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좋다 맹난자

 

 

 

바람 부는 언덕에 선 채이대로 좋다.

눈앞에 펼쳐진 일망무재 발 아래의 삼계화택三界火宅에서 나 용케도 견디어왔다.

어느 대왕이 학자들에게 인간의 역사를 써오게 하자 그들은 수백 권의 저서를 기술하여 대왕께 올렸다백성들이 읽기에 분량이 너무 많으니 좀더 줄여보라고 지시했다대왕은 간추린 수십 권의 저서도 더 줄일 것을 요구했다이 같은 과정을 되풀이 한 뒤학자들은 마침내 합의점을 찾았다대왕께 올린 것은 커다란 종이에 쓰여진 글자 하나 ''였다그제서야 대왕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이다.

만약 누가 나더러 인간의 역사를 써 오라고 한다면 나 역시 ''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올릴 것이다그러나 그 고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성장을 거듭하고 성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의 일이다어느 심령술사가 내게 '당신은 전생에 해인사에서 수도하던 사람'이라고 했을 때갸우뚱하다가 정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공부하던 스님 세 분을 차례로 속가에서 만나게 된 인연 때문이다.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후원에서 담소를 나누던 세 분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뱀사蛇 자를 넣어 호를 나누어 가졌는데 세 분 모두 속퇴하여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청사 석도륜(미술평론가), 홍사 고은(시인). 백사 유충엽(명리학자)선생이다이분들과 인연이 닿아 인간의 운명과 주역에서 말하는 생사生死원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불교와 문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함께 한 시간들이 있었다첼리스트 조현진 씨를 데리고 정각사에 오신 석도륜 선생을 만난 것은 1960차례로 이분들을 만나면서 서로간의 친분관계를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로 깊은 불연佛緣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화수미제火水未濟의 인생길을 에둘러 여기까지 왔다.

인간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어떻게 해야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을 갖고 애를 태우던 중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석가의 말씀에 압도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요즈음엔 설법에도 등한한 편이다재액災厄으로부터 지켜달라고 법당에 가 엎드리지도 않는다가족의 영달과 복을 달라고 매달리지도 않는다아무 발원도 없이 그저 바람 부는 언덕에 나와 온몸으로 그걸 맞고 있다.

발원發願은 물론 좋은 것이다하나의 목표를 향한 에너지의 응집이며 자기 위안이기도 하다그러나 엄연한 인과因果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일밭이랑에 심어 놓지 않고 어찌 거둘게 없다고 탓하겠는가기도에 매달려 어찌 약속되지 않은 수확을 바라겠는가지은 게 없는지 나는 이 생에서 유복하기는 틀렸다그렇다고 내 생의 빈보貧報를 받지 않기 위해 복의 종자를 부지런히 심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마음속의 발원도 내려놓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린 듯 휑한 공동이 느껴진다.

요즈음 들어 더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나를 둘러싼 결핍된 사항과 부족한 것들에 대해 그 개선을 요구하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그대로 놓고 불편한대로 지낼만하다나는 지금 텅 빈 가슴으로 나목裸木처럼 서있다그 앞에 저항하지도 않고달아나려고도 하지 않으며 미련하달만큼 한 곳에 서서 맞을 것 다 맞고 싶다그리하여 정직한 댓가를 치루고 버릴 것은 버리며세상과의 관계맺음에서 홀가분해지고 싶다.

 

끌어 모아서 얽어매면한 칸의 초가집.

풀어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어느 선사의 시구처럼 허물어져 가는 한 칸의 조가집 같은 나.

언젠가는 본래의 들판으로 돌아가리.

바람 부는 언덕에 선 채나 이대로 좋다.

 

 

어떤 일탈 / 정재순

 

 

숙이네가 원당골에 가자고 한다. 꽃구경도 하고 점심도 지어 먹자고 해서 얼결에 그러자고 답했다. 여럿이 함께 어울린 적은 있지만 혼자 초대를 받기는 처음이다. 새초롬한 그녀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은근 걱정이 앞선다.

