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하늘 밑에서

 

 

성 기 조 (시인,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9월이다. 여름하늘을 덮고 있던 뭉게구름이 말끔히 가시고, 작고 아담한 조개구름이 하늘 한가운데에 군데군데 피어 올랐다. 파란 하늘 사이로 보이는 탐스런 조개구름을 보며 목 쉰듯한 매미소리를 듣노라면 가을이 왔음이 완연하다.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났다. 아침저녁으로 선들거리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열었던 창문을 닫아야 하는 처서도 지났다.

 

창문을 닫고 온기가 느껴지는 방안에서 차분한 생각에 잠겨드는 일도 9월에는 자주 있어야 한다. 여름내 서성이던 삶에서 조용히 물러나 생각하는 삶, 뒤돌아보는 일들이 있어야 속살이 넉넉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하늘의 조개구름처럼 겹겹이 쌓여 밀려오지만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하나하나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삶이 둥둥 떠다니는 물거품처럼 연속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성찰을 거친 뒤에 행동으로 옮겨지는 기회를 갖지 못한 까닭이다.

 

창틈으로 하늘을 엿보다 조개구름이 가지고 있던 흰색이 점점 엷어지고,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 눈부신 것을 발견했다. 동네 어귀에 쌓아놓은 돌탑이 파아란 하늘을 이고 손짓한다. 오가는 사람들의 소망을 빌기 위하여 쌓여진 돌탑은 누구의 소망이랄것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참회, 화해와 용서, 그리고 회개의 마음을 담아 끝간데 없는 우주에까지 전파하려고 높이 쌓여져 있다.

 

널찍한 터전을 잡고 쌓여진 돌탑은 높아질수록 작고, 좁게 쌓여져 제일 마지막에는 신기하게 잘 생긴 돌 하나로 마무리 되어 있다. 나의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돌을 쌓는 사람들의 경건한 마음은 한 칸씩, 한 칸씩 쌓아올라가면서 더욱 간절해진다. 돌을 쌓는 일은 기다림이요, 인내이지만 결국은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란 희망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쌓여진다. 간절한 소망의 종착점은 결국 우주이겠지만 돌을 쌓는 사람들은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란 희망을 갖는다.

 

희망은 기도하는 심정이기에 ‘무엇이고 이루게 해주십시오’란 말로 끝맺는다. 나를 잘되게 해달라던가, 가족의 건강을 보살펴 달라던가, 아니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에 기도는 절대자 앞에 엎드려, 자신의 욕망을 들어 달라는 애원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부끄러움 없이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다. 때문에 많은 명상가들이나 철학가들이 “이런 기도가 대답을 찾을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기 연민에 불과한 메아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9월, 파아란 하늘이 지구를 뒤덮고 삽상한 바람이 알맞게 부는 이 계절에 소망을 담은 기도를 하는 시간이나 삶의 성찰과 인간의 불완전함을 깨닫는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기도뿐 아니라, 나의 소망을 담은 돌맹이 하나라도 올려놓아 돌탑을 만드는 간절한 시간을 가져보아야 한다. 탑이 높아질수록 둘레가 작아지듯 나의 소망도 작아지는 이치는 ‘비움’의 철학에서 깨우쳐야 한다. 돌탑이 하늘 높이 올라가면 결국은 뾰족한 부분이 되는 까닭, 마음속에 수없는 소망을 담고 기도하거나 외쳐보았자 모두 이루어질 수 없듯,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소중함을 깨우쳐야 한다.

 

우리가 갖는 소망이나 외침, 그리고 기도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꼭 필요한 것, 허황되거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절대자나 창조주, 하나님이나 부처님은 우리들의 간절한 소망 하나만 들어 줄 것이라고 믿어 보자. 꼭 필요한 소망을 하나씩만 가지고 이 가을을 살아보자.

 

너절하고 욕심많은 찌꺼기들을 버리고 간절한 소망을 하나씩만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고 인내하고 참회하고 회개하는 진정한 삶이 참 사람을 만드는 길이라고 믿어야 한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희망을 거울삼아 살아가야 한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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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방문과 통닭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송민석

 

 교직기간 내내 4월은 고행의 달이었다. 담임의 역할 중 가장 힘든 것이 가정방문이 아닐까 싶다. 대도시에서야 담임이 아니라도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들이 알아서 챙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학부모의 낮은 학력수준과 무관심 속에 방치되기 쉬운 시골학교일수록 가정방문은 꼭 필요한 일이려니 싶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교직에 첫발을 내딛던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것이 가정방문이었다. 매년 3월 중순부터 우리 반 가정방문이 시작된다. 할 일을 팽개쳐두고 신들린 사람처럼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찾아 나서야 4월이 끝날 무렵까지 겨우 가정방문을 마치게 된다.

