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현대문학』, 2008년 4월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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