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 버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歡迎)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回想)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夫婦)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感動)을 안겨다 주는 실화(實話)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新婚夫婦)였다. 보통(普通)의 경우(境遇)라면, 남편이 직장(職場)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反對)였다. 남편은 실직(失職)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會社)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出勤)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瞬間),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幸福)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幸福感)에 가슴이 부풀었다.
다음은 어느 시인(詩人) 내외의 젊은 시절(時節) 이야기다. 역시 가난한 부부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세수를 하고 들어와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개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있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기에 우리도 좀 사 왔어요. 맛이나 보셔요."
남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식전(食前)에 그런 것을 먹는 게 부담(負擔)스럽게 느껴졌지만, 아내를 대접(待接)하는 뜻에서 그 중 제일 작은 놈을 하나 골라 먹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함께 놓인 홍차(紅茶)를 들었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드셔요."
아내는 웃으면서 또 이렇게 권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또 한 개를 집었다. 어느 새 밖에 나갈 시간이 가까와졌다. 남편은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하고 재촉했다.
"지금 잡숫고 있쟎아요. 이 고구마가 오늘 우리 아침밥이어요."
"뭐요?"
남편은 비로소 집에 쌀이 떨어진 줄을 알고, 무안(無顔)하고 미안(未安)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다.
"쌀이 없으면 없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 하는 거요? 사내 봉변(逢變)을 시켜도 유분수(有分數)지."
뿌루퉁해서 한 마디 쏘아붙이자, 아내가 대답했다.
"저의 작은아버님이 장관(長官)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人生)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쟎아요."
잔잔한 미소(微笑)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아내 앞에, 남편은 묵연(黙然)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는 형언(形言) 못 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다음은 어느 중로(中老)의 여인(女人)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여인이 젊었을 때였다. 남편이 거듭 사업(事業)에 실패(失敗)하자, 이들 내외는 갑자기 가난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春川)에 갔다 넘기면 다소의 이윤(利潤)이 생겼다.
그런데 한 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 날로 돌아 오기는 어렵지만, 이틀째에는 틀림없이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다.
"춘천에만 닿으면 만나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나 봐요. 정말 막막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여관(旅館)을 뒤졌지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새웠지요. 이튿날 아침, 문득 그이의 친한 친구 한 분이 도청(道廳)에 계시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분을 찾아 나섰지요.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정거장(停車場)에 들러 봤더니……."
매표구(賣票口) 앞에 늘어선 줄 속에 남편이 서 있었다. 아내는 너무 반갑고 원망(怨望)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트럭에다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남편은, 가는 길에 사람을 몇 태웠다고 했다. 그들이 사과 가마니를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상해서 제 값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損害)를 보아서는 안 될 처지(處地)였기에 친구의 집에 기숙(寄宿)을 하면서, 시장 옆에 자리를 구해 사과 소매(小賣)를 시작했다. 그래서, 어젯밤 늦게서야 겨우 다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보(電報)도 옳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8․15 직후였으니…….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때만 해도 세 시간 남아 걸리던 경춘선(京春線),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한 손을 맡긴 채 너무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에 잠길 뿐이었다.
그 남편은 그러나 6․25 때 죽었다고 한다. 여인은 어린 자녀(子女)들을 이끌고 모진 세파(世波)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面目)이 선 것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지난날의 가난은 잊지 않는 게 좋겠다. 더구나 그 속에 빛나던 사랑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행복은 반드시 부(富)와 일치(一致)하진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陳腐)한 일 편(一片)의 경구(警句)만은 아니다.
그 곳은 시내 쪽을 보고 서 있는 커다란 병원 건물 한 편에 자리한 등나무 밑의 작은 정원이었는데, 보라색의 등꽃이 실바람에 통통거리는 모습이 마치 보라색의 손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이 햇살에 밀려 뿌리로 스며들자 무수한 잔디 잎들이 생명수를 마신 듯 힘껏 두 손을 뻗치고 기지개를 켜며 속살거리고 있었고 이름모를 꽃들이 다투 듯 피어나 방긋이 웃으며 서로 인사말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막 꽃받침을 사방으로 밀쳐내며 노란 머리를 드러낸 민들레가 말했습니다.
"어머! 정말 눈부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네. 찬란한 햇빛, 향기롭고 귀여운 등꽃. 저 건물은 참으로 커다랗고 튼실해 보여. 그런데 이건 뭐람. 길고 뾰족하잖아. 아이, 따거!"
옆에서 구부정한 허리에 꽃잎이 하얀 솜처럼 변해 버려 잠시 후면 홀씨로 날려가 버릴 늙은 민들레가 아는 체 하며 귓속말을 했습니다.
"저건 잔디라고 해. 사람들의 엉덩이 밑에 깔려 흙으로부터 옷을 보호해 주는 일 말고는 어데고 쓸모가 없단다. 보렴, 방금 네 뺨을 콕콕 찌른 것도 잔디의 시새움이란다."
이 때, 어린 민들레와 늙은 민들레의 속삭임을 엿듣고 있던 잔디가 발끈하며 소리쳤습니다.
