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옷을 벗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걸 부끄러워하긴 커녕 깔깔대며 웃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내연산 수목원, 화단에 핀 야생초들이 모두 누드다. 구절초, 꿩의비름, 물옥잠들이 나체로 피어 저마다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꽃들뿐만이 아니다. 울타리처럼 둘러선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오동나무들도 모두 나체다. 수목원 연못으로 흘러드는 시냇물 소리도, 화단가에 잠든 고양이털을 슬쩍 만지고 가는 바람도 누드다. 지금 막 덤불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이며 백양나무 꼭대기 위로 흘러가는 솜털구름, 이 모든 것들이 누드다. 지금 이곳에서 누드가 아닌 것은 나뿐이다.
한때 누드열풍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누드화장품, 누드폰, 누드속옷. 너나없이 누드를 표방하며 상품화했다. 누드가 풍기는 약간의 에로티시즘과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이 상품구매 욕구를 야기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누드에 열광했으며 다투어 누드상품을 구매했다. 그건 어쩌면 문명화된 현대인들이 문명 이전의 원시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발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리가 분명해져 어떤 것에도 혹함이 없어야 한다는 불혹지년(不惑之年)을 몇 해 전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과 허영의 덩어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인들의 모임에 갔다 온 날에는 끊임없이 마음에 물결이 일기 일쑤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보다는 건네받은 명함의 지위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 같아 자리가 불편하다. 걸치고 있는 보석, 들고 있는 가방이나 입고 있는 옷에 따라 묘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살고 있는 거주지와 집의 크기, 타고 온 차의 종류에 따른 생활상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진다. 출발은 똑같이 했건만 이미 속한 세계도, 생활상도, 성취의 결과도 확연히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인생의 성패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그로인한 열패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다. 하나도 모자라 여러 겹의 옷을 덧입고 있다. 어디 옷들뿐이겠는가. 몸을 치장하고 있는 장신구며, 학벌, 명예, 권력, 아이와 남편에 대한 욕심까지. 나는 너무 두꺼운 가식과 위선의 옷으로 나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가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존클리어의 걸작인 '레이디 고디바'는 고디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얀 말을 타고 가는 그림이다. 고디바의 남편 레오프릭은 11세기 중엽 영국의 백작으로서 지방 영주였다. 당시 그는 농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기로 악명이 높았다. 꽃다운 열여섯 살의 고디바는 남편의 세금정책을 과감히 비판하고 세금을 낮추어달고 요구했다. 백작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세금 감면을 고려하겠다.'라고 빈정댔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했다. 주민들은 그날 창문과 커튼을 닫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애벌레의 몸을 벗지 않으면 나비는 자신을 완성하지 못한다. 뱀은 일생동안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다고 한다. 누드는 이처럼 제 자신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어서 본래의 자연 상태인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무소유란 모든 번뇌와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덜어내는 일이다. 무위자연의 도(道)를 설파한 노자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도 결국은 누드에 닿아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요즘 벗는 연습을 자주 해본다. 손톱의 매니큐어를 벗겨낸다든지, 집안의 잡다한 장식품을 떼어내고 빈 공간을 많이 만든다든지, 살림살이를 조금씩 줄이는 일이 그것들이다. 그건 일견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겠지만 작은 것들을 비워내야만 큰 것들도 비워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성적을 위하여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모는 일이며, 더 높은 지위를 위하여 남편을 다그치는 것들도 요즘은 조금씩 자제를 한다. 그러다 문득 비워낸 공간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 벽으로 빗살무늬처럼 비쳐드는 햇살이며, 출렁이며 창을 넘어 오는 노을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남편의 사랑이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것이었다.
김미루는 누드사진작가이다. 폐쇄된 기차역, 버려진 건물, 지하철, 터널 같은 도시의 폐허 속에서 자신의 누드를 직접 촬영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는 문명의 더께를 벗고 벌거벗음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웠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동양화에선 여백을 중요시한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때문이리라. 수묵화법도 먹의 농도를 풀어 풍경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사물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누드열풍이 사라진 것이 개인적으론 무척 아쉽다. 누드열풍을 조금 더 연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누드학교, 누드국회, 누드정상회담. 이처럼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누드를 놓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개인과 개인, 나라와 나라, 종교와 종교 간의 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환경운동가들이 모피반대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 전라(全裸)의 몸으로 시위를 하는 데모대의 모습을 본다. 인간의 벗은 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가 이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스스로 높은 지위에서 내려온 고디바처럼 이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지구보호라는 큰 이익을 위해 옷을 벗은 것이다.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저만치 수목원을 뛰어다닌다. 꾸미지 않은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야말로 누드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내게 꽃들과 나무와 바람이 손을 내민다. 나는 하나 둘 옷을 벗는다. 어느새 나도 누드가 되어 있었다. 어느 시인은 민둥산에서 옷을 벗고 구름의 자식들을 낳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수목원에서 옷을 벗고 꽃의 자식들을 낳는다. 나무와 바람의 자식들을 낳는다. 훌쩍 커버린 꽃과 나무와 바람들이 내 젖꼭지를 빤다. 어느덧 나는 꽃이 되어 있었다. 나무와 바람이 되어 있었다
오늘 오후 채소밭을 정리했다. 고랭지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오이넝쿨과 고춧대와 아욱대 등을 걷어 냈다. 여름날 내 식탁에 먹을 것을 다 주고 가꾸는 재미를 베풀어 준 채소의 끝자락이 서리를 맞아 어둡게 시들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가꾸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름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장한 내려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또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해와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에 자연을 되찾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자연뿐임을 아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개체인 나를 뛰어넘어 전체와 만난다. 눈앞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세상의 한 부분이고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한다. 그것은 삶에 새로운 향기와 빛을 부여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정신적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우고 소유와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분명하게 가릴 줄 안다. 문명이 만들어 낸 온갖 제품을 사용하면서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머지않아 늦가을 서릿바람에 저토록 무성한 나뭇잎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빈 가지에 때가 오면 또다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수필가는 자기가 몸소 체험한 이야기와 느낀 소감, 또는 자기가 관찰하고 생각한 바 등을 산문으로 기록한다. 그런 뜻에서 수필은 작가의 마음의 세계를 그리는 자화상에 가깝다.
화가들이 그리는 자화상의 경우에 있어서, 좋은 그림이 되기 위하여 화가의 용모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어느 전문가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화상의 예술적 가치는 주로 그리는 솜씨에 달렸으며, 화가의 용모가 수려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아마 의견이 다른 전문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용모가 뛰어난 화가만이 훌륭한 자화상을 그릴 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한 외모가 탁월한 화가가 되기에 큰 지장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화상이 아닌 다른 그림을 얼마든지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의 경우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수필이라는 것은 통념상 자기의 정신세계를 대상으로 삼도록 마련되어 있으므로, 화가의 경우처럼 묘사의 대상을 아무 데서나 구하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화가의 경우에는 그림 솜씨만 탁월하면 빈약하더라도 예술성이 높은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나, 수필가의 경우는 아무리 문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빈약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훌륭한 글을 쓰기는 매우 어렵다. 수필이 주는 감명이 문장력에서 오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필자의 인간성에 대한 공감이기 때문이다.
남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풍부하고 매력적인 필자의 정신세계가 있고, 그것을 탁월한 문장력으로 그렸을 때 진실로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수필이 생긴다고 하겠다.
그러나 훌륭한 인격자가 남다른 문장력으로 자서전을 썼을 때 가장 좋은 수필이 탄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풍부하고 매력적인 정신세계란 반드시 성현 또는 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위인이나 석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풍부한 체험이 내면화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밝거나 인심의 기미(機微)를 포착함이 날카로운 사람은 탁월한 표현력만 있으면 좋은 수필을 쓸 수가 있다.
아름다운 정감이 풍부하거나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수필에 적합한, 매력적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서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도 수필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며, 각박한 일상(日常) 속에서 잠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풍류를 아는 사람도 수필의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체험을 안으로 깊이 들여다보고 그 체험 속에 담긴 의미를 음미할 정도로 조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대개 수필을 쓸 수가 있다. 자기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겸허하고 자기의 부족함이나 실패담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솔직한 사람도 수필을 쓰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수필을 쓰기 위해서 특별나게 사람이 잘날 필요는 없으며, 오직 세상과 자기 자신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표현의 솜씨
좋은 수필을 위해서 요구되는 '탁월한 표현력'이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해서 전문가들 사이에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법한 일이며, 수필의 소재와 주제에 따라서 바람직한 표현의 양식도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력 내지 표현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소설이나 논문의 경우보다도 월등하게 크며, 또 수필의 문장론은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나의 빈약한 개인적 견해를 소개하기에도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만한 여유가 없으므로, 간단하게 몇 가지만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수필에서는 딱딱한 문장보다는 부드러운 문장을 선호해 왔다. 경수필(硬隨筆)이라는 것도 있어서 때로는 억세고 딱딱한 표현이 어울릴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수필의 맛은 역시 포근하고 부드러운 문장을 통하여 잘 빚어진다.
부드러운 문장이라 함은 미사여구나 수식어를 많이 사용한 이른바 '미문(美文)'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수식어를 남용한 문장은 좋은 문장이 아니다. 글을 쓰는 순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면 문장도 부드러워진다. 간결한 표현 가운데 많은 함축이 담겨 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언어는 본래 의사소통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말이든 글이든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좋은 언어가 아니다. 난삽한 문장은 대체로 의사의 전달에 어려움이 있다. 겉멋을 부린 문장에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따른다. 쉬운 말로 된 깨끗한 문장을 나는 좋게 본다.
그러나 글의 뜻을 소상히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지나쳐서 설명적인 말이 많은 글은 좋은 수필이 아니다. 독자의 독해력을 못 믿겠다는 듯이, 일일이 설명을 집어넣으면, 글의 밀도가 약해지면서 함축의 묘미가 달아난다. 필자 혼자서 모든 말을 하여 결론까지도 명백히 밝히는 것은 수필의 바람직한 수법이 아니며, 독자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읽고 난 뒤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글이 수필로서는 좋은 글이다.
