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그 첫 마음

박종국(교사, 수필가)


모든 시작은 설레고 아름답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 만나는 세상은 어떨까. 신비스러울까. 경이로울까. 아닐 거다. 아이가 처음 만나는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다. 열 달 동안 엄마의 심장소리만 듣다가 갑자기 아이가 만나는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


아동심리학자의 말을 빌면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세상은 바로 ‘공포 그 자체’란다. 정돈되지 않은 세상의 갖은 소음과 불빛, 그 밝음과 요란함이 아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런데도 너무나 친절한(?) 어른들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기보다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말 못하는 아이를 더욱 까무러치게 한다. 


지금 내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아이 할 것 없이 미운 데를 가진 녀석이 없다. 한달 여 만에 만난 아이들 한층 야무지다. 건강한 몸집이 눈에 띤다. 아이들이 자꾸만 내 곁을 파고든다. 말릴 게재도 아니다. 그 열기 뜨뜻하다. 열 살배기 아이들이 부셔주는 순수한 사랑 때문이리라.


아이들 하나하나를 훑어보니 어제그제 개학 준비로 바빴나 보다. 새 학기를 맞는 아이들의 마음가짐이 야무지고 당차다.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생각가지가 많다. 그냥 아이라고 쉽게 생각해서 방학 동안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으면 빙충맞기 딱 알맞다. 코흘리개라고 함부로 대접해서는 원망을 듣게 마련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한다. 마찬가지로 첫날 첫 수업에 임하는 아이들의 눈빛 하나하나가 학기를 가늠한다. 첫 수업시간,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그것만으로도 새 학기 농사는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애써 마음 조리지 않아도 좋으리라. 다만 아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교사로서의 내 소임은 충직한 것이다.


수업 중에도 짬짬이 내 손을 움켜잡는 아이들, 불쑥불쑥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들, 그만큼 아이들은 방학 동안 일들을 자잘하게 늘어놓았다. 말소리가 힘차다. 개학을 맞는 첫 느낌은 신선했다. 첫 마음은 그 모든 행위의 준거가 된다. 장맛비 그친 하늘은 너무나 짙푸르다.  /2010. 08. 31.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어디 청렴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 없나?


박종국(교사, 수필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을까. 공자나 예수, 부처 같은 성인들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건만 보통 사람의 삶 언저리에는 으레 고만고만한 때가 끼기 마련이다. 살면서 찌든 때가 쌓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럴까? 정부 고위공직자들의 국회청문회를 보고 있으면 시골집 문지방 닳아 반질반질한 땟국도, 얼기설기 다 헤어진 속곳 걸레도 오히려 친근타(그래도 걸레는 걸레라고 우겨댄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대청마루 엉겨 붙은 땟국은 대접받지 못한다. 집집마다 진공청소기가 시시콜콜한 흙먼지를 다 빨아들이고, 드럼세탁기로 옷 때를 죄다 훑어내기에 옴 붙듯 먼지가 남아있을 까닭이 없다. 설거지를 해도 고약한 세제를 듬뿍 뿜어다가 자동세척기 찜질까지 마친다. 그러니 생활 집기며 옷가지 모두가 깔끔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여느 사람 할 것 없이 무시로 샤워를 해서 반질반질하다. 때문에 요즘 사람들은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다.


헌데, 정부의 소폭 개각 이후 분분하게 이는 먼지로 세상이 시끄럽다. 한 나라에 국무총리 장관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지. 채 빗질도 하지 않았는데 새까만 흙먼지를 풀풀 날리고 중도하차 했다. 소위 도청살림은 운위했다는 분이 그 정도다. 물론 청와대가 주도면밀(?)하게 공들여 인선했을 것이다. 근데 걸레로 훔친 물기가 마르기 전에 퀴퀴한 땟국이 잘잘 묻어났다. 인사청문회라면 으레 단골메뉴로 떠오르는 이야기들, 세금탈루에다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병역의혹, 논문포절 및 이중게재 등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정치인, 경제인, 대학교수 할 것 없이 고위 공직자로 낙점만 받으면 청렴성에 흠집이 난다. 도덕성에 심각한 구멍이 뚫린다. 치욕적이다. 이는 국무총리나 장관 후보자들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 나라 청렴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낯부끄럽다는 자괴감이다. ‘고소영’ ‘강부자’ 운운하는 것만 해도 살맛이 떨어지는데, 정작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고 보니 이 땅의 국민으로서 슬프다.


