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 4. 수필의 특성(3)

(6) 수필은 해학성(諧謔性)과 비평정신(批評精神)이 높은 문학(文學)입니다.

수필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힘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이 냉철히 판단하는 비평정신이 있고,
미래를 향해 방향을 제시해 주는 유익한 지표도 담겨 있어야 합니다.
유머, 지혜와 위트, 비판정신을 함께 수용하는 수필이야말로 타 문학이 감히 능가할 수 없는
수필만의 영역이요 또한 본질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요즘 들어 수필에 있어서 '재미'를 많이 강조하는데
이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해학(諧謔)인 것입니다.
시나 소설이 '낯설게 하기'를 통해 독자를 끌어들이듯이 수필에서의 해학과 비평정신은 농축과
상징의 시나 상상력이란 이름으로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불러오는 소설의 맛에서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맛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수필의 문학성에서 품위있는 해학과 비평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문.5]
" 저 돼지 눈웃음을 치는 쌍판 좀 보게. 꼭 쥔(주인) 마누라 소싯적 같으네 그랴".
부실한 치아 때문에 입에 든 머리고기가 부담스러워 공들여 우물거리는 다른 노인과는 달리,
가장 기력이 있어 보이는 충청도 말씨의 노인이다.
말이야 짐짓 좌중에게 동의를 구하는 척 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려온 농지꺼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주모다.
" 앗따, 왜 조용한가 했더니 인제야 시작이구먼? 저 웬수```".
그러나 말과는 달리 주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 저걸 보라니께? 닮아두 쬐금만 닮은 게 아니구 아주 판에다 박았다니께".
다른 노인들의 얼굴에도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돈다.
" 저 돼지가 어떤 돼지인줄 알구 하는 소리유?"
" 어떤 돼진 어떤 돼지여. 홀애비 돼지길래 과부 집에 와서 선웃음 치고 있지 ```.
돼지두 당신처럼 과부라면 사죽을 못쓰는 줄 아는 가베?"
"저게 처녀 돼지라우. 처녀두 보통 처년가? 꼭 가둬 기른 숫처녀지```."
노인들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럴 듯도 하다고 동의하는 노인도 있었다.
- 강호형의 수필 <돼지가 웃은 이야기> 중에서


위의 수필에서 우리는 읽어가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박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 호쾌한 느낌을 주게 하는 해학성은 수필에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해학이 있는 수필은 독자에게 한껏 수필의 맛을 더욱 잘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요즘 수필이 너무 신변잡기적이고 너무 일상적이란 비판을 많이 듣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서 힘을 느끼게 하는 비평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수필에서 비평 정신이 너무 강해 버리면 오히려 수필의 맛을 떨어뜨리지만
적당한 비평이 들어있는 수필은 한결 작품을 생동감 있게 해 줍니다.


[예문.6]
트로이의 목마 앞에서 오딧세이의 장대한 서사시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에페소의 유적지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화려한 열정을 상상하기도 하다가
문득 유럽의 신화와 역사에 젖어있는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화를 읽기 전에 먼저 그리스의 신화를 읽어야 했던 학창시절이 회상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식민지 땅에 드리우고 있는 자조(自嘲)와 패배주의에 매몰된 채
도도한 서풍(西風)의 세례를 받아온 근대사의 유역(流域)을 반성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남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인 문화에 최대한으로 겸손한 자세로 다가갈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가난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곳에서 삶을 꾸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와 노력의 결정(結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교되거나 평가되기 이전에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쉽게 관여하려는 것은 오만과 무지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일구어온 인류의 귀중한 자산을 훼손하는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시원히 떠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 떠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과거를 짐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지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한 오만과 무지가 낳고 있는 안타까움입니다.
특히 세계화라는 도도한 이데올로기가 도처에 그 예봉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만날 때 더욱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지구촌의 시대로 단정하고 서둘러 세계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에 나서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숨막히는 산업사회의 질곡 속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하여 떠나온 관광객들의 경우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화 논리의 전령(傳令)이 되고 있거나 질곡의 외연(外延)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돌아옴(歸)입니다.
정직한 귀향이며 겸손한 만남입니다.
나 자신으로 돌아옴이며 타인 에 대한 겸손한 이해입니다.
이 정직한 귀향과 겸손한 이해가 없는 한 서로 다른 세계가 평화롭고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20세기의 아픈 과거를 떠나 새로운 세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 신영복의 수필 <바다 위의 하늘에서> 중에서


위의 글처럼 충분한 자기 비판과 비평이 있어도 수필로서의 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비판과 비평이 수필에선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비평 곧 자성(自省) 및 자조(自照)로
독자에게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필에서 해학(諧謔)과 비평(批評)은
우리가 오독오독 약간 뼈가 씹히는 고기를 먹는 맛처럼 수필의 맛을 더해 주게 되며,
독자는 이러한 맛을 상당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7) 수필은 완숙을 향해 나아가는 문학(文學)입니다.