논문을 쓸 경우에는 빈틈없이 따져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나, 수필에 있어서는 논리를 앞세우면 도리어 맛이 떨어질 경우가 많다. 수필에도 논리의 일관성은 있어야 하며, 앞과 뒤에 모순이 있거나 현실과 어긋나는 구절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논리의 연결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글 전체의 구성과 문단(文段)의 길이, 그리고 대화의 삽입 등도 넓은 의미의 표현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는 하지만 수필에도 구성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수필에도 짜임새는 있는 편이 바람직하며, 짜임새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구성을 짤 필요가 있다. 그러나 꾸몄다는 인상이 짙을 정도로 빈틈없는 틀을 짜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문단의 길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념(想念)의 연결의 원근을 따라서, 그리고 호흡(呼吸)의 흐름의 자연스러움을 따라서, 적절하게 잇고 끊으면 스스로 넘고 처짐이 없을 것이다.
과거에 주고받은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어려운 까닭에, 대화의 삽입에는 자연히 작위(作爲)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작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도 좋은 소설의 경우와 달라서, 수필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작위를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적절한 곳에 적절한 대화를 삽입함으로써 글의 묘미를 더할 수도 있다.
미화(美化)의 상한선
마음의 세계가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문장력이 탁월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문필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마음의 세계가 깊고 넓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글과 사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문필가의 글재주가 그의 사람됨의 크기를 재는 척도가 될 수는 물론 없으나, 글 가운데 필자의 사람됨이 크게 반영되는 것도 사실이다.
성품이 솔직한 사람은 대개 자기의 모습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글을 쓰는 경향이 있고, 공격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글에서도 남을 공격하는 버릇이 나타난다. 재주는 놀라우나 인덕(人德)이 약한 사람은 재치 있는 글을 쓰기는 쉬우나 품위가 있는 글을 쓰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성품이 부드러운 사람은 대개 문장도 부드럽고, 성격이 날카로운 사람은 대개 문장도 날카롭다.
그러나 수필 전문가 가운데엔 문장 또는 표현의 기교가 탁월하여 자신의 본바탕을 감출 수 있는 필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욕심이 없는 자화상을 그릴 수도 있고, 번뇌가 많으면서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한 글을 쓸 수도 있다. 늙은 필자가 젊은이 같은 글을 쓸 수도 있고, 젊은 필자가 늙은이 같은 글을 쓸 수도 있다. 명배우가 되면 여러 가지 다른 가면을 쓸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사정이다.
배우나 탤런트의 경우에는 자기의 본색(本色)에서 먼 배역을 잘 해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수필에 있어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늙은 사람을 대상으로 삼고 젊게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뛰어난 화가가 아니듯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붓장난을 하는 작가는 훌륭한 수필가가 아니다. 특히 수필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인 까닭에, 미화(美化)의 속임수는 더욱 큰 감점의 이유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는 글이 좋은 수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가 화장을 하고 싶듯이 수필가도 자기의 몸에 색동저고리를 입히고 싶어 한다. 이 유혹을 뿌리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전문적 수필가일수록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비법을 알고 있다. 전문가의 수필이 간혹 감탄과 역겨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사유가 여기에 있으며, 정말 좋은 수필을 쓰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평소의 자기보다 나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언제나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글을 쓰는 순간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게 마련이고, 따라서 글을 쓰는 동안의 정신 상태는 평소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를 경우가 많다. 이 높은 경지에 이른 순간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되면 평소의 자신보다 아름다운 자화상을 얻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높은 선과 낮은 선 사이를 왕래하며 부단히 방황한다. 한 사람의 마음의 상한선(上限線)은 그가 자신의 모습을 미화해서 그리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상한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필가는 자신이 늘 그 상한선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솔직함은 좋은 수필을 쓰기에 가장 긴요한 덕성이다.
높은 곳으로 향하는 마음이 간절하되 좀처럼 낮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 그것을 진솔하게 그리면 좋은 수필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수필이라 하여 글줄을 바꾸고 문단 나누기를 필자의 자의에만 맡길 수는 없다. 더구나 처음부터 줄이나 문단을 바꾸고 나눔이 없이 잇따라 써서도 안 될 것이다. 사실 문단을 나누지 않은 잇따른 글쓰기는 고대 소설에서 시작하여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장의 전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글을 적어 놓으면 읽는 사람은 부담을 느끼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 읽지 않으면 요지를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쉬어야 할는지 막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 글은 몇 문단으로 나누면 독자가 읽기도 편하고 내용을 이해하기에도 수월하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문단을 나눌 것인가.
통일된 한 생각으로 씌어진 문장들만으로 모듬을 만들어 놓으면 읽는 사람에게 편리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제각기 다른 생각, 즉 각 주제를 가진 모듬으로 묶어 문단으로 나누면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문단을 이루는 문장들은 그 문단이 나타내려는 주제(소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만일 문단 주제와 관련이 없거나 먼 문장이 있다면 잘된 글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문단의 소주제를 가장 핵심적으로 들어낸 문장을 주제문, 화제문(topic sentence), 또는 문단 주제문이라 한다. 그러니까 한 문단은 주제문과 이 주제문을 뒷받침하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 예문(1)은 소주제문과 뒷받침 문장들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완결된 문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예문(2)는 소주제문과 뒷받침 문장이 긴밀하지 못하여 잘 짜여진 문단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문(1)
우리 집 아침은 분주하다. 우리 집 식구 모두는 매일 동네 뒷산에 있는 약수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약수를 받아 온다. 집에 와서 아버지와 나는 아침 청소를 하고, 누나는 어머니를 도와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출근하시고, 누나와 나는 학교로 향한다.
예문(2)
우리 집의 아침은 분주하다. 아침에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약수터에서 운동하는 것은 건강에 이롭다. 건강은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므로 잘 지켜야 한다.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을 보면, 안쓰러워진다.
소주제문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 속에 용해되어 있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묘사적인 글에서는 주제문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글 전체의 내용이나 인상을 통하여 주제를 암시하게 된다. 위의 예문(1)은 소주제문(우리 집 아침은 분주하다.)이 겉으로 드러난 경우이고, 다음 예문 (3)은 소주제문(노랑이는 영리하다.)이 내용에 용해된 경우이다.
예문(3)]
한번은 어느 초심자가 두륜산을 등반하는데 이 노랑이가 따라오자 “저놈의 개가 길을 잃으려고 여기까지 오나.”하면서 자꾸 노랑이를 쫓아 보냈단다. 그러나 노랑이는 마냥 뒤따라오다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짖고는 따라오지 않고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냥 거기 서서 짖더라는 것이다. 그 때 손님은 길을 잃어 밤늦게야 완도 쪽으로 내려왔고, 시무룩이 돌아온 노랑이는 자기가 끝가지 안내하지 못한 그 손님이 여관으로 짐 찾으러 되돌아온 다음에야 펄펄 뛰었단다.
문단이 완결된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가져야 한다.
첫째, 통일성의 원리
각 문단의 소주제문을 뒷받침하는 문장들은 철저하게 소주제문을 뒷받침해야 한다. 소주제문이 없을 경우에는 문단을 이루는 문장들이 하나의 통일된 생각으로 모아져야 한다.
다음 예문(4)에서 -친 부분은 소주제문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와 엇갈리므로 삭제해야 필자의 생각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예문(4)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이 눈물에 어리어 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 선돌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것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을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이다.
둘째 연결성의 원리
문단을 구성하는 문장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문장을 시간적 순서, 공간적 순서, 논리적 순서에 맞게 배열해야 한다. 시간적 순서는, 오늘에서 어제, 그제의 순서거나, 그제에서 어제, 오늘의 순서여야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수월하다. 공간적 순서는 가까이에서 먼 데로 혹은 먼 데에서부터 가까이로, 오른 쪽에서 왼 쪽으로 등과 같이 일정한 방향을 잡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수월하다. 글감이 서로 인과 관계에 있을 때에는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좋다. 인과 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순리적으로 배열하면 된다.
시간적 순서에 따른 배열은 주로 사건의 진행 과정을 서술할 때 사용하고, 공간적 순서에 따른 배열은 자연 풍경이나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릴 때, 그리고 논리적 순서에 따른 배열은 글의 내용을 논리적 관계로 연결하는 방법으로, 앞 문단의 내용을 보충하여 설명하거나, 구체적 예를 들거나, 원인과 결과를 밝히거나, 근거를 들거나,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하거나, 내용을 보충하거나 전환하는 등이 이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문장이 긴밀하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지시어나 접속어를 사용하여 연결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문단과 문단을 연결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음 예문(5)는 제시문단(첫 문장)과 근거를 설명하는 문단으로 긴밀히 이어져 있다.
예문(5)
우리는 학문을 배우고 연구한다.
배우고 연구하는 데에는 실지로 경험해 보는 것, 몸소 행동하여 보는 것이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인류가 오랜 세월을 두고 경험한 것을 빼놓지 않고 되풀이 해볼 수는 없다. 우리는 선인들의 고귀한 경험의 축적에 의하여 획득한 문화유산을 손쉽게 계승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일에 선인과 동등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동시에 다시금 그의 발전도 꾀할 수 있다. 이처럼 선배들이 도달한 수준까지 따라가서, 그를 극복하여 새로운 향상의 길을 트려는 노력이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예문(6)은 원리와 적용으로 연결된 문단이다. 이는 원리-적용, 주장-증명, 일반-특수로 연결된 문단이라 할 수도 있다.
예문(6)
평화로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존재는 가장 비싼 문화의 장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처해있는 국가가 비운에 빠졌을 때에 있어서 시인은 비싼 문화의 장식을 떠나, 혹은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적 지위에 놓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제 1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군의 가혹한 압제 하에 있었던 벨기에 인에게 있어서 베르하렌은 조국의 한 시인 영(靈)으로 추앙되었다.
다음 예문(7)은 이유와 결과로 긴밀히 연결된 문단이다.
예문(7)
하나의 현상이라고 해도 일정한 순서로 진행되지 않는 한 예술적 감동이 작가의 기대대로 달성되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의 감동 효과를 위해선 작가가 훨씬 인상적인 표현을 시도해야 한다는 귀결을 얻게 된다.