 

 특히 농촌의 4월은 농번기나 다름없다. 가정방문 중 부모가 계시지 않는 집이 절반이 넘는다. 일요일 시골길에 식당이나 가게를 찾지 못하면 점심까지 거르기 일쑤다. 따라서 자동차도 흔치 않던 시절 일요일 종일 시골길 먼지를 뒤집어쓰며 연례행사처럼 고난의 4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고 나면 학생들이 한 눈에 쏙 들어올 뿐만 아니라 소통이 원활해져 학급운영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지난 태풍 때 삐걱거리던 그 대문 넘어지지 않았느냐?”
“강아지 새끼는 몇 마리나 태어났니?”
“군대 간 둘째 형은 언제 제대하니?”
가정방문 길에 학생과 단둘이서 산길과 밭길을 걸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학생의 고민을 비롯한 속내까지도 파악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교육의 장이 되곤 하였다.

 

 아버지는 이웃마을로 머슴살이를 가고, 어머니는 서울에서 가정부 일을 하느라 집을 비운 채 팔순이 넘은 반신불수의 눈먼 할머니와 어린 동생 4명을 보살피는 학생을 발견하고 함께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이런 학생에게 지각했다고 꾸중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독거려 주어야 할 일이었다. 물론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게임을 하느라 걸핏하면 지각하는 학생은 특별한 지도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신출내기 교사시절 군청소재지 실업계고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토요일 오후 학생과 함께 가정방문에 나섰다가 잘 아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득이 발길을 돌려야 했었다. 그런 다음 월요일 오후에 다시 그 학생의 집을 찾아 나섰다. 학생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다 보니 듬성듬성 10여 호의 작은 산골마을이 나타났다. 위에 양철 갓을 씌운 싸릿대로 만든 사립문이 비스듬히 넘어져 가고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멍이 숭숭 뚫린 초가집 마루에 오후 햇살이 가득하였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는 밭일을 하다말고 막내의 담임을 보자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의 속사정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선생님이 가정방문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하여 그동안 중학교나 고등학교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온 적은 한 번도 없는 마을이었다. 설마하면서도 아들의 성화에 속는 셈치고 집에서 키우던 닭을 한 마리 잡아 두고 기다렸다고 한다. 기다리던 토요일에 가정방문을 오지 않아 삶은 닭을 우물 속 깊숙이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일요일이 가고 월요일 한나절이 지나자 닭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먹고 난 뒤에야 담임이 나타난 것이다. 닭을 미리 먹었다는 자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어머니의 순박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머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방금 낳아 따뜻하다면서 날계란을 권하였다. 자식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학생 어머니를 보면서 문득 우리 어머니가 떠올라 한동안 말문을 잃고 학생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을 위해 등이 굽도록 헌신하시다가 일생을 마치시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니던가.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자식교육에 열성을 다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국가발전이 가능한 게 아닐까. 해방과 6․25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자식 교육열만큼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희생적인 우리 부모들이 아닌가. 

 

 누구나 궁핍의 기억은 비슷한 시절을 살아왔던 이들에겐 모자이크처럼 얼룩진 공유의 추억이 아닐까. 우리 부모는 7남 1녀 8남매를 두셨다. 시골에 살면서도 논밭 한 마지기 없이 남의 품을 팔거나 어머니의 행상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는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일생은 눈물을 삼키며 견뎌낸 고난과 상처의 역사였다. 허기진 몸을 곧추세우고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주신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선다. 노인대학 초청으로 강단에 설 때면 우리 어머니를 마주한 것만 같아 목이 메어 말문을 열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산등성이를 몇 구비 넘어 면소재지에 나와 보니 광주나 군청이 있는 읍내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고 광주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생각보다 택시비는 많이 나왔으나 담임으로서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한 하루였다.

 

 가정방문을 통하여 통닭 열 마리를 대접받은 것보다 더 고운 마음씨를 가진 학부형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알량한 봉투를 억지로 넣어주고 교사의 동정이나 살피는 도회지의 얄팍한 학부형들에 비해서 얼마나 순수하고 소박한가. 날이 갈수록 순박함과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태에 그날의 가정방문은 지금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2009.5.3.)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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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은 지금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김세명 

 

 얼마 전 고향을 가던 중 어릴적 친구 집이 생각나 차를 세우고 둘러 본 일이 있다. 그 집은 을씨년스런 폐가가 되어 있었다.

