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물
최 원 현
선물이란 말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남에게 주어버리는 것임에도 한없이 기쁘고, 내가 받으면 더없이 행복해 지는 것이 선물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물을 해 보지 않은 사람 없을 테고, 선물 한 번 받아보지 않은 사람 또한 없으리라.
주는 사람 우선이 아니라 받을 사람 우선으로 정해지는 것이 선물이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정성으로 마련하여 건네는 것이 선물이다.
이 나이 이르도록 나는 몇 번의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은 바 있다. 값이 비싼 선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보나 내가 누구에게 선물을 받을만한 존재도 못 되는데 그런 내게 가없는 사랑을 선물로 보내 주는 마음과 손길들이 있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던 때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선물이 있다.
그러니까 수 해 전 가을이었다.
오랜 서울살이를 벗어나 충북 음성에서 과수원을 시작하신 수필가 ㅂ선생이 사과 한 상자를 보내오셨다. 아니 내외분이 친히 오토바이에 싣고 내 사무실까지 가져 오셨다.
! 사과 한 상자, 선물로 흔히 오갈 수도 있는 물건이다. 허나 내게 보내진 사과 선물은 그런 흔히 있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니었다. 사실 그냥 인편에 보내 주시는 것으로만 해도 고맙고 송구스러울 일이건만 일부러 친히 가져오신 것인지라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두 내외분 말씀이 더욱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버린다.
몇 해를 고생하여 금년에 첫 수확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수확은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외분이 몇 몇 분을 선정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의견일치를 보게 되어 선물을 하기로 하셨단다. 그 중에 나를 생각 하셨다는 것이다.
내외분이 사과밭을 두루 다니며 가장 크고 탐스럽게 잘 익은 사과들을 골라 따서 그득 한 상자를 만들었고, 그것을 손수 음성에서 서울까지 가져 오셨다는 것이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수줍듯 탐스런 자태를 자랑하며 보란 듯 결실의 여왕으로 익어간 사과, 그 사과들 중 유독 튼실해 보이고 잘 생긴 것으로만 따서 한 개, 두 개 망태기에 담는 두 분의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태초 에덴동산이 생각되면서 두 분 사이에 넘쳐나는 두 배의 기쁨, 두 배의! 보람, 두 배의 희망이 느껴진다. 그것은 나누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최상의 기쁨으로 그 모습은 천사와도 같아 보였다.
나는 그 사과를 받아놓고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과나무에 손을 뻗쳐 사과를 따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그 분들의 사랑은 이해되면서도 그런 수고가 마음에 걸려 좀처럼 사과를 맛있게 먹을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식구 수에 맞춰 사과 네 개를 씻고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 분들과 내가 받은 사과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사과를 깎아 나눠 먹었다.
사과 맛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두 분의 일년간, 아니 수 해 동안 애씀의 정성으로 알이 굵어지고 맛이 든 사과요, 거기에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게 보내주신 사랑은 또 얼마나 큰가. 내가 사과 맛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사과 맛보다 그 분들 사랑의 맛이 더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나는 나머지 사과들을 두 세 개씩 나의 소중한 이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었다. 그 분들의 사랑을 내가 받은 만큼 나도 나누고 싶었음이다. 아니 감히 나 혼자만 먹을 수 있는 배짱이 없었던 것이 더 큰 이! 유일 것 같다.
그러니까 수 해 전이었다. 내가 병원에 근무하는 덕택에 그 분들에게 약간의 편의를 제공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실 큰 도움이랄 수도 없는, 병원에 오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런 보통의 편의 제공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게 되면 평소의 침착함은 간 곳 없고 크게 당황하기 마련이듯 나의 작은 도움이 그 분들에겐 그토록 고마웠었던가 보다.