"아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어요? 우린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땅 밑을 파고들어 어떤 황폐한 땅 속의 물길도 잡을 수 있답니다. 그 물을 길어 올려 연녹색의, 가늘지만 비수와도 같이 싱싱하고 뾰족한 잎사귀를 수 만개씩 피워내 회색의 도시에 희망을 주고 있지요. 튜립처럼 아름답거나 장미처럼 향기롭지도 않은 당신들이 정말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흥!"
잔디는 한껏 토라져 얼굴까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늙은 민들레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가뜩이나 구부정한 허리를 잔뜩 더 구부렸지만 어린 민들레는 눈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당신들은 대단하네요. 그렇게 뽀송뽀송한 솜털로 몸이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부리와도 같은 날카로움을 지녔군요. 거기에 비하면 저흰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것 같아요. 튜립의 아름다움도, 장미의 향기도 없으니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요......"
잔디는 자신이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어린 민들레의 가슴에 상처를 준 것 같아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사실 당신들은 저희보다 놀라워요. 튜립이나 장미는 저희 틈새에서 살 수가 없잖아요? 뿌리조차 제대로 내릴 수 없지요. 정원사들이 정원에 그들을 심으려고 할 때는 넓고 깊은 원형의 구덩이를 파서 저희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도록 해 놓은 후 심지요. 저희가 침범이라도 해서 수분을 죄다 빨아들일라치면 그들은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버리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어떤가요? 저희가 당신들의 뿌리 내림을 방해하고 물을 한 방울도 내주지 않으려고 버텨도 아무말없이, 저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 꽃을 피우고, 홀씨를 날려 조용히 어디엔가, 또 누구에겐가 희망을 주러 떠나잖아요? 미안해요, 말주변이 없어서......"
잔디는 자신이 너무 떠들어 댄 것 같아 살짝 얼굴을 붉혔고 늙은 민들레는 떨어져 나가려는 홀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아이, 예뻐!"하는 탄성과 함께 고사리 같은 어린아이의 손이 어린 민들레를 잽싸게 꺾어 들어 한 묶음이나 되는 다른 이름모를 풀꽃들 사이에 가지런히 누이는 것이었습니다.
잔디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가 늙은 민들레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어린 민들레는 이제 병실 창가에 꽂혀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지요?"
잔디가 대답없는 늙은 민들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빈 줄기만 남겨 놓은 채 잔잔한 바람결을 따라 하얀 미소를 지으며 그는 홀씨로 날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답지도, 향기도 없는 꽃을 단 며칠간 피우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바람에 묻혀 사라져 가는 민들레를 향하여 잔디는 눈이 시리도록 발돋움을 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수첩도, 일정한 메모 용지(用紙)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종이이거나 ―원고지도 좋고, 공책의 여백도 가릴 바 아니다.― 닥치는 대로 메모가 되어, 안팎으로, 상하 종횡 (上下縱橫)으로 쓰고 지워서, 일변 닳고 해지는 동안에 정리를 당하고 마는지라, 만일 수첩을 메모지와 겸용한다면, 한 달이 못 가서 잉크 투성이로 변할 것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시문(詩文), 밝은 날에 실천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의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원고지와 연필이 상비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가 있다.
가령,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탕을 나서다가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나는 이것을 잊을까 두려워,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나, 거기서 연상(聯想)의 가지가 돋치는 다른 생각 때문에, 기록할 때까지 기억해 두 지 않으면 안 될 수효가 늘어, 점점 복잡하게 된다든지, 또는 큰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피하다가, 혹은 친구를 만나 인사와 이야기하는 얼마 동안, 깨끗이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지 못할 때의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그러므로 목욕이나 이발 시간같이, 명상의 시간이 주어지면서도 연필과 종이가 허락되지 않는 때처럼, 나 같은 메모광에게 있어서 부자유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
꿈에서 현실로 넘어서는 동안, 고개 안팎에서 얻은 실로 좋고 아름다운 상(想)을, 나는 머리맡에 놓인 종이에 곧 의뢰하건만 ― 바쁜 행보 중(行步中), 혹은 약간의 취중에 기록한 메모의 글자나 그 개념(槪念)이 불충분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런 메모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모색하는 고통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 마치, 예의 있는 석상에서 상대방의 불쾌를 우려하여, 기자풍(記者風)의 괴벽(怪癖)을 발휘하지 못하는 고통과 비견(比肩)할 만도 하다. 그래, 그 분명하지 못한 자신의 필적을 응시 숙려(凝視熟慮)해 보건만, 결국 신통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또한 적지 아니하다. 연상(聯想)의 두절(杜絶)로 인한 무의미한 자획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산란하게 해 주었을 따름이요, 그렇다고, 별반 큰 변동이 나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침마다 나는 그 메모를 대략 살펴, 그 날의 행사를 발췌 초록(拔萃抄綠)해 들고 집을 나서건만, 물론 실행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기회 있는 대로 정리하고 정리하는 메모, 여기저기 기이한 잉크 흔적을 보여 주는 몇 장의 메모일지라도 나는 그냥 봉투 속에 집어넣고 간수한다. 그것은 고액(高額)의 지폐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분실한 일이 없었다.
