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
 
날씨가 꽤 쌀쌀해졌습니다.
잔디밭이 황토밭처럼 누렇게 변했습니다. 그 위로 도토리와 밤나무 낙엽이 뒹굴고 있습니다. 낙엽을 굴리다가 마른 잔디를 말아올리는 심술궂은 바람이 여간 차갑지가 않습니다.
˝오늘로 겨울 양식 준비는 끝났어요,여보. 양식 창고 두 개가 가득한데 떨면서 이러고 다닐 것 없잖아요? 이제는 따뜻한 집에서 겨울 잠을 자고싶어요.˝
아내 다람쥐가 차가운 바람에 떨면서 말했습니다.
˝이까짓 추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게요? 순이 누나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편안히 겨울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소?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좀 더 기다려 봅시다.˝
남편 다람쥐가 아내를 달래듯 대꾸했습니다.
남편 다람쥐가 기다리는 사람은 이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고 있는 순이 누나입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위해 골프채가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따라 다니는 것이 순이 누나의 일입니다.
다람쥐는 거의 매일 한번씩은 순이 누나를 만납니다. 다람쥐가 사는 곳이 바로 골프장 안에 있는 잣나무 숲이기 때문입니다. 잣나무 속에 도토리나무와 밤나무도 몇 그루 드문드문 서 있습니다. 다람쥐가 좋아하는 식량이 많은 곳인데다 하루도 빠짐없이 순이 누나를 만날 수 있어 다람쥐는 그곳에 삽니다.

봄이 될 때까지 다람쥐는 순이 누나네 집에서 살았습니다. 식이를 위해 다람쥐 통의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 다람쥐의 일이었습니다.
˝누누이야, 다라쥐가 참 귀여워. 참 좋아. 이뻐.˝
다람쥐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순이 누나가 아니라 순이 누나의 동생 식이였습니다. 여섯살이 된 식이는 말도 잘 할 줄 모릅니다. 언제나 입을 반쯤 헤벌리고 있지만 입은 말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는데만 쓸려고 있는 듯한 아이입니다.
˝멍청이, 바보야, 밥 먹었니?˝
˝고기 먹었어. 고기 마맛있어. 우리 순이 누야가 사와다.˝
놀리는 또래들에게 대답하는 말이 고작 이렇습니다. 마을 아이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이 얻어맞아도 힝힝 우는 게 고작이고 대들거나 싸울 줄을 모릅니다. 그런 식이에게 진짜 동무가 돼 주는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순이 누나가 길가에서 팔고 있는 다람쥐를 사서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그런 식이를 위해서였습니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누구에겐지 얻어맞고는 잉잉 울면서 들어오곤 하던 식이가 요즘은 통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집에서 함께 놀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사판으로, 어머니는 파출부로 나갔습니다. 순이 누나도 골프장으로 나가 돈을 벌어야했습니다. 학교도 가지 못하는 식이는 그래서 혼자 집에서 울고 지내야만 했습니다.
순이 누나는 그런 식이가 너무 불쌍하고 가여웠습니다. 골프장 일이 끝나면 과자를 사 들고 불이나케 집으로 돌아와 식이와 놀아주었습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씻어주고, 그림책도 읽어주며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그러나 한낮에는 언제나 식이 혼자 집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식이를 위해 지난 봄에 큰 맘 먹고 사 온 것이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였습니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는 식이에게 귀여운 다람쥐가 아주 좋은 동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식아, 다람쥐야. 귀엽지? ˝
순이 누나는 다람쥐통을 식이에게 선물하며 말했습니다. 귀엽다는 말에 다람쥐는 새 주인을 위해 열심히 통안의 쳇바퀴를 돌렸습니다.
˝누이이야, 다라쥐 참 귀엽다. 참 좋다. 히히히 ...이거 내 장난감이가?˝
˝그럼, 장난감이 아니고 우리 식이 동무지. 식이 너 줄려고 누나가 사 온 거야.˝
그 날부터 다람쥐는 식이의 동무가 되었습니다. 식이는 다람쥐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다람쥐통을 들고 나가 마을 아이들에게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다람쥐는 자기 때문에 동무들 앞에서 뽑내고, 자랑하는 식이를 위해 통안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렸습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다람쥐는 겨울 잠을 자야 합니다. 개구리나 뱀, 곰처럼 겨울잠을 자며 겨울을 나야 합니다. 먹이는 며칠만에 한 번씩 잠이 깨면 먹고 이내 다시 잠이 듭니다.
그런데 식이는 다람쥐가 겨울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일어나 다라쥐야! 돌려, 내 하고 놀아.˝
식이는 잠이 들만하면 다람쥐통을 흔들며 다람쥐를 깨웠습니다. 바깥 날씨가 추워서 방안에만 있어야 하는 식이는 다람쥐를 잠시도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다라쥐야, 밤 머어.마있다, 머어.˝
먹고싶지도 않은데 자꾸만 먹이를 넣어주며 흔들어댑니다. 그래서 다람쥐는 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식이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도 남겨 줍니다. 다람쥐는 싫어하는 생선의 비린내 때문에 더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끝내 다람쥐는 병이 들었습니다. 다른 다람쥐들처럼 겨울잠을 자지 못하니 병이날 건 뻔한 이치였습니다.
˝아이구, 이러다가 다람쥐가 죽고 말겠구나! 식아,다람쥐가 병이 났어. 안되겠다. 병원에 보내야 되겠다.˝
축 늘어진 다람쥐를 보고 순이 누나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고는 다람쥐를 병원에 보냈다고 식이를 속이고 다람쥐 집처럼 껌껌한 다락에 다람쥐통을 몰래 올려 놓았습니다. 다람쥐는 땅속 굴처럼 조용하진 않지만 껌껌한 다락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짧은 겨울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순이 누나는 다람쥐 대신 강아지 한 마리를 식이 동무로 사다 주었습니다. 식이는 다람쥐보다 크고 볼과 손을 핥으며 귀엽게 안겨드는 강아지에게 푹 빠져서 다람쥐를 잊어버렸습니다.
˝안되겠다. 네 동무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골프장 숲속에 살게 하마. 먹을 것도 많은 곳이니 좋을 게다.˝
봄이 되어도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다람쥐를 보자 순이 누나는 걱정이 되어 다람쥐를 골프장 안의 잣나무 숲속에 놓아주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기운을 차린 다람쥐는 고마운 순이 누나를 잊지 않고, 매일 그곳을 지나가는 순이 누나 앞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안녕? 잘 있었니? ˝
다람쥐를 보면 순이 누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합니다.
˝난 이렇게 잘 있어요, 고마운 순이 누나!˝
다람쥐는 팔짝팔짝 재주를 넘으며 대답합니다.
순이 누나는 그런 다람쥐를 매일 볼 수 있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덧 다람쥐도 귀여운 색시를 맞았습니다. 그걸 누구보다도 먼저 순이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색시와 함께 순이 누나 앞으로 달려나가 팔짝팔짝 자랑을 하였습니다.
˝오라! 너도 귀여운 색씨를 얻었구나! 축하해, 다람쥐야!˝
다람쥐의 마음을 금방 알아챈 순이 누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그런 순이 누나를 위해 다람쥐 부부는 더 신나게 팔짝팔짝 재주를 넘었습니다.