 

 친구의 안부도 모른 채 우두커니 바라 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이 집에서 뛰놀던 친구와 '오디'를 따먹던 생각이 났다. 폐가 울타리 옆에 자리한 늙은 뽕나무는 여전히 '오디'를 매달고 있었다.

 

 "떠나는 농촌! 농촌은 희망이 없다. 어린애 우는 집이 없고, 노인들만 사는 적막강산이며, 학생이 없으니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농촌에서 자랐기에 늘 한여름 밤 모깃불을 놓고 별을 헤며 멍석에 누워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지붕에는 박이, 담장에는 호박이 주렁주렁 열렸다. 겨울 초가지붕에 눈이 쌓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인정이 넘치는 세상이었다. 명절이 오면 멀리 떠났던 가족이며 친척들이 고향을 찾으니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농약과 비료로 농사를 지으니 땅속에는 생명체가 살지 않고 천적이 사라져서 정취도 없다.

 

 내 친구들도 농촌에서 살다보니 나이에 비해 더 늙고 쇠약해 보인다. 예전에는 농기구라야 재래식으로 소가 일을 하고 운송수단도 도로가 여의치 않아 지게로 지고 다녔다. 그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며 농업을 제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농기계로 편리하게 농사를 짓지만 돈벌이가 되지 않아 아쉽다.

 

 그 시절에 비하면 엄청난 경제발전이다. '새마을운동'은 농민의 사기를 올려주어 근대화의 초석을 깔았고, 통일벼로 녹색혁명을 이룩했지만 사실 그때부터 농약과 비료를 쓰기 시작했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농로도 넓혔다. 수출은 공산품이요, 수입은 농산물이라 농사를 지어야 가격이 폭락하니 농촌은 농가부채에 시달리고, 젊은이는 농촌을 떠나 명절 때나 늙은 부모를 찾는 실정이다.

 

 외국농산물과 경쟁하려고 시설농을 한다. 농기계를 구입하여 생산해 보아야 외국농산물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시설농으로 생산한 농산품은 기름값과 이자도 못갚아 빚만 불어난다. 농민은 대부분 고령자에다 친환경을 강조하지만 희망이 없다. 농민들은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지 않고 개선책도 없다.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되어 농민을 더욱 어렵게 한다.

 

 나라는 발전하는데 농촌은 늙어가니 '농자천하지대본'은 옛말이다. 농촌총각은 베트남이나 필리핀여성과 국제결혼하여 다문화가정(多文化家庭)이 늘어가고 있다. 사람 사는 곳도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나 보다. 1%의 국민이 전 국토의 52%를 소유하고 있다니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산다는 뜻일 게다.

 

 나는 오늘도 젊은 농촌! 환경이 쾌적한 아름다운 농촌! 평화가 깃든 곳! 누구나 한 번쯤 자연을 벗 삼아 쉴 수 있는 곳, 돌아오는 농촌이 되기를 빌어본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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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경남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삶의 나무, 죽음의 나무 / 성낙향