말로는 공정한 사회라 일컬으면서 행동은 이중 잣대로 하겠다는 건지. 공직자로서 적격, 부적격사유를 떠져서 완벽한 위법 사실이 밝혀졌다면 불법, 그 자체만으로 엄연한 논란거리다. 그래도 흠집이 덜하다며 나머지 일곱 장관 청장을 선뜻 임명하는 것을 보면 겁난다. 법을 어긴 것만큼 더 이상 무슨 결정적인 흠이 또 있나? 정부나 여권은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한 가벼운 생각들이 ‘공정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다.


일례로 위장전입으로 국민들 중 5천여 명은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도 고위공직자들은 면죄부를 받아야 하나? 위장전입은 명백한 편법이고, 불법이며, 주민등록법 위반이다. 그것은 ‘사회적 합의의 법’을 모독하는 것이다. 국민 여론 조사 결과, 60% 이상이 위장전입은 능력에 관계없이 고위직 공무원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국민의 뜻을 잘 살펴야 한다. 국민들이 많이 화가 났다. 도덕성이 결여되고, 정책이 흐지부지하고, 신뢰성이 떨어지는 후보자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신뢰한다. 다시 총리 장관 후보자를 선임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국민의 뜻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불법표적 기준에 든 후보자들을 몇 달을 굶은 맹수처럼  죄다 까발리겠다고 벼르는 정치인들에 또 한번 아연실색한다. 과연 비토를 장담하고 드는 그들의 뒤꽁무니는 깨끗할까. 정말 탈탈 털어도 한 풀의 먼지가 나지 않을까. 가당찮은 꼬락서니를 지켜보자니 할 말을 잃는다. 마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게 나무란다더니. 부정부패의 땟국 절은 사람을 인선하는 측이나 거기다가 개발새발하며 얼굴 부라리고 드는 사람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국민을 기만하고 호도하는 철면피한 정치인들의 작태는 여야당 가릴 것 없이 똑같다. 그들은 오직 당리당락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국민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지난한 삶을 모른다. 그들은 오직 최상위층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게 그들의 삶의 잣대다. 지금과 같은 경제난국에서 정치인들이 젯밥에만 눈을 부라리고 서로 헐뜯기를 한다. 민의를 대변하라고 국회 보내놓으니까 하는 짓이 예닐곱 살 아이들 짓거리보다 못해서야 어디 쓰겠나. 국민의 뜻을 거역하는 정치인들은 깡그리 내쫓아야한다.


하여 요즘 텔레비전 라디오를 끄고 산다. 뉴스를 듣는 순간 불끈불끈 혈압이 도지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나만의 울화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라 걱정을 하는 보통사람이라면 시시각각으로 불거지는 만성적이고 관행적인 답답증은 다 앓고 있을 것이다. 정녕 이 땅에는 모두에게 선뜻 존경받고 신뢰받을 수 있는 인물이 없을까. 국민에게 신선한 희망을 주고, 두 주먹 불끈 쥐며 이제는 좋은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힘을 부추겨줄 수 있는 깨끗한 정치인이 없을까. 어디 청렴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 없나? /2010. 08. 31.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스마트폰 붐  (0) 2010.09.11
[스크랩] 개학, 그 첫 마음  (0) 2010.09.11
[스크랩] 나 동생할거야  (0) 2010.09.11
[스크랩] 똥차 바꿔요  (0) 2010.09.11
[스크랩] 그대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  (0) 2010.09.11

나 동생할거야

 

박종국(교사, 수필가)

 

수업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진수가 시무룩한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딱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대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자꾸만 딴전을 피워댔습니다. 평소 같으면 좋게 기분을 누그려주었을 텐데, 괜스레 아이들 일에 끼어드는 것 같아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우리 반 소식통 혜경이가 다가오더니 살짝 귀띔을 해줍니다.

