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박종국(교사, 수필가)
임종을 앞둔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자기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구나. 명심하거라."
살면서 숱하게 겪었던 일이지만 우리들은 다만 강한 것에, 단단한 것에, 크고 값진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단단하기로 따지자면 사람의 끝없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집을 마련하거나 차를 살 때, 냉장고나 가전제품을 들여놓을 때, 먹을거리를 챙길 때도 작고 부드러운 것보다 크고 때깔 좋은 것에 먼저 손이 간다. 크고 단단한 것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녀 끝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평소에는 그토록 부드럽던 바람과 겸손하던 물도 어떤 힘을 받으면 그렇게 사납고 거셀 수가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부드러움이 능히 강한 것을 이겨낸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성정(性情)도 이와 같다. 항상 뜻을 세워 자기를 꼿꼿하게 내세우나,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면 극히 심약해서 풀꽃 하나 밟는데도 마음 조리는 보드라운 심성 갖고 있다. 그는, 외유내강(外柔內剛)하는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이 많이 시끄럽다. 강한 것만 좇아가는 현대문명이 결국엔 치유 불가능한 병마를 붙들고 애원하는 시대가 되었다. 서로 흘겨 뜯고, 더 나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아득바득대는 짓거리 또한 부질없는 양태만 빈발시킨다. 아름답게 사는 것, 참으로 좋은 향기를 나누며 정답게 사는 데는 남을 윽박지를 만큼의 강함을 필요치 않다.
일찍이 노자는,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나앉아 있는 것이 물이고, 가장 착한 것 또한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은 일정불변의 고정된 모습이 없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습을 하고,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난 모습을 한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곳에서는 수증기가 되고, 차가운 곳에서는 얼음이 된다. 이렇듯 물의 자기 고집이 없다. 강함을 앞세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내면의 부드러움으로 남의 뜻을 따른다.
다시 노(老)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에 대해서 스스로의 삶을 되짚어본다. 여태껏 하고자 했던 일, 애써 얻으려고 갈망했던 것에 대해서 따져본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게 한둘 아니다. 몇몇 사단들은 드러내놓기조차 부끄럽고 천박하기까지 하다. 항상 강한 것, 좋은 것, 편한 것만 최선인 것처럼 발발댔고, 작고, 보잘것없고 밋밋한 것에는 눈길조차 던지지 않았던 미천함에 얼굴이 붉어진다.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얼굴 붉혔던 일들이 많았을까?
사물을 대하는 데 태도를 부드럽게 가져야겠다. 사는 데 온유함을 배워야겠다. 항시 달콤한 맛에 길들여졌던 혀끝도 다독여야겠다. 맑은 물에 눈을 씻고, 부드러운 바람결에 귀를 후벼야겠다. 크고 값진 것에 매달리기보다 조그만 것이더라도 알뜰하게 챙겨 사는 따사로움으로 다시 서야겠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2010.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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