수필은 무르익은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문학의 그릇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도달한 삶(인생)의 경지에 따라 수필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수필은 글이 곧 자신(삶과 인생)이므로 작가와 작품은 하나이며,
또 내용은 작가의 삶이요 체험으로 일체이며 동일시됩니다.

그렇기에 수필가의 품격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작가인 수필가가 품고있는 사상이나 그만의 인품 그리고 그가 지닌 유머와 위트가
수필에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만의 다양한 체험과 전문적인 지식, 인간애 등이 바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수필가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수필을 쓰고자 하면
먼저 이러한 품격을 갖추기 위해 부단한 인격의 도야와 훌륭한 인생연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수필을 만났다는 것은 곧 좋은 인간을 만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수필의 경지는 바로 인생의 경지를 뜻하게 되며,
인생의 성숙도 내지 완숙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문학이 수필입니다.
그러나 수필이 완성의 문학은 아닙니다.
인간이 완전해 질 수는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성숙하고 완숙되도록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그 나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기에
수필은 깨달으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구도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참고 글>에서 몽테뉴가
'나를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긴장도 기교도 없는 담백한 모습으로 보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고
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문학이 수필인 것입니다.


'리취'는 <문학형태의 연구>라는 그의 저서에서 에세이의 특질로 세가지를 들어 정의 했습니다.

(1) 작자가 강력하게 작품속에 들어가는 것,
(2) 산문으로 씌어지는 것,
(3) 반드시 예술적인 것 인데
이 중에서도 반드시 예술로서의 형태를 갖추어 독자의 상상력과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이것만이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기 위한 여지의 짧은 산문 저작물과 에세이를 구별하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뿐아니라 수필가는 시대적인 정서를 잘 파악하여
그 시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의 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귀로도 보아야 하고,
눈으로도 들어야 하며,
가슴으로, 마음으로 듣고 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늘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철학과 인생관과 비전과 사랑과 희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은
좋은 수필을 쓰는 전제 조건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바라보되 따스한 가슴을 열고 정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아가같은 맑은 눈으로 사실을 사실로, 진실을 진실로 바라보는 것은
수필가의 눈과 마음이 시인과 소설가와 비평가의 눈과 마음을
함께 가져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사랑의 쉼터 4050
글쓴이 : 정소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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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필의 개념


우리의 국어생활에서 듣기와 말하기가 주로 음성언어라고 한다면, 읽기와 쓰기는 문자언어가 된다. 또한 듣기와 읽기가 이해 의 측면이라면, 말하기와 쓰기는 표현의 측면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해의 영역인 듣기와 읽기가 수동적인 태도라면, 표현의 영역인 말하기와 쓰기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언어활동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이 네 가지 영역을 두루 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떠들고 말하는데 그것을 글로 써 보라면 주춤거리게 된다. 말은 재미있게 하는데 글로 쓰려면 전혀 절벽이다. 그러나 말이나 글이나 결국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글은 말보다 질서가 있고 논리가 있다는 것뿐이다. 글쓰기란 글로써 하는 '말하기'라 할 수 있다. 말에도 조리가 있어야 듣기 쉽듯, 쓰기도 순서만 지키면 아주 쉬운 것이다.

다만, 수필쓰기 전에 생각을 체계적으로 한번 정리해 보면 된다. 글쓰기에서의 사전정리, 그것을 작품구상이라고 한다. 시작-중간-끝 부분에 각기 무엇을 쓸 것인가, 설계도를 그리듯 간단 간단한 메모를 한 뒤에 집필을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줄기로 통일성 있게 얘기가 흘러내린다. 그러나, 사전준비를 하지 않고 시작하다 보면, 중간쯤 가서 쓸 것이 없어서 도중하차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물론, 세심한 관찰력, 넓은 통찰력, 날카로운 비판력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우선은 이웃집의 친한 친구와 얘기하듯이 평범하게 쓰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일상생활에서 극히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바람은 어디서 불어 오는가? 해와 달은 왜 뜨는가?' 등 일반 사물과 사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이 저절로 생겨난다.


