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 다시 퇴고를



# 퇴고란 무엇인가

시문(詩文)을 창작할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거나, 문장을 갈고 다듬는 일을 퇴고(推敲)라고 한다.
퇴고라고 하는 말은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다>의 ‘밀다(推)'를 ’두드린다(敲)'로 바꿀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그의 조언으로 ‘두드린다'로 고쳤다는 고사에서 추고(推敲)가 아닌, 퇴고(推敲)가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당대를 풍미했던 문장가였다. 통속적인 언어 구사와 풍자에 뛰어났으며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詩風)은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로 유명하다. 그의 자(字)는 백낙천(白樂天)으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으며, 시문집에 ‘백씨 문집(白氏 文集)'이 있다.

이 얘기는 백낙천과 얽힌 에피소드의 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하루는 백낙천이 이웃 친지들, 즉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을 불러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 칠현금(七絃琴)을 뜯어가며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연구 등을 위한 이 모임에서 한 제자가 백낙천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화선지에 붓만 대시면 절창(絶唱)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선생님은 퇴고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퇴고는 무슨 놈의 퇴고! 자고로 시란 즉흥적(卽興的)이고 즉물적(卽物的)인 게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는 것이지. 모름지기 시란 순간의 포착이 중요한 것이야. 순발력이 없으면 아예 시를 짓거나 흉내내려고 덤비지 말아야지."

술잔이 여러 순배 돌고 흥취가 일 만큼 거나해진 백낙천이 화장실에 간 뒤였다. 백낙천이 깔고 앉은 방석이 유난히 도도록 불거져 있었다. 시회에 참가한 문하생(門下生)이 백낙천이 깔고 앉은 그 방석을 들추자 아뿔싸! 그가 깔고 앉은 방석 밑에는 그날 발표한 백낙천의 시문 초벌 원고(草稿)와 무수히 개칠을 거듭했거나 고쳐 쓴 흔적이 역력한 파지(破紙)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백낙천도 남몰래, 그리고 무수하게 퇴고를 했다는 일화 한 토막이다.



‘오발탄(誤發彈)' ‘학마을 사람들’의 작가 이범선(李範宣·1920~1982)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작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키 높이 만큼의 습작 원고를 써야 한다"고. 그만큼 절차탁마(切嗟琢磨)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칼' ‘들개’ ‘금오벽학도' ‘황금비늘' ‘장수하늘소' 등을 발표한 작가 이외수(李外秀)씨는 유창하고, 아름답고, 적확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장편소설 한 편이면 대략 1200장 내지 1500장의 원고지가 소요되는데, 그는 장편소설 한 편을 막 탈고(脫稿)하고 나면 그 소설의 내용을 토씨(助詞) 하나도 안 틀리고 다 외운다고 한다. 낮에는 주로 자고, 밤에만 작업하는 야행성(夜行性)인 그는 소설의 플롯을 짜고 얼개를 얽은 다음 집필에 들어가면 일반 사람은 엄두도 못낼 고통스런 공정을 되풀이한다고 한다. 소설 집필 첫날 밤 10장을 쓰고 나서 그 다음 날 집필할 때는 앞서 쓴 10장을 다시 베껴 쓰면서 문장을 다듬고 윤문(潤文)을 하면서 새로 10장을 보태고, 세째 날 역시 앞에 쓴 20장의 원고를 베껴 쓰면서 또 문장을 다듬고 새로운 스토리 10장을 보태고, 소설 집필 네째 날은 먼저 쓴 30장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 또다시 글발을 지우고 고치는 등 퇴고를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스토리 10장 추가하고…. 이런 식으로 1200장 혹은 1500장 분량의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작업 과정에서 문장의 부호 하나, 어휘 하나하나까지 갈고 다듬는 것은 물론 자연스럽게 줄거리 전체까지도 술술 외워진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외롭고 고통스런 글쓰기 작업을 통해 이외수씨는 끝내 ’아름다운 문장'을 성취해내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소설문장은 바로 시'라고 평가하는 비평가의 지적은 빈 말이 아님을 입증하는 예가 될 것이다.


이렇듯 문장은, 특히 시문학은, 백낙천이 말한 ‘즉물적인 것'이거나 ’순간의 포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즉물적 발상법이나 직관적(直觀的) 어프로치(접근)가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고치는 무수한 퇴고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한 편의 시조는 완성되는 것이다. 일단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을 통해 발표한 작품이라도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있거나 흡족하지 않을 경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발표 당시의 정서나 분위기가 바뀔 경우 평생 두고 고치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썼다지 않은가.

어디 한번 상상을 해보라. 소설 한 편을 두고 20번도 아니고 200번을 고쳐 쓴다는 일을. 웬만한 사람은 똑같은 작품을 세번만 고쳐 쓰라고 해도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나고 신물이 난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텐데 200번이라니! 웬만큼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을 헤밍웨이는 해냈으며, 그런 끈질기고 피나는 절차탁마의 노력, 더 나아가 200번에 걸친 퇴고 작업 덕분에 영광의 노벨문학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는가.



# 퇴고의 실제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핏집 울리는 죽비 소리 남기고.

등이 허전하여 등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는 앞산,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오고 밀려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불리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파릇파릇 핏줄 돋는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가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놓고….

- 윤금초의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저자(著者)가 1999년 문학사상사 주관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가람시조문학상 선고위원회(최승범 박철희 권영민)는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으로 윤금초씨의 <할미새야, 할미새야> 외 2편을 선정한다. 윤금초씨는 시조의 격조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적 실험을 지속해온 시조시인으로서 특히 사설시조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다양한 기법적인 추구 작업에 몰두해 오고 있다. 문학사상사 가람시조문학상 선고위원회에서는 윤금초씨가 도달하고 있는 사설시조의 새로운 미학이 한국 시조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여,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본상을 윤금초씨에게 수여하며 그동안 쌓아 올린 시적 성과에 찬사를 드린다'고.


심사를 맡은 최승범 교수는 심사평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 말 그대로, 난상토의 끝에 윤금초씨를 수상자로, 수상작은 <할미새야, 할미새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하회탈 양반의 눈웃음> 등 3편을 올리기로 하였다. 윤금초 시인은 시력 30여년에 이른다. 그동안 꾸준한 작품 창작으로 시조시의 문학성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시조시의 저변 확대에도 많은 기여를 하여 왔다. 지난 1년에도 의욕적인 작품 발표와 더불어 젊은 시인들에게 시조시의 길을 넓힌 사화집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번 수상작으로 올린 3편에서 시조시를 위해 그동안 기울여 온 윤금초 시인의 실험의식과 노력의 결정미(結晶美)를 볼 수 있다. 사실, 그동안 그는 시조시형의 전통성을 어떻게 이어 가꿀 것인가. 자유시가 추구하고 있는 현대성이나 표현 기교 문제를 시조시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많은 고심을 하여 온 시인이다. 윤금초 시인은 사설시조 시형의 연작(聯作)이나 평 엇 사설시조 시형의 연첩(連疊)에서 현대시조의 활로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도 평 엇 사설시조형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율격의 묘미를 그 각각의 시형마다에 잘 살려냈다(시조의 율격을 정형(定型)이 아닌 정형(整形)이라는 가람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윤금초 시인의 시어 선택도 매력적이다. 어느 말엔 옛스러운 느낌이다가도 다시 보면 그 말에 겨레의 마음결이 일고 반작거린 새 정이 돋는다. 그가 취한 제재나 표현 기교 또한 현대 자유시의 어느 기준에 못미치고 퇴색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윤금초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박철희 교수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 윤금초의 시는 다양한 리듬과 대담한 실험성이 특색이다. <할미새야, 할미새야>가 보여 주듯이 시조적 세련을 거친 그 분방한 가락은 시조를 낯설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사는 내면(아픔)을 새로이 경험케 한다. 그만큼 타령과 육자배기, 잡가와 가사 그리고 민요의 장단을 두루 어울리게 하여 울려 주는 가락과 사설 속에 이 땅의 역사와 서민들의 애환이 정의되어 있다. <할미새야, 할미새야>가 단순히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회한으로 머물지 않고 훼손된 우리의 삶과 도덕적 감수성의 시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일찍부터 스스로 노래하는 지휘자요 창(唱)하는 감정의 조율사임을 자임하여 나섰다. 한결같이 시조의 확장과 변화의 실험에 그의 인식은 움직여 왔다. <하회탈 양반의 눈웃음>이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질라래비 훨훨> 등은 탈놀이, 사물놀이와 같은 민중연희의 변이요, 변주다. 그러면서도 ‘시조성'의 핵이랄 수 있는 형식은 변함이 없다. 더구나 <사설·인터넷 유머> 연작의 구절들이 보여 주듯이 거의 체질적으로 지녔다고 해야 할 입심이 돋보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서정성 속에 녹여내는 능력도 범상이 아니다.'


또한 권영민 교수는 ‘윤금초씨는 시조의 전아한 기품과 격조를 파괴하는 데에서 오는 긴장을 잘 살려낸다'고 전제하고 ’사설시조의 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그의 시적 상상력은 <할미새야, 할미새야> <질라래비 훨훨> 등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심사평에서 밝히고 있다. ‘적절한 어구의 반복, 자연스런 리듬 의식의 재현, 시적 심상의 확장과 응축 등은 윤금초씨의 시조에서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시조의 미학이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을 지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적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종적인 수상작 선정에서 심사위원 모두 윤금초씨의 작품을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지목하는 데에 동의하였다'고 평가했다.


사설시조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당초 ’가을비 한나절' 혹은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제목으로 초고(草稿)를 잡은 것이다.

1997년 우리 사회에 몰아닥친 IMF라는 대형 경제변란(經濟變亂). 경축 국치(庚丑 國恥)라고 불리는 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외환위기사태에 몰린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조선일보에 몸 담고 있었던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8년 2월 우대퇴직이라는 이름 아래 20년 동안 청춘을 다 불태웠던 그 직장을 뒤로 한 채 마치 한 마리 노숙(露宿)하는 할미새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등걸잠 자는 할미새>는 바로 평범한 소시민 윤금초로 읽어도 될 것이고, 서울역 지하도나 광화문 지하도, 서소문 공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름 모를 홈 리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고 제목을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를 상징하는 ‘가을비 한나절'이나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는>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생각에서 사설시조 한 수(首)를 구상한 것이다. ②에서는 초고 ①보다는 시적(詩的) 화자(話者)를 좀더 객관화시키고 어떻게 하면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게 되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번민 끝에 ①의 초고에 한 수를 더 얹기로 한 것이다.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 역시 시적 자아(自我)로 보아도 좋고, 고향을 벗어나 직장생활을 하는 어느 소시민을 떠올려도 될 것이다.