사거리로 내려가는 길의 한쪽 어름에 공터가 있다. 그곳에는 버려진 문짝과 의자와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별 특징도 볼품도 없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원래는 어느 집 마당의 정원수였던 것이 그 집 식구들이 떠나고 주택마저 철거되어 공터에 혼자 남은 듯했다.
겨우내 그 나무를 지나치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산으로부터도 밀려나고, 인간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그 나무는 내게 있어 낡아빠진 문짝이나 의자와 똑같이, 그저 그 공터에 방치된 하나의 고물이자 우중충한 정물일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멀리 공터 위로 낯선 것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깨끗하게 빨아 넌 흰 손수건 같기도 하고, 환하게 불 밝혀진 알전구 같기도 한 것들이 공터 뒷집 먹색 슬라브 지붕을 배경으로 점점이 떠있었다. 공터 가까이 다가간 나는 한순간 탄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세가 밀린 세입자처럼 늘 어딘가 불편한 자세로 서있던 그 나무가 전날 내린 비에 부풀어 오른 무수한 흰 꽃송이를 가지에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신 순백의 꽃들을 보고서야 신원을 알 수 없던 그 나무의 정체가 ‘목련’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몇 년간 데면데면하게 지내온 동네슈퍼 주인이 사실은 잃어버린 친동생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 그런 황당함 같은 걸 나무 앞에서 느꼈다.
목련이라면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친숙한 나무다.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보아왔기에. 누군가 나에게 목련나무를 아느냐고 물었다면, 분명 잘 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련을 몰랐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목련나무가 피워 올린 희고 탐스런 꽃에 불과했다.
나무의 둥치나 껍질이나 잎사귀에는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비가 내리거나, 찬바람이 불적에 목련나무가 그것들을 견뎌내는 모습을 지켜본 적도 없이, 그저 봄날의 짧은 며칠, 발화(發火)하듯 피는 꽃송이들에 열광했을 뿐이다. 이지러진 양초 덩어리처럼 뚝뚝 꽃들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살 차듯 자잘한 잎이 돋아나면 나무는 차츰 시선 밖으로 물러났다가, 다른 신록들 속에 묻히게 되는 여름이 오면 그만‘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가 돼버리곤 했다. 목련나무 본연의 모습보다 한순간의 꽃단장에만 미혹되었던 나의 부박함이 느껴져 씁쓸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 공터의 나무처럼, 목련이란 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꽃피는 것이 너무도 극적이다. 겨울동안 메마른 가지를 치켜들고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서 있다가 다른 꽃나무들이 겨울과 봄의 모호한 날씨를 탐색하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꽃을 확 피워버린다. 선수를 빼앗길까봐 두려운 듯 잎사귀도 내기 전에 꽃부터 피우고 본다. 도발적일만큼 당찬 개화에 정작 그것을 생산해낸 회색의 나무둥치와 가지들은 한낱 꽃을 위한 버팀목처럼 내 눈의 초점 밖으로 밀려났는지도 모르겠다.
열정도 의지도 없이 다만 생장할 뿐이라고 여겼던 나무의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욕망을 본다. 세상에 자신이 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자 인고하며 때를 기다려온 뜨겁고 질긴 욕망이 그 나무를 돌아보게 한다.
공터 한쪽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발로 차도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묵묵히 서있을 뿐이던 나무는 별 보잘 것 없다가 난데없이 일등을 한 아이처럼, 오늘 찬란하다. 일 년 중 며칠간은 온몸에 명찰을 달고 세상에 제 이름을 외치는 목련나무를 떠나오면서,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제 존재를 알리는 참나무를 생각해보았다.
한 알의 도토리에서 시작되는 상수리, 떡갈, 굴참 등 우리 산야의 흔하디흔한 참나무들. 이렇다 할 특징도 없이, 산속에 군집해서 살아생전 누군가의 눈길 한 번 끌지 못했을 한 그루의 참나무는 톱으로 베어져 제 속살이 지닌 향을 드러내고서야 나로 하여금 제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고대 그리스 신들이 맨 처음으로 만든 나무라 하여 ‘어머니 나무’로 불리는 참나무. 나에게는 그런 참나무로 만든 작은 밥통이 있다.
갓 지은 뜨거운 밥을 그 밥통 안에 넣어놓으면 둥글게 맞물려진 참나무 널조각들은, 시골 방 아랫목에 놋주발을 묻어두는 어머니처럼 제 가슴에 흰쌀밥을 품고서 오래도록 온기를 보존시켜준다. 온기도 온기지만 밥알마다에 은은하게 스며든 참나무 향기는 또 어떤가. 무심코 밥통의 뚜껑을 열었을 때 밥의 훈기에 우러나있던 나무의 향기가 코끝에 물씬 와 닿으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들을 때처럼 마음의 갈피마다 아늑한 울림이 인다.
향이 좋은 까닭에 옛날부터 청어나 연어를 훈연시킬 때, 질 좋은 와인을 숙성시킬 때,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참나무를 골라 사용 했다. 물론 편백나무나 향나무처럼 생살 속에 고아한 향을 가진 다른 나무도 있긴 하다. 그러나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상에서, 낯선 방식으로, 낯선 추억을 쌓으며 자라난 연어와 포도, 그 이질적인 것들이 가진 본래의 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깊고 그윽한 풍미까지 더해주는 나무는 오로지 참나무뿐인 것을 옛사람들은 알았던 모양이다.
한겨울, 늙은 군고구마장수가 끌고 다니는 수레의 양철화덕 속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참나무 냄새는 고층건물로 빽빽한 도심의 거리에 일순, 이른 저녁나절의 시골 정취를 풀어놓는다. 장작 몇 개일 뿐이나, 그 향이 너무도 짙고 깊어서 양철화덕 속에는 해묵은 참나무 숲 하나가 통째 타고 있는 듯하다.
스님들의 독경처럼, 수사들의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향기가 아까워, 주린 듯 그 향을 맡는다. 무엇을 태운들 저리 맑고 그윽한 향기를 풍길까. 태워도 결코 정갈한 향을 풍기지 못할 내 몸, 내 삶을 알기에 참나무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열매를 겹겹의 껍질로 싸고도 가시까지 촘촘하게 세우는 밤나무와 달리, 산짐승들에게 순하게 도토리를 내어주고, 외부의 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독소를 만들어내는 은행나무와 달리, 제 속의 영양분을 둥치에 달라붙은 버섯들과 나누어가지는 욕심 없는 나무. 소나무처럼 그악스럽게 햇빛을 긁어모으지도 않고, 꽃송이마저 잎사귀 아래로 드리우는 가식 없는 나무. 남보다 많은 겸손의 덕을 몸 안에 지니고, 남보다 적게 탐하는 일생을 살아왔기에 불길에 사루어지는 참나무의 향기는 고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지난 가을, 갑작스럽게 이모님이 돌아가셨다.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온 그 분의 삶이었건만, 나흘간의 장례식 동안만큼은 일생 받지 못한 주목을 받았다. 묵묵히 살다 느닷없이 활짝 꽃피워 세상에 제가 있었음을 알리는 목련나무처럼.
이모님은 남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자들의 기억 속에서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모두들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사고로 망가진 고인의 싸늘한 얼굴에 뺨을 부비며 눈물 흘렸다. 그렇게 모두들 울면서 고인의 자취를 아린마음으로 더듬었다. 관속에 누운 이모님에게서는 양철화덕 속의 참나무 같은 향기가 장례식 내내 풍겨났다.
내 삶도 사람들에게 조상되는 때가 올 것이다. 죽음을 들여다보며, 어떤 죽음을 맞을까 생각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는 분명해진다. 무심히 지나쳐온 목련과 참나무는 이모님의 별세를 통해 인생의 종결부를 되새기게 하고, 남은 삶에 대해서도 숙연해지게 하는 그런 나무가 되었다.