ㅂ선생은 일찍부터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 문인이시고,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든 그 정도는 해드렸을 일인데 너무나 황망한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나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내 작은 도움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처럼 반갑고 큰 고마움으로 기억 되셨던 것 같다. 그 하고 많은 사람들 중 내가 맨 먼저 생각났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삶이 고달프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그 분이 보내주셨던 사과 선물을 생각하곤 한다. 당신들이 몇 년을 고생하여 이룩한 과수원에서 첫 열매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지난날의 고마웠던 일을 갚고 싶으셨던 마음, 연세도 지긋하신 ? ?분이 사과나무 이파리 사이로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있는, 튼실해 보이는 잘 생긴 사과 하나를 발견해 내고 맞이하던 감격과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의 열매에 손을 뻗어 사과를 잡았을 때 손안 가득 넘쳐 났을 충만한 과육의 감촉, 그런가하면 손에 따 든 사과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과 햇살을 받아 빛나는 빛 부신 사과를 생각해 보시라. 어찌 삶이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인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내 사랑하는 마음, 내 고마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ㅂ선생은 수필 작품을 통해서도 많은 감동을 주곤 하시더니 이처럼 선물로도 수필보다 더한 감동을 주고 있지 않은가. 글이 곧 사람이라고 했는데 ㅂ선생이야말로 그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삶과 글이 아름다운 감동으로 넘쳐나는 사람, 나는 이 날껏 살아오면서 내게 귀한 사랑의 베품을 주셨던 그 많은 분들에게 얼마큼이나 고마움을 표하며 살아왔을까.
과연 나도 몇 년을 고생하여 얻어낸 소중한 결실을 맨 먼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진심 어린 감사를 해 본 적이 있을까. 내가 급할 때만 아쉬움이고, 그 때만 지? じ?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삶이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인정해 버리고서 내가 먼저 그런 삶의 사람으로 살아온 것은 아녔던가.
오늘은 편지라도 써야겠다. 날씨가 더운데, 햇볕이 뜨거운데, 오히려 ㅂ선생은 사과나무 아래서 이처럼 뜨거운 햇볕을 주시어 사과가 잘 익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번 가을에도 탐스런 사과들을 따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아름다운 선물을 하게 해 주십사 기도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나눌 때 마음도 세상도 맑아지고 밝아진다고 했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뜨거운 태양 빛을 하늘의 은총인 양 함뿍 받으면서 사과나무 사이에 서있는 ㅂ선생 내외분의 모습이 밀레의 '만종'을 보는 것 마냥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번 가을엔 나도 그렇게 가슴 가득 감동과 기쁨으로 남게 할 그런 아름다운 선물을 하나쯤은 꼭 하고싶다.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던 말이 사과 맛보다도 더 싱그럽게 입맛으로 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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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을 적시는 수필 한 편 (18)을 띄우며.
요즘 시대를 다들 삭막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삭막함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나로부터 오는 것이란 생각이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겐 내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고,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오히려 내 것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결국 내가 관심과 사랑으로 마음을 열 때 대상이 좋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서로 나누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선물이란 받아서 즐겁고 주어서 행복한 것이다. 거기다 상대의 마음이 짙게 느껴지면 더더욱 감동하는 것이 선물이다. 내가 받은 사과 한 상자의 선물이 오래도록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것도 요즘처럼 삭막하다고 하는 때에도 한 여름 한 줄금 시원한 비처럼 상쾌함을 가져다주곤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과 마음을 열지 못하고, 진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겪는 실망과 좌절,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아닐까. 몇 년을 수고하여 이룬 과수원에서 그 첫 수확을 하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들로만 골라 따서 선물을 했? ? 사과를 따는 모습, 이것을 누구에게 주겠다고 포장을 하며 다시 그와의 정을 여는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지지 않는가. 사람의 마음보다 아름다운 것이 세상이 또 있으랴.
< 어떤 선물>은 선물을 통해 사랑이 교감되는 모습을 그려본 수필이다.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다. 왠지 가엾다는 생각이 들만큼 막바지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이럴 때 우리 에세이코리아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이 여름을 이기고 찬란한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았으면 싶다. 그러나 가을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숙연한 계절임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답고 좋은 날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2001. 8. 18. 토.
에세이코리아 최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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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작가 최원현(崔元賢)
수필문학가 최원현은 1951년생으로 《한국수필》천료(薦了)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강남문협 수필분과회장 및 《한국수필》편집위원. 《건강과 생명》편집위원이며, 제5회 [허균문학상]. 제1회 [서울문예상]을 수상했! 다.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와 시집《아름다울 수》가 있으며, 정감 넘치는 칼럼 연재, 작가탐방, 평론 등 문학 전반에 걸친 저력있는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수필문학 전문 사이트 [에세이코리아]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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