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팔월
주오돈(교사, 시인)
참 무던히도 길었던 여름이었다. 한반도가 아열대기후로 변해 가는 징후가 곳곳에 감지된다. 가을이 오던 길목에선 장마철 같은 비에다 태풍도 스쳐갔다. 이런 속에 지난 주말 교외로 나갔더니 들녘의 벼는 노르스름하게 고개를 숙여가고 있었다. 콩밭이랑 사이 수수도 이삭이 나와 여물어 갔다. 한낮엔 늦더위 꼬리가 남았긴 해도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을 실감한다.
일주일 전 풀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가 지났다. 일주일 후면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다. 올해는 추분과 추석이 겹치다시피 했다. 추석 다음 날이 추분이다. 일교차가 커져 아침 출근길은 많이 서늘해졌다. 하늘은 파래지고 높아졌다. 이십여 년 전 서울에서 열렸던 올림픽을 떠올려 보았다. 그해 서울을 찾았던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가을 하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칠팔월은 음력일 테다. 칠월은 어정어정하는 사이 지나가고, 팔월은 건들건들하는 사이 지나간다는 뜻이다. 앞서 오뉴월은 ‘깐깐오월 미끈유월’이라 했다. 농사철 힘겹고 깐깐하게 지낸 오월이다. 긴긴 하루해를 일에 미끄러지듯 보낸 유월이다. 칠팔월은 오뉴월에 비해 한결 수월하게 넘겼다는 의미를 담았다. 세월은 쏘아 놓은 화살이다.
올해는 비가 잦고 더위가 심했다. 나무는 왕성한 광합성작용으로 나뭇잎을 튼실하게 키워 놓았다. 기상예보에 올가을 단풍은 예년보다 조금 늦어도 빛깔은 곱게 물들 것이란다. 한두 달 뒤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줄 단풍이 기대된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일 년에 두 차례 옷을 갈아입었다. 봄 산은 연두 옷을 아래서 위로 입어 올렸고, 가을 산은 단풍 옷을 위에서 아래로 벗어 내렸다.
추석을 닷새 앞둔 팔월 초아흐레였다. 주중 평일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였다. 저녁식후 모처럼 산책을 나섰다. 즐겨가던 저녁산책인데 근래는 꼬박꼬박 나가질 못했다. 마음 씀이나 몸 움직임에 게으르지 않으려 한다만 쉽지가 않다. 미적대지 말고 바지런해야겠다. 나는 교통문화연수원 앞으로 갔다. 반송시장 지나다 추석 대목을 실감했다. 과일과 채소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올해는 봄부터 채소와 과일 작황이 좋지 않았다. 이상저온과 비가 잦았던 봄날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강 둔치 기름진 경작지도 사라져버렸다. 산지로부터 공급이 달리니 소비자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름날 많은 비로 과일의 맛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땀 흘린 농부 손끝에서 가꾸어진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이었다. 재래시장에서 명절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창원스포츠파크로 향했다. 경륜장을 지나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으로 갔다. 운동 나온 시민을 위해 알맞은 밝기의 조명이 비추었다. 녹색의 천연잔디가 싱그러웠다. 잔디구장 둘레의 우레탄 트랙을 예닐곱 바퀴 걸었다. 나 말고도 보조경기장 트랙을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도심 하늘에 보름달로 채워지는 상현달이 예쁘게 걸렸다. 팔월 초아흐레 저녁이었다.
나는 보조경기장트랙 걷기를 끝내고 실내수영장 뒤를 돌았다. 콘크리트옹벽과 언덕 풀밭에서 귀뚜라미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수컷이 암컷에게 보내는 사랑의 노래는 청아하단다. 수컷끼리 서로를 밀어낼 때는 아주 시끄럽단다. 나는 귀뚜라미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았다. 어찌 들으면 사랑노래 같았고, 어찌 들으면 싸움소리 같았다. 귀뚜라미는 밤새도록 날개를 비벼댈 것이다.
실내수영장 곁에는 인라인스케이트장이 있다. 요즘 동호인이 많이 늘어난 인라인스케이트다. 야간조명 아래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들이 있었다. 아이들도 있고 어른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하고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도청에서 체육청소년 업무를 보고 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부터 비만에서 탈출한 친구였다. 시공을 참 잘 활용했다. 1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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