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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Ten. Beniamino Gigli (1890-1957)
유치환이 사모한 여인 '이영도'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21세에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영도-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은 갑자기 몰아닥친 신의 시샘으로 종점을 맞는다.
1967년 2월 13일 오후 9시30분 부산 미성극장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청마는 시 쓰기와 편지 쓰기에 들었던 붓을 영영 놓게 된다.
1908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청마는 통영.부산.경주 등 지방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46년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으로, 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으로 피선되는 등
그의 영향력은 중앙문단도 휘어잡는 위력이 있었다.
유치환의 부음을 듣자 시인 박성룡은 기자로 일하는 '주간한국'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 하였네라"의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과, 주고 받은 편지를 두 쪽에 걸쳐 가득 실었다.
이름 있는 출판사들은 다투어 이영도에게 청마의 편지를 내자고 달려든다.
그러나 이영도는 '뭍'같이 까딱 않는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유치환을 여읜 슬픔도 슬픔이지만
보배 같은 그의 편지를 세상에 까발릴 만큼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유치환이 간 지 두 달 뒤쯤인 4월 어느날 "근배, 니 부산좀 내려오거래이"
뜻밖에도 부산에서 걸려온 이영도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 생긴 중앙출판공사 편집장에 취직한 나는 책 한 권은 커녕 문패의 먹도 마르기 전인데
큰 시인들을 앞세운 대형 출판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림없는 줄 알면서
"저도 출판을 하고 싶은데요"하고 응석을 부려두었던 터였다.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은 이영도의 집은 동래 금정산 기슭 양지바른 터에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규방에는 유치환이 준 사랑의 시를 손수 수 놓은 열 폭 병풍이 둘러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이영도를 두 세 번 밖에 만난 일이 없었다.
충청도 촌뜨기라 부산 쪽과는 길이 닿지 않았고 이영도도 서울 오는 편이 뜨악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어쩐일인지 62년엔가 이영도의 서울 나들이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아주 예뻐해주었다.
또랑또랑한 시인 세 사람에 이형기.박재삼을 쳐들면서 그 밑에 내 이름을 달아주기도 했다.
내가 부산에 내려간 날은 바로 부산의 문인들이 청마추모문학제를 올리는 날이었다.
나는 소복 입은 이영도와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이영도 말고도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다섯이나 내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영도는 그 많은 편지 보따리를 선뜻 내게 내주었고 국제신문 문화부장이면서 아동문학가인 최계락과 나는
동래 금호장 호텔에서 그 편지들을 대충 추려 서울로 올라와 '청마 유치환시인이 규수시인 이영도 여사에게
20년간 보낸 사랑의 서한집'을 책으로 묶어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돼,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일로 해서 이영도와 나는 어머니와 아들만큼이나 살가운 사이가 되었고
편집장에서 주간으로 일자리도 튼튼하게 되었다.
그러면 왜? 이영도 그 깔끔한 성격이 편지 보따리를 풀렀을까?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의 시를 썼다.
청마의 이영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쉬이 잊으리라/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들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찔렀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명편의 시를 낳기도했다.
"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느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지만 사람들은 청마 유치환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나르는 한문 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져 있는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벗어나 있다.
청마는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찌 사슴이 초식 동물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서문"에서 썼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海原(해원)을 향하야 흔드는/永遠(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純情(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이념)의 標(표) 대 끝에 /哀愁(애수)는 白鷺(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旗빨"이다.
그 "기빨"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문단적 교류가 전무한 채 변방에서
외롭게 혼자 시를 써가던 청마는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람을 남겼다.
6.25전쟁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냄.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함.
제1회 시인상, 서울시문화상, 예술원공로상, 부산시문화상 수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음.
출처 : 카페에서 모셔온글
낙일 신경림 (0) | 2014.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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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1968)
1921년 11월 27일(서울) ~ 1968년 6월 16일 (향년 46세) |1945년 시 '묘정의 노래' 연희전문학교 중퇴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969년 5월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그의 마지막 시〈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펌
* 더 읽을 거리 / -김상욱
짧고 서정적인 이 한 편의 시는 지금껏 우리 시가 이룬 가장 높은 봉우리 중의 하나이다. 쓰여진 언어도 모국어의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만으로 채워져 있으며, 형식 또한 전통적인 서정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풀, 바람, 비라는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자연현상을 눕다, 일어나다, 웃다, 울다 등 흔히 쓰이는 동사의 현재형으로 진행함으로써 꿈틀거리는 힘을 당차게 얻어내고 있다. 눕고 일어나는 반복적인 동작 속에서 섬세한 묘사는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풀과 바람이 지니고 있는 폭넓은 상징적 의미로 인해 이 시는 그 어떤 시보다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닌 채 우리의 정서에 다가오고 있다.
이 시는 보는 눈에 따라서는 단순히 바람에 풀이 눕고 일어서는 풍경에 대한 시적 형상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는 초기에 매달려왔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치열한 자기비판에서 시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으로, 마침내 역사에 몸담음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그의 시적 세계와 함께 바람과 풀이 서로 엮어내는 대립적인 정황은 이 시를 이 땅,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의 삶에 대한 형상화로 읽어야 마땅하다.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기어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형상은 끊임없이 쓰러지나 옹골찬 고개짓으로 다시금 몸을 바투는 민중의 거센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김수영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다른 형식으로 확인된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인이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 쓴 시는 내용에도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우며, 어떤 그럴싸한 거대한 것에 기대임 없이도 민족과 인류의 문화에 공헌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풀' 이후 조국의 산천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은 연약하나 그 강인한 생명력에 어울리는 정당한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더욱 푸르게 바람에 눕고 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자신의 얼굴과 삼위일체가 되어 김수영이란 한 시인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 - 김상욱 - (펌)
박용래시인의 겨울밤 서정주시인의 신부 (0) | 2014.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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