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 수필가의 수필

 

햇빛 마시기

최원현

 

 

마셔 보세요!”

김 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산부인과병원 원장이다. 표정으로 보아도 전혀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는 매일 그렇게 햇빛을 받아 마신다고 했다. 순간 내가 마셔버렸던 유리컵을 다시 바라보았다. 컵은 다시 창가의 제자리로 가 있었지만 해가 없어졌으니 햇빛도 없다. 그런데도 유리컵에 내가 채 마시지 못했던 몇 개의 햇빛 알갱이들이 남아 보석가루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고 보면 햇빛도 포근히 안기거나 한곳에 담겨 쉬고 싶을 수도 있겠다.

태양에서 발산된 빛이 대기 속을 뚫고 내려와 발견한 한 작은 공간, 거기 갇힌다기보다는 빠져든 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건 어머니의 품속 같이 안온할 수도 있고 태양으로부터 보내지던 순간의 보드랍고 따스한 느낌일 수도 있다. 그 먼 거리를 달려와 이른 곳이 고작 작은 컵 속이라는 것이 화가 날 법도 하지만 땅으로 스며들어버리는 수많은 동료들을 보면서 그나마 그들과는 다른 곳에 이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 빛은 초당 삼십만 킬로를 가니 태양에서 발산된 빛이 이곳에 닿는 데까진 약8 20초가 걸린 셈이다. 그렇다고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빛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었다면 어떨까. 로켓이라면 5개월을 가야 하는 거리요, 비행기라면 17, 소리였다고 하면 15년이고, 새마을호 기차라면 114, 걸어서는 4,270년이나 걸리는 거리다.

내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맛이 어때요?” 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글쎄요. 향긋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얼버무리자 마음이 상대에게로 가는 데는 0.5초라더니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맛은 없을 거예요 해 버린다. 그의 말은 참 사무적인데도 싫진 않다. 사실 여기 무슨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어느 날 진료를 하다 물을 마신 컵을 마땅히 치울 곳도 없어 창가에 놔뒀다. 그런데 햇빛이 창 안 깊숙이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햇빛이 창가의 컵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도 보였다. 순간 햇빛이 컵에 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석가루 같은 빛의 알갱이, 하나님의 선물이 지금 컵에 담기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컵을 들어 주욱 들이 마셔봤다. 가슴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빛이 들어간 가슴 속에서 반가운 악수소리가 막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바깥 나라는 어떠니?’ 서로 묻고 답하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그는 그렇게 햇빛받이 컵을 창가에 계속 놓아두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매일 햇빛을 받아 마시게 되었을 수 있다. 어쩌면 나도 그랬을 수 있다. 내가 전혀 부정적이 안 되는 것도 그와 같은 생각을 나도 일찍부터 하고 있었을 수 있고 아니더라도 그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가능한 데다 거기에 내가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만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잡히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다. 정작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아주 큰 것도 작은 것도, 아주 먼 곳도 가까운 곳도 볼 수 없는 게 우리 눈이고 들을 수 없는 게 우리 귀다. 공기나 햇빛, 바람의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문득 김 원장이 내게 햇빛이라며 마셔보라고 한 건 보이지 않는 것도 보라는 특별한 마음 씀 같이 생각이 되었다.

햇빛 마시기, 참 그럴싸한 생각이지 않은가. 내 안의 어두움을 밝혀줄 기회요, 엄청난 살균력이 있다는 햇빛이니 그게 또 내 안 깊숙이 들어가면 거기 있으면 안 될 것들이 순식간에 괴멸되는 최고 유익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게 햇빛이었는데 나는 그걸 너무 모른 체 하고 살아오지 않았나싶다.

너무 큰 은혜나 사랑에는 고마워할 줄도 미처 깨닫지도 못 하고 사는 게 사람이란다. 그런 면에서 김 원장이 더욱 고맙다. 그 고마움의 마음 표시로라도 나도 당장 내 방 창가에 가장 투명한 컵 하나를 놓아두어야겠다. 그리고 거기 담긴 햇빛을 소중히 내 속 깊이로 들여보내 주리라. 그것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밖에 되지 않을 지라도 내 삶 속엔 아주 작게라도 소중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것 같다. 어쩌면 내 마음도 한결 깨끗해지고 생각도 정신도 맑아질지 모른다.

