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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나무/장석주

가끔 뒤란에 대추나무가 있던 옛집을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칸나꽃보다 작았다

대추나무는 병든 장기수(長期囚)처럼 영양실조의 기운을 보였다

연초록 잎은 이내 노랗게 변하고 열매는 볼품없었다

어느 해 이른 봄 어머니가 다섯 번째 아이를 해산한 뒤

외할머니는 붉은 태반을 대추나무 아래에 묻었다

이듬해는 붉게 잘 읽은 대추들이 가지가 휠 듯 주렁주렁 달렸다

 

 

버드나무 갱년기/장석주

 

 

금요일 저녁엔 영화 관람을 하고
일요일 아침엔 흰 셔츠를 입고 버드나무 성당엘 갑니다.
강의 서쪽에 살 땐 자꾸 눈물이 차올라
일없이 강가에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지요.
내 정수리께 새치가 생기고
당신의 쇄골은 아름답고 숭고했습니다.
약간의 몽상, 약간의 키스, 약간의 소금이
우리 자산이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당신은 슬픔의 슬하에 있는 아이들에게
기린과 중국 음식, 여수 밤바다가
사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냄비에서 꽁치와 바다가 함께 끓며 넘치던 계절,
바람을 방목하는 보리밭은 파랗고
삶이 삶을 살 수 있도록 놓아두는 동안
우리의 기쁨은 자주 증발했습니다.
그 많던 건달과 삼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칠흑 하늘에 내건 등불들도 다 꺼지고
버드나무 몇 그루를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숨은 꽃/장석주-

 

1
너……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랑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몽해항로 6-탁란/장석주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장석주 시인 약력>>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붉디붉은 호랑이』,『절벽』등.

*산문집 『 이 사람을 보라 』,『추억의 속도』,『강철로 된 책들』,『느림과 비움』,『책은 밥이다』,

『새벽예찬』,『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취서만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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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각] 외로움, 그 흔한 질병

장석주 시인, 인문학 저술가 opinion@etoday.co.kr시인, 인문학 저술가

 

세밑에 소식이 끊긴 한 친구가 연락이 닿아 만났다. 상업학교를 나와 은행지점장을 끝으로 은퇴한 친구다. 소년시절 상업학교에서 만난 우리는 귀밑머리가 센 모습으로 다시 만났으니 감회가 없을 수가 없다. 우리는 두런두런 지난 얘기를 나누었다. 일찍이 상처하고 인연을 만나 새 가정을 꾸린 것, 세 아들은 바르게 잘 커서 첫째는 내과의사로, 둘째는 외국계 금융회사 부장으로, 셋째는 사립대학 공대 교수로 제 밥벌이를 한다는 것, 명민한 두뇌와 침착한 성격대로 노후 대비도 잘해서 별 걱정이 없다는 것…. 돈 워리 비 해피. 그의 인생 위로 시대는 급류처럼 흘러갔고, 그 거친 흔적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겉보기에 그의 인생살이는 평탄해 보였다. 그는 주말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산행을 하거나 당구를 친다고 말했다. 대인관계도 원만해 보였다. 인생 후반기의 지복을 자랑하던 그가 불쑥 외롭다고 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튀어나온 외롭다는 말이 생경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나 외로워, 정말 외로워. 제발, 외로움에서 나를 꺼내줘.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로움의 고통을 호소하는 그의 말에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친구와 헤어져서 돌아오는 내내 ‘외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외로움이 노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젊건 늙건 간에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 속에서 살아간다. 외로움이 낳는 우울, 고립감,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진절머리를 치는 사람들. 외로움이 죽음을 낳는 질병은 아니지만 외로움은 사람이 겪는 다양한 스트레스 요인 중 하나다. 장기간 외로움에 노출되면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의 분출로 생리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다고, 의사들은 경고한다. 외로움은 가난이나 학대만큼이나 인생을 좀 먹고 피폐하게 만든다. 특히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외로움은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데, 그것은 외로움이 노화를 재촉하고, 면역 체계를 약화시키며, 인지 능력에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인생을 망가뜨리는 요인인 건 알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에서 벗어나는지를 모른다.