일반적인 글쓰기란 무엇인가. 우선 그 개념적 성격부터 살펴보자.

첫째, 글이란 마음속에 가진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글은 말에 비하여 공간적으로 멀리 전달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 오래 남을 수 있으며, 내용을 재음미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생각을 재정리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등의 몇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글이 말보다 더욱 조리 있고 체계적일 수 있는 이유는 말은 즉시적인데 비해, 글은 통시적이다. 생각을 오랫동안 여과할 수가 있다. 말은 다만 의사전달을 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글은 글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초적인 글쓰기로서 '수필'은 바로 이러한 일반적인 글의 초보적 형태이다.

둘째,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글이 운문이 아닌 산문인 까닭은, 운문이 일정한 운율을 갖추어야 하는 조탁의 어려움이 있는 데 비해, 산문은 자유로운 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문의 기초는 수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필을 잘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함께 노력해 보자.

리드Herbert Reed는 그의 <영국 산문록>에서 수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심중에 잠재해 있는 관념이나, 기분-정서를 표현해 보는 것은 일종의 시도이다. 그것은 관념이나, 기분-정서 등과 상응하는 어떤 유형을 언어로써 창조하려고 하는 불형식(不形式-형식이 아니려고 하는)의 시도이다. 그것은 음악에 있어서 즉흥곡과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에 있어서 서정시가 차지하는 위치를 산문분야에서 차지하는 것이다. 수필은 한마디로 특정인에게 보낼 필요가 없는 하나의 공개장이다." 리드의 견해는 수필의 성격,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인 글쓰기의 성격을 함축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몽테뉴Montaigue도 그의 <수상록> 서문에서 말하기를 "이 수상록의 내용은 나 자신을 그린 것이다."고 하여 그는 그의 글쓰기에서 가장 자유스런 방법으로 단편적이고 산만하게 중얼거리고 있는데도 독자가 그의 독백에 자꾸 끌려간다. 바로 독자들은 자기 아닌 남의 얘기를, 그것도 산만하고 독백적인 형식으로 쓰여진 글을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수상록>은 자기실현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곧, 글쓰기의 가장 순수한 목적 즉, 자기의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몽테뉴의 이러한 독백이 바로 수필의 시작이 되었고, 성격이 되어버렸다.

위의 두 사람, 리드와 몽테뉴의 견해를 빌리면 작문은 형식과 내용에 제한이 없고, 무엇이든 소재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산문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에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친구에게 심정을 말하는 듯한 한편의 정성스런 글을 쓴다면 그것이 수필이 되는 것이다.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다. 이것이 수필의 운명이고 성격이다.


김진섭은 "한 시대나 한 세기의 소설, 시, 희곡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서 몇 가지로 분류하여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사조와 사회의식에 연결되어 발전·쇠퇴하는 특징을 가진 문학형식인 까닭이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성쇠기복이 시대적 제약에 의거한다고 간주한다기 보다 오히려, 생활단면에 부딪치는 까닭에 비교적 관련이 적게 자라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는 수필이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요컨대 효과적인 글짓기를 위해서 우리는 아무런 구속 없이 온몸에 비치는 사실들을 여과하여 자기 나름의 느낌과 생각을 조리 있게 만들면 그것은 비로소 하나의 생명을 지닌, 자기만의 냄새를 가진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생명이 있는 글을 쓰려고 한다면,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여 삶을 고뇌하고, 고독과 절망을 직시하는 데에서 귀중한 주제성을 솎아내야 한다. 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써야 한다.


습작기에는 때로, 원고지가 백지의 공포로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자기는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는 좌절감도 물론 있겠지만 그것보다 자기의 진정한 감정과 사상을 호소하기에 앞서 '언제나 나는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인가'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 명예욕보다는 마음을 텅 비우고 여유를 가질 때, 우리의 감정은 봄 날 언덕 위의 들꽃같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우리의 가슴에 만발하게 된다.