③의 제목 ‘햇볕이 계실까요'는 이 작품을 구상할 당시의 시대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햇볕정책'라는 화두(話頭)가 그 무렵 정치적 수사(修辭)의 차원을 뛰어 넘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이데아로 자리잡아가고 성숙되어가는 분위기였다. '햇볕'은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그리하여 비에 젖어 등걸잠 자는 할미새나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까지도 아우르고 껴안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준다는 의미로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③에서는 이미지를 명료하게 부각시키는 데도 신경을 썼다. 가령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저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을,>이라는 대목을 통째로 드러냈다. 이 대목을 통째로 드러내도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시란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시나 시조 짓기 작업은 군살 빼기 작업과 같은 것이다. 군더더기를 가차없이 걷어내는 것, 필요없는 너스레나 수다스럽게 지껄여 이미지를 산만하게 하는 요설(饒舌)을 삼가하는 것이다. 생략과 압축, 상징과 응축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 시조 짓기 작업의 요체(要諦)가 아니던가. 특히 사설시조에서는 필요 없는 수다나 너스레 때문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본전'을 못 찾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③에서는 둘째 수 종장 <정동진 불 타는 바다>를→ <물안개 거두어내는>이라고 수정했다. ‘물안개'가 ’정동진'보다는 더 구체적 적시라는 점과 ‘정동진' 하면 해돋이를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정동진의 해돋이 분위기는 이제 이미 낡고 너무 흔해 빠진 정서가 되어버렸고 포괄성을 띠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물안개 거두어내는>이라는 이미지를 끌어옴으로써 희망의 메시지, 무엇인가 다양한 뉘앙스가 풍기는 결구(結句)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④에 이르러 제목을 ‘할미새야, 할미새야'로 바꾸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할미새…'는 작자(作者)의 자설적(自說的) 진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시조다. 누구나 창작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바겠지만, 시나 시조는 작자의 체험 요소가 많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사사로운 체험을 가공(加工)하고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보편적 체험으로 확대촵재편했을 때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20년 직장을 하루 아침에 그만 두고 거리로 밀려난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마치 한 마리 노숙하는 할미새가 된 느낌, 그 억장 무너지는 충격적 사건은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와 다를 바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목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작자가 체험한 IMF 환란(換亂)의 충격적 사건을 간접 화법(間接 話法)으로 토로한 자기 고백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처럼 사설시조 두 수로 이루어진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네 차례의 개작(改作) 과정, 달리 말하면 네번의 퇴고 작업을 거쳐 비로소 마무리한 작품이다. ’할미새…'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시간적 개작 순서를 열거하면 ①→②→③→④로 나뉜다. 여러 차례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개칠을 하는 등 퇴고와 퇴고의 되풀이과정 끝에 탄생한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기록상 네 차례의 퇴고 과정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시조'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착상(발상)→플롯 설정→얼개짜기→시어의 취사선택→이미지의 전개→서사(敍事) 구조 얽기→군더더기 제거 작업→시적 화자의 진술 등 작품 창작 배경을 설명하자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퇴고 과정'을 거친 것이다.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피집 울리는 죽비 소리만 남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家長처럼 앞 산은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후비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내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햇볕이 계실까요'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똬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더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피집 울리는 죽비 소리만 남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앞 산은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다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모아 제 몸 불려가는 강물, 다리품 팔고 귀동냥하고 한 짐 남루를 지고 오는 저 강물아.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저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을,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정동진 불 타는 바다,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햇볕이 계실까요' 혹은 ’가을비 한나절'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앞 산은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다 둘러봐도 곤곤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모아 제 몸 불려가는 강물, 다리품 팔고 귀동냥하고 한 짐 남루를 지고 오는 저 강물아.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정동진 불 타는 바다,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가을비 한나절' 혹은 ‘햇볕이 계실까요’



# 담금질 거듭해야 시우쇠가 된다


다음은 옴니버스시조를 시도한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보자.


<1>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풋풋한 활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에 노역의 햇살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 눈 돌하루방이 부릅뜬 눈 굴리고 굴리는
꽃멀미 부르는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한숨 짓는 것도 같고
웅웅웅 울음 우는 것도 같은
이어도 노랫가락 소리,
그렇게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파도 뚫고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 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상상의 눈에는 언제나 선 명한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의 섬,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나고 나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 리게 되는 구원의 섬, 그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아직 아무도 없 는 섬, 그런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썰물 때만 잠시 잠깐 모습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쌀쌀한 마파람이 마른 낙엽 몰고 가는 어느 겨울날
눈앞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넘어가버리고
억새풀 산등성이만 하얗게 하얗게 물들이고….

<2>
<리드(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햇살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이 부릅뜬 눈 굴리고 굴리는
꽃 멀미 부르는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
나직한 목소리로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는 것도 같은 이어도 노랫가락 소리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파도 뚫고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 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상상의 눈엔 언제나 선명한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게 되는 구원의 섬, 그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분명하게 증언할 이는 아직 아무도 없는 섬, 그런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썰물 때면 건듯 건듯 등 모습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수면 아래로 뉘엿이 가라앉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날
눈앞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3>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돌하루방 퉁방울눈 부릅뜬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
나직한 목소리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짖는 것 같은, 이어도 이어도 노랫가락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상상의 눈엔 훤하게 훤하게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섬, 구원의 섬이어라.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영영 다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또렷이 증언할 이 아무도 없는 섬,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등 모습 드러내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
꿈길처럼 떠오른 섬, 훌쩍 수평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4>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짖는 것 같은, 이어도 이어도 노랫가락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다금바리 오분재기
상한 그물 손질하며
물길 급한 물질 하며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상상의 눈엔 언제나 언제나 훤하게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섬, 구원의 섬이어라.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또렷이 증언할 이 아무도 없는 섬,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등 모습 드러내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
꿈길처럼 떠오른 섬, 훌쩍 수평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5>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다금바리 오분재기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캄캄한 침묵의 수렁,
산호초 덤불 숲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입에서 입으로 굴려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구원의 섬,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는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6>
<전문 생략>

등지느러미 나풀대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입에서 입으로 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구원의 섬,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는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7>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지느러미 나풀거리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노래로 노래로 굴려온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접고 나면 저승 복락 누리는 섬, 한번 보면 이내 가서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오지 않는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 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굽은 산등성이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윤금초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문학사상’에 발표할 때 이런 시작(詩作) 노트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오늘의 시조문학은 ‘윤회’만 있지 ‘변화’는 없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외중내졸(外重內拙). 밖을 중시하면 속이 쪼잔해진다. 형식에 치중하면 내용이 치졸해진다는 말이다.

사설시조를 기피하는 몇몇 인사의 사설시조 부정론이 거센 줄 알고 있다. 내가 외면하니까 너도 하면 안 된다? 이만저만한 논리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시조 형태 가운데 사설시조 엇시조가 엄존해 왔음에도 굳이 평시조만을 고집하는 것은 사설시조 부정론자의 아킬레스건을 호도하기 위한 비겁한 술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표현의 다양성을 짓누르는 것은 가치 중립의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술의 가장 큰 적인 도식성을 멋지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윤회'가 아닌 ’변화'를 꿈꾸는 일이다. ‘이어도 사나…'는 이른바 옴니버스시조다. 시조의 각종 형식미학을 두루 아우르면서 서사구조를 갖추는 등 ’윤회'가 아닌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사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는 보기 드물게 형식실험을 모색한 작품이다. 하나의 소재 및 주제를 가지고 평시조+양장시조(2장시조)+엇시조+평시조+사설시조+평시조+사설시조 등 일곱 수로 마무리한 혼작(混作) 연형시조(連形時調)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의 <1>과 <7>, <2>와 <6>, <3>과 <5>… 등 글의 변천 과정(퇴고 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라. <1>과 <7>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와 수정·가필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도 사나…’의 일곱 번에 걸친 변천 과정을 순서대로 열거했지만, 여기에 나타나 있지 않은 수정작업과 퇴고작업이 무수히 뒤따랐다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대장간에서 다루는 쇠붙이만 담금질을 거듭하고 연찬(硏鑽)을 거듭하면 시우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학도 마찮가지다. 얼마만큼 끈기를 가지고 연찬작업을 거듭했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박목월(朴木月) 선생은 일단 탈고한 시 작품을 원고지에 정서(淨書)한 다음,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시어(詩語)의 생사 존망(生死 存亡) 문제를 따졌다는 것이다. 이 시어가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인지, 이 조사(助詞)가 여기에 꼭 있어야 하는지 일일이 따졌고, 필요 없는 군더더기나 조사(토씨)는 가차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솎아내고 잘라냈다는 것이다.



# ‘기다림의 미학’ 터득해야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소설 ‘닳아지는 살들’을 집필할 때였다. 소설의 도입부(導入部)를 20장 정도 초안하고 나서 더 이상 다음 줄거리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상상력이 바닥나고 영감(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의 고갈 현상에 부딪쳤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가며 끙끙거렸지만 ‘줄거리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고 이야기의 진척이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설 집필을 중단, 초고 노트를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난 후에 문득 ‘닳아지는 살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마치 신 들린 것처럼 소설의 가닥이 술술 풀려 나갔다. 책장 서랍 깊숙이 묵혀 두었던 초고 노트를 다시 꺼내 단숨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저 유명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거머쥐게 된 동인(動因)이었고, 그 작품이 바로 ‘닳아지는 살들’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작가 이호철 선생이 고백한 대로 소설은 물론 시나 시조 등 문학작품의 주제·소재에 대한 충분한 취재 및 방계 자료(傍系 資料) 수집을 게을리 하거나, 쓰고자 하는 ‘그 무엇’ 즉 내용이 청국장처럼 충분히 곰삭는 숙성(熟成)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집필(執筆) 작업은 힘 겨울 수밖에 없고 작품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요, 좀체 창작 진척에 가속도가 붙을 수 없는 노릇이다.

판소리 ‘심청전’에 나오는 아니리 한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사람의 설움이 어지간 해야 눈물이 나오는 법이지, 기가 차고 멱이 꽉 차면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법이렸다.’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쓰고자 하는 시조작품이 충분히 곰삭아서 저절로 ‘꼭지가 떨어지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해야 하는 일이고, ‘인내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대상(시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숙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취사 선택한 주제나 소재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지고 방계 자료를 찾고, 때로는 관련 책자를 읽고 때로는 관련 영화나 비디오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며, 꿈 속에서 헛소리를 하며, 입술이 다 부르트는 산고(産苦)를 겪으며, 그것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좀체 실감을 못할 수도 있다. 글쓰기란 하얀 원고지를 메워야 하는, 피 말리는 작업이라 하여 ‘백색 공포’라고 했을까.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인ㆍ작가는 모니터의 깜박이는 커서가 마치 “빨리 글을 쓰라고 재촉하며 윽박지르는” 강박감마저 느끼는 수가 있다.

개인에 따라, 그 작품의 주제 및 소재에 따라 천차만별 시차(時差)가 있게 마련이지만, 시조 한 편을 구상하여 손을 털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1주일도 걸리고 한 달도 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조 한 편을 하룻밤 사이에 완성, 쾌재를 부르는 수도 있으나 대체로 1주일 혹은 한 달, 심하면 1년도 가고 2년도 간다. 그러면서 그 작품이 완전히 곰삭아서 꼭지가 떨어지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내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불안ㆍ초조ㆍ조바심 때문에 버둥대는가 하면, 때로는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다.

인스피레이션이 떠오르고, 떠오른 이미지가 숙성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에서, 혹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무수한 정보(情報)를 입력(入力)하고 수정·가필(加筆)하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작품을 줄줄 외우게 마련이다.

드디어 마지막 탈고했을 때의 희열이란! 밤을 꼬박 새워도 성취감에 젖어 절로 신명이 나고 창작 복무 때문에 겹친 피로가 한꺼번에 가시는 것이다.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를 이런 때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기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퇴고와 관련, 이우걸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기로 하자.



● 외우면서 퇴고하기 / 이우걸

<1>
내게도 비밀한 나만의 시조작법이 있다. 그것은 외우기이다. 시조에 접하게 된 계기도 외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외우면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외우는 것이 어떤 면에서 좋은 방법이 되는가. 또, 외우면서 무엇을 고치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2>
나는 초 중학교 시절에 늘 어머니를 위해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야 했다. 어머니는 그걸 외우시는 것이 당신의 낙이었다. 그 낙은 마치 옛 여인들이 기구한 그들의 한을 노래에 실어 물레를 잣듯 시간을 자아가며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시조 두루말이는 그 당시 우리 집에선 어머니의 교과서로 여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교과서를 외우시는 어머니 곁에서 우리 식구들은 혹시 어느 구절이 틀리나 하고 듣고 있었지만 틀리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 나 스스로도 시조를 외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조를 자꾸 외우다 보면 3장 12음보의 형식미를 자연스레 알게 될 뿐 아니라 그 작품이 그려보이는 정경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시조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시조감상 방법대로 지금은 내 시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 감상 과정에서 문제점이 생기면 손질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의 퇴고 방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얘기해야 할 순서가 된 것 같다.

첫째로는 형식에 대한 점검이다. 시조는 두루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형시다. 특히, 자수로 해결되지 않는 운율의 미학을 시조는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수는 맞으나 시조가 아닌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수로는 넘쳐나는 듯한 데도 시조의 형식미를 잘 갖춘 시조가 있다. 이에 대한 감식안은 시조를 많이 외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법이 아닌 비법이다.

두번째로는 동원된 언어에 대한 점검이다. 가령, 격을 낮춘 비어를 발견했을 때 이 비어를 동원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된다. 또 모음의 지나친 반복이나 받침 사용의 문제점, 동어반복의 문제점 등을 따지는 것이다. 지나치게 율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 가벼운 서정시로서는 장점이 될 것이고 무거운 서정시의 경우는 단점이 될 것이다. 또 모음의 반복이 리듬감을 살리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받침의 경우 발랄한 서정시의 분위기를 필요로 할 때는 어휘를 바꿀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로는 내용에 대한 점검이다. 여기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구조의 완결성이다. 시조는 초, 중, 종장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초, 중, 종장은 서로 관계해야 한다. 또, 연시조의 경우 첫 수와 둘째 수 혹은 샛째 수는 독립해 있으면서도 서로 한 시세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서로 관계없는 연시조라면 함께 묶어 같은 제목을 붙일 이유가 없다.