 

파리 지하철 공사가 해마다 공모하는 시 콩쿠르에서 1등으로 뽑힌 ‘사막’이라는 짧은 시는 외로움에 대해 쓴 것이다. “그 사막에서 그는/너무나도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오르탕스 블루) 사막에서의 외로움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누군가는 텅 빈 집이 견딜 수가 없어 잠들기 전에 늘 텔레비전을 틀어놓는다고 했다. 오늘날 외로움은 도시에 살건 오지에 살건 누구나 겪는 보편적 현상이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그로칼랭’이라는 소설에는 외로움에 사무친 주인공이 비단구렁이와 동거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타인과의 친밀한 교류와 사랑을 열망하지만 그것에 실패하는 주인공은 비단구렁이에게 제 애정을 쏟아 붓는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고독에 대한 우화이고 사회의 비인간화에 대한 경고의 외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칼랭’을 읽으면서 나는 외로움이란 얼마나 기이하고 처연한 것인가를 느꼈다. 아울러 이것이 문명이 만들어낸 잉여와 소외의 질병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서 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올리비아 랭이 뉴욕이라는 도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쓴 ‘외로운 도시’를 읽었다. 누구나 흔하게 겪는 경험인 외로움은 현대사회에서 사소한 불행의 한 형태이고, 널리 퍼져 있는 만성 질병 중 하나다. 사람 하나하나는 단독자이고, 고독은 실존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다. 랭은 연인과 뉴욕에서 살다가 실연을 당하고 혼자 살며 ‘외로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마주했다.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쓰는 랭은 말한다. “고독 자체가 하나의 도시라는 것을.” 도시가 고독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고독이 곧 도시다. 뉴욕이나 서울, 혹은 베이징이나 도쿄 같은 수백, 혹은 수천 만 명이 밀집해 사는 편마암과 콘크리트와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사람들은 고독이라는 내적 고립에 빠진다. ‘고독사’가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곳이 도시다. 서울 상공에 휘황한 폭죽이 연신 터지며 서울올림픽 폐막식이 열리던 시각에 한 시인은 서울 변두리 한 주택 양변기 위에 앉은 채 혼자 고요하게 숨을 거두었다. 도시는 외로움으로 충만한 또 다른 사막이다. 도시는 인파로 북적이지만 사람들이 교류 없이 고립된 채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독이 인생에서 자양분을 빨아먹으면서 뚱뚱해지는 동안 우리는 얇아지고 야위어간다. 삶의 안쪽에 콜타르처럼 들러붙은 외로움은 인생에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빠트리며 자주 삶을 공허하고 얇은 것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해리 스택 설리반은 “인간적 친밀함의 필요가 부적절하게 방사되는 것과 연결되는, 지독하게 불쾌하고 강력한 체험”이 고독이라고 정의한다. 랭은 도시 풍경, 즉 호텔, 카페, 레스토랑, 주유소, 교외 주택, 기차 안에 고독한 사람이 등장하는 ‘도시의 아침’이나 ‘밤의 창문들’ 같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좋아한다. 호퍼 작품의 원천이 고독이라는 주장은 타당한가? 호퍼는 소통의 단절과 고립, 소외 의식, 즉 도시에서의 고독을 핵심 체험으로 탐색한 화가다.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시 거주민들은 아무 소통도 하지 않은 채 따로 떨어져 있다. 호퍼의 그림은 미국적 고독을 재현하고 복제한다. 휘트니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카터 포스터는 ‘호퍼의 드로잉’에서 호퍼의 말을 전해 준다. “타인들과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지만 동작, 구조, 창문, 벽, 빛, 어둠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데서 기인하는, 뉴욕에서는 흔한 특정한 공간과 공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예술은 우리를 고독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 호퍼에서 앤디 워홀까지 도시 고독의 기록자인 예술가의 내면을 탐색한 랭이 독자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그런 것이다. 예술은 대도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 폭력과 살인, 더 나아가 기후 재난, 바이러스가 퍼뜨리는 전염병의 역습 따위에서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예술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거나 병든 이를 치유할 수도 없지만 예술은 우리들 사이에서 증발해 버린 친밀감을 되살려내고,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중재하는 기묘한 능력을 발휘한다. 예술가만큼 외로움에 민감한 족속이 있을까? 평범한 사람들은 고독을 한사코 피하려고 들지만 예술가들은 외로움은 자기 예술의 질료로 삼고, 고독과 투쟁하며 그 속에서 고독의 역량을 키운다. 그들은 한없이 나약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강한 전사들이다.

나는 외롭게 살다 죽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한다. 비천하고 야만적인 세계에서 고독하게 살다 죽은 이들은 우리의 외로움을 알아주고, 외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다. 김소월, 윤동주, 김관식, 천상병, 박정만, 기형도 같은 비운의 시인들이나 가객 배호, 김광석, 조각가 권진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천재 작곡가 에릭 사티, 시인 아틸라 요제프의 이름을 혼자 불러본다. 나는 “품에 안겨 입에 젖을 문 사람/젊은 여자의 단단한 가슴을 쥐고 있는 사람/빈 접시를 내던지는 사람/가난한 사람들이 이기도록 돕는 사람/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는 사람”을 노래하는 헝가리 시인 요제프의 시집 ‘일곱 번째 사람’을 사랑한다. 다시 친구를 만나면,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32세로 달리는 화물열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친 요제프의 시집을 선물로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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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최민자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휘황한 네온사인도, 대형마트도, 요란한 차량의 행렬도 없다. ‘열려라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스르륵 열리는 자동문이나, 제복 입은 경비원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 내리는 고층빌딩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길목 어름에 구멍가게 하나, 모퉁이 뒤에 허름한 맛집 하나 은밀하게 숨겨두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를 일상의 맥박삼아 두근거리는, 웅숭깊고 되바라지지 않은 샛길이어서 좋다.

