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이야기

 정채봉

  

꽃뫼 마을에 집을 사서 들어서자 이 녀석이 먼저 소리를 내었다. 털이 하얀 스피츠인데 제 판잣집에 틀혀박혀 눈에 파란 빛이 일렁일만큼 죽어라 하고 짖어댔다.
 어떻게 좀 사귀어 볼까 하고 빵을 사 들고 간 아이들한테 으르렁거려서 혼비백산하게 만들었고, 이튿날이 되어 목이 쉬어도 녀석은 짖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 주인이 이사가면서 물려준 개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괜히 얻었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다못해 집사람이 "저 빌어먹을 놈의 개새끼, 옆집 할머니네에나 주어 버립시다." 하는 것을  "쉬 달구어지지 않는 조선 솥이 오래가지 않던가요? 두고 보시오. 정 들이면 또 그만큼 잘 따를 것이오." 하고 말렸다.
 과연 녀석은 차차로 낯이 익어지자 처음 사납게 짖던 맹렬만큼 우리 식구들하고 바짝 가까워졌다. 이름도 원래의 '해피'에서 우리 아이들의 돌림자인 '태'자를 써서 '개태'로 바꿔졌다.
 그러자 바깥 외출이 잦은 녀석을 아이들이 "개태야! 개태야!"하고 찾으러 다니는 통에 이웃에서 우리 집을 가르켜 '개태네 집'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일요일에는 이 마을에 외판 사원들이 들이닥쳐 이집 저집의 개들을 짖기고 다녔다.
 그중에 한 사람이 우리 골목을 들어서면서 옆집 할머니한테 "저 집은 누구네 집입니까?"하고 물었던 모양. 그러자 그 할머니가 무심히 "개내테 집이라우."하는 말을 듣고 이 사람이 대문을 두들기면서 부르는 것이었다.
 "개태 선생님, 개태 선생님 계십니까!"하고.
 물론 녀석이 컹컹 대답을 하였는데 우리는 여간 쑥스럽지가 않았다.
이 녀석한테 얽힌 에피소드는 이외에도 많다. 아침 출근할 때 밖에서 놀고 있는 녀석한테 들킨 날이면 온 동네 개들을 다 데리고 전철역까지 배웅 나오는 통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지를 않나, 족발집에서 소주를 마신 김에 생각이 나서 한두 번 먹고 남은 것을 비닐 봉지에 담아 들고 들어왔더니 밤이 늦을 때는 꼭꼭 전철역으로 내 마중을 나오질 않나.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해 가니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나오면서 말했다.
 "아빠, 개태가 잡혀갔나 봐요."
 "개태가 잡혀가다니, 누구한테 잡혀가?"
 그때서야 나는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집사람의 설명으로는 아침 나절에 나간 후로 들어오지를 않는다고 했다.
 점심 무렵에 개장수의 ""개 파세요, 개 파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어찌 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정 들인 것을 잃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간 마음이 섧지 않다. 녀석의 빈집을 보는 것도 괴롭고 이웃집 개가 짖는 것조차도 가슴아팠다. 녀석은 집을 나간지 나흘째가 되어도 종무소식이었다.
 그 주 일요일에 나는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사제관에 들러 신부님을 만나고 있었다. 집 나간 개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이들이 성모님께 전에 없이 무주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녀석 때문인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신부님의 얼굴이 환해지며 "기쁜 소식입닏."하면서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집사람의 숨가쁜 음성이었다.
 "개태가 돌아왔어요. 무슨 끈을 끊고 왔는지 목에 털이 벗겨지고 상처가 크게 났어요."


 꽃뫼 마을에 산지 3년 만에 우리도 부득이 아파트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집이 팔리자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녀석이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뾰족 수가 없었다. 전 주인처럼 집을 사서오는 분들께 부탁을 하고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이삿짐 차에 올랐다. 그러나 녀석은 아이들이 사다 준 소시지에 정신이 팔려 떠나는 우리를 못 보았다.

 그날은 외국으로 떠나는 친구의 송별연 관계로 밤길이 늦었다.전철을 타고 전에 살던 화서역을 지나면서 무심히 창 밖을 보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수은등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하얀 것. 그렇다. 녀석인지도 모른다.
 나는 수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짚어 나왔다. 역의 출구를 나서는데 쏜살같이 달려와서 엉겨 붙는 것은 녀석이었다.
 안면 있는 역원이 곁에서 말했다.
 "개가 의리없는 사람보다도 낫습니다. 저놈이 밤마다 나와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우리들끼리 그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뒤부터 나는 한 며칠동안 집에 가기 전에 먼저 녀석의 군것질을 준비해 가서 녀석하고 만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내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녀석한테 꼭꼭 들를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이것은 녀석을 행복케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녀석한테로의 발걸음을 뚝 끊었다.
 아,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이 에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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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례사

                                                                                                      법정


며칠 전 한 친지가 느닷없이 자기 아들 결혼식에 나더러 주례를 서달라고 했다.