<3>
이제 나의 시조 쓰기 방법을 보이기 위해 몇 편의 작품을 들어보고 싶다.

어릴 때 누나는 창녕에서 자랐고
자라서 누나는 파주에서 살지만
당신은 우리 누나를 욕하지 못한다.

강도 산도 해도 달도 산 자의 인연일 뿐
핏줄처럼 엉켜붙은 잡초들을 후벼파다가
사변이 나던 이듬해 밤차를 타고 떠났다.

이따금 엽서에다 누나는 소식을 쓴다
성한 그, 다리로는 밟지 못할 고향땅에
어머니 추우실까 봐 털옷도 짜 보낸다.

‘우리 누나 - 6·25'

유월 어느 날이었다. 반공 구호가 신문이나 방송 채널에서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이나 TV 채널의 도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에 식상해서 몸서리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시인인 나는 6·25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시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글을 써 본 사람이면 경험하곤 하지만 정말 막막했다. 그 때 얼른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릴 때 아랫동네 한 처녀에 관한 것이었다. 즉, 그 처녀는 6·25 이후 너무 가난해서 거리의 여인이 되어 파주에 살고 있는데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고향 땅 발 못 디딘다."고 외치던 그 처녀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에 노랑머리 남자 아이와 얼굴이 검은 아이를 데리고 몰래 밤에 고향에 왔다가 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6·25의 참상 중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가장 아픈 사건은 바로 죄 없는 이 처녀의 인생사다. 따라서, 실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우리 누나'의 일로 바꾸어 써 본 것이다. 처음엔 제목을 ‘6·25'로 했다가 다시 '편지'로 했다가 최종적으로 '우리 누나'로 바꾸었다.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서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 ‘비’

어느 가을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어떤 사람에게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한번도 부치지는 못했다. 그 때 내가 하숙한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그 지붕 끝에 양철 물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지면 실로폰 소리 같은 게 났다.
대학 2학년 어느 가을날, 나는 다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시조를 썼다. 비상과 하강의 이미지 배치, 그리고 사랑의 감정 - 어쩌면 가을에 내가 만난 비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완성되지 못한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은 씌어진 것이다. 제목도 ‘편지', ’가을 비', ‘비'를 두고 많은 시간을 보낸 뒤 ’비'로 정했다. 고심한 덕분으로 이 작품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4>
이제 다시 좋은 시조를 쓰는 방법으로 돌아가서 얘기해 보자. 나는 그 비법으로 외우기를 들었다. 그렇다. 시조는 특히 외우면서 퇴고해야 한다. 퇴고 기간은 길게 잡을수록 좋다. 어떤 작품의 경우는 창작할 때부터 수작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많은 모순을 안고 태어난다. 그 모순은 퇴고라는 작자의 애프터 서비스를 통해 말끔히 지워지게 된다. 어제까지 몰랐던 작품의 문제점을 오늘 다시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잘 고치면서 느끼는 희열 또한 작은 것이 아니다. 과작이라도 좋다. 시인은 완결된 한편의 작품을 묘비명에 새기기 위해 생애를 투자하는 사람이 아닌가!


외우면서 퇴고한다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시조시인 백수 정완영(鄭椀永) 선생 같은 분은 시상(詩想)의 발상에서부터 탈고(脫稿)까지 전과정을 머릿속에서 외우면서 처리한다고 한다. 그 시조에 걸맞는 시어(詩語)를 취사선택하고 이미지를 풀어내는 언어의 조립, 짜집기, 군더더기 제거, 결구 작업 등 모든 창작 공정을 머릿속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컴퓨터 두뇌처럼 머릿속에서 정리·정돈한 글을 원고용지에 옮겨 적는 정서 작업을 끝내면 한 편의 완결된 시조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완영 선생은 ‘컴퓨터 두뇌'로, 당신이 창작한 모든 시조를 줄줄 외운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창작한 모든 작품을 줄줄 외운다고 하여 천재시인이나 ‘위대한 문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컴퓨터 두뇌 백수 선생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중국 당나라 중엽의 시인 이백(李白 자 太白)은 천성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한 나머지 흥이 나면 곧 시를 창작하는 천재 시인이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을 읊었다고 하니 천재는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태백이 놀았던 당나라 때와 오늘의 21세기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백낙천과 방석에 얽힌 에피소드나,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쓴 헤밍웨이의 이야기, 그리고 작가 이외수, 시조시인 이우걸의 창작 비결(秘訣)은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시나 시조를 포함하여 모든 문학작품을 창작한다는 일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시조의 미진한 대목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꿈속에서도 시조와 씨름하는 절차탁마의 노력 없이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얻어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퇴고, 다시 퇴고를!’ 이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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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 對하여/李敏影

詩心은 무엇인가 詩人의 마음이다
그냥 마음이 아니고
歲月과 歲月
詩와 詩
그리고 그 세월에서 삭이고 묻혀온 詩人=사람의 詩想이다.
혼자가 아닌 님의 노래인것이다.
詩에 대한 사람의 感이자 想이요,
像이요,
人生을 바라보는 시선=哲學인것이다.
그래서 철학이라 한다,
그래서 시를 쓰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곧잘 성경을 보라하며.불경을 보라하며
朱程子東洋思潮의 書冊들을 보라 하며
思想家들의 文集을 권한다.
학교 다니면서 우리들의 先生들이 수없이 이야기 하는 말이다.
그렇다.
사는 만큼 들려온 만큼
詩에 나타낼수있는 그만의 詩心이 없어서랴
詩에 나타나는 그만의 독특한 詩感이 없을수있으랴
오늘 여러분들에게 詩의 詩心은,
詩人의 詩的態度를 근본으로 하는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떠밀려 오는 학문이 아닌,
담는 감정이 아닌,
스스로 터득하고 베어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현확의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라
개성이 있으며
마음이 있으며
노래가 있으며 그리고 애원이 있단다.
신경림은 그 나름의 아기자기한 自我에 對한 反復되는 疑問과의 對話를
文貞姬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세상에 對한 인간적 포용을 이야기한다.
高銀은 무엇인가 그도 사랑의 울안에 있단다.
정호승 그는 무엇인가
그는 人生에 대한 나름의 直答을 은유하는 事像의 詩이다.
무릇 도종환 이성복 곽재구 최해춘 등등도..

모두가 詩의 철학이다 어디 한순간에 이루어지랴..
이야기 하고자 한다

詩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詩人의 삶에서 온다
삶은 사랑이다
사랑의 마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 전부이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사랑의 태도이다.
格이 없는 그리고 多情의 마음이다.
주저함도 없다 그냥 가는 것이다.
그래야 詩에 흐른다 내 사랑이 흐르고 차져서 속에서 흐른다.
사랑이 흐른다.
詩가 이야기한다
詩가 노래한다.
마치 人生을 達觀한 知天命의 나이처럼 哲學者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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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적 시창작론 >>

- 최영철


- 제1장 -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시를 쓰는 데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시를 잘 쓸 수 있다'정도로는 안되고 '나는 시를 잘 쓴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습작시절에는 자기 시의 어줍잖음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의 완벽함에 곧잘 절망한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자. 안되면 매일 아침 '나는 정말 미치도록 시를 잘 쓰는 놈이야'하는 자기 최면을 반복해도 좋다. 그러나 자만심은 금물이다. 자신감은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만 필요한 강정제 같은 것이다. 일단 다 쓴 작품에는 일이 끝난 뒤 거시기가 스르르 풀이 죽듯이 기가 죽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출판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시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천재시인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편을 갈겨 쓰며 집에는 이만한 분량의 작품이 또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벌린다. 이런 시인일수록 자기 시가 한국시사를 바꾸어 놓거나 출간만 하면 공전의 대히트를 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다. 자기 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흥에 겨워서 계속 써 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천재시인들에게는 약도 없다. 계속 천재로 착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법뿐이다. 그 천재시인 출판사 문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아, 천재는 외로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자신감은 없고 자만심만 있는 엉터리 시인인지 모른다. 아니 나는 아직 그런 알량한 자만심조차 없다. 쓰기 전이나 쓰고 나서나 내 재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주눅이 든다. 그러나 이런 의심조차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기나 했을까.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계속 턱걸이하며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이 '나는 도대체 시를 쓸 재주나 있는 놈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때마다 나의 자문자답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했다. 10년을 하면 사법고시라도 붙을 판인데 돈도 명예도 안 되는 시인 자격증 하나 못 따는 걸 보면 글렀구나 싶다가도, 사법고시에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으니 이런 초지일관이면 뭐가 되도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란 말의 뜻을, 하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는 능력이라고 새롭게 정의 해 버렸다. 즉, 재능은 그 분야의 특별한 재주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받는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것 때문이라면 추위와 굶주림도 참을 수 있고 멸시와 외로움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 그것 이외에는 세상 모든 것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 이런 경지가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 부여된 경지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재능도 세월 따라 닳아 없어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밖에 없다. 그 시절은 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 고통이 조금씩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반성하고 있다.


<요점정리>

1.자신의 재능을 추호도 의심해 본 일 없는 천재시인들은 이제
부터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의심하라.
2.자신의 재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 같은 어중개비 시인들
은 매일 아침마다 '나는 시를 너무 미치도록 잘 쓴다'는 최면
을 걸어라. 그 최면이 통하지 않으면 계속 절망하라. 시 때문
에 절망하는 한 당신은 누구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시인
이다.


- 제2장 -

시 창작 강좌 같은 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씨뿌릴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을 느낀다. 우선 내가 지독히도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체형이 숏다리이기 때문이고, 남에게 시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할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럽게 '시를 못 쓰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한참 떠들다가 말문이 막힐 대는 수강생 중에 누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린다.

'야, 그만해라. 너는 뭐 짜다라 잘 쓰니.'
그러나 나도 할말은 있다. '시는 배우는 게 아닙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엉터립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자기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주워섬기고 나는 단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우둔한 강의를 은폐하는 비법이다.

나는 순전히 혼자서 시를 썼다. 그 흔한 문예반도 백일장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 시 잘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유치한 대로 써 나가다 보니 그런대로 최영철적인 언어와 최영철적인 어법이 자리를 잡았다. 남의 시의 장점을 흉내내고 고운 말을 달달 외우기라도 했다면 내 시가 지금처럼 험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 잘 써서 100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시는 몸 전체에서 우러나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소설처럼 작업이 될 수 없다.

시를 잘 쓰려는 노력보다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 노력하는 게 좋다. 자기 몸 전체가, 생의 편편들이, 웅웅거리는 가슴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게 좋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주로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남들이 무수히 쏟아놓은 애찬과 탄식의 언어를 동어 반복할 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 '내가 또 있어야 하는'이유를 빨리 찾는 게 좋다. 그것이 자기 것이며 자신이 가장 잘 서낼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주제에 어울리는 것이다.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요점정리>
1.시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
라. 그래도 시가 안되면 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 것.

2.시를 알기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알아라. 자기 주체가 성스러
우면 성스러운 시를, 자기 주체가 상스러우면 상스러운 시를.