산기슭 숙이네 집에는 꽃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금낭화가 홍사초롱을 내건 화단에는, 라일락 향기에 취한 양귀비가 가녀린 몸매를 살랑인다. 지난밤 별이라도 내려왔을까, 키 작은 애기별꽃들이 오종종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금잔옥대는 청초한 각시붓꽃에게 입술을 내밀며 속살거린다. 나비 수백 마리를 뭉쳐놓은 것 같은 수국을 흔들면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오를 것만 같다.

곳곳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다. 지난겨울 지었다는 육각 정자며, 손수 일구었다는 텃밭이며, 눈이 가는 곳마다 숙이네 손길이 스며있다. 햇볕 환한 마당가에 항아리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세월을 발효시킨다. 어디서 구했는지 돌절구와 맷돌이 덩그마니 앉아 촌집 정취를 살린다. 주방 선반 위에는 색깔도 모양새도 각각인 질그릇이 투박한 멋을 부린다.

그녀가 살림과의 인연을 들려준다. 무겁거나 말거나 예쁘면 용서되는 숙이네가 아니던가. 방과 거실의 옷장이나 장식장은 그녀가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내다놓은 것을 가져왔다. 부엌의 그릇도 이웃이 버린 걸 말끔히 닦았다고 한다. 쓰윽 봐도 하나같이 쓸모 있다. 말하지 않았으면 감쪽같아서 새것인 줄 알겠다. 세상에, 숙이네가 이렇게 알뜰살뜰한 구석이 있었다니.

찻상 앞에 마주 앉는다. 국화차를 준비하는 그녀의 손놀림이 차분하다. 하나의 다기에서 우러난 차를 함께 마시자 둘의 마음이 향기로 젖어 든다. 그동안 속엣말을 드러내지 않더니 빗장을 열고 조금씩 풀어낸다.

성격이 예민한 탓이었을까. 말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거늘, 밤을 지새운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단다. 정작 막말을 쏟아낸 자는 기억조차 못 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숨이 가쁘고 심장을 찌르는 고통에 병원을 찾아갔으나 병명은 알 길이 없었다. 용하다 소문난 곳을 수없이 두드리고, 온갖 요법을 써 봐도 후련한 답을 얻지 못했단다. 부족한 데라곤 없어 보였건만, 다 버리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릴까 마음도 먹었단다.

숙이네를 보다 못한 남편이 이곳에 촌집을 마련했다. 소심한 아내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남편을 생각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엔 엄두도 못 냈지만, 징그러운 벌레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이 갔다. 달이 차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꽃밭을 가꾸고 텃밭도 일구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동안 원하는 무언가가 자꾸 만들어졌다. 아하! 이런 게 삶이구나 싶더란다.

뭐든 땅에 심기만하면 햇살과 비바람이 키워냈다. 감나무 잎이 눈곱만해질 즈음 호박씨를 묻어놓았더니 싹이 돋아났다. 연이어 넝쿨이 번지고 엄지손가락만 한 호박이 달렸다. 땅에 뿌리를 내린 것들과 교감하면서 그녀의 표정은 한결 부드럽고 환해졌다. 차츰 마음자리의 어둠까지 깨웠다.

맨 처음 허락 없이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원당골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단다. 본데없는 치들로 여겨져 말을 피했었다. 그런데도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과 말을 섞다 보니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 이제는 원당골에 도착하면 아예 마당을 열어 놓는다. 차 한 잔 대접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속이 개운하단다.

저 평온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찬찬이 짚어보았을 것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고 경계하는 세상과 다투다 보면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도 한다. 밉다고 세상을 짓밟을 수도 패대기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보다 느리면 어떻고 덜 가지면 어떠랴. 욕심을 채우는 길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길을 찾았다니 반가운 일이다.

시장 끼가 슬슬 돈다. 숙이네가 목에 무명수건을 질끈 묶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따라나선다. 발을 감싼 다홍색 고무신이 신명을 낸다. 예닐곱 평 텃밭에 생전 처음 보는 새하얀 감자 꽃이 정겹다. 가지 꽃은 노란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고, 블루베리도 머루 빛으로 영글어간다. 밭두렁에 가죽나무가 발그레한 새순들을 내밀고 있다. 방풍나물과 상추를 한잎 두잎 따다 보니 어느새 바구니가 찬다.

