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하영론)

     

                                                       유  재  천(경상대학교 교수)

     

     

     

    1. 실상사 처마 밑의 물고기

    절간 처마 밑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물고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푸른색 소리로 쏟아내고 있다. 사찰에서 물고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들어 목어는 물고기가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정진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또는 물 속의 생물을 제도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보더라도 절간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치환은 깃발에서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아이러닉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했지만 물 속에 있어야 할 물고기를 절간 지붕 처마 밑에 처음 매달아 놓은 사람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영 시인이 노래하는 그리움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지상적 존재로서의 시인의 생에 대한 끝없는 슬픔과 연민이 깔려 있다.

    실상사 대웅전 처마 끝에는
    등푸른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그의 슬픔이 너무 맑고 고와
    자세히 살펴보니
    아가미가 움직인다
    지느러미도 움직인다
    이곳에는 강도 바다도 없는데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너의 바다는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내면서도
    시퍼런 가슴을 열고 내려다보는
    저 가을 하늘
    너는 저 높은 하늘로 날아가서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던져라
    갸날픈 네 등에 실한 날개 돋아나도록

    맑은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마주선 장승이 가을비에 젖는다
    천년 만년 젖던 그대로 젖는다
    나도 돌이 되어 함께 젖는다
    아, 내 작은 날개도 젖고 있구나.
              ―작은 날개가 젖는다

    「작은 날개가 젖는다」는 실상사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피안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물고기는 이 지상 세계에 던져진 비극적 존재로서 인간을 상징한다. 처마 밑에 매달린 청동 물고기는 물고기의 집인 바다에서 추방당한 존재이다. 추방당한 존재인 물고기는 끊임없이 바람에 일렁이며 추방당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소리내어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처마 밑의 물고기가 추구하는 바다가 실제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다. 물고기가 그리워하는 곳이 실제 바다가 아니라는 것은 이 물고기가 물고기가 아니라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의 객관적 상관물임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퍼렇게 녹이 슨 처마 밑 물고기의 청동 색은 등 푸른 물고기로, 등 푸른 물고기의 푸른 색 이미지는 시인에게 슬픔으로 인지된다. 물고기의 슬픔은 물고기가 바다가 아닌 대웅전 처마 밑에 있다는 것, 즉 바다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라는 데 있다. 바다로부터 추방되어 있지만 이 물고기의 내면 속에는 푸른 바다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고기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아가미를 움직여보고 지느러미를 흔들어보며 쉴 새없이 움직이면서 쨍그렁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바람은 이 유전자를 일깨우고 본성을 자각하게 하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2연은 물고기가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바다, 즉 하늘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처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물고기에게 으름장을 놓는 공포의 대상이다. 바다가 검은 구름이나 성난 파도 등과 같이 존재를 집어삼키는 공포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하늘이 공포의 대상으로 사용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비밀은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에서 해결된다. 가을 하늘,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가을 하늘은 온갖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퍼런 가슴을 열어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상적 존재인 인간이 그 투명한 청정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높푸른 가을 하늘은 물고기에게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물고기의 지상적 한계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돌아가는 것은 모든 욕망을 던짐으로써 가능하지만 지상적 존재로서 물고기로서는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공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신들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한 고고학자는 거대한 컴퓨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컴퓨터에 특정 날짜와 시간에 다시 합체되도록 명령을 주고 해체시키면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던 각 부품들은 해체되어 다시 합쳐지기 전까지는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처럼 작동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 다시 합체되면 서로 무관한 개체들로 보였던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드러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할 때 우주 속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영의 시에서 사물과 인간 내면 속에는 우주의 한 조각이 각인되어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 조각과 우주는 서로 부르고 찾는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듯 마음 속에 간직된 불성이 부처를 향하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다.