초겨울이 시작되면서 순이 누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골프장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다람쥐 부부는 순이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이 누나가 닷새만에 골프장에 나온 날은 첫얼음이 언 추운 날이었습니다. 다람쥐가 사는 잣나무 숲을 지나며 순이 누나는 습관처럼 중얼거렸습니다.
˝ 진작 겨울 잠을 자러 굴 속에 들어갔을텐데....그래도 한 번 보고싶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이 누나 앞으로 다람쥐 두 마리가 쪼르르 달려왔습니다.
˝ 아니, 너희들 여태?˝
순이 누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수척해진 얼굴에 함빡 웃음을 흘렸습니다.
˝누나, 걱정이 되어 여태 기다렸어요. 우리는 이제 편안히 겨울 잠을 자러 가요.˝
순이 누나 앞에서 입을 오물거린 두어번 팔짝팔짝 재주를 넘은 다람쥐 부부는 쏜살같이 잣나무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헛참, 이 추위에 아직도 겨울잠을 자지 않는 다람쥐가 있구먼.˝
영문을 모르는 골프 손님이 신기하다는 듯 순이 누나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에 순이 누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다람쥐가 사라진 잣나무 숲을 향해 손은 흔들었습니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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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 한 그릇

 

글/ 정 혁

 

 

언젠가 아는 분과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마침 중복인데 보신탕을 좋아하느냐고 하였더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라고 한다. 평소에 잘 한다는 보신탕집들을 생각하다가 종로에 있는 집으로 함께 하였다. 미리 예약을 하면서 가장 맛있는 부위를 준비해 놓으라고 부탁을 하고 출발하여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도 중복 날 이어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1, 2층 홀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약이고 뭐고 손님들이 많이 몰리다 보니 자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입장 번호표를 받아들고 땀을 흘리며 현관에서 10여 분 간 기다리다가 겨우 자리가 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인이 미안하다고 하며 맛있는 부위를 내어와 그런 대로 만족하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초대한 분을 모시고 간 자리에서 식사마저 맛이 없었다면 낭패를 당할 번하였는데 비록 인사치레라 할지라도 음식이 맛있다고 하니 체면은 세운 셈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여름 복더위 중에는 더위를 이기고 몸보신한다는 이유로 보양식을 많이 먹는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보신탕과 삼계탕이다. 그런데 늘 이 보신탕이 문제다. 소위 동물애호가들이 많은 서양 사람들 중에는 이 개고기를 즐겨먹는 한국인들을 악하고 미개한 종족들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저들 중에는 그러한 한국인들이 야만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우리의 문화 관습이 틀리고 음식문화가 다르며 풍속이 다른 것을.

 

사실 먹는 것 가지고 따지자면 우리가 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그렇지 달팽이를 음식이라고 먹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서양인들은 아니지만 곰 발바닥이나 상어지느러미, 원숭이 골이나 눈알을 요리해 먹는 종족들이 과연 사람이라면 할 짓인가? 그런데 오히려 점잖은 동양예의지국 사람들을 추악한 야만인이라고 하니 가당치도 않은 어불성설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내친김에 억지라도 궤변이면 궤변이라고 할 내 주장을 한번 말하려고 한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어도 일찍이 <추악한 미국인> 이라는 책은 보았으나 그만 때쯤 추악한 한국인이라는 책은 있지도 않았다. 다만 1964년인가, 김진만의 <아글리 코리안>이라는 제목이 붙은 수필집(?) 같은 것이 탐구당에서 탐구신서로 발간되기는 하였으나 짤막한 글의 제목을 책제목으로 붙여 논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건 단지 <어글리 아메리칸>에 빗댄 글과 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야만인이라는 비하의 말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의예지를 중시하는 고등문화민족이다. 배달민족이요 백의민족이다. 그래서 오히려 옛날부터 우리 민족 아닌 종족들을 보고 오랑캐라고 부르지 안했던가? 진화론적으로 보면 인류의 진화가 가장 빠르게 되고 민족의 역사도 짧지 않은 우리나라이고 한민족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털북숭이가 없다. 서양 사람들이 오히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털북숭이가 많은 것을 보면 그만큼 진화가 덜된 인종이 서양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족이 더 야만에 가까운가? 억지를 또 부려보자. 우리 옛 말에도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과 같다. 동물애호가들이 많은 서양 사람들은 그야말로 동물(야만)에 가까우니까 동물을 애호한다. 그러면서도 가장 약육강식의 지배논리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테리비전에 자주 나오는 동물의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항상 약한 동물들은 강한 동물들에게 잔인하게 잡혀 먹히는 비정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해설가들은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생명이 소멸되고 순환되는 자연의 역사라고 설명한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자의 논리에 다름 아니고 힘 있는 나라가 약소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태도이다. 야만인이 얼마나 힘이 센가? 힘으로 하자면 사람이 고릴라나 오랑우탕을 당할 재간이 없다. 왜 그런가? 힘이 셀뿐만 아니라 인정사정도 없으니까. 인정은 사람(人)에게만 있는 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동물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애완동물이니까 먹지 말라는 말도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애완동물이 어디 개에게만 국한된 시대인가?