햇빛 마시기는 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다. 바깥세상을 안 세상으로 들여보내기다. 생각의 전환이다. 마실 수 있는 것의 영역 확대다. 새롭게 보기다.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아름답지 못하거나 바르지 못한 생각과 마음들이 들여보내진 햇빛으로 하여 씻기고 닦이고 다듬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컵을 준비하러 가는 내 마음도 창가의 햇빛보다 더 밝아진다. 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 내 안이 밝아지게 되면 세상도 조금 더 밝아질 게다. 내 안의 어둠이 걷히면 거기 새로운 희망의 싹들이 마구 피어날 것 같다.

 

누름돌 

최원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 지는 것이 있다. 앞서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만 못한 분은 없다는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다. 그 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날들은 분명 오늘의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과 조건의 세상살이를 하셨다. 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그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몫을 아름답게 감당하셨던 것이다.

요즘의 나나 오늘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분들보다 어렵다고는 할 수 없겠고, 특히 그분들이 처해 있던 시대는 지금에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였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보다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엄격하게 당신들 스스로를 절제하고 희생하셨다. 그분들의 어느 한 삶도 결코 오늘의 우리만 못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저 잘났다는 표를 지나칠 만큼 서슴없이 해댄다. 향기도 지나치면 역겨움이 되지 않던가. 멋을 낸답시고 호화로운 옷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그런 모습이 부럽고 아름답게 보이기보단 거스르고 거들먹대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명 적삼 내지 무명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어린 눈에도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던 앞 세대 어른들 모습은 지금에 생각해도 훨씬 더 아름답고 품위 있어 보이고 위엄 넘쳐 보인다.

강원도 정선엘 갔다. 다들 냇가로 나간다고 해서 나도 따라 나갔는데 그곳에서 수석(壽石)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저 돌일 뿐이었다. 다들 의미를 부여한 돌 한 두 개씩을 가져가는데도 나만 빈손이다가 문득 어린 날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께선 한 해에 한번쯤은 부러 냇가에 나가서 납작 동글 손바닥 만 한 돌멩이를 한 두 개씩 주워오셨다. 그걸 무얼 하려느냐고 물으면 누름돌이라 했다.

누름돌, 나는 그때 그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용도를 알게 되면서 부터는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다 냇가에 들러 그런 돌을 주어다 드리면 할머니께선 매우 좋아하셨다. 그 어린 날이 생각나 뒤늦게 마음이 급해져 누름돌로 쓸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그건 순전히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겠지만 내 삶에도 그런 누름돌이 필요하단 생각도 했을 것 같다.

누름돌은 모나지 않게 반들반들 잘 깎인 돌이어야 한다. 그걸 깨끗이 씻어 김치 수북한 김칫독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로 아주 서서히 내리누르며 숨을 죽여 김치 맛이 나게 해주는 돌이다. 그런가 하면 조금 작은 것은 때로 밭에서 돌아와 저녁을 지을 때 돌확에 담긴 보리쌀을 쓱쓱싹싹 갈아내는 돌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 돌은 어두운 부엌에서도 금방 알아볼 만큼 빛이 났다. 밤낮 없는 할머니나 이모의 쓰임에 따라 더 닳고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다 나도 손에 쥐어보면 돌의 차가움이 아닌 왠지 모를 따스함이 감지되기도 했다.

요즘 내게 부쩍 그런 누름돌이나 돌확용 돌이 하나쯤 있었음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뭔가 모를 것들에 그냥 마음이 들떠있고 바람 부는 대로 휘둘리는 키 큰 풀잎처럼 좀처럼 내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렵다. 이런 때 그런 누름돌 하나 가져다 독안의 김치 꾹 눌러주듯 내 마음도 눌러주었으면 싶다. 거친 내 마음을 돌확에 넣고 확돌로 쉭쉭 갈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스쳐가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에 주제넘은 욕심을 펴는 날카롭게 결로 깨진 돌 같은 감정들도 지그시 눌러주거나 갈아내 주었으면 싶다. 아니다. 그보다 짜고 맵고 너무나 차가워 시리기까지 한 김장독 안에서 보아주는 이 없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곰삭은 김치 맛을 만들어내는 누름돌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옛 어른들은 다 누름돌이거나 최소한 누름돌 하나씩 품고 사셨던 분들 같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누가 그렇게 하라고 안 해도 아주 자연스럽게 누름돌이 되었고, 또 상대를 자신의 누름돌로 인정도 해주었다. 내뻗치는 기운도 억누르고, 남의 드센 기운도 아름답게 받아 안는 희생과 사랑의 마음들이 서로 나눔으로 이해로 살아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 어려운 삶의 현장, 차마 견디어낼 수 없던 시대의 질곡에서도 아픔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으리라.