 

“선생님, 진수 있잖아요. 쉬는 시간에 동생하고 싸웠대요. 서로 동생 하겠다고요.”

“뭐, 서로 동생 하겠다고 우기며 싸웠다고?

“그랬나 봐요. 제 엄마가 동생을 더 좋아하고, 동생 편만 든다고 속상하대요.”

“거참 모를 일이구나.”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만나는 경쟁하고 갈등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형제나 자매간에 엄마아빠의 사랑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이 드는 일입니다. 


형제간에 사이가 나쁘고, 서로 시기하는 것은 자신이 더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합니까? 부모가 나서서 무조건 싸우지 말라고 다그치거나 뜯어말리는 것은 좋은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흔히 첫째 아이가 온통 부모의 사랑을 혼자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면 좋다는 생각보다는 갑자기 아기 같은 행동을 하거나 조그만 일에도 사사건건 동생을 미워하고 못살게 굽니다. 그렇다고 첫째 아이의 이러한 행동을 무턱대고 불거진 게 아닙니다. 단지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날벼락이 또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아기 하나가 온전히 내 것이었던 엄마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모두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준수도 그래서 속상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괜히 화가 나고, 동생이 미워지는 것입니다.  


첫째 아이가 생각하기에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태껏 엄마아빠의 사랑은 물론, 제 혼자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동생이 독차지 합니다. 그래서 쌤통이 나고 신경질이 납니다. 게다가 미운 짓을 하는 동생을 툭 건드리고 나면 어떻습니까. 여느 엄마아빠 할 것 없이 이유를 따져보지 않고 동생 편을 들며 야단부터 칩니다. 


그 순간 첫째 아이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그러한 대접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한번쯤 아이의 눈높이에서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만 따져 생각하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실 아이는 똑같은 양의 사랑을 바란다기보다는 믿음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형제간의 다툼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의 차이를 조절할 줄 알게 됩니다. 또한 시기와 갈등을 겪음으로써 그것들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능력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형제가 그렇게 치받으며 싸우지 않는다면 관심을 가지돼 속단하여 까여들지 말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면서 아이들을 대하는 일관성 있는 부모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형제간에 다툼에 있어 부모가 아이들의 서운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들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합니다. 그게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눅진하게 관심을 갖고 충분히 기다려주었는데도 아이들의 갈등이 그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서로 보듬고 껴안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충분한 스킨십은 그것만으로도 부모의 사랑에 흠뻑 젖어듭니다. 공감하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아니면 손을 잡고 숲길을 걷는 것은 어떨까요? 


조그만 감정으로 응어리진 아이를 품어 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먼저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끄고 온 가족이 재미있게 놀아 주는 것만으로도 닫혔던 아이들의 마음을 풀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아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주는 엄마아빠가 아이들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끼게 해 주어야합니다. 그것이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할 자녀사랑법입니다. 


그러한데 아이들이 더 이상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들판 알곡이 부지런한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여물듯이 아이들은 부모의 따스한 사랑과 관심으로 커갑니다. 내일 아침, 진수의 얼굴이 아침 햇살을 담뿍 받은 해바라기 마냥 해맑았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똥차 바꿔요

박 종 국


거리마다 차량물결이다. 그러나 낡은 차는 자주 눈에 띠지 않는다. 그만큼 신형차량들이 많다. 요즘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불과 서너 달이면 구형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 변화가 얼마나 재바른지 멥새가 황새를 좇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내 차는 1996년 산 에스페로다. 이미 차령이 15년이다. 때문에 중고차라기보다 폐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동안 33만 여 킬로미터를 달렸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것 없이 나다녀 혹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은 차량내부는 말짱하다. 그렇지만 외양은 검버섯이 피었고, 녹내가 덕지덕지하다. 보험회사 감정가로 채 20만원도 안 된다. 숫제 그저 준다고 해도 가져갈 사람이 없다. 오죽했으면 폐차장에서도 마다하다시피 할까.


