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을 위한 밥상    
 
김인자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컨디션을 가라앉히느라 책상에 앉아 뭘 좀 하다가 시계를 보니 10시가 지나있었다. 시간에 놀란 나는 뭔가에 퉁기듯 반사적으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마 출출하다는 생각이 나를 주방으로 들게 했으리라. 그때야 생각이 났다. 식구들이 없다고 저녁밥을 할 생각도 먹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는 걸. 시골에서 보낸 김장김치도 알맞게 익었겠다 쌀통에서 두어 공기쯤 되는 분량의 햅쌀에 현미찹쌀과 흑미까지 한 줌 섞어서 전기밥솥에 플러그를 꽂는다. 약 20분쯤 기다리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으리라. 그러고는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식구들은 밖에서 적당히 배를 채웠으리라. 고기도, 해산물도, 야채도 먹었으리라. 술도 한 잔 곁들였으리라.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위해, 오직 내 자신만을 위해 정성스럽게 쌀을 씻고 반찬을 뚝딱거린 때가 언제였던가, 아니 그런 때가 있긴 있었던가. 언제나 찬밥으로 때우거나 밥이 없으면 면 같은 것으로 대체하지 않았던가. 여행 중에는 더러 밥을 해 먹기도 하지만 언제나 간단한 메뉴에 반찬도 대충이었다. 나는 책상의 스탠드를 끄고, 읽던 책장도 단단히 덮어버리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만을 위한 성찬을 준비하는 시간은 고작 20분, 정식으로 식단의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항상 가득한 냉장고 속 밑반찬 말고 뭐 신선한 것이 없을까.

 

나는 앞치마를 두른 뒤 뚝배기를 불에 올리고 마른 멸치 된장 등을 찾아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 이 메뉴의 특이사항은 오직 한 가지 ‘대충’이란 건 없다. 가능한 한 정성스럽게, 재료는 성실하게, 불 조절까지도 마음을 써 찌개가 완성될 즈음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가 왔다. 우리 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우아하고 예쁜 도자기 접시에다 알맞게 익은 푸른 배추김치를 꺼내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뚝배기를 김치 곁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식탁 위에는 이미 물과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됐다. 이제 법만 담으면 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어른 계실 땐 어른 밥부터 담고, 그 다음엔 남편, 그리고 차례대로 식구들의 밥을 담은 후 내 밥은 언제나 맨 마지막이었다. 조카들이 자라 줄줄이 아이를 데리고 와 몇 십 명이 한자리에 둘러앉아도 내 차례를 언제나 꼴찌를 면치 못했다. 그러노라니 밥솥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누룽지나 구석에 붙어있던 밥알을 긁어모아 그릇 가장자리에 쓰윽 하니 주걱을 훑고 나면 언제나 모양은 떡밥이기 일쑤였다. 어렸을 적 내가 꿈꾸던 부자는 재산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쌀밥을 얼마나 맘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조금 커서 부자의 상징은 신기하게도 집안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콸콸꽐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밥의 서열을 따지자면 결혼 전에는 딸이기 때문에 감히 내 밥부터 먼저 담을 수 없었고, 결혼 후에는 며느리고 아내고 엄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이런 땐 조금은 서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밥 서열은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스스로 그 틀 속에 가두어버린 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위해 이 늦은 밤에 정성을 다해 반찬을 준비하고 밥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는가.

 

나는 밥이 몇 그릇이 되던 내 밥부터 우선 펐다. 시집 와 처음으로 잘 보이고 싶은 시어른들의 담을 때처럼, 방금 햅쌀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쪽으로 골라서 말이다. 반찬이라야 김치와 된장찌개가 전부지만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혼자만의 식사가 주는 고독감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반찬보다 중요한 가족들의 대화 같은 것도 잠시 잊고 싶었다. 다만 한밤에 준비한 나만을 위한 성찬을 되도록 천천히 우아하게 마칠 참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적막감은 밥상을 마련한 시간이 식사시간을 한참이나 비낀 늦은 밤이라는 것 때문만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주방을 정리하고 차 한 잔 준비해 책상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지나있었다. 배는 불렀지만  허전함이 밀려오는 건 오랜 시간의 습 때문만은 아니리라. 이제 서서히 나를 위해 이 같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들이여, 혼자 집 지키는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만 밥상을 차린 날이니까. 밤이 늦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식구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2007년 12월 16일.
 

 

출처 : 박샘의 "배꾸마당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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