    굳게 닫힌 창을 열고,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고, 입술을 포개어 취하게 하더니, 슬그머니
    손목 잡아 끌고, 봄 들판에 나와

    나처럼 가벼이 날아 보아라
    나처럼 부드러이 살아 보아라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아지랭이

    시인은 「아지랭이」에서 사물과 인간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자락과 우주 사이의 교감, 감응을 노래하고 있다. 봄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눈에 잡힐 듯 말 듯,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겨울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사람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 뿐 아니다. 그것은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모든 사물들의 생명을 불러내고 꽃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사물과 화자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는 아지랑이가 머리를 쓰다듬고 볼 비비고 입술 포개 취하게 하고 슬그머니 손목 잡아끌어 당김으로써 봄 들판으로 불려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지랑이는 사물과 인간의 내면 속에 깊이 잠복된 유전자를 일깨울 뿐이다. 일깨워진 유전자는 지상적인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아지랑이는 「작은 날개가 젖는다」의 바람처럼 굳게 닫힌 화자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어 우주와 하나되게 하고 황홀경에 들게 하는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우주적 힘의 상징이다. 이런 만물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과 시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할미새는 시를 모른다
    시를 몰라도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영혼이 맑게 우는 것은 시다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노랑 할미새의 울음을 보던 날
    달맞이꽃을 생각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듯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나 파블로 네루다를 그리워한다

    달맞이꽃의 서원이
    달에 닿아 별에 닿아
    서로의 눈물을 나눠 마시며
    월견초나 월하향, 혹은 야래향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정겨웁게 서로를 부르듯
    채송화꽃이, 쬐끄만 씨앗으로 이 땅에 와서
    색색의 꽃잎으로 기쁨을 나눠주듯
    눈물은 내 삶을 든든한 뿌리로 자라게 한다
    절망을 먹고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면
    절망은 더 없는 자양이 된다

    절망의 절망에게 할미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도
    노랑 할미새나 알락할미새를 날려 보낸다
    그리움을 아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밤.
              ―할미새

    「할미새」에서 시인은 할미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라고 즉각적인 감정이입을 일으킨다. 즉각적인 감응이 가능한 것은 시인과 할미새의 내면에 우주의 한 자락이 각인되어 있어서 할미새의 울음과 지상적 존재로서 자신의 슬픔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할미새의 울음 소리를 듣고 할미새의 슬픔과 그리움을 이해한다. 시인이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한 것처럼 할미새의 울음은 할미새도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 즉 맑은 영혼의 울음이라고 한다면 할미새의 울음 역시 시인 셈이다.
    이러한 할미새와 시인의 시 사이의 등가적 결합은 다음 연에서 달맞이꽃의 서원으로 확대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시인이 미스트랄이나 네루다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근본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간절한 그리움들이 영혼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그 영혼의 울음이 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피안의 세계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것을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한 것도 그 때문이다.
     

    3. 주왕산 단풍

    하영 시인의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항상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그리움과 슬픔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리움이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된 것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슬픔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인간 존재의 내면에 간직된 거대한 슬픔과 비원에 마주친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는
    이쁜 손길에 머물기로 하네

    믿음과 믿음
    서원과 서원으로 탑을 쌓아
    저 먼 별에까지 닿고자 했던,
    천불 천탑으로 징검다리를 놓아
    미륵의 나라로 가고자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
    한 단 한단 소망을 쌓아올린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저 탑을 딛고 가면
    등 돌리고 돌아서는 마음 밭마다
    바라밀의 꽃씨를 뿌릴 수 있으리
    그리하여 마침내 불국토에 닿을 수 있으리

    나 오늘 이곳에 머물러
    돌에서 자고 돌에서 깨어나고 싶네
        ―운주사에서; 원은희 시인에게

    운주사는 화순에 있는 천불 천탑, 와불로 잘 알려져 있는 절이다. 천불 천탑이란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불탑을 가리키는 말로,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하룻밤 사이에 배의 돗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91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이 남아 있지만 야트막한 구릉과 벼랑,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게 되는 서민들의 얼굴을 닮은 미륵불들은 당시 서민들의 미륵 세계에 대한 염원과 지상적 존재로서의 슬픔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불탑들과 불상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미륵세계에 대한 비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단 한 단 탑을 쌓아 저 너머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염원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 그리움의 장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고 그 돌 위에서 자고 돌 위에서 깨어남으로써 그들의 아름다운 소망을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에게 운주사는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인간의 비원을 형상화한 거대한 예술작품인 셈이다.
    주왕산 가을 역시 인간 존재의 슬픔과 비원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나 이제사 알겠네