어제 퇴근길에 단골 정비소에 들러 엔진오일을 보충했다. 차가 오래 되어 그런지 엔진오일을 갈아도 채 한 달 못 미쳐 엔진 부대끼는 소리로 달달거린다. 엔진 게이지가 낡아서 기름도 샌다. 운전 중에 기름 냄새가 심하다. 암튼 쓸데없는 오일 소모가 많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형차들 같으면 5천이나 만 킬로미터 정도를 주행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한다. 그에 비하면 너무나 자주 정비소를 들락거리는 나를 두고 정비주임은 갈 때마다 이참에 새 차 하나 바꾸라는 지청구가 끊이지 않는다.


학교 아이들도 그렇다. 고물차를 몰고 다녀 옹색하게 보이는지 ‘똥차 바꾸라’고 야단이다. 선생님 체면이 안 선단다. 개적인 생각으로 차는 굴러만 가면 그만인데…. 정작 나의 의사보다는 주변에서 손사래 치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가다가 서 버리면 어떻게 할 거냐고 지레 걱정까지 마다하지 않는다(사실 난 새 차를 구입할 여력도 없다. 만약 그럴 돈이 있으면 도서나 여행경비로 충당할 거다).


요즘 들어 사람 그 자체보다는 모는 차의 품격에 따라 사람을 가늠하는 것 같아 뜨악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설핏 비교가 되는 것이다. 내심 나잇살이 지천명에 다다랐건만 내 속도 은연중에 욕망의 나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동창모임에 갔다 온 날은 마음이 편치 않다. 끊임없이 마음이 일렁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가움보다는 건네받은 명함이나 몰고 온 차의 품격이 그간의 삶을 반추하는 것 같아 자리가 불편한 게 사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걸치고 있는 옷차림이나 들고 있는 가방에 자주 눈길이 가고, 빳빳한 지갑 하나에도 묘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살고 있는 거주지는 물론, 집의 평수와 필드 이야기 등등에 따른 생활상의 차이가 드러나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진다. 출발은 똑같이 했건만, 이미 속한 계층화도, 생활정도도, 성취의 결과도 확연하게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인생의 성패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그로인한 열패감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똥차로 인한 푸대접의 기억은 숱하다. 시내 어느 호텔에 내 고물차를 들이댔다가 그냥 쫓겨났다. 고교 총동문회 졸업30주년기념식 자리였다. 그들은 고객관리 차원에서 호텔 안에는 저급한 차량을 주차할 수 없다고 했다. 차량 등급으로 손님대접을 하겠다는 거였다. 근데 명색이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무참하게 거덜이 났으니 그 사실을 알고 난 동기들은 일말 분개하면서도 지청구 쏘아댄 화살로 내 넓은 낯짝을 다 가리고도 모자랐다.


아직 내 주변에는 아예 자동차운전면허증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운전을 마다하는 사람들도 많다(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달뜬 인간이냐?). 요즘 같은 세상에 자가운전을 하지 않으면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주위의 눈총도 따끔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두주불사하고 호탕하게 산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차로 인하여 감당해야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괜한 괴리감으로 마음 아파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도 새 차를 몰고 싶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돈키호테가 비쩍 마른 로시난테를 타고 광야를 내달아갔듯이 그침 없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가다가 수명이 다해 꼴까닥 서 버린다고 해도 자부심을 갖고 똥차를 계속 몰 것이다. 해묵은 김치 된장이 감칠맛 나듯이 손때 묻은 차는 정말 부담 없이 편안하다. 근데도 나는 새 집, 새 차, 새 옷, 새 구두, 새 가방, 새 휴대폰, 새 스마트폰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영락없는 속물건성이다. 2010. 09. 04.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그대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

박종국(교사, 수필가)


아프리카의 깊은 숲속에 있는 한 부락의 원주민들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풍습이 있다. 바로 ‘용서 주간’이라는 것이다. 날씨가 좋은 때에 실시되는 이 풍습은 모든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해주기로 서약하는 주간이다. 그것이 오해이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모두 용서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매사 바쁘게 사는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조그만 일에도 분개하며 용서하는 마음에 인색하다. 자기 마음속에 사랑을 베푸는 그릇을 작게 빚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눈부신 햇살 같은 기쁨만으로 이루어진 행복의 꽃이 아니다. 야무진 사랑은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과 눈물을 딛고 서야하는 것이다. 사랑만이 상처 난 사람들을 치료해 줄 수 있다.