유감스럽지만 내게는 ‘주례 면허증’이 없어 해줄 수 없다고 사양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단 한 번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주례를 3년 전 6월 어느 날 한 적이 있다. 그날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나는 오늘 일찍이 안하던 짓을 하게 됐다. 20년 전에 지나가는 말로 대꾸한 말빚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만이 책임을 질 줄 안다.


오늘 짝을 이루는 두 사람도 자신들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세상에 서겠다’고 했으니(청첩장에 박힌 그들의 말이다) 그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무릇 인간관계는 신의와 예절로써 맺어진다.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그 신의와 예절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부부로서 만난 인연을 늘 고맙게 생각하라. 60억 인구이니 30억대 1의 만남이다. 서로 대등한 인격체로 대해야지 집안의 가구처럼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지 말라.


각자 자기 식대로 살아오던 사람들끼리 한 집안에서 살아가려면 끝없는 인내가 받쳐 주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지 말고 맞은편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이해와 사랑의 길이 막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났을 때라도 말을 함부로 쏟아버리지 말라. 말은 업이 되고 씨가 되어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결코 막말을 하지 말라. 둘 사이에 금이 간다. 누가 부부싸움을 칼로 물베기라고 했는가. 싸우고 나면 마음에 금이 간다. 명심하라. 참는 것이 곧 덕이라는 옛말을 잊지 말라.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신속 정확하게 속물이 되고 만다.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없으면 대화가 단절된다. 대화가 끊어지면 맹목적인 열기도 어느덧 식고 차디찬 의무만 남는다. 삶의 동반자로서 원활한 대화의 지속을 위해, 부모님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숙제를 내주겠다. 숙제 하나,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밖에서 빌리지 않고 사서 읽는다. 산문집은 신랑신부가 따로 한 권씩 골라서 바꿔가며 읽고 시집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해서 하루 한 차례씩 적당한 시간에 번갈아가며 낭송한다.


가슴에 녹이 슬면 삶의 리듬을 잃는다. 시를 낭송함으로써 항상 풋풋한 가슴을 지닐 수 있다. 사는 일이 곧 시가 되어야 한다. 1년이면 36권의 산문집과 시집이 집안에 들어온다. 이와 같이 해서 쌓인 책들은 이 다음 자식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의 자취로, 정신의 유산으로 물려주라. 그 어떤 유산보다도 값질 것이다.


숙제 둘, 될 수 있는 한 집안에서 쓰레기를 덜 만들도록 하라. 분에 넘치는 소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악덕이다.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 광고에 속지 말고 충동구매를 극복하라. 가진 것이 많을수록 빼앗기는 것 또한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적게 가지고도 멋지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그 날은 두 사람 다 숙제를 이행하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뒤 소식은 알 수 없다. 숙제의 이행 여부는 이 다음 삶의 종점에서 그들의 내신성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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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정 진 권

 

 자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허술한 앉은뱅이 식탁은 낡아야 한다. 고춧가루 그릇이나 식초병은 때가 좀 끼고 금이라도 가야 운치가 있다. 방석은 때에 절어 윤이 날 듯하고, 자장면 그릇은 거무스레하고 이가 두어 군데 빠져 있는 게 좋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은 뚱뚱해야 한다. 머리엔 한 번도 기름을 바른 일이 없고, 인심 좋은 얼굴엔 개기름이 번들거리며, 깨끗지 못한 손은 소두방만하고, 신발은 여름이어도 털신이어야 한다. 나는 그가 검은 색의 중국옷을 입고, 그 옷은 때에 전 것이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런 옷을 찾기 어려우니 낡은 스웨터로 참아 두자.

  하여간 이런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평안해서 좋다.

