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모습

무소유


"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 있을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낸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 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는 매미들이 있는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어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 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僧家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리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러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 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1971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1978년 12월 15일 인쇄된 법정스님 수상록입니다.

오랜시간이 지나 책장이 누렇게 바랬지만 

가끔씩 한편한편 읽어봅니다.

32년이나 된 책이라서 한번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법정수상록 차례입니다.

 

 

 

첫 단락입니다.

 

115페이지에 있는 무소유의 글입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글을 읽을수 있를겁니다.

 

 

 

맨 뒤페이지입니다.

마지막 글은 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입니다.

책 어린왕자를 많이 좋아하셨네요.

 

저자 약력이 쓰여져있네요.

 

이때는 집현전에서 펴냈군요.

 

오래된 책이지만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무소유라고 하지만 소유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소유하면서 뒤져보고 있습니다.

이놈의 집착 이놈의 욕심 이제 버리고 비울수 있는

삶의 나이가 된것도 같은데요..................................

 

이 세상 삶을 조금만 더 함께하셨으면........................... 

 

 

 

 

 

 

 

출처 : 동부민요
글쓴이 : 대평리 원글보기
메모 :

1978년 12월 15일 인쇄된 법정스님 수상록입니다.

오랜시간이 지나 책장이 누렇게 바랬지만 

가끔씩 한편한편 읽어봅니다.

32년이나 된 책이라서 한번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법정수상록 차례입니다.

 

 

 

첫 단락입니다.

 

115페이지에 있는 무소유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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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글은 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입니다.

책 어린왕자를 많이 좋아하셨네요.

 

저자 약력이 쓰여져있네요.

 

이때는 집현전에서 펴냈군요.

 

오래된 책이지만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무소유라고 하지만 소유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소유하면서 뒤져보고 있습니다.

이놈의 집착 이놈의 욕심 이제 버리고 비울수 있는

삶의 나이가 된것도 같은데요..................................

 

이 세상 삶을 조금만 더 함께하셨으면........................... 

 

 

 

 

 

 

 

출처 : 동부민요
글쓴이 : 대평리 원글보기
메모 :

법정 스님은 어떤 책에 감동하고 또 사랑했나

 

[서평]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속 <닥터 노먼 베쑨>

 

10.06.01 15:01 ㅣ최종 업데이트 10.06.01 15:01 김현자 (ananhj)

법정 스님은 <버리고 떠나기>에서 이렇게 썼다.

"<닥터 노먼 베쑨>은 이른바 실명 소설인데, 한 의학도의 희생적인 인간애가 수행자인 나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한다. 의학도라면 <소설 동의보감>과 함께 꼭 읽어둬야 할 책이다."

 

그리고 책 뒤표지의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요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닥터 노먼 베쑨>을 읽어보라고 한다. 자신의 직업에 투철한 사명감과 열정을 쏟고 있는 주인공의 삶이 전류처럼 우리 가슴속에 전해 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현재의 삶에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중에서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겉그림
ⓒ 문학의 숲
법정스님

그저 책으로 만났을 뿐인데 이따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노먼 베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노먼 베쑨의 존재도, 그의 삶을 쓴 <닥터 노먼 베쑨>이란 책이 있다는 것도 법정 스님의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마도 2003년? 그때부터 가끔 큰 의사 노먼 베쑨의 숭고한 삶의 궤적들이 떠오르곤 한다.

 