셋째, 명확성의 원리
하나의 문단은 소주제를 명확히 나타내야한다. 이는 소주제문을 명기하면 된다.{ 위의 예문(1)과 예문(4)}. 소주제문이 없을 경우에는 문단을 이루는 문장들이 소주제를 분명히 나타내 주어야 한다. {위의 예문(3)}.
문장 하나하나에 대하여도 세심한 주의를 기우려야함은 물론이나, 기분에 따라 행(行)을 바꾸거나 문단을 나누는 일이 없어야 수필을 쓰는 바른 자세라 하겠다.
나는 지금까지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아홉 권의 수필집을 냈고, 어림잡아 6백여 편의 글을 써서 수필이란 탈을 씌워 우리 수필문단에 내놓았다. 1962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아웃사이더의 사랑이야기’란 작품을 써서 대학신문에 발표한 이래 무려 45년 동안 이만큼의 수필을 썼으면 지금쯤 도가 터서 누가 제목만 던져 주면 거미꽁무니에서 거미줄이 나오듯 술술 단숨에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처음에 글을 쓸 때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지진아(遲進兒)여서 그런지, 아니면 수필쓰기란 원래가 그런 것인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내가 처음으로 수필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지금과 사뭇 다른 여건이었다. 지금처럼 수필의 이론과 창작실기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도 없었고, 또 수필이론서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수필공부가 전부였고, 선배들이 발표한 수필작품을 읽으면서 어깨너머로 익혀야 했다. 등불도 없이 어두운 동굴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선배들의 작품을 읽고 흉내 내기를 되풀이하면서 수필작법을 스스로 터득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문학이론보다는 경험을 스승처럼 여기면서 수필을 썼다. 그런 어려움을 겪었기에 나는 최근에 문단에 얼굴을 내민 신진 수필가들이 한없이 부럽고 또 두렵다. 그래서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요즘에는 누구나 형편이 나아졌으니 좋은 수필집을 얼마든지 구해서 읽을 수 있고, 다양한 수필이론서들이 많이 출간되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수필이론을 독학할 수 있으며, 또 전국 방방곡곡의 대학교 평생교육원을 비롯하여 문화원과 도서관, 백화점 등 곳곳에서 수필문학강좌를 열고 있으니 수필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얼마나 좋아졌는가.
*수필소재와의 만남
나는 수필의 소재를 내 생활주변에서 찾는다. 나의 갖가지 체험은 물론이요,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까지도 나에게 좋은 소재를 제공해 준다. 그 소재가 내 눈에 띄는 순간 ‘이것으로 수필 한 편 써야겠다.’ 싶으면 바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런 창작태도가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처음 수필집을 한 권 내고나니 이제는 소재가 없어서 더 수필을 쓸 수 없겠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모두 수필의 소재라더니, 수필소재를 알아보는 눈만 있다면 우리 주변에는 수필 감이 무한대로 널려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수필은 문장으로 엮는 문학이다. 때문에 수필가라면 제대로 문장을 엮어갈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맞춤법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지니 <한글 맞춤법>과 <한글 누리집[www.hangeul.or.kr]> 등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맞춤법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소재로 요리한 수필일지라도 단어표기, 띄어쓰기, 어법, 어순, 문장부호 등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잘 씌어진 수필이 될 수 없고, 그런 작품은 독자를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특히 문장부호는 그 용법을 알고 정확하게 활용해야 한다. 특히 말줄임표(……)는 가운뎃점 6개를 찍는 것이 원칙인데도 초심자들은 마침표(.) 6개를 찍거나, 적당히 점 세 개를 찍는 이들도 없지 않다. 잘못된 버릇이다. 또 어떤 이는 물음표(?)나 느낌표(!) 다음에 이어서 마침표(.)를 나란히 찍기도 한다. 그러나 물음표나 느낌표도 엄연히 하나의 문장부호인 만큼 그 뒤에 마침표를 더 찍을 필요가 없다. 또 산문시와 짧은 수필은 그 길이로만 보면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구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문장부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그것은 산문시이고, 띄어쓰기를 잘 지키고 필요한 곳에 문장부호를 넣었으면 그건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수필가는 과학자들처럼 항상 물음표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생각하는 버릇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같은 소재일망정 수필가 나름의 독창적인 해석이 가능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耳目口鼻, 眞善美貞叔賢, 東西南北, 梅蘭菊竹, 身言書判, 仁義禮智信 등 한자숙어를 보면서 왜 한자의 배열순서를 그렇게 고정시켰을까를 따져 보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오랜 관행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왜 순서가 그렇게 되었을까, 그 순서를 바꾸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며 어순을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수필을 쓸 때 내 나름대로 정해둔 수필쓰기 5단계전략이 있다. *주제선정-관련소재 모으기-틀 짜기-원고 쓰기-글다듬기가 그것이다. 수필의 주제가 결정되면 그 주제와 연관된 소재들을 최대한 긁어모은다. 내 기억 속의 소재들도 징발하고, 참고 서적이나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관련 소재를 최대한 모은다. 열 가지든 스무 가지든 자료를 모아 메모를 한 뒤, 활용가치가 높은 소재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린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한 편의 수필을 쓴다. 좋은 주제를 만나 그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기도 하지만, 반대로 참신한 소재를 만나 그 소재에서 주제를 추출해 내기도 한다.
*나의 글다듬기 방식
나는 글을 다듬을 때마다 윤오영 선생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그 노인의 방망이를 깎는 태도가 바로 수필가에게 수필 다듬기의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 같아서다. 그 노인은 기차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만 방망이를 달라고 재촉하는 소비자에게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느냐며 나무란다. 그래도 어서 달라고 재촉하자 안 팔 테니 다른데 가서 사라고 엄포를 놓는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세상에 방망이 깎던 노인은 그 왕 앞에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셈이니 얼마나 꼬장꼬장한 장인(匠人)인가. 그 방망이 깎던 노인은 수필가는 물론 모든 예술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수필가라면 모름지기 이 방망이 깎던 노인에게서 진짜 수필가로서의 자세를 배워야 하리라. 청탁원고 마감에 쫓겨서 허둥지둥 원고를 마무리하여 보내는 수필가라면 그 노인의 태도를 보고 무엇인가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는 글을 다듬을 때 밤에 쓴 수필은 낮에, 비나 눈이 내릴 때 쓴 글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다시 읽어 보며 글을 다듬는다. 날씨의 분위기에 따라 내가 너무 감상에 치우쳐 쓰지 않았는지 검토하고자 그런 것이다. 나의 글다듬기는 며칠 또는 몇 주일,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나는 또 글다듬기를 할 때마다 제목과 서두, 내용, 결미까지 꼼꼼히 읽으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간다. 이 단어를 더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는 없을까, 토씨를 넣을 것인가 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한 글자라도 더 줄일 수는 없을까 궁리한다. 그것이 수필문장의 경제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자말이나 외래어는 가능한 한 우리말로 바꾼다. 그러다 보니 영어의 번역문투가 우리말에 깊이 스며들어 있고, 그런 사실을 우리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위하여’란 어휘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이 어휘는 영어 ‘~for +명사(동사 +ing, to +동사원형)’을 번역한 어투지 순수한 우리말의 어투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어휘가 순수한 우리말로 알고 즐겨 사용한다. ‘~위하여’를 ‘~하고자’ ‘~하려고’ 등으로 바꾸면 자연스러운 우리말 말투가 된다. 또 ‘~후’자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이는 한자 ‘後’자를 뜻하는 한자말인데 한문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한글세대까지도 무의식중에 이 글자를 사용한다. ‘後’자를 우리말로 바꾸면 ‘뒤’다. 그런데 버릇처럼 순수한 우리말 ‘뒤’자는 ‘後’자에 밀려나고 있다. ‘아침밥을 먹은 뒤’라고 표현하면 좋을 텐데 ‘아침밥을 먹은 후’라고 쓰면서도 그것이 한문문장 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원고를 마무리 지은 다음, 글을 다듬을 때는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 가면서 그 단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한 바꿔야 한다. 그래야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답고 쓰임새가 높은지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작품을 손질하고나면 초등학교 5,6학년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친근한 수필로 바뀐다. 그래야 수필가를 우리말 지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수필가는 조물주와 동격
수필가는 조물주와 동격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이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무생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바꿀 수도 있는 게 수필가다. 길가에서 만난 돌멩이, 농기구창고에서 만난 괭이나 낫에게도 목숨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게 수필가란 말이다. 그러니 수필가의 권능이 조물주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반대로 수필가는 살아있는 생물체에게서 목숨을 거두어 무생물처럼 다룰 수도 있다. 수필가는 모름지기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글쟁이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허투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 펜을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해서는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유명한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 들른 신혼부부의 대화에서였다. 건축가인 신랑이 신부에게 돌부처를 설명하면서, 불상(佛像)은 석공이 돌을 쪼아서 조각한 게 아니라 석공이 바위 속에 숨겨진 불상을 찾아낸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멋진 말을 들으면서 무릎을 쳤다.
“수필은 수필가가 수필소재를 찾아서 문자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수필가가 수필소재 속에 숨겨진 수필을 찾아내는 게 아닐까?”
붓 가는대로 쓰는 게 수필이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수필이며, 형식이 없는 게 수필이라고들 한다. 그렇게들 말장난을 하니까 여태까지 수필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수필쓰기도 더 어려워진다. 수필이란 게 일정한 틀이 있다면 19공탄 찍어내듯 하면 될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나는 지금도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수필을 나의 반려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남의 좋은 수필을 탐독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하루 세끼 밥을 먹듯 최소한 하루 세 편의 수필을 읽으려 노력한다. 내가 수필을 쓸 수 있는 한 앞으로도 나는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첫째 읽기 힘든 수필이 있고, 둘째 내용을 알 수 없는 수필이 있고, 셋째 재미없는 수필이 있고, 넷째 재미와 깨달음이 있는 수필이 있고, 다섯째 재미와 깨달음과 감동이 있는 수필이 있고, 여섯째 문학성이 높은 명 수필이 있다.