메모뿐이 아니요, 평소에 별로 소유물을 잃어버려 본 일이 없는지라, 성냥 한 갑이라도 이유 없이 어디다 놓고 온 때에는, 불쾌한 마음이 한 동안 계속되는 괴벽임에도 불구하고, 일대 사건 ― 내게 있어서는 실로 중대한 사건 ― 이 발생한 일이 있다.
이미 오래 된 일이지만, 나의 학창 시절에 자취하는 친구들의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서 메모를 정리하려고 포켓을 뒤졌으나, 내 노력은 헛것이었다. 이 날 밤, 잠들기 전의 일과는 상궤(常軌)를 벗어나, 내 마음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찾고 또 찾고, 생각다 못해 기차로 두 정거장이나 가서도 십 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친구의 집을 그 길로 다시 되짚어 찾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쓰레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변소로 가는 마루에서 내 귀중한 메모 봉투를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란! 아직도 어렸을 적이라, 환호작약(歡呼雀躍)하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자고 가라는 권유도 한 귀로 흘리고, 단걸음에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그 날 밤은 평소에 드문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메모광적인 버릇은 나의 정리벽(整理癖)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적(書籍)이며, 서신(書信)이며, 사진이며, 신문, 서류 등의 정리벽은 놀랄 만큼 병적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원고를 끝내지 못하고서는, 다른 새로운 일에 착수하지를 못한다. 독서에 있어서도 또한 다분히 그런 폐단이 있는 까닭에, 책상 위에 4,5종 이상의 서적을 벌여 놓는 일이 별로 없으며, 책의 페이지를 펼쳐 놓은 채 외출하는 일도 전혀 없다.
또, 수집벽(蒐集癖)도 약간 있어, 내 원고를 발표한 신문, 잡지들은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하고, 소용에 닿을 만한 다른 신문, 잡지도 가위와 송곳을 요한 후, 벽장 속에 쌓아 두는 것이다.
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 양면(物心兩面)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設計圖)이다. 여기엔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의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의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우동집으로서는 일년 중 가장 바쁠 때이다. 북해정도 이날만은 아침부터 눈 코.뜰 새 없이 바빴다. 보통 때는 밤 12시쯤이 되어도 거리가 번잡한데 이날만큼은 밤이 깊어질수록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10시가 넘자 북해정의 손님도 뜸해졌다.
사람은 좋지만 무뚝뚝한 주인보다 오히려 단골손님으로부터 주인아줌마라고 불리고 있는 그의 아내는 분주했던 하루의 답례로 임시 종업원에게 특별 상여금 주머니와 선물로 국수를 들려서 막 돌려보낸 참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막 나갔을 때, 슬슬 문 앞의 옥호막을 거둘까 하고 있던 참에, 출입문이 드르륵, 하고 힘없이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6세와 10세 정도의 사내애들은 새로 준비한 듯한 트레이닝 차림이고, 여자는 계절이 지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라고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그 여자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 우동…, 일인분만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네. 자, 이쪽으로."
난로 곁의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주방 안을 향해,
"우동, 1인분!"
하고 소리친다.
주문을 받은 주인은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예!"
하고 대답하고, 삶지 않은 1인분의 우동 한 덩어리와 거기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 삶는다. 둥근 우동 덩어리가 일인분의 양이다. 손님과 아내에게 눈치 채이지 않은 주인의 서비스로 수북한 분량의 우동이 삶아진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우동 그릇이 테이블에 나왔다. 우동 그릇을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고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카운터 있는 곳까지 희미하게 들린다.
"맛있네요."
라는 형의 목소리.
"엄마도 잡수세요."
하며 한 가닥의 국수를 집어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가는 동생.
이윽고 다 먹자 150엔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모자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주인 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했다.
신년을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한해를 보내고, 다시 12월 31일을 맞이했다. 지난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끝내고, 10시를 막 넘긴 참이어서 가게를 닫으려고 할 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주인은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무늬의 반코트를 보고, 일년 전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그 손님들임을 알아보았다.
"저…, 우동…, 일인분입니다만,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여주인은 작년과 같은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일인분!"
하고 커다랗게 소리친다.
"네엣! 우동 일인분."
라고 주인은 대답하면서 막 꺼버린 화덕에 불을 붙인다.
"저 여보, 서비스로 3인분 내줍시다."
조용히 귀엣말을 하는 여주인에게,
"안돼요. 그런 일을 하면 도리어 거북하게 여길 거요."
라고 말하면서 남편은 둥근 우동 하나 반을 삶는다.
"여보,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은 구석이 있구료."
미소를 머금는 아내에 대해, 변함없이 입을 다물고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는 주인이다.
테이블 위의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싼 세 모자의 얘기 소리가 카운터 안과 바깥의 두 사람에게 들려온다.
"으, 맛있어요."