된장찌개와 가죽 순으로 전 굽는 내음에 식욕이 돋는다. 쟁반에 음식을 담고 온갖 야채를 올리자 밥상이 풍성하다. 손수 가꾸고 거둔 것을 한 입 넣으니 자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김장김치의 아삭하고 시원한 맛을 걸쳐 잡곡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다.

배가 부르면 여유가 아니던가. 마당으로 나가니 바람이 머리칼을 흔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잘 다듬어진 꽃 마당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텃밭을 지그시 바라본다. 포만감 위에 더해지는 안빈낙도. 그래, 이것이 그녀가 되살아난 이유구나.

누구에게나 마음 놓을 자리가 있을 것이다. 소는 풀밭이 나비는 꽃이, 긴 여행에 지친 이는 따뜻한 아랫목이 그러할 터이다. 뭇별, 들꽃, 산들바람이 어루만져 주는 곳, 어느새 나도 마음 내려앉을 자리를 꿈꾸고 있다.

 

바다의 기별 / 김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리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닫는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너머의 밀물과 썰물이 이 내륙 하천을 깊이 품어서 숭어 떼들이 수면 위로 치솟고 호기심 많은 바다의 새들이 거기까지 물을 따라 갯벌을 쑤신다. 그 작은 물줄기는 바다의 추억으로 젖어서 겨우 기신기신 흐른다. 보이지 않는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서정주「격포우중」에서)와도 같이 젖어서 질퍽거린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들 바다로 돌아가고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날아가면 빈약한 물줄기는 낮게 내려 앉아 겨우 이어가는데,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자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 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라는 글자 밑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라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 부엉이 같이 말을 걸 수 없는 동물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

물가에서 돌아온 밤에 램프 밑에 앉아서 당신의 정맥에 관하여 적는다.

그해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고 빗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산 것들의 몸 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 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횐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백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몸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정맥이 숨어드는 죽지 밑에서 겨드랑 살은 접히고 포개져서 작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이 찻잔을 잡느라고, 책갈피를 넘기느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느라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당신의 겨드랑 골은 열리고 또 닫혀서 때때로 그 안쪽이 들여다보일 듯했지만, 그 어두운 골 안쪽을 당신의 살 속을 파고 들어간 정맥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사라진 정맥의 뒤 소식은 아득히 먼 나라의 풍문처럼 희미해서 닿을 수 없었다. 정맥의 저쪽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별도 오지 않았는데, 내륙의 작은 하천에 바다의 조짐들과 바다의 소금기가 와 닿듯이, 희미한 소금기 한 둘이 얼핏 스쳐오는 듯도 싶었고 아무런 냄새도 와 닿지 않는 듯도 싶었다. 환청(幻聽)이나 환시(幻視)처럼 냄새에도 환후(幻嗅)라는 것이 있어서 헛것에 코를 대고 숨을 빨아들이는 미망이 없지 않을 것인데, 헛것인가 하고 몸을 돌릴 때, 여름 장마의 습기 속으로 번지는 그 종잡을 수 없는 소금기는 멀리서 가늘게, 그러나 날카롭게 찌르며 다가오는 듯도 했다. 내 살아 있는 몸 앞에서 ‘너’는 그렇게 가깝고 또 멀었으며, 그렇게 절박하고 또 모호했으며 희미한 저쪽에서 뚜렷했다.

