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서 유배 살던 집을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영영백운도>. 추사는 유배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 듣고 ‘만시’를 지었다.
〈옛사람들의 눈물〉
전송열 지음/글항아리·1만4800원

“통곡이 끝나도 또 눈물이 흐르고/ 그 눈물 거두니 또 울음이 터지네/ 울음이 터짐에 또 무슨 말을 하랴/ 그저 애간장만 마디마디 끊어질 뿐”

조선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조태억이 둘째아들을 잃고서 남긴 오언절구 10수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를 ‘만시’(挽詩)라 한다. 한문학자 전송열(연세대 강사)씨의 <옛사람들의 눈물>은 조선 시대 만시를 종류별로 모아 엮고 작품의 배경과 미학적 특징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우리 형의 얼굴은 누구를 닮았던가요/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형을 보곤 했지요/ 오늘 형이 그리운데 어디 가서 볼까 하다/ 옷매무새 바로 하고는 시냇물에 비춰봅니다”

연암 박지원의 시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그리워하며>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호가 난 연암이지만, 산문에 주력하느라 그가 쓴 시는 15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두 형제 사이의 닮은꼴 외모를 통해 아버지와 형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솜씨는 ‘역시 연암’이라는 찬탄을 자아낸다.

만시의 대상은 가족과 친구, 또는 스승이나 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남을 대신해 지은 ‘대만시’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쓴 ‘자만시’도 없지 않았다. 특히 부부유별의 엄격한 유교적 법도가 중시되던 조선 사회에서 만시는 점잖은 선비들이 사별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거침없이 표현할 통로가 되기도 했다.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 〈옛사람들의 눈물〉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에서 아내의 죽음을 한 달여 만에 알고서 쓴 작품이다. 월모란 자식을 점지하는 삼신할미처럼 배우자의 인연을 맺게 해 준다는 전설 속의 노파를 가리킨다. 흥미로운 것은 죽은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보다는 그렇게 아내를 떠나 보낸 지아비의 아픈 심사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사가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살아서도 이별했는데 이제 죽어서 또 이별함을 참담히 여긴다”며 “저 푸른 바다 저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끝이 없을 뿐”이라 탄식한 산문 ‘애서문’(哀逝文)을 추사의 알리바이 삼아 읽어 볼 만하다.

“문을 들어서려다 다시 나와서/ 고개 들어 바쁘게 두리번대네./ 남쪽 언덕엔 산 살구꽃이 피었고/ 서쪽 물가엔 해오라기 대여섯”

조선 후기의 빈한했던 선비 이양연이 처와 둘째아들을 연이어 잃고 쓴 <슬픔을 피하려고>라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몇 달 상관으로 떠나 보낸 가장의 아픔이 은근하면서도 둔중하게 다가온다. 제목에서 보듯, 슬픔을 표나게 내세우는 대신 ‘딴청’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슬픔과 아픔을 자극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너희 남매의 혼은/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겠지/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랄까”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네/ 천 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게도 외로운 무덤뿐이로구나”

앞의 것은 비운의 여성 예술가 허난설헌이 어린 남매를 차례로 잃고서 쓴 <죽은 자식을 통곡하며>라는 작품이고, 뒤엣것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죽임을 당한 기준이 사약을 받고서 자신의 죽음을 읊은 ‘자만시’다. 어느 죽음이 무겁고 어느 죽음이 가벼우며 어느 죽음이 억울하고 어느 죽음이 통쾌하다 하겠는가. 계절처럼 오고 가는 생과 사 앞에 다만 옷깃을 여밀 따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김정운의 남자에게] 한국 남자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유
한겨레
»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살다 보면 그런 인간 꼭 있다. 도무지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한 이야기 하고 또 해도 매번 같은 자리다. 도대체 어쩌면 이럴까 싶은 마음에 답답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교수들이 그렇다. 평생 남을 가르치기만 할 뿐, 남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내 가족의 불만도 마찬가지다. 매번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 백 마리를 끌고 가는 것보다 교수 세 명 설득해서 데리고 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도 한다.