노먼 베쑨(1890.3~1939.11)은 할아버지를 따라 의대에 입학한 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번다. 그는 24세 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프랑스로 가는데, 이때의 그에게는 전쟁에 대한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처참해진 프랑스에서 전쟁은 학살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부상을 당해 귀환하나 다시 영국으로 가 군인이 된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대를 전쟁과 함께 보낸 그는 기회의 땅 미국 디트로테이트에서 첫 개인병원을 열게 된다. 그런데 가장 붐빈다는 이유만으로 터를 잡은 그곳은 알고 보니 홍등가의 중심지였고 환자들 대부분은 가난 때문에 제때 치료하지 못해 나빠 질대로 나빠진 상태였다. 그는 가난한 환자들의 차트에 병명을 '폐결핵'으로 써야 할지, '가난'으로 써야 할지 고민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밤,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베쑨의 집 문을 두드린다. 아내가 산고를 겪고 있는데 분만을 도와줄 의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베쑨을 시 외곽에 버려진 박스카로 안내했다. 그제야 사내가 분만을 도와줄 의사를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베쑨은 영양실조에 걸린 산모에게서 아주 작고 쭈글쭈글한 갓난애를 받아냈다. 아이는 한 달이 못가서 죽을 것이었다. '신성한 의술? 이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인가? 이 남자에게는 불운한 자식의 생사보다도 주급 20달러의 일자리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인술이라? 거 참 말이 좋군. 그 사기꾼들은 자신의 편안한 잠을 위해서 박스카에 사는 남자의 간청을 거부하지 않은가?' 베쑨은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 의사들을 향해 거침없는 말을 내뱉는다. - 책속에서

 

모든 사람은 건강할 권리가 있다

 

이 무렵 그의 병원은 성공한 한 개업의의 도움 덕분에 성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치료하던 지난날과 달리 부자들만을 상대하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며 부자들에게서 받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던 터였다. 이런 중에 이처럼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받지 못한 산모를 만나게 되고 이후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더욱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치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그의 병명은 폐결핵. 당시 결핵은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환자는 하루하루 죽을 날만 세는 수밖에 없었다. 베쑨은 아내에게 이혼을 통지하고 결핵 환자들이 모여 있는 트뤼도 요양소로 들어가지만, 요양소의 규칙을 무시하고 자유분방하게 지낸다. 그러던 중 도서실에서 <폐결핵 수술>이란 책을 보게 된다. 책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수 있는 인공기흉술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때 의사들이 외과 수술을 기피하기 때문에 결핵환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간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수술을 의뢰한다.

 

문득 그는 결핵 치료술이 발달했는데도 결핵 환자의 발병률이 전혀 줄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 이유를 끈덕지게 파고들었고, 세계를 집어 삼키고 있는 또 하나의 질병, 결핵균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중세의 콜레라보다도 훨씬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질병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가난'이라는 질병이었다. 그는 좌절했다. 차라리 매스를 집어 던지고 거리로 뛰쳐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을 외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국의 대공황이 세계를 휩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모든 사람은 건강할 권리가 있다.' 베쑨은 이익을 따지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치료하는 일하는 의료 공동체를 구상했다. - 책속에서

 

그의 나이 37세, 당시만 해도 폐결핵 치료를 위해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인공기흉술로 살아난 그의 관심은 오로지 폐결핵. 수술 덕분에 회복한 그는 흉부외과으로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1936년에 스페인 내란이 일어난다. 그는 캐나다 국민이 모금한 기금을 지원받는 스페인 파견 의료지원단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스페인으로 가게 된다.

 

그에게 있어 스페인행은 흉부외과의사로 7년 동안 결핵과 싸워온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폭격당한 스페인의 참상에 분노한다. 그리고 병사들을 치료하던 중 현대전의 의료체제가 가진 중대한 결점을 발견한다. 부상당한 병사들이 이송하는 과정에 더욱 악화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 그는 이동수혈대를 조직하여 전쟁터에서 수혈을 함으로써 수많은 병사들을 살린다.

 

11월, 그는 수술 중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빨리 후퇴하라는 보고를 받고도 최후의 순간까지 수술을 감행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아주 작은 상처였지만 얼마 뒤 그는 쓰러졌다. 패혈증이었다. 감염 부위가 이마까지 번져 있었다.…1939년 11월 13일.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죽음이었다. 세균이든 사회체제든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좀먹는 것이라면 온몸으로 맞섰던 휴머니스트 노먼 베쑨. 그가 거쳐 간 마을 구석구석마다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오늘날 그는 모택동, 주은래, 에드거 스노우와 함께 중국 근대사의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모택동은 그의 동료들에게 "우리는 한 인간의 서거 이상의 것을 통곡합니다"라고 말했다. - 책속에서