    상처와 상처가 어울리면
    깊은 상처가 더 깊은 상처를 끌어 안으면
    따뜻한 이웃이 되고 정겨운 마을이 되는 것을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그대로 선혈을 쏟고 마는
    담쟁이 덩굴 그 붉은 울음 위에
    영혼이 맑은 가을 물소리가 머물다 가네
    늦가을 잘 익은 햇살 한 줌도 머물다 가네

    잘 아문 상처는
    여운이 길어 오래 남는 징소리처럼
    따뜻한 노래로 오래 오래 남을 수도 있다네


      첩
        첩

    단풍 단풍 단풍
           ―가을 周王山

    주왕산은 기암 절벽으로 유명한 산이다. 시인에게 이 기암 절벽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이상세계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그 상처로 인식된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은 지상 세계를 벗어나 이상 세계로 향하는 인간의 욕망과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선혈을 쏟는 담쟁이 역시 기암절벽과 등가적으로 결합되어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염원과 몸부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 도달하려는 이 몸부림은 끝내 좌절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던 절벽들은 끝내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골짜기, 골짜기를 이루며 상처를 드러내고 만다. 절벽을 오르던 담쟁이가 선혈로 쏟아낸 것들이 단풍이다.
    여기서 주왕산은 저 너머 세계를 지향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원과 슬픔을 간직한 거대한 수도원으로 변하게 되고 주왕산의 아름다운 단풍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과 한계를 형상화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하영의 시는 비극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인간은 지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천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하영의 많은 시들은 이러한 이원적 존재로서 인간의 비극과 슬픔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하영의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슬픔이 인간의 운명적 비애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유마경에 보살의 병은 슬픔이라고 했다. 보살은 이미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불가의 말이다. 슬픔은 깨달음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으로 인해 생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고 깨달음을 얻으면 더 큰 슬픔으로 중생들의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 활동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노래하는데서 나아가 더 큰 슬픔을 깨닫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천착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적극적으로 저 너머의 세계로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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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하영론)

     

                                                       유  재  천(경상대학교 교수)

     

     

     

    1. 실상사 처마 밑의 물고기

    절간 처마 밑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물고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푸른색 소리로 쏟아내고 있다. 사찰에서 물고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들어 목어는 물고기가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정진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또는 물 속의 생물을 제도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보더라도 절간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치환은 깃발에서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아이러닉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했지만 물 속에 있어야 할 물고기를 절간 지붕 처마 밑에 처음 매달아 놓은 사람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영 시인이 노래하는 그리움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지상적 존재로서의 시인의 생에 대한 끝없는 슬픔과 연민이 깔려 있다.

    실상사 대웅전 처마 끝에는
    등푸른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그의 슬픔이 너무 맑고 고와
    자세히 살펴보니
    아가미가 움직인다
    지느러미도 움직인다
    이곳에는 강도 바다도 없는데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너의 바다는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내면서도
    시퍼런 가슴을 열고 내려다보는
    저 가을 하늘
    너는 저 높은 하늘로 날아가서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던져라
    갸날픈 네 등에 실한 날개 돋아나도록

    맑은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마주선 장승이 가을비에 젖는다
    천년 만년 젖던 그대로 젖는다
    나도 돌이 되어 함께 젖는다
    아, 내 작은 날개도 젖고 있구나.
              ―작은 날개가 젖는다