의사소통 장애는 교수의 직업병이다. 교수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남의 말귀는 못 알아듣는다. 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은 단순하다. 의미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같다고 누가 보장해주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암묵적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는 서로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 혹은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의미에서 빠져나가는 중년 부부에게 의사소통 장애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결혼 23년차인 내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아침식사를 집에서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식사’와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매번 힘들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지적·논리적 의미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일한 정서적 경험이다. 엄마의 품안에서 아기는 엄마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 아기가 놀라면 엄마는 같이 놀라고, 아기가 기뻐하면 엄마는 함께 기뻐한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이 정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의미 공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연인들이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으로라도 과장된 정서공유의 경험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함께 구성하려는 것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일수록 이런 정서공유의 경험이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젊어서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한 부부의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결혼이 일상이 되면, 그 번잡한 일상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변한다.

정서공유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말귀 못 알아듣는 한국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경험에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뭘 느끼는지 알아야 타인과 정서를 경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증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감정인지불능’(Alexithymie)이라고 한다. 이 증상이 심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문제는 판단력 상실이다. 인지능력은 멀쩡하지만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아주 황당한 결정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주위에 너무 많다.

멀쩡한 집 놔두고, 토마토케첩만 가득한 달걀토스트를 들고 서 있는, 그 싸한 길거리 기분부터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손님에 대한 아무 ‘배려’ 없이,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만든 싸구려 원두커피에 혓바닥을 델 때의 그 분노가 처절해질 때쯤, 아내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형용사가 다양해져야 남의 말귀를 잘 알아듣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거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어제는 오름해설사 1기 출신들의 번개 모임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회포를 풀다보니, 시간이 너무 흘러 아침에 빠듯하게 일어나서,

블로그에 사진도 못 올리고, 부랴부랴 4기와 함께 통오름, 독자봉,

남산봉을 거쳐 김영갑 갤러리를 다녀왔다. 4기생들도 이제 다음 주면

마지막 강좌를 갖게 된다. 그렇지만 다다음 주면 강천산에 원정 산행

가지, 그것이 끝나면 겨울과 봄, 번개 산행이 계속되리라.  


아왜나무는 인동과의 상록 소교목으로 높이는 10m 정도이며,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이며 두껍고 윤기가 난다. 꽃은 6월에

흰색의 원추(圓錐) 꽃차례로 피며, 열매는 9월에 빨간색의 핵과

(核果)가 익는다. 산울타리의 소재로 많이 쓰이며, 우리나라의

제주와 남해 섬, 일본의 오키나와,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 가을 숲을 보며 - 김시탁


고여 있는 숲을 바람이 흔듭니다. 산새에 파 먹힌 붉은

시간들이 피를 흘립니다. 붉은 피를 본 소나무 하나가

시퍼렇게 질려 온몸을 떨고 서 있습니다. 제 살을 파

먹는 딱따구리를 고목은 나무라지 않습니다. 숲은 아

무도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로

어깨를 걸고 가슴을 비빕니다. 시린 햇살 한 조각도

나누어 먹으며 한 목소리로 소리를 만듭니다. 한번씩

계절의 불심검문에 숲 속의 나무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입니다. 파란 하늘을 쓱쓱 쓸어 이마가 벌겋게 달아

올라도 한번도 온몸을 눕혀 잠들어 본 적이 없습니

다. 자기 몫의 바람을 가지에 걸고 숲의 대열을

이탈하지 않습니다. 함께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탈하지 않습니다.



 

♧ 가을 숲에서 - 김문희


가을 숲에 서면

나무들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린다


한 시절 살아온 말없던 삶이

빛바랜 세월을 털고

이 가을, 나무는 정직한 맨몸으로

찬바람 속에 선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던가

추수의 마차들이 숲을 지날 때

지난여름의 셈은 끝나고

돌아오라, 고독한 자유여


나무는 저마다 혼자서


가을 햇살에 몸을 씻노니

바람이 올 때마다 아픈 손을 흔들어도

가을 하늘 높이에서 아득한

그리운 이름

슬픔으로 수액을 말리고

메마른 육체를 쓰다듬어

겨울 문턱에 서서

나무는 

그 싱싱한 내일을 위하여

이 가을, 말없이 옷을 벗는다


가을 숲에 서면

나무들의 아픈 숨소리 들린다



 

♧ 가을 숲속을 걷는다는 것은 - 김영호


홀로

가을 숲속을 걷는다는 것은

낙엽이 내 발등을 밟고

바스러지는 소리로 일어서는

어제의 날개짓을 만나는 일이다.