  스무 살 때던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나는 자장면을 잘 사 먹었는데, 그 그릇이나 맛, 그 방안의 풍경이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인의 모습까지도 내 고향의 자장면, 그 중국집, 그 짱궤(장궤의 속음)와 다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해서, 내가 처음으로 으리으리한 중국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엄청난 중국 요리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것들이 온통 가짜처럼 보였고, 겁이 났고, 괜히 왔구나했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위에 말한 그런 주인의 그런 중국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 친애하는 자장면 장수 여러분들도 자꾸만 집을 수리하고 늘리고 새 시설을 갖추는 모양이어서, 마음 편히 갈 만한 곳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돈을 벌고, 빌딩을 세우고, 나보다 훌륭한 고객을 맞고 싶은 것이야 물론 그 분들의 큰 소원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와 내가 다니는 직장 근처에만은, 좁은데다 깨끗지 못한 중국집과 내 어린 날의 그 짱궤 같은 뚱뚱한 주인이 오래오래 몇만 남아 있어 줬으면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러면 나는 어느 일요일 저녁때, 호기 있게 내 아이들을 인솔하고, 그 동네 중국집으로 갈 것이다. 아이들은 입술에다 볼에다 자장을 바르고 깔깔대며 맛있게 먹을 것이고, 나는 모처럼 유능한 아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퇴근길에 친구를 만나면, 나는 그의 어깨를 한 팔로 얼싸안고 그 중국집으로 선뜻 들어갈 것이다. 양파 조각에 자장을 묻혀 들고, "이 사람, 어서 들어." 하며, 고량주 한 병을 맛있게 비운 다음, 좀 굳었지만 함께 자장면을 나눌 것이다. 내 친구도 세상을 좁게 겁 많게 사는 사람이니, 나를 보고 인정 있는 친구라고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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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사람들

 

김 태 길

 

사람의 평균 수명이 크게 늘었다고는 하나, 80세를 넘기기는 지금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 제한된 이 시간 속에서 뜻있고 보람찬 삶을 이룩하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설계와 실천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있게 사는 것일까? 멋있는 길이 오직 한 줄기로만 뻗어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의 소질과 취향 그리고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른 길이 모두 뜻과 보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음직하다.

예술가의 생활은 언제 어느 모로 보아도 멋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라면 더욱 좋을 것이며,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경우라 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창작의 길로 정진하는 모습에는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위기가 따라다닌다.

참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여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예술에서 오는 즐거움은 관능(官能)의 만족에서 오는 즐거움보다 깊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긴 여운을 남긴다. 관능의 쾌락은 뒷맛이 어두우나 예술의 즐거움은 뒤가 맑아서 좋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에게 감사를 느낀다.

예술이 한갓 상품으로 전락할 떄, 예술가의 값도 떨어진다. 가난은 예술가의 경우에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을 위해서 있어야 하며, 돈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생명을 잃는다.

예술가가 권력의 시녀(侍女)가 될 때, 그의 모습은 장사꾼이 되었을 경우보다도 더욱 보기에 흉하다. 장사꾼도 아니요 권력의 심부름꾼도 아닌 그를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앞에 마음의 꽃다발을 바친다.

학자의 생활은 남의 눈에도 별로 멋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젊어서 화려하고 활달한 기질을 뽐내던 사람도 학자 생활 30년만 하면 초췌한 영감으로 변한다. 그러나 학자의 생활에는 그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내면의 세계가 있다.

학자로 행세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깊고 넓은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세계를 향하는 외길로 생명을 불사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멋과 기쁨이 있다.

학자도 남의 눈에 멋있어 보일 때가 있다. 그의 학문이 한갓 전문적 지식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그를 확고한 세계관 또는 인생관의 고지로 안내했을 경우이다. 그토록 거창한 경지가 아니더라도 신념과 지조를 갖춘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뚜렷한 학자는 그 나름의 멋을 풍긴다.

학자의 모습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돈이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꼿꼿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경우이다.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도 감동을 자아낸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는 장군의 모습도 멋이 있지만, 총칼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학자의 용기는 더욱 멋이 있다.

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멋이 있는 사람들이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건강하고 여유가 있는 안내양은 아주 멋이 있어 보인다. 할머니를 도와서 부축하기도 하고, 엄마 대신 어린이를 번쩍 들어서 차 밖으로 내려 놓는 그의 모습은 반코트를 입고 부츠를 신은 명동의 아가씨보다도 더 멋이 있다.

병원의 간호사들 가운데도 멋있는 사람들이 있다. 백옥같이 흰 가운을 입고 고깔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한 것을 뒤통수에 얹은 그 청순한 외모도 멋이 있지만, 환자를 위하여 정성껏 돌봐 주는 고마운 마음씨가 더욱 멋이 있다. 모든 간호사가 누구나 그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다. 대개는 사무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가운데 어쩌다 특별히 착한 간호사가 있어서 더욱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간호사들이 친절하다 하더라도 그 진가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결심보다는 천성이 착해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다. 내 욕심을 눌러 가며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존경의 감정을 느끼고, 천성이 착한 사람에게는 친근감을 느낀다.