 

애완동물로 취급되는 동물들을 보면 돼지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악어나 뱀도 있듯이 그 종류가 실로 다양하다. 그리고 애완동물이던 아니던 간에 사람들이 먹는 종류 역시 다양하다. 따라서 나라마다 전통과 인습이 제 각기 다른 음식문화를 가지고 무조건 시비를 걸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한 때, 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맞춰 한국정부에서는 외국의 그런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서인지 보신탕집이나 뱀탕집들을 시내에서 몰아내고 영업을 못하게 제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나는 검찰청과 법원청사의 부근에 있는 서초동의 유명하다는 어느 보신탕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음식점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런 행정조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정 조치를 내린 국무위원들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은 개의치 않고 개고기 집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고관대작의 잘 잘못을 가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역설적으로 그만큼 보신탕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애호음식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중복 하루 전날 우리나라의 동물애호가들도 피켓을 들고 동물을 사랑하자는 캠페인(시위?)을 벌렸다는 소식인 데도 많은 사람들이 보신탕집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고 본다. 또 한 가지 눈에 띄었던 것은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보신탕집 드나드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는데 손님들 중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으며 개중에는 처녀들도 곧잘 들어와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보신탕의 매력인지 복날의 위력인지를 다시 느꼈던 하루였다.

 

글을 쓰다 보니 어쩌다가 보신탕론으로 빠져 그야말로 보신탕 맛과 글맛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주장들은 나의 억지스런 주장을 한번 한 것에 불과 하니까 혹시 동물애호가들이나 보신탕을 혐오하고 보신탕을 먹는 사람마저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널리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원래 이 글을 쓰고자 했던 뜻은 보신탕을 먹을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이다. 나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아버지는 보신탕을 무척이나 좋아 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잘 아는 아버지의 친구와 후배들은 매년 복 때가되면 아예 개 한 마리를 요리해 놓고 아버지를 초대하곤 하였다. 그런 행사를 여러 번 보았다.

 

아버지는 슬하의 8남매를 키우시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셨다. 내가 넷째지만 장남이어서 그런지 이런 저런 의논은 늘 나에게 해 오셨다. 군대를 마치고 대학 재학시절에 결혼을 한 후로도 형편상 아버지를 모시지는 못했지만 가까이 살고 계시는 부모님 댁을 오며가며 찾아뵙곤 하였다. 하루는 부모님 댁을 들렀더니 아버지가 아직 점심을 들지 않았다고 하셨다.

 

마침 한 여름이고 해서 보신탕을 사드릴 생각으로 택시를 타고 그 당시 내가 살던 인천에서는 제일 잘 한다는 깜상네 라는 별명의 보신탕집으로 모시고 같다. 그리고 보신탕 한 그릇씩을 맛있게 비우고 나온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연년생인 딸 둘이 있었고 직장 초년생이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내 딴에는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 가며 아버지께 보신탕을 한번 접한다는 효심이 발동하여 택시로 모시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운 일이 되는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후에 나이가 들고 이런 저런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신탕집을 여러 차례 드나들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보신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드나들다 보니 보신탕은 그야 말로 탕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칼 판 위에 수육이라는 고기 요리도 있고 전골도 있고 나중에는 거기에 밥을 볶아 먹는 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라고 왜 그런 것이 없었겠는가? 그래서인지 보신탕집에 들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은 보신탕 한 그릇이 전부인양 생각했던 무지가 빚은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과 불효에 가슴이 메어질 때가 많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나도 보신탕 요리를 잘 몰라 그냥 뚝배기 탕 만 있는 줄 알았고, 그때 주머니 사정도 구차하던 시절이었으나 그까짓 탕 값이야 얼마나 하랴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칼판 위에 얹어 내오는 수육이나 전골요리를 알았다면 아예 아버지를 보신탕집에 모시고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자장면을 여덟 그릇이나 잡수실 정도로 대식가였다고 한다. 또한 미식가이기도 하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결혼까지 한 큰 아들이 모처럼 사 드렸던 보신탕 뚝배기 한 그릇을 비우시고서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갑작 스러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 딴에는 효도한답시고 사 들였던 보신탕 한 그릇, 그것을 잡수시고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생각을 하면 아버지 살아 계실 때에 그야말로 맛있는 보신탕 요리 한번 제대로 사드리지 못했던 불효가 죄송스러워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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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수


무척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 사람들은 밥을 앞에 놓고 신을 섬기며, 밥을 먹으며 구원을 바란다. 허구한 날 두세 끼를 먹으니 밥은 그저 세속적이고, 도무지 그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해탈과 보이지 않는 진리는 밥 저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없이 과연 그런 삶이 가능할까. 세상에는 섬기고 싶어도 섬길 밥이 없고 밥이 구원인 인류도 많다.

 

한때, 우리 가족의 밥이 몹시 위태하였다. 재화에 과도한 탐욕과 집착을 부리다가 내가 우리 집 살림을 거덜내고 말았다. 적빈이 된 것이다. 한국의 이별 문화에서‘밥 잘 먹고……’라는 송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그 말 속에는 절망하지 말고, 잘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환란을 피해 나는 가족에게 가족은 나에게 그저 그 말만을 수없이 건네며 결별하였다.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읍으로 떠났다. 나는 어느 강변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혼자 짐을 부렸다. 적막이 무서워 빈 사과궤짝 위에 얹어둔 낡은 텔레비전을 켜놓고 밥상을 차리곤 했다. 익숙하던 삶의 방식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바뀔 때 사람들은 곧잘 밥을 거절하거나 밥 앞에서 운다. 그러나 감정의 추상적인 의미를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며 눈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은 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어떤 까닭으로 뽀얗고 소복한 밥이 눈물의 원근(遠近)에 알알이 아롱질 때 서럽지 않을 존재가 있으랴만, 나는 울다가도 밥을 보면 반갑고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불현듯 식욕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언가 골수에 사무친 것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건 배고픈 저녁의 밥 한 그릇’이라고 했다. 따스한 한 그릇의 밥은 귀한 벗이며 어느 어진 이의 복스러운 미소 같았다. 밥만이 나를 바라보고, 내 입속에 들어가서 기꺼이 씹히며 무저항의 헌신이 될 터였다. 그 사이에 쌀 봉지는 날마다 허룩하였고, 급기야 나는 빈손으로 밥을 벌어야 했다.


