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지내러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작은 딸을 공항에

데려다 주고 오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양

배추와 브로콜리 묘종을 심어 놓고, 물주기에 바빴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니, 좀 불편하

긴 해도 그런대로 위안이 된다.


어제 결혼식 피로연에 가다 골목길에서 본 분꽃이 생각

나 저녁 5시 정도에 비가 그치면 그걸 찍어볼 요량으로

작정을 했는데, 3시가 되어 언제 비가 왔는가 싶게 말짱

하다. 언젠가 겨울이 다 된 시기에 그 골목에서 분꽃을

찍은 적이 있는데, 한 포기가 이건 숫제 나무 수준이다.


 

어떻게나 많은 꽃을 피웠는지 셀 수도 없다. 다만 붉은

빛을 띤 작은 가지는 꽃 핀 것이 없고, 곳곳에 탈색된 흰꽃,

약간 붉은 빛을 띤 거 외에는 온통 노랑꽃의 향연이다.

추석과 추분이 지나도 아직 그 위세를 조금도 누그러뜨

리지 않았다.


분꽃은 분꽃과의 한해살이풀로 높이는 60cm 정도이고

줄기에는 마디가 뚜렷하며, 잎은 마주나고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이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흰색, 빨간색,

노란색의 깔때기 모양의 꽃이 해 질 무렵부터 아침까지

핀다. 관상용이고 열대 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 노란 분꽃 - 목필균


분꽃이 피었다

아침 출근길에

노란 나팔소리가 난다


햇빛을 모으는 나팔소리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의성어들

뚜뚜뜨---뚜뚜뜨---

유년의 뜨락에

곱게 접혀있던 향기까지

소리로 진동한다


바람처럼 쓸려간 소리들

분꽃이 필 때마다

환청으로 들린다


한 시절을 접던 가슴앓이들

뽀얀 속살 감추려고

그렇게 밖으로만 귀를 열다가

가슴에 까만 씨알을 박는다


 

♧ 분꽃 - 김형술


우물 속엔 정적만 서늘히 고여 있을 뿐

누이는 없었다

들먹이던 여린 어깨 위로

뭉텅뭉텅 잘려 흩어지던

풀 내나는 머리카락 한 올 조차도

 

자꾸만 미끌어지는 발걸음을 이끌고

논두렁 따라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서낭당 삼신 할매의 집, 산 아래

굴 속 같은 상여집도 들여다봤지만

목철 깊은 황소만 우렁우렁 울며

노을과 함께 산을 내려오고

이른 잠든 강을 따라 붉은 길

한 줄기

봄과 함께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그해 여름 감나무는 해걸음을 하고

누이를 찾아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아침잠에 지각을 하는 날이면

혼자뿐인 하교길 신작로에서

자꾸만 땀에 절은 고무신을 벗겨가던

낯선 소문들

 

 

언청이 아이를 낳았다고도 하고

도회지 선술집에서 보았다고도 하고

나루터 둔덕 아래 풀꽃를 꺾어 앉아

세초럼히 웃더라는 바람같은 소문이

장마통 물살에도 씻겨지지 않고

도둑고양이처럼 온동네 담을 넘어다녀서

 

오래토록 우물가에 가지 않았다

가슴 열어 순결함 보여줄 수 없으니

차라리 우물 속에 몸을 던지리라던

칼날처럼 시퍼런 누이의 비명소리가

한밤중 등줄기를 타고내리며

선잠 속 가위를 누르곤 하여

우물가를 지나칠 때면 언제나

귀머거리 장님이 되고 싶었던

불더미 여름

 

그 여름도 다 갈 무렵

누이보다 아버지 소식을 더 기다리던 어느 날

무심히 지나치던 우물가에

누군가 와서 앉아 있었다

 

솜털 송송한 귓볼을 붉히며

녹두색 치마깃 여며 돌아보다

연분홍 저고리 고름으로도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 감추지 못한 채

야윈 목덜미 가누며

웃을 듯 말 듯 꽃으로 피어


 

♧ 분꽃 - 박순옥


햇빛에 몸사리던

작은 저녁 종

어김없이 활짝 열어젖힌

진분홍


꽃술을 늘어뜨려

귀에 걸고 목에 꿰고

화관도 만들다

부엌에선 어머니의 도마질

간 맞추다 맛보는 나물무침


지금

내 아이에게

날 오이 한 조각 베어주며

어디선가 피어나는

지분脂粉 내음



 

♧ 분꽃이 피었다 -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 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 분꽃 씨를 받으며 - 서재남

 

수류탄을 조그맣게 축소해놓은 것 같은

까만 분꽃 씨를 받으며, 이 아침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의 어린 고아를 생각한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죽기 살기로

이스라엘 탱크를 쫓아가며 돌을 던지던

그 어린 소년의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던

눈빛을 떠올린다.


지난 봄 개울 둔덕에 하나 둘 풀들이 돋아나던 날

열아홉 살 형은 인티파타의 위대한 전사답게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을 적진으로 몰고 가

철 이른 분꽃이 되어 장렬히 타올랐다

그 다음날 친구들과 탄피를 주워 집으로 오다가

적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걸 보았다.


 

아비와 어메는 친구들의 아비와 어메들처럼

무너진 집더미에 깔려서 죽었다

그 후로도 형들은 자원하여 그들의 길을 갔다

부서진 마을에선 그래도 날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시궁창 가에도 분꽃들은 여름내 피었을 것이다

소년의 팔뚝처럼 단단하게 열매를 굳히고 있었을 것이다.


아, 어쩌면 분꽃 씨는

그 소년이 돌멩이 대신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수류탄을 이리도 쏙 빼닮았을까.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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