우리 집에선 그때 내가 정선에서 가져온 누름돌이 단단히 한 몫을 했다. 베란다의 항아리 안에서일 때도 있고, 오이지를 담글 때도 곧잘 사용했다. 요즘이야 보리쌀을 갈아 밥 짓는 일은 없어졌으니 확돌이 될 일은 없지만 어쩌다 제 몫의 일이 없어 바닥에 놓여 있거나 항아리 뚜껑에 올라와 있어도 어린 날을 추억케 하면서 내 삶의 누름돌을 생각게 한다.

두 동강이 나버린 누름돌을 보며 안타까워하시던 외할머니 모습도 생각난다. 단순히 못 쓰게 된 돌 하나가 아니었으리라. 웃자라는 욕심에도 성급한 마음에도, 서운함으로 파르르 떨리던 마음, 시집살이 고된 삶의 눈물도 누름돌을 씻으며 삭이던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 설운 마음 꾸욱 누르고 누르고 하셨던 그 마음이 담겨있었을 텐데 깨져버리자 마음이 찢기는 안타까움과 헤어짐의 슬픔을 느끼셨을 것이다. 내 나이도 이젠 들만큼 들었는데도 팔딱거리는 성미며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서는 당돌함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누름돌이 없어서일까. 이제라도 그런 내 못된 성질을 꾹 눌러 놓을 수 있도록 누름돌 하나 잘 닦아 가슴에 품어야겠다. 그게 나뿐이랴. 부부간에도 서로 누름돌이 되어주는 것이 좋겠고,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지간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도 훨씬 더 밝아지고 마음 편하게 되지 않을까. 김장을 처가에서 해와서인지, 김치 냉장고 때문인지 지난겨울 내내 베란다 바닥에 누름돌이 하릴없이 놓여있었다. 나도 그게 특별히 쓰일 데가 없어 그냥 본 체 만 체 했다. 그러나 내일은 마침 집에 있게 되니 아내 몰래 저 두 개의 돌을 깨끗이 씻어 뚜껑 덮인 항아리 위에라도 올려놓아야겠다. 그걸 보며 왠지 모르게 들떠있는 내 마음도 꾹 누르면서 말이다. 아니다. 그러기도 전에 정성껏 김장독에 올려놓던 할머니 모습이 먼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종소리

최원현

 

 

대앵, 대애애앵종소리는 신기하게도 십리가 넘을 우리 집까지도 들려왔다. 교회와 우리 집이 모두 조금 높은 곳에 위치했다 하더라도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동산도 두 개나 있건만 수요일 저녁만 되면 종소리는 어김없이 우리 집에까지 들려왔다. 할머니는 먼 어두운 밤길은 다녀올 수 없기에 종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를 하시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 3년간을 들었던 종소리다.

막내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 화요일 저녁이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업어 키워 주신 분이다.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와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이리 빨리 돌아가실 것 같진 않았었다.

하지만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뼈와 가죽만 남은 가느다란 몸매와 얼굴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앉아있는 것이라 할 정도로 똑같아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이가 들면 부모 모습이 된다더니 이모의 모습은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저렇게 똑같아질 수 있을까싶게 닮았다. 할머니도 치매로 고생 하다 가셨다. 할머니가 여든 일곱에 가셨는데 이모는 일흔 여덟에 가시니 9년이나 빨리 가신 셈이다.

새벽 첫차로 이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내려갔다. 성공한 세 아들의 문상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빈소에서 이모님과 마주했다. 10여 년 전에 찍었다는 소라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은 영정사진 속에서 이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원현이 왔냐? 오느라 고생했다.”사진 속에서 이모는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지난 번 병원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오셨소? 누구시요?”하던 이모였는데 오늘은 반갑게 알은 체를 하며 맞아주고 있다.