자백하건대, 식당업은 천민이 하는 줄 알았다. 요리 실력조차 섣부르니 나는 천만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십 리도 못 가서 하구에서 강물이 만나듯 이산가족이 다시 모였다. 밑천을 아슬아슬하게 구하여 식당을 열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밥을 위해 수십 박스의 책을 버렸다. 책은 환상과 낭만의 상징 같았다. 현실에 적응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책을 배신한 것이다. 플라톤을 주머니에 꽂고 전쟁에 나간 병사가 허기 속에서 빵을 찾았듯이 밥 속에서 길을 찾으려 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먹여주셨고, 결혼 뒤에는 남편이 거두어주지 않았던가. 밥을 구하는 길이 그토록 고된 줄은 난생처음 알았다. 찬물 더운물에 손등은 떡갈나무 껍질처럼 부르텄다. 식당에 딸린 임시 건물 방은 비좁고, 몹시 추웠다. 피곤한 등이 방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으나 천근의 몸을 일으켜야 했다. 논산 훈련소 신병 훈련이 이만큼 험할까 싶었다. 온 가족이 그렇게 매달리던 몇 년이 지나자 다행히 밥이 우리에게로 왔다.


나는 밥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밥을 팔아 밥을 먹으면서도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정 금액만 내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이다 보니 손님들은 음식에 욕심을 낸다. 밥은 얼마든지 있으니 한꺼번에 많이 푸지 말라고 당부를 해도 남기고 지저분해서 버려야 하는 밥이 음식물 쓰레기통에 넘친다. 충실한 기도 뒤에 밥을 먹고 간 사람들의 뒷자리도 거의 마찬가지다. 엉망진창으로 못다 먹고 퍼지른 학생들에게는 손님이라는 사실도 아랑곳없이 나는 냅다 고함을 친다,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8억 명이 넘는다고!

 

걸인들이 자주 가게에 찾아온다. 한 푼을 받아가기도 하고, 꾸무적꾸무적 밥을 먹고 싶다는 이가 있다. 서른 날에 아홉 끼니인가, 뼛속까지 고파 보인다. 삶의 찬 서리에 젖어 돌아앉아 밥을 먹는 그 뒷모습이 나의 연민을 세차게 흔든다. 헌 옷이 부지기수로 버려지는 세태이니 주워 입을 옷이야 많건만, 밥은 상하지 않은 것으로 제때 먹어야 한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는 통정(通情)은 오히려 미풍양속이며 밥이 윤리다. 정에 굶주린 자에게 어느 누가 하룻밤 정을 주어도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배를 채우려고 이웃의 밥을 훔치면 그 누구라도 가차없이 생매장을 당하는 것이다. 가뭄과 흉작이 심하여 자식들의 밥조차 보전하기 어려운지라, 부모는 칠십 살이 되면 살아있어도 까마귀 떼 날아오르는 나라야마 산에 버려진다.

어떤 준엄한 교리보다 나는 밥을 통해 삶을 배우고 싶다. 타인을 향한 소모적인 비난보다 밥으로서 나를 조절하고, 혼자서도 겸허하게 밥을 잘 먹고 싶다. 그것은 한편, 외로움이나 노후의 설움에 익숙해지기 위한 중요한 연습이기도 하다.

 

이 밥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밥을 받으리라.* 눈앞의 것은 잘 보이지 않고 봐도 소중한 줄 모른다. 사십오 년 넘게 밥을 먹고 살아왔지만 나 역시 아직도 내 먹을 양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니 무슨 깨달음으로 나아가랴. 다만, 환하게 밝힌 등불 같은 고봉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그 무언의 가르침을 일신의 경전으로 삼는다. 쉽고도 어려운 밥, 밥은 형이상학이다.


발췌 : http://cafe.daum.net/chojung45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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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천 득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기도 하다.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알 전부이다.
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
그대 바라보고 한 숨 짓노라.

 

  예이츠는 이런 노래를 불렀고, 바이런은 인생의 으뜸가는 것은 만취(滿醉)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백(李白)을 위시하여 술을 사랑하고 예찬하지 않은 영웅 호걸, 시인, 묵객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술을 먹지 못하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름날 철철 넘는 맥주잔을 바라다보면 한숨에 들이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차라리 종교적 절제라면 나는 그 죄를 쉽사리 범하였을 것이요, 한때 미국에 있던 거와 같은 금주법(禁酒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벌금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못 먹는 것은 나의 체질 때문이다.

  나는 학생 시절에 어떤 카페에서 포도주를 사 본 일이 있다. 주문을 해 놓고는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술값을 치르고 나오려니까 여급이 쫓아나오면서 왜 술을 안 마시고 그냥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할말이 없어서 그 술빛을 보느라고 샀던 거라고 하였다. 이 여급은 아연한 듯이 나를 쳐다만 보았다. 그 후 그가 어떤 나의 친구에게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내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술을 못 먹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울할 때 슬픔을 남들과 같이 술잔에 잠겨 마시지도 못하고 친한 친구를 타향에서 만나도 술 한잔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피 선생이 한잔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 한이 없다.

  내가 술 먹을 줄 안다면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을 것이요, 탁 터놓고 네냐 내냐 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도 내가 늘 맑은 정신을 갖고 있으므로 집사람은 늘 긴장해서 힘이 든다고 한다. 술 먹는 사람 같으면 술김에 아내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나에게 무엇을 사 달래서 안 된다면 그뿐이다. 아내는 자기 딸은, 술 못 먹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아이들도 내가 다른 아버지들같이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술에 취해서 돌아오면 무엇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돈도 마구 주고 어리광도 받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 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라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 볼 텐데, "문 열어라"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 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 한바탕 하고 나면 주말여행(週末旅行)한 것 같이 기분이 전환될 텐데 딱한 일이다.