[심사평]---수필부문-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작품 구성에서 보인 대조법 묘미 돋보여"

귀하고 애쓰신 원고를 보내주신 여러분께 우선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120 편 가까운 작품을 읽어내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박 또박 한자 한자, 한 문장 한 문장 현미경 들여다보듯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선작 고르는 일은 돌 더미에서 옥을 가리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구슬 상자에서 보옥 한 알 , 고르는 것이나 진 배 없었습니다.
고르는 절차는 삼 단계를 밟아 갔습니다. 문장에 무리가 있고 문리(文理)에 어긋남이 있는 글을 우선 뒤로 물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서 ‘글의 미학’과 나란히 ‘글의 정교함’이 두드러지게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차 읽기가 끝난 다음, 열편 정도의 예비 후보 작품이 남겨졌습니다. 그것들을 고쳐 살피고 따지고는 3 편이 남겨졌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막상막하! 호불호를 가리기는 무척 힘겨웠습니다. 그 중에서 애석하게도 ‘선소리’가 물러나게 된 것은 주제나 내용 보다는 두어 곳 문장과 문리가 드러낸 작은 흠집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두 편이 맞겨루게 되었을 때는 실로 난감했습니다. 최후의 왕좌를 놓고 겨루게 된 것은 ‘낙엽을 위하여’와 ‘삶의 나무 , 죽음의 나무’였습니다. 오죽하면 두 편 다 당선작으로 삼을 수 없을까 하고 궁리를 했겠습니까.
우선은 발상이며 착상의 창의성을 두고 두 작품을 견주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는 글 전체의 구성이며 논리적 전개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삶의 나무, 죽음의 나무’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선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주제와 겹친 작품 구성에서 발견되는 대조법의 묘미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비유법이며 이미지의 재미가 선자의 취향이나 주관에 보다 더 가까웠던 것입니다. 성낙향님에게 삼가 기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서도 가작으로 뽑힌 , ‘낙엽을 위하여’의 유 정서님께는 우수한 수필 작가로서의 긍지를 더한층 살려 가시도록 박수를 드립니다.
응모하신 모든 분과 함께 한국 수필 문학의 내일을 축복하는 것으로 심사평을 마치겠습니다.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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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하여

                                                    -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

법정


이 글을 읽어줄 네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슬기롭고 아름다운 소녀이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슬기롭다는 것은,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 가지고도 커다란 보람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종로에 있는 제과점에를 들른 일이 있다.