자기 마음속에 사랑이 깃든 사랑은 마음껏 나누어야한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 사랑 또한 남에게 나눠준다고 해서 결코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기쁘고 즐거울 때, 어렵고 힘겨울 때, ‘나’보다 ‘우리’라는 말은 참 아름답다. ‘우리’라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누구나 다 알 게다. 사랑의 실천은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전염성이 워낙 강해서 금세 사람 사는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사랑하면 사람의 모습도 바뀌게 된다. 그가 누구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아무리 어렵고 힘 드는 일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그때부터 참다운 삶의 길은 열리게 마련이다. 하루하루 자기 속에 든 교만과 이기심을 덜어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어두운 밤 등불이 된다, 그때 그 사람은 비로소 참 행복을 알게 된다.


시인 타고르는 ‘사랑’을 ‘이해’라고 했다. 상대방의 고민이나 슬픔, 불만의 깊이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 모두를 배려해 준다. 때문에 인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우리’라는 따뜻한 말이 사라지는 세상이 되고 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우리’가 절실한 때이다.


꾸중과 원망, 질책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랑으로 곱게 양념한 용서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내가 먼저 실천하는 조그만 사랑이 나를 바꾸고, 내 주위를 바꾸며,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랑을 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미소 지을 수 있다. 그는, 우리들 가슴에 북소리를 울려주는 영혼의 음악가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삶은 단 한권의 책과 같다.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밖에 읽지 못하며, 다시는 앞장으로 되돌려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정된 이 삶의 책을 읽으면서 작은 기쁨에 너무 달뜨고, 작은 아픔에 너무 쉽게 절망한다. 지레짐작으로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한다. 사소한 일에 얼굴 붉히고, 자잘한 일에 쌍심지를 돋운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잦다. 생각을 담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한다. 언행일치가 잘 안 된다. 눈알 부라리며 싸우는 일이 많다. 정말이지 이러한 일들은 어깨 죽지 힘 빠지는 일이다.


사물의 껍데기는 자기를 보호하고 감추는 기능은 있지만 그 속의 진실은 껍데기와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외모나 옷차림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그 사람의 마음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보려 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이고, 들으려 하는 사람에게 더 잘 들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잘 느껴진다.


아름다움은 일부러 꾸미고 변화시키려고 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있을 자리에 있고 사람다운 향기가 담뿍 묻어나는 순간이다. 좋은 향기를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여 스스로의 삶에 충실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이 먼저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그대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하루를 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무심코 던진 말로 상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독화살 같은 말은 없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물건이나 돈을 잃어버렸을 때는 찾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왜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덜한 것인지. 보다 아름답게 살려고 한다면 매일 자신의 손과 얼굴을 씻듯 자신의 마음을 정갈히 가다듬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겠다. /2010. 09. 06.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 동생할거야  (0) 2010.09.11
[스크랩] 똥차 바꿔요  (0) 2010.09.11
[스크랩] 세상을 보는 너른 눈  (0) 2010.09.11
[스크랩] 금과(金果)는 농혈(膿血)  (0) 2010.09.11
[스크랩] 이타행(利他行)  (0) 2010.09.11

세상을 보는 너른 눈

박종국(교사, 수필가)


영국의 어느 일간지가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까’

라는 현상모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1위로 당선된 것은 놀랍게도 ‘모래성을 쌓는 어린아이’였습니다. 다음으로 ‘아기를 목욕시키는 엄마’였고, 3위가 ‘큰 수술을 가까스로 성공하고 막 수술실을 나서는 의사’, 4위가 ‘작품의 완성을 앞두고 콧노래를 흥얼대는 예술가’였답니다.