 

  골목은 자주 부끄럼을 탄다. 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섬세한 그물을 드리우는 잎맥과 같이, 골목도 보통 한길에서부터 곁가지를 치고 얼기설기 갈라져 들어간다. 하여 골목의 어귀는 대충 크고 작은 세 갈래 길을 이루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골목들은 입구 쪽을 어수룩이 숨겨두기를 좋아한다. 한두 번 다녀간 골목을 섣불리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것도 그들이 일쑤 낯가림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싶은데 없고 저기다 싶은 데 아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시멘트벽의 완강함, 4차원의 입구처럼 사라져버린 미로를 몇 바퀴씩 서성거리고 나서야 목적지를 발견할 때도 있다. 헤진 속옷과 빛바랜 수건과 색색의 양말짝들이 담장 너머로 공중그네를 타고, 밤사이 새끼를 친 무수한 말들이 담벼락 사이로 수군수군 넘나드는, 응달진 사람들의 남루한 삶터가 부끄러워 골목은 자꾸만 꼬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용케 골목 입구로 접어들었다 해도 안심할 것이 못된다. 이 좁다랗고 다소 내성적인 공간은 낯선 사람들에게 속내를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진행에 따라 약간의 전망을 예측하게 할 뿐, 모퉁이 뒤에서 기다리는 정경을 속속들이 암시하지도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방금 지나온 풍경도 가뭇없이 여미어버리고 밋밋한 회벽만 내보이며 딴전을 피우기도 한다. 과거란 빨리 잊을수록 좋은 거라고 충고라도 하려는 듯이. 골목의 이런 은폐성이 난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도 없지는 않다. 골목이 없었다면 늦은 밤 애인을 바래다주던 청년이 느닷없이 돌아서 키스를 훔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코밑 검실검실한 삐딱모자 소년이 도둑담배의 유혹에 걸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미진 은신처에 웅크리고 있던 깍두기형님들의 야행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던 곳도 음습한 뒷골목 아니던가. 골목은 윤리를 따지지 않는다.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 인정에 약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골목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골목은 약한 것을 강하게, 강한 것을 약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길에서 피켓을 들고 아우성치던 사람도 골목에 들어오면 갑자기 순해져서 허리 굽은 노인에게 곧잘 허리를 굽히곤 한다. 큰길에서 씽씽 내달리는 고급차일수록 골목에 들어서면 맥을 못 추고 설설 기는데, 철가방 오토바이는 왕파리소리를 내며 홈그라운드를 가볍게 휘젓는다. 야채 트럭 아저씨가 ‘고랭지 배추 왔어요. 산지에서 직송한 사과가 왔어요!’를 기세 좋게 외치는 것도 한길이 아닌 골목길에서다.  

 

  골목의 시간은 느리다. 한 잔 술에 거나해진 남자가 외눈박이 가로등 아래를 갈지자로 흥청이며 ‘사랑만은 않겠어요’ 를 흥얼거려보는 곳도, 산전수전 다 겪은 안노인들이 구부정한 어깨로 쭈그려 앉아 누추한 일상을 구시렁거려보는 곳도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골목에서일 것이다. 골목에서는 바람도 속도를 늦추고 모퉁이에 쌓인 눈 더미마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천천히 녹는다. 달각거리는 냄비 소리, 도란거리는 말소리, 선잠 깬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진즉 생의 이면을 알아버린 사람들의 가슴조차 잔잔하게 흔들어놓고, 밥 냄새, 찌개 냄새, 비 오는 날 호박전 부치는 냄새가 가난했지만 가난을 몰랐던, 아늑하고 따스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가만히 데려다놓는 것이다. 

 

  땅 팔자가 사람 팔자를 닮는 것인가. 사람 팔자가 땅 팔자를 따르는 것인가. 신토불이란 먹거리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모양으로 골목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여러 모로 닮은꼴이다. 탄탄대로 변 초고층아파트에 사는 이들의 삶은 그 길을 닮아 거칠 것이 없겠지만,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오르막에 둥지를 튼 사람들의 일상은 그 길처럼 구절양장이다. 쓰레기통과 폐지묶음과 고장난 자전거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길모퉁이를 더트며 박스 쪼가리나 알루미늄 캔들을 모아 싣고 내려오는 꼬부랑노인을 만날 때면 살아가는 일의 신산함에 콧마루가 시큰거리고, 퇴락한 담장 밑에 홀로 붉은 봉숭아가 까닭 없이 서러워 보이기도 한다. 우중충한 현실, 숨기고 싶은 가난, 불확실한 미래를 다 벗어버리고 꿈속에서나마 메이저를 꿈꾸지만 마이너리그를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골목이 한길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 꿈꾸기에도 그들은 이미 지쳐있는지 모른다. 