"올해도 북해정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내년에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 먹고 나서, 150엔을 지불하고 나가자 세 사람의 뒷모습에 주인 내외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날 수십 번 되풀이했던 인사말로 전송한다.
그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여느 해보다 더욱 장사가 번성하는 중에 맞게 되었다. 북해정의 주인과 여주인은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9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10시를 넘긴 참이어서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은, 벽에 붙어 있는 메뉴 표를 차례차례 뒤집었다. 금년 여름에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표가 150엔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2번 테이블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져 있다. 10시 반이 되어, 가게 안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것처럼, 모자 세 사람이 들어왔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퍼를 헐렁하게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볼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엄마는 여전히 색이 바랜 체크무늬 반코트 차림 그대로였다.
"어서 오세요!"
라고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엄마는 조심조심 말한다.
"저…, 우동…, 이인분인데도 괜찮죠?"
"넷, 어서 어서. 자 이쪽으로."
라며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거기 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카운터를 향해서 소리친다.
"우동 이 인분!"
그걸 받아,
"우동 이 인분!"
이라고 답한 주인은 둥근 우동 세 덩어리를 뜨거운 국물 속에 집어넣었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고, 이야기도 활기가 있음이 느껴진다.
카운터 안에서, 무심코 눈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 여주인과, 예의 무뚝뚝한 채로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이다.
"형아야, 그리고 쥰아. 오늘은 너희 둘에게 엄마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실은,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켰던 사고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잖니. 보험으로 지불할 수 없었던 만큼을, 매월 5만 엔씩 계속 지급하고 있었단다."
"음, 알고 있어요."
라고 형이 대답한다.
여주인과 주인은 몸도 꼼짝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지불 약속은 내년 3월까지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오늘 전부 지불을 끝낼 수 있었단다."
"넷! 정말이에요? 엄마!"
"그래, 정말이지. 형아는 신문 배달을 열심히 해 주었고, 쥰이 장보기와 저녁 준비를 매일 해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던 거란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을 한 덕택에 회사로부터 특별 수당을 받았단다. 그것으로 지불을 모두 끝마칠 수 있었던 거야."
"엄마! 형!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 준비는 내가 할 거예요."
"나도 신문 배달, 계속할래요. 쥰이하고 나, 엄마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요. 11월 첫째 일요일, 학교로부터 쥰이의 수업 참관을 하라는 편지가 왔었어요. 그때 쥰은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놓고 있었지만요.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도 뽑혀, 전국 콩쿠르에 출품하게 되어서 수업 참관일에 이 작문을 쥰이 낭독하게 되었대요.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엄마에게 보여드리면 우리를 위해서라도 회사를 쉬실 걸 알기 때문에 쥰이 그걸 감췄어요. 그걸 쥰의 친구들한테 듣고 내가 참관일에 갔었어요."
"그래? 그랬었구나. 그래서?"
"선생님께서, 너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라는 제목으로, 전원에게 작문을 쓰게 하셨는데, 쥰은 <우동 한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냈대요. 지금부터 그 작문을 읽어드릴게요. <우동 한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사실은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죠. 작문은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많은 빚을 남겼다는 것,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 내가 조간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있다는 것 등 전부 씌어 있었어요. 그러고서 12월 31일 밤 셋이서 먹은 한 그릇의 우동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것 셋이서 다만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동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신 일. 그 목소리는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요. 그래서 쥰은, 어른이 되면, 손님에게 '힘내라!' '행복해라!'라는 속마음을 감추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었어요."
카운터 안쪽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주인과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카운터 깊숙이에 웅크린 두 사람은,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길 듯이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작문 읽기를 끝마쳤을 때 선생님이, 쥰의 형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와주었으니까, 여기에서 인사를 해 달라고 해서…."
"그래서 형아는 어떻게 했지?"
"갑자기 요청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지만... 여러분, 항상 쥰과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맙습니다.. 동생은 매일 저녁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동생이 <우동 한그릇>이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엔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펴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는 사이에,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때 한 그릇의 우동을 시켜주신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가 힘을 합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쥰과 사이좋게 지내 주세요, 라고 말했어요."
차분하게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웃다가 넘어질 듯이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작년까지와는 아주 달라진 즐거운 그믐날 밤의 광경이었다. 우동을 다 먹고 300엔을 내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깊이깊이 머리를 숙이며 나가는 세 사람을, 주인과 여주인은 일년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전송했다.
다시 일년이 지났다.
북해정에서는, 밤 9시가 지나서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을 2번 테이블 이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 세 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2번 테이블을 비우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북해정은 장사가 번성하여, 가게 내부 수리를 하게 되자, 테이블이랑 의자도 새로 바꾸었지만 그 2번 테이블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새 테이블이 나란히 있는 가운데서, 단 하나 낡은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이 여기에?'하고 의아스러워 하는 손님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우동 한그릇>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 테이블을 보고서 자신들의 자극제로 하고 있다, 어느 날인가 그 세 사람의 손님이 와줄지도 모른다.