순간 어린 날 들었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허나 종소리가 들려올만한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모가 요새도 교회 잘 댕기냐?” 하시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세상 천지에 네 의지 될 만헌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교회로 너를 데꾸 갔단다.” 이모는 웃는 얼굴 채로 조근조근 할머니 애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곱게 차려입은 모습도 외할머니 모습이다. 참 정갈하신 분이었다. 십리 황토 길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장에 다녀오셔도 어찌 걸음을 하셨는지 버선에 흙 한 점 튀지 않았고 결코 버선코를 넘어선 흙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는 없다더니 연세 들어가며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렸다. 그 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이모가 또 그 길까지 따라 걸었다. 해서일까. 내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로 장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 괜찮다. 봤으니 되얐다. 잘 살어라.” 이모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왜 종소리였을까. 아마 이모도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멀리 퍼지는 종소리처럼 여운을 붙잡고 살았다 함일까. 그렇다고 누가 그 그리움의 끈을 흔들어 종을 쳐 줄 것인가. 그래도 종소리의 긴 여운은 내 남은 삶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잘 사냐?” “잘 살어라 할머니와 이모 두 분 모두의 한결같은 물음이고 순하디 순한 그분들만의 나에 대한 축복이고 소원이었다. 나는 두 분의 목소리 여운을 내 가슴에도 울리고 있는 종소리로 들으며 두 분 바램의 의미 담긴 잘 사는 일을 남은 내 삶 동안 꼭 지켜가야 한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신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할머니는 평생 나만을 바라보며 사셨다. 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어린 날에는 온갖 부러움 다 받으며 사셨지만 바람처럼 나다니시는 할아버지 만나 결혼 후에는 어렵게 어렵게만 사셨다. 거기다 딸만 셋을 두신 것도 큰 서러움이셨을 텐데 큰딸 내외에 둘째 셋째 사위를 다 먼저 보내셨으니 그 참담한 가슴을 무엇으로 다독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 큰 딸이 홀로 남긴 세 살짜리의 유일한 피붙이인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시울은 한시도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철이 드는 걸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노래처럼 말씀 하셨던 그 걱정 속 할머니의 성화로 일찍 결혼을 했던 나는 다행히 남매를 두게 되었고 딸과 아들은 내게 다섯이나 되는 손주를 안겨 주었다. 그 딸아이의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도 보고 가셨으니 당신의 모든 염려는 기우(杞憂)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 결혼식 날 돌아가셨다. 결혼식을 막 마쳤는데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의 전보를 받았다. 신혼여행 대신 상주가 되어 5일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길에 함께 했다. 멋쟁이셨던 할아버지, 그러나 당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암울한 시대에 가장 평범한 삶으로 살다 가신 분이셨다. 내게는 참으로 엄하셨다. 행동거지 하나, 사람의 도리 하나하나 어린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심어주셨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방향을 인도하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의 내게 대한 바램은 오직잘 살어라였다. 살어라의 의미를 아직까지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종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내 가슴 속을 울리고 있는 말씀이다.

이모는 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끈이었다. 그 끈도 이젠 끊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젠 그때의 교회당 종소리도 요즘엔 들을 수 없다. 그냥 시간 되면 교회도 알아서 가고 오라고 하지 않아도 갈 줄 안다. 그러나 오라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계없이 종소리가 울리면 그 종소리의 의미를 생각했었고 한 번쯤 마음도 가다듬었던 옛날의 그 종소리, 이모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까지도 내게 그 종소리를 상기시키셨는데 사실 이모님이 내게 들리던 마지막 종소리였던 것 같다. 그 종소리마저 끊긴 지금 이제는 그 종소리의 여운으로나 살아야 할까.

소라 색 한복 저고리를 입고 고운 미소로 나를 보던 이모님, 수요일 저녁이면 들려오던 종소리에 손 모으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할머니,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하라며 가르침 주시던 할아버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다 나를 바로 세워주던 종소리였다. 그런데 긴 여운으로 들려오던 그 종소리조차 이젠 자꾸만 놓치는 것 같다. 그런 나는 누구에게 얼마큼의 어떤 종소리가 되고 있을까.

 

숨어있는 향기

최원현

 

 

, 살았구나!

드디어 새 촉이 나왔구나,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2년쯤 된 것 같다. 직장 동료들 몇이서 전라도 어딘가로 난을 캐러 간다고 하더니 춘란 몇 촉을 내게 주었다.

나는 원래 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까다롭다고 하는 난 기르기에 선뜻 나서고 싶지도 않아 어느 집이건 한두 분()쯤은 있기 마련인 난 분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난이라고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아무리 야생란이라고는 해도 내가 평소에 보아 왔던 그런 난의 품위도 찾아볼 수 없었고,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잎은 과연 내가 이것을 살려낼 수 있을까 싶게 자신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에다 이 나이의 내 방에 난 분 하나 없다는 것도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난의 신비롭던 꽃 모습이며, 은은하게 풍겨나던 난향이 생각나 이 기회에 나도 한 번 시작해 볼까하는 호기도 생겼다.

