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간격 - 정목일
깊은 산중의 고찰에 가 보면,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들어서 있을 때가 많다. 옛것과 새것이 뒤섞이고 건물들의 간격이 좁아졌다. 제한된 공간 속에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 간격이 맞지 않음을 느낀다. 건물의 배치는 여러 측면을 살폈을 것이다. 건축이나 그림을 그릴때에 적용되는 황금 비례를 염두에 둠은 물론이요, 건물과 건물의 간격, 산세와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산과 사찰, 인간과 자연 , 대웅전과 요사 등에 사색의 간격이 사라진 것은 아쉽기만 하다.
미국 서부 휴양 도시인 산타바바라에서 본 해안 풍경 중에 기억나는게 있다. 바닷가 식당 지붕에 새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펠리컨, 갈매기, 비둘기 수십 마리가 일직선으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유심히 본 것은 새들의 간격이었다. 덩치가 큰 펠리컨들이 앉은 간격과 갈매기, 비둘기가 앉은 간격이 몸의 크기와 정확하게 비례하고 있었다. 새들은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 내려앉아 있었다.
미국 서부 아리조나 사막을 여행할 때도 비슷한 풍경을 접했다. 바람이 불면 굴러가다가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사막의 풀이 있었다. “ 세시부래쉬 “ 란 이름의 이 풀은 바람이 세게 불면 줄기가 부러져 날아가 죽은 듯이 있지만 비가 오면 살아나 13미터까지 뿌리를 내린다. 광막한 사막을 차지한 풀들은 바람에 날려가다가 멈춰진 곳에 자리를 잡아 자생하는 것인데도, 마치 사람들이 심어 놓은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영역과 간격을 유지하므로 공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활동 범위가 넓은 야수들은 그만큼 생존 영역이 넓어야 하며, 이 영역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생존 위협을 느낄수 밖에 없다. 종의 번식을 위해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것은 본능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고속도로 주행 중에 뒤차와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안전거리를 지켜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간격이 있어야 한다. 가로수들도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기에 쾌적감을 갖게 하지 않는가,
인간관계에도 간격이 있어야 한다. 너무 가까우면 싫증이 나게 마련이고 멀리 있으면 망각하기 쉽다. 이런 면에서 상대방과의 간격 유지는 삶의 슬기가 아닐수 없다. 간격은 떨어짐의 공허만이 아닌, 서로 간의 깊이와 이해와 자각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어떤 대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데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간격이 없으면 허물도 보이고취약점도 드러난다.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이해의 간격, 배려의 간격, 사색의 간격, 사랑의 간격이 필요한 것이다. 날이 저물고 저녁놀이 붉게 타고 있다. 사라지는 저녁놀이 아름다운 것은 하루라는 간격이 있어서일 것이다. 계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일 년의 간격이 있어서이고, 그대가 그리운 것은 볼 수가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필의 치열성과 여유
-정목일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의 수필이 삶의 절박성, 치열성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관조, 회고, 달관, 사유, 취미 등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삶의 치열성, 노동의 현장, 시대정신, 역사의식, 시회문제 등 실제로 삶과 직결 되는 문제와는 동 떨어진 주제와 소재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인다. 삶의 주제어가 지금, 여기, 오늘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지향의 회고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문학이다. ‘체험’이란 과거의 소산이기에 과거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시, 소설, 동화, 희곡 등에서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현장과 문제들을 펼치는 것과는 달리 수필에 있어선 현실 문제엔 관심조차 나타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실 문제를 분석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삶의 형태나 상황을 보여주지 못한다. 문제 해결의 의식과 작가의식, 시대정신의 결핍을 느낀다. 물론 자연 감상이나 신변잡사를 통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담으려는 소박한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노동의 땀 냄새, 일터의 현장과 애환, 삶의 치열성이 담긴 수필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수필은 본질적인 일을 외면한 채 취미, 산책, 회고 등에 빠져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담담하게 은근하게 다가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런 빛깔과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근원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피하려고 한다.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픽션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문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수필집에 정작 삶의 현장과 모습이 빠져 있음을 목격한다. 농경시대와 산업시대를 지나 정보시대에 살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고, 농경시대의 정서와 의식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지향적인 의식 체제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의 의식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산책이나, 회고조의 글이 아닌 본격적이고 치열한 문학형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삶의 주변문학이 아니라, 삶의 중심문학이 돼야 한다.
수필이 삶의 중심과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한가로운 취미나 여행, 혹은 회고조의 토로와 에피소드에 머물고 만다면 아무리 수필인구가 증가하고 발표되는 수필양이 많다고 할지라도 주변문학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분석하고 해결해 보려는 뜨거운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시, 소설, 희곡 등 픽션과는 달리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은 채 현실 문제를 과감하게 파헤친다거나 삶의 현장과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란 실로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분량에 있어서도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테마를 포용하기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수필이 삶의 핵심, 인간 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치열하고 뜨거운 작가정신을 투입해야 하며, 인생 산책과 한가한 토로 방식의 글쓰기에 대하여 재고해 보아야 한다.
평생 동안 꽃을 테마로 한 수필가, 한국미의 발견에 매달리는 수필가, 자신의 전문 테마에 일생을 건 수필가도 없지 않다. 또한 인생의 문제를 미시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한 걸음 비켜서서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보다 정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수필의 화법은 직접적이라기보다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현장과 현실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여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수필가가 보이지 않는다. 작업복 차림의 흙내 나고 땀에 저린 수필, 일터의 숨결과 긴박감이 느껴지는 수필, 오늘의 사회상과 이에 대한 고발, 정의와 부조리, 양심에 대한 가책과 고백, 삶의 생생한 기록과 현실 직시가 보이는 수필들이 나와 시대와 오늘을 증언하고 표현해 주어야 한다.
이제 수필은 삶의 주변부를 맴돌아선 안 된다. 삶의 심장을 느끼고 우리가 서 있는 현장, 오늘에 처한 현실의 중심에 서서 인간의 삶을 표현해야 한다.
취미나 여유나 산책 정도의 의식으로 수필을 쓸 때는 지났다. 그것은 아마추어문학 시대나 할 일이지 않은가. 이젠 수필은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대중적인 문학이 된지 오래다. 수필은 수필가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고학력 시대인 현대엔 모든 사람들이 수필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록화 한다. 인터넷이 글쓰기의 일상화, 수필의 생활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수필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독자적인 전문 세계와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와 치열한 작가정신, 탐구와 몰두의 땀이 요구된다. 시대와 현실의 한 복판에서 삶을 수용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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