물론 첫째와 둘째처럼 겨우겨우 읽어갈 수 있는 작품은 수필 지망생들의 습작일 테고, 깨달음이 있고 재미가 있으면 그만 그만한 작품일 테고, 그것에 감동이 있고 오래도록 기억되고 다시 읽혀지는 작품은 명 수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첫째. 읽기 힘든 수필.
작품을 거침없이 읽어갈 수 없는 이유는 문장이 바르지 않거나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기 때문이다. 작가는 글을 쓸 때 문법에 맞는 바르고 정확한 문장을 써야 한다. 문장은 간결하고 담백해야 하고 어려운 단어는 되도록 피해야 하고 단어나 문장이 중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한 문장이 50자를 초과하게되면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니 되도록 너무 긴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적당한 길이의 문장이 두 세 차례 오고 짧은 문장을 쓰는 것이 좋다. 짧은 문장을 반복하여 쓰는 경우는 긴박감을 주고자 할 때에만 좋다.
서두의 첫 문장은 길지 않게, 그리고 내용 전체를 암시하는 그런 것이 좋다.
수필에서는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시나 소설과 달리 서술에 의해 주재를 전달해야 하기에 그것도 원고지 15매라는 작은 분량에서 해야 함으로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 내용을 알 수 없는 수필.
이 말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거나, 주제가 불 분명 하거나, 묘사가 잘 되지 않아서 그렇게 된다. 그래서 서두에서 말미까지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를 선명하게 이끌고 가야함은 물론 작가의 주장이 논리에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사물이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현장감 있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강조나 직유나 비유를 적절히 구사해서 독자가 머리 속에 실제 상황과 꼭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때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글에 제대로 옮겨졌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자신은 옳게 표현했다고 생각하나 뜻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 다듬기를 할 때 작가는 독자가 되어 냉정하게 자신의 글을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재미가 없는 수필
수필에서는 깨달음보다는 재미가 우선 되어야 한다. 아무리 유익한 메시지가 있어도 재미가 없으면 독자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수필에서의 재미는, 우선 소재가 좋아야 하겠지만 구성 또한 중요하다. 소제도 좋고 문장도 좋은데 종종 지루한 글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글의 구성이 탄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다.
구성은 주제의 전달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장치다. 말하자면 메시지의 구체적 전개과정이다. 어떤 방법으로 말 할 것인가 하는 말하는 방법 찾기가 바로 구성이다. 구성에는 단순구성, 복합구성, 산만구성, 긴축구성, 액자식구성등 여러 구성이 있는데 소제나 주재에 따라 구성을 달리 선택해야 한다.
또 서두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는 문제의 핵심에 바로 들어가는 것이 좋고, 너무 설명적이지 않아야 하고, 이야기의 속도를 느리지 않게 하여 가급적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 독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쉽게 결과를 알리지도 말아야 한다.
넷째. 재미와 깨달음이 있는 수필.
이 정도의 수필만 쓰게되어도 성공한 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필이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니 자기 과시나 자랑을 늘어놓기 쉽다. 독자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의식 없는 수필가들이 그런 글을 이제껏 써왔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수필은 신변잡사다.’하는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글 속에는 자기의 자랑이 아닌 어떤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알맹이,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렇다고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이어서는 안 된다. 또 질책하거나 명령하는 형식은 더 더욱 안 된다. 은근하게 암시적으로 깨달음을 던져 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수필이 어렵다는 것이다.
다섯째, 재미와 깨달음이 있고 감동이 있는 수필.
모든 수필가들이 이런 수필을 쓰려고 머리를 짜내고 있다. 수필작품의 완성도, 그것은 바로 이 감동이 아니겠는가. 감동과 완성도는 비례한다고 본다. 완성도란 좋은 소재에, 유려한 문장력, 적절한 구성, 상징과 은유를 구사한 멋들어진 표현, 주제가 선명하게 살아나고 논리가 정연했을 때 감동이 일어난다. 그러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진부한 표현이나 독창성이 없는 글은 감동을 줄 수가 없다. 깊은 사색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감동이란 말 그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통곡을 끌어내는 감동도 있을 것이고, 가슴을 짠하게 하는 감동도 있을 것이다. 너털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감동도 있는 반면에, 잔잔한 미소로 긴 여운을 남기는 감동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문학성이 높은 명 수필
감칠맛 나는 문장, 멋있는 표현, 그것만으로는 문학성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수필의 문학성은 앞에 열거했듯이 감칠맛 나는 유려한 문장, 멋들어진 독창적인 표현, 그것에다 재미있고, 깨달음이 있고, 감동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견을 달지 못하게 정말 확실하게 해두려면, 그 작품을 읽었던 독자가 먼 훗날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 다시 읽고싶은 작품이라야 진정한 문학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수필만큼 다양한 표현 형식을 가진, 그리고 그만큼 분류가 복잡한 문학은 없을 것이다. 분류의 관점과 시선에 따라서는 객관적 수필이냐 주관적 수필이냐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며, 표현의 기법에 중점을 둔다면 묘사적이냐 설명적이냐, 혹은 논증적이냐 서사적이냐로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 내용적 성격에 따라서는 철학적 수필, 과학적 수필, 비평적 수필, 역사적 수필, 종교적 수필, 개인적 수필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아질 것이고, 형식(세부적 장르)에 따라서는 일기체, 기행체, 서간체, 평론체, 기사체로의 분류도 가능하게 된다.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하면서 흔히 인용되는 말로 '수필의 소재는 무엇이나 좋다'라는 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인간성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다 좋다. 그 재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라고 한 피천득의 수필, <수필>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성찰해 보면 위의 말은 비단 수필문학에만 한정된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필이 아닌 소설이나 시에서도 생활경험, 자연관찰, 인간성이나 사회현상은 역시 중요한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때의 무드에 따라서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라는 말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라고 하는 정의와 더불어 수필문학의 창작 과정을 오도하는 데에 크게 한 몫을 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 문체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다양한 형식이 주는 자유스러움을 지적한 말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필자는 본고를 통하여 '자연'과 '인생'이 수필문학에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수필에서 '자연'의 비중은 어떠하며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그리고 수필에서의 자연은 인생과 어떻게 조화하고 있는가 분석하는 일은, 비단 수필의 소재에 대한 분석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며 수필 전체의 철학과 주제와 내용을 포괄하는 중요한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2. 수필에서의 자연의 비중
자연은 원래 우리 인간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되어 왔으며, 문학 역시 자연을 중요한 제재로 채택하여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발생을 자연의 모방에 두었고 프레밍거는 자연이 문학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척도라고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자연의 의미가 특히 부각되고 있는 것은 급속히 발달한 과학문명 속에서 인간이 상대적으로 경시 내지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며, 정신적 고독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갈등을 위무해 주고 고독을 해소해 주는 필수적 요소다. 자연의 재발견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문명생활에서 마모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상실의 위기에 처한 삶의 단순성과 진실성, 소박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애워싸고 있는 자연은 문학의 직접적인 소재와 주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순수 자연 그대로 삶의 배경이 되어 간접적인 감화를 주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자연 속에 태어나서 자연을 구성하며 살다가 결국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대자연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문학 장르 가운데 특히 시와 수필에 있어서의 자연의 비중은, 소설이나 희곡에 비하여 현저하게 크고 무겁다고 하겠다. 직면하는 하나의 자연물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한 편의 작품이 될 수도 있고 지나간 자연의 체험이 추억의 형태로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시나 수필에서만 가능할 뿐 소설이나 희곡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시와 수필이 주관적 자기 고백의 문학이며 길이가 짧고 분량이 적다는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에서 표현의 방법이 주관적이면 주관적일수록 작자의 개성과 철학이 보다 투명하게 노정될 수 있으며, 그 표현의 과정에서 자기를 보다 성실하게 돌아보고 사유의 깊이를 천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의 주관적 표현과 작자의 자기 성찰적 고백이라는 항목은 필연적으로 조화할 수 있는데, 자연은 여기 중요한 매개체로서 개입하게 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그만큼 삶의 규범을 제시하면서 조영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이나 선비들이 세상의 영달을 추구하다가 실망하면 항구적이며 여일 불변하는 자연에 귀의하게 되고, 낙향하여 안빈낙도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으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었던 것도 신과 같이 의연한 자연에 비추어 자기를 성찰하고자 노력했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필이나 시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길이가 짧고 분량이 적다는 특징은 표현 형식상에서 함축과 비유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자연은 문학작품에서 복잡다단한 인생을 상징하고 은유하는 오브제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가깝고 설득력 있는 보조관념으로서 인생을 대변하기도 한다.
최초의 한문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파한집(破閑集)이나 보한집(補閑集),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에 실려 있는 내용들은 詩話, 詩文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고사를 인용한 비평과 時評, 문담과 해학 등의 人間事는 자연을 빗대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소프의 우화도 자연계의 동식물 세계에 인간사를 빗대어 우의적으로 표현한 함축성 있는 이야기이다. 이를 만일 우의적으로 함축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건으로 다루었다면 길이가 엄청나게 길어졌을 것임은 물론이고 예술적 감동이나 아름다움도 감축되었을 것이다.
3. 주관적 자연과 은유적 인생
문학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모습은 여러 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시대에 따라 변천된 자연관에 기준을 둔다면 전통적 자연과 현대적 자연으로 나누고 전통적 자연의 의존성과 현대적 자연의 비정적 독립성을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객관적 자연과 주관적 자연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표현상의 비중에 따라서는 주체적 자연과 배경적 자연으로 나눌 수 있으며, 또 표현 기법상의 성격에 따라서는 순수 자연과 우의적 자연으로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고에서는 주체적 자연과 배경적 자연으로 분류하고 자연이 배제된 인생 수필과 함께 비교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주체적 자연이란 작품의 중심과 맥락이 자연 중심으로 이끌려 가는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인간과 인생이며, 자연으로 비유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배경적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이 하나의 배경(Setting)으로서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전자 후자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인간과 인생이 자연보다 소홀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작품상에 나타나는 작자의 대자연의 태도와 친화의 정도, 심리적 거리를 비교 참작하여 분류한 것일 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옹호하면서 조화와 융합을 도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품을 직접 감상해 보자.
