀던 옛집을 어렴풋이 짚어 가지만 짐작만 해야 했다.
내화벽돌을 쌓는 아버지는 손재간이 뛰어나셨다. 사람만 좋아서 실속이 없었다. 전국을 내 집처럼 다니다 잊을 만하면 집에 오셨다. 노동의 땟국으로 절은 봉투는 빈약했다. 엄마는 거룩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감사하셨다. 소중한 돈은 삼남매를 위해 알뜰살뜰 들어갔다. 당신 뼈에 바람이 들락거리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자신의 몸을 위할 생각은 안 하셨다. 헛헛한 시간은 교회를 다니고 화초를 가꾸며 메우셨다. 난소에 자꾸 혹이 생겨 자궁을 모두 들어낸 후 꽃이 시들듯 쪼그라지셨다.
엄마는 결핍과 적막을 감당하시느라 꽃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엄마가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생각도 했었다. 시난고난 앓던 분이 그 무거운 화분을 들고 애면글면하던 이유를 이제야 안다. 그저 그런 화초들마저 새삼 돌아보며 경탄하는 나이가 되니 알겠다. 눈빛을 반짝이며 꽃과 마주하던 엄마의 모습이 육십여 년이 지나도 선연하다. 그리움 주위에 아픔이 공전하는 이유를, 그것을 깨닫다니 다된 나이에 철이 났다.
엄마는 육십에 먼 길을 떠나시고 나는 툭하면 울었다. 진작에 병원에 모시고 가 혈액검사만 했었더라도 수를 누리다 가셨을 것을. 앞서가신 발자취는 내 몸 곳곳에 깊이 새겨졌다. 이것저것 검사하며 나는 삶의 모순에 자주 빠진다.
실란은 금방이라도 꽃대가 쏘옥 올라올 것처럼 이파리만 이들이들하다. 베란다가 답답할까, 햇살이 부족한가. 아니면 조각난 바람에 감질난 것인가. 물을 자주 주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무슨 변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한 실란에게 눈총만 줄 일이 아니다. 급기야 화분을 거꾸로 들고 쏟았다. 둥근 뿌리들이 뒤엉켜 빽빽하다. 저들의 사랑은 얼마나 절절하기에 꼭 붙어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꽃필 때를 놓친단 말인가. 커다란 화분으로 옮기고 숨쉬기 편하도록 거리를 두었다. 자주 들여다보며 말을 걸고 이파리를 쓸어내렸다. 분갈이한 지 얼마 안 되어 꽃대 열 주가 나란히 올라온다. 아, 두근거리던 가슴이 곧 경건해졌다.
우리 가족은 산동네를 내려와 평지로 이사를 했다. 언젠가 무덥던 날 뜰엔 온통 흰 빛깔의 실란으로 눈이 부셨다. 꽃처럼 곱던 부모님, 손주들에게 꽃을 보여주시며 함께 웃던 그때가 절절하다. 물김치에 국수를 말아 먹고 수박을 잘라 먹던 그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부모님의 은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집을 늘렸다. 학교에 보내고 공부를 잘해 행복했다. 남편과 희희낙락 하는 사이 부모님은 늙고 돌아가셨다. 옹색하고 알뜰한 살림이 당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했었으니 실란 옆에 앉아 뜨거운 것이 위로 솟구친다.
실란의 꽃대가 수도 없이 올라와 꽃망울이 환하다. 꽃송이 속에는 암술과 수술이 가족처럼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이 핀 듯하다. 노란 꽃가루가 담뿍 붙어 통통한 아이들 머리통이 연상된다. 햇살이 퍼지면 여섯 개의 꽃잎이 별처럼 펼쳐진다. 엄마보다 훨씬 늙은 딸은 옛날 집이 생각나 그리움에 사무친다.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이라도 그것이 그렇게 허망할지라도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뿌듯하다. 엄마의 시간은 영원히 멈추어 있다. 엄마는 하늘 저편에서 꽃을 가꾸고 계실 게다. 하찮고 볼품없는 꽃을 애지중지 아끼고 그들의 아픔과 수고를 돌보고 계실 거라 믿는다.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다. 삶을 쥐락펴락하며 멋지게 살고자 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얽히고설킨 인생길을 빠져나왔더니 삶의 끄트머리다. 노을처럼 펼쳐진 길 위에서 엄마가 보여주신 고귀한 사랑을 답습하며 담대하게 걸어가련다.
선선한 바람이 인다. 더디게 올라와 애를 태우던 꽃잎이 쉬이 진다. 꽃잎 끝부터 도르르 말린 여섯 개의 꽃잎이 파리해져 간다. 만남과 헤어짐의 변화에 묵묵히 순응하는 실란의 몸짓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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