우리 이웃 자리에는 여학생이 대여섯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들이 깔깔 거리 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는 슬퍼지려고 했어. 그 까닭은,고1 이나 2쯤 되는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때문이었다.우리말고도 곁에는 다른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그 애들은 전혀 이웃을 가리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더구나.


그리고 말씨들이 어찌도 거친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 아니니?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주고받는 말은 우리들의 인격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하는 거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녀들의 입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니?


꽃 가지를 스쳐 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 하고 죽을 우리인데.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 서 풍기는 휘발유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속까지 상하게 하니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 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야.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 게 할 수가 없었어. 욕지거리가 인간의 대화로 통용되고 있는 요즘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했거나 생활환경이 무질서한 그런 애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니.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보람'이란 말을 앞에서 했다. 그럼 아름다움 이란 뭘 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 듯하게 치장해놓은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그건 이내 지워지고 마니까. 아름다 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어.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할 거야.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 의 발견일 수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에.


나는 미스 코리 아라든지 미스 유니버스 따위를 아름다움으로 신용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잡지의 표지나 사진관 앞에 걸린 그림처럼 혼이 없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아름다움 이란 겉치레가 아니기 때문이지.상품가치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 이라면 거죽만을 보려는 맹점이 있어.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려고 갖은 수고를 다한다더군. 값진 화장품 을 써야 하고,사람이 먹기도 어려운 우유에 목욕을 하는가 하면 무슨 무슨 운동을 하고,값비싼 옷을 해 입어야 하고.......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대인들은 그저 나타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겉치레에만 정신을 파느라고 속을 다스릴 줄 모른단 말 야. 이런 점은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 한 테 배워야 할 거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어떤 시인의 말인데,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 에서 가장 정결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풀어준다는 거야. 그러나 그 꽃은 누굴 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래.


숲속의 새들도 자기의 자유스런 마음에서 지저귀고 밤하늘의 별들 도 스스로 뿜어지는 자기 빛을 우리 마음에 던질 뿐이란 거야.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 이미 잉태된 큰 힘의 뜻을 받들어 넘치는 기쁨 속에 피고 지저귀고 빛나는 것이래.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안에서 번져 나오는 거다. 맑고 투명한 얼이 안에서 밖으로 번져 나와야 한단 말이다. 사람마 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 그럴까. 서로 뒤바뀌지 않게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일까? 아닐거야,아니고 말고.그건 저마다 하는 짓이 달라서 그런 거지.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굴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아름답게 얼을 가꾸어와서 그럴 거고, 추한 얼굴은 추한 행위만을 쌓아왔기 때문에 그럴거야. 그렇다면 아름답고 추한 것은 나 아닌 누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그러한 꼴[탈]을 덮어썼다는 것이지.


욕지거리를 잘하는 미인을 상상할 수 있겠어? 그건 결코 미인이 아니야. 그리고 속이 빈 미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또한 슬기로움과 서로 이어져야 해. 슬기로움은 우연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 순수한 집중을 통해 자기 안에 지닌 빛이 발하는 거지. 나는 네가 시험 점수나 가지고 발발 떠는 소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골빈당 이 되어서도 안 된다.


네가 있음으로 해서 네 이웃이 환해지고 향기로워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소녀라는 말은 순결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기로운 본질을 가꾸는 인생의 앳된 시절을 뜻한다. 너의 하루하루가 너를 형성한다. 그리고 멀지 않아 한 가정을, 지붕 밑의 온도를 형성할 것이다. 또한 그 온도는 이웃으로 번져 한 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너의 '있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누이야,이 살벌하고 어두 운 세상이 너의 그 청청한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도록 부디 슬기로워지거라 .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라. 그것 이 곧 너 자신일 거다.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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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정권교체

김 학

 

우리 집에도 정권교체 바람이 불었다. 내가 장기 집권해온 '가장(家長)'이란 옥좌를 물려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오랜 세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며,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치노라 힘써왔다. 내 나이 이순(耳順)의 고개를 넘어선지 7년! 이제 온갖 세상 잡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때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덟 살에 '가장'이란 옥좌에 올랐다. 무려 78년을 집권한 고구려 장수왕보다는 짧지만 나도 반 백 년이 넘도록 장기 집권을 한 셈이다. 서른하나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나신 아버지는 가장이란 옥좌에 오르지도 못하셨다. 그러니 나는 조선시대 정조 대왕처럼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로 옥좌에 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어렵사리 가정을 이끌면서 대학까지 마쳤다. 제대 후 직장에 나가면서부터는 내가 받은 월급으로 가정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다달이 살림살이가 불어나고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안엔 훈기가 돌았다.

