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김문억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가 할퀸 자국과 마지막 나를 끌어안았던 따뜻함이 아직 내 가슴속에 남아 있지만 그는 편안한 쉼터로 갔다. 그리고 나도 할퀸 자국의 쓰라림과 그의 포옹의 애틋함을 점점 잊어가고 있다.
간호대학에서 병원 쪽으로 가다 보면 ‘사랑의 쉼터’라는 등나무가 지붕을 이룬 휴식처가 있다. 초여름에는 젊었을 적 어머니의 젖 모양을 닮은 아름다운 자주색 꽃송이들이 천장에서 거꾸로 내려오기도 한다. 등나무 밑둥치들은 서로 다른 두 서너 개의 가지로 분지되었다가 다시 비비 꼬며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줄기를 만들고 있다. 서로 엉킨 자리에는 홈이 파져서 서로의 몸에 상처를 만들고 있다. 그렇게 서로를 끼어 넣고 감아 돌아간 등나무는 나무처럼 뻣뻣하게 되어 높은 쉼터 지붕 위로 올라간다. 그 모습은 나와 한동안 갈등하다가 마지막 화해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던 한 환자를 떠오르게도 한다.
그는 제지하는 간호사를 젖히고 막무가내로 내 진찰실로 들어섰다. 눌러쓴 모자, 종이 반창고로 들어 올린 왼쪽 눈까풀, 그 밑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꽉 다문 입, 딱 버러진 어깨, 중심이 잡힌 듯한 땅땅한 키, 그러나 파리한 피부·····.
“교수님, 불편해 죽겠어요. 하루라도 눈을 똑 바로 뜨고 살아야지, 반창고로 눈까풀을 들어 올리고 살자니 미치겠어요. 반창고 붙인 자리도 따가워 죽겠고요. 어떻게든 고쳐주세요.”
그는 위압적으로 수액 병을 매달은 받힘 대를 한 번 흔들었다. 그리고는 쓰고 있는 모자 창을 약간 들어 올리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반창고로 들어올려진 왼쪽 눈까풀을 가리켰다.
안과에 입원해 있던 그를 본 것은 약 1년 전이었다. 안과의 협진을 요청받고 그의 병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비교적 공손하게 문진에 협조를 해 주었다. 비록 전공의가 ‘그 환자는 골치 아픈 환자이므로 전과(轉科)를 받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사전에 이야기했지만, 그리고 간호사들도 ‘그 환자는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환자예요.’ 라면서 그를 두려워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약 1년 반 전에 이비인후과에서 상악동(上顎洞)에 생긴 혹에 대하여 조직검사를 받으셨네요. 그리고 방사선 치료도 받으셨고요.”
나는 암이라는 말 대신 혹이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제 찍은 안구 CT 사진을 보니 왼쪽 눈알 뒤쪽 상방에 혹이 또 있습니다. 아마 상악동 혹이 전이(轉移)된 것 같은데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혹이 전이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무척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스무 살 근처의 딸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제 맘을 잡고 딸하고 잘 살려고 했는데······. 할 수 없죠. 선생님, 제발 수술을 잘 해서 저를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
수술하는 방법 및 합병증, 수술 후 항암제 투여의 필요성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처진 눈까풀은 수술을 받은 후 약 6개월 이상은 기다려야 호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술하던 날, 가능한 암을 완벽하게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렇게 수술해 주어도 재발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수술 후에도 그는 한 번씩 병실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전공의들한테 협박도 했고 간호사들한테도 한번씩 윽박지르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원인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병에 대한 분노, 불치병이 자신한테 생겼다는 불행한 운명에 대한 자포자기적 발광을 가끔 하곤 했다. 그리고는 무섭다고 했다. 한번씩 죽음이 두려워 미칠 지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술상처가 나은 후 항암제 투여를 받게 하기 위하여 그를 종양내과로 전과(轉科)시켰다. 그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호스피스 병실로 옮겨갔다. 그 후에도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를 가끔 만나곤 했다. 나를 볼 때면 ‘언제 눈까풀이 올라가느냐?’고 묻곤 했다. 한번씩 외래로 찾아와 신세타령을 하기도 했다.
“교수님, 제가 열여덟 살 근처부터 조폭 생활을 했어요. 부모님 속도 무척 썩혀드렸고 큰 집도 몇 번 들락날락 거렸어요. 그 바람에 아내도 도망가 버리고·····. 이제 맘 잡고 택시를 운전하며 딸하고 잘 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렸으니·······.”
처진 눈까풀은 아주 느린 속도로 호전되고 있었고, 나와 그와의 관계도 한 동안 그저 그런 상태로 지속되고 있었다. 그는 항암제를 투여받기 위하여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퇴원했다가는 다시 입원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빠진 머리카락으로 민둥해진 머리를 감추기 위하여 그는 항상 모자를 썼다. 푹 눌러 쓴 모자 차양 밑으로는 왼쪽 눈까풀이 아직 종이 반창고로 들어 올려져 있었다.
그의 딸이 결혼한다고 양가 부모가 상견례 하던 날, 그는 역시 모자를 쓰고 처진 눈까풀을 종이 반창고로 들어 올리고 상견례 장에 갔다고 했다. 양가 부모와 딸과 사위가 될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인사한 던 때, 그는 민둥한 머리를 보이기 싫어 모자를 벗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눈가풀이라도 종이 반창고로 들어 올리지 않았더라면, 가발을 쓰고 폼이 나는 모습으로 참석할 수도 있지 않았나하고 수없이 생각되더란다. 그때, 문득 내가 그렇게 미워지더라고 했다. 수술하면 금방 처졌던 눈까풀이 들어 올려질 줄 알았는데····. 비록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호전 될 것이라고 말을 들은 것이 기억되었어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나와 자신한테 생기더란다. 그래서 그는 지금 나를 찾아 왔다고 했다.
나는 진찰실 창문을 통해 ‘사랑의 쉼터’ 등나무를 바라보았다. 그와 나는 지금 의사와 환자라는 인연으로 묶여 치유라는 꽃을 피우기 위하여 서로 몸을 부대기며 피부가 긁히는 상처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서로 무척 쓰라리고 아린 아픔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등나무가 서로 엉켜 붙어 상처를 만들면서 자라 올라가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우리들도 지금 아픔을 느끼면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한동안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싸움, 그가 눈길을 내렸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외래 진찰실을 나갔다.
그 일이 있은 후 약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다시 내 외래 진찰실로 찾아왔다. 종이 반창고 없이도 눈까풀은 거의 정상으로 올라가 있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한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지난 날 내 앞에서 보인 행동을 반성한다. 몹쓸 병이 자기한테 생겨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운명에 맡기겠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교수님을, 생을 마칠 때가지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겠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화해를 했다. 내가 그를 치료하면서 무척 가슴 아파했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을 해 주었고, 나도 그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어린아이같이 투정을 부렸었다고 이해를 했다. 삶이란 결국 서로 부대기고, 상처를 만들고, 치유하고, 그리고 그런 아픔 후에 꽃을 피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진 눈까풀이 올라간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결국 영원한 쉼터로 떠나갔다. 갓 결혼한 딸과 사위가 그의 빈소를 지켰다.
출처 : http://cafe.daum.net/chojung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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