 

  골목도 사람처럼 병들고 늙는다. 시름시름 앓아눕기도 하고 때 없이 몸살을 하기도 한다. 오래된 담벼락은 검버섯처럼 청태가 끼고 하수구에도 혈전이 생긴다. 칠이 벗겨지고 돌쩌귀가 떨어진 대문들이 바람이 불적마다 삐거덕거리며 가만가만 관절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나마 그렇게 천천히 게으르게 늙어갈 수만 있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천박한 개발 논리에 떠밀린 골목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떼죽음을 당하고,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변방에 숨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에움길들조차 혼탁한 상혼에 물들고 찌들어 본 모습을 잃고 아우성친다.

 

  골목이 사라진 도시는 음영이 없는 얼굴처럼 각박하고 살풍경해 보인다. 말초 구석까지 양분을 전하고 산소를 공급해주는 모세혈관이 있어 순환이 되는 육신과 같이, 미세한 골목들이 손금처럼 퍼져있어 도시 또한 소통의 활기를 얻는다.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거친 삶의 에너지가 뒤섞이고, 사람 사는 냄새와 사람 사는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오래 늙은 골목들이 문득 그립다.

수필집 『손바닥 수필』2012.

 

최민자 (수필가)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가정대학을 졸업하였다. 1998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하였고, 수필집으로 『흰 꽃 향기』, 『꼬리를 꿈꾸다』 『손바닥 수필』등이 있다. 2002년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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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굿

 

김 애 자

 

 

   강 가운데 생긴 섬마을이다. 태백산에서 태어난 내성천(乃城川)과 소백산에서 출발한 서천(西川)이 만나 마을을 휘돌아나가면서 물돌이동을 만들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수도리 모래사장에는 일 년 중 가장 달이 크게 보이는 정월대보름 달집이 세워진다. 달집을 태우면서 한 해를 시작하면 바라던 일들이 잘 이루어질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설날보다 대보름이 더 신났다. 농한기의 쉼을 얻은 어른이나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명절이라는 이유로 오랜만에 여유를 즐겼다. 낮에는 연날리기와 지신밟기로, 밤이면 쥐불놀이로 마을은 온통 축제에 들떴다.

   절정은 달집태우기였다. 타오르는 불 앞에 소원을 걸어놓고 이루어지기를 빌고 다짐하는 것은 한 해의 농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은 긴 막대로 기둥을 세우고 달집의 뼈대를 세웠다. 집 안에는 불씨가 잘 살아나도록 솔가지며 마른나무, 관솔을 넣고, 밖에는 생솔가지를 쌓아 이엉을 얹어 새끼줄로 감는다. 아이들도 자기 주먹만 한 꿈 하나씩 품고 땔감을 보태기 위해 고사리손을 모았다. 집이 다 만들어지면 달이 보이는 쪽으로 문을 내고 보름달 모양을 만들어 달집 가운데 새끼줄로 매달아 놓았다.

   “망월이야!”

   환호성과 함께 불길이 솟아오른다. 붉은 너울의 끄트머리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자 농악대의 꽹과리 소리가 자지러진다. 달집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도 불꽃의 춤사위와 풍악에 맞추어 몸을 흔든다. 보름달의 꼬리가 산 능선을 박차고 둥실 떠오르자 구름이 물러나면서 길을 터준다. 달은 온 세상에 환한 빛을 흩뿌린다.

   불이 점점 무섭게 타오른다. 선홍의 불빛이 검붉은 색이 되어 하늘로 사라진다. 거센 기세로 솟구치는 불길과 강 건너편 숲이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더한다. 나무에 달아놓은 액막이 부적과 소원들도 활활 타 올라간다. 잡아먹을 듯 널름거리는 불의 혓바닥을 빠져나온 불똥이 탁탁 소리를 지른다. 마치 마음속에 쟁여둔 사악함을 몰아내라고 죽비를 치며 호령하는 것 같다. 한기가 뼈마디를 쑤시는 한겨울 밤의 매서운 추위지만 불 앞에 있으니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따뜻하다.