몇 안남은 찢기고 바랜 추억을

나무 가슴벽을 흔들어 마져 다 떨구고

등뒤로 이는 바람을 재우는 일이다.


온 봄 여름, 짐승들 속병을 주던

철쭉도 산유화도

한갓 저 갈대에 업힌 흰 바람인 것을,


 

늦은 가을 저녁

홀로 숲속을 찾는 것은

겨울로 간 네 생각의

파득이다 쓰러진 내 날개죽지

낙엽 한 장의 저 치켜뜬 갈한 눈빛을

꾹꾹 밟아주는 일이거나,


홀로 비를 맞고 있는

무덤도 없는 돌비 하나를 비스듬히 바라보든가

새도 없는 둥지의 나무기둥을

밑둥째 넘어뜨리는 돌바람이 되는 일이다.



 

♧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 이해인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읽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 숲으로 가는 가을 저녁 - 김경윤


나무들에게 가야겠다

속살 깊이 침묵의 나이테를 키우는

저 나무들에게 가야겠다


한지(韓紙)에 먹물 번지듯

그렇게 어둠이 산 아래 마을로 번져오는

이 가을 저녁, 나는

침묵 하나 거느리고 억새밭을 지나

뒷산 가시나무숲을 오른다


적막한 숲 속에서

호르르 침묵에 파문을 내며 날아오르는 갈가마귀들

꽃치자빛 노을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

서편 하늘이 일순 먹먹하다


서늘한 초저녁 별들이 안부를 묻는

숲으로 가는 이 가을 저녁

저 산 아래 마을에선 또 누가 이 세상을 떴는지

마을 초입에 걸린 조등(弔燈) 하나 꽃처럼 붉은데


어둠이 나를 지울 때까지

나무들의 침묵에 기대어 이승의 길을 묻는

나의 말은 아직 너무도 서툴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메모 :

 

어제 갔던 가을의 김영갑 갤러리는 봄에 갔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빛이 넘쳐흘렀다. 물론 전시 사진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가을색이 넘쳐 났다. 아직 구절초 핀 건 보지 못했지만 화살

나무라든지 개모밀덩굴, 그리고 이 까마귀밥여름나무는 아주

환상적인 색을 자랑한다. 열매가 많이 떨어져버린 것이 흠이

였지만….


까마귀밥여름나무는 범의귓과의 낙엽 활엽 관목으로 줄기는

높이가 1m 정도이고 조금 덩굴졌으며, 잎은 어긋나고 둔한

톱니가 있다. 4월에 푸른빛을 띤 흰색 꽃이 피고 열매는

넓은 타원형으로 가을에 빨갛게 익는다. 어린잎은 식용하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 숲 속의 가을 풍경 - (宵火)고은영


숲의 깊은 자락엔 사람 흔적이 없다

산길엔 다람쥐가 걸어나 와 종종걸음치고

어쩌다 지난 자동차 바퀴 자국만

진흙에 깊은 화인처럼 찍혀 있을 뿐


백 자작나무 군락과 억새 무리가

한 무더기씩 춤을 추는 두메산골

바람이 온 숲을 술렁대는 동안

반쯤 옷 벗은 자작나무 가지마다

대낮을 누워 뒹굴던 햇살이 걸려

아직은 뜨겁게 숲을 달구고

숲은 가슴 깊이 멀미 증세에 시달려

봄부터 틔운 그리움에 핏빛 안부를 게워내고

노랗고 빨갛고 온통 가을로 불타고 있다


잠잠하다 가도 바람이 부스스 일어서면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의 대화조차 끊기고

정처 없이 나풀거리며 비늘처럼 날리는 나뭇잎들

밤나무 밑

월장하는 바람의 성화를 간절히 기다리다 가

후두 둑 떨어지는 작고 앙증맞은 토종밤을

달려가 열심히 줍는.....