꽃집에 들러 화분과 흙을 사고 그곳에서 일러준 대로 정성스레 심었다.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던 것이었는데 화분에 심어 놓으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게 해서 내 방에 난이 놓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를 놓고 보니 너무 외로워 보인다. 정을 붙이고 뿌리를 내릴 엄두조차 못낼 것만 같다. 해서 평소 난을 좋아하시는 숙모님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더니 난을 나눠주시겠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친걸음에 숙모님 댁에서 난 분 하나를 얻어다 함께 놔주었다.

한결 좋아 보인다. 갑자기 방안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고, 나도 제법 운치깨나 아는 선비 같아 보인다.

나는 그 때부터 난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

헌데 숙모님 댁에서 가져온 난은 이내 새 촉이 올라오고 잘 자라는데 야생 춘란은 늘 그대로다. 혹시 뭔가 잘못 되었나 싶어 뿌리를 확인해 보면 뿌리가 매말라 있기도 했고, 어떤 땐 뿌리가 거의 다 썩어 있기도 해서 이게 어떻게 살아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러면 그럴수록 그 난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아닌가. 아내는 자기보다 난을 더 생각한다며 자기는 난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투정을 해댔지만 나는 그 난이 죽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내가 마음을 주면 줄수록 난은 더 몸살을 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얼핏 보면 이미 죽은 것처럼 보여 식구들에게도 당부를 해 놓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밖에 내다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까지 겹쳐 나도 함께 앓기 시작했다.

그런 난이 죽지 않고 끈질기게 나와 함께 목숨 지키기를 하더니 오늘 이렇게 산을 들어올리는 감격으로 새 촉을 틔워 올린 것이다.

그 동안 몇 개의 난 분이 늘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춘란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난을 파는 곳에서 우리 집의 난 이야기를 했더니 난의 생김새를 묻고는 그런 난은 일 이 천원이면 한 줌씩 준다면서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애지중지 마음을 써 주었던 난이 그토록 값싸고 흔한 것이며,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정성을 쏟았구나 하는 후회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잘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만일에 내가 처음부터 난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면 그런 난을 준다고 받기나 했겠으며, 설혹 받았다고 해도 그토록 정성을 쏟을 수 있었겠는가. 결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함께 앓으며 목숨을 지켜줄 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세상이기에 좋아 보이면 우선 얼마짜리냐고 묻는 요즘 사회이지만 생명엔 귀천이 있을 수 없는 것, 비록 한 포기 난일지라도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섭리와 은총이 내려진 생물체요, 어쩌면 인간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엔 더 아름다운 피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그 때 앞으로 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것이 좋고 귀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나도 필시 그 좋은 것, 일반적으로 누구나가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들 쪽으로만 눈을 돌리고 그렇지 않은 것에선 자연스럽게 발을 돌릴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릴 것이다.

물론 난은 꽃을 보기 위함이니 나중에 내가 그처럼 정성을 쏟았던 난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이 없어서 몹시 속이 상할런 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어쩌면 꽃조차 피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해가 넘는 동안의 내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인내하며 참으로 힘겹게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드디어는 하늘 문을 여는 감격으로 장하게 촉을 틔워 살아 있음의 의미를 내게 보여준 난에게서 고마움과 안쓰러움과 감동을 함께 안는다. 거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자 난의 감격, 환호, 기쁨, 보람이 정말 하늘에 닿는 충만함으로 내게 향해진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집안 어른 한 분의 별명이 '섰다'였다. 별명이 하도 이상하여 왜 '섰다'라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로 얼굴들을 쳐다보며 기다렸다는 듯 배를 움켜쥐곤 웃어댄다.

얘기인 즉, 그 할아버지가 일곱 살 때까지 일어서지를 못했단다. 그래서 영영 서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방안에서 '섰다'하는 소리가 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바라보니 일곱 살짜리가 열린 방문 고리를 붙잡고 일어서서 다리를 덜덜 떨며 저 혼자서 일어섰다고 환성을 지르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다리에 힘이 오르기 시작하여 곧 걷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별명이 그 날 이후로 '섰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옛날에 들었던 그 '섰다 할아버지'의 감격이 어쩌면 저 춘란의 감격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 저 난도 섰다 할아버지처럼 다른 난에 뒤지지 않고 쑥쑥 자라 오를 것 같고, 뿌리도 화분에 가득하도록 튼실하게 차오를 것 같다.

지금 당장 성과가 없다고,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없다고 쉽게 자포자기 해 버리고, 또 쉽게 저버리고 마는 이 시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신선하고 맑게 들려오는 한 소리인가.