그때 이 테이블로 맞이하고 싶다, 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 이야기는, '행복의 테이블'로써, 이 손님에게서 저 손님에게로 전해졌다. 일부러 멀리에서 찾아와 우동을 먹고 가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테이블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문을 하는 젊은 커플도 있어 상당한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또, 수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섣달그믐의 일이다. 북해정에는, 같은 거리의 상점회 회원이며 가족처럼 사귀고 있는 이웃들이 각자의 가게를 닫고 모여들고 있었다.
북해정에서 섣달그믐의 풍습인 해넘기기 우동을 먹은 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동료들과 그 가족이 모여 가까운 신사에 그해의 첫 참배를 가는 것이 5,6년 전부터의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도 9시 반이 지나 생선가게 부부가 생선회를 가득 담은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들어온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평상시의 동료 30여명이랑 술이랑 안주를 손에 들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가게 안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2번 테이블의 유래를 그들도 알고 있다. 입으로 말은 안 해도 아마, 금년에도 빈 채로 신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은 비워둔 채 비좁은 자리에 전원이 조금씩 몸을 좁혀 앉아 늦게 오는 동료를 맞이했다.
우동을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서로 가져 온 요리에 손을 뻗히는 사람, 카운터 안에 들어가 돕고 있는 사람, 멋대로 냉장고를 열고 뭔가 꺼내고 있는 사람 등등으로 떠들썩했다.
바겐세일 이야기, 해수욕장에서의 에피소드, 손자가 태어난 이야기 등, 번잡함이 절정에 달한 10시 반이 지났을 때, 입구의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몇 사람인가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오버코트를 손에 든 정장 슈트 차림의 두 청년이 들어왔다. 다시 얘기가 이어지고 시끄러워졌다. 여주인이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로 '공교롭게 만원이어서'라며 거절하려고 했을 때 화복(일본옷) 차림의 부인이 깊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서, 두 청년 사이에 섰다.
가게 안에 있는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인다.
화복을 입은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그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변했다. 십 수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어 젖히고, 그 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과 겹쳐진다. 카운터 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주인과, 방금 들어온 세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저…, 저…, 여보!"
하고 당황해 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일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외가가 있는 시가현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금년,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교오또의 대학병원에서 소아과의 병아리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4월부터 삿뽀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인사도 하고 아버님 묘에도 들를 겸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오또의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에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뽀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과 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흘렀다.
입구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진을 치고 있던 야채 가게 주인이, 우동을 입에 머금은 채 있다가 그대로 꿀꺽하고 삼키며 일어나,
"여봐요 여주인 아줌마! 뭐하고 있어요! 십년간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이잖아요, 어서 안내해요. 안내를!"
야채 가게 주인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
"잘 오셨어요... 자 어서요... 여보! 2번 테이블 우동 3인분!"
무뚝뚝한 얼굴을 눈물로 적신 주인,
"네엣! 우동 3인분!"
예기치 않은 환성과 박수가 터지는 가게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눈발도 그치고, 갓 내긴 눈에 반사되어 창문의 빛에 비친 <북해정>이라고 쓰인 옥호막이 한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쯤은 높은 하늘을 쳐다보자. 별이 총총히 깔린 흰 구름이 시름없이 떠도는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서 자꾸만 멀어진다는 것은 병들어 간다는 증거다.
본래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요 자연의 딸이다. 자연은 우리를 낳은 위대한 어머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 위에서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발바닥이 흙을 밟지 않을 때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병이 생긴다.
우리는 오늘날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서, 산업화 도시화라는 명목 하에서 우리의 따뜻한 품이요, 어머니인 자연에서 자꾸 멀어져 가고 있다. 조용한 산길을 걷고, 맑은 풀냄새의 향기를 맡고, 깨끗한 시냇물에 발을 적시고, 푸른 잔디밭에서 쉴 줄을 모른다.
인간이 자연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고향을 떠나는 것이다. 마음의 고향, 몸의 고향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고, 온 누리에 밝은 빛과 따뜻한 열을 주는 태양 앞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뜰 한구석에 심은 화초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어야 한다. 맨발로 흙을 밟아 보아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문명으로 병들고 산업화로 메말라진 우리의 마음에 비로소 청신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달을 쳐다보고 별을 바라보고 밤하늘을 우러러 볼 때 우리는 생명의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흙의 아들이요, 자연의 딸인 인간이 흙과 자연을 망각할 때 심신의 병이 생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쯤은 높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2. 남을 위해 착한 일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쯤은 남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자. 일일일선(一日一善)을 우리의 생활신조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바쁜 생활을 한다. 자기중심으로 행동하고 나의 일에 골몰하면서 살아간다. 내 몸, 내 집, 내 자식, 내 행복, 내 남편, 늘 "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중심으로 뱅뱅 돌아가는 생활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용감하게 이 테두리를 벗어나서 남을 위하여 순수하게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남에게서 받을 생각을 말고 줄 생각을 하자. 주되 받기를 바라지 말고,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주자. 그것이 진정한 봉사이다. 받기를 바라면서 주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주고받는 계산을 초월하여 오로지 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저 주는 것이 봉사다. 하루에 한 번쯤은 남을 위해서 순수한 봉사의 실천을 해야 한다.
