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1968)
1921년 11월 27일(서울) ~ 1968년 6월 16일 (향년 46세) |1945년 시 '묘정의 노래' 연희전문학교 중퇴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969년 5월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그의 마지막 시〈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펌
* 더 읽을 거리 / -김상욱
짧고 서정적인 이 한 편의 시는 지금껏 우리 시가 이룬 가장 높은 봉우리 중의 하나이다. 쓰여진 언어도 모국어의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만으로 채워져 있으며, 형식 또한 전통적인 서정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풀, 바람, 비라는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자연현상을 눕다, 일어나다, 웃다, 울다 등 흔히 쓰이는 동사의 현재형으로 진행함으로써 꿈틀거리는 힘을 당차게 얻어내고 있다. 눕고 일어나는 반복적인 동작 속에서 섬세한 묘사는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풀과 바람이 지니고 있는 폭넓은 상징적 의미로 인해 이 시는 그 어떤 시보다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닌 채 우리의 정서에 다가오고 있다.
이 시는 보는 눈에 따라서는 단순히 바람에 풀이 눕고 일어서는 풍경에 대한 시적 형상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는 초기에 매달려왔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치열한 자기비판에서 시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으로, 마침내 역사에 몸담음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그의 시적 세계와 함께 바람과 풀이 서로 엮어내는 대립적인 정황은 이 시를 이 땅,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의 삶에 대한 형상화로 읽어야 마땅하다.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기어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형상은 끊임없이 쓰러지나 옹골찬 고개짓으로 다시금 몸을 바투는 민중의 거센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김수영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다른 형식으로 확인된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인이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 쓴 시는 내용에도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우며, 어떤 그럴싸한 거대한 것에 기대임 없이도 민족과 인류의 문화에 공헌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풀' 이후 조국의 산천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은 연약하나 그 강인한 생명력에 어울리는 정당한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더욱 푸르게 바람에 눕고 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자신의 얼굴과 삼위일체가 되어 김수영이란 한 시인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 - 김상욱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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