다음에서 수필과 다른 문학형태와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이것은 수필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기초적인 문장형태인 '수필'에서 숙달된 후, 그 다음 단계인 시, 소설, 평론 등의 전문 문학형태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비교 분석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4050Sophia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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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마음을 열면서] 행복한 시간이 되고 계십니까? /최원현

 

제2강. [마음을 열면서] 행복한 시간이 되고 계십니까?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날이 참 좋은 날입니다.
모래밭을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게 뭘까? 궁금했습니다.
해서 발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가봤습니다.
헌데 가까이 가자 반짝이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헌데 거기엔 깨진 유리병 조각이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망입니다.
그토록 찬란하고 강렬하게 빛을 내던 것이 겨우 유리 조각이라니요.
그런데 그 유리 조각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아주 작게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유리가 깨진 유리가루겠지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다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부분의 모래 한 줌을 손에 들고 좀더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은 사금(沙金), 금가루였습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무언가 호기심으로,
또는 커다란 기대로 이곳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여러분은 깨진 유리 조각의 실체 앞에서 실망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인내하며 강좌를 이해하려고 하신다면 틀림없이 금가루를 발견할 것입니다.
물론 그 사금가루는 금방 여러분의 가계 경제에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발견한 사금가루가 바로 수필이 되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금들을 모으면 여러분의 아름다운 목걸이도 반지도 팔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사금을 찾는 법, 그리고 그 사금가루가 여러분에게 소중한 무언가로 변화될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모으고 만드는 것은 바로 여러분 스스로의 몫입니다.
이 작업을 저와 같이 해 보시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가 맨 처음 무엇을 해볼까요?
먼저 수필(隨筆)이란 게 뭔지,
아니 그보다 먼저 문학(文學)이란 게 뭔지 부터 잠시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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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문학 그리고 수필문학


1.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 문학이란


수필을 쓰고자 하여 수필문학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전에
문학이 무엇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文學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기호로 이루어진 언어의 구조, 의미, 기능 등을 다루는 학문' 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특정한 분야를 연상하며,
사실 그것이 문학의 주류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아놀드(Matthew Arnold)는
'문학은 언어를 사용하여서 인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곧 문학이란
'언어라는 수단(도구)의 도움으로써 인생을 해석하고 표현하는데,
그것을 예술적 기교로써 표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예술적 기교가 바로 작가의 몫인 것입니다.

또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문학이 '사회현실의 반영이냐, 사회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냐'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문학작품의 내용을 두고도
'작가 개인적 견해인가, 작가가 속한 집단이나 계급의 견해이냐'에도 논쟁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수필을 쓰고자 하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독자의 자리에만 있던 내가 작가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만남이었던 것에서,
역으로 독자와의 만남을 '작가가 된 나를 통해 이룬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며,
나아가서는 그 언어를 독자가 좋아하게끔 맛있게 만들어 제공하는 만남
이를테면 '맛있게 먹는 일'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는 비정할 만큼 냉철합니다.
독자는 처음부터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며, 그렇기에 나를 좋게 보아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지의 독자에게 나를 알리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곧 문학은 내가 생산한 것을 소비해 주는 독자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순수문학'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작가 고유의 창작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작가가 살아있을 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의 장르가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 그 시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가 이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작품상에 문제가 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문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인 만큼 예술은 시대적 산물일 수 있음을 인정함이 옳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강의가 이루어지는 on line 이라는 새로운 세계(공간/환경)가 생긴 것입니다.
지역적이고 한정적이던 세계가 초지역적 초공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던 것,
체면이나 다른 사람의 이목을 생각하던 제약도 무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수많은 독자를 동시에 만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변화의 상황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기존의 텍스트적 답으로는 충분한 이해를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1년 3월말로 한국의 인터넷 이용인구가 2093만명(국민의 약 50%)을 돌파했다고 했습니다(2001.3.17.동아일보).
지금은 훨씬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문학을 언어로서만이 아니라 영상과 음향으로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문학이 단순히 문자 언어로서 독자를 찾던 시대가 아닌 만큼 문학에 대한 정의나 개념도 보완되고 재정립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 그런데 우리에게 왜 문학이 필요한 것일까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라는 존재를 나타내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쓰기는 아주 좋은 방법이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글쓰기는 항상 인간의 의식과 그것이 위치한 환경간의 긴장을 반영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충실하게 글로 묘사하기도 하고, 또 그 현실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학이 단순히 현실을 말하기보다
그 현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자신의 희망을 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충실히 반영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는 이가 많습니다.
문학이 현실에서의 삶을 가감 없이 반영하는 그 순간,
그 속에도 인간의 고통과 소망은 함께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시가 독자의 감각이나 감정에 호소하여 상상력을 자극함으로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소설은 현실적 문제를 허구로 구성해서 인간의 문제를 다루되,
그 허구의 세계를 현실적 환경처럼 인식시킴으로서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며,
수필은 현실적 체험적 내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 사실 개념에 충실하여,
과장하지 않고, 산문정신에 입각하여 쓰되,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켜 감동케 하여 이들 모두에게 인간의 고통과 소망이 함께 녹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학이란 결국 인간의 얘기인 것입니다.

