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마음] 모든 확전 논리는 슬프고 끔찍하다 | |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생때같은 희생자나 연평도 주민들의 아득한 삶보다 앞서는 내용들은 고장난 자주포, 국방장관 경질, 대통령의 확전 자제 발언 논란, 정치적 이해관계 따위이다. 무자비한 보복이나 화끈한 선제공격 주장에 이르면 온몸이 저리다.
확전을 주장하는 논의들은 모두 헛되고 참담하다. 그 안에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어디에도 없다. 전시의 군 지휘 벙커처럼 되로 주고 말로 갚는다는 ‘비례성의 원칙’만 홀로 도드라진다. 확전을 우려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봉건시대 서자처럼 주눅들고 홀대받는다. 무자비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들이 눈 부라리며 하는 말의 요지는 ‘누가 몰라서 그러느냐. 지금은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이다. 내가 보기엔 모르는 것 같다. 확전 때 얼마나 많은 인간의 생명이 헛되이 스러져 가는지를.
1994년 북핵 위기 때 한반도는 구체적으로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갔다. 당시 미국의 전쟁 시뮬레이션 자료에 따르면 개전 일주일 안에 군병력 100만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사상자 수는 500만명이었다. 훗날 역사책에 두번째 한국전쟁의 해로 기록되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니 실제로 그런 정도의 천문학적인 인명손실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생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수백만명의 무고한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그 전쟁이 지키려고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국가의 품격이나 자존심, 단호한 응징, 힘의 우위 과시를 위해 무수한 목숨을 제물로 삼아도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끔찍하고 어리석은가.
급작스런 사고나 돌연사와 관련된 대개의 죽음은 무고하고 비통하다. 그런 죽음은 망자와 관련 있는 최소 5명 이상의 그림자 죽음을 동반한다. 자식이, 연인이, 부모가, 친구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는 순간, 그들과 깊은 관계에 있던 남아 있는 이들의 삶도 온전하지 못하게 된다. 죽지 않았으되 죽음 같은 고통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모든 죽음은 무고하고 비통하다. 그러므로 전쟁에서의 모든 죽음 뒤에는 반드시 그림자 죽음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민간인 100만명을 포함해 적어도 20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실종됐다. 그림자 죽음까지 합하면 1000만 가까운 숫자다.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핏빛 후유증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적어도 100년 정도 걸려야 치유가 가능한 한국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국가안보의 최종 목적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다음이다.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하고 있는 한 정치분석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 중 하나로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 된다’는 대북관을 꼽는다. 북한이라는 호전적 적대세력과 대치한 상황에서 국가지도자로서 적절한 발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략 전술적 차원에서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과 관련해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둔 국가지도자로서 김대중의 철학을 나는 존경하고 지지한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연평도에 남아 있는 반려동물들의 생사를 걱정하는 일부 젊은이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철부지로 매도당한다. 한가하다는 것이다. 티베트 승려는 봄철 수행기간에 바깥출입이 완전 통제된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라서 밖에 나섰다가 무심코 발로 밟아 생명체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제3자의 처지에서는 종교적 과민반응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윽박지르거나 무시하는 집단들의 선택이, 언제나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한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심도 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유통되는 모든 확전 논리는 슬프고 두렵고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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