난 분을 여리게 볕이 들 수 있는 쪽으로 옮겨주며 '어느 난도 가지지 못할 너만의 꽃을 피워다오' 가만히 속삭여 본다.

꽃도 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제껏 맡아보지 못했던 솔향기, 풀내음들이 몰려와 춘란을 감싸고, 방안엔 때 아니게 피지 않은 난에서 나는 난향이 가득 차는 것 같다.

향기는 꼭 꽃에서만 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람에게서도 품향이 나타나듯 어쩌면 가장 향기로운 것은 꽃을 속으로 머금고 있을 때의 숭고한 정성스러움에서 나는 것은 아닐까. (1994)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최원현

 

 

하늘과 바다가 반가운 포옹을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그 품안에서 빠져 나온 푸른 숲, 그리고 하얀 옷에 오렌지색 모자를 쓴 건물들이 쪽빛 바다에 내리다 반사되는 햇살을 받아 여유롭게 빛나고 있었다. 빛과 색이 수줍은 듯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였다.

내게 통영은 이상스러우리 만큼 그리움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통제영(統制營)이라는 크고 엄숙한 느낌보다도 바다와 섬 그리고 섬 만한 산과 항구가 마치 모태 속 여덟 달 아기의 방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대개의 어항이 주는 음습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렴 고결한 선비 같은 품위를 자아내는 도시, 그래서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미항으로 불려왔나 보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남망산엘 올라보고 싶었다. 중턱에 서있다는 청마의 시비도 보고 싶고, 저 한산대첩의 현장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있을 충무공 상 앞에서 나도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삶에도 어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았다.

역사는 말이 없다지만 아니었다. 통영에 오면 무수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수많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이 피안의 모랫벌처럼 밀려들게도 하고,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보면 이 땅에서 살다간 이들의 애환이 몽실몽실 솜구름처럼 피어오르기도 했다.

 

미명의 아침이었다. 바다의 일출을 보고자 했는데 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아니 섬 뒤로 부끄러운 듯 사알짝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이내 둥실 몸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누리의 바다가 온통 황금빛이 되어 버린다. 통영의 일출은 망망한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장엄하지 않으면서도 긴 여운의 감동을 오래도록 가슴에 남게 하는 그런 해 떠오름이었다.

남망산(南望山)에 올랐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바다와 섬과 도시에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꼭 어울리는 키와 덩치로 자리한 산, 얼핏 고래의 등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산은 살아있었다. 수필 작가인 이곳 K 시장의 사랑과 꿈과 열정이 도시의 곳곳에서 살아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숨결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이곳 남망산인 것 같다. 시민회관이 그렇고, 작은 오솔길 하나에서도 정성스런 마음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남망산 조각공원은 국내작가 5명에 외국작가 1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랑블루(Grand Blue)라는 통영의 자연환경에 맞는 주제로 자신의 작품이 설치될 수 있도록 직접 설치될 장소와 주변환경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는 작품의 내용과 크기와 재료를 결정하는 심포지엄 형식을 통해 이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꿈꾸는 듯한 쪽빛 바다와 군데군데 떠있는 섬들의 어울림은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흥겨움, 그리고 명상적 태도의 통일된 공감대로 승화시켜 내고자 함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브론즈와 스텐레스 스틸을 소재로 한 <허공의 중심>이란 제목의 우리 나라 작가 작품이었다. 나신(裸身)의 남성상을 다섯 단계로 설치하였는데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등 이원론적 사고(思考)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해 내고자 하는 인간의 고귀한 염원을 나타낸 인체조각이었다. 강한 이미지의 나신 남성상(男性像)에서는 태초의 에덴과 같은 원초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생명력은 생겨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았으며, 특히 삶에서 죽음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인간이 신 앞에서 생명에 대해선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인정케 하고 있었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랑스 작가의 나무와 고무와 모터를 소재로 한 <잃어버린 조화>라는 작품이었다. 움직인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단순한 반복 동작은 주제도 없는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움직임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있었다. 곧 인간의 삶은 이런 무의미한 반복 동작일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한 것으로 모터의 동력에 의해 연결된 여러 토막의 통나무가 움직임으로 인간 행위와 삶의 의미를 곰 새겨보게 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분재, 시간과 공간을 체험케 하는 입방체의 공간, 인체라는 소우주를 통해 초자연적인 우주의 원리와 생명력 및 영원의 활력을 표상하고 있는 <출산>, (-)과 양(+)의 균형 속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을 통해 명상할 수 있게 하는 <망산> 등은 삶과 죽음이란 대 주제를 자연적 지리적 환경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게 함으로서 크게는 남망산 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 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의 초점은 역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자리였다. 가만히 보면 통영은 우리 나라 모형의 축소판이다. 수군통제사가 수군을 통제 훈련하던 것처럼 삼면의 바다가 통영으로 모이고 통영에서 다시 나래를 편 물결은 태평양을 향해 더 힘차게 퍼져나가듯 통영은 세계로 세계로 한국을 빛내갈 힘의 발원지였다.