아, 가을 중심에 풍경이 된 이 황홀한 행복



 

♧ 가을 숲을 탐닉한다 - 이민숙


가슴 시린 서늘한 가을

차갑게 식어 가는 심장처럼

칼날 같은 외로움 삭이며 숲길을 걷는다


한때 가슴에서 자살한

독소처럼 퍼졌던 악에 받친 그리움

붉은 낙엽처럼 골 깊게도 깔렸다


나는 무소유 숲으로 은닉해

아픔을 자근자근 밟듯

붉은 물 흐를 듯한

단풍 밟으며 가을 숲을 탐닉한다



 

♧ 가을 숲으로 가자 - 공석진


숲으로 가자

상처뿐인 빈자리

아파서

많이 아파서

신음하는 숲으로 가자


바람이는 소리에

행여 임이 오실까

하얗게 새는 밤

동 터오는 새벽

사랑은 절망한다


하도 그리워

파리해진 낙엽

정이 땅에 떨어져

숨죽이는 숲에

입 맞춘다


입술 깨물며

조붓이 닫히는 숲

길 떠나지 못하는

슬픈 가을

숲으로 가자

 


 

♧ 가을 숲 - 박인걸


시월 숲 길 위로

알알이 여문 산열매들

산 짐승이 거둬갔는가

흔들어도 인색하다.


아침 햇살이 드리울 때

늙은 숲이 기지개 켜면

솔가지 작은 새들

조율 音도 무겁기만 하다.


늦깎이 꽃잎마저

모두 떠난 빈자리

베옷으로 갈아입는 숲

예배 시간처럼 敬虔경건하다.


지난여름 지날 적에

싱그러움에 감탄했더니

윤기 마른 피부처럼

늙는 데는 별 수 없구나!



 

♧ 가을 숲 - 반기룡


가을 숲에 드니

산새들 우짖고

풀벌레 합창소리 드높다

단풍으로 옷 갈아입은 나무들마다

일렬 횡대로 어깨를 나누고

햇살이 내리는 틈마다

야생화 지천이다

서걱이는 억새가

바람의 세기에 따라

4분음표 8분음표로

고개를 휘저으며

낮은 음자리로

혹은

높은 음자리로 변주곡처럼 연주한다

 

가을 숲은 모두 소리의 샘이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메모 :

모세에 대한 두 가지 소문

    소설 '람세스'를 읽고--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소설의 마술은, 육체의 죽음이 주기를 거절했던 새로운 생명을 람세스에게 베풀었다.


-'람세스'의 저자 크리스티앙 자크의 서문 중에서 “흔히 서구 문화의 두 기둥은 그리스 중심의 헬레니즘과 이스라엘 중심의 헤브라이즘이라고들 한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무엇인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헬레니즘은 고전 시대의 순수 그리스인들의 별칭인 헬레네인들의 문화, 헤브라이즘은 이스라엘인들의 별칭인 히브리인 혹은 헤브라이인들의 문화를 일컫는다. 이 두 문화는 각각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신을 그 정점으로 하는 문화와 유일신 야훼를 그 정점으로 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두 문화는 각각 자연발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뒤 나름의 독자적인 발전을 성취한 문화인가, 아니면 여기에 선행하는 어떤 어미그루의 뿌리가 있었던 것일까? 만일에 어떤 어미그루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어미그루의 정체를 추적하는 단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고대의 종교가 그런 단서 중의 하나일 수 있다.

 


헬레니즘의 어미그루는 어떤 문화인가?