 

   
<닥터 노먼 베쑨>겉그림
ⓒ 실천문학사
법정 스님

<닥터 노먼 베쑨>(실천문학사)은 패혈증으로 쓰러진 그가 들것에 실려 중국 북부 하북성 어느 좁은 골짜기를 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사들을 위해 갖은 고생을 겪었기 때문일까, 책은 40대인 그를 70대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렇게 시작한 책은 그의 숭고하고 지난한 삶의 궤적들을 들려준다.

 

책도 두껍고(600여 페이지), 이 책을 읽던 2003년 당시 가게를 하고 있었던지라 한 달 가까이 틈틈이 읽었는데, 책을 읽는 동안 노먼 베쑨으로 인한 분분한 감동들이 일렁였다. 여하간 책을 통해 만난 노먼 베쑨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돌아보게 했다.

 

그때 내 아이들은 어렸다. 선택했다. '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그리고 얼마 전, 청소년인 두 아이에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허삼관 매혈기>와 함께 <닥터 노먼 베쑨>을 권했다. 노먼 베쑨의 이념과 국경을 초월한 따뜻한 인류애를, 그의 따뜻한 가슴을 우리 아이들이 꼭 알기를 바라며.

 

법정 스님이 추천하는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50권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기 전,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 숲 펴냄)을 통해 <닥터 노먼 베쑨>을 간략하게나마 다시 만났다. 법정 스님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강한 감동의 첫인상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이다. <닥터 노먼 베쑨>뿐일까.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에는 내 아이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책들과 다시 읽고 싶은 책 등, 꽤나 가치 있는 책들이 50권이나 소개돼 있다.

 

장 지오노-<나무를 심은 사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윌든>, 프랑수아 를로르-<꾸뻬씨의 행복>, 생 떽쥐베리-<인간의 대지>, 사티쉬 쿠마르-<끝없는 여정>, 장 지글러-<왜 세셰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다산 정약용-<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조안 말루프-<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피터 톰킨스·크리스토퍼 버드-<식물의 정신세계>, 제인 구달-<희망의 이유>, 김태정-<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가지> 등등.

 

지금처럼 인터넷 정보가 많지 않았던 2000년 이전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언급되고 있는 책을 찾아 읽곤 했다. 지난날 법정 스님의 수필집을 참 많이 읽었던지라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은 거의 낯익다. 그래도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많다. 노먼 베쑨과 함께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제인 구달이다. 2006년쯤, 법정 스님의 글을 통해 '장 지오노-<나무를 심은 사람>을 다시 읽으며 예전보다 한층 깊은 감동을 느꼈던 기억도 떠오른다.

 

우리는 여기에 50권의 책을 골라 실었지만, 선정 작업도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대상이 된 책도 3백 여 권에 달했다. 그만큼 법정 스님의 독서의 폭은 매우 넓었다. 인류의 정신사를 수놓은 다양한 종교의 경전들, 고전이 된 동서고금의 문학작품들, 파괴와 착취를 향해 질주해 가는 이 시대의 종말을 경고하는 의식 있는 환경 서적들, 이미 절판이 되었으나 다시 출간되어야만 할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 속에서 우리는 아쉽지만 지면의 한계상 50권을 추려 낼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획은 단순히 '법정 스님이 읽어 온 책들은 어떤 책들일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삶,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며 그 기준과 방향을 정하는데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하는가? 로 그 주제가 확장되었다. -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책을 엮고 나서' 중

 

<닥터 노먼 베쑨>은

1952년 <메스 검-닥터 노먼 베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캐나다 리틀브라운컴퍼니에서 처음 발행된 이 책은 세르비아어, 히브리어,중국어를 비롯해 19개의 언어로 출판되었다. 캐나다 역사상 가장 널리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실천문학사에서 1991년 12월 천희상이 번역해 <닥터 노먼 베쑨>이라는 제목으로 바간되었는데, 출판과 함께 대학가에서 먼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2001년 6월, 같은 이가 개역하여 재출간되었으며, 실천문학사의 역사인물찾기 시리즈 첫 번째 권에 자리했다. 이 시리즈는 <체 게바라 평전> <스콧 니어링 자서전> <간디 평전> <비노바 바베> <노신 평전> <밥 딜런 평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책에서