문학이란 곧 인간의 얘기, 곧 내 이야기요,
내 이야기 같고, 내 이야기일 수 있는 얘기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히딩크의 자신감 ** 처음에 강의에 접하면 두려움도 생깁니다. 조금 힘들면 도중에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때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히딩크 감독은 감독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요소에 대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 믿음이 분명하고 강해야 합니다.
주어진 목표를 향해 매진(proceed)할 수 있는 추진력입니다.
물론 전제(前提)가 있습니다. 마땅히 감독은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하는 말들을 모두 성실하게 귀담아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감독은 소신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수필을 쓰고자 하는 여러분 각자는 바로 자신들의 감독입니다.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하찮은 것들도 하찮게 생각지 않는 열려있는 생각,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참고사항입니다.
작가는 자기 소신을 갖고 이것들을 재창조하는 사람임을 명심하십시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30여 년 전, 내 집이랍시고 지었는데, 지인이 과꽃 씨앗을

선물하였다. 이후 2~3년 동안 우리 화단을 장식해준 과꽃.

그 동안 흔히 볼 수 없었는데, 카메라를 든 내 앞에 올레

제1코스 출발점 시흥초등학교에서 좀 늦었지만 반갑게

조우했다. "올해도 과아꽃이 피었습니다아."


어제는 문학기행으로 비가 내리는 중에도 이덕구 산전을 

찾았는데, 방향을 조금 삐끗하게 잡아 한동안 헤매였다.

전에는 혼자서도 자주 찾아 그런 일은 없었는데, 지금은

리본도 없어졌고, 길도 불분명해져 찾는 사람들이 헷갈

리는 경우가 많겠다. 같이 간 사람에게 많이 미안했다.


과꽃은 국화과의 한해살이풀로 높이는 30~10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피침 모양으로 거친 톱니가 있다. 7~9월에

남색·붉은색·흰색 따위의 큰 꽃이 피는데, 관상용으로

원예 품종이 많다. 한랭한 지방의 산지에 난다.



 

♧ 과꽃 - 함동선


옛날 아주 옛날 백두산 기슭에는

추금秋錦이라는 이쁜 과수댁이 살았네

남편이 아끼던 꽃을 가꾸며

어린 아들과 함께이었네

그러던 어느 날

중매장이의 재혼 권유로

마음이 흔들렸는지

꿈에

남편이 나타났네

그 꿈속에 몇 년을 살았을까

하루는

바위에 핀 꽃을 꺾다가 떨어지는 남편을 보고

잠을 깨 밖으로 나가봤더니

가꾸던 흰 꽃이 달빛을 받아

분홍빛으로 물이 들었네

그 후 추금은

그 꽃을 보면서 수절을 했으니

마을 사람들은

그 꽃을 과꽃이라 불렀네

 



 

♧ 과꽃 - 김윤현


일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란

평생 할 수 있는 것보다 적지 않다

꽃을 피웠다가 지우고 씨를 맺고서는

몸을 말려 땅 속으로 마감하는 삶이란

일 년이면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일 년이 너무 짧다고 아쉬워한다면

백 년은 미련이 없는 세월이겠느냐

백 년의 웃음이 가져올 울음보다는

일 년의 울음이 맺어놓을 웃음으로

빨강 하양 자주의 꽃을 피운다


 

♧ 과꽃 - 槿岩 유응교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사랑이 걱정이에요.

나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보다 깊어요.


 

나를 사랑한다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를

반복하면서

우리 함께

꽃잎을 떼어 내봐요.

그러면 당신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의

사랑이 걱정이다

나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보다도 깊다며

사랑하는 사이엔

근심과 걱정이 그치질 않아요.

언제나 그 사랑 고귀하기에

누군가에게 빼앗길까봐 안달이 나죠.