출처: 계간시와 시학22호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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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詩作의 뜻

千祥炳


詩作의 意味를 大體로 밝히겠다.
한 편 한 편의 詩作노트를 지면관계로 쓸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詩作 과정은 쓸 수 있다.
나는 詩를 文學의 王이라고 생각한다.
文學이라고 하면 장르도 많다.
小說도 있고 수필도 있고 아동문학도 있고 희곡도 있고 가지가지다.
그런데 詩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것이다.
詩는 가장 眞實하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詩는 詩가 아니다.
詩는 가장 眞實의 眞實이다.
우리는 眞實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기쁨도 眞實의 한 意味이다.
나는 웃음을 좋아한다.
金柱演이라는 평론가는 詩評에서
나의시를 두고 웃음이 안 나올 수 없다고 評했는데,
웃음이 나오는 詩를 나는 일부러 쓴 적이 없지만
그래도 유모어를 감각할 수 있는 모양이다.
여러 독자들이여,
우리는 眞實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人生의 진실은 여기 저기에 깔려 있습니다.
이것을 表現하는 것이 詩입니다.
詩를 읽고 짜증을 낸다면 그 詩는 가짜입니다!
나는 이런 시는 쓰지 않았다.
되도록 人生의 참뜻을 알리려고 했다.
나는 詩를 短時間에 쓰는 편이다.
그러나 쓸 때 만이 短時間이지
그 詩를 구상하는 데는 많은 時日이 걸린다.
한 번 着想을 하면 이렇게 쓸까 저렇게 쓸까 많은 時日이 걸린다.
詩作 노트는 그 詩의 生命이다.
이렇게 되어서 이 詩가 생겼소,
하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本質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詩를 人生의 本質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 가지 일에 充實해야 한다.
그래서 우수한 作品이 만들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없어서 그런지 더욱 고독하다.
이 고독을 克服하자면 자연히 든든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굳세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센 마음으로 이 人生을 솔직하게 대하고,
굳세어야 하는 것이다.
굳세자니 冊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冊을 많이 읽는 것 뿐만 아니라 생각도 많이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詩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
가깝게 지내자니 자연히 詩와 관계가 많아진다.
그래서 詩人이 된지도 모른다.
詩人인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가치없는 일에 사로잡힐까 그것이 걱정이다.
되도록 人生에 큰 무게를 주는 事實에 치중하여
그것을 詩에 反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독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음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나의 絶對한 存在이다.
나는 고독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고독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면
언제나 고독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詩에서 무고독을 생각하는 것은 일면의 眞實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있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고독하지 않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신다.
나는 언제나 詩를 나의 生活 주변에서 찾는 것이 버릇이다.
生活 주변을 보면 詩가 구르고 있는 것이다.
生活 주변은 항상 詩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여러분 똑똑한 눈으로 생활 주변을 보면 시가 구르고 있는 것이다.
생활은 넓다.
가만히 혼자 있어도 詩는 있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는 한 詩는 언제나 구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잡기만 하면 詩는 태어난다.
나는 生活을 사랑한다.
하잘 것 없는 일상에서도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많은 것이다.
이런 일상의 습성에서 나는 용케도 시를 잡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하잘 것 없는 물건이나 사건에서조차 詩를 찾는 나는
풍부한 詩的 素材를 잡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나는 많은 테마를 얻는 것이다.
나의 家族이라고는 아내 단 한 사람 뿐이고 쓸쓸한 편이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順從하는 나는 외롭지 않다.
너무 외로우면 詩를 못 쓰는 것이다.
이거나 저거나 다 나와 無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는 幸福한 것이다. 돈도 못 벌고 아내 밖에 없는 내가 비교적 낙관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생활은 복잡하지만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정리하면 아주 단순한 것이다.
생활을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詩의 素材는 意味있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무렇지도 않는 일에서 나는 깊은 의미를 찾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하여튼 나는 나의 生活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멋을 찾고
그리고 그것을 形象化한다.
그래서 하찮은 일에 나의 詩가 되는 것이다.
아무쪼록 나는 맑은 눈으로 生活을 直視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찮은 것들에서 나는 詩를 찾고 있다.
그래서 生活은 나의 詩인 것이다.
나는 音樂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도 古典音樂이다.
그래서 나는 詩를 쓸 때면
언제나 KBS의 FM 방송을 틀고 귀를 기울인다.
이 방송은 하루종일 고전음악을 방송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은 詩想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합당한 語句를 提供하는 것이다.
음악없는 나의 詩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아름다움은 詩의 生命인 것이다.
世界는 복잡하다.
전쟁도 있고 平和도 있는 이 世界의 소용돌이야말로
우리 生活感情을 복잡하게 하지만
精神만 똑바로 세우면 간단한 것이 된다.
그 영향이 생활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일에서 생활은 영향을 아니 받을 수 없다.
이 영향관계도 생활 속에 미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활을 직시하면 이런 것들이 모두 판가름 나는 것이다.
하여튼 생활을 직시할 일이다.
人生은 生活인 것이다.
人生의 眞實이란 생활 안에 있고 그리고 그 표적인 것이다.
나의 옛날의 詩에 「푸른 것만이 아니다」란 시가 있다.
푸른 빛깔 속에는 푸른 빛깔만이 아닌 다른 색깔도 있다는 시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사물 속에는 한 가지만이 아닌 것들이 있는 것이다.
어쨋든 나는 나의 믿음과 生活이 나의 詩의 根本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곧 나의 詩的態度이며 根本인 것이다.
우리는 詩를 읽으면서, 어렵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쉽게 판단해야 한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詩는 시가 아니다.
수필적으로 읽을 수 있는 詩가 좋은 詩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소로운 일에서 人生의 根本을 생칵케 하는 것이 시다.
믿음과 生活은 詩의 根本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려운 말이 介入할 여지가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믿음은 絶對者에 대한 신앙이다.
이 世界의 本質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絶對者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모른 체 살 수 가 있겠는가?
맏음은 나의 人生의 最高의 原理이다.
이 原理原則을 빼고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나로 말하면 이 原理 없이는 너무나 無力한 存在인 것이다.
그래서 敎會에도 나가고 詩를 쓰는 것이다.
이 詩集에는 신앙시가 없다시피하지만
딴 詩에서도 그것을 깊이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자부한다.
이 詩集에는 요새 쓴 詩와 예전에 쓴 詩가 섞여 있지만
독자들은 그런 줄 알고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번 이 詩集이 세 권 째 詩集이다.
나의 55세에 시집이 세 권 뿐이라니 좀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불쌍한 시인이지만 나는 후회없이 열심히 살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人生의 幸福인 것이다.
나는 가난하고 슬퍼도 행복한 것이다.
그 나의 행복의 결과가 이 시집으로 태어난 것이다.
행복이란 딴 것이 아니다.
언제나 가슴 뿌듯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사소한 일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건 행복이다.
내가 그런 것이다.
여러분이 시집을 읽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신다면
필자에겐 더한 기쁨이 없겠다.
아무쪼록 시간나는 대로 읽으셔서 기쁨을 억지로라도 찾아 주십시오,
하는게 필자의 바램이자 소망입니다.



- 펌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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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하영론)

     

                                                       유  재  천(경상대학교 교수)

     

     

     

    1. 실상사 처마 밑의 물고기

    절간 처마 밑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물고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푸른색 소리로 쏟아내고 있다. 사찰에서 물고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들어 목어는 물고기가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정진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또는 물 속의 생물을 제도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보더라도 절간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치환은 깃발에서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아이러닉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했지만 물 속에 있어야 할 물고기를 절간 지붕 처마 밑에 처음 매달아 놓은 사람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영 시인이 노래하는 그리움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지상적 존재로서의 시인의 생에 대한 끝없는 슬픔과 연민이 깔려 있다.

    실상사 대웅전 처마 끝에는
    등푸른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그의 슬픔이 너무 맑고 고와
    자세히 살펴보니
    아가미가 움직인다
    지느러미도 움직인다
    이곳에는 강도 바다도 없는데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너의 바다는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내면서도
    시퍼런 가슴을 열고 내려다보는
    저 가을 하늘
    너는 저 높은 하늘로 날아가서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던져라
    갸날픈 네 등에 실한 날개 돋아나도록

    맑은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마주선 장승이 가을비에 젖는다
    천년 만년 젖던 그대로 젖는다
    나도 돌이 되어 함께 젖는다
    아, 내 작은 날개도 젖고 있구나.
              ―작은 날개가 젖는다

    「작은 날개가 젖는다」는 실상사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피안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물고기는 이 지상 세계에 던져진 비극적 존재로서 인간을 상징한다. 처마 밑에 매달린 청동 물고기는 물고기의 집인 바다에서 추방당한 존재이다. 추방당한 존재인 물고기는 끊임없이 바람에 일렁이며 추방당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소리내어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처마 밑의 물고기가 추구하는 바다가 실제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다. 물고기가 그리워하는 곳이 실제 바다가 아니라는 것은 이 물고기가 물고기가 아니라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의 객관적 상관물임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퍼렇게 녹이 슨 처마 밑 물고기의 청동 색은 등 푸른 물고기로, 등 푸른 물고기의 푸른 색 이미지는 시인에게 슬픔으로 인지된다. 물고기의 슬픔은 물고기가 바다가 아닌 대웅전 처마 밑에 있다는 것, 즉 바다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라는 데 있다. 바다로부터 추방되어 있지만 이 물고기의 내면 속에는 푸른 바다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고기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아가미를 움직여보고 지느러미를 흔들어보며 쉴 새없이 움직이면서 쨍그렁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바람은 이 유전자를 일깨우고 본성을 자각하게 하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2연은 물고기가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바다, 즉 하늘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처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물고기에게 으름장을 놓는 공포의 대상이다. 바다가 검은 구름이나 성난 파도 등과 같이 존재를 집어삼키는 공포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하늘이 공포의 대상으로 사용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비밀은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에서 해결된다. 가을 하늘,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가을 하늘은 온갖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퍼런 가슴을 열어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상적 존재인 인간이 그 투명한 청정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높푸른 가을 하늘은 물고기에게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물고기의 지상적 한계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돌아가는 것은 모든 욕망을 던짐으로써 가능하지만 지상적 존재로서 물고기로서는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공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신들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한 고고학자는 거대한 컴퓨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컴퓨터에 특정 날짜와 시간에 다시 합체되도록 명령을 주고 해체시키면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던 각 부품들은 해체되어 다시 합쳐지기 전까지는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처럼 작동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 다시 합체되면 서로 무관한 개체들로 보였던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드러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할 때 우주 속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영의 시에서 사물과 인간 내면 속에는 우주의 한 조각이 각인되어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 조각과 우주는 서로 부르고 찾는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듯 마음 속에 간직된 불성이 부처를 향하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다.

    굳게 닫힌 창을 열고,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고, 입술을 포개어 취하게 하더니, 슬그머니
    손목 잡아 끌고, 봄 들판에 나와

    나처럼 가벼이 날아 보아라
    나처럼 부드러이 살아 보아라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아지랭이

    시인은 「아지랭이」에서 사물과 인간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자락과 우주 사이의 교감, 감응을 노래하고 있다. 봄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눈에 잡힐 듯 말 듯,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겨울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사람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 뿐 아니다. 그것은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모든 사물들의 생명을 불러내고 꽃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사물과 화자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는 아지랑이가 머리를 쓰다듬고 볼 비비고 입술 포개 취하게 하고 슬그머니 손목 잡아끌어 당김으로써 봄 들판으로 불려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지랑이는 사물과 인간의 내면 속에 깊이 잠복된 유전자를 일깨울 뿐이다. 일깨워진 유전자는 지상적인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아지랑이는 「작은 날개가 젖는다」의 바람처럼 굳게 닫힌 화자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어 우주와 하나되게 하고 황홀경에 들게 하는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우주적 힘의 상징이다. 이런 만물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과 시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할미새는 시를 모른다
    시를 몰라도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영혼이 맑게 우는 것은 시다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노랑 할미새의 울음을 보던 날
    달맞이꽃을 생각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듯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나 파블로 네루다를 그리워한다

    달맞이꽃의 서원이
    달에 닿아 별에 닿아
    서로의 눈물을 나눠 마시며
    월견초나 월하향, 혹은 야래향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정겨웁게 서로를 부르듯
    채송화꽃이, 쬐끄만 씨앗으로 이 땅에 와서
    색색의 꽃잎으로 기쁨을 나눠주듯
    눈물은 내 삶을 든든한 뿌리로 자라게 한다
    절망을 먹고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면
    절망은 더 없는 자양이 된다

    절망의 절망에게 할미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도
    노랑 할미새나 알락할미새를 날려 보낸다
    그리움을 아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밤.
              ―할미새

    「할미새」에서 시인은 할미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라고 즉각적인 감정이입을 일으킨다. 즉각적인 감응이 가능한 것은 시인과 할미새의 내면에 우주의 한 자락이 각인되어 있어서 할미새의 울음과 지상적 존재로서 자신의 슬픔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할미새의 울음 소리를 듣고 할미새의 슬픔과 그리움을 이해한다. 시인이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한 것처럼 할미새의 울음은 할미새도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 즉 맑은 영혼의 울음이라고 한다면 할미새의 울음 역시 시인 셈이다.
    이러한 할미새와 시인의 시 사이의 등가적 결합은 다음 연에서 달맞이꽃의 서원으로 확대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시인이 미스트랄이나 네루다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근본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간절한 그리움들이 영혼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그 영혼의 울음이 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피안의 세계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것을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한 것도 그 때문이다.
     