덧붙이는 글 |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 편집부 (엮은이) | 문학의숲 | 2010-03-03 |정가:18500원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출처 : 무소유 법정스님
글쓴이 : 우수영 원글보기
메모 :

 

 

 

 

 

 

부부가 함께보면 좋은글

세상에
이혼을 생각하지 않은 부부가 어디 있으랴
하루라도 안보면 못 살 것 같던 날들 흘러가고
고민하던 사랑의 고백과 열정 모두 식어가고

일상의 반복되는 습관에 의해
사랑을 말하면서 근사해 보이는 다른 부부들 보면서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옛사랑을 생각하면서

관습에 충실한 여자가 현모양처고
돈 많이 벌어오는 남자가
능력 있는 남자라고 누가 정해놓았는지..

서로 그 틀에 맞춰지지 않는 상대방을
못 마땅해 하고 자신을 괴로워하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귀찮고 번거롭고
어느새 마음도 몸도 늙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

헤어지자 작정하고
아이들에게 누구하고 살 거냐고 물어보면
열 번 모두 엄마 아빠랑
같이 살겠다는 아이들 때문에 눈물 짓고,

비싼 옷 입고 주렁주렁 보석 달고 나타나는 친구.
비싼 차와 풍경 좋은 별장 갖고 명함 내미는 친구.

까마득한 날 흘러가도
융자받은 돈 갚기 바빠 내 집 마련 멀 것 같고.
한숨 푹푹 쉬며 애고 내 팔자야 노래를 불러도.

어느 날 몸살감기라도 호되게 앓다보면
빗길에 달려가 약 사오는 사람은
그래도 지겨운 아내.
지겨운 남편인 걸.

가난해도 좋으니 저 사람 옆에서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하루를 살고 헤어져도 저 사람의 배필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시든 꽃 한 송이 굳은 케익 한 조각에 대한
추억이 있었기에..
첫 아이 낳던 날 함께 흘리던 눈물이 있었기에..

부모 喪 같이 치르고
무덤 속에서도 같이 눕자고 말하던 날들이 있었기에..

헤어짐을 꿈꾸지 않아도 결국 죽음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날이 있을 것이기에..

어느 햇살 좋은 날
드문드문 돋기 시작한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다가가 살며시 말하고 싶을 것 같아
그래도 나밖에 없노라고..
그래도 너밖에 없노라고..

항상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면서 열심히 살아봅시다. 

- 좋은글 중에서 -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건들팔월


주오돈(교사, 시인)

 

참 무던히도 길었던 여름이었다. 한반도가 아열대기후로 변해 가는 징후가 곳곳에 감지된다. 가을이 오던 길목에선 장마철 같은 비에다 태풍도 스쳐갔다. 이런 속에 지난 주말 교외로 나갔더니 들녘의 벼는 노르스름하게 고개를 숙여가고 있었다. 콩밭이랑 사이 수수도 이삭이 나와 여물어 갔다. 한낮엔 늦더위 꼬리가 남았긴 해도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을 실감한다. 


일주일 전 풀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가 지났다. 일주일 후면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다. 올해는 추분과 추석이 겹치다시피 했다. 추석 다음 날이 추분이다. 일교차가 커져 아침 출근길은 많이 서늘해졌다. 하늘은 파래지고 높아졌다. 이십여 년 전 서울에서 열렸던 올림픽을 떠올려 보았다. 그해 서울을 찾았던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가을 하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칠팔월은 음력일 테다. 칠월은 어정어정하는 사이 지나가고, 팔월은 건들건들하는 사이 지나간다는 뜻이다. 앞서 오뉴월은 ‘깐깐오월 미끈유월’이라 했다. 농사철 힘겹고 깐깐하게 지낸 오월이다. 긴긴 하루해를 일에 미끄러지듯 보낸 유월이다. 칠팔월은 오뉴월에 비해 한결 수월하게 넘겼다는 의미를 담았다. 세월은 쏘아 놓은 화살이다.