그러나

제 꽃잎 수만큼

하루에도 몇번씩

사랑해 사랑해를

반복 하시면 그대의 사랑은

그대로 지켜 질 거예요.



 

♧ 과꽃 - 김용언

  

촌 아낙을 닮은 과꽃 씨앗을 마당 한 구석에 심는다

색깔도 어눌한 토종꽃.

서양꽃이 판치는 꽃밭에서도 설 땅을 부여받는다.

향수 한 자락에 뿌리를 내린 인연(因緣)이 있어 줄 없이 버티지 못하는 세상에도 버젓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칠거지악을 범해도 면죄부가 있는 듯 당당하다.


투박한 얼굴과 허리 굵은 모양새는 오십 줄에 들어선 아내의 모습이다.

박토에 뿌리를 굳건히 내려

아이 둘을 무사히 키워낸 내 아내를 쏙 빼닮았다

화려하고 향 좋은 꽃에 눈길을 빼앗기다가도

일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아내의 사랑 높이가 떠올라

해마다 마당 한 구석을 또 내준다.

눈부신 꽃도 식상이 나는 판에

당당한 권리를 누리는 뒷 배경

아마도 아주 높은 곳에 있는가 보다

 



 

♧ 과꽃 - 강세화

    

처서(處暑) 지나고

과꽃이 뜰을 채우고 있다

지조(志操) 지켜 피는 꽃을

초가을 햇볕이 떠받들고 있다

마음은 선선히 살찌면서 시름이 만만하여

아무래도 엇나가는 조짐이 찬란하다

 

부수고 몰아내고 밀어붙여서

이대로 살맛나는 실명(實名)세상이 올지

저간의 환호성이 아련한 곁에서

과꽃이 피어있는 뜰을 바라보며

이래 저래 지꺼분해도 카프카즈 갈 수 없는 몸은

반반한 얼굴이 부끄럽지 않은

꽃 한 송이에 반해서

생각을 누르며 마땅히 서 있다

 

처서 지나 껑충해 진 기운이

뜰을 채우고

내 마음을 채우고

수없이 배반(背反)하고 돌아서면 다시보는 안마당에

그나마 마음 둘 데는 있어야 할까부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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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모처럼 한라수목원에 갔다가 이 꽃무릇을 만났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 한다는 상사화(相思花)와

같은 과에 속하는 꽃이다. 흔히 비늘줄기를 한약으로 쓰는데,

그 이름이 석산이란다. 오늘은 오랜만에 오름 1~2기 출신들과

오름에 다녀와 오후에는 박물관대학에서 오름 강의를, 끝난

뒤에는 친척집 잔치에 다녀온 바쁜 하루였다.


꽃무릇은 석산(石蒜)이라고도 하는 수선화과에 딸린 여러해

살이풀이다. 일본 원산이며 산기슭이나 습한 땅에서 무리지

어 자란다. 절 근처에서 흔히 심는다. 꽃줄기의 높이는 약

30~50 센티미터이다. 잎은 길이 30~40cm, 너비 1.5cm 정도로

길쭉하며 10월에 나왔다가 다음해 5월에 사라진다.


잎이 떨어진 9월에 산형꽃차례에 붉은 꽃이 피는데, 꽃덮이

는 여섯 조각으로 거꾸로 된, 얇은 바소꼴이고 뒤로 말린다.

수술은 6개이고 길이 7~8 센티미터로 꽃 밖으로 나오며 암

술은 한 개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은 쓰러지며 그 뒤에

잎이 나오며, 비늘줄기(인경)로 번식한다. 비늘줄기의 한약명

이 석산(石蒜)이다. 해독 작용이 있다고 한다.(위키백과)

 



 

♧ 꽃무릇 - 박종영


꽃무릇 너,

상사화 흉내 내듯

온통 붉은 울음으로 그리움이다


그냥 임을 가늠하고 솟아올라도

꽃대는 푸른 잎 감추고 너를 이별하고,


네 생애 단 한 번도

찬란한 얼굴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슬픔으로

붉은 눈물 뚝뚝,

지상에 흩뿌려 한이 되것다


오늘도 강산은 핏빛이네,


하늘빛 싸리꽃 너머

흔들리는 억새 춤을

불타는 네 가슴에 안겨주랴?