남을 위해서 또는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감탄을 느끼며 머리가 수그러지는 것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남이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하여 감탄과 존경을 느낀다.

직업이나 지위와는 관계 없이 여기저기에 멋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멋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가치관의 차이에 있는 것일까.

장관이나 그 밖의 이른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도 더러는 멋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같으면 교만스럽거나 거드름을 피우기 쉬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나는 멋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보기 드문 미모를 갖추고도 잘난 척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여자의 경우도 감탄을 금하기 어렵다.

보통 같으면 비굴하기 쉽고 때로는 아첨도 되는 불우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존심을 간직하고 당당한 사람은 더욱 멋이 있다. 소아마비의 불행을 겪고 절름거리면서도 늘 명랑하고 쾌활한 친구도 멋있는 사람이다.

세상 인구는 날로 늘어가지만 멋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더러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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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이야기

문형근 

        우리의 밥상에는 밥과 함께 국이 주인이다. 봄이면 냉이국이나 쑥국의 향긋한 냄새가 좋고, 여름엔 애호박국이 감미로우며, 가을엔 뭇국이 시원하다. 그리고 겨울이면 시래깃국과 얼큰한 배추 김칫국이 있어서 철따라 우리의 입맛을 돋운다.가을 뭇국은 반드시 간장을 넣고 끓여야 제 맛이 나고, 겨울 시래깃국은 된장을 풀어야 구수한 맛이 돈다. 사람들이 지닌 성품과 애정(愛情)도 이처럼 사계절의 국물맛과 같지 않을까?

조선 시대 왕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왕이 친히 선농단까지 나갔던 것이다.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도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궁궐에서만 사는 왕을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고, 또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도 해서였다. 흉년이 든 다음 해는 백성들이 더 많았는데, 그 까닭은 그 곳에 가면 국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농단의 국물에는 은혜와 감사, 또는 마음 속 깊은 기원(祈願)이나 따듯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농단에서 백성들에게 국물을 나누어 주다가 갑자기 사람이 더 늘어나면 물을 더 붓는다. 그리고 간을 다시 맞추어 나누어 먹는다. 물을 더 부으면 그만큼 영양가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 지난날 우리가 영양가를 따져 가며 먹고 살아왔던가? 가난을 나누듯 인정(人情)을 사이좋게 실어 나르던 고마운 국물이었던 것이다.

엿장수 인심에 '맛보기'라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기분만 나면 맛보기 한 번에다 덤을 주는데, 이 역시 국물 한 대접 같은 인정의 나눔이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살 때도 값어치만큼의 양은 당연히 준다. 그러나 덤으로 콩나물이 더 얹히지 않을 때 아낙네들은 금방 섭섭한 눈치를 한다. 파는 이가 두꺼비 같은 손잔등을 쫙 펴서 서너 개라도 더 올려놓아야 아낙네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 간다. 그 덤 역시 국물과 같은 끈끈한 인정의 나눔이리라.

그런데 요즈음 우리네 식탁엔 점차 국물이 사라지고 있다. 걸어가면서 아침을 먹고, 차에 흔들리면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인가? 아니면, 개척 시대 미국 이주민의 생활(生活)이 부러워 그것을 흉내 내고 싶어서인가? 즉석 요리, 즉석 식품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내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생선은 굽고, 닭고기는 튀겨야 맛이 있다고 성화인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그 반대 입장에 서서 국물이 있는 것으로 입맛을 챙기려 하니, 아내는 늘 지혜롭게 식탁을 꾸려갈 수밖에 없다. 

기다릴 줄을 모르고, 자기욕심 자기주장이 통할 때까지 고집을 피워 대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그런 성격이 서구화(西歐化)된 식탁 문화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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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의 귀향_박완서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때는 일몰이었으면 참 좋겠다

 
박완서·소설가

친정 쪽은 휴전선 이북이고, 시댁 쪽은 대대로 서울에서도 사대문 안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은근히 으스대는 서울 토박이라 명절이 돼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금년엔 좀 덜했지만 추석 때마다 전국의 도로란 도로가 엄청나게 정체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한테까지 그것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마치 집 없는 거지가 남의 집 불타는 걸 고소하게 구경하면서 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집이 없어 불날 걱정 안 해도 좋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했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거지 아범처럼 말이다.

마당에서 한때 하늘을 뒤덮을 듯이 무성하던 나무들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흙에서 난 것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아무도 못 말린다. 사람도 설령 나고 자란 데가 흙을 밟을 수 있는 시골이 아니라 해도 추석이 되면 조상의 묘나 집안 내의 연로한 어른들을 찾아뵙고 눈도장이든 몸 도장이든 찍고 와야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한 것처럼 편안해진다.