‘너’가 이인칭인지 삼인칭인지 또는 무인칭인지 알 수 없는 날엔 혼자서 동물원으로 간다. 동물들은 모두 다 제 똥과 오줌과 제 몸의 냄새를 풍긴다. 기린이나 얼룩말이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볼 때, 그 망막에 비치는 세계의 내용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기린의 눈의 안쪽으로 나의 시선을 들이밀 수가 없다. 올빼미의 눈과 독수리의 눈에 비치는 나를 나는 감지하지 못한다. 늙은 독수리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철망 밖을 내다본다. 백곰은 하루 종일 철망 안쪽을 오락가락한다. 그의 앞발은 무겁고 그의 엉덩이는 늘어져 있다. 백곰은 앞발을 터벅터벅 내딛어, 몸을 흔들며 철망 안을 서성거린다. 코를 철망에 비비면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백곰의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백곰의 동작은 대낮의 몽유(夢遊)처럼 보였다. 철망에 쓸려서 해진 콧구멍으로 피를 흘리면서, 백곰은 돌아오고 또 돌아간다. 수사자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저편으로 돌아누워 있다. 갈기가 흘려내려 바닥에 닿았고 돌아누운 옆구리를 벌떡거리며 숨을 쉰다. 귀 기울이면 사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숨은 바람처럼 사자의 콧구멍으로 몰려 들어갔다가 다시 쏟아져 나온다. 숨이 드나들 때, 창자가 ‘가르릉’ 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늙은 사자의 숨소리는 불균형하고 숨쉬는 옆구리는 힘들어 보인다. 코끼리 발바닥은 발가락 다섯 개가 한 덩어리로 붙어 있고, 붙은 발가락에 제가끔 발톱이 박혀 있다. 공룡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발가락 다섯 개는 분화되지 않았다. 코끼리는 그 들러붙은 발바닥으로 둔중하게 땅을 딛는다. 다시 억겁의 세월이 지나야 코끼리의 발가락은 갈라지는 것인지, 발가락은 갈라짐의 먼 흔적들을 지닌 채 들러붙어 있다.

‘사랑’의 메모장에 왜 동물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항목 안에 써놓아야 할 단어들이었다. 동물원에서 코끼리 발바닥과 기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너’는 이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임을 안다. ‘너’가 삼인칭으로 다가오는 날엔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을 보러 간다.

다시 ‘사랑’의 메모장을 연다. ‘시선’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강’이라는 단어도 적혀 있다. ‘시선’을 적은 날은 봄이었고, ‘강’을 적은 날은 가을이었다. 봄에서 가을 사이에는 아무런 메모도 없었다. 메모가 없는 날들이 편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시선’ 밑에는 ‘건너가기’라고 적혀 있고, ‘강’ 밑에는 또 ‘혈관’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농수로’도 있고, ‘링거주사’도 보인다. 불쌍해서 버리고 싶은 단어들인데, 버려지지가 않는다.

내가 당신과 마주앉아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고,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당신의 시선은 내 얼굴을 뚫고 들어와 몸속으로 스미는 듯했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이끌려, 건너와서 내게 닿는 당신의 시선에 경악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으로 당신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닿을 때, 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나와 코끼리 발바닥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을 느꼈다. 그것이 환각이었을까? 환각이기도 했겠지만, 살아 있는 생명 속으로 그처럼 확실하고 절박하게 밀려들어온 사태가 환각일 리도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다시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숙일 때, 당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에서 햇빛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당신의 먼 변방에 주저앉은 나는 당신의 겨드랑 밑으로 숨어드는 푸른 정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당신의 푸른 정맥은, 낮게 또 멀리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다. 나는 나주 남평의 드들강을 생각했다. 드들강은 넓고 고요하다. 들에 낮에 깔려 다가오는 강은 강가에 앉은 자의 몸속을 지나서 흘렀다. 저녁이면 노을이 풀리는 강물은 붉게 빛났고, 강물이 실어오는 노을과 어둠이 몸속으로 스몄다. 당신의 겨드랑 속으로 사라지는 당신의 정맥이 저녁 무렵의 강물처럼 닥쳐올 시간의 빛깔들을 실어서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오기를 나는 그 강가에서 꿈꾸었던 것인데, 그때 내 마음의 풍경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을 기다리고 또 받아내는 곡릉천과도 같았을 것이다. 곡릉천은 살아서 작동되는 물줄기로 먼 바다와 이어져 있다.

내 빈곤한 ‘사랑’의 메모장은 거기서 끝나 있다. 더 이상의 단어는 적혀 있지 않다. ‘관능’이라고 연필로 썼다가 지워버린 흔적이 있다. 아마도, 닿아지지 않는 관능의 슬픔으로 그 글자들을 지웠을 것이다. 너의 관능과 나의 관능 사이의 거리를 들여다보면서 그 두 글자를 지우개로 뭉개버렸을 것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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