 

언제부턴가 5년마다 12월이면 대통령선거를 치른다. 여야는 저마다 대통령후보 경선을 치르느라 나라가 들썩들썩하다. 대통령후보를 뽑는 일이 체육관을 벗어나 전국 시․도를 순회하며 치러지고, 당원은 물론 일반 국민이 직접 참여하게 되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5년마다 치러지는 12월 대통령선거 때 어느 당의 어느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을 깨우는데 여야 대통령후보 지역순회 경선이 크게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 집에서의 '가장' 선출은 가족의 투표로 결정되지 않는다. 왕조시대의 임금자리가 자연스레 큰아들에게 물려지듯이 우리 집의 '가장'자리도 큰아들에게 넘겨주면 된다. 대통령 이․취임식처럼 번잡스런 요식 절차도 필요가 없다. 그러니 2남 1녀의 아이들이 저마다 가족을 대상으로 득표활동을 펼칠 이유도 없다.

 

며칠 전 큰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한 통씩 보내달라는 주문이었다. 전국의 어느 곳이던지 가까운 동사무소에 가서 신청하면 그런 민원서류를 발급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녀석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가족의 건강보험증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정년퇴직을 하니 건강보험이 문제였다. 지역보험에 신고를 했더니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세 자녀는 따로 건강보험증이 발급되고, 보험료도 별도로 부과되었다. 전주에 사는 식구와 서울에 사는 식구가 따로따로 지역보험에 가입해야 했다. 보험료는 직장보험 때보다 배 이상 높게 부과되었다. 백수가 된 처지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차 마침 큰아들이 취직을 하게 되고, 큰아들 덕에 직장건강보험증이 발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직장에 나갈 때까지는 모든 식구가 내 우산 속에 있었는데 이제 그 식구들이 큰아들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엔 한 가정의 '가장권'(家長權)은 건강보험증이 누구의 이름으로 발급되느냐에 달린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의 정권교체는 마침내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신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을 깔아뭉개는 일들이 많았다. 잘한 업적은 묻어두고 잘못한 일만을 들추어내서 존경의 모자를 벗기기에 급급했다. 5년 후에 나타날 자신의 후임자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듯 안하무인격이었다. 자기는 평생 대통령이란 금불상(金佛像)을 등에 지고 살 줄 아는 모양이다. 이솝우화의 어리석은 당나귀를 생각나게 하는 현상이다.

 

내가 비록 '가장'이란 가통(家統)을 큰아들에게 물려준다 해도 그런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나 승어부(勝於父) 즉 자기 아들이 아비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던가?

가정을 확대하면 국가가 되고, 국가를 축소하면 가정이 되는 것인데 왜 정치가들은 그걸 모르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권좌만을 탐내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 집의 정권교체는 끝났다. 하하호호 웃으며 축복 속에 옥좌를 넘겨주었다. 정권을 물려준 나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권을 물려받은 큰아들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통령 꿈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름지기 우리 집의 정권교체를 본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출처 : http://cafe.daum.net/pen063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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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고민

김 학

  

 맞선 한 번 보고 결혼한 우리는 시쳇말로 웃기는 부부다. 씨름꾼도 아닌 나의 몸무게는 88킬로그램인데 반해 미스코리아도 아닌 아내의 몸무게는 그 절반도 안 되는 43킬로그램이다. 살을 빼려고 고민하는 나는 식성이 좋은데 살이 찌지 않아 고민하는 아내는 늘 입맛이 없다며 끼니때마다 께적거린다.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나는 새벽에 눈을 뜨기 무섭게 집에 설치한 ‘알칼리 이온수’ 한 컵을 받아 꿀꺽꿀꺽 마시지만 아내는 물마시기를 싫어한다. 마신 물은 금세 대소변과 땀, 침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한 번 마신 물은 우리 몸속에서 90일 동안이나 핏줄을 타고 떠돌면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몸 밖으로 나온다.

 

 우리부부는 입맛도 다르다. 비만형의 나는 대식가요 저체중인 아내는 소식가다. 내 얼굴은 갸름한데 아내의 얼굴은 둥글넓적하다. 또 나는 쇠고기나 돼지고기, 닭과 오리 등 고기류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채식을 좋아한다. 나는 소주를 즐겨 마시지만 아내는 술을 사갈시(蛇蝎視)한다. 우리부부가 모처럼의 합의로 냉면집에 가더라도 나는 비빔냉면을, 아내는 물냉면을 시킨다.