남에게 따뜻한 말을 던지고, 맑은 웃음을 선사하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자. 나의 시간을 제공하고, 노력을 제공하고, 땀을 제공하자. 그러면 상대방은 반드시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一日一善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즐겁고, 우리의 사회는 얼마나 명랑해질 것인가.
오늘은 남을 위해서 한 가지의 착한 일을 하였다는 기쁨을 안고 잠자리에 들 때, 우리는 축복과 감사 속에 편안히 쉴 수 있다. 그 착한 일이 반드시 큰 일이 아니라도 좋다. 남을 위해서 매일 한 번 쯤은 착한 일을 해보겠다는 그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이 소중한 마음 자세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3. 행복을 약속하는 땀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땀을 흘리자. 온 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일에 열중해야 한다.
땀은 인간이 흘리는 고귀한 액체다. 우리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지고 우리의 온 몸에서 땀 냄새가 풍길 때 우리는 생명의 건강을 되찾고 일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땀처럼 고맙고 믿음직스럽고 거짓이 없는 것이 없다. 땀에는 거짓이 없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방을 치우고, 마당을 쓸고, 빨래를 하고 나면 우리의 몸에서 땀이 흐른다. 땀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서 허영의 꿈이 사라지고, 사치의 때가 없어지고, 안일의 하품이 자취를 감춘다.
땀을 한 방울 흘리고 나면 몸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상쾌해 진다. 삶의 보람이 느껴지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위대한 것, 모든 알찬 것,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값있는 것은 모두 땀의 産物이요, 땀의 結晶이요, 땀의 열매다.
인생이 따분하다고 느껴질 때는 한 바탕 땀을 흘리며 일에 몰두해 보라. 삶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전신이 땀투성이가 되도록 일해 보라.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인간이 땀을 흘리지 않는 데서 모든 병이 생긴다. 땀을 흘리기 좋아하는 사람을 보라. 몸과 마음에 병이 없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온 몸에 땀투성이가 되어 일에 골몰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에 행복과 건강을 약속한다.
4. 양서로 마음의 밭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책을 읽자. 책을 읽되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 나를 살찌게 하는 책, 나의 인격을 풍성하게 하는 책, 나의 정신을 정화시키는 책, 나의 사명이 무엇이고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하는 책, 내 마음의 눈을 활짝 뜨게 하는 책, 우리는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그릇된 독서는 인간의 정신에 해독을 끼친다. 음탕한 소설, 불륜과 선정(煽情)으로 가득 찬 저속한 문학은 인간의 마음을 더럽히고 흐리게 만들 뿐이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적 창조력이 고갈된다. 풀 한 포기 없고 샘물 한 줄기 흐르지 않는 벌판처럼 우리의 마음이 거칠고 황량해지기 쉽다.
책상머리에 애독하는 책을 몇 권 놓고 수시로 들춰보는 습관을 가지자. 위대한 책 속에는 정신의 보석이 빛난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 지혜로운 교훈이 있고 감격의 원천이 있다. 우리에게 겸허한 성찰을 촉구하는 깊은 말씀이 있다. 넓은 정신적 우주의 파노라마가 있다.
우리의 머릿속에 곰팡이가 피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책을 읽자. 우리의 생활 속에 녹이 끼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 내 인생의 깊이와 보람과 무게를 주기 위해서 하루에 한 번쯤은 진지한 독서를 하자.
5. 나라와 겨레를 위한 생각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우리의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자. 내가 태어난 이 조국과 이 조국의 품에서 같이 살아가는 많은 동포를 가슴속에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조상이 물려준 땅과 말과 문화와 역사 속에서 동고동락하고 공존공영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한국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한국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요, 한국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다.
민족이 망할 때 나만 혼자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없다. 우리는 좋건 싫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한국의 품에서 한국의 땅에서 한국인으로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이 운명을 축복과 영광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힘써야 한다. 아름다운 강토, 살만한 나라, 보람 있는 사회를 만들어서 우리의 아들딸에게 빛나는 유산으로 물려주자. 그것이 우리의 민족적 의무요, 책임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나밖에 없는 인생이 아니다. 네가 있고, 그가 있고, 우리가 살고, 민족과 동포와 조국이 있는 인생이요, 세상이다. 남이 다 못 사는데 나만 잘 산다고 정말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너도 잘 살고 그도 잘 살고, 우리가 다 같이 잘 살 때, 나도 그 속에서 참말로 잘 살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깊이 조국과 겨레의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 나라의 앞길에 빛이 솟고, 나라의 힘이 강해져서 힘 있고 늠름한 민족이 될 것이다. 나와 나라를 직결시키는 애국의 시간을 하루에 한 번쯤은 가져보자.
6. 자기반성과 자기 검토를
끝으로 하루에 한 번쯤은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부처님 앞에 서고, 천지신명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진지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준엄한 자기 검토의 시간을 갖다.