  술 못 먹는 탓으로 똑똑한 내가 사람 대접 못 받는 때가 있다. 술좌석에서 맨 먼저 한두 번 나에게 술을 권하다가는 좌중에 취기가 돌면 나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저희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댄다. 요행 인정 있는 사람이나 끼어 있다면 나에게 사이다나 코카콜라를 한 병 갖다 주라고 한다. 시외같은 데 단체로 갈 때 준비하는 사람들은 술은 으례 많이 사도 음료수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 수가 많다. 간 곳이 물이 없는 곳이면 목메인 것을 참고 밥을 자꾸 씹을 수밖에 없다.

   술을 못 먹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다. 회비제로 하는 연회라면 그 많은 술에 대하여 억울한 부담을 하게 된다. 공술이면 못 먹고 신세만 진다. 칵테일 파티에는 색색의 양주 이외에 주스가 있어 좋다.

  남이 권하는 술을 한사코 거절하며 술잔이 내게 돌아올까봐 권하지도 않으므로 교제도 할 수 없고 아첨도 할 수 없다. 내가 술을 먹을 줄 안다면 무슨 사업을 해서 큰돈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술 때문에 천대를 받는 내가 융숭한 환영을 받는 때가 있다. 그것은 먹은 술이 적거나 한 사람에 한 병씩 배급이 돌아갈 때다. 일정 말엽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내가 술 못 먹는 덕을 볼 때가 있다. 내가 술 못 먹는 줄 아는 제자들이 술 대신 과일이나 과자를 사다 주기 때문이다. 또 내가 술을 못 먹는 줄을 모르고 술을 사오는 손님이 있으면 그 술을 이웃 가게에 갖다 주고 초콜렛과 바꾸어 먹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지내는 내 친구 하나가 여성들에게 남달리 흥미를 많이 갖는 거와 같이 나는 술에 대하여 유달리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찹쌀 막걸리는 물론 거품을 풍기는 맥주, 빨간 포도주, 환희(歡喜) 소리를 내며 터지는 샴페인, 정식 만찬(正式晩餐) 때 식사전에 마시는 술, 이런 술들의 종류와 감정법(鑑定法)을 모조리 알고 있다. 술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 자체뿐이 아니라 술 먹는 분위기를 즐긴다. 비 오는 저녁때의 선술집, '삼양(三羊)'이나 '대하(大河)' 같은 고급 요리집, 눈 오는 밤 뒷골목 오뎅집, 젊은 학생들이 정치, 철학, 예술, 인생, 이런 것들에 대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카페, 이런 곳들을 좋아한다. 늙은이들이 새벽에 찾아가는 해장국집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것은 이십여 년 전 명월관에서 한때 제일 유명하던 기생이 따라 주던 술을 졸렬하게 안 먹은 것이요, 한번 어떤 미국 친구가 자기 서재 장 안에 비장하여 두었던 술병을 꺼내어 권하는 것을 못 받아 먹은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수 있는 술을 안 먹은 것, 앞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고 떠나는 그 분량은 참으로 막대한 것일 것이다. 이 많은 술을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인지 또는 그만큼 생산을 아니 하게 되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솔직이 고백하면, 나는 술에 대하여 완전한 동정(童貞)은 아니다. 내가 젊었을 때 어떤 여자가 나를 껴안고 내 입을 강제로 벌려 술을 퍼부은 일이 있다. 그 결과 내 가슴에 불이 나서 의사의 왕진을 청하여 오게끔 되었었다. 내가 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쓰려면 주호(酒豪), 수주(樹州)의 ≪명정 사십년(酩酊四十年)≫보다 더 길게 쓸 수도 있지만, 뉴맨 승정(僧正)이 그의 ≪신사론(紳士論)≫에 말씀하시기를, 신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더 안 쓰기로 한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 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여자를 호사 한 번 시켜 보지 못하였다. 길 가는 여자의 황홀한 화장과 찬란한 옷을 구경할 뿐이다. 애써 벌어서 잠시나마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들의 남자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밤새껏 춤도 못 추어 보았다. 연애에 취해 보지도 못하고 사십여 년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을 읽느라고 나의 일생의 대부분을 허비하였다. 남이 써 놓은 책을 남에게 해석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남의 세방살이를 하면서 고대광실을 소개하는 복덕방 영감 모양으로 스물 다섯에 죽은 키츠의 ≪엔디미온≫ 이야기를 하며, 그 키츠의 죽음을 조상하는 셸리의 <아도니스> 같은 시를 강의하며 술을 못 마시고 산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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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 윤오영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서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군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고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 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홀낏 홈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빰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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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마누라_황덕중

 

  내 아내가 키우는 화초 중에는 값진 것이 하나도 없다. 화초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돈 주고 사는 일이 별반 없다. 기껏해야 풍물시장에 5일장이 서는 날 이삼천 원짜리나 하나 정도는 사지만, 제법 근사한 화원에 가서 몇만 원씩 턱턱 내고 이름 있고 고급스러운 화초를 사는 일이 없다. 나는 이왕 화초를 기르려면 잡다한 것 다 치우고 본때 있는 것 몇 분만 기르지 그러느냐고 하면, 아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 이름도 모를 잡다한 것들을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주워 들여 앞 발코니가 꽉 차도록 늘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며 정성을 들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화초 같지도 않은 것들이 봄이 되니까 일제히 꽃을 피우는 것이다. 군자란, 철쭉, 이런 것 한두 가지 빼고는 이름도 모를 것들이 무슨 반란이라도 하듯이 너도나도 하고 일제히 울긋불긋 봉오리를 터뜨린다. 비싼 게 아니니까 제법 귀티가 나거나 서로 조화를 이루어 작품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동산에 올라가 아무 꽃이나 만나도 그게 없는 것보다는 있는 쪽이 나아서 거기서 어쨌든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은 충분히 든다. 품위 있고 고급스런 정서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격식 없이 편안하게 앉아서 즐기는 토속음식의 맛 같은 것이어서 제법 그럴듯한 기쁨을 아침마다 맛보곤 한다. 다 아내 덕이다.