    3. 주왕산 단풍

    하영 시인의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항상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그리움과 슬픔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리움이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된 것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슬픔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인간 존재의 내면에 간직된 거대한 슬픔과 비원에 마주친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는
    이쁜 손길에 머물기로 하네

    믿음과 믿음
    서원과 서원으로 탑을 쌓아
    저 먼 별에까지 닿고자 했던,
    천불 천탑으로 징검다리를 놓아
    미륵의 나라로 가고자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
    한 단 한단 소망을 쌓아올린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저 탑을 딛고 가면
    등 돌리고 돌아서는 마음 밭마다
    바라밀의 꽃씨를 뿌릴 수 있으리
    그리하여 마침내 불국토에 닿을 수 있으리

    나 오늘 이곳에 머물러
    돌에서 자고 돌에서 깨어나고 싶네
        ―운주사에서; 원은희 시인에게

    운주사는 화순에 있는 천불 천탑, 와불로 잘 알려져 있는 절이다. 천불 천탑이란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불탑을 가리키는 말로,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하룻밤 사이에 배의 돗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91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이 남아 있지만 야트막한 구릉과 벼랑,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게 되는 서민들의 얼굴을 닮은 미륵불들은 당시 서민들의 미륵 세계에 대한 염원과 지상적 존재로서의 슬픔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불탑들과 불상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미륵세계에 대한 비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단 한 단 탑을 쌓아 저 너머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염원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 그리움의 장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고 그 돌 위에서 자고 돌 위에서 깨어남으로써 그들의 아름다운 소망을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에게 운주사는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인간의 비원을 형상화한 거대한 예술작품인 셈이다.
    주왕산 가을 역시 인간 존재의 슬픔과 비원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나 이제사 알겠네

    상처와 상처가 어울리면
    깊은 상처가 더 깊은 상처를 끌어 안으면
    따뜻한 이웃이 되고 정겨운 마을이 되는 것을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그대로 선혈을 쏟고 마는
    담쟁이 덩굴 그 붉은 울음 위에
    영혼이 맑은 가을 물소리가 머물다 가네
    늦가을 잘 익은 햇살 한 줌도 머물다 가네

    잘 아문 상처는
    여운이 길어 오래 남는 징소리처럼
    따뜻한 노래로 오래 오래 남을 수도 있다네


      첩
        첩

    단풍 단풍 단풍
           ―가을 周王山

    주왕산은 기암 절벽으로 유명한 산이다. 시인에게 이 기암 절벽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이상세계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그 상처로 인식된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은 지상 세계를 벗어나 이상 세계로 향하는 인간의 욕망과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선혈을 쏟는 담쟁이 역시 기암절벽과 등가적으로 결합되어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염원과 몸부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 도달하려는 이 몸부림은 끝내 좌절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던 절벽들은 끝내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골짜기, 골짜기를 이루며 상처를 드러내고 만다. 절벽을 오르던 담쟁이가 선혈로 쏟아낸 것들이 단풍이다.
    여기서 주왕산은 저 너머 세계를 지향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원과 슬픔을 간직한 거대한 수도원으로 변하게 되고 주왕산의 아름다운 단풍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과 한계를 형상화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하영의 시는 비극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인간은 지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천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하영의 많은 시들은 이러한 이원적 존재로서 인간의 비극과 슬픔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하영의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슬픔이 인간의 운명적 비애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유마경에 보살의 병은 슬픔이라고 했다. 보살은 이미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불가의 말이다. 슬픔은 깨달음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으로 인해 생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고 깨달음을 얻으면 더 큰 슬픔으로 중생들의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 활동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노래하는데서 나아가 더 큰 슬픔을 깨닫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천착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적극적으로 저 너머의 세계로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메모 :
요절한 시인들이 보여준 죽음의 방식과 그 의미
 
 
계간 [시인세계]의 기획특집 <시인의 요절과 마지막 시>
- 2003 여름 통권 제4호 특집      
 
정 효 구 | 문학평론가
 
 
 
         

 
 
  1 글을 열며
 
김소월, 이상, 윤동주, 박용철, 이장희, 임홍재, 신동엽, 김수영, 고정희, 기형도, 박정만, 이연주, 진이정……. 우리 시단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라면 방금 열거한 시인들의 성명을 보고 필자인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방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굳이 말을 꺼내자면, 위에서 열거한 시인들은 하나같이 길지 않은 생애를 보내고 잽싼 걸음으로 이승을 하직한 시인들이다. 이런 시인들을 가리켜 우리는 ‘요절시인’이라고 칭하거니와, 그런 시인들의 시와 삶 앞에서 우리는 각별한 감정과 끝나지 않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요절한 시인이든, 장수한 시인이든, 평균 수명 정도를 표나지 않게 살다 간 시인이든, 이런 모든 시인들을 포함한 인간들 하나하나의 죽음은 그 모양도 백인백색일 뿐만 아니라 그 의미 또한 백인백색이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죽음에 대한 연구가 인간사를 깊이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죽음의 연구를 지속하다 보면, 사는 일 만큼 어려운 일이 죽는 일이며,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긴박한 문제는 삶의 그림자 혹은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저 죽음이란 존재와 어떻게 투쟁하고, 대면하고, 대화하고, 타협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 세상을 일찍 떠남으로써 숱한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히도록 만든 5명의 시인 ― 고정희, 기형도, 김남주, 박정만, 진이정 ― 과 관련하여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는 오랫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관념적인 죽음이 아닌, 실존적인 육체의 죽음 앞에서 나는 말을 장황하게 풀어놓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으며, 일찍 찾아온 그들의 죽음이란 그림자 앞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맞대결할 용기가 쉽게 솟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잘 달래며, 그리고 인간과 역사와 시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내 마음 속에서 회복시키며, 그들의 그림자를 고요히 끌어안고 발효시키다 보면 승화의 숨은 신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 글을 힘있게 밀어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 역사와의 대결에서 실족한 비극 ―고정희
 
고정희는 역사를 믿는 시인이다. 고정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고정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며 현실 속에 뛰어든 시인이다. 고정희는 그가 믿는 기독교까지도 이러한 역사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없다고 믿는 ‘역사주의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엔 항상 미래를 향한 희망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엔 역사를 살리고 인간을 살려내려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시엔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역사 속의 인간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교훈적 선동성도 가득하다. 더 나아가 그의 시엔 왜곡된 역사, 파행적인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정의감이 가득하다.

이런 고정희의 내면세계와 행동 그리고 그의 시를 통하여 분출되는 강한 의지력을 읽고 있노라면, 역사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현장 속의 진행형 동사임을 절감하게 된다.

고정희, 그는 평생을 젊게 산 시인이다. 그가 쓴 시의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그리고 그가 살아온 생애의 어느 시간을 보더라도 그는 청년처럼 싱싱하고 건강하였다. 그는 진행형 동사의 형태를 띤 역사의 중심부 혹은 최전선에 자신의 위치를 정하였고, 그 위치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정의의 역사를 만들어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가 이처럼 진행형의 형태를 띤 역사의 중심부 혹은 최전선에 자신을 의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세우면서 내공을 키우듯 스스로의 안팎을 무장하려고 노력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매년 계속된 ‘지리산 등반’이었다. 그러나 그가 매년 하나의 의식儀式처럼 행한 지리산 등반은 그로 하여금 갑자기 불어난 홍수 속에서 실족을 하게 만듦으로써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가 믿는 기독교 야훼 하나님에게 항의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식처럼 치러진 그의 지리산 등반과 그에 포함된 적극적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리산 등반도중 생명을 잃은 그의 비극은 수많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그의 지리산 등반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리산은 어떤 산인가. “아! 지리산!” 하고 외칠 때, 우리는 그 외침으로부터 남다른 느낌과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까닭은 지리산이 인간과 관련된 무수한 삶과 역사의 내용들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고정희가 지리산을 오른 것은 물리적인 산으로서의 지리산을 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오른 것이고, 그럼으로써 역사의 기운을 몸속 깊은 곳까지 흡수하고자 한 것이며, 그 힘으로 역사의 미래를 희망의 세계로 바꾸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를 실족사시킨 지리산 계곡의 홍수처럼, 역사는 선한 의도까지도 무력화시키고 배제시킬 만큼 폭력적일 때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그 역사와 맞서서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역사의 횡포까지도 감내할 만한 용기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든 것이 역사라고 불리움에도 불구하고, 역사란 어찌 그렇게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엄청난 문제 앞에서 역사와 대면한 고정희는 안타깝게도 실족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여기서 그의 실족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그는 분명 외형적으로 볼 때, 실족을 통하여 역사 바깥으로 주검이 되어 밀려난 존재가 되고 말았지만, 그는 그 실족에 의하여 역사의 물결에 온몸을 던지면서 역사의 온전한 회복과 발전을 꿈꾼 것이라고……. 그렇게 볼 때, 고정희의 실족사는 한편으로 비극의 형태를 띠지만, 다른 한편으론 영웅의 승리와 같은 성공담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 시단은 한동안 허전하였다. 여성시단은 물론 민중시단, 더 나아가 기독교시단까지 허전함을 메우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그의 역할은 컸었던 것이고, 그런 만큼 그의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수많은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3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질식한 생 ― 기형도
 
기형도의 시집처럼 어두운 시집이 또 있을까. 세상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이 시집에 모여들었듯이 그의 시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캄캄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집을 열어보는 일은 어둠과 대면하는 일이었으며, 그의 시 한 편 한 편을 읽는 일은 어둠을 만나고 판독하는 일과 같았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어둠의 세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슨 일로 인하여 세상의 어둠이 그의 영혼 속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강렬하게 몰려들어갔을까. 시대적·사회적 분석도 필요하겠지만, 특별히 생애사적 탐구와 심리학적 탐구를 필요로 하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어둠에 목이 콱콱 막히는 체험을 반복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그의 시집 속에 자욱한 안개처럼 스며 있는 그 어둠의 유혹과 마력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겐 어둠의 세계에 잠기고 싶어하는, 아니 어둠의 세계를 관음증 환자처럼 훔쳐보고 싶은, 아니 어둠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기형도 시에 그토록 강하게 이끌리는 비밀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쯤해서 인간이 가진 죽음의 본능을 떠올린다.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 속에 있으면서 상호 모순관계를 유지하거나 상호 공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무엇인가가 한 편에 유리한 계기를 이루게 되면, 이들 두 본능 중 하나의 본능이 월등하게 우세해지며 다른 하나를 억압한다. 기형도의 경우 죽음의 본능이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삶의 본능을 억압한 형국이거니와, 그 거대해진 죽음의 본능에 저당잡힌 한 인간이 마침내 자기자신을 죽음 그 자체로 만들어버린 경우가 기형도의 예이다.

삶의 본능도 강력하고 교활하다. 그러나 죽음의 본능도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하고 교활하다. 너무나도 순진하고 결백한 한 인간의 영혼은 죽음의 본능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아니 너무나도 깊이 사색하고 너무나도 진지한 한 인간은 그 스스로 죽음의 본능을 불러들일 수 있다. 나는 기형도를 보면서 이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본다. 그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결백한 한 청년이었으며, 역시 ‘너무나도’ 깊이 사색하고 진지한 한 젊은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죽음의 본능이 유혹하면 삶의 본능을 불러오고, 삶의 본능이 조증躁症의 환자처럼 나부대면 죽음의 본능을 슬쩍 불러들이면서 이 양자 사이의 줄타기를 유연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지혜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인가.

그런 점에서 기형도는 지나치게 고지식했다. 그는 자학하듯 죽음의 본능이 부르는 소리 쪽을 끝까지 따라갔다. 끝이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그 끝을 요령도 부리지 않고 따라가다니……. 적당한 자리에서 멈추었어야 할 그의 행보가 ‘끝까지’ 이어짐으로써 그는 시로써 죽음의 노래를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육체적 죽음까지 감행하고 만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는 동안 죽음의 본능이 만들어내는 안팎의 수많은 죽음에 온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일이다. 죽음의 본능은 끊임없이 세포증식을 일으키며 한 사람을 어둠 속으로 익사시킬 만큼 괴력을 갖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죽음의 본능이 삶의 본능을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 시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그러니 너무 이른 나이에 조로한 얼굴로 죽음의 본능 쪽에 몸을 맡길 일이 아니다. 죽음의 본능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승화시키는 일은 필요할지 모르나, 죽음의 본능 안쪽으로 무작정 발길을 들여놓고 출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일은 안타까울 뿐이다.