동짓달이 가고 섣달이 성큼 오면 나의 출근길에는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강남의 압구정동 거리를 빠져 나오면 반공으로 치솟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라인더를 타는 느낌으로 단숨에 올라서면 좌우가 활짝 트이면서 한강이 파아랗게 넘실댄다. 바른쪽으로 강물, 왼쪽으로 지하철, 둘이서 나란히 한참을 달리면 왼쪽에 옥수역의 길다란 지붕이 나온다. 동호대교가 거의 북단에 이를 때 동쪽을 보면 중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작은 반도가 보인다. 바로 도봉산에서 시작하여 중랑구를 지나 성동구의 행당동을 한 바퀴 굽이돌아 이제 막 한강으로 달려드는 중랑천의 종점인 것이다. 나의 관심거리는 바로 그 합수점이었다. 나는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올 때면 철새를 기다리듯 그곳에 새로 돋는 작은 섬을 기다린 지 벌써 이십여 년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었다. 동짓달 찬바람이 스산해질 때면 중랑천의 물도 날마다 메말랐다. 그 얄팍해진 수면 위로 만두 모양의 둥근 흙더미가 조금씩 머리를 내밀더니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는 그것이 문득 고구마 모양의 길쭉한 섬으로 드러나 있었다. 춘분이 지나고 봄비가 내리고 그렇게 봄이 깊으면 그 고구마가 물에 잠기면서 이윽고 작은 만두로 남아 찰랑찰랑 물살에 몸부림하더니 어느 날 아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합수점에 거무튀튀한 물결이 힘차게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 두 달이면 나조차 그 자리에 넙죽 돋았던 섬을 잊기 마련이다. 하기야 지적에도 오르지 않을 섬. 물론 이름도 번지도 없는 섬인 것을 여름 날 시원한 바람을 만나면 나는 그쪽을 향하여 애써 섬을 기억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 섬은 분명한 섬이나, 적어도 일년의 절반은 햇빛에 반짝이는 섬이요, 일년의 절반은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물 속에 잠겨 있기에 말이다.
봄이 무르익으면 그 머리에 잡초는 물론 꺼벙한 키의 갈대도 솟았다. 그러나 여름밤 싱싱한 바람 속에 갑자기 침수의 비운을 맞았다. 겨우 얼굴을 내밀고 며칠쯤 하늘거리다 그렇게 사라졌다. 가을이 익어서 바람소리 윙윙거리다가 겨울이 오면 그 섬이 돋는다. 이른 봄 언덕에 돋는 쑥나물처럼. 그러나 작은 민둥산으로 돌아왔다. 잿빛 흙더미 위로 햇빛들이 모였다. 기온이 떨어지면 하얀 물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무언지 종알거리다가 훨훨 어디론지 날아갔다. 중랑천과 한강이 악수하는 곳에 비스듬히 누워서 하얗게 얼었을 적 그의 알몸을 보면 왠지 서럽기도 했다. 장마철에 먼길을 떠밀려 온 헌 신짝처럼 한 귀퉁이에 버려진 그 모습에서 말이다.
그 겨울 섬의 내력은 이럴 것이다. 도봉산으로부터 어쩌면 더 멀리 의정부 어디쯤부터 발원한 중랑천이 연도의 토사와 쓰레기를 거느리고 내려오다가 그 힘이 쇠진한데다 하구는 넓어지고, 한강으로부터 방해를 받아 그것들이 정체된 퇴적의 현상일 것이다. 그 하구를 시원스레 준설하여 물길을 뚫어주거나 중랑천의 혈맥이 보다 깨끗하고 창쾌하다면 거기에 서울의 토사나 쓰레기가 찌꺼기나 부스럼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두 줄기 강이 내려와 거기서 합수하지 않았더라면 저 비운의 겨울 섬은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든 것은 사람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면 게으름의 탓이요. 물길을 제 마음대로 흐르지 못하게 막은 탓일 것이다. 자연이 만든 일이라면 아무 할 말이 없다. 오직 저 하늘이 만든 일에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겨울 한철 저 중랑천에 돋아난 고구마 섬은 나에게 분명한 하나의 풍경이다. 그것이 비록 합수점에 돋아난 암이요 패잔병들의 수용소일지라도. 그 민둥한 돈대에 하얗게 모여 있는 햇빛과 철새를 지울 수 없다. - 허세욱 <겨울에 돋는 섬> 전문 -
위의 글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는 인간이지만 작자는 인간 중심의 시선이 아닌 자연 중심의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세밀하고 충실한 관찰은 자연물 하나 하나에 애정을 쏟아 거기에 인간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마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랑천과 한강이 합해지면서 작은 반도처럼 솟아오른 토사의 무더기. 작자는 '도봉산에서 시작하여 중랑구를 지나 성동구의 행당동을 한 바퀴 굽이 돌아 이제 막 한강으로 달려드는 중랑천의 종점'에 뜨거운 관심을 나타내면서 해마다 겨울이 다가올 때면 마치 철새를 기다리듯이 거기 새로 솟아오르는 작은 섬을 지금 20여 년째 기다리고 있다고 술회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지명들, '옥수역' '중랑천' '행당동' '강남의 압구정' 등의 고유명사들은 각각 하나씩의 시어처럼 살아 있다. 이들이 단순한 지명인데도 마치 생명을 지닌 자연의 명칭처럼 싱싱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작가가 거기 쏟는 성실한 배려, 인간으로서의 자책감이 포함된 염려 때문이 아닐까. 자연에 기울이는 작자의 애정은 지명에 기울인 애정으로 그치지 않고 지상에서의 삶에 기울이는 애정으로 확장되고 있다.
작자는 스스로 섬이라고 부르는 흙더미의 변화하는 모습을 '만두 모양의 둥근 흙더미' '고구마 모양의 길쭉한 섬' '이른 봄 언덕에 돋는 쑥나물' '비운의 겨울 섬' '합수점에 돋아난 암' '패잔병들의 수용소' '장마철에 먼길을 떠밀려 온 헌 신짝'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도봉산으로부터 어쩌면 더 멀리 의정부 어디쯤부터 발원한 중랑천이 연도의 토사와 쓰레기를 거느리고 내려오다가 그 힘이 쇠진한데다 하구는 넓어지고, 한강으로부터 방해를 받아 그것들이 정체된 퇴적의 현상일' 따름인 흙더미에 쏟는, 작자의 다양한 정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이 정의했듯이 한낱 정체된 쓰레기더미에 불과한 '섬'을 때로는 다정함으로 때로는 연민으로 그리고 때로는 죄책감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자는 자연에 생명을 부여하여 활성화하면서 비정의 자연을 유정의 자연으로 옹호하고 있으며 자연현상에 인생의 여러 가지 국면을 조화시키고 있다. 특히 허세욱의 수필 가운데 이러한 경향의 것들이 많다. 다시 그의 다른 작품 <풍우연변>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내린다. 바람을 동반하지 않은 오후를 주룩주룩 적신다. 여인네들 파라솔보다는 약간 큰 베우산을 바쳐 들고 고궁 돌담을 돌아 바짓가랑이가 절반쯤 젖도록 걷는 것은 차라리 온갖 화초가 난만한 공원을 걷기보다 유한하고 쾌적하다. 어느 정도의 어둠과 어느 정도의 습기는 차라리 눈부신 직사광에 메마른 뜰보다 다정하고 편안하다. 겨우 1평방 미터 남짓한 면적으로 하늘을 막고 풍우를 막고 더러는 보기 싫은 사람과의 피곤한 시야도 편리하게 막아 주는 곳이다. 이 세상 풍우가 한꺼번에 몰아친다 해도 그 널찍한 머리로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아 가느다란 우산대를 으스러지게 쥐어 본다. 한 손을 바지에 묻고 뚜벅뚜벅 거니노라면 지붕이나 처마를 손바닥에 받쳐 놓았는가 내심 든든하기만 하다. 방사형으로 짜여진 철사들은 서까래들이요, 여덟모 둘레는 더덩실 날 들한 팔각정 추녀요, 아기똥하게 턱을 내민 손잡이는 내 항상 먼 구름을 바라보던 석계가 아닌가? 비록 좁기는 하지만 보란 듯이 활개도 쳐보고 진동할 듯이 보무도 당당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갓에다 풍덩한 도포자락이나 입은 양 한유롭기도 하고 안방에 뒹구는 외동아들처럼 벽장에 숨겨 둔 엿단지라도 꺼내고 싶다. 고궁 돌담을 끼면 더욱 좋았다. 가로수 한 잎 한 잎 심심챦게 발끝에 떨어지면 이 길이 삭막하지 않았다.
조용히 접어드는 소년의 뒤안길, 그리고 오래오래 표류했던 여정들이 다시금 날개 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이토록 퐁요롭던 추억도, 쾌적했던 공간도 출렁이는 물결에 휩쓸리고 무엇인가 빼앗겨 버린 아픔이 다가선다. 어쩌면 내가 비에 흠뻑 젖어 낯설은 추녀 끝에 배꼽을 내밀고 서 있는 소년이 아닌가? 한쪽 어깨에 한기가 스며들더니 오싹해진다. 비에 젖지도 않았는데........ 이런 빗속이라면 두 사람이 걸어야 한다. 비좁은 우산 속이라서 젖는 면적은 많다 하겠지만 두 사람의 체온으로 한기를 쫓을 수 있어 좋은 것이다. 바람과 비의 언저리에선 가난한 어깨를 비벼야 한다. 손을 뻗치면 거기는 풍우세계 어깨를 내밀면 거기도 풍우세계, 비가 차가우면 될수록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바람이 세차면 될수록 옷깃을 여며야 한다.