  그리스 신화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티탄 족에 속하는 튀폰이 공격해오자 올림포스의 신들이 각기 동물로 둔갑하고는 아이귑토스(이집트)로 도망쳐 숨어살았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때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암몬 양으로, 태양신 아폴론은 까마귀로, 주신 디오뉘소스는 염소로,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물고기로, 전쟁신 아레스는 멧돼지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그리스 신화의 기자들이 이로써 그리스 신화와 이집트 신화의 친연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 문화가, 국제 무역의 중개지역 노릇하던 크레타를 통하여 이집트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아한 그리스 양식의 미술이 꽃피기 이전 시대의 출토품 조상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것을 승인할 수 있게 한다. 각기 그 직분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올림포스의 12신 체계는, 하늘의 신(누트), 생명의 신(라), 진리의 신(마아트), 지하의 신(민), 창조의 신(아몬), 생명의 신(프타) 등으로 그 직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 이집트 신들의 체계를 받아들여 이를 세련되게 확대재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분석심리학자 카알 융의 편저서 '인간과 상징'은, 네 복음서 기자 중 세 사람이 각각 사자(마르코), 소(루가), 독수리(요한)로 그려지는 것에 주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세 마리의 동물은 바로 이집트의 신 호루스의 세 아들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헤브라이즘은 어떤가?

  구약성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책은 모세 오경이라고 불린다. 이 중 '출애굽기'는 주로 히브리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행적을 그린 책이다. '출애굽기'가 다루고 있는 모세의 생애는 헤브라이즘이 이집트 문화에 가까이 닿아 있었음을 기정사실화 한다. 모세와 관련된 것으로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것은 미국의 영화감독 세실 B.드밀이 영화 '십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생생한 영상이다.

 

'출애굽기'의 기록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후대의 유태 역사가 필로스와 요세푸스 등의 기록을 토대로 모세의 출애굽 전 과정을 조명한 이 영화는 그 충격적인 영상으로 또 한 번 헤브라이즘과 이집트 문화와의 관계를 기정사실화 한다. 이 영화에서 벤허로 유명한 찰튼 헤스턴은 모세, 대머리 배우 율 브린너는 이집트 왕 람세스2세,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써 세드릭 하드위크는 파라오 세티, 앤 박스터는 네페르타리를 각각 연기한다. '출애굽기'가 그린 밑그림에다 '십계'가 인상적인 색채로 덧칠을 한 셈인데, 이로써 모세는 우리의 뇌리에, 움직일 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자리잡는다. 모세는 파라오의 자리와, 파라오의 아내로 내정되어 있는 아름다운 여성 네페르타리도 마다하고, 노예살이하고 있던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고단한 '엑소더스'의 길로 들어선 히브리의 영웅, 헤브라이즘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모세는 과연 그런 사람이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지금부터 약 60년 전에 아니라고 말한, 참으로 무모하게 보일 만큼 대담무쌍한 사람이 있다. '꿈의 해석'으로 이름 높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말과 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말과 글을 통해 지닌, 이러한 마법과 같은 기능 때문에 말과 글의 약속인 철자를 뜻하는 '스펠(spell)'이 '마법(spell)'과 동일한 철자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또 하나의 마법을 이렇게 연출해 낸다. 프로이트는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들어가면서 모세는 이집트인이었고,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가르친 유일신교는 이집트의 종교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태인인 그가 그 자신의 말마따나 "카톨릭 교회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그 논문을 쓴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터인데, 그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대략 이렇게 된다.

 


이집트의 18왕조의 아메노피스 왕은 당시까지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다신교를 금지시키는 한편 태양신 아톤만을 유일신으로 섬길 것을 강요한다. 그는 이렇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톤', 즉 '아톤 신이 사랑하는 자'로 개명한 뒤 아몬 신의 성도였던 수도 테베를 버리고 새로운 도시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으로 천도하는 종교 개혁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이 아톤교는 다신교에 버릇 들어 있던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다. 나라는, 국왕의 편애를 받던 아톤교와 실지회복을 노리는 아몬교와의 갈등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상태는 호렘헵 장군이 18왕조를 쓰러뜨리고 19왕조를 세우기까지 계속된다. 프로이트는 일단 모세를, 몰락한 아톤교를 재건하려는 이집트인이라고 가정한다. 말하자면 이집트에서는 아톤교의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당시 '하비루'라고 불리던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 가나안에다 재건한 종교가 바로 야훼를 섬기는 유일신교라는 것이다. '주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바로 이 '아톤'에서 온 것이며,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는 입이 무거웠다"는 구절은 이집트인이어서 히브리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1930년대의 교황청의 시각으로 보면 프로이트의 논문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의 출판은 기철초풍할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어서 터진 히틀러의 발호와 프로이트 자신의 사망,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큰 논쟁의 불씨는 되지 못했다. 이제 프로이트의 주장이 프랑스에서 거대한 로망의 꽃으로 피어난다. '람세스'가 그 꽃의 이름이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는 '출애굽기' 및 '십계'가 전하는 모세 이야기보다는 프로이트의 주장 쪽을 향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다.