인생은 善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빛을 찾아서 끊임없이 전진하려는 향상의 과정이다. 자기완성을 위한 꾸준한 수양과 공부의 생활이다. 우리 인생에 그런 높은 목표가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10분 동안이라도 좋다.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를 스스로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인생을 바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나의 해야 할 구실을 제대로 다하고 있는가. 나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나는 나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좋다. 적어도 10분간이라도 진지한 반성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자. 우리는 저마다 인생에서 한 가지 이상의 간절한 높은 소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나와 하나님이 마주서는 시간, 내가 부처님 앞에 꿇어앉는 시간, 내가 천지신명 앞에 서는 시간,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종교요, 기도요, 수양이요, 참선이요, 자기심화(自己深化)요, 자기향상이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을 매일 가져야 한다. 그러한 시간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생활을 하는 것이요, 인생을 수박 겉핥기로 살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거짓 없는 반성, 진지한 자기검토의 시간을 가져보자.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컨디션을 가라앉히느라 책상에 앉아 뭘 좀 하다가 시계를 보니 10시가 지나있었다. 시간에 놀란 나는 뭔가에 퉁기듯 반사적으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마 출출하다는 생각이 나를 주방으로 들게 했으리라. 그때야 생각이 났다. 식구들이 없다고 저녁밥을 할 생각도 먹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는 걸. 시골에서 보낸 김장김치도 알맞게 익었겠다 쌀통에서 두어 공기쯤 되는 분량의 햅쌀에 현미찹쌀과 흑미까지 한 줌 섞어서 전기밥솥에 플러그를 꽂는다. 약 20분쯤 기다리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으리라. 그러고는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식구들은 밖에서 적당히 배를 채웠으리라. 고기도, 해산물도, 야채도 먹었으리라. 술도 한 잔 곁들였으리라.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위해, 오직 내 자신만을 위해 정성스럽게 쌀을 씻고 반찬을 뚝딱거린 때가 언제였던가, 아니 그런 때가 있긴 있었던가. 언제나 찬밥으로 때우거나 밥이 없으면 면 같은 것으로 대체하지 않았던가. 여행 중에는 더러 밥을 해 먹기도 하지만 언제나 간단한 메뉴에 반찬도 대충이었다. 나는 책상의 스탠드를 끄고, 읽던 책장도 단단히 덮어버리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만을 위한 성찬을 준비하는 시간은 고작 20분, 정식으로 식단의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항상 가득한 냉장고 속 밑반찬 말고 뭐 신선한 것이 없을까.
나는 앞치마를 두른 뒤 뚝배기를 불에 올리고 마른 멸치 된장 등을 찾아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 이 메뉴의 특이사항은 오직 한 가지 ‘대충’이란 건 없다. 가능한 한 정성스럽게, 재료는 성실하게, 불 조절까지도 마음을 써 찌개가 완성될 즈음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가 왔다. 우리 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우아하고 예쁜 도자기 접시에다 알맞게 익은 푸른 배추김치를 꺼내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뚝배기를 김치 곁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식탁 위에는 이미 물과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됐다. 이제 법만 담으면 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어른 계실 땐 어른 밥부터 담고, 그 다음엔 남편, 그리고 차례대로 식구들의 밥을 담은 후 내 밥은 언제나 맨 마지막이었다. 조카들이 자라 줄줄이 아이를 데리고 와 몇 십 명이 한자리에 둘러앉아도 내 차례를 언제나 꼴찌를 면치 못했다. 그러노라니 밥솥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누룽지나 구석에 붙어있던 밥알을 긁어모아 그릇 가장자리에 쓰윽 하니 주걱을 훑고 나면 언제나 모양은 떡밥이기 일쑤였다. 어렸을 적 내가 꿈꾸던 부자는 재산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쌀밥을 얼마나 맘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조금 커서 부자의 상징은 신기하게도 집안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콸콸꽐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밥의 서열을 따지자면 결혼 전에는 딸이기 때문에 감히 내 밥부터 먼저 담을 수 없었고, 결혼 후에는 며느리고 아내고 엄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이런 땐 조금은 서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밥 서열은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스스로 그 틀 속에 가두어버린 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위해 이 늦은 밤에 정성을 다해 반찬을 준비하고 밥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는가.
나는 밥이 몇 그릇이 되던 내 밥부터 우선 펐다. 시집 와 처음으로 잘 보이고 싶은 시어른들의 담을 때처럼, 방금 햅쌀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쪽으로 골라서 말이다. 반찬이라야 김치와 된장찌개가 전부지만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혼자만의 식사가 주는 고독감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반찬보다 중요한 가족들의 대화 같은 것도 잠시 잊고 싶었다. 다만 한밤에 준비한 나만을 위한 성찬을 되도록 천천히 우아하게 마칠 참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적막감은 밥상을 마련한 시간이 식사시간을 한참이나 비낀 늦은 밤이라는 것 때문만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주방을 정리하고 차 한 잔 준비해 책상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지나있었다. 배는 불렀지만 허전함이 밀려오는 건 오랜 시간의 습 때문만은 아니리라. 이제 서서히 나를 위해 이 같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들이여, 혼자 집 지키는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만 밥상을 차린 날이니까. 밤이 늦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식구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며칠 계속되는 트럼펫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견디다 못해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벨을 눌렀다.