기형도는 보통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가서는 곤란한 죽음의 본능 쪽으로 지나치게 멀리 갔다. 그것을 우리가 바라보는 일은 두렵고 불안하면서도 우리의 욕망이 지닌 어떤 부분을 자극시켜주고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사는 일은 막고 싶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죽음의 본능에 이끌렸을 때, 우리는 보통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보통 사람으로서 세속의 마당에 남아 적당한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삶은 진부하지만, 진부한 것이 세속사라면, 그것을 용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형도와 같은 삶에 무한한 경외감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보통 사람인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올 때까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묵묵히 영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이상주의자가 받은 형벌(?) ― 김남주
 
김남주의 시와 그의 생애를 보면서 나는 이상주의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김남주는 누가 뭐래도 근본적으로 이상주의자였고, 그 이상주의자의 꿈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는 고귀하다. 이상주의자는 순결하다. 이상주의자는 정의롭다. 그러나 이상주의자만큼 위험하고, 이상주의자만큼 외롭고, 이상주의자만큼 결핍감에 사로잡히는 자가 또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세속의 찌든 시장터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전선 같은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자가 나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고귀한 일이다. 어떻게 드높은 이상주의자의 꿈을 설정하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몸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이상주의적 속성은 사람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상주의자의 꿈을 위하여 순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김남주가 가진 이런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면서 나는 그가 변혁시켜 완성시키고자 한 역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역사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역사는 발전하는가. 인간은 역사를 발전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진정 역사는 인간 편에 서 있는가. 역사는 어쩌면 인간에게 복수를 가할 만큼 난폭하고 무정한 존재는 아닌가. 어떻게 하면 역사를 믿고 역사 속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을 지닐 수 있을까. 유토피아는 과연 실현가능한가. 그 유토피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이외에도 무수한 물음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자. 그리고 김남주가 이상주의자의 열정을 바치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간 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로 하자.

김남주는 사회주의자였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넘어서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순결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으로 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면서 이 땅에 그가 유토피아라고 믿는 사회주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남주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박노해가 말하듯이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나름의 의미와 참뜻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회주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점이 아니라, 그 사회주의의 나라가 옳다고 믿으며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신뢰한 김남주야말로 이상주의자의 전형이었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이런 김남주는 사회주의라는 종교 앞에서 순교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순교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것을 믿고 옹호하든지 간에 거의가 이상주의자임이 틀림없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지 결코 순교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교란 한편 비장하다. 그러나 순교란 다른 한편 어리석다(?). 관념 이전에 육체가, 유토피아 이전에 현실이, 미래 이전에 지금 이곳의 삶이 진실일 터인데 그 관념을 위하여, 유토피아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인 김남주, 그는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가 받은 형벌 앞에서 우리는 그의 이상세계에 동의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아픔을 느낀다. 세속사회와 적당히 타협하며 그 속에서 유연하게 처신하면서 세속의 단맛에 인생을 맡겼다면 그런 고통과 때이른 죽음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의 냉정함과 교활함을 모른 채, 우직하게 이상주의자의 꿈을 삶의 한가운데에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 심란해진다. 그가 이 세속의 땅에서 당해야 할 고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다.
 
 
 5 정치적 폭력에 짓밟힌 개인 ― 박정만
 
정치적 폭력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폭력혁명으로 세력을 거머쥔 주체가 이 땅에 자신들을 태양으로 삼아 움직이는, 이른바 독재정치의 새판을 짜려고 폭력을 계속하여 휘두를 때, 개인은 그 아래서 개미 한 마리보다 나을 것이 없을 때가 많다.

새판을 짜려는 독재자들은 잔인하다. 그들이 새판을 짜는 데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두 금 밖으로 몰아내며 공포정치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박정만의 생애를 보며 나는 새판을 짜려는 독재자들의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진 한 개인을 본다. 주지하다시피 박정만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고문과 횡포로 인하여 어느날 직장과 건강과 가정을 다 잃어버린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다. 그는 좋은 서정시인이었고, 그는 한 출판사의 책임감 있는 직원이었으며, 그는 한 가정의 따스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언로를 감시한 전두환 정권의 폭력 앞에서 한 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는 폭력정치가 내두른 몽둥이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정만은 소위 ‘한수산 사건’에 아무 잘못도 없이 그야말로 ‘우연하게’ 연루되어 고문을 당한 이후에 폭력적인 정권을 저주하며, 폭력적인 역사를 두려워하며, 폭력적인 인간에 분노와 좌절을 느끼며, 정치와 역사와 인간의 ‘저쪽’ 편에 그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가 마련한 그 자리에서 그는 그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냈거니와, 그것은 서정시 쓰기와, 술마시기와, 우주를 사모하기였다.

박정만은 서정시의 대가이다. 나는 그가 그토록 폭력적 정치의 희생물이 되었으면서도 어떻게 결이 고운 서정시만을 써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서정시 쓰기는 폭력정치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방식이며, 폭력정치에 대한 적개심을 가라앉히는 방식이며, 폭력정치에서 오는 좌절감을 껴안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정시 쓰기는 그를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줬을 것이다. 이런 서정시 쓰기로 인하여 그는 잠시나마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과 다른 곳에서 지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정시 쓰기는 그를 지탱하게 만들어준 중요한 요인이었다.

박정만의 서정시 쓰기와 더불어 언급돼야 할 것은 그가 마신 엄청난 술에 대해서이다.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죽였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술을 밥처럼 먹고 마시며 고문 이후의 생을 살아냈다. 이렇게 술병을 옆구리에 끼고 생의 보폭을 옮긴 박정만은 명실공히 ‘술의 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더 이상 폭력정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 사람이기를 거부하고, ‘술의 나라’ 속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이다.

독재자의 폭력정치는 이렇게 건강한 한 개인을 ‘술의 나라’로 밀어넣어버렸다. 그 속에서 박정만은 이성 너머의 혹은 이성 이전의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은 그로 하여금 시의 귀신에 들린 사람처럼 시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술의 나라에서 서정시 쓰기, 그러나 이것도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 영토에까지 가끔은 독재자의 폭력정치 소리가 들려오고, 그 영토에 머물면서도 가끔은 독재자의 폭력정치가 가한 아픔으로 치를 떨 때가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독재자의 폭력정치가 아예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더 멀리 거처를 옮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로 무화시키는 일이다. 아니 풀어놓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이며 그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것이야말로 ‘죽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박정만은 세상을 버렸다. 그는 이 세상을 버리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종시(終詩)」의 전문
 
‘광활한 우주’ 속으로 거처를 옮긴 박정만, 그는 이제서야 지독한 독재자의 폭력 정치가 난무하는 땅으로부터 비로소 온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죽음을 보면서, 아직도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해하는 우리들은 여전히 아프고 안타깝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6 허무로부터 벗어나는 길 ― 진이정
 
허무에 발목 잡혀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웬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나 허무에 발목 잡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허둥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허무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다가온 그 허무의 늪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그 허무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어느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위장일 뿐, 허무는 우리의 몸과 삶 근저에 자리잡고 언제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허무와의 긴 싸움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고, 수시로 앞서 말한 바처럼 ‘허무의 늪’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 것인가, 골몰하게 된다.

일단 허무의 늪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구원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말해도 유한한 인간조건 앞에서 구원을 온전히 체험하며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진이정의 시와 생애를 보면서 허무의 문제를 꺼낸 것은 그의 시와 생애의 근저에 이 허무와의 지난한 대결상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결 속에서 진이정은 허무를 이긴 것일까, 아니면 허무에 예속돼버린 것일까. 어찌보면 진이정은 허무를 이긴 자같이 보이고, 또 다르게 보면 허무에 패배한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잘 읽어가다 보면 진이정은 죽음으로써 허무를 자발적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죽음으로써 허무를 자발적으로 극복하다니……. 그러나 이 역설을 깊이 이해할 때 진이정의 죽음은 허무에 짓눌린 수동적인 죽음이 아니라 허무를 휘어잡은 자의 능동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진이정은 죽음으로써 우주와 적극적인 합일을 이루기 이전에는 허무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으로써 우주의 거대하고 무한한 흐름에 몸을 싣기 이전에는 삶의 첫 부분에도, 마지막 부분에도 허무가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처럼 죽음으로써만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러나 진이정은 인생을 잔인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분명 어느 면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적 사유를 동원한다면 인생이 잔인하다는 생각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이정은 일찍 인생의 허무를 넘어서 우주의 거대하고 무한한 흐름 속으로 몸을 실었다. 그런 점에서 진이정은 허무의 늪 앞에서 너무 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기를 ‘내 인생은 소위 보람 있다는 일로 낭비되었다’(「거꾸로 선 자의 꿈을 위하여 3」)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을 통한 우주와의 합일에 의하여 낭비로 얼룩진 삶을 일찍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나는 현명한(?) 것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허무, 그것과의 만남,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 속에 진이정의 죽음이 놓여 있다. 이런 그의 죽음은 허무에 발목 잡힌 우리들의 삶을 자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나는 글을 끝내며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허무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하여도, 우주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하기엔 우리의 생명욕이 너무나도 강력하다고…….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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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시집의 허와 실 ㅡ 이승하 ㅡ


1 상업적 연시집의 등장

다수의 시집을 몇 십만 부 찍을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대형 서점에서 매달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를 따로 매기는 나라도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해마다 출간되는 시집의 수도 엄청나지만 한두 해에 10판 이상을 찍는 시집도 상당수 출간된다. {홀로 서기}를 필두로 하여 1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시집도 여러 권이니 우리 나라는 시인의 왕국, 시의 나라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러한 외적 화려함이 문화의 전반적인 성숙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상업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시집이 많다고 하여 국민의 시에 대한 사랑의 체감온도가 서정윤의 {홀로 서기}와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의 성공과 더불어 갑자기 뜨거워졌고, 그 뜨거움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시집의 상품화 성공과 시집이라는 얇은 책자의 고부가가치가 시에 향기를 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향기를 악취로 바꾸는 데 일익을 담당해왔는데, 이는 일시적인 우려를 넘어 문학적 불행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것이 그레샴의 법칙이다. 독자대중에게 널리 읽혀지는 시가 문단에서 높이 평가받는 시를 구축하고 있으므로 그레샴의 법칙에 따르면 영상 매체가 우리의 시야에 늘 자리잡고 있는 이 휘황찬란한 시대에 질 낮은 시집의 상품화는 막을 도리가 없다. 독자층의 확대와 문학의 문화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문학의 시대'로 간주해도 좋을 1980년대의 우리 시단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집을 몇 권 갖게 된다. 250만 권이 팔렸다는 {홀로 서기} 외에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김초혜의 {사랑굿}, 김대규의 {사랑의 팡세} 등이 그것이다. 1976년에 나온 이해인의 {민들레의 영토}도 1980년대에 수십 판이 나간 시집 중의 하나다. 199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은 류시화가 여러 권을 점하고 있다.

그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같은 시집 외에 번역한 책도 예외가 없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이밖에 이정하의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와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예반의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용혜원의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은}과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원태연의 {원태연 알레르기}와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등이다.

이들 시집은 낙양의 지가를 올린 것 외에도 이성(혹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뒤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이하 줄여 '戀詩'로 표기)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 시문학사에 연시의 전통은 1925년에 출간된 소월의 {진달래꽃}과 1926년에 출간된 만해의 {님의 침묵}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많이 팔린 연시집이라고 하여 '상업적'이라는 수사를 붙여 비판을 가할 수는 없다. 1980∼90년대의 유명 연시집은 시 독자층의 확대에 공헌한 문단사적 의의를 지닌 시집으로 훗날에도 거론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통문학권 출판사에서 낸 시집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으로 80년대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90년대는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등을 갖고 있다.