  그렇더라도 그걸 보며 마냥 즐거움에 빠져 희죽거리는 아내가 내게는 치근하게 느껴진다. 바보 같은 마누라. 남들은 고급 주택에 화분 하나에도 몇 십만원씩 하는 것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는 우아한 드레스를 걸치고 느긋이 완상하는 삶에도 만족을 못 느껴서 더 비싼 화초, 더 고급스런 꽃을 욕심부리는 데, 이 마누라는 욕심이 없는 건지 자존심이 없는 건지, 그 싸구려 화초들에 흠뻑 빠져들어 늘 싸구려 꽃처럼 품위 없이 히죽거린다. 바보 마누라.


  발코니나 좀 널찍하면 또 모른다. 아이들 다 나가 살고 달랑 우리 부부만이 사는데 넓으면 뭐하느냐고 바짝 줄인 아파트고 보니 널찍한 구석이 어디 있겠는가? 어지간히 넓은 아파트를 계약했다가 계약금의 10%를 손해보면서까지 계약을 취소하고 평수 좁은 것으로 바꾼 것도 아내의 주장이었다. 그래 놓고도 아내는 하나도 후회 같은 것이 없다. 자기 친구들은 부부만 살아도 넓은 데 살고 있지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 정도면 일본 사람들 살 듯 하면 대궐이라고 하면서 대 만족이다. 부부 모두 건강하니 좋고, 젊어서 하지 못했던 취미 생활 마음껏 누리며 사니 좋고, 아주 넉넉지는 않지만 연금 타서 걱정 없이 사니,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냐며 늘 만족이다.


  그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고, 고전무용을 배우고, 영어를 배우고, 그리고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이라나 하는 것을 통해서 부지런히 봉사 활동도 다닌다. 그게 또한 행복이다. 봉사활동 갈 때에 내가 차라도 태워 주면 그게 또 그렇게 고맙다. 거기다가 같이 봉사활동 가는 동료를 같이 태워 주면 아내는 나에게 정색을 하며 고맙다고 한다. 내가 복 받을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넓은 아파트도 고급 차도 아니지만 아내는 그저 행복하다. 바보 마누라.


  집에서 밥 차리지 말고 나가서 막국수라도 먹자면 아내는 금방 소녀처럼 즐거워한다. 막국수는 닭갈비와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중 음식이다. 그러면서 제일 싼 음식이다. 그래서 아무거나 간단히 먹자고 할 때에 우리는 항용 “막국수나 먹지.” 라고 말한다. 그런 음식일지라도 아내는 그것의 열 배도 더 비싼 양식을, 호텔 레스토랑에서 냅킨 턱밑에 걸치고 앉아서 금색 나는 포크로 우아하게, 그것도 고혹적인 색깔로 미각을 돋우는 와인 한 잔 곁들여 음미하는 파티의 여인보다 더 맛있게 먹는다. 그러고는 또 소녀처럼 순진한 웃음을 웃는다.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서 먹고 오는 경우, 아내는 행복이 곱빼기이다. 운전하고 있는 내 손을 꼬옥 잡이 주며, 또 그 바보 같은 미소로 나를 응시한다. 바보. 바보 마누라.


  바보같이 아내는 순댓국을 제일 좋아한다. 술 먹는 남자들이나 좋아하는 순댓국을 아내가 좋아할지 몰라서 조심스럽게 한번 권해 봤는데, 그 뒤로 아내는 시골에 있는 밭에 갔다가 돌아오는 때에 너무 늦으면 으레 순댓국으로 저녁을 때우자고 한다. 뜨끈한 국물이 좋아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계절에 관계없이 아내는 그것을 먹으면 속이 편하다고 한다. 그리고 제일 좋다고 한다. 자기 체질에 맞는다나?


  그러나 나는 안다. 꼭 그 싸구려 순댓국이 아내의 체질에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다 친목회에서 꽤 고급스런 수준의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아내는 그걸 순댓국보다 맛없게 먹지 않았다. 순댓국이 제일 맛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늘 빠듯한 봉급을 가지고 아이들 셋 기르며 살아오는 동안, 싸구려에 이력이 찬 아내는 비싼 것에 대한 공포, 싼 것에 대한 친근감이 몸에 밴 것이다. 내 아내라고 해서 명품을 모르며, 고급 음식을 모르며, 윤택한 생활을 모르겠는가? 넓은 집, 고급 차, 명품 가구, 화려한 옷, 게다가 값비싼 고급 음식을 즐기며 사는 생활이 주변에 얼마든지 있어도, 아내는 그것들을 모두 외면하고 분수에 맞게 살고 있는 것이다. 내게 불평불만이라도 퍼부으면 답답한 속이라도 좀 풀리련만, 아내는 혼자서 새겨 삼키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모양이다. 바보.


  지금 아내가 가장 만족해하는 것은 연금 생활이다. 내가 미련을 떨고 노후의 연금 생활을 계획해 온 것이, 아내나 내 생활에서 가장 잘한 것이라고 하며 대단히 만족해하고 있다. 모아 놓은 무더기 돈은 없지만, 먹고 사는 생활은 그런대로 근심이 없으니, 이 어려운 시국에 그게 어디냐는 것이다.
  무더기 돈에 욕심 부리지 않고, 하루하루 근심 없이 살아가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아내는, 그래서 그런지 건강하다. 나도 건강하다. 욕심없음에서 얻어지는 건강은 부수입치고는 대단한 소득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소녀같이 헹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고, 그 웃음으로 인해서 나도 웃음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햇살 퍼지는 아침 발코니에서 싸구려 화초들에게 물을 뿜어주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는 우아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웃음이, 그 바보 같은 웃음이 가득 번져 있다. 동물적인, 또는 사회적인 만족을 만끽하고 게트림을 하며 웃는 웃음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웃음이지만, 아내의 웃음은 담백하다. 바보 같다.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웃음을 머금은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나 또한 바보일 수밖에 없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 내 아내는 바보 마누라이다.