“트럼펫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거든요. 아무래도 연습은 연습실에서 해야 할 것 같아요. 이곳 아파트에선 아니에요.”
정중한 항의 때문인지 한동안 트럼펫 소리는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다 가끔 어디선가 트럼펫소리가 들려 내다보면, 심증대로 아파트 마당 구석진 곳에서 들판을 향해 트럼펫을 부는 아래층 남자가 거기 있었다. 웬만했으면 참았을 텐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마치 내가 그를 밖으로 내쫓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트럼펫소리를 들을 때마다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었다.
한때 남편은 클래식 음악에 기타연주에 플루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취미생활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어렸지만 막내 고모와 큰 딸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어서 집안 분위기는 다분히 음악적이었다. 우리는 목련과 대추나무 마당이 있는 3층짜리 주택에 살았는데, 그때 악기소리나 음악소리가 아무리 시끄럽더라고 그 소리를 문제 삼는 이웃은 없었다. 심지어는 지하실과 옥상에 간이 골프장을 만들어 놓고 밤늦도록 공을 쳐도 어느 누구도 불편을 호소하는 이는 없었다. 아파트나 빌라처럼 공동주택의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개인 취향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는 것에 추호의 의구심도 없었다.
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긴 후 소소하게 불편을 겪는 일은 어느덧 훈련이 되어 수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요즘 들어 조금 문제가 생겼다. 얼마 전 남편은 우연한 동기로 인디오들의 전통악기인 팬플루트를 불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적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연습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서재 하나를 전부 방음처리 한다거나, 뒷베란다 일부를 막아 연습실을 꾸밀까 하는 머리를 짜보지만 시원한 답이 없다. 그렇다고 남편의 성격상 쉽사리 ‘안 되겠다’하며 물러설 사람도 아니니 그야말로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아래층 남자의 트럼펫소리를 내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남편의 팬플루트 소리에 이토록 마음을 졸일까.
어제는 억수로 퍼붓는 비를 뚫고 악기를 가지고 나간 남편이 몇 시간 후에야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왔다. 집 근처 인적 없는 논가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팬플루트를 연습하다가 왔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연주가 사람을 피해 비 쏟아지는 논둑으로 그를 내몰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안타까운 마음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측은지심마저 들었다.
집(home)이 뭔가? 쉬고 싶을 때 쉬고, 하고 시을 때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 집이라는 공간이 개인 소유이긴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는 건 당연하나 한편으론 서글픈 일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주택에 살면서 맘껏 누려운 그 자유가 진짜 행복인 것도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의 안식을 방해할 권리까지 없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바깥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선 수궁이 가나 집안에서까지 그런 제재를 받는다는 건 아무래도 유감이다.
아파트 생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매우 편리한 주거형태이긴 하나 지극히 개인주의를 부추기게 하는 모순됨, 어찌 보면 교류에 있어서만은 비인간적이기 그지없는 단절의 표본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 가겠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지 못할 것 같다. 지금으로선 남편이 맘 놓고 팬플루트를 불 수 없다는 것 외엔 아쉬운 것이 없으니까.
어느 날, 곰이 옹달샘을 발견했어요. 돌 틈에서 맑은 물이 퐁퐁퐁 솟아나고 있었지요. "어, 물맛 좋다!" 곰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 옹달샘에 '이 물은 내 꺼다.' 라고 표시해 두었어요. 그런데 곰이 숲속에 다녀와 보니, 토끼가 물을 마시고 있지 뭐예요. "이 놈! 꺼지지 못해!" 곰은 얼른 그 토끼를 쫓아 버렸어요. 그런데 다음에는 또 노루가 물을 마시고 있었어요. 노루도 얼른 쫓아 버렸어요. '이젠 내가 계속 지키고 있을 거야.' 곰은 옹달샘 옆에 앉아 단단히 지켰어요. 밥도 그곳에서 먹었고 잠도 그곳에서 잤어요. 다른 동물들을 절대 못 오게 했어요. 그런데 그 맑았던 옹달샘에 먼지가 내렸어요, 그리고 가랑잎이 떨어지지 뭐예요. '왜 이렇게 더러운 물로 변하는 걸까?' 곰 자신도 그런 물은 마실 수 없었어요. 곰은 크게 실망을 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났어요. 그러자 토끼가 물을 마시고 갔어요. 노루도 여우도 사슴도 물을 마시고 갔어요. 또 하늘의 새들도 내려와 물을 마시고 가지 뭐예요. 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옹달샘으로 가 보았어요. '어, 참 맑은 물이 고여있네!' 곰은 목이 말라 옹달샘 물을 한 모금 마셨어요. 그러자 그 만큼의 맑음 물이 퐁퐁퐁 솟아나지 뭐예요. 또 마시고 또 마셔도 자꾸 솟아났어요. "아하, 옹달샘이란 아무나 와서 자꾸 마셔야 하는 거구나!" 곰은 참 늦게서야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