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유감
김인자
며칠 계속되는 트럼펫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견디다 못해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벨을 눌렀다.
“트럼펫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거든요. 아무래도 연습은 연습실에서 해야 할 것 같아요. 이곳 아파트에선 아니에요.”
정중한 항의 때문인지 한동안 트럼펫 소리는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다 가끔 어디선가 트럼펫소리가 들려 내다보면, 심증대로 아파트 마당 구석진 곳에서 들판을 향해 트럼펫을 부는 아래층 남자가 거기 있었다. 웬만했으면 참았을 텐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마치 내가 그를 밖으로 내쫓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트럼펫소리를 들을 때마다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었다.
한때 남편은 클래식 음악에 기타연주에 플루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취미생활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어렸지만 막내 고모와 큰 딸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어서 집안 분위기는 다분히 음악적이었다. 우리는 목련과 대추나무 마당이 있는 3층짜리 주택에 살았는데, 그때 악기소리나 음악소리가 아무리 시끄럽더라고 그 소리를 문제 삼는 이웃은 없었다. 심지어는 지하실과 옥상에 간이 골프장을 만들어 놓고 밤늦도록 공을 쳐도 어느 누구도 불편을 호소하는 이는 없었다. 아파트나 빌라처럼 공동주택의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개인 취향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는 것에 추호의 의구심도 없었다.
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긴 후 소소하게 불편을 겪는 일은 어느덧 훈련이 되어 수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요즘 들어 조금 문제가 생겼다. 얼마 전 남편은 우연한 동기로 인디오들의 전통악기인 팬플루트를 불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적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연습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서재 하나를 전부 방음처리 한다거나, 뒷베란다 일부를 막아 연습실을 꾸밀까 하는 머리를 짜보지만 시원한 답이 없다. 그렇다고 남편의 성격상 쉽사리 ‘안 되겠다’하며 물러설 사람도 아니니 그야말로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아래층 남자의 트럼펫소리를 내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남편의 팬플루트 소리에 이토록 마음을 졸일까.
어제는 억수로 퍼붓는 비를 뚫고 악기를 가지고 나간 남편이 몇 시간 후에야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왔다. 집 근처 인적 없는 논가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팬플루트를 연습하다가 왔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연주가 사람을 피해 비 쏟아지는 논둑으로 그를 내몰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안타까운 마음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측은지심마저 들었다.
집(home)이 뭔가? 쉬고 싶을 때 쉬고, 하고 시을 때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 집이라는 공간이 개인 소유이긴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는 건 당연하나 한편으론 서글픈 일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주택에 살면서 맘껏 누려운 그 자유가 진짜 행복인 것도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의 안식을 방해할 권리까지 없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바깥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선 수궁이 가나 집안에서까지 그런 제재를 받는다는 건 아무래도 유감이다.
아파트 생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매우 편리한 주거형태이긴 하나 지극히 개인주의를 부추기게 하는 모순됨, 어찌 보면 교류에 있어서만은 비인간적이기 그지없는 단절의 표본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 가겠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지 못할 것 같다. 지금으로선 남편이 맘 놓고 팬플루트를 불 수 없다는 것 외엔 아쉬운 것이 없으니까.
2008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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