 

프로이트의 주장과 아주 같은 것은 물론 아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2세와 절친한 친구 사이기는 하나 처음부터 히브리인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프로이트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책에 유일신교인 아톤교를 편애하던 왕 아케나톤의 증손녀와, 그 증손녀를 통하여 18왕조와 아톤교를 재건하려는 오피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크리스티앙 자크는 분명히 프로이트의 주장을 소설 구성의 어미그루로 삼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의 줄거리를, 그러나 나는 여기에다 소개하지 않겠다. 요약도 하지 않겠다. 찬양도 비난도 삼가겠다. 다만 게으르게, 독자들이 텅 빈 마음으로 이 '종교의 새벽'을 맞아 하루를 꾸미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한 대목을 귀띔하고 싶다는 유혹은 누를 길이 없다. 그것은 저 트로이 전쟁의 승리자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가 귀향길에 이집트로 건너와 람세스 왕의 국빈으로 이집트에 머무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죄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저 그리스 땅의 경국지색 헬레네, 눈이 어두운 대신 신들로부터 놀라운 지혜와 기억의 재능을 얻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저자인 시인 호메로스가 람세스와 만나는 대목이다.

 

  람세스의 이집트 문화, 장차 모세가 이룩게 되는 헤브라이즘, 그리고 제우스의 딸 헬레네가 대표하는 헬레니즘의 동석을 목도하는 흥분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람세스2세는 기원전 1279년부터 1212년까지 67년 동안 재위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람세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무리짓고 돌아오는 메넬라오스와 만난다는 것은 트로이 전쟁이 그 직전에 끝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이 끝난 것은 기원적 1279년 무렵이었던 것이 된다. 우리는 기원전 8세기 인물로 알려진 호메로스가 기원전 1279년 전후에 이집트에 나타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이 책의 저자에게, 크리스티앙 자크에게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크리스티앙 자크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특권이다. 이 특권을 바탕으로 누리는 무한한 자유, 이것은 소설가가 고독한

소이연이기도 하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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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생명존중의 방법론 /남재일
한겨레
»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자살기사가 실린다. 물론 보도되지 않는 자살이 훨씬 많다. 하루 수십명이 자살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얼마 전에는 ‘행복전도사’ 최윤희씨 부부동반 자살했다. 아내가 병고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하는 길을 택하자 남편이 뒤를 따랐다. 타인에게 행복을 전도하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차분한 어조로 세상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까지 전하며 떠났다? 거기에 충동의 흔적은 없었고 결단한 사람의 담담함만이 있었다? 이 광경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아마 개인의 죽을 권리를 옹호한 ‘자유죽음’의 저자 장 아메리라면 이들의 죽음을 실존적 선택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자살을 명예롭게 삶을 마감하는 방법으로 이해했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생존을 포기함으로써 삶을 구원한 행동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자살은 원칙적으로 부정의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처벌받아야 하는 죄였고, 현재는 치료받아야 하는 질병이다. 사회는 어떤 형태든 자살에 개입했고, 자살을 개인의 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살의 의미는 자살자의 삶의 논리가 아닌 자살예방이라는 사회의 필요에 따라 재단됐다. 최씨의 자살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기사에 붙은 수많은 댓글들 중에는 “자살은 개인적인 선택이다”, “질병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남으라는 건 산 사람들의 심리적 평안을 위한 이기적 행동”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극히 소수다. 다수의 댓글은 ‘어떤 경우든 생명존중’이라는 성직자의 강박과 ‘어떤 경우든 미화돼선 안 된다’는 예방의학자의 불안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어느 누가 자살행위 자체를 미화한다고, 어느 누가 생명존중 자체를 거부한다고 방금 떠난 생명의 등을 떠밀고 있는가.

