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험적 시창작론 >>

- 최영철


- 제1장 -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시를 쓰는 데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시를 잘 쓸 수 있다'정도로는 안되고 '나는 시를 잘 쓴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습작시절에는 자기 시의 어줍잖음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의 완벽함에 곧잘 절망한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자. 안되면 매일 아침 '나는 정말 미치도록 시를 잘 쓰는 놈이야'하는 자기 최면을 반복해도 좋다. 그러나 자만심은 금물이다. 자신감은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만 필요한 강정제 같은 것이다. 일단 다 쓴 작품에는 일이 끝난 뒤 거시기가 스르르 풀이 죽듯이 기가 죽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출판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시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천재시인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편을 갈겨 쓰며 집에는 이만한 분량의 작품이 또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벌린다. 이런 시인일수록 자기 시가 한국시사를 바꾸어 놓거나 출간만 하면 공전의 대히트를 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다. 자기 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흥에 겨워서 계속 써 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천재시인들에게는 약도 없다. 계속 천재로 착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법뿐이다. 그 천재시인 출판사 문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아, 천재는 외로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자신감은 없고 자만심만 있는 엉터리 시인인지 모른다. 아니 나는 아직 그런 알량한 자만심조차 없다. 쓰기 전이나 쓰고 나서나 내 재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주눅이 든다. 그러나 이런 의심조차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기나 했을까.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계속 턱걸이하며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이 '나는 도대체 시를 쓸 재주나 있는 놈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때마다 나의 자문자답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했다. 10년을 하면 사법고시라도 붙을 판인데 돈도 명예도 안 되는 시인 자격증 하나 못 따는 걸 보면 글렀구나 싶다가도, 사법고시에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으니 이런 초지일관이면 뭐가 되도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란 말의 뜻을, 하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는 능력이라고 새롭게 정의 해 버렸다. 즉, 재능은 그 분야의 특별한 재주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받는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것 때문이라면 추위와 굶주림도 참을 수 있고 멸시와 외로움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 그것 이외에는 세상 모든 것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 이런 경지가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 부여된 경지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재능도 세월 따라 닳아 없어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밖에 없다. 그 시절은 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 고통이 조금씩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반성하고 있다.


<요점정리>

1.자신의 재능을 추호도 의심해 본 일 없는 천재시인들은 이제
부터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의심하라.
2.자신의 재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 같은 어중개비 시인들
은 매일 아침마다 '나는 시를 너무 미치도록 잘 쓴다'는 최면
을 걸어라. 그 최면이 통하지 않으면 계속 절망하라. 시 때문
에 절망하는 한 당신은 누구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시인
이다.


- 제2장 -

시 창작 강좌 같은 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씨뿌릴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을 느낀다. 우선 내가 지독히도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체형이 숏다리이기 때문이고, 남에게 시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할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럽게 '시를 못 쓰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한참 떠들다가 말문이 막힐 대는 수강생 중에 누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린다.

'야, 그만해라. 너는 뭐 짜다라 잘 쓰니.'
그러나 나도 할말은 있다. '시는 배우는 게 아닙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엉터립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자기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주워섬기고 나는 단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우둔한 강의를 은폐하는 비법이다.

나는 순전히 혼자서 시를 썼다. 그 흔한 문예반도 백일장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 시 잘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유치한 대로 써 나가다 보니 그런대로 최영철적인 언어와 최영철적인 어법이 자리를 잡았다. 남의 시의 장점을 흉내내고 고운 말을 달달 외우기라도 했다면 내 시가 지금처럼 험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 잘 써서 100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시는 몸 전체에서 우러나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소설처럼 작업이 될 수 없다.

시를 잘 쓰려는 노력보다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 노력하는 게 좋다. 자기 몸 전체가, 생의 편편들이, 웅웅거리는 가슴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게 좋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주로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남들이 무수히 쏟아놓은 애찬과 탄식의 언어를 동어 반복할 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 '내가 또 있어야 하는'이유를 빨리 찾는 게 좋다. 그것이 자기 것이며 자신이 가장 잘 서낼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주제에 어울리는 것이다.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요점정리>
1.시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
라. 그래도 시가 안되면 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 것.

2.시를 알기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알아라. 자기 주체가 성스러
우면 성스러운 시를, 자기 주체가 상스러우면 상스러운 시를.


출처: 계간시와 시학22호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