 

♧ 꽃무릇 - 이계윤


전남 함평군

해보면 모악산 기슭

용천사엔


꽃무릇  상사병 들 뜬 사람들

가슴속 찌든 때

노래로 녹여내며


너도 나도

우리 모두

꽃으로 피자고


꽃이랑 같이 하늘 쳐다보며

한사코 꽃같이

웃고 서 있네


찰칵! 그 찰나에

 


 

 

♧ 꽃무릇 - (宵火)고은영


내 가슴에 그대가 심기 운 날부터

몽환에 이른 서늘한 달빛에 넋을 태우다

망각의 강도 건너지 못하고

안개 덩굴로 정적을 여는 숲

다홍 빛 기다림으로 서있었다


나는 그대를 만날 수 없는가

정녕 가벼운 눈인사조차 허락되지 않는

충일한 고독으로 홀로서면

사랑은 나를 모른다 도리질했다

사랑의 조건은 영원한 이별로 밖에

설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지극한 형벌인가


그대를 구애하면서도

천년이고 만년이고 어긋난 길로

지나쳐야만 했던 운명 속에

세속도 모르고 살았건 만

나의 눈물은 기화(氣化) 되어

사뿐히 하늘 위를 날다가

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지나는 바람에 그리움을 물었다



 

♧ 꽃무릇 피는 산사(山寺)에서 - 김정호


물비늘 같은 푸른 안개

산부리를 덮을 때

깊은 산사(山寺) 법고(法鼓) 소리 들려오면

소녀의 초경처럼 피어오르는

저 꽃들의 현란한 탄생

저렇게 붉은 함성이

깃발처럼 일어선 자리아래

푸른 향기 가녀린 잎으로 일어선다


이승의 사랑조차 죄가 되어

하늘 끝에 사무치다

꽃으로 다시 태어나도

눈빛 한 번 맞출 수 없는 운명

남 몰래 꽃눈물 번지는 가슴앓이

다음 세상에는 이런 어긋난 사랑도

거슬러 올라가는 강물의 숙명처럼

그대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 때에는 숲 속에 바람 집을 짓고

네사랑 

목숨처럼 지켜주고 싶다

 



 

♧ 꽃무릇 - 안수동


잡은 손 놓으신 날

끈 끊어진 연鳶이 되고서야

저도 어미가 되더이다

어머니


당신을 여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통한이 되고서야

살가운 딸이 되더이다

어머니


당신 가신 꽃자리에

이슬로 고인 녹색 그리움을 마시며

상사화는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바람도 볼 수 없는 설움에

꽃잎만 마냥 흔드는데


갈래

갈래로 찢어진 갈래꽃

꽃무릇이여

불효한 여식의 삼베 적삼을

피빛으로 물들인

사모의 꽃이여.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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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지내러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작은 딸을 공항에

데려다 주고 오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양

배추와 브로콜리 묘종을 심어 놓고, 물주기에 바빴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니, 좀 불편하

긴 해도 그런대로 위안이 된다.


어제 결혼식 피로연에 가다 골목길에서 본 분꽃이 생각

나 저녁 5시 정도에 비가 그치면 그걸 찍어볼 요량으로

작정을 했는데, 3시가 되어 언제 비가 왔는가 싶게 말짱

하다. 언젠가 겨울이 다 된 시기에 그 골목에서 분꽃을

찍은 적이 있는데, 한 포기가 이건 숫제 나무 수준이다.


 

어떻게나 많은 꽃을 피웠는지 셀 수도 없다. 다만 붉은

빛을 띤 작은 가지는 꽃 핀 것이 없고, 곳곳에 탈색된 흰꽃,

약간 붉은 빛을 띤 거 외에는 온통 노랑꽃의 향연이다.

추석과 추분이 지나도 아직 그 위세를 조금도 누그러뜨

리지 않았다.


분꽃은 분꽃과의 한해살이풀로 높이는 60cm 정도이고

줄기에는 마디가 뚜렷하며, 잎은 마주나고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이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흰색, 빨간색,

노란색의 깔때기 모양의 꽃이 해 질 무렵부터 아침까지

핀다. 관상용이고 열대 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 노란 분꽃 - 목필균


분꽃이 피었다

아침 출근길에

노란 나팔소리가 난다


햇빛을 모으는 나팔소리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의성어들

뚜뚜뜨---뚜뚜뜨---

유년의 뜨락에

곱게 접혀있던 향기까지

소리로 진동한다


바람처럼 쓸려간 소리들

분꽃이 필 때마다

환청으로 들린다


한 시절을 접던 가슴앓이들

뽀얀 속살 감추려고

그렇게 밖으로만 귀를 열다가

가슴에 까만 씨알을 박는다


 