 

 우리부부는 기호도 다르다. 아내가 나에게 술을 끊으라고 하면, 나는 아내에게 장모가 술 한두 잔쯤 마실 줄 알아야 사위가 더 행복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우리부부가 의견일치를 보기란 남북회담대표의 합의점 찾기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부부는 2남 1녀를 낳았다. 그 아이들이 결혼하여 우리 곁을 떠난 뒤 우리는 비둘기처럼 부부만 산다. 우리 집의 식탁분위기는 정겹다. 36년이란 오랜 세월 함께 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부부애가 깊어졌다. 나는 끼니때마다 살 좀 찌라며 아내에게 내 밥을 서너 숟가락씩 덜어 주는데도 내 몸무게는 더 줄어들지 않고, 그렇다고 아내의 몸무게가 불어나지도 않는다. 나는 내 살을 떼어 주는 심정으로 밥을 덜어 주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어 안타깝다. 요즘 나는 아무리 술을 마시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이 한없이 부럽다.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도 서럽지만 먹을 것이 푸짐한데도 먹을 수 없는 내 처지는 더 괴롭다.

 

 우리부부는 건강한 물을 마시고자 지난 7월 하순쯤 주방에 ‘알칼리 이온수기’를 설치하였다. 그 뒤부터 우리는 마음대로 이온수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끼니때마다 알칼리 이온수로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인다. 그런 까닭에 밥맛이 참 좋다. 우리부부는 아침마다 1시간 남짓 산책을 하고 돌아와 몸무게를 측정해 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 어떤 날은 내 몸무게가 줄었다고 희색이 만면하고, 또 어떤 날은 아내의 몸무게도 덩달아 줄었다며 얼굴을 찡그린다.

 

 나는 지난 8월 뱃살을 빼려고 한약을 복용하면서 한 달 동안 금식을 했었다. 처음 나흘간은 밥을 먹지 않고 한의사가 준 환약과 고비탕(高肥湯) 그리고 저지방 우유에 섞은 대체식(代替食)을 먹고 과일과 채소반찬 그리고 이온수로 공복감을 메웠다. 또 26일 동안은 점심때만 잡곡밥 반 그릇을 먹고 나머지 두 끼는 대체식과 과일, 채소반찬, 이온수로 배를 채웠다. 그리하여 나는 몸무게를 5킬로그램이나 줄였다. 그 덕으로 고공행진을 하던 나의 혈압이 낮아졌다. 남들은 하나같이 날씬해졌다며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나만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아내까지도 살이 4킬로그램이나 빠졌으니 그게 문제다. 두 식구가 살면서 남편이 금식을 하는데 아내가 밥을 지어 혼자 먹을 수는 없었으리라. 결과적으로 아내마저 금식을 한 꼴이다. 나는 끼니때마다 대체식을 먹었지만 아내는 그것도 먹지 않았으니 나보다 아내의 고생이 컸을 것이다. 그 뒤 아내에게 보약을 한 제 지어 복용시켰지만 아직도 아내의 체중에는 변화가 없다.

 

 지난 한 달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6․25한국전쟁 후유증이 심각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흉년이 자주 들어 먹고 싶어도 먹을 밥이 없었다. 또 끼니때마다 밥을 얻어먹으려는 거지들은 왜 그리도 많이 찾아왔는지 모른다. 그때 가난한 사람들은 상추에 된장만 싸서 빈 배를 채우는 게 예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농민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이 찐다면서 밥 먹기를 꺼린다. 쌀이 남아돌아 걱정인데 쌀 소비는 오히려 거꾸로 자꾸 줄어든다니 안타깝다.

 

 때로는 조물주가 원망스럽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간이나 콩팥 등 사람의 장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때때로 부모에게 장기를 기증했다는 효자이야기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몰래 장기를 사고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서로 살을 주고받을 수는 없을까? 요즘 우리부부의 고민은 거기에 있다. 하긴 이게 어찌 우리부부만의 고민일 것인가?

 

 

발췌 :  http://cafe.daum.net/pen063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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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 새 날아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 빛만 남기고, 집 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은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히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 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것 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 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 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띄운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 --- 땅속 깊이 파 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 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흥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라, 늘 들어가는 집 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 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 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워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 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에 창 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 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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