이제 많이 살아 친·인척 간에 제일 연장자가 됐으니 가만히 앉아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맞는 입장이 됐다고 해도,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한 번은 벌초를 겸해 대가족을 이끌고 다녀왔고, 며칠 있다 왠지 혼자 가고 싶었지만 차 없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운전자만 데리고 갔다.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왜 혼자 오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먼저 간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갈 때마다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던 데가 이상하게 정답게 느껴지면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데도 산꼭대기가 아니고 골짜기라 우리 동네처럼 아늑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규격화된 작은 비석도 마음에 들었다. 비석엔 내 이름도 생년월일과 함께 새겨져 있다. 다만 몰(沒)한 날짜만 빠져 있다. 나의 사후(死後) 내 자식들은 큰 비석이나 아름다운 비명을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긴 어떤 무덤도 잘난 척하거나 돋보이려고 허황된 장식을 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묘지이다. 그래도 우리들 것보다 조금만 더 큰 봉분과 비석을 가진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도 저승의 큰 '빽'이다.

다만 차도에서 묘지까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른 것이 걱정스럽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 떨어지면 혹시 저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한다면 그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농담이 되겠지.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십여년 전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최초로 휴전선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장관에 크게 감동했지만 될 수 있으면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정 회장은 정 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 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신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들어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그분이 철통 같은 분단의 장벽을 뚫고 낸 물꼬는 마침내 금강산관광 개성관광까지 이어졌고 나도 금강산관광까지는 다녀왔지만 개성관광엔 저항을 느꼈다. 어떻게 고작 6~7km 밖에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을 놔두고 개성 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성관광을 제안받을 때 나 홀로 경로 이탈을 해서 고향 마을 박적골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을 말해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출처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2009. 11.16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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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단영 (본명 배문경)

 

 

못을 뺀다. 낡은 벽장을 수리하기 위해 못 머리에 장도리를 끼우고 낑낑거리며 못을 뽑았다. 못은 야무진 벽을 뚫고 들어가 긴 세월 동안 제 역할을 다했다. 제 크기의 수십 배, 수백 배도 더 되는 무게를 견디느라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무엇을 얹거나 걸면 못은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억지로 끌려나온 못이 허리 굽은 아버지를 닮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는 해가 뉘엿할 때 들판으로 논물을 보러가셨다. 아침저녁으로 들판을 돌보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벼들의 성장이 푸짐하게 차려진 잔칫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버지의 다리가 허방을 짚는 듯하더니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좁은 논둑은 아버지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흙을 밀어내며 내려앉았고 그 바람에 논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넘어진 아버지가 쉬 일어나질 못하자 동네 친척이 업고 나왔을 때는 사위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동네 의원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는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서도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하룻밤 자고 나면 될 것을 무에 번거롭게…….”

흙탕물에 젖은 옷은 아버지의 몸에 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았고 머리 밑까지 머드팩을 한 듯이 구석구석이 흙덩어리가 끼여 말끔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픔을 억지로 견디려고 입을 꼭 다물었지만 신음소리는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빨리 약방에 가서 진통제와 파스를 사오라고 대문 밖으로 나를 내몰았다.

어둠은 앞산에서 시작해서 마을 전체를 상보처럼 덮고 있었다. 개구리 소리는 그날따라 더욱 청승맞게 들렸다. 달이 없는 하늘에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멀리서 마주보며 그리움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약과 파스의 효력을 못 본 아버지를 설득해서 진찰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사고로 허리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겨우 통증을 참아냈다. 다친 부위의 검사와 치료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자 아버지는 괜찮으니 주사나 한 대 달라며 말꼬리를 자르셨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자신의 병이 가족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못내 껄끄러우신지 우리를 외면하고 돌아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부러진 뼈를 치료하기 위해 못을 박아 두 개의 뼈를 고정해 하나처럼 움직이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두 개는 그만한 기능을 위해서 필요한 숫자였지만 어느 날부터 하나로 살아야 한다는 특명이 내려진 것처럼 항명이 불가능해졌다.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병원에는 아버지와 비슷한 병으로 입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단한 못이라고 생각했던 몸이 나이 든 사람들을 배신하는 듯이 보였다. 노년의 서글픔마저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자라는 곡식들이 걱정된다며 몇 번인가 집으로 가자고 입원 중에도 고집을 부리셨다. 병원에서 제시한 퇴원날짜보다 앞당겨 나오셨지만 돌아오신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기 이전처럼 많은 일을 하실 수가 없었다. 어이없이 발생한 사고에 비해 치유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허리뼈가 거의 완치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꼬리뼈가 다시 말썽을 일으켰다. 휘어진 척추와 금이 간 뼈 그리고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들은 노년의 아버지를 자유로움에서 멀어지게 했다. 신체적인 고통은 너그럽고 이해심 많던 아버지를 사막처럼 건조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사람이 변하면 오래 못 산다며 뒤에서 말들이 많았다. 나는 못들은 척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신 아버지는 땅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논 중에서도 가장 작고 볼품없는 논에 대한 개간 계획을 갖고 계셨다. 가족들이 무리한 일이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 논은 구릉과 구릉 사이에 끼여 정사각형도 직사각형도 아닌 삐뚜름하게 생겨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다. 양 옆으로는 작은 개울과 구릉이 자리를 잡고 있어 논은 더욱 작아보였다.