그래서일까. 통영이 낳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 박경리는 그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시작에서 자신의 고향 통영을 이렇게 그려놓았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청마(靑馬)의 시비 앞에 섰다. 그의 시 깃발이 바다를 등에 업고 새겨져 있다. 통영에는 청마가 살면서 거닐었던 거리와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보내던 우체국이며, 호심 커피숍 등 추억이 깃든 곳들이 많다. 물론 지금엔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지만 그 자리엔 가지 못하더라도 통영에 오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결,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시비 앞에 서니 더욱 그가 그립다. 새로 세운 청마문학관에 가면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큼이라도 채울 수 있을까.

청마는 그랬다.

"여기엘 오면 나도 어부가 되고싶다/그리하여 저 대해(大海)의 심산유곡으로 헤치고 나아가/억센 그들과 맞싸우며 그들을 모조리 잡아 비끌어오고 싶다"(청마의 시 어시장에서)...

사람들이 통영에 오면 그리움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 같다.

언젠가 젖먹이 아이와 한참을 놀아주고 나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얼마동안을 간 곳이었는데 내 몸에서 아기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고 놀았던 사이에 아기냄새가 몸에 배었나보다.

통영은 예향이다. 그것은 산자수려함뿐 아니라 그곳을 빛내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을 통해 맑고 깨끗한 성정에 젖었고 또 그렇게 청명한 사람이 되어 그의 주위까지도 청정하게 만들었다. 겨우내 얼어 있다 봄이 가까워지면 얼음장 밑으로 녹아 흐르는 산골 물 같은 맑고 시원함이 너른 바다에서도 느껴지는 곳, 비록 통영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잠시 안아주었던 아기에게서 배어나던 아기 냄새처럼. 내게서도 분명 통영냄새가 솔솔 풍겨 날 것 같다.

함께 있어도 그리운 곳, 하물며 떠나가면 오죽 더하랴. 고향도 아니면서 이만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건 아름다운 풍정만은 아닐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다음 번에 오게 될 때는 나도 오렌지색 모자를 쓰고 올까보다. 그럼 더욱 정감이 넘치지 않을까. 마지막 둘러보기인 해저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망산 위에 머물던 낮 해가 통영을 둘러본 느낌이 어떠냐는 듯 환한 웃음 가득 우리를 내려다 보고있다.

애향작품집 통영의 향기(2001.7. 교음사)

 

저녁 노을

최원현

 

 

도시 생활에 젖어버린 내게 저녁 노을은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분명 홍시 빛이었다.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있던 그리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신다.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려운데 누군가 갖다드린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두셨던 것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헌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은 것이 안타까워하시다가 보여라도 주겠다며 다음 해 내가 내려갔을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묻어 있고, 역겨운 신 냄새까지 났다. 그러나 그런 냄새까지도 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니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로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 마루에 걸려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댔지만 목소리는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그 날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인 순리를 이제 내가 받아들일 차례가 된 것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수필과 비평2002.4.5월호

 

 

잡초 뽑기

최원현

 

 

요즘 들어 나는 때 아닌 잡초 뽑기에 시달리고 있다. 하룻밤 자고나면 여기저기에 자리잡아버린 잡초들이다. 이놈들은 싹 터서 자라는 기간조차 없이 어딘 가로부터 불쑥 날아 들어와 터를 잡아버린 놈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운영하고 있는 문학사이트에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광고물들인데 어찌나 교묘한 방법을 쓰는지 막아낼 길이 없다. 내 역량으로는 오로지 하나씩 열어서 제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소홀하면 제목만으로도 낯 뜨거운 음란 광고물들로 게시판이 온통 도배가 되어버린다. 주인 모르게 침입하여 나 몰라라 자리를 잡아버리는 아주 고약한 놈들로 도저히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분들께 큰 실례를 하게 될 일이다.