풍우가 동으로 치면 서쪽으로 가리고 풍우가 남으로 치면 북쪽을 가려야 한다. 그리고 우산을 지면에 낮추어 허리도 가지런히 굽혀야 한다. 가다가 심한 회오리바람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버텨야 하며 가다가 사나운 소나기를 만나면 바지를 걷어 올려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우산이 찢기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이 풍우를 뚫고 가야 한다. 하수도가 모자라 넘치는 물바다를 건너다보면 우리가 의지하는 우산은 창해의 뜬 범선. 표류를 생각해 본다. 메일리 부부같이 긴긴 1백 18일도 뗏목을 생각해 본다. 손과 손을 맞잡은 채 떠내려가는. 그러나 우리는 돛을 세운 채 이 표류 직전을 건너가야 한다. 우연히 만났을 지라도 같은 우산 아래서는 퐁우동주, 그러니까 사나운 비바람에 조난도 불사하는 숙명으로 얼룩진 것이다. 그 속엔 사랑하는 풍경들이 있다. 등에 업힌 아들 쪽을 받치다가 흠뻑 버선을 적신 엄마. 어린 동생을 받쳐 주느라 꾸부정 키를 낮춘 형, 가냘픈 여인의 어깨를 안고 가다가 한쪽 어깨에 빗물이 툼벙이는 사내, 어깨동무하다가 활랑 날려 버린 꼬마들....... 그들은 즐겁게 철버덕거리고 있다. 낯설은 사람끼리라면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서먹했던 사람끼리라면 자연스레 해빙도 불러오고, 미웠던 사람끼리라면 여기 우중충한 우산 아래서 어깨를 비벼 보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면 옷이 젖는 줄을 모르는 곳이다. 그리고 길을 걷는 일을 제쳐놓고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곳이다. 그렇게 가까울 수 있는 것은 어깨와 어깨를 비벼서라기보다 손을 뻗치면 바로 그 곁에 빗줄기가 쏟아지기 때문이요, 그렇게 쾌적할 수 있는 것은 공간이 넓어서가 아니라 어깨를 내리면 바로 그 곁에 빗줄기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봄비 설레이는 창가에선 진달래꽃 술을 마시고 가을비 쓸쓸한 다락에선 따끈한 차를 마시듯 향그럽지만, 여름 장마 울부짖는 마루에선 지루한 장례를 치르고 겨울비 훌쩍이는 안방에선 할매의 해소를 듣듯 지겹다. 그러나 그것이 향그럽거나 지겹거나 우리가 늘 쾌적할 수도 다정할 수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산은 나의 지붕, 우리는 늘 바람과 비의 언저리에 서 있다. 바람과 비의 언저리에서 살게 된 지 너무너무 오랜지라 우리 사이엔 이미 우정의 이끼가 검푸르고 있는 것이다. 빗속을 거닌다. 빗방울이 차갑거든 한 걸음 내 곁으로 가다오게..... 바람 속을 거닌다. 바람결이 아프거든 우산을 기울이게...... - 허세욱 <풍우연변> 전문 -
앞의 글 <겨울에 돋는 섬>이 쓰레기처럼 떠밀려온 흙더미를 유심한 시선으로 관찰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풍우연변>은 자연현상인 풍우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투시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바람이 치는 날의 우산 아래와 고난과 역경으로 이어지는 세상살이를 연결하고 있다. 작자는 인생이란 결국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가는 것이며 그 방법 또한 천태만상임을 지적한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서 가되, 그것은 '겨우 1평방 미터 남짓한 면적'밖에 되지 않는 하나의 작은 우산 속이라는 것, 어깨를 부비면서 함께 가는 사람들은 모자간, 형제간, 연인간 혹은 친구간의 다양한 관계이며, 그들 사이는 낯설거나 서먹서먹하거나 밉거나 사랑하는 각기 다른 감정의 뉴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풍우의 모습과 그 정서가 각기 다르듯이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만 빗방울이 차갑거든 한 걸음 곁으로 다가서고, 바람결이 아프거든 우산을 기울이면서 가자는 작가의 제안에는 사랑과 지혜가 배여 있다. 작자가 삶을 지겹지 않게, 오히려 향기롭고 쾌적하며 다정하게 가꿀 수 있는 지혜는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허세욱은 말한다. '우산은 나의 지붕'이라고, '우리는 늘 바람과 비의 언저리에 서 있'지만 그러한 처지에 살게 된지 '너무너무 오랜지라 우리 사이엔 이미 우정의 이끼가 검푸르'게 무성했노라고. 이러한 삶의 각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복처럼 작품의 문체에 빛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독립된 자연물을 단지 자연물로서 상찬하는 다음과 같은 글도 있다.
숲속에는 온갖 자연이 가득 차 있다. 그곳은 풋풋한 냄새와 이끼 낀 수목들의 향기가 있어서 우리에게 싱그러운 환희와 벅찬 생동력을 아낌없이 가슴속에 불어넣어 준다. 나는 어릴 적에 인왕산 숲속 활터에 자주 놀러갔다. 그 활터에선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는 골짜기 냇물에 발을 담그고 친구들과 숲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였었다. 한줄기의 소나기가 지난 뒤, 언덕을 가로질러 동편 하늘에 걸리던 쌍무지개, 그걸 바라보며 꿈을 그리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때 나는 그 무지개에 꿈을 싣고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하늘은 레몬빛 노을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석양 속에서 숲들이 찬연히 빛났다. 빗방울들이 나뭇잎 위에 머물러 있었으리라. 문득 지난 가을 강원도 대관령 자연 휴양림에 갔던 생각이 난다. 여성문학회에서 40여명이 그곳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왔다. 그곳에는 숲이 우거지고 계절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는 마음껏 자연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었다. 봄에는 연록의 잎새들과 진달래꽃이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맑은 물이 가을날은 불타는 단풍이며, 겨울날의 나목들의 절규들.
숲속에는 골짜기가 있었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나무끝으로부터 숲 전체를 흔들며 옷자락에 휘감겨 왔다. 숲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수면 위에 반짝인다.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쉬임없이 들려온다. 숙소에는 모두 나무 이름을 붙였다. 벚나무방, 잣나무방, 등.......... 재미있는 이름들이다. 내 방에는 시인이 두 분, 시조시인이 한 분, 수필인이 둘, 모두 다섯분인데 전부터 다정했던 분들이다. 우리는 밤새 노래로 밤을 새웠다. 숲의 기운이 우리 몸에 옮겨진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S여사와 낙엽을 밟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낙엽을 밟으며'의 시심을 음미하면서 숲속의 소리를 들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숲소리의 반주와 어울려 자연의 하모니를 이루었다. 이렇게 자연의 숲소리를 들으니 내 몸은 동화되어 온몸이 자연의 소리로 휘감겨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정지된 상태가 되었다. 내가 나무가 되고 돌이 되고 바람이 되어 천년을 그곳에 살았는가 싶었다. 돌아오는 서울행 버스를 타고 고요히 생각에 잠겨보았다. 우리나라 전국토의 약 65%가 산악지대로 숲으로 덮여 있으며 한 때 삭막하도록 황페되었던 우리의 숲은 경제성장과 보조를 같이 하여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항상 살아 숨쉬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은 이제 겨우 제 모습으로 돌아온다. 봄의 숲은 설레임과 약동이, 여름 숲은 환회와 젊음이, 가을 숲에는 우수와 허무가, 겨울 숲은 인내와 그리움이, 윤회하면서 다시 윤회하면서 숲은 더 우거지고 더 자라난다. 이은상님의 <나무의 마음>의 마지막 구절을 흥얼거려본다.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들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 이 숙 <숲의 소리> 전문 -
이숙은 자연으로 인생을 애써 은유하려 하지도, 옹호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연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되 주관적이며 긍정적인 시각으로 예찬하였다. 따라서 위의 글에서 자연은 작자의 인생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숲에 얽힌 유년시절의 추억으로부터 근래에 다녀온 자연 휴양림의 감동, 숲을 가꾸고 보호하는 정부의 시책에 대한 신뢰와 긍지 또한 긍정적이다. 이 글은 시선이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순진한 경이로움에 차 있으며, 그 경이로움을 경이로움 그대로 계산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작자는 마치 자신의 삶의 깊이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숲의 우거짐과 정비례하는 것처럼 숲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봄의 숲은 설레임과 약동이, 여름 숲은 환회와 젊음이, 가을 숲은 우수와 허무가, 겨울 숲은 인내와 그리움이, 윤회하면서 다시 윤회하면서 숲은 더 우거지고 더 자라난다'고 정의하고 있는 작자는 '봄에는 연록의 잎새들과 진달래꽃이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맑은 물이 가을날은 불타는 단풍이며, 겨울날의 나목들의 절규'를 들을 줄을 안다. 만상은 즐기는 자의 것, 자연이 다만 객관의 자연으로 서 있을 때 그것은 얼마든지 비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을 예찬하면서 거기 스스로 동화되고 있는 작자는 자신의 삶과 얼굴을 드러내는 데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
4. 주관적 인생과 배경적 자연
'문학'과 '현실'은 대치되고 상반되면서도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문학은 현실의 토양 위에서 자라는 식물이지만 그 토양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되며, 현실은 문학으로 말미암아 여과되고 지양되며 개선되는 것이다. 수필에서 삶의 이야기는 결국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삶'이란 살아가는 일이며 달리는 '인생', 혹은 '현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사실적 기록인 역사적 리얼리즘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인간중심, 인생중심이되 인간을 넘어서고 인생을 넘어서는 창조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문학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 리얼리즘에 도입된 자연은 표현의 여과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즉 분위기를 조성하여 긴박성을 완만하게 하는 점, 리듬에 여유를 부여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자연 중심의 글이 되었든 인간 중심의 글이 되었든 어떤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며 인생이라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아무리 자연 중심 사상이 강하게 드러난 글이라 해도그것은 작자가 자연을 대하는 친화감을 비교 분류한 것일 뿐임을 지적한 바 있다. 다시 강조하자면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다. 인생이 표현되지 않은 문학은 문학 향수자인 인간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하는 작품으로 박연구의 다음과 같은 글은 우리들의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감나무·대추나무·앵두나무·등 시골집의 향수를 달래주는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데 이것들이 제법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만들어 준 비닐끈의 줄을 타고 더덕과 강낭콩의 넝쿨이 지붕 위로 뻗어 올라가고 있어서 밤이면 달빛을 받고 창에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더한층 시골집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비록 좁은 뜰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공간이 있는 내 집을 사랑한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이웃 아이들 중에는 마당 한쪽에 심어 놓은 벼 포기들을 보고 무슨 풀이냐고 묻기도 한다. 어린 내 외손주 녀석의 볼기짝보다도 좁은 면적이지만 물이 담긴 '논'에서는 미풍에도 살랑살랑 몸을 흔들고 있어서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고향 마을에서 보낸 여름날이 생각난다. 삼복더위에 밀짚모자를 쓰고 논의 김을 매면 나락(벼) 잎새에 팔꿈치가 훑이고 거기 땀이 닿자 어떻게나 쓰라렸는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픈 허리를 잠깐 쉬기 위해 서서 옷소매로 얼굴의 땀을 씻고 났을 때 불어오는 마파람의 시원함이란 그 경험이 없는 이에겐 전달할 방법이 없다. 논물이 끓을 정도로 불볕 더위가 계속되다가도 화방산 기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데불고 밀어닥친 소나기에 한 치는 더 자라 오른 듯 푸른 벼 포기들의 생동감이 온 들판을 일렁이고 있을 때, 어찌 농주 한사발을 기울이지 않고 뱃길 수 있었겠는가.