    「작은 날개가 젖는다」는 실상사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피안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물고기는 이 지상 세계에 던져진 비극적 존재로서 인간을 상징한다. 처마 밑에 매달린 청동 물고기는 물고기의 집인 바다에서 추방당한 존재이다. 추방당한 존재인 물고기는 끊임없이 바람에 일렁이며 추방당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소리내어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처마 밑의 물고기가 추구하는 바다가 실제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다. 물고기가 그리워하는 곳이 실제 바다가 아니라는 것은 이 물고기가 물고기가 아니라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의 객관적 상관물임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퍼렇게 녹이 슨 처마 밑 물고기의 청동 색은 등 푸른 물고기로, 등 푸른 물고기의 푸른 색 이미지는 시인에게 슬픔으로 인지된다. 물고기의 슬픔은 물고기가 바다가 아닌 대웅전 처마 밑에 있다는 것, 즉 바다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라는 데 있다. 바다로부터 추방되어 있지만 이 물고기의 내면 속에는 푸른 바다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고기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아가미를 움직여보고 지느러미를 흔들어보며 쉴 새없이 움직이면서 쨍그렁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바람은 이 유전자를 일깨우고 본성을 자각하게 하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2연은 물고기가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바다, 즉 하늘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처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물고기에게 으름장을 놓는 공포의 대상이다. 바다가 검은 구름이나 성난 파도 등과 같이 존재를 집어삼키는 공포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하늘이 공포의 대상으로 사용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비밀은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에서 해결된다. 가을 하늘,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가을 하늘은 온갖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퍼런 가슴을 열어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상적 존재인 인간이 그 투명한 청정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높푸른 가을 하늘은 물고기에게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물고기의 지상적 한계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돌아가는 것은 모든 욕망을 던짐으로써 가능하지만 지상적 존재로서 물고기로서는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공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신들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한 고고학자는 거대한 컴퓨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컴퓨터에 특정 날짜와 시간에 다시 합체되도록 명령을 주고 해체시키면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던 각 부품들은 해체되어 다시 합쳐지기 전까지는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처럼 작동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 다시 합체되면 서로 무관한 개체들로 보였던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드러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할 때 우주 속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영의 시에서 사물과 인간 내면 속에는 우주의 한 조각이 각인되어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 조각과 우주는 서로 부르고 찾는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듯 마음 속에 간직된 불성이 부처를 향하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다.

    굳게 닫힌 창을 열고,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고, 입술을 포개어 취하게 하더니, 슬그머니
    손목 잡아 끌고, 봄 들판에 나와

    나처럼 가벼이 날아 보아라
    나처럼 부드러이 살아 보아라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아지랭이

    시인은 「아지랭이」에서 사물과 인간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자락과 우주 사이의 교감, 감응을 노래하고 있다. 봄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눈에 잡힐 듯 말 듯,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겨울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사람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 뿐 아니다. 그것은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모든 사물들의 생명을 불러내고 꽃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사물과 화자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는 아지랑이가 머리를 쓰다듬고 볼 비비고 입술 포개 취하게 하고 슬그머니 손목 잡아끌어 당김으로써 봄 들판으로 불려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지랑이는 사물과 인간의 내면 속에 깊이 잠복된 유전자를 일깨울 뿐이다. 일깨워진 유전자는 지상적인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아지랑이는 「작은 날개가 젖는다」의 바람처럼 굳게 닫힌 화자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어 우주와 하나되게 하고 황홀경에 들게 하는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우주적 힘의 상징이다. 이런 만물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과 시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할미새는 시를 모른다
    시를 몰라도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영혼이 맑게 우는 것은 시다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노랑 할미새의 울음을 보던 날
    달맞이꽃을 생각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듯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나 파블로 네루다를 그리워한다

    달맞이꽃의 서원이
    달에 닿아 별에 닿아
    서로의 눈물을 나눠 마시며
    월견초나 월하향, 혹은 야래향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정겨웁게 서로를 부르듯
    채송화꽃이, 쬐끄만 씨앗으로 이 땅에 와서
    색색의 꽃잎으로 기쁨을 나눠주듯
    눈물은 내 삶을 든든한 뿌리로 자라게 한다
    절망을 먹고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면
    절망은 더 없는 자양이 된다

    절망의 절망에게 할미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도
    노랑 할미새나 알락할미새를 날려 보낸다
    그리움을 아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밤.
              ―할미새

    「할미새」에서 시인은 할미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라고 즉각적인 감정이입을 일으킨다. 즉각적인 감응이 가능한 것은 시인과 할미새의 내면에 우주의 한 자락이 각인되어 있어서 할미새의 울음과 지상적 존재로서 자신의 슬픔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할미새의 울음 소리를 듣고 할미새의 슬픔과 그리움을 이해한다. 시인이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한 것처럼 할미새의 울음은 할미새도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 즉 맑은 영혼의 울음이라고 한다면 할미새의 울음 역시 시인 셈이다.
    이러한 할미새와 시인의 시 사이의 등가적 결합은 다음 연에서 달맞이꽃의 서원으로 확대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시인이 미스트랄이나 네루다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근본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간절한 그리움들이 영혼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그 영혼의 울음이 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피안의 세계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것을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한 것도 그 때문이다.
     

