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경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새' 全文
입력2019.12.31 16:10 수정2020.01.01 02:01 지면A23
눈앞에 있지 않은 새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무실 내 옆자리의 후배는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유독 새빨간 입술이 백문조를 쏙 빼닮았다. 뭐 때문인지 매사에 부루퉁한 얼굴로 혼잣말이 잦은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새카만 까마귀를, 아파트 근처 편의점의 스물 남짓한 야간 알바생은 검푸른 눈매가 도드라진 동고비를 닮았다. 세상에는 새를 닮은 사람이 아주 많다. 개나 고양이를 닮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를 닮기도 하며 특별하거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하필 새를 보는가 하면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캠핑을 가고 맛집 탐방을 다닌다면 나는 새를 본다. 하필 새가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번식기나 월동기가 되면 주말을 이용해 순천만 습지나 남해 강진만, 창원 주남저수지, 강화도, 낙동강 하류 을숙도, 충남 태안 천수만 등 전국을 돌아다닌다.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직 새를 볼 수 있다면 거리는 상관없다. 새를 보러 가는 길은 실제로 새를 보는 것만큼이나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사람들은 새를 보는 일을 일면 생소해하면서도 마뜩찮게 여기는 구석이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새를 보는 일을 굉장히 수고롭게 생각한다. 일례로, 내가 주말에 새를 보러 간다고 하자 사수는 비꼬듯 말했다. ‘뭐? 새를 보러 간다고? 뭐 하러? 새를 보면 떡이라도 나와?’ 새를 보는 것을 하찮게 여기니 새를 보는 나도 하찮아 보였던 걸까. 떡이 나오냐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뭘 바라고 새를 보는 것이 아니다. 새를 봐도 내가 얻는 건 없다. 새를 보는 일은 지극히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새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문외한은 아니다. 새라고 다 같은 새가 아니라는 것을 새를 보고 구분할 정도는 된다. 그렇다고 또 자랑할 만한 수준도 아닌 것은 지구에는 팔천육백여 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칠백여 종이 한반도에 서식하고 있는 걸 고려하면 그저 협소한 나의 생활 반경 내에서 꼭 필요한 만큼 보일 뿐이다.
가만히 새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새가 있고 새를 보는 내가 있다. 단출하고 홀가분하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새를 보고 있으면 지구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오로지 새를 기다리고 새가 있으면 보고 또 기다리고 다시 본다. 저물녘, 녹아내리는 듯한 하늘을 무리 지어 비행하는 풍경 앞에서 자연스레 겸허해진다. 어떤 순간은 감히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고 담으려는 찰나 지나가 버린다. 마치 인생의 가장 눈부셨던 순간을 잡아둘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다. 탐조용 스코프나 망원렌즈 같은 전문적인 장비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새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새를 본다는 건 저장이 아니라 비움이다.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이다.
내가 새를 보러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걸 아는 지인은 내게 새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약속도 취소할 만큼? 사람보다 더? 나는 거의 평생 새를 봐왔으며 새와 견줄 비교대상은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너무나 무심코 타인에게 가혹하게 군다. 새는 내가 가장 부서지기 쉬웠을 때 내게 왔다. 나의 최초의 새에 관한 기억은 열 살 때로 외할머니의 집 마당에 자그마한 새가 날아든 일이다. 눈 위를 디디며 자그마한 발자국을 남기던 녀석은 몸의 윗부분이 붉은 갈색이었다. 동작이 재빠르고 움직일 때마다 꽁지를 좌우로 쓸어댔다. 그것은 몹시 부드러울 것 같았으나 손에 쥐기엔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해 겨울, 나는 인천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아버지의 수술과 장기 입원 생활로 엄마가 나를 보살필 여력이 안됐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의 눈 덮인 한적한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를 쫓아다녔다. 지치는 줄도 모르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푸르스름한 바닥위로 짙게 기울기 시작하면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얌전히 앉아 공기놀이나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숨이 다 넘어갈 정도로 달리고 몸을 움직여 혼을 빼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외롭고 슬프고 우울한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나는 그 추운 겨울을 헤집으며 새를 쫓았다. 그러는 동안은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두려운 상상과 망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었다. 바짝 언 몸으로 돌아가면 외할머니가 상기된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고 차가운 몸을 품에 보듬고 가만가만 어르고 달래주었다.
언젠가 추락하는 새를 본 적 있다. 새를 볼 때는 그저 새를 볼 뿐이므로 새가 추락하는 동안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날개를 뒤집은 채 빠르게 추락하던 새는 능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 이후로 나는 이따금 그 추락하는 새를 떠올리고 무기력함에 젖는다. 내가 어쩌지 못한 일들. 부정하고 불합리한 일에 대해 침묵을 강요당함으로써 부당함을 감내해야 했던 지난날. 세상은 참으로 불가해한 현상들로 끓어 넘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를 본다. 새를 생각한다. 가벼워져라. 가벼워져라. 주문을 외운다. 날아가라. 날아가라.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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