나는 원고를 쓰다가도 잘 풀리지 않으면 마당에 나가서 벼 포기를 바라본다. 그때 뇌리에는 푸른 바다처럼 넓은 고향의 들판이 떠오른다. 큰 수로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풍년이 연상되고 마음도 시원해진다. 이런 나에게 아내는 벼 포기 보는 값 내놓으라고 손을 벌린다. 그것들은 더덕이나 강낭콩처럼 아내의 솜씨로 이뤄진 풍경이기에, 나는 두 말 않고 일금 암만이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손에 돈을 쥐어주는 시늉을 하였더니 올 여름에는 꼭 시골에 가보자고 한다. 매년 여름이면 말로만 시골에 간다고 했으니 나를 믿지 않게도 되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밭도 논도 남의 것이 되기는 했지만, 그 밭둑 논둑을 거닐면서 도시 생활에서 찌든 마음의 때를 씻어보고 싶다. - 박연구 <여름 그리고 고향 2 > 전문 -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자연과 관련된 어떤 일들, 사람과 장소와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요 추억이 아닐까. 윗 글의 중심 내용은 작자가 고향 마을에서 보내던 여름날의 추억이다. 삼복더위 속에서의 노동의 힘듦과 그 뒤에 오는 상쾌함, 논물이 끓어오를 듯한 불볕 더위 끝에 '화방산' 기슭으로부터 불어닥치던 소나기, 푸른 벼 포기들이 일렁이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들이키던 농주.
'아내'는 도시 생활에 피로한 남편으로 하여금 고향의 자연을 맛보게 하려고 더덕을 심고 강낭콩 넝쿨을 올리고 비록 '어린 외손주 녀석의 볼기짝보다도 좁은 면적이지만' 마당 한 쪽에 벼 포기까지 심어 놓았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에 열심히 접근하려고 하는 작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그날 그날의 일상적 삶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존재는 일상적 삶에 여유를 회복하게 하고 광채를 더해 주는 존재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상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능가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자연을 가까이하는 데에 반드시 생활에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이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거리를 두는 경우는 허다하다. 지금 작자의 희망은 올 여름 고향의 논둑 밭둑(지금은 남의 것이 되었지만)을 거닐면서 도시생활에서 찌든 마음의 때를 씻는 일이다. 그러나 여름이면 늘 시골에 간다고 빈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내'는 믿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조금도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고백이다. 다시 인생의 무게가 더욱 중시되고 있는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동화가 부재한 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장수무대에 출연한 가족들을 보고는 내 막내인 네 살짜리 아들아이가 느닷없이 할머니를 사달라고 졸라대어 매우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 적도 있거니와......... 나의 어머니는 회갑을 훨씬 앞둔 연세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문득 영국의 계관시인 메이스피일드가 한 말이 뇌리를 스치곤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비롯한 어두운 뱃속에서 어머니의 생명이 나를 사람으로 만드셨다. 인간으로 탄생되기까지의 여러 달 동안,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의 하찮은 흙을 가꾸셨다. 그녀의 일부분이 죽지 않았던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움직이지도 못했으리라>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누구나가 <그녀의 일부분이 죽지 않았던들> 어찌 꽃과 나무와 별...... 그리고 태양이 빛나는 것을 환희로 바라보는 삶을 누릴 수 있었으랴만, 유독 나만은 <그녀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를 죽게하여> 생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머니>라는 어휘 하나에도 코가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잔병치레가 많아 어머니의 가슴께나 태우며 자란 내가 스무살을 전후해서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죽음의 문턱에서 허우적거렸을 때, 어머니의 헌신적(표현이 다 안된 말이지만)인 간호와 하늘에 닿는 기도가 아니었던들 오늘의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뜰에 핀 목련꽃이며 라일락꽃을 바라볼 수 있겠으며 올봄에 국민학교에 입학한 막내 아이의 손목을 잡고 출근하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으랴 싶으니, 성묘도 제대로 못한 불효를 새삼 뉘우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구정에는 막내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실로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가서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한 일이 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몽성산 산마루에는 잔설이 은빛으로 빛나는데 어머니 산소에도 하얀 눈이 덮여 있어서 숙연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오열이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오려 했으나 애써 참고는 아이놈에게 웃으며 물었다. 「할머니가 우리 강아지 왔구나 하시지 않니?」 아이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런(그러시는) 것 같아」 그때 산토끼 한 마리가 산소 옆을 휙 지나서 저편 골짜기로 뛰어 갔다. 아이놈은 그 토끼를 잡는다고 뒤따라 뛰어가고 있는데 송림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리마저 내 귀에는 어머니의 음성처럼 들렸던 것이다. 박연구 - <바람결에도 어머니의 음성이> 전문 -
위의 글에는 우리들의 투명하고 정직한 삶이 표현되어 있다. 가족과 함께 텔레비젼을 보고 아이의 손목을 잡고 출근하는 일, 일찍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고 가끔 고향에 가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성묘하는 일, 이런 일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작년이나 올해나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살아가는 일상사일 뿐이다. 인생이란 결국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밖에 달리는 표현할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연구의 수필이 감동을 준다면 깜짝 놀랄만큼 특별한 일이 아닌,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바로 나의 일처럼 가까워서 눈물나는 글이라는 점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의 소재는 대부분이 인생이며 인간이다. 그의 수필을 통하여 독자들은 그의 가족과 친구와 가깝게 사귈 수가 있으며, 그가 사랑하는 친지들을 만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을 얼마나 성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사람들을 얼마나 진솔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위의 글에도 산토끼가 있고 목련꽃이며 라일락꽃을 바라보는 기쁨이 언급되고는 있지만 이러한 자연물의 명칭은 인생의 기쁨을 표현하려는 소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수필과 인생의 중량
자연을 소재로 한 수필보다 그렇지 않은 수필이 더 많다. 자연물이 수필의 문맥상에 전혀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연을 소재한 수필 가운데 인생이 배제되어 있는 작품은 없지만, 오로지 인간과 인생만 있고 자연을 배제시킨 수필은 아주 많다. 인간과 인생의 비중은 그만큼 문학의 요체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은 '가치 있는 인생 체험을 예술적인 구조로 재현한 것, 사상과 감정을 통해서 인생을 탐구하고 심화하는 창조의 세계'이며, 그 중에서 수필은 '작게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부터 크게는 정치·경제·사회· 문화·법률·종교, 심지어는 습관과 무속에 이르기까지 해당'된다는 문학의 정의와 연관시킨다면 더욱 이해가 빨라지지 않을까 한다.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며 그 중에서도 수필은 그 인생의 세부까지도 확장하여 보여줄 수 있는 문학형식인 것이다. 인생을 주요 소재로 선택했을 경우,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보다 미적 쾌락(예술적인 감동)이 감하는 대신 교시적인 쾌락(교훈적 감동)이 커지는 것이 보통이다. 비유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을 피하고 사실로 직입하여 노출하고 폭로하고 투명하게 고백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자연배제의 인생 수필은 자칫 잘못하면 건조한 설교가 될 수도 있고, 여운이 없는 기록으로 그칠 위험도 있으나 반면 독자가 자신의 일처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만큼 이해의 폭도 커질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진다.
40년 간 지키던 교단을 떠나면서 사무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군 교육청에 갔다. 4년 전 일이다. 아래층에는 관리과가 자리해 있고 위층은 주로 장학사들이 일하는 공간인 학무과였다. 나는 관리과로 학무과로 위 아래층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내는 등 잡다한 절차를 밟느라 한나절이 넘도록 시달려야 했다. 결코 살갑다고만 할 수 없는 상부 관청, 거기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는 탁자 사이를 서류나부랭이나 들고 다니는 내 몰골에 스스로 초라해하고 또 지쳐 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경력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즉 1976년부터 1년간 근무했던 여천군 쌍봉초등학교 교명이 군 교육청 공보에 없다는 것이었다. 청에 비치되어 있는 내 인사기록카드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 근무기간과 근무학교가 허구인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력을 어떻게 인정하라는 것이냐'는 상황으로까지 몰린 나는 노랗게 기가 질린 끝에 '그렇다면 내가 그 동안 허위경력을 조작하여 오늘까지 나라의 녹을 축냈단 말이냐' 식의 항변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러 사람이 나서고 여러 경로로 추적하여 그 여천군이 여천시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쌍봉'이란 교명이 '여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 밝혀져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하면 당시 나는 화를 낼 기력조차 없이 허탈해져 그저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나를 시종 지켜보고 있던 장학계장 K씨가 관리과에 내려가려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일이 다 끝나가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해서 들고 있는 서류 하나만 관리과에 제출하면 된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듯싶던 그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여 서랍 속에 넣은 다음 나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관리과 문을 열고 나서는 나를 문밖에서 기다라고 있던 K씨, 내 손을 붙들며 자기와 차나 한 잔 나누고 갈리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의를 받고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라 근처 다방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마음 상하셨지요. 오늘 일, 널리 접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담당 작학사의 태도를 가리킨 것이었다. 당무자로서는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니었냐는 반응에, "한평생 애들에게 헌신하셨고 이제 더는 이 청사에 들를 일도 없으실 텐데 옆에서 보기에 매우 민망스러웠습니다" 하면서 안주머니에서 해서로 '頌功'이라 쓴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놓으면서 말을 잇는다. "퇴임식을 굳이 사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군내 여러 학교에서 퇴임식들을 갖는다고 알려왔습니다만 선생님 퇴임식에는 꼭 참석하려고 했는데 매우 서운합니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윗자리 사람의 입에 발린 찬사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매우 정중하고 진지한 자세여서 가슴이 뭉클해졌었다.