    3. 주왕산 단풍

    하영 시인의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항상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그리움과 슬픔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리움이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된 것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슬픔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인간 존재의 내면에 간직된 거대한 슬픔과 비원에 마주친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는
    이쁜 손길에 머물기로 하네

    믿음과 믿음
    서원과 서원으로 탑을 쌓아
    저 먼 별에까지 닿고자 했던,
    천불 천탑으로 징검다리를 놓아
    미륵의 나라로 가고자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
    한 단 한단 소망을 쌓아올린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저 탑을 딛고 가면
    등 돌리고 돌아서는 마음 밭마다
    바라밀의 꽃씨를 뿌릴 수 있으리
    그리하여 마침내 불국토에 닿을 수 있으리

    나 오늘 이곳에 머물러
    돌에서 자고 돌에서 깨어나고 싶네
        ―운주사에서; 원은희 시인에게

    운주사는 화순에 있는 천불 천탑, 와불로 잘 알려져 있는 절이다. 천불 천탑이란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불탑을 가리키는 말로,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하룻밤 사이에 배의 돗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91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이 남아 있지만 야트막한 구릉과 벼랑,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게 되는 서민들의 얼굴을 닮은 미륵불들은 당시 서민들의 미륵 세계에 대한 염원과 지상적 존재로서의 슬픔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불탑들과 불상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미륵세계에 대한 비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단 한 단 탑을 쌓아 저 너머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염원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 그리움의 장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고 그 돌 위에서 자고 돌 위에서 깨어남으로써 그들의 아름다운 소망을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에게 운주사는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인간의 비원을 형상화한 거대한 예술작품인 셈이다.
    주왕산 가을 역시 인간 존재의 슬픔과 비원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나 이제사 알겠네

    상처와 상처가 어울리면
    깊은 상처가 더 깊은 상처를 끌어 안으면
    따뜻한 이웃이 되고 정겨운 마을이 되는 것을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그대로 선혈을 쏟고 마는
    담쟁이 덩굴 그 붉은 울음 위에
    영혼이 맑은 가을 물소리가 머물다 가네
    늦가을 잘 익은 햇살 한 줌도 머물다 가네

    잘 아문 상처는
    여운이 길어 오래 남는 징소리처럼
    따뜻한 노래로 오래 오래 남을 수도 있다네


      첩
        첩

    단풍 단풍 단풍
           ―가을 周王山

    주왕산은 기암 절벽으로 유명한 산이다. 시인에게 이 기암 절벽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이상세계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그 상처로 인식된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은 지상 세계를 벗어나 이상 세계로 향하는 인간의 욕망과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선혈을 쏟는 담쟁이 역시 기암절벽과 등가적으로 결합되어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염원과 몸부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 도달하려는 이 몸부림은 끝내 좌절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던 절벽들은 끝내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골짜기, 골짜기를 이루며 상처를 드러내고 만다. 절벽을 오르던 담쟁이가 선혈로 쏟아낸 것들이 단풍이다.
    여기서 주왕산은 저 너머 세계를 지향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원과 슬픔을 간직한 거대한 수도원으로 변하게 되고 주왕산의 아름다운 단풍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과 한계를 형상화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하영의 시는 비극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인간은 지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천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하영의 많은 시들은 이러한 이원적 존재로서 인간의 비극과 슬픔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하영의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슬픔이 인간의 운명적 비애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유마경에 보살의 병은 슬픔이라고 했다. 보살은 이미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불가의 말이다. 슬픔은 깨달음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으로 인해 생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고 깨달음을 얻으면 더 큰 슬픔으로 중생들의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 활동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노래하는데서 나아가 더 큰 슬픔을 깨닫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천착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적극적으로 저 너머의 세계로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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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엇을 배웠소

 

 

시인 류시화 씨가 인도를 방문 하였는데

​북인도 바라나 시의 한 여인숙에서 묵고 있을때입니다.