그럼 '상업적 연시'라는, 다분히 비판적인 어조로 언급될 수밖에 없는 시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필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출간된 시집 중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위를 한동안 지킨 많은 시집의 이름을, 출판사명·저자명과 함께 일일이 나열하면서 출판사의 속된 상업성에 비난의 화살을 쏘아댈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상품임이 분명한데, 많이 팔렸다는 사실 때문에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분석이 전제되지 않은 비판은 설득력이 없으므로 ①상업적 연시집의 공통적인 특징과 함께, ②연시가 넓은 수용층을 갖고 있는 이유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고, ③연시집의 상업적인 성공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또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승리자인 상업적 연시를 쓴 시인들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은 가급적 피하겠지만, 시를 인용할 때는 저자 혹은 편저자의 이름을 밝히도록 하겠다.

2 상업적 연시집의 공통적인 특징

첫 번째 특징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시, 그리움의 시, 우정의 시라는 점이다. 시집의 제목에, 시의 제목에, 그리고 편편의 시에 '사랑'이라는 명사는 무수히 등장한다. 시집 제목 앞에 '사랑·명상의 시'라는 또 하나의 제목이 붙기도 하고({만남에서 동반까지}), 시집 제목 밑에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 것이며 또 사랑이란 진실로 무엇일까요' 하는 부제가 붙기도 한다({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더 마음 절이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

시집을 펼쳐보면 소녀 취향의 조악한 삽화가 등장하는 경우는 아주 많고, 시인의 잘생긴 얼굴이 여러 장에 걸쳐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원태연 알레르기}). 시 본문 하단 여백에 고딕체 활자로 "서로 만나고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고 끝내 헤어짐은 많은 사랑의 슬픈 인생인 것을"이나,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또 안다는 것은 미워한다는 것" 등 사랑에 관한 유치한 소리가 적혀 있기도 하다({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더 마음 절이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 시집 말미에 여러 쪽을 할애해 "이 순간을 소중히 사랑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길은 기쁨이 아닌 고통이게 합니다."느니, "잃어버린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곧 성숙을 느끼는 것, 사랑은 부서지는 자신의 틀 속에서(…)" 하는 식의 사랑에 관한 치졸한 경구가 나열되기도 한다({만남에서 동반까지}). 사춘기 청소년들의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좋을 글귀를 시와는 무관하게 적어놓는 이런 행위는 시집의 품격을 떨어뜨릴지는 몰라도 상업적 성공에는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것이다. 시를 봐도 거의 전부 사랑을 예찬하거나 이별을 서러워하지 않으면 우정과 진실을 소중히 여기자고 권유하고 있다.


지금 나는 누군가 절실히 그립습니다. /혼자란 사실이 너무도 싫습니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더욱더 느껴지는 이 고독. /이제는 혼자 있기를 원치 않건만 /세상은 언제나 나를 외톨이로 만들며, /그대로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하게 하며 /진실된 마음을 더욱 그립게 합니다.

―박렬, <만남에서 동반까지 6―사랑을 찾습니다> 1연


휘저어도 바람이 일지 않는 /이별의 적막함이여 //고함을 쳐도 소리가 막힌 /이별의 무서움이여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이정하, <사랑의 이율배반> 전문


친구야! /우리가 꿈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 /…(중략)… /친구야! /우리들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커다랗게 웃었지. /우리의꿈이 산산이 깨져버렸을 때, /얼싸안고 울었다. /욕심 없던 날 /우리들의 꿈은 하나였지.

―용혜원,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친구야 8> 1, 3연

상업적 연시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이별, 우정과 진실의 노래는 이렇듯 유치하기 짝이 없다. 시적 수련의 흔적은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대신 편마다 어설픈 감상이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유치함과 감상성이야말로 독자의 감정에 강력히 호소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이들 시집을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다. 상업적 연시집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생활의 구체적인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렬의 시를 보면 세상은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하게 하는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싫다고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넋두리다. '고독' '외톨이' '진실된 마음'이란 것도 극단적으로 추상화되어 있어 대중가요의 수준보다 못하다. 이정하의 <사랑의 이율배반>은 '이별'이 시종일관 관념화되어 있어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용혜원의 <친구야> 연작에는 '꿈'이 나오는데 "꿈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라는 구절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꿈이 관념어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상업적 연시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사랑'과 '이별'일 것이다. 누구를 왜 사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는지 사건의 추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 그저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이별은 대단히 슬프다는 식의 통속적인 얘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진실이니 꿈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관념화가 지나쳐 우리네 보편적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주된 요소이므로 질타의 대상만이 될 수는 없다. 독자가 이런 시를 찾고 있는 터에 시인이 그런 시를 제공하고 있으니 서비스의 차원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인가. 그렇더라도 독자 대중을 추상과 관념의 안개 속으로, 유치와 감상의 늪지대로 계속 인도하는 데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 연시라도 얼마든지 사람의 숨결과 생활인의 온기를 느끼게 할 수 있거늘 이들 시집은 하나같이 사춘기 청소년들의 설익은 감성에만 호소하려 든다. 세 번째 특징은 저자의 약력이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인데, 상업적 연시집이 대개 무명 시인의 시집이므로 이는 불가피한 현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명을 의도적으로 내세우는 시집, 예컨대 '얼굴 없는 시인'이란 글자를 표지에 큼지막하게 내건 {우리가 진짜로 사는 것은} 같은 시집은 출판사의 상업성이 도에 지나쳐 꼴불견이다. 소설가 서영은을 연상시키는 '서은영'이라는 약력 미상의 사람이 편집한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더 마음 절이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는 어느 일간지에서도 문제를 제기한 바 있지만 그런 구설수가 판매 부수에 지장을 주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시집은 누구의 작품을 어떤 기준으로 편집했는지를 숨기고 있는, 독자를 철저히 기만하고 있는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장기 베스트셀러였다. '책머리에' 부분에는 거의 전부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인용하고 있어 칼릴 지브란의 작품을 시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네 번째 특징은 제목이 긴 시집이 많다는 것이다. 제목이 너무 길어 암기하기 어려운 베스트셀러 시집은 부지기수다. 이풀잎의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간직함이라더니 거봐 너도 울잖아!}와 고은별의 {마지막이란 말보다 더 슬픈 말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는 저자명도 본명이 아닌 듯하다. 원태연의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와 여경희의 {그대 사랑엔 "완전 초보"랬지 알고 보니 그대 이별엔 "완전 프로"였어}도 앞의 두 시집과 함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시집이다. 장근봉의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당신이 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김양수의 {니가 미워질 때쯤 떠나면 안 되는 이유는 그 이후에 더욱 사랑하고 싶은 것 같음이지}, 김정곤의 {아침 늦게까지 꿈을 꾼 날에는 메조포르테의 음률이 춤을 추고 아침을 서둘러 깨는 날에는 안단테 길게 산책을 한다}는 베스트셀러 순위로의 진입을 꿈꾸는 시집인데 뒤의 두 시집 제목은 문법에도 맞지 않는다. 이들 제목은 하나같이 통속의 극을 보여주고 있어 어처구니없다. 청소년 독자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데, 제목이 길면 잘 팔린다는 속설이 연시집 전문 출판사에는 널리 퍼져 있는 모양이다. 제목이 짧은 경우도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나 {원태연 알레르기} 같은 시집은 제목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려 애쓰고 있어 가관이다. 1995년 3월 10일자 조선일보의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세 권의 시집이 한 사람이 쓴 것이라 놀랍다. 그중 하나가 {원태연 알레르기}이다. 원태연이라는 시인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알레르기에 가깝다는 것인지, 시인이 알레르기로 고생한 내용이 들어 있는지, 시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정신적인 거절 반응이 심각하다는 뜻인지 제목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랑의 명시' 등의 제목으로 출판사 편집부에서 유명 시인의 시를 수집, 재수록하여 판매고를 올리는 경우가 있다. 필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장정의 시집에 이미 발표했던 시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 경험이 두 번 있었다. 그리고 대학가 화장실과 도서관 벽의 낙서와 동아리 방(서클 룸)의 노트를 수집해 거기 적힌 낙서를 시 형태로 행과 연을 나누어 출판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경우도 있었다. 시집에 실려 있으니 시라고 해야 하겠으나 도무지 시 같지가 않아 두 편 예시해둔다.


대학은 뭐하러 왔어? /취직하러요. /취직해서 뭐하려고? /돈 벌어야죠. /돈 벌어선?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죠. /그리곤? /없어요. 그게 전부예요. 그밖에 또 있나요?

/그래…… 없다. 우린 레디메이드 인생이니까. /―대학문학탐험대 편, {사랑하기 시작하자} 중 /<우리들의 대학> 부분


가을과 나와 가을 여인 /둘은 사랑했으며 /둘은 이별했다. /그리고 나는 /가을 여인을

또 찾는다. /―사회와 문학을 생각하는 모임 책임편집, {슬픈 우리 젊은 날} 중 <가을여인> 전문


3 연시가 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유

연시가 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유는 첫째, 시집이란 상품의 주요 고객이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 직장 여성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연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무시하고서 문단에서 높이 평가받는 시인의 이해 못할 시집을 꼭 읽어야 한다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둘째 이유는 상업적 연시가 학교에서 배운 시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연시라고 해도 연모의 대상이 조국이나 절대자였지 이성인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중·고등학교에서 시를 애송하는 것이 아니라 시어와 시의 구조를 분석하는 신비평적인 방법으로 배운다. 제도교육의 긴 과정을 통해 시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야 하므로 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아울러 묘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시마다 시인의 활동 무대와 시대 배경과 관련해 암기할 사항도 많고, 이 시의 이 단어는 무엇을 의미한다는 따위의 해답도 익혀야 하니 시가 어렵게 느껴진다. 이에 반해 연시집은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무척 쉽고 공감이 가는 내용일 뿐 아니라 독자에 따라서는 깊은 감동을 주는 절묘한 구절도 연시집을 펼쳐보면 속출한다. 구체성의 상실이란 것도 독자에 따라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과 이별, 우정과 진실의 대상이 애매할 때, 독자는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주변 인물을 대입시키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이다.

셋째 이유는 교과서에 나오는 시가 케케묵은 시조가 아니면 대개 일제시대에 생산된 시로서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용혜원의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이란 시는 제목도 그렇거니와 연들이 "이유를 알고 싶었지", "커다랗게 웃었지", "우리들의 꿈은 하나였지" 등으로 끝나 청소년층의 현실적인 언어 감각에 호소하고 있다.

넷째 이유는 우리 현대시의 대중성 상실을 들 수 있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김소월과 윤동주, 김영랑과 이상화가 아직도 국민의 시인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현대시의 난해성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유치환이나 김춘수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현대시사에 큰 획을 그은 김수영의 대부분의 시도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의 시가 한자(대개 관념어이다)의 난무에서 헤쳐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고, 한자가 거의 사라진 시집을 손에 쥐게 된 것은 1980년대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씌어진 민중시는 그 이름과는 달리 민중의 폭넓은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민중은 시를 통해 민중의 건강한 힘을 느껴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말재주로서의 유치함과 말초적인 감상성에 젖어들기를 더 원했던 것인지 모른다. 민중, 아니 보편적인 인간은 정치가 우리의 삶 전반을 강하게 억압할 때 문학을 통해 더 많은 억압을 체험하기보다는, 사랑 노래로 위안을 받기를 원하는 나약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문예지의 순수시는 여전히 난해하게 느껴졌고, 분노에 찬 현장의 민중시는 왠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의 직장 여성들에게 절실한 문제는 계급의 평등과 통일, 민주화와 노동자 해방이 아니었다. 이렇듯 순수시와 민중시의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무명 시인이 저급한 사랑의 찬가를 열심히 불렀고, 이는 독자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상업적 연시의 탄생과 성장에는 이렇듯 또 다른 변수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농구 경기장에 '오빠 부대'가 몰려들 듯 연시집에 청소년 독자는 계속 몰릴 것이다.