   검붉은 구름이 치솟는다. 땅의 소망을 신에게 전하기 위해 연기에 올라탄 불기둥이 하늘 길을 터준다. 농사의 풍요와 생명력을, 물과 여성을 품은 달이 이루어 주리라는 믿음 때문인가. 여인들은 고쟁이나 저고리 동정을 뜯어 불 속으로 던지며 다산을 기원한다. 풍악 소리가 더 크게 울리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달집 주위를 빙빙 돌며 목이 터져라 강강수월래를 불렀다. 불가에 쪼그리고 앉았던 내 어깨도 저절로 들썩거린다. 아랫도리가 후줄근하도록 아낙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붉은 달빛이 흥건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바다의 밀물처럼 내 안의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비릿한 냄새와 축축한 느낌이 께름칙하다. 젖은 속옷을 보자 두려움과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부끄러움에 온 몸이 오그라든다. 빨강 꽃잎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름적거리며 엄마 눈치만 살폈다. 낌새를 알아챈 엄마가 책상 밑에 숨겨 둔 흔적을 찾아냈다. 엄마는 달거리가 시작된 거라며 작은 소창 생리대를 만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선홍의 달빛을 경험한 나는 무슨 못할 짓을 한 죄인처럼 후미진 곳으로 숨어 다니며 식구들의 눈을 피했다.

   가뭄이 심할 때 옛사람들은 붉은 빛이 선명한 소녀의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냈다. 당신도 딸의 첫 생리를 신성하게 여겼는가. 엄마는 지저분하게 구겨진 개짐을 정성스럽게 신문지에 쌌다. 뒷마당 한갓진 곳에 땅을 파고 왕겨로 불을 피워 성인식을 치르듯 찬찬히 딸의 증거물을 태웠다. 달빛의 흔적이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당신의 얼굴은 달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씨알을 품을 딸의 밭에 나쁜 기운은 재가 되고 막 피어나는 여체女體는 옥양沃壤이 되기를 염원하였으리라.

   달은 생명의 집이다. 씨를 품는 여인의 몸이며 땅이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차고 기우는 달의 정기를 받은 여인들의 몸에는 창조의 기운이 서려 있다. 달집을 태워 액을 없애고 농사가 번성하기를 기원한 것처럼, 여성은 생산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치르면서 자신의 몸을 정화시켰으리라. 보름달에서 완숙한 기운을 받은 여자가 달거리로 생명을 불러 후손을 얻으려는 것은 잉태의 근원이 달과 여인의 신비로운 조화에 있음 아니던가. 여자의 힘이 달을 닮은 자궁에서 비롯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땅의 소원이 달에 닿도록 풍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너울거리는 불꽃 뒤로 보름달이 둥두렷이 떠올랐다. 달집 속에 매어 놓았던 달이 언제 뛰쳐나갔는지 동쪽 하늘에 성큼 올랐다가 다시 불 속으로 들어간다. 광기 어린 꽹과리 소리에 기죽은 듯 안팎으로 보이는 달의 모습이 처연하다. 시끄러운 소리 속에 표현할 수 없는 적막감이 감돈다. 생명을 받고 헤어지는 모녀처럼, 뜨고 이우는 달처럼 생과 사의 비밀을 품은 이 땅의 여인과 농민들의 아픔을 다 끌어안느라 힘든 때문일까. 땅을 품고 사는 이들의 몸을 밟고 춤추는 세상사가 올해도 뾰족한 수를 보여줄 수 없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깽 깨갱 깨갱 깽, 하늘을 가르는 꽹과리 소리가 천둥을 부르자 둥 두둥 구름떼가 몰려든다. 딱 따닥 딱, 장구재비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져 무아지경에 이르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지잉 지잉, 천지의 기운을 한데 모은 바람이 파문을 그리며 골짝으로 퍼져나간다. 꽹과리, , 장구, 징의 사물四物을 앞세운 농악소리가 산천을 누비며 하늘로 올라간다. 불과 물과 달에 만취한 아녀자와 남정네, 늙고 젊고 높고 낮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달집을 돌고 돈다.

   “올해도 풍년이고, 내년에도 풍년일세.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 나아 네에.” 땅의 함성과 하늘의 자비가 공중에서 얼싸안고 춤을 춘다. 절정으로 치 닫는 망월굿의 오르가즘을 맛보며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땀으로 흠씬 젖은 육신이 땅의 품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개운하고 편안하다.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진다. 가물거리던 연기도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남은 불똥 몇 개가 튀어나가면서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풍악도 시들해지고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하나둘 발길을 돌린다. 불길에 몸을 사르며 사라져간 달집의 흔적은 다시 어미의 품인 토양으로 돌아가 생명을 키우는 거름이 될 게다.

   아직 못다 한 소원이 남았는가. 모닥불 옆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불야성의 도시로 향한다. 달집을 빠져나온 보름달이 차창에 올라앉아 있다. 더러운 것은 모두 태웠고 액운도 거두었다며 싱긋 웃는다. 달집에 달아놓은 소원은 다 들어주겠으니 안심하라며 성큼성큼 앞장선다.