생각하면 그와 나는 군 장학사와 일선학교 평교사라는 단순한 관계로 만나 4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개인적으로 대좌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처음 대했을 때 서로 통성명하는 정식 인사를 나눈 일조차 없는 사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육현장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결코 자그마한 고을 장학사로서가 아니라 더 넓은 영역으로 또 깊이 있게 그의 교육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4년 전 내가 교단을 떠나려던 그때, 장학사 K씨는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나의 머리 속에 그려 넣어 주었다. 그랬던 그도 내년 초면 농촌의 작은 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교육일선을 떠날 것이라는 아쉬운 소식이 들려온다. - 김용복 <지워지지 않는 그림> 전문 -
자연이 배경으로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음은 물론, 하다못해 주변의 흔한 산이나 강이나 햇살이라는 말 한 마디도 위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4년 전 퇴임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사무 착오와 그로 인해 마음을 상했던 일화를 회고적 형태로 적었다.
그러나 단순히 사무 착오를 일으킨 행정상의 일을 드러내거나 어이없이 마음을 상했던 일을 돌이켜보기 위해서 적은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 와중에서도 나에게 하나의 잊혀지지 않는 그림처럼 남아 있게 된 K교장(당시 K 장학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떠나는 사람과 차라도 한 잔 한 다음 이별하고 싶어하는 K교장은 정중하고 진실하다. 그의 정중성과 진실성이 삽입되어 있지 않다면 이 글의 맛은 크게 절감되어 버릴 것이다. 지방 교육청의 권위 위주적 처사와 철저하지 못한 서류 정리, 잘 알아보지도 않고 닦아세우는 부당한 사람 대접만 부상하게 되고 그 결과 수필의 정서는 거칠어질 것이며, 감동도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 수필에서 자연이 표현되어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이 있다면 여유와 아름다움이 아닐까? 위의 수필은 자연이 제공하는 여유와 아름다움을 K교장의 인정스러움이 대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글의 내용에 허구가 삽입되었다고 해도 좋으며 K교장의 언행에 과장이 있다고 해도 좋다. 사실적인 내용만을 기록하는 것이 수필은 아니니까 말이다.
나의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이 있다. 여학교 시절에는 짓궂은 남학생들의 놀림도 꽤나 받았다. 어떤 심술장이는 대문 앞까지 졸졸 따라 오면서 한사코 놀려대기도 했다. 나는 학교 예술제 같은 때에 연극 주인공 노릇을 했는데 분장을 한 관계로 주근깨가 보이지 않은 탓이었던지 연애 편지도 많이 받았었다. 이런 일과 무슨 관련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나의 사춘기를 주근깨 때문에 고민한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젊었을 때 어쩌다 미장원엘 가면 '주근깨만 없으면 얼마나 훤하겠어요. 00병원에 가면 깨끗이 밀어준다는데......' 하면서 친절한 미용사들은 성형외과를 권하기도 하고 특효약에다 별별 비방을 귀띔해 주며 시험 해보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는 그저 웃으면서 고마워요하고 대답했을 뿐 그들이 권하는 녹두물이나 뜨물 세수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
이상한 것은 아침 저녁으로 거울을 대하면서도 남이 상기시켜 주지 않는 한 내 얼굴에 쪽 깔린 주근깨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사실이다. 미용사 아가씨의 친절한 코우치를 받고 있는 동안 미장원 거울 위에 확 돋아났던 나의 주근깨는 미장원 문만 나서면 또 어느샌지 모두 잦아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이를 먹었으니 자연 성형의원을 권하는 이조차 없어져 그것을 의식할 기회도 점점 더 줄어가고 있다. 나의 다정한 친구들은 주근째 없는 나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나의 얼굴이 갖는 흠까지도 나의 일부로서 사랑해 주고 있다. 본인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 흠을 남들인들 뭣이 그다지 안타까워 박박 기를 쓰며 미워할 까닭이 있겠는가? 딱이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나의 얼굴, 나의 젊음 나의 여성을 의식적으로 생활의 무기로 삼으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짧고 한계가 드려다 보이는 밑천이요 가장 닦이지 않는 원형적인 자산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딸은 곱게 길러 시집이나 보내고 싶다는 것이 아직도 우리네 어머니들의 공통된 꿈이다. 하기야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공통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곱다는 것이 어떻게 평생 살아가는 밑천이 될 수 있을까? 앞세대를 살아온 어머니들의 생각은 그렇다 해도 내일을 살아야 할 젊은 여성들이 제 용모 제 젊음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고 마침내는 이것으로써 의존적 생활 무기를 삼으려 하는 속셈이 들여다 보일 때, 나는 늘 민망스러운 생각이 들었었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밑천이 달랑달랑한 장사꾼 같아 불안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 김효자 <주근깨> 전문 -
역시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이 배제된 수필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수필의 맛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독특한 호소력과 감동력을 가지는 글이다. 자연물이 배제됨으로써 표현상의 박자가 다급해질 수도 있지만 그 다급함이 오히려 효과적인 문장기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핍진하는 건조체의 문장이 오히려 화려체의 다변을 압도할 수 있는 것처럼 본론 위주의 의미 중시가 힘을 가지게 된다. 인생 중심의 수필에서는 필연적으로 작자 자신을 깊게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드러난 자신이 필자 자신의 모습으로 머물지 않고 보편적 자아, 세계적 자아로 확대될 수 있을 때에 수필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자신을 폭로하면서까지 작가가 그 말을 쓰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폭로 이상의 가치를 겨냥한 것이며 이 가치야말로 수필 일반이 고민하고 의도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자연 중심의 수필에서 지나치게 비현실적 환상에 몰입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면 인생 중심의 수필에서 유의할 것은 지나치게 사실적인 설명으로 기록에만 충실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에서 무엇을 소재로 하였는가는 어떻게 썼는가의 중요성에 미치지 못한다. 소재의 선택은 심각하지 않다.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따라서 달라지고 바라보는 시각과 도출하는 결론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문체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자동차는 그저 굴러가기만 하고, 휴대폰은 통화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내 생각이 바뀌고 있다. 유행을 도외시한 생각들이 많은 부대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뚝하면 최신형으로 차를 바꾸고, 새 휴대폰이 출시되자마자 손에 넣고 있다. 유행에 민감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분명 유행 감각에 무딘 사람이다. 게다가 정보통신에 대한 친밀감도 떨어진다. 대문에 여러 모임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쉽게 꺼내는 ‘스마트폰’ 하나에도 주눅이 든다. 화재를 공유하려면 스마트폰을 갖춰야 할 상황이다.
한국 사회가 스마트폰 열풍에 휩싸인 지금, 인터넷 세상이 무색해지고 있다. 이제 스마트폰은 카페나 도서관은 물론, 해변이나 지하철, 심지어 강의실에까지 장소를 불문하고 일상화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거나 대학 강의에 참여하고 신문을 본다. 스마트폰이 만들어 낸 신풍속도다.
스마트폰 문화는 버스를 탈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 때문에 도서관 풍속도가 달라졌다.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거나 도서대출, 연체 상황도 당장에 조회 된다. 친구와 약속 장소를 정할 때도 긴요하다. 위치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즈니스 미팅에 이르기까지 스마트폰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젊은층은 기성세대처럼 명함을 권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명함도 다이어리도 필요 없다. ‘범프(BUMP)'을 설치하면 그냥 스마트폰을 한번 ’툭‘ 부딪치기만 하면 상대방의 이름과 연락처가 자동으로 저장된다.
스마트폰은 지난달 국내 판매량(누적) 300만대를 돌파한데 이어 연내 500만대, 내년 1000만대까지 팔릴 전망이고 보면, 현재 30-40대 직장인들에게는 이미 스마트폰이 다이어리의 대용품이다. 스마트폰의 일정 프로그램에 각종 회의나 약속 일정을 기록해 두면 된다. 무엇보다도 종이 면함이나 다이어리의 pc의 프로그램과 연동시킬 수 있기에 편리하다고 한다.
근데도 난 아직 구형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을 뿐 스마트폰 족에 편승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은연중에 스마트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언제쯤 내 손아귀에서 스마트폰의 마력이 넘쳐날 수 있을까.
그러나 벌써 ‘호사다마’를 호소하는 스마트폰 족이 생겨나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왜냐? 되레 스마트폰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마트폰이 족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특히 외국기업 한국지사에 근무하는 임원들일수록 심각한 폐해 양상을 보이고 있다(본사의 출근시간이 한국지사의 퇴근시간과 맞먹는 시차를 가진 업체라면 심각하다. 일단 블랙베리를 지급받은 이후 퇴근을 했더라도 본사에서 오는 이메일을 실시간으로 확인해서 답장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친구 중에도 ‘스마트폰 붐’에 편승했다가 떨쳐버린 이가 있다. 그는 줄곧 인터넷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스마트폰을 마다했을까? 그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스마트폰을 써 보니까 말마따나 자주 사용하는 앱은 몇 개도 안 되고, 요금이 비싸 실속이 없다고 한다. 아직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와 같은 고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스마트폰 족들이 족쇄처럼 느껴진다는 것으로 보아 꼭 필요한 것이지만 애물단지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2010. 0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