‘생명존중’의 풍경이 이런 거라면 도대체 누구의 생명, 어떤 존중을 말하는 것인가?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인 목숨과 사회적 생명인 삶을 포괄해야 한다. 인간에게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자의 등 뒤에 내거는 생명존중의 구호는 삶을 거세한 생존에의 집착만 도드라진다. 이런 태도는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무감각하고 목숨을 끊어 놓는 행위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성폭행을 피해 투신자살한 소녀의 죽음에 성추행범의 책임이 없다는 경찰의 논리를 생각해 보라!) 그래서 자살자의 삶에 폭력을 가하면서까지 자살행위를 응징하는 데 집착한다. 이건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관념에 대한 물신숭배일 뿐이다. 생명이라는 관념을 절대화하면 생명 훼손에 대한 심판의 공포심은 증폭되고, 반사적으로 조금이라도 타인의 죽음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방어적 태도를 불러오기 쉽다. 이건 사실 타인의 삶은 애초에 관심이 없고 나의 생존에 대한 신경증적 불안만 있는 상태이다.

이런 심리상태는 생명이란 관념을 절대화해서 신의 권능에 의탁하면서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도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곳곳에서 그런 징후들이 보인다. 성폭행과 살인을 동시에 저지른 김길태는 저주하지만 정신지체 소녀를 16명의 청소년이 성폭행한 사실에는 무감각한 것, 파키스탄에서 자행된 간통녀에 대한 투석형의 잔인함에 분개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미군 무인비행기에 의한 살육의 교활함에 무덤덤한 것, 뇌도 없는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며 낙태를 불법화하면서 미혼모에 대해 인격살인이 저질러지는 현실의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암치료술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며 말기 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에는 관심이 없는 것. 진정 살아 있는 생명을, 삶을 존중한다면 어떻게 이런 부조리가 가능할까? 현대사회는 죽음의 문제가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손으로 넘어온 사회이다. 생명존중의 방법 또한 생존의 물신화에서 삶에 대한 존중으로 관심을 돌려나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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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본토 곳곳을 하얗게 물들이는 구절초.

제주에는 쑥부쟁이나 해국, 산국 등의 들국화는 많지만

구절초는 드물다. 지난 9월 29일 영실 바위 사이에서

몇 포기 확인되어 반가웠는데, 어제 갔던 한라생태숲에

한라구절초가 많이 복원되어 이렇게 환하게 꽃을 피웠다.


한라구절초는 국화과 여러해살이풀로서 한라산 해발 1,300m

이상에서 자란다. 산국과 감국에 비해 두상화가 크고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총포 편은 선형이다. 9월 9일 중앙절에

꽃이 피기 때문에 구절초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한라산에

자라는 구절초라 하여 한라구절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줄기 높이는 20㎝ 정도이고 지하경은 옆으로 뻗으며 번식한다.

잎은 호생하며 가늘게 깃 모양으로 갈라지고 육질이다. 꽃은

보통 흰색, 분홍색이며 두화는 가지가 갈라지는 화경 끝에

1개씩 피고 두상 화서의 지름은 5~6㎝이다. 9~10월에 피고,

결실기는 10~11월이다.



 

♧ 구절초 - 박상희


강물이 세월 따라 흐른다.

산이 강을 안고 흐른다.

강물이 하늘은 안고 흐른다.


강 언덕배기

가슴이 탈수록 안으로 파고들어

거울처럼 제몸 비춰가며

세월의 강바람에도

언덕배기 산기슭에 붙어

바들바들 하더니

한 생을 살기위해 얻어낸

온 우주의 모든 것을

스스로 다 받아 살아 왔구나.