나는 제대로 농사를 지어보지 못해서인지 잡초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땅에게는 잡초가 있을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잡초라 하는 것이지 그게 만일 어느 땐가 요긴하게 소용되면 특별재배라도 해야 될 테고 잡초란 이름 대신 분명 어울리는 좋은 이름을 붙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잡초라 부르는 것들만으로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든 이도 보았다. 그러나 이침이고 저녁이고 틈만 나면 들어가 없애야하는 내 문학의 방 온갖 광고물들은 정말 미운 잡초라 조금의 동정도 주고 싶지 않다.

우리네 논에 흔하던 물피. 물달개비. 쇠털골. 밭뚝외풀 .방동사니. 바람하늘지기. 마디꽃, 그런가 하면 밭에 성하던 바랭이. 뚝새풀. 돌피. 강아지풀. 쇠비름. 반하. 갈퀴덩굴. 명아주 등은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초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쓸모없다 해서 무심히 넘겨서 그렇지 조금만 정을 담고 눈여겨보면 그 아름다움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언젠가 미시령 휴게소 뒷산 능선을 오른 적이 있다. 그곳에 피어있던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을 누가 잡초라 하랴. 그러나 그들이 우리들 밭에 있다면 그걸 아름답다며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잡초가 산이나 들에 있다면 아무도 그들을 잡초라 하며 나무라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 분위기에 따라 칭찬도 받고 시인이 라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시로 노래하기도 하리라. 그런데 사람이 자기 영역에 특별히 무언가를 기르려 터 잡아놓은 곳에서 불청객이 피어오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건 풀꽃이건 제자리서 제 할일을 할 때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 아니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곧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잡초란 이름은 참으로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표현이요 그 한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말인 것 같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면 바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제거 대상이 된다. 지나침과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듯 자기 자리가 아니면 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잡초로부터 배운다.

 

전에 꽃씨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화분에 직접 심었는데 싹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주 작은 싹이 하나 올라왔다. 한데 조금 자라고 보니 그건 잡초였다. 꽃씨는 안 나고 섞여있던 잡초 씨만 발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뽑아버리지 않고 두었더니 거기서도 꽃이 피었다. 나는 잡초로가 아니라 화초로 자라게 해 주었다. 이름도 모르지만 하얀 아주 작은 꽃을 오랫동안 피워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잡초라면 끈질긴 생명력부터 연상 된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일을 별로 해 보질 못했다. 중학교를 마치자 바로 서울로 올라와버린 때문도 있겠지만 약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억척스럽지도 못했고, 또 특별히 그런 일을 해야 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고작 아이들과 함께 땔나무를 하러 가거나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퇴비감을 준비하는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시원스레 해내지 못해 그 또한 늘 남의 도움을 받기 일수였다.

그런데 팔자에 없는 잡초 뽑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사이트에 큰 문제가 생겨 거금을 들여 게시판 13개를 몽땅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이러니 아무래도 다시 기술자의 신세를 져야 할 모양이다. 어릴 때도 땔나무나 퇴비 숙제조차 남의 도움을 받아 하곤 했는데 지금에도 그래야 할 모양이다.

문득 게으른 농사꾼네 밭에 잡초가 무성하다는 말이 생각나 또 한번 나를 부끄럽게 한다. 결국 내가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속이 상한다고 해서 하루만 걸러도 다음 날에 몇 배로 더 힘이 드는 작업을 해야만 할 테니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입장을 바꿔서도 생각을 해 본다. 저들은 이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저들의 생존 방법일까? 그렇다면 내가 너무 심한 것일까? 하지만 둘이 함께 살 수는 없잖은가. 그게 운명 아닌가. 그런데도 삶의 현장은 여전히 잡초와 곡식의 함께 삶터이다. 곡식에겐 잘 자라게 조건을 만들어주고 잡초는 제거를 기본으로 한다. 그래도 모두 없애지는 못하니 결국은 공존하는 셈이 된다.

다시 컴퓨터를 켠다. 잡초 뽑기를 해야 한다. 그나마 손을 안 대고 놔두고 있으면 필시 저들은 대단히 힘 있는 존재들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저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저희들 일을 하고 말리라. 그렇다면 그것이 지는 것이든 그냥 포용하는 것이든 차라리 저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까. 세상이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공존의 장임을 어쩌랴.

계간수필》2004.4. 

 

 

 

최원현 nulsaem@hanmail.net

《한국수필》에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문학에게 길을 묻다》등 13권이 있으며,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및 여러 교재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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