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과(金果)는 농혈(膿血) 

박종국(교사, 수필가)


벌써 개학한 지 한주일이 후딱 지났다. 방학 내내 만나지 못했던 아이들, 구월의 땡감처럼 햇살에 가무잡잡하게 그을려 야무지다. 언제든 학교는 아이들 웃음을 품어야 살아난다. 궂은 장맛비로 운동장가에 듬성듬성 웃자랐던 잡풀들도 이내 자취를 감췄다. 풀꽃들의 생존전략은 끈질긴 데가 있지만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도 맥을 못 추는가 보다. 그새 태풍이 세 번이나 연거푸 들이쳤다.


근 한달 달궜던 땅거죽이 순한 호흡을 가다듬을 때도 됐다. 그렇지만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도 후텁지근한 날씨는 여전하다. 여느 때보다 모기도 극성이다. 올해는 윤달에다 삼복이 열흘 간격으로 이어져 있어 늦더위가 구월까지 계속될 전망이란다. 워낙에 더위를 못 참아내는 탓에 여름나절이 지겹기까지 하다.


그런 와중에 오늘 치밀고 왔던 태풍이 순하게도 남해 먼 바다로 비켜가서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다. 덕분에 저녁바람이 시원할 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 논밭의 알곡이며 과수들이 거친 부대낌을 피한 까닭인지 한층 도드라져 보인다.


지난 주말 삼촌 기제사가 있었다. 그런데 갖가지 제수용품 중에서 유독이면 과일 값만 천정부지였다. 한여름 같으면 만원 남짓 하던 게 무려 세 곱이나 날개를 쳤다. 크기도 때깔도 그렇게 곱지 않은 것이었다. 제사를 모시고 음복을 하였더니 수박의 속살은 영 제 맛을 읽은 것이었다. 참외를 비롯한 여타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두어 번의 태풍으로 전국에 걸쳐 많은 과실들이 낙과를 하였다니 이번 추석명절에 선뜻 과일 사기가 겁난다.


일전에 창원 북면에서 대대적으로 과수원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그 역시 올해 작황이 그리 좋지 않단다. 무더운 날씨로 과실의 당도는 높아졌으나, 그에 반하여 잡벌레들이 극성이란다. 근데도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요즘은 다들 유기농 제품을 즐겨하고 농약사용을 꺼려하는 까닭에 울며 겨자 먹기로 절반의 결실은 포기했다는 얘기였다. 봄여름 하루도 빠짐없이 돌보았던 결과들이 힘없이 죽죽 빠져 내리는 것을 보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바다에 매여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농촌사람들도 날씨와 밀착되어 있다. 조금의 기온변화에도, 경황에 맞지 않는 바람 한 자락에도 시름이 깊어진다. 죽자고 농사를 지어봤자 뗄 것 다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산지에서 거저 가져가다시피한 과일들이 도회지 백화점 마트에서는 몇 곱절로 팔린다. 영락없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투전꾼이 버는 셈이다. 그러니 처진 어깨 더 처질 수밖에―.


추석을 앞두고 방송마다 제수용 과일이 비싸다고 흰소리를 해댄다. 물론 이상기후 징후로 물량이 달려서 그렇겠지만, 이건 숫제 봉이 김선달이가 살아서 활개를 치는 형국이다. 과일 한 알이 영글어서 입 안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한지 그 속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농투성이로 태어난 나도 지금껏 농촌에 살고 있지만 정작 농사를 짓지 않으니까 타는 농심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이번 태풍은 곱게 지났다. 결실을 앞둔 농부들은 움츠렸던 가슴을 쓸어내렸을 거다. 앞으로도 태풍이 잇따르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도통하게 잘 영근 과실들이 제 빛깔로 잘 익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덧붙여 이번 추석명절만큼은 과일 값 비싸다고 호사를 부리지 말고 한 알을 베어 물어도 그 속에 감당하고 있는 농부들의 소중한 피땀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산지에서부터 제값을 받는 유통구조를 바로 잡아 안타까운 농부들, 마른 담배 타는 냄새가 논두렁 밭두렁을 타고 넘지 않게 다독였으면. /2010. 09. 07.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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