   돌아오는 밤길이 훤하다.


  *2020년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인 김애자 선생님은 지금 대구창작반에서 창작 공부에 열정을 쏟고 있는 분입니다.(곽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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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매일신춘문예]수필 당선작-아버지 게밥 짓는다

당선인 김옥자

달무리 속으로 언뜻언뜻 구름이 흘러들다 사라지는 밤, 정월대보름 놀이를 하느라 한껏 들뜬 여흥이 가시기전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에서 내리더니 보호자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농한기를 맞아 도시에 사는 지인들과 관계의 밥을 짓고 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속도의 바퀴에 무참(無慘)하게 부딪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빠와 언니에게 당부의 말도 일러 둘 겨를도 없이 그 분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위중했던 병세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적응되고도, 근 1년여의 투병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진 대퇴부까지 석고 깁스를 하고 목발에 의지한 채 집으로 오셨다. 한 집안의 대들보이자 기둥처럼 튼튼했던 몸이 사고의 후유증 때문인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왼쪽 어깨가 앞으로 치우치면서 게가 걷는 형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게걸음은 더욱 더 심하게 나타났다.

서식환경과 외향적인 특성이 다양한 게는 한 쌍의 집게발과 네 쌍의 다리로 종횡무진 갯벌을 오고 간다. 아버지 역시 푹푹 빠지는 세상 속에서 마른 곳과 젖은 곳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상의 파고와 맞서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도가 지나간 자리엔 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사고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과 육체적인 상처를 지닌 채 당신의 건재함을 보이려는 듯 세상의 파고 속에서 잠시도 자신을 풀어 놓는 일 없이 게걸음을 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까치발을 든 민꽃게처럼 수게의 기개(氣槪)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게딱지의 단단함 속에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을 감추고 도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필 '아버지 게밥 짓는다'수필 '아버지 게밥 짓는다'

썰물을 밀어낸 너른 벌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게가 숨구멍을 오가며 무기물을 걸러 내거나 갯지렁이 바다 생명의 사체를 먹이로 찾고 있는 중이다. 게가 먹이를 찾는 것이나 아버지가 세상의 바다에서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해 게걸음 치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다리로 분주히 걷는 모습에선 언제나 인내의 짜디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일 년 농사를 준비하며 관계의 밥 짓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품앗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듯, 주위 사람들에게 지청구를 주며 완고함을 보이기 위해 게걸음은 지속되었다. 게가 옆으로 기어가다 길이 아닌 곳에 처박힐망정 당신 사전엔 굽힐 줄도 모르고 포기도 없었다.

게는 위험을 감지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싶을 때 빈 소라껍질을 자신의 은신처로 삼거나 뻘 구멍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긴다. 하지만 아버진 그러지 않았다. 게는 몽글몽글 밥을 짓고 있었다. 뻘과 모래밭에 수 천 수만 개의 밥을 지어 놓았다. 연신 앞발 두 개를 얼굴에 비벼대며 거품을 물었다 뱉어 낼 때마다 게밥의 숫자는 늘어났다. 너울성 파도 한 번이면 와르르 쓸려나갈 저 밥들, 아버지가 지어 놓은 밥들은 수시로 파도에 쓸려 나갔다. 하우스 세 동의 배추 농사가 그랬고, 천오백 평 감자 농사가 가격 폭락으로 거센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 한우 값 폭락으로 반도 못 건진 비용들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며 더욱 더 절름거리게 만들었다. 어린 게들의 왕성한 식욕을 위하여 아버지의 게걸음은 오금도 펴지 못한 채 세상의 바다에서 게걸음을 치며 내달려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몸은 옆으로 치우치며 점점 더 빠른 게걸음이 되어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분명 당신은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셨을 게다.

게는 열 개의 다리중 하나라도 부러지면 게로서의 능력을 잃는다. 아버지는 교통사고 이후 다리만 와지끈 부러지고 깨진 것이 아니었다. 속도의 바퀴에 다리가 깨진 순간, 당신의 꿈과 희망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아픈 다리와 함께 상실되었음을 철이 들고서야 알았다. 나와 가족들은 "아버지! 다쳐서 아픈 다리는 괜찮으시냐"고 묻지도 못했다. 아니 그 얘길 입 밖으로 꺼내질 못했다. 마치 금기사항이라도 된 것처럼 모두가 함구했다. 여러 번의 수술로 인해 살가죽 속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다리를 어루만져 드리지도 못했다. 한쪽 어깨가 옆으로 치우치며 게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긴 시간을 아버진 묵묵히 혼자서 감내해야만 했다.

