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하영론)

     

                                                       유  재  천(경상대학교 교수)

     

     

     

    1. 실상사 처마 밑의 물고기

    절간 처마 밑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물고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푸른색 소리로 쏟아내고 있다. 사찰에서 물고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들어 목어는 물고기가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정진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또는 물 속의 생물을 제도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보더라도 절간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치환은 깃발에서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아이러닉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했지만 물 속에 있어야 할 물고기를 절간 지붕 처마 밑에 처음 매달아 놓은 사람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영 시인이 노래하는 그리움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지상적 존재로서의 시인의 생에 대한 끝없는 슬픔과 연민이 깔려 있다.

    실상사 대웅전 처마 끝에는
    등푸른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그의 슬픔이 너무 맑고 고와
    자세히 살펴보니
    아가미가 움직인다
    지느러미도 움직인다
    이곳에는 강도 바다도 없는데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너의 바다는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내면서도
    시퍼런 가슴을 열고 내려다보는
    저 가을 하늘
    너는 저 높은 하늘로 날아가서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던져라
    갸날픈 네 등에 실한 날개 돋아나도록

    맑은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마주선 장승이 가을비에 젖는다
    천년 만년 젖던 그대로 젖는다
    나도 돌이 되어 함께 젖는다
    아, 내 작은 날개도 젖고 있구나.
              ―작은 날개가 젖는다

    「작은 날개가 젖는다」는 실상사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피안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물고기는 이 지상 세계에 던져진 비극적 존재로서 인간을 상징한다. 처마 밑에 매달린 청동 물고기는 물고기의 집인 바다에서 추방당한 존재이다. 추방당한 존재인 물고기는 끊임없이 바람에 일렁이며 추방당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소리내어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처마 밑의 물고기가 추구하는 바다가 실제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다. 물고기가 그리워하는 곳이 실제 바다가 아니라는 것은 이 물고기가 물고기가 아니라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의 객관적 상관물임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퍼렇게 녹이 슨 처마 밑 물고기의 청동 색은 등 푸른 물고기로, 등 푸른 물고기의 푸른 색 이미지는 시인에게 슬픔으로 인지된다. 물고기의 슬픔은 물고기가 바다가 아닌 대웅전 처마 밑에 있다는 것, 즉 바다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라는 데 있다. 바다로부터 추방되어 있지만 이 물고기의 내면 속에는 푸른 바다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고기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아가미를 움직여보고 지느러미를 흔들어보며 쉴 새없이 움직이면서 쨍그렁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바람은 이 유전자를 일깨우고 본성을 자각하게 하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2연은 물고기가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바다, 즉 하늘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처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물고기에게 으름장을 놓는 공포의 대상이다. 바다가 검은 구름이나 성난 파도 등과 같이 존재를 집어삼키는 공포의 이미지로 사용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하늘이 공포의 대상으로 사용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비밀은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에서 해결된다. 가을 하늘,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가을 하늘은 온갖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퍼런 가슴을 열어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상적 존재인 인간이 그 투명한 청정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높푸른 가을 하늘은 물고기에게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물고기의 지상적 한계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돌아가는 것은 모든 욕망을 던짐으로써 가능하지만 지상적 존재로서 물고기로서는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공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신들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한 고고학자는 거대한 컴퓨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컴퓨터에 특정 날짜와 시간에 다시 합체되도록 명령을 주고 해체시키면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던 각 부품들은 해체되어 다시 합쳐지기 전까지는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처럼 작동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 다시 합체되면 서로 무관한 개체들로 보였던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드러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할 때 우주 속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서로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영의 시에서 사물과 인간 내면 속에는 우주의 한 조각이 각인되어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 조각과 우주는 서로 부르고 찾는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듯 마음 속에 간직된 불성이 부처를 향하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다.