가슴 조이던 시간은 가고

참아온 인내의 향기로

너 거기 있음을 알아

이제야 생각하니

너보다 긴 날을 살고도

한 호흡 향기 없는 내가 부끄러워

강물에 일렁이는 너를 본다.

물에 잠긴 세월을 흔들어 본다.

 



 

♧ 구절초를 바라보며 - 구재기

    --千房山에 오르다가·73


무녀巫女의 눈 밖으로 쫓겨난 꽃

하이얀 구절초를 바라보며

이 땅에도 하루가 소리 없이 지나갔음을 알았다


가을빛이란, 잔 솔가지 사이로 빠져나온 가을햇살이란

물레방아 바퀴에서 흐느끼며 물방울로 흐르던 千房山 물소리는 사라지고

어느 새 세상과 어울려 싸운 곳에는 흰 머리칼만 돋아났다.

人事는 잠잠히 오고 가는 산허리에 감돌고

코 끝에 향기로 묻어나는 것은 새털처럼 가비야운 한 점 웃음뿐


느닷없이 발등 위로 이름 모를 낙엽 하나 떨어졌다.

못 견딜 바람 사이로 千房山 해거름을 걷는데

처음으로 가는 허리에 돋아난 두 다리가 서러웠다

이따금 꺼져가는 햇살이 있는 듯 없는 듯

실상은 하잘 것 없는 세상의 외출조차 몰라야 했다.


잊어버린 생각이나 잃어버린 시간을 마련할 자리도 없이

끝내 슬퍼버린 머리칼을 말끔히 빗어 내렸다

모두가 제 자리에 들어 주위를 한 번 휘돌아볼 즈음

멀리 손 가는 데 없이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는데

저녁 냄새가 산 아래 마을에서 몰려왔다


이제 구태여 千房山 봉우리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좋았다

뜨거워지는 눈두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하이얀 구절초를 바라보면서

더욱 가까와진 하늘 저만큼

새소리랑, 멀리 산등성이에서 달려오는 산짐승 울음소리랑

巫女가 홀로 깨어있음을 알았다



 

♧ 구절초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라고 - 김명석


구절초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었던가

나는 네게 이야기하였지 피어야 한다고

구절초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었던가

나는 네게 이야기하였지 한 번 사는 인생이라고

구절초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었던가

나는 네게 이야기하였지 비어진 가슴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구절초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었던가

나는 네게 말을 하였지 구절초도 이제

지는 시간이 곧 돌아 올 것이라고.

 


 

♧ 구절초 꽃 - 홍윤표


산사에 소요(騷擾)가 일어나듯

다투어 앞으로만 걷는 너의 자태는

가을빛에 스승이 되었구나


가던 길 잃어 손을 놓은 그 아픔

유배라도 간 듯 옹기종기 시월의 하늘엔

운명을 여는 바람꽃이 피었구나


날카로운 외투 깃 세우고

산길 걸어 구만리 정상에 올라

목놓아 너를 부르니

귓전 가까이 들려오는

너의 의기소침한 신음소리는

가늘한 비밀을 남기었구나


지금도 영랑사에 내리는

옅은 햇살 속을 걷는 바람아

수줍은 얼굴 간지르는 생명의 꽃이 되었으랴


구절초, 나의 구절초 꽃

노랑배꼽을 내놓고 하늘을 보는

너의 순결은

수줍음 없는 자유의 혼이었구나.

 



 

♧ 구절초 엽서 - 이정자


먼 산 가까워지고 산구절초 피었습니다

지상의 꽃 피우던 나무는 제 열매를 맺는데

맺을 것 없는 사랑은 속절없습니다

가을 햇살은 단풍을 물들이고 단풍은 사람을 물들이는데

무엇 하나 붉게 물들여보지도 못한 생이 저물어 갑니다

쓸쓸하고 또 쓸쓸하여

찻물을 올려놓고 먼 산 바라기를 합니다

그대도 잘 있느냐고,

이 가을 잘 견디고 있느냐고

구절초 꽃잎에 부치지 못할 마음의 엽서 다시 씁니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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