 어린이가 모래성을 쌓는 것을 어른의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하찮은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모래성도 불과 한두 시간 지나면 파도가 씻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아이들한테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을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머니가 아기를 목욕시키는 일이나,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 예술가가 자기 정열을 쏟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담뿍 쏟아낼 수 있는 일은 그저 즐겁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 하나만으로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것이다’고 딱 잘라서 매듭지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욕망의 소산인 행복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은 단지 ‘행복지수’로 그 가치를  가시화시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다 골고루 주어진 것이 아니요, 원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연히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찾아오기도 하고, 반면에 붙들고 있던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행복은 원래 몸이 약해 힘이 없었고 불행은 몸이 튼튼해서 힘이 세었습니다. 그래서 불행은 자기 힘만 믿고 행복을 만나기만 하면 못살게 굴었습니다. 행복은 불행의 등쌀에 못 이겨 피해 다니다가 마침내 하늘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주신 제우스와 상의를 했습니다.

 제우스는 행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가 여기에만 있겠다면 당장은 불행을 피할 수 있어 좋겠지만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도 생각해야 될 게 아니냐. 그러니까 이렇게 하려무나. 여기서 있다가 꼭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비로 내려가도록 해라. 그러면 불행한테 붙들릴 염려도 없을 테고 꼭 만나야 될 사람도 곧바로 찾아갈 수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인간은 좀처럼 행복을 만나가가 힘들고 불행만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 사는 일, 그다지 큰 것에 의미부여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조그만 것 하나에도 크게 만족하며 참 좋은 사랑을 우려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듯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내가 웃으면 세상이 웃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만 보입니다. 해변에 사는 사람에겐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문득 바라다본 수평선에 저녁달이 뜨는 순간, 아, 그때서야 그는 아름다운 바다의 신비에 취하게 됩니다. 세상은 내가 느끼는 것만이 보이고, 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별이, 저녁놀이, 날이면 날마다 저렇게도 찬란하게 열려 있는데도 우리는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우리는 너무 슬픈 것들만 보고, 너무 언짢은 것들만 보고 살고 있습니다. 속이 상하다 못해 좌절하고 자포자기까지 합니다. 희망도 없는 그저 캄캄한 날들만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어렵게 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쉬운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반 컵의 물은 반이 빈 듯 보이기도 하고 반이 찬 듯 보입니다. 비었다고 불평하든지, 찼다고 만족하든지, 그건 자기 의지에 따른 일입니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만이 존재하고 또 보는 대로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세상이 그래서 좋습니다. 비바람 치는 캄캄한 날에도 저 시커먼 먹장구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평화스런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세상은 보는 대로 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두루 너른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2010. 09. 07.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금과(金果)는 농혈(膿血) 

박종국(교사, 수필가)


벌써 개학한 지 한주일이 후딱 지났다. 방학 내내 만나지 못했던 아이들, 구월의 땡감처럼 햇살에 가무잡잡하게 그을려 야무지다. 언제든 학교는 아이들 웃음을 품어야 살아난다. 궂은 장맛비로 운동장가에 듬성듬성 웃자랐던 잡풀들도 이내 자취를 감췄다. 풀꽃들의 생존전략은 끈질긴 데가 있지만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도 맥을 못 추는가 보다. 그새 태풍이 세 번이나 연거푸 들이쳤다.


근 한달 달궜던 땅거죽이 순한 호흡을 가다듬을 때도 됐다. 그렇지만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도 후텁지근한 날씨는 여전하다. 여느 때보다 모기도 극성이다. 올해는 윤달에다 삼복이 열흘 간격으로 이어져 있어 늦더위가 구월까지 계속될 전망이란다. 워낙에 더위를 못 참아내는 탓에 여름나절이 지겹기까지 하다.


그런 와중에 오늘 치밀고 왔던 태풍이 순하게도 남해 먼 바다로 비켜가서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다. 덕분에 저녁바람이 시원할 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 논밭의 알곡이며 과수들이 거친 부대낌을 피한 까닭인지 한층 도드라져 보인다.