올해는 비가 잦고 더위가 심했다. 나무는 왕성한 광합성작용으로 나뭇잎을 튼실하게 키워 놓았다. 기상예보에 올가을 단풍은 예년보다 조금 늦어도 빛깔은 곱게 물들 것이란다. 한두 달 뒤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줄 단풍이 기대된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일 년에 두 차례 옷을 갈아입었다. 봄 산은 연두 옷을 아래서 위로 입어 올렸고, 가을 산은 단풍 옷을 위에서 아래로 벗어 내렸다.


추석을 닷새 앞둔 팔월 초아흐레였다. 주중 평일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였다. 저녁식후 모처럼 산책을 나섰다. 즐겨가던 저녁산책인데 근래는 꼬박꼬박 나가질 못했다. 마음 씀이나 몸 움직임에 게으르지 않으려 한다만 쉽지가 않다. 미적대지 말고 바지런해야겠다. 나는 교통문화연수원 앞으로 갔다. 반송시장 지나다 추석 대목을 실감했다. 과일과 채소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올해는 봄부터 채소와 과일 작황이 좋지 않았다. 이상저온과 비가 잦았던 봄날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강 둔치 기름진 경작지도 사라져버렸다. 산지로부터 공급이 달리니 소비자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름날 많은 비로 과일의 맛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땀 흘린 농부 손끝에서 가꾸어진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이었다. 재래시장에서 명절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창원스포츠파크로 향했다. 경륜장을 지나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으로 갔다. 운동 나온 시민을 위해 알맞은 밝기의 조명이 비추었다. 녹색의 천연잔디가 싱그러웠다. 잔디구장 둘레의 우레탄 트랙을 예닐곱 바퀴 걸었다. 나 말고도 보조경기장 트랙을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도심 하늘에 보름달로 채워지는 상현달이 예쁘게 걸렸다. 팔월 초아흐레 저녁이었다.


나는 보조경기장트랙 걷기를 끝내고 실내수영장 뒤를 돌았다. 콘크리트옹벽과 언덕 풀밭에서 귀뚜라미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수컷이 암컷에게 보내는 사랑의 노래는 청아하단다. 수컷끼리 서로를 밀어낼 때는 아주 시끄럽단다. 나는 귀뚜라미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았다. 어찌 들으면 사랑노래 같았고, 어찌 들으면 싸움소리 같았다. 귀뚜라미는 밤새도록 날개를 비벼댈 것이다.


실내수영장 곁에는 인라인스케이트장이 있다. 요즘 동호인이 많이 늘어난 인라인스케이트다. 야간조명 아래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들이 있었다. 아이들도 있고 어른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하고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도청에서 체육청소년 업무를 보고 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부터 비만에서 탈출한 친구였다. 시공을 참 잘 활용했다. 10.09.16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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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쇠기

주오돈(교사, 시인)


‘개 보름 쇠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보름날 개한테 먹이를 주면 한 해 내내 파리가 붙고 야윈다는 속설이다. 지역마다 세시풍속이 전해온다만 전승 과정에서 조금씩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야기문학을 적층문학이라고 한다. 모래흙이 물살에 실려 떠내려 와 한 켜 두 켜 쌓여 이룬 퇴적층과 마찬가지다. 물길에 따라 변하는 삼각주와 같아 구비문학을 유동문학이라고도 이른다.


내 어릴 적 설날은 동짓날부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부터 낮이 길던 밤이 점차 짧아졌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빚어주신 동지팥죽 새알을 나이보다 한 개 더 먹을 수 있었다. 당신은 동짓날 팥죽을 쑤어 여러 곳에다 뿌렸다. 부엌문은 기본이고 곳간이나 장독대에 붉은 팥죽을 훠이훠이 저으셨다. 외양간 기둥에도 뿌리셨다. 한 해가 오고감을 조왕신께 아뢰고 잡귀를 멀리 쫓으셨다.