♧ 분꽃 - 김형술


우물 속엔 정적만 서늘히 고여 있을 뿐

누이는 없었다

들먹이던 여린 어깨 위로

뭉텅뭉텅 잘려 흩어지던

풀 내나는 머리카락 한 올 조차도

 

자꾸만 미끌어지는 발걸음을 이끌고

논두렁 따라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서낭당 삼신 할매의 집, 산 아래

굴 속 같은 상여집도 들여다봤지만

목철 깊은 황소만 우렁우렁 울며

노을과 함께 산을 내려오고

이른 잠든 강을 따라 붉은 길

한 줄기

봄과 함께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그해 여름 감나무는 해걸음을 하고

누이를 찾아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아침잠에 지각을 하는 날이면

혼자뿐인 하교길 신작로에서

자꾸만 땀에 절은 고무신을 벗겨가던

낯선 소문들

 

 

언청이 아이를 낳았다고도 하고

도회지 선술집에서 보았다고도 하고

나루터 둔덕 아래 풀꽃를 꺾어 앉아

세초럼히 웃더라는 바람같은 소문이

장마통 물살에도 씻겨지지 않고

도둑고양이처럼 온동네 담을 넘어다녀서

 

오래토록 우물가에 가지 않았다

가슴 열어 순결함 보여줄 수 없으니

차라리 우물 속에 몸을 던지리라던

칼날처럼 시퍼런 누이의 비명소리가

한밤중 등줄기를 타고내리며

선잠 속 가위를 누르곤 하여

우물가를 지나칠 때면 언제나

귀머거리 장님이 되고 싶었던

불더미 여름

 

그 여름도 다 갈 무렵

누이보다 아버지 소식을 더 기다리던 어느 날

무심히 지나치던 우물가에

누군가 와서 앉아 있었다

 

솜털 송송한 귓볼을 붉히며

녹두색 치마깃 여며 돌아보다

연분홍 저고리 고름으로도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 감추지 못한 채

야윈 목덜미 가누며

웃을 듯 말 듯 꽃으로 피어


 

♧ 분꽃 - 박순옥


햇빛에 몸사리던

작은 저녁 종

어김없이 활짝 열어젖힌

진분홍


꽃술을 늘어뜨려

귀에 걸고 목에 꿰고

화관도 만들다

부엌에선 어머니의 도마질

간 맞추다 맛보는 나물무침


지금

내 아이에게

날 오이 한 조각 베어주며

어디선가 피어나는

지분脂粉 내음



 

♧ 분꽃이 피었다 -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 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 분꽃 씨를 받으며 - 서재남

 

수류탄을 조그맣게 축소해놓은 것 같은

까만 분꽃 씨를 받으며, 이 아침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의 어린 고아를 생각한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죽기 살기로

이스라엘 탱크를 쫓아가며 돌을 던지던

그 어린 소년의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던

눈빛을 떠올린다.


지난 봄 개울 둔덕에 하나 둘 풀들이 돋아나던 날

열아홉 살 형은 인티파타의 위대한 전사답게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을 적진으로 몰고 가

철 이른 분꽃이 되어 장렬히 타올랐다

그 다음날 친구들과 탄피를 주워 집으로 오다가

적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걸 보았다.


 

아비와 어메는 친구들의 아비와 어메들처럼

무너진 집더미에 깔려서 죽었다

그 후로도 형들은 자원하여 그들의 길을 갔다

부서진 마을에선 그래도 날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시궁창 가에도 분꽃들은 여름내 피었을 것이다

소년의 팔뚝처럼 단단하게 열매를 굳히고 있었을 것이다.


아, 어쩌면 분꽃 씨는

그 소년이 돌멩이 대신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수류탄을 이리도 쏙 빼닮았을까.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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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쓰는 유서 / 법정 스님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 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해와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의 자연을 되찾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자연뿐임을 아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한다.
그것은 삶에 새로운 향기와
빛을 부여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자신을 정신적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우고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 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서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분명하게 가릴 줄 안다.
문명이 만들어낸 온갖 제품을 사용하면서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머지않아 늦가을 서릿바람에
저토록 무성한 나뭇잎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빈 가지에 때가 오면
또다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 스님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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