 

공무원 연금관리공단 수기 응모에 금 상 수상

 

전 내촌중학교 교장 황덕중
현 강원도 교육삼락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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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주와 설탕물/강돈묵

 

어려서 나는 단 것은 오직 감주뿐인 줄 알았다. 그것도 강바닥이 얼어터지는 겨울밤에 마시는 감주의 맛이란 그 무엇에 비할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면 어머니는 감주를 뜨러 나가신다. 방문을 열고나서면 칠흑의 마당 저편으로 어둠이 도망쳤다. 등을 든 어머니 뒤엔 으레 내가 양푼을 들고 따랐다. 김치 광에 들어서며 어머니는 등을 내게 넘겨주시고, 내 손의 양푼을 가져 가셨다. 감주가 가득한 양푼을 들고, 칼바람에 쫓겨 방으로 다시 들어올 때는 기분이 좋았다. 양푼에 담긴 감주에 형제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희끄무레한 색깔을 띠고 있는
감주, 어쩜 저 색깔이 단맛을 내는 것이려니 했다.

 

좀 나이가 들어 배앓이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얻어먹은 설탕물은 전혀 색깔이 없었다. 장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방바닥을 기면 아버지는 장롱 속 깊이 감추었던 설탕을 꺼내 한 숟갈 타 주셨다. 그 물은 신기하게도 내 배를 고통에서 구출해 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물인데, 그것에는 이런 신통한 효력이 있었다. 어떤 때는 감주보다 훨씬 단맛을 내었다.

 

배앓이로 방바닥을 쓸고 있다가도 설탕물로 통증이 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래서 동네 마당으로 나가 구슬치기를 했다. 구슬이래야 요즘처럼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뒷산 언덕에서 주운 상수리가 고작이었다. 가을이 어느 정도 익어 가면 어른들은 메로 상수리나무를 두드렸다. 설익은 상수리를 털어 내린 것이다. 마당 한가운데 펼쳐 널었다가 묵을 해 먹었다. 이 상수리를 부모님 몰래 호주머니에 넣고 나가 우리는 구슬치기를 했다.

 

친구들에게서 많이 딴 날은 장롱의 서랍이 상수리광이 되었다.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상수리들의 요란함은 듣기에도 좋았다. 친구에게 모두 잃고 들어온 날, 어머니는 골방에서 말린 상수리를 한 줌 내어주며 내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다시 신이 나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면 “넘어질라 조심해서 가렴.” 하는 어머니의 말씀이 내 등 뒤를 쫓아왔다.

 

저녁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빈 호주머니로 쓸쓸하게 들어오면 아버지는 마당가에서 나를 불러 세우곤 당신의 호주머니에서 상수리 몇 개를 꺼내 주셨다. 많은 개수는 아니었다. 언제나 서너 개를 내 손에 얹어 주셨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웃으셨다.

“이거, 네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거지? 조심하지 않고.....,”

처음에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 나중에 내가 가지고 나간 것의 수와 똑같을 때도 그런 말씀을 하셔서 그 동안의 말씀이 달랐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같은 말씀을 가끔 하셨다. 언제나 없는 듯이 나타나서 내게 힘을 주시곤 했다. 더러 내 서랍에 상수리가 까닭 없이 많아진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에 거짓이 있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게되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불룩해진 호주머니를 받쳐들고 들어올 때는 신이 났다. 대문을 들어서며 엄마를 불러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게로 달려와서는 꼭 껴안고 당신의 볼을 내 볼에 포개어 비비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볼이 내 볼의 한기를 몰아내어 주었다.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이러한 동작은 한참 후에야 끝이 났다. 어머니의 따뜻한 볼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지워져야 마무리됐다. 어쩌다 힘을 더하며, ‘으그, 내새끼.’ 하실 때는 내 몸이 으스러질 듯이 옥죄어 왔지만 결코 싫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이사 가는 친구의 집에 갔다가 늦은 적이 있었다. 밤이 그렇게 늦어진 줄도 모르고 우리는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한참 놀다 보니 시간이 제법 되었다. 어른들이 먼저 짐을 싣고 떠났다가 내일 와서 친구를 데려가기로 되어 있어서 아무도 우리에게 시간을 일러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황급히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엄청난 눈이 내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그때는 연락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서 머물 상황도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친구의 집에서 나왔다. 하얗게 뒤덮인 들판.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논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 하얀 벌판이었다. 잘못하면 구렁으로 빠질 것만 같은 밤이었다.

 

다행이 밤이라 해도 눈이 와서 주위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한참을 헤메며 걷다보니 저 앞에서 아버지가 오고 계셨다. 나를 마중 오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올려다본 아버지의 키는 산마루보다도 더 높아 보였다. 내어주는 아버지의 등에 말없이 업혔다. 내가 헤매며 걷던 길을 아버지는 잘도 걸으셨다. 한 번도 옆으로 빠지지 않고 걸으셨다. 아버지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게 다가왔다.

“무섭지 않던?”
“많이 무서웠어요.”

편안한 아버지의 등에서 깨어난 것은 집 앞에서 였다. 집 앞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당신의 등에서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리고는 내가 빨리 정신을 수습하기를 권하셨다. 겨우 정신을 되찾아 바로 섰을 때, 아버지는 느닷없이 집안을 향해 소리치셨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차분하고, 조용하시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 이놈아. 어린 것이 그 눈 속을 어떻게 혼자 왔어.”
“우리 집에 대장군이 나왔어, 대장군이.”