아버지는 논을 반듯하게 만들겠노라 선언하시고는 밤낮없이 논에서 살다시피 했다. 거친 자갈밭과 바위들이 아버지의 손길을 거부했다. 굵은 칡뿌리는 잘라내어도 뿌리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땅과 한판 승부를 낼 듯이 곡괭이로 땅을 뒤지고 돌을 주워 버렸다. 바로 옆 개울가는 아버지가 버린 돌들로 흙탕물이 되기 예사였다.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향기조차 아버지의 땀 냄새를 덮을 수는 없었다.

논은 조금씩 넓어졌다. 구릉에는 잡초와 잔나무들이 사라진 거친 자리를 대신해 모내기한 모들이 푸르게 자리 잡곤 했다. 모내기를 하던 첫 해에는 땅이 거칠어 일을 하던 아낙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수확량은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추위를 이겨내고 거둔 성과는 논이 조금씩 커져가는 만큼 나타났다.

무리한 개간은 오남매의 뒷바라지는 가능하게 했지만 아버지의 몸은 휘어지고 내려앉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가득 짊어진 못이었다.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뼈가 옆으로 휘어지는 통증에 고통스런 시간도 보냈으리라.

그나마 허리뼈를 못으로 고정해서 일상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에게 이 막의 인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서 살아온 인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 볼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좋은 것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흙에서만 살던 아버지가 농사를 접고 여가를 보내는 것이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흙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들이 아버지 본인의 삶 자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기에.

필요한 것을 걸기 위해서 다시 못을 박는다. 아이들의 커 가는 모습이 액자에 담겨져 한두 개씩 늘어난다. 큰애의 백일 사진이 돌 사진으로 바뀌고 둘째가 언니와 함께 찡긋 윙크하며 찍은 사진이 덧붙여진다. 단단한 못에 의지해 가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곳에는 겸연쩍게 물러나 계신 아버지, 가족에게는 늘 힘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이 든든한 못을 배경으로 세상에 한 발자국을 내디딜 힘을 얻는다.

자신의 책임을 무던히 견뎌 주던 아버지는 내게 늘 휘어진 못으로 오래토록 기억에 남아 있다.

 

/2010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배단영 (배문경)

 

△1964년 6월 15일 경북 포항 출생 △선린대학 간호학과 졸업 △현 경주 굿모닝병원 간호과장 재임 △경주대학교 사회교육원 수필창작수료 △동리목월문학관 수필연구반수료 △경주수필문학회 회원 △시흥문학상 우수상 수상

 

당선 소감

 

차디찬 겨울의 따뜻한 햇살 한줄기

 

뜨락으로 수북이 쌓이는 낙엽들이 서로 엉켜 겨울을 나고 있다. 이미 잎은 나무로부터 떨어져 자의든 타의든 생명줄이 다한 것이다. 하지만 버석하게 말라가면서도 곧잘 우리의 시심을 파고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나무의 일부분이었지만 이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진 운명이 가여워서인지 쉬 눈길을 돌리지 못한다.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린 겨울나무는 상실의 아쉬움을 갖지는 않을까. 푸른 날을 기억하는 잎들은 거름이 되어 또다시 나무를 키워 나갈 것이다.

내가 부모의 그늘을 찾을 나이는 아니지만 나의 육체와 정신 속에는 부모의 DNA가 엄연히 살아 대를 이어가고 있다. 나 또한 불혹의 나이에 부모의 자리로 밀려가며 치기로 버티던 시간은 버려야 함을 안다.