철이 없어 아버지가 지어 놓은 보리 섞인 밥이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소금기에 절은 짠내가 싫어 아버지의 고단함을 외면한 적이 많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서야 삶은 짭조름 간을 맞추며 살아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터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감추듯 어떤 상황이나 낯선 변화에 집게발을 번쩍 들어 대항하는 게처럼 단단한 날을 세웠던 아버지였다. 게는 늘 까치발을 들고 짠물 가득한 세상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그가 뻘 구멍을 아지트로 삼고 쉬는 시간 역시도 마른 곳이 아니듯 아버지의 쉼터 역시 그랬다. 게가 생존을 위해 밥을 짓느라 집게발로 연신 얼굴을 비벼대며 게거품을 무는 것처럼 아버지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 했다.

누구나 세상의 바다에서 게걸음을 걷는 형상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세상을 향해 똑바로 걸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비틀거리며 게걸음을 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매사 어긋나버린 꿈을 향해 비틀거리는 모습은 보였어도, 아버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우리 가족을 지켜내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온전치 못한 다리를 짜디짠 물에 담금질을 하며 게밥을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게는 집게발로 연신 얼굴을 비벼대며 거품을 물며 몽글몽글 밥을 지어 놓을지언정 흔들리며 걸어 온 발자국은 남기지 않는다.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 놓은 밥을 퍼 먹고 있는 오늘, 여덟 형제가 그 자식을 위해 다시 세상의 파고를 넘나들며 또 다른 밥을 짓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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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댓돌- 우영미


그곳은 성전의 들머리다. 저마다 순례길 같은 일상에서 지고 온 남루들을 벗어놓는다. 하루치의 자잘한 삶의 편린들을 정화시킨 후 비로소 맨발을 방으로 들인다. 또 날이 새면 어김없이 새로운 다짐을 찍으면서 나선다.

  • 돌은 연장이 되기도 하고 염원을 담아 얹으면 탑이 되기도 한다. 성벽의 돌처럼 우러러봐야 할 정도로 높이 쌓은 것도 있고, 보일듯 말듯 나지막이 집 담장으로 둘러진 경우도 있다. 그 쓰임새가 다양하나,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인 댓돌은 유난히 살갑다.

    비상하는 새들도 머무르며 쉼표를 찍듯이, 생각이 흐트러질 때엔 시골집에 와서 댓돌을 바라본다. 칼에 베인 시간처럼 빈집의 공허가 창백하다. 내 시간의 긴 침도 모 닳은 댓돌 위에 멈춰 있다. 각이 서 매사 반듯하던 젊은 날의 성정도 유연해졌는지 제 몸에 이끼꽃을 피웠다. 바닥의 애환을 알고 있는 듯 묵묵히 세월을 받아낸 낙수의 결마저 간직하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고요에 든다. 이렇듯 자신을 잘 바라볼 수 있을 때는 멈추어 있는 시간일 것이다.

    해가 설핏해지자 산 그림자가 마당에 내려앉는다. 감나무 끝에 서성이던 바람이 댓돌 위로 먼 기억의 풍경들을 부려놓고 간다. 우듬지 까치 소리가 여명을 깨울 때부터 들리던 자분자분한 어머니 발걸음 소리. 뻐꾸기 울고 스무날만 지나면 풋보리를 먹을 수 있다던 외할머니 말씀이 문득문득 생각난다던 어머니. 보릿고개를 넘어가며 했다던 그 말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주문인 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힘겨운 시집살이에 속울음을 삼키며 친정으로 향하고픈 발걸음을 몇 번이나 여기서 바장였을까. “이별이 꼭 죽음뿐이랴.” 하시며, 집 나간 자식 흉몽이라도 꾸는 날이면 하얀 소금을 한 줌 댓돌 주변으로 뿌려 놓으시곤 했다. 아랫목 이불 속에 밥그릇이 따뜻하면 객지에서도 배곯지 않는다는 믿음, 신발이 가지런하면 어디를 가든 발걸음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믿음, 그것은 어머니 불변의 동종주술이었다.

    하루의 일과 중 무시로 눈보다 정갈히 씻은 시어른 고무신을 섬돌에 올리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이었다. 가족의 밥이 되고 자식의 책이 될 벼를 돌보기 위해 산모롱이 돌아 물꼬 트는 아버지의 흙고무신. 안쪽 바닥에 우산대 달궈서 눌러놓은 낙인은 끝까지 닳지 않는 바코드였다. 덤벙대며 마루로 뛰어오르곤 하던 오빠의 운동화는 사선으로 놓이거나 한쪽이 뒤집히기 일쑤였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조용히 챙겨놓았다. 마치 댓돌이 나의 영역이라고 무언의 주장이라도 하듯이. 어떤 허물도 절대 발설치 않는, 주소를 잡고 떠날 줄 모르는 정착의 의지가 굳건하다.