 

그날 나는 아버지의 그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 의미를 안 것은 그러고도 몇 해가 지난 후였다. 지금 고향집에 가면 뒷산의 상수리를 줍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늦가을 찬바람에 떨어져 여기저기 굴러다닐 뿐이다. 그것을 주워 묵을 만들어 나눠 먹을 가족이 없고, 구슬치기하도록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시던 두 분도 이 세상에는 다 아니 계시다. 다만 감주같이 색깔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사랑과 아무 색깔도 없이 달기만 하던 설탕물 같은 아버지의 사랑이 내 가슴에 잔잔히 고일 뿐이다. 이번 주말에 선영에 다녀와야겠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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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夫婦)


강호형


 무던한 부부지간에도 가벼운 말다툼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도에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도 가벼운 입씨름이 자칫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부부간에 활력소 구실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짓도 오래 지속하다 보던 단골 ‘메뉴’ 같은 것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이 자존심에 저촉(?)되는 사안일 경우 잘못하면 위험 수위로까지 치닫는 수도 있다.


 자식에 관한 문제가 그 중의 하나다.


 자식은 어디까지나 부부의 합작품이니만큼,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을 닮거나 두 사람의 특성을 적당히 섞어서 닮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럴 경우 부모 모두가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완전한 인간이고, 자식들 또한 그런 부모를 완벽하게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것은 한낱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 욕심일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남매를 둔 우리 부부의 경우가 그렇다. 외모로만 보면 딸은 나를 닮았고 세 살 아래인 아들은 아내를 닮았다는 것이 중평인데 외모가 반드시 성격까지 결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비교적 활달한 편인 아내의 성격이 딸아이에게 더 많이 유전된 듯한 반면, 그렇지 못한 내 성격은 아들아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외모나 성격이 이처럼 공평하게(?) 교차하여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발견될 때마다 원망의 화살은 내게로만 날아드니 딱한 노릇이다. 그 첫째는 고집이 세다는 점인데, 여기서 안(安)씨와 최(崔)씨의 제현께는 양해를 구하는 바이거니와, 고집이 세기로는 ‘안(安), 강(姜), 최(崔)’라는 말을 진작 들었더라면 인생 행로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푸념이 나오는가 하면, 고집불통의 세 강가들 틈에 어쩌다 선량한 오씨 하나가 끼이게 된 것은 순전한 팔자소관이라며 신세를 한탄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예외가 인정되는 모양이지만, 우리 나라 관습상 자식의 성씨는 아버지를 따르도록 규정한 민법의 오류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아내는 언필칭 안․강․최를 내세우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씨 고집 또한 이에 뒤질 것이 없어 보이니 하는 말이다.


  둘째는 씀씀이에 관한 문제다. 아이들 용돈을 월급제로 하고 있는데, 나이 차이만큼 액수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딸아이는 그 중의 일부를 떼어 적금을 넣는 반면, 아들녀석은 보름을 못 넘기고 가불 신청서를 내밀기가 예사인 것이다. 물론 가불이 쉬울 리 없다. 그러니 정 급해지면 제 누나에게 꾸어 쓰기도 하는 눈치인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던지 어느 날인가는 무슨 쪽지를 내밀면서 서명을 해달라기에 보니 보증서다. 저 아무개는 누나에게 일금 얼마를 차용하는 바, 모월모일까지 갚을 것이며, 그 보증인으로 나를 세운다는 내용인 것이다. 어이가 없어 두 놈을 싸잡아 야단을 치려니까, 딸아이 가 해명을 하고 나선다. 녀석의 신용도가 엉망이라 그렇게라도 해서 버릇을 고칠 작정이라는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아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아이들이 혼쭐이 난 것은 물론 그날 저녁에는 애꿎은 나까지 공격을 당했다. 녀석의 하는 짓이 나를 닳았다고……. 대들어 봐야 과거지사를 들먹일 것이 뻔했으므로 국으로 잠이나 청할 수밖에.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다. 이 경우에는 물론 올라가는 건 오씨 덕, 떨어지는 건 강가 탓이다. 그러나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내가 여사여사한 과거의 실적을 열거해 가며 반론을 제기하면 아내는 더 큰 실적을 들고 나온다. 차츰 언성이 높아지고 목에 핏대가 설 때쯤 어김없이 결정타가 날아온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사당오락(四當五落)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도외시하고 게으름을 피운 데서 오는 필연의 결과이며, 그 책인 역시 못된 유전 인자를 물려준 내게 있다는 것이다. 하기야 40대의 만학으로 나로서는 엄두도 내 본 일이 없는 학위까지 취득한 ‘오씨’인만큼이 대목에서도 대세를 뒤집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오씨에게도 약점은 있다. 운동 신경이 평균치 이하로 둔하다는 사실이 그것인데, 여학교 때 조별로 달리기를 하면 다음 조의 선두와 경쟁을 벌였노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마침 딸아이가 달리기에서 1등을 한 일이 있었다. 아내의 약점을 알고 있는 나로서야 더 좋은 기회가 없다 항복을 받아낸 것은 물론이었다. 아들아이가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자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래저래 기분이 좋은 김에 내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내 말에 과장이 있었다 해도 나의 2세들이 현실로 그것을 입증한 이상, 그 방면에 관한 한 열성 인자의 보유자인 아내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단거리 경주며, 평행봉, 철봉 등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노라고 떠벌인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 기도 하다.


  얼마 전, 일요일 아침이었다. 모처럼 아내와 아침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 뒷동산에는 여러 개의 자그마한 운동장이 있고 운동장마다 여러 가지 운동 기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이라 늦잠들을 즐기는지 젊은이들은 보이지 앉고 대여섯 분의 남녀노인들만 배드민턴을 치거나 맨손 체조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을 둘러보다가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평행봉과 철봉틀이었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실력(?)을 과시할 기회다 싶어 평행봉에 뛰어올랐다. 배튀기기부터 시작해서 물구나무서기까지 보여 주리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구나무서기는 고사하고 첫동작부터 실패였다.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운데 팔에는 힘이 붙지를 않아 후들거리는 것이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봤지만 참담한 실패였다.  망신은 이렇게 시작되어 철봉에서 턱걸이 세 번을 채우지 못해 발버둥을 치다가 내려오는 것으로 끝났다.


  벤치에 앉은 아내 곁으로 갔다. 변명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뭐라고 놀리든 다 받아줄 참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도 아내는 말이 없다. 웬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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