4 상업적 연시의 성공은 바람직한 것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이러한 특징과 성공 요인을 갖고 있는 연시집을 '잘 팔린다'는 사실 때문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독자의 구미를 잘 포착한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은 출판계의 만성적인 불황을 타개하려는 몸부림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영세한 출판사가 고부가가치를 낳는 시집에다 시인이 무명임을 강조하고, 유치하건 어떻건 제목을 길다랗게 붙이고, 조악한 삽화까지 그려 넣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것쯤이야 가상하게 봐줘도 무방하리라. 그럼 독자층에 문제가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도 선뜻 비난의 화살을 꺼내 들 수는 없다. 활자 매체 위축의 시대에 그나마 시의 독자층이 있는데 이런 시가 훌륭한 시니 읽고 이런 시는 저급한 시니 읽지 말자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자율적인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위배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없다. 상업적 연시집의 서점 시집 코너 장악은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이 문제에 대해 회피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시가 왜 좋은 시이며, 이 시는 왜 저급한 시인가 하는 분별력을 갖춘 독자가 지금같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우리 문화의 성숙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날 또한 요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마다 노벨 문학상의 계절이 오면 번역 환경의 열악함을 운위한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나는 이것을 우리 문학의 숙원사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화(문학도 문화의 한 갈래이니)를 잘 보존하고 보살피려는 성숙한 국민의식에 있지 않을까.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 베껴 먹기 일색인 무명 시인의 베스트셀러 시집에 영혼을 팔 수 있으랴. 나는 학교 교육에서의 시 학습 방법에 문제가 아주 많다고 본다. 시가 설사 어렵지 않더라도 어렵게 배움으로써 독자는 시에 대해 동경과 거부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는 결국 상업적 연시에의 경도로 이어진다. 보다 많은 생존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일, 시를 분석의 대상에서 벗어나 향유의 대상으로 여기게끔 하는 일, 시 공부라 하더라도 지식 습득이 아니라 인격의 고양 차원에서 논의하는 수업, {詩經}의 시와 호머의 시를 일부분이라도 배워 동서양 시의 역사적 변천을 알게 하는 일, 시가 왜 탄생했고 온갖 문예사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대강이라도 알게 하는 일, 시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하는 일 등이 학교에서 제대로 행해지면 상업적 연시집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에 시를 오로지 문제 풀이를 통해 배우는 현재의 교육 방식이 유지되는 한 상업적 연시의 위세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상업적 연시집이 좋은 시집을 구축하는 현상황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등단한 시인이 베스트셀러 시집을 낸 바도 있는데, 최영미의 시집은 숱하게 거론되었으니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잠시 보자. 류시화는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운동' 동인의 일원이었음을 약력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의 시집은 장기 베스트셀러이다. 유치한 연시집도 아니고 시인의 남다른 생이 판매 부수에 영향을 끼친 시집, 예컨대 {접시꽃 당신} {노동의 새벽} {입 속의 검은 잎}과도 다른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진단에 별 자신은 없지만 류시화의 시는 상당수 신비주의에 몰입해 있어 물질 만능, 컴퓨터 만능 시대에 역설적으로 잘 나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현실 일탈이라는 면에서는 여타의 베스트셀러 시집과 궤를 같이한다.


바다에 섬이 있다 /섬 안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로 나가면 다시 새로운 섬

섬 안의 섬 그 안의 더 많은 바다 그리고 더 많은 섬들 /그 중심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들면서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꿈꾸었다 /꿈속의 꿈 그리고 그 안의 더 많은 잠 더 많은 /꿈들 ―<섬> 전문


이런 식의 추상화·관념화는 상업적 연시집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의 다양한 모습은 청소년 독자가 원하지 않는 살벌한 풍경이긴 하다. 그렇지만 시인이라고 허구한 날 백일몽만 꾸고 있는 자는 아닌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더라도 그 자연이 인공의 자연이거나 인간이 없는 자연인 한 자연 고유의 빛마저 상실하기 쉽다. 우리들의 축축한 삶을 비추는 '빛'이 없는 시가 인구에 오래 회자될 수 있을까.

하종오의 {님詩篇}(민음사, 1994)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이 시집은 "님의 침묵이 지나니 저의 침묵도 지나서, 푸르던 청춘의 옷은 낡고 닳았습니다"(<가을날>)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자칫 잘못하면 {님의 침묵}의 아류라는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또 민중시에 대한 반성 정도가 아닌 전면적인 부정으로부터 나온 비현실적인 세계라면 자신이 과거에 했던 모든 작업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님詩篇}이 상업적 연시집은 결코 아니므로 긴말을 하지 않는 대신 시를 한 편 인용한다.


님의 영혼을 생각다가 /저의 영혼은 피곤한 육신에 눌려 흐릿합니다. /서로 더는 유혹 받을 수 없는 시간이 왔고 /서로 더는 유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환희라고 한다면 그건 님의 생이고 /이것을 비애라고 한다면 그건 저의 생입니다. /님이시여 님이시여

―<유혹> 전문

소월과 만해가 죽은 지 벌써 몇 해인데 우리 시인들이 아직도 그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시인들 스스로 반성해야 될 일이다. 기원전 10∼6세기경에 불려진 노래를 모은 {詩經}의 시편을 봐도 시란 사랑 노래임이 분명하지만 '공허한' 사랑 노래는 아니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의 모습들이 아무리 지긋지긋한 것일지라도 시는 바로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프랑스의 쟈크 프레베르처럼 전세계적으로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네 일상적 삶에서 우러나오는 희로애락을 그려낼 줄 아는 국민의 시인, 혹은 참다운 민중 시인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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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

<ㄱ>

가까와 → 가까워
가정난 → 가정란
간 → 칸
강남콩 → 강낭콩
개수물 → 개숫물
객적다 → 객쩍다
거시키 → 거시기
갯펄 → 개펄
겸연쩍다 →겸연쩍다
경귀 → 경구
고마와 → 고마워
곰곰히 → 곰곰이
괴로와 → 괴로워
구렛나루 →구레나루
괴퍅하다 →괴팍하다
-구료 → -구려
광우리 → 광주리
고기국 → 고깃국
귀엣고리 → 귀고리
귀절 → 구절
귓대기 → 귀때기
귓머리 → 귀밑머리
깍정이 → 깍쟁이
깡총깡총 →깡충깡충
꼭둑각시 →꼭두각시
끄나불 → 끄나풀

<ㄴ>

나뭇군 → 나무꾼
나부랑이 →나부랭이
낚싯군 → 낚시꾼
나무가지 →나뭇가지
년월일 → 연월일
네째 → 넷째
넉넉치않다 →
넉넉지않다
농삿군 → 농사꾼
넓다랗다 →널따랗다

<ㄷ>

담쟁이덩굴→
담쟁이 덩굴
대싸리 → 댑사리
더우기 → 더욱이
돐 → 돌(첫돌)
딱다구리 →딱따구리
발발이 → 발바리

둥근파 → 양파
뒷굼치 → 뒤꿈치
땟갈 → 때깔
떨어먹다 → 털어먹다

<ㅁ>

마추다 → 맞추다
멋장이 → 멋쟁이
무우 → 무
문귀 → 문구
미류나무 → 미루나무
미싯가루 → 미숫가루
미쟁이 → 미장이

<ㅂ>

뼉다귀 →뼈다귀
반가와 → 반가워
발가송이 → 발가숭이
변변챦다 →변변찮다.
보통이 → 보퉁이
볼대기 → 볼때기
빈자떡 → 빈대떡
발자욱 → 발자국
빛갈 → 빛깔
뻐치다 → 뻗치다
뻗장다리 → 뻗정다리
봉숭화 → 봉숭아

<ㅅ>

사깃군 → 사기꾼
삭월세 → 사글세
살별 → 꼬리별
숨박꼭질 → 숨바꼭질
상판때기 → 상판대기
새앙쥐 → 생쥐
생안손 → 생인손
설겆이하다 →
설거지하다
성귀 → 성구
세째 → 셋째
소금장이 → 소금쟁이
소리개 → 솔개
숫병아리 → 수평아리
숫닭 → 수탉
숫강아지 → 수캉아지
숫개 → 수캐
숫놈 → 수놈

솔직이 → 솔직히
술부대 → 술고래
숫소 → 수소
심부름군 → 심부름꾼
심술장이 → 심술쟁이
살어름판 → 살얼음판

<ㅇ>

아니꼬와 → 아니꼬워
아니요 → 아니오
아닐껄 → 아닐걸
아름다와 → 아름다워
아뭏든 → 아무튼
아지랭이 → 아지랑이
앗아라 → 아서라
애닯다 → 애달프다
어귀 → 어구
여늬 → 여느
오금탱이 → 오금팽이
오똑이 → 오뚝이
웅큼 → 움큼
-올습니다 → -올시다
얼룩이 → 얼루기
욕심장이 → 욕심쟁이
웃니 → 윗니
웃도리 → 윗도리
웃목 → 윗목
오뚜기 → 오뚝이
웃쪽 → 윗쪽
웃츰 → 윗층
옛부터 → 예부터
웃통 → 윗통
윗돈 → 웃돈
윗어른 → 웃어른
으례 → 으레
-읍니다 → -습니다
이맛배기 → 이마빼기
익살군 → 익살꾼
오무리다 → 오므리다
일군 → 일꾼
일찌이 → 일찍이
우뢰 → 우레
있구료 → 있구려

<ㅈ>

지푸래기 → 지푸라기

자그만치 → 자그마치
장군 → 장꾼
장난군 → 장난꾼
장삿군 → 장사꾼
저으기 → 적이:
적쟎은 → 적잖은
주착없다 → 주책없다
죽더기 → 죽데기
지겟군 → 지게꾼
지리하다 → 지루하다
짓물다 → 짓무르다
짚북세기 → 짚북데기

<ㅊ>

천정 → 천장
총각무우 → 총각무
춥구료→ 춥구려

<ㅋ>

켸켸묵다 → 케케묵다
코맹녕이 → 코맹맹이
코보 → 코주부
콧배기 → 코빼기

<ㅌ>

탔읍니다 → 탔습니다
트기 → 튀기

<ㅍ>

판잣대기 → 판자때기
팔굼치 → 팔꿈치
팔목시계 → 손목시계
펀뜻 → 언뜻
푼전 → 푼돈
풋나기 → 풋내기

<ㅎ>

하게시리 → 하게끔
하는구료 → 하는구려
하는구면 → 하는구먼
하옇든 → 하여튼
한길 → 행길
할께 → 할게
할찌 → 할지
허위대 → 허우대
허위적허위적 →
허우적허우적
호루루기 → 호루라기


◈ 새 맞춤법의 주요내용 ◈

●[읍니다]와[습니다]로
있읍니다
→있습니다.
없읍니다 → 없습니다.
●[장이]와[쟁이]를 구분
미장이,유기장이 등 기술자를 일컬을 때에는 [장이]로, 욕쟁이, 심술쟁이 등 버릇을
일컬을 때에는 [쟁이]로 한다.
●[군]을 [꾼]으로
일군
일꾼, 농삿군 농사꾼
●[와]를 [워]로
고마와
고마워, 가까와 가까워
●수컷을 이르는 말은[수]로 통일
수꿩, 수캉아지, 수컷, 수평아리
(예외:숫양,숫쥐,숫염소)
●[웃], [윗]은 [윗]으로 통일
윗도리, 윗니, 윗목
(된소리나 거센소리 앞에서는 [위]로 쓴다 :
위짝,위턱)
·[아래·위]대립이 없는 단어는 [웃]으로 쓴다.
예 : 용돈,웃어른)
성과 이름을 붙여쓴다.
이 순신
이순신, 김 구 김구
●수를 적을 때는 만·억·조·의 단위로 쓴다.
이억팔천오백십육만칠천팔백구십팔


◈ 개정된 외래어 표기법 ◈

●인명·지명의 표기
고호
→ 고흐 베에토벤 → 베토벤
그리이스 → 그리스 시저 → 타이사르
뉴우요오크 → 뉴욕 아인시타인 → 아인슈타인
뉴우지일랜드 → 뉴질랜드 에스파니아 →
에스파냐 뉴우튼 → 뉴튼 처어칠 → 처칠
디이젤 → 디젤 콜룸부스 → 콜롬버스
루우스벨트→루스벨트 토오쿄오 → 도쿄
페스탈로찌 → 페스탈로치
마오쩌뚱 → 마오쩌둥
모짜르트 → 모차르트 헷세 → 헤세
말레이지아 → 말레이시아
힙포크리테스 → 힙포크라테포
뭇솔리니 → 무솔리니 바하 → 바흐


●일반용어의 표기
뉴우스
→ 뉴스 도우넛 → 도넛
로보트→ 로봇 로케트 → 로켓
보올 → 볼 보우트 → 보트
수우프 → 수프 아마튜어 → 아마추어
어나운서 → 아나운서 유우엔 → 유엔
텔레비젼 → 텔레비전 포케트 → 포켓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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