5년 동안 수필을 쓴다고 나름 애를 쓰고 산 것 같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보내면서 부족한 나 자신을 힐책하기도 하고 발버둥도 쳐보았다. 앙금 같은 시간을 잘 풀어내리란 기대는 매번 동강났고 어쭙잖게 버틴 시간은 차디찬 겨울이었다. 겨울 짧은 햇살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때는 추위 속에서 떨어보고 창을 통해 밖을 보았을 때의 일이다.

겨울햇살이 이토록 포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 홍억선 선생님과 긴 시간 등을 도닥이며 서로 힘이 되어준 문우님, 가족, 나를 알고 있는 지인 모두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오늘의 이 기쁨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심사평

 

못과 아버지의 삶 심도있게 형상화

 

응모작 총 300여편을 읽었다.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응모한 작품 경향은 예년에 비해 수필에 대한 진지성과 사유의 깊이, 주제와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확대성이 엿보였다.

또한 회고, 토로, 고백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 의식의 반영과 주제와 소재의 다양성, 젊은 의식이 나타나는 등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수필은 체험과 느낌을 형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의 사회적 확대가 이루어져야 하며 삶에 대한 발견과 의미 부여가 있어야 한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나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생의 집중력과 경지가 담긴 작품을 보여야 한다. 일생의 집중력과 역량을 보이는 본격성이 드러나야 한다. 한 체험을 통한 부분적인 발견과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소한 체험일지라도 작가만의 관점으로 청신하고 독특한 개성과 표현력을 보인 작품들이 있는가를 살폈다. 신인이라면 패기와 역량이 담겨야 한다. 안정과 보편성을 얻기보다는 선명한 빛깔, 향기, 모습이 있어야 한다. 기성의 형식과 틀을 깨는 용기와 개척성이 아쉬웠다.

눈에 띄었던 ‘옹기’와 ‘풍구’ 두 작품은 주제는 뚜렷했으나 내용이 다소 진부한 것이 흠이었다. 최종심에 오른 ‘못’과 ‘인생연주’를 놓고 숙고한 끝에 ‘못’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인생연주’는 삶의 체험 중 여러 현상들을 악기의 연주에 비유한 점이 좋았으나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에 비해 ‘못’은 못과 아버지의 삶을 심도 있게 형상화했을 뿐 아니라, 인생 경지와 의미 부여가 두드러져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정목일·서현복>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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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곽홍렬

 

   중학에 들어가고부터 하교 시간이 늦어지는 날이 잦았다. 지금 아이들처럼 방과 후에 이 학원, 저 교습소 옮겨 다니느라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영어암송대회다 웅변대회다 백일장이다 해서 걸핏하면 대표로 뽑혀 연습을 하다 보니 야심토록 학교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잠직하고 재주도 하찮았던 촌뜨기였건만, 어디가 그리 미쁘게 보여 선생님들의 분에 넘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하루치 연습이 마쳐지고 뒷정리까지 끝나면, 서둘러 귀갓길에 오른다. 시계는 벌써 밤 열 시가 훌쩍 넘어 있기 일쑤다. 요사이야 열 시께면 아직 초저녁에 불과하지만, 그 때는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기껏해야 몇 시간에 한 대씩 있는 시외버스마저 끊긴 지 오래다. 쌀에 뉘처럼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해만 빠지면 거리는 이내 적막강산이 된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신작로를 지나오려면 주뼛주뼛 머리끝이 곤두서면서 오싹 소름이 끼쳤다.

 

   지난날엔 늑대와 여우, 개호주 같은 산짐승도 많았지만 도깨비며 귀신 이야기는 또 어찌 그리 흔했던지……. 어린 나는 자연 풀어낼 수 없는 두려움을 가슴에 들였다. 그런 잠재된 공포에의 기억이 무섬증을 불러와,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사람을 호린다는 골짜기 앞에 다다르면 걸음아 날 살리라며 부리나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정신없이 내달려 마을 앞까지 다 왔을 때는 식은땀으로 등줄기가 흥건히 젖어 있곤 했다.

 

   동구 밖에 들어서면,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가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와 계셨다. 저만치 어머니의 희미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무섬증과 고단함은 눈 녹듯 일시에 풀려나갔다. 아들의 모습을 확인한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이 되시는지, 한 차례 깊은 눈 맞춤을 하고는 집을 향해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 침묵 속에 어리비치던 당신의 자애로운 눈빛을, 머리에 서리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지금 이 나이까지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달이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당신의 아들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어 줄 달이기를, 그것도 보름달이기를 소망하셨을 것이다. 지금 헤아려 보니, 어머니가 꼭 달맞이꽃을 닮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터처럼 수선스럽고 살벌한 세상에서 내가 오늘 이 때까지 쓰러지지 아니하고 꿋꿋이 버티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달맞이꽃이 되어 지켜주신 어머니의 염려와 보살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지병으로 시난고난하다 생의 가을 녘에 훌홀히 저세상으로 떠나가 이제는 더 이상 달맞이꽃이 되어 주실 수 없는 어머니, 어쩌다 고향집을 찾을 때면 그때의 어머니가 동구 밖에 달맞이꽃으로 서 계시는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들곤 한다.