​낮에 이곳 저곳 구경을 하고 돌아오면

늙은 여인숙 주인이 류씨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소?

​그는 여행을 하러온 류씨에게 ‘오늘은 뭘 구경했소?

​라고 묻지않고 항상 그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서 못들은 척 할려고 하다가

아무렇게나 둘러 대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인도가 무척 지저분 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는 류씨의 말에 흥미를 가지고 심부름 하는 아이를 불러서 말합니다.

​이 손님이 오늘 인도가 무척 지저분 하다는 것을 배웠다는구나

​그러니 그 아이도 덩달아서 그래요? 그런걸 배웠대요?

​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다음날 주인은 또 물었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소?

​류씨는 또 아무거나 둘러 댓습니다.

​오늘은 인도에 거지가 무척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는 ”그래요 그런걸 배웠어요?” 하면서

또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제 류씨는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가 아이와 짜고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수 하기로 작정을 하고

​그 다음날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인도에 쓸데없는 걸 묻는 사람이 참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자 여인숙 주인은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누가 그런 쓸데 없는 걸 묻던가요?”

그는 그가 말귀를 못알아 들은건지

아니면 알아 듣고서도 모르는척 하는건지 잘 몰라서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그런 희한한 사람이 있습니다.

안녕히 주무시오 .

그런데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여인숙 주인은

똑 같은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 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저 손님이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는 구나”

그는 미칠것만 같아서 괴상한 여인숙을 떠나 옮기려고 하다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일저녁 그 이상한 여인숙 주인에게서

그 질문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뭘 배웠소?

그러다가 결국 류시화씨는 세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일주일이 지나자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내가 뭘 배웠지?

​결국 그 여인숙 주인은 자기에게

아주 좋은 스승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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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통한 치유

 

 

침묵은 한마디로 영적인 길이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내면의 현실을 만난다.

그러나 침묵은 또 우리가 끊임없이 몰두하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인 침묵이 아니라,

마음의 침묵이다. 외적인 침묵은 감정들을 가라 앉힘으로써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여

마음이 조용해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상처를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적절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심리 치료는 그 효과를 충분히 보여 주었다.

그러나 침묵이라는 치유 수단도 있다.

내적인 자극은 침묵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소용돌이 치는 먼지가 가라앉을 수 있으면 내면은 정화된다.

 

--안셀름 그륀 삶의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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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치법]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예)

1.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2.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3.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4.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대구법]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歌辭)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예)

1.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2.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3.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설의법]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 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표현 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독자의 판단에 맡겨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표현하는 기교이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예)

1.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2.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3.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4.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박대인(Edward W.POITRAS)의 '온돌'에서>

5.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춘향전'에서>


[인용법]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로서 '인용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에 따옴표가 드러나 있는 명인(明引)과 따옴표가 드러나 있지 않은 암인(暗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

1.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2.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3.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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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법]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예)

1. 집 없는 천사(천사→거지)

2.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3. 우리는 그 백의의 천사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간호원→백의의 천사)

4.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 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송 순>


[연쇄법]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어키게 하는 데에 있다.

(예)

1.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2.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3.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최인욱의 '단편 소설의 특질'에서>


[영탄법]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1920년대 우리 시에서 많이 썼다.)

(예)

1.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2.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3.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현재법]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예)

1.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김원룡의 '한국의 미'에서>

2.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이광수의 '산중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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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법]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흔히 '∼만큼', '∼보다', '∼처럼', '∼같이' 등의 비교격 조사를 사용한다.

(예)

1.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2.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3.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의 '논개'에서>

*참고...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 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 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대조법]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① 단어의 대조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8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③ 색상의 대조

* 가라미 파라니 새 더욱 해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억양법]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던지 하는 표현 방법

(예)

1.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2.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3.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4.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예증법]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예)

1.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2.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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