절기는 동지이후 소한대한 지나 입춘이다. 입춘 전후 설날이 들고 정월대보름이다. 어릴 적 대보름은 겨우내 날렸던 연을 달집에 메달아 불살랐다. 액운은 연기로 날려 보내고 복은 숯불다리미에 받는 격이었다. 농경문화에선 정월보름날이 농사의 출발점이다. 보름날 별식인 부름과 귀밝이술은 주된 의미와 딸린 의미가 있다. 건강을 챙기십사는 뜻 말고도 이웃과 통하라는 뜻이 담겼다.


어릴 적 고향집에선 줄곧은 아니지만 개를 기른 때가 있었다. 불러준 이름은 고상하지도 않은 ‘누렁’이나 ‘까막’이였다. 정월대보름이면 어머님은 새벽녘 잡곡밥을 짓고 묵나물을 장만하셨다. 가족이 들기 전에 조왕신께 먼저 바치셨다. 그리고 문밖을 나서 고샅에다 음식을 놓고 두 손 모으셨다. 모르긴 해도 가족의 안녕은 집안에서 빌었을 테고, 한 해 농사가 잘 되길 비셨지 싶다.


세월이 흘러 쉰 고개를 넘었다. 수년 전 어머님을 마지막으로 친부모 처부모 모두 선산으로 모셨다. 설이나 추석 명절이 다가와도 예전만큼 마음 설레지 않는다. 조상의 대가 한 대 갈라진 가장이 되어 어쩔 수 없나 보다. 예전의 개보름쇠기라는 속담은 개를 굶긴 동물학대가 아니었다. 나는 이 속담에서 선인들의 삶이 참으로 친환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개는 묶여 있지 않았다.


나는 개보름쇠기라는 속담은 달리 해석한다. 보름날 개는 굶겨야한다는 의미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론 정월보름날이면 어머님은 조왕신께 바친 대보름 음식을 문간 밖에다 고수레했다. 지나는 날짐승길짐승이 먹고 가라는 배려였다. 이런 음식이 지천으로 깔린 날이니 보름에는 굳이 개한테까지 먹이를 줄 필요가 없었다. 보름날 개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굶지 않았다.


개보름쇠기에서 러시아 생리학자 파블로프가 떠올려 본다. 파블로프는 개의 침샘에 분비하는 조건반사설로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다. 우리네 개는 정월대보름이나 상갓집에선 조건반사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정월대보름에는 마을 어귀마다 보름음식이 깔렸고, 상가에서도 개한테 신경 쓸 만한 겨를도 없지만 뼈다귀가 굴러다녔다. 그러니 우리네 개는 대보름이나 상가에선 자력갱생했다.


내가 에둘러 보름이야기를 하는 데는 추석을 앞두어서다. 추석도 같은 열두 달 가운데 정월대보름 이상으로 우리 민족 고유 명절이다. 나는 선물이랍시고 어디 보내기보다 쑥스럽게도 받아본 횟수가 많다. 지위에야 위아래가 있지만 인격에야 위아래가 있겠는가? 나는 명절이면 몇몇 낮은 곳에 더 마음 쏠렸다. 어쩌면 내가 그만큼 세상 처세에 눈치 모르고 살았다는 반증이기도하다.


각설하고, 추석연휴를 앞둔 날이었다. 퇴근해서 시립도서관에 들렸다. 연휴에 읽을 몇 권 책이 필요해서다. 전에는 세 권까지였으나 이제는 다섯 권까지 대출 가능했다. 연휴기간 일용할 양식은 준비한 셈이었다. 돌아오다 집 근처 주막에서 혼자 막걸리를 한 잔 들었다. 주인아낙은 추석이랍시고 나한테 치약을 한 개 주었다. 나보고 추석 잘 쇠라더군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10.09.20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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