    옆구리 맞대고 길게 늘어섰던 신발들. 그런 댓돌이 휑하니 비는 밤이 한 해에 꼭 하루씩 있었다. 음력 정초가 되면 날마다 무슨 금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그 중 신일(申日)에는 밤중에 귀신이 와서 신발을 하나씩 신어 보고, 그 중 딱 맞는 신 임자는 그 해에 병치레를 많이 한다고 했다. 그래서 초저녁이 되면 방 윗목에 신문지를 깔고 온가족의 신발을 나란히 늘여 세웠다. 늘 보던 신발을 방안에서 보면 색다르게 보였다. 아침에 나와서 말끔히 비어 있는 댓돌을 볼 땐 마치 새집에 온 듯이 낯설었다. 그만큼 댓돌은 신발이 놓여야 생명을 가지는 공간이다.

    큰 건물의 댓돌은 마당에서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기도 하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도와 주는 디딤돌이다. 불국사의 연화교에 디딤돌마다 연꽃이 새겨진 이유도 그 위가 부처의 세계라는 암시이다. 진흙에 뿌리를 내린 채 티없이 향기를 피우고, 물 위에 잎을 펼치고도 젖지 않는 연화처럼 청정한 세계로 걸어가라는 뜻이리라. 대궐의 조계(階)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용이 통치자의 권위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구름을 몰고 다니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하니,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우로(雨露)를 골고루 내려 풍족하게 한다는 다짐일 터이다.

    그에 반해 속계에 사는 서민의 집 댓돌은 조붓하다. 장식이 없고 밋밋하다. 화장기 없고 수수한 시골 아낙과 같다. 비록 열반을 향해 오르는 연꽃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용 문양의 돌은 아닐지라도 댓돌의 적요는 본성이 지닌 포용력에 있다. 울타리 허술하게 치고 사는 서민들 정 붙이고 살아가는 속내야 어찌 연화장 세계나 대궐보다 덜하겠는가.

    유년시절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두 장의 흑백 필름이 있다. 팔남매의 막내인 나에게 기억될 정도면 할아버지는 수를 하신 셈이다. 한 장은 누워 계신 모습이다. 이불을 잔뜩 당겨 덮은 까닭에 얼굴만 드러났다. 얼굴보다는 숱 많은 수염과 한 번도 벗지 않던 탕건만 기억난다. 또 한 장은 댓돌에 앉은 모습이다.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리에 행전을 두른 채, 마루를 배경으로 댓돌 위에 앉아 계셨다. 그분에게 댓돌은 일생 다스려온 영토를 내려다보는 성루이자, 피안을 바라보는 차안의 나루터였을지도 모른다.

    댓돌은 밤이 되면 도량의 정례석처럼 정(靜)하다. 하루를 돌아보고 나쁜 기운은 별빛에 우려낸다. 고된 노동 후에 밥은 달고 잠은 깊은 법. 깊은 잠 속에서도 생의 무게에 신음하는 부모님의 숨소리마저 거두어 달빛에 씻어내는 정화수 막사발이다. 어제의 삶에 오욕이 달라붙었을지라도, 뉘우침으로 밤이 길었을지라도, 아침이 되어 신발을 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부여해준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댓돌 위에는 지난 삶이 남아 있다. 돌아봄과 되새김의 시간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달뜬 걸음이든, 일용할 양식에 매인 비루한 걸음이든, 끝내는 댓돌에 닿아서 멎는다. 내려간 만큼 삶을 절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바닥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낮은 자세로 좌정하고 있다. 가족들 차례로 떠나고 종내에는 어머니 혼자 오르내려도, 생각 속 신발만은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던 댓돌이다. 이제 어머니의 신발도 정물이 되었다. 걷고 걷다 온 제자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날들이 채도를 잃은 가족들의 신발과 함께 저기 놓여 있다.

    이 모든 희로애락을 듣고 갈무리한 댓돌에 앉아 지난 세월을 되작여 본다. 걸을 때에는 나아가는 일에만 전념했다. 바라보았던 건 앞쪽과 남은 거리뿐이었다. 멈추어 돌아본다. 인지한다는 것은 관찰하고 그 깊이를 가늠하는 일이다. 신발을 잘 벗어 놓으려면 고개를 숙여야 하듯, ‘지금 여기’ 자신이 서 있는 마음자리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겸허한 마음을 지니고 하심(下心)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 허허로운 날엔 댓돌에 올라 볼 일이다. 우리의 뒷모습이 저기 있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가족들의 온기가 새겨져 있다. 시간을 거슬러 표정들이 살아나고, 귀 기울이면 속삭임이 들려온다. 모 닳은 댓돌은 우리집 호적등본이다. 칸이 부족해 너덜너덜한 우리 삶의 이야기가 깨알처럼 씌어 있다. 나 또한 언젠가는 하나의 정물로 들어앉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이건, 오늘도 이 제단을 조용히 쓸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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