지난 주말 삼촌 기제사가 있었다. 그런데 갖가지 제수용품 중에서 유독이면 과일 값만 천정부지였다. 한여름 같으면 만원 남짓 하던 게 무려 세 곱이나 날개를 쳤다. 크기도 때깔도 그렇게 곱지 않은 것이었다. 제사를 모시고 음복을 하였더니 수박의 속살은 영 제 맛을 읽은 것이었다. 참외를 비롯한 여타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두어 번의 태풍으로 전국에 걸쳐 많은 과실들이 낙과를 하였다니 이번 추석명절에 선뜻 과일 사기가 겁난다.


일전에 창원 북면에서 대대적으로 과수원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그 역시 올해 작황이 그리 좋지 않단다. 무더운 날씨로 과실의 당도는 높아졌으나, 그에 반하여 잡벌레들이 극성이란다. 근데도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요즘은 다들 유기농 제품을 즐겨하고 농약사용을 꺼려하는 까닭에 울며 겨자 먹기로 절반의 결실은 포기했다는 얘기였다. 봄여름 하루도 빠짐없이 돌보았던 결과들이 힘없이 죽죽 빠져 내리는 것을 보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바다에 매여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농촌사람들도 날씨와 밀착되어 있다. 조금의 기온변화에도, 경황에 맞지 않는 바람 한 자락에도 시름이 깊어진다. 죽자고 농사를 지어봤자 뗄 것 다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산지에서 거저 가져가다시피한 과일들이 도회지 백화점 마트에서는 몇 곱절로 팔린다. 영락없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투전꾼이 버는 셈이다. 그러니 처진 어깨 더 처질 수밖에―.


추석을 앞두고 방송마다 제수용 과일이 비싸다고 흰소리를 해댄다. 물론 이상기후 징후로 물량이 달려서 그렇겠지만, 이건 숫제 봉이 김선달이가 살아서 활개를 치는 형국이다. 과일 한 알이 영글어서 입 안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한지 그 속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농투성이로 태어난 나도 지금껏 농촌에 살고 있지만 정작 농사를 짓지 않으니까 타는 농심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이번 태풍은 곱게 지났다. 결실을 앞둔 농부들은 움츠렸던 가슴을 쓸어내렸을 거다. 앞으로도 태풍이 잇따르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도통하게 잘 영근 과실들이 제 빛깔로 잘 익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덧붙여 이번 추석명절만큼은 과일 값 비싸다고 호사를 부리지 말고 한 알을 베어 물어도 그 속에 감당하고 있는 농부들의 소중한 피땀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산지에서부터 제값을 받는 유통구조를 바로 잡아 안타까운 농부들, 마른 담배 타는 냄새가 논두렁 밭두렁을 타고 넘지 않게 다독였으면. /2010. 09. 07.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이타행(利他行)

박종국(교사, 수필가)


여름 벌레는 얼음을 믿지 않습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살듯이, 한철 메뚜기가 사계절을 훑어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연못 속에 든 송사리가 너른 세상을 얘기할 수 없겠지요. 모두 넒은 세상의 형편을 모르는 사람을 빗대기에 딱 좋은 말입니다.


경황에 따라서 세상을 자세히, 꼼꼼하게 들여다 보아야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세상을 넓게 보아야 합니다. 뱀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자에게는 땅 위의 수풀이나 먼지밖에 눈에 띄지 않습니다. 먼 곳을 보려면 독수리같이 힘차게 높은 하늘을 날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창으로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보는 이상으로 넓고 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가장자리 밖의 세상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식견이 좁은 자는 스스로 넓게 보지 못해 그 입으로 망하고, 그 입술에 스스로 옭아 매입니다. 사물을 잘못 헤아리고 함부로 내뱉는 말은 겨누지 않고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은 결국 싫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낯을 찡그리고 살면 세월이 괴롭고 하는 일마다 짜증이 납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찔려봤자 무엇하겠습니까. 돌부리를 차면 제 발부리만 아픕니다. 마음이 편하면 하루하루가 잔치 기분이 납니다.


혜안을 갖고 남을 배려하는 다정스러운 말은 시원한 물보다도 더 목마름을 축여줍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말을 듣거나, 어떤 일을 당해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대해야겠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헐뜯어가면서 제 욕심을 차린다면 참 슬픈 일입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자기 것만으로 만족하려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얻어도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 하나에도 남을 배려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2010. 09. 08.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