 

   해바라기가 정열의 꽃이라면 달맞이꽃은 소박함의 꽃이다. 꼭 달이 뜨는 저녁을 기다려 피어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달맞이꽃,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꽃말을 얻게 되었나 보다. 야심한 밤에 달팽이각시처럼 살그머니 찾아오는 꽃이라 하여 ‘야래향夜來香’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야래향, 미혹되지 않을 수 없는 향도 향이려니와, 무엇보다 꽃 이름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어쩐지 권력자를 치어다보며 간살을 떨고 있는 듯싶은 해바라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은근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이름이 나는 좋다.

   일찌거니 저녁술을 놓고는 달 바라기라도 할 겸 동구 밖으로 산책을 나선다. 아니나 다를까, 달맞이꽃이 어느새 제가 먼저 달을 마중하고 섰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건만, 달 오시는 밤만 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얼굴을 내민다. 뒤란에서 말없이 나타나는 은근한 정인 같기도 하고, 멀리서 소식 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같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이슬을 맞고서 함초롬히 피어 있다 아침 해가 부챗살을 펼치기 시작하면 다시 저녁을 기약하며 조용히 입을 오므린다.

 

   대다수의 꽃들은 낮에 다투어 피건만, 이 달맞이꽃은 어찌하여 밤을 틈타 수줍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무슨 정이 그리 많아 남들 다 깊이 잠든 시간에도 저 홀로 잠들지 못하고 온 밤을 지새우는 것일까. 하얀 밤에 노란 꽃, 그 선명한 색채의 대비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달맞이꽃에 찬찬히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애달픈 전설 하나가 망막에 맺혀 온다.

 

   오랜 옛적,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 틈에 유독 홀로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요정은, 별이 뜨면 달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조바심에 무심코 이런 모진 말을 하고 말았다.

   “하늘나라의 별들이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럼 매일매일 달을 볼 수 있을 텐데……”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요정들이 곧바로 제우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잔뜩 화가 난 제우스는 그만 달 없는 깜깜한 세상으로 그 요정을 유배시켜 버린다.

 

   나중에야 사연을 알게 된 달의 신은 자기를 좋아했던 요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곳곳에서 제우스가 곁쐐기를 박는 바람에 둘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달을 사랑했던 요정은 너무 지친 나머지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요정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찾아올 수 있었던 달의 신은 눈물을 흘리며 그 요정을 땅에 묻어 주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 제우스는, 그 미안한 마음을 자책하며 요정의 영혼을 달맞이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달맞이꽃은 일편단심 달을 따라 함초롬히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조용히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볼 때에도 이 슬픈 전설이 가슴을 적셔 오곤 한다. 그것은, 달의 신이 요정을 찾아 헤매듯 이제 이승에서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달 뜨는 시각이면 어김없이 달마중을 나오는 달맞이꽃처럼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면 여부없이 아들의 밤 마중을 나오셨던 어머니, 내가 해바라기 꽃보다 달맞이꽃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마 이런 까닭에서가 아닌가 싶다.

 

   이제 그 때의 늑대도, 여우도, 개호주도, 도깨비도 그리고 처녀귀신도 죄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한다. 유괴다 폭력이다 사기다 뭐다 해서 세상이 너무 어둡고 흉흉한 일들로 뒤덮여 가기 때문이다. 별의별 사건, 오만 사고들이 어느 하루도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지 아니하는 날이 없다. 이런 사회가 무섭고, 이런 세태가 두렵다. 이 무서움, 이 두려움을 지켜 줄 달맞이꽃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무엇으로 이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도 가시고 없는 이 풍진세계에서, 나는 얼마만큼 밝은 달이 되어 세상을 비추며 살아왔는지…….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 보면 그저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마음뿐이다.

   해마다 선들바람이 불어오고 달맞이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시절이면, 달맞이꽃이 되어 아들의 귀갓길을 밝혀 주셨던 어머니가 그립다. 몹시도 그립다.

                                                                                                                   

<2009년도 제3회 중봉 조헌문학상 수상작>

 

 

 

출처 : 박종국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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