    굳게 닫힌 창을 열고,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고, 입술을 포개어 취하게 하더니, 슬그머니
    손목 잡아 끌고, 봄 들판에 나와

    나처럼 가벼이 날아 보아라
    나처럼 부드러이 살아 보아라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아지랭이

    시인은 「아지랭이」에서 사물과 인간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의 한자락과 우주 사이의 교감, 감응을 노래하고 있다. 봄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눈에 잡힐 듯 말 듯,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겨울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사람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 뿐 아니다. 그것은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모든 사물들의 생명을 불러내고 꽃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사물과 화자의 마음 속에 각인된 우주는 아지랑이가 머리를 쓰다듬고 볼 비비고 입술 포개 취하게 하고 슬그머니 손목 잡아끌어 당김으로써 봄 들판으로 불려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지랑이는 사물과 인간의 내면 속에 깊이 잠복된 유전자를 일깨울 뿐이다. 일깨워진 유전자는 지상적인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아지랑이는 「작은 날개가 젖는다」의 바람처럼 굳게 닫힌 화자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어 우주와 하나되게 하고 황홀경에 들게 하는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우주적 힘의 상징이다. 이런 만물의 내면에 간직된 우주의 한 자락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과 시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할미새는 시를 모른다
    시를 몰라도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영혼이 맑게 우는 것은 시다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노랑 할미새의 울음을 보던 날
    달맞이꽃을 생각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듯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나 파블로 네루다를 그리워한다

    달맞이꽃의 서원이
    달에 닿아 별에 닿아
    서로의 눈물을 나눠 마시며
    월견초나 월하향, 혹은 야래향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정겨웁게 서로를 부르듯
    채송화꽃이, 쬐끄만 씨앗으로 이 땅에 와서
    색색의 꽃잎으로 기쁨을 나눠주듯
    눈물은 내 삶을 든든한 뿌리로 자라게 한다
    절망을 먹고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면
    절망은 더 없는 자양이 된다

    절망의 절망에게 할미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도
    노랑 할미새나 알락할미새를 날려 보낸다
    그리움을 아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밤.
              ―할미새

    「할미새」에서 시인은 할미새 울음소리를 듣고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라고 즉각적인 감정이입을 일으킨다. 즉각적인 감응이 가능한 것은 시인과 할미새의 내면에 우주의 한 자락이 각인되어 있어서 할미새의 울음과 지상적 존재로서 자신의 슬픔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할미새의 울음 소리를 듣고 할미새의 슬픔과 그리움을 이해한다. 시인이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한 것처럼 할미새의 울음은 할미새도 슬픔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 즉 맑은 영혼의 울음이라고 한다면 할미새의 울음 역시 시인 셈이다.
    이러한 할미새와 시인의 시 사이의 등가적 결합은 다음 연에서 달맞이꽃의 서원으로 확대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섬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시인이 미스트랄이나 네루다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근본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간절한 그리움들이 영혼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그 영혼의 울음이 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피안의 세계가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것을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한 것도 그 때문이다.
     

    3. 주왕산 단풍

    하영 시인의 그리움의 밑바탕에는 항상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그리움과 슬픔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리움이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된 것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슬픔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인간 존재의 내면에 간직된 거대한 슬픔과 비원에 마주친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는
    이쁜 손길에 머물기로 하네

    믿음과 믿음
    서원과 서원으로 탑을 쌓아
    저 먼 별에까지 닿고자 했던,
    천불 천탑으로 징검다리를 놓아
    미륵의 나라로 가고자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
    한 단 한단 소망을 쌓아올린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저 탑을 딛고 가면
    등 돌리고 돌아서는 마음 밭마다
    바라밀의 꽃씨를 뿌릴 수 있으리
    그리하여 마침내 불국토에 닿을 수 있으리

    나 오늘 이곳에 머물러
    돌에서 자고 돌에서 깨어나고 싶네
        ―운주사에서; 원은희 시인에게

    운주사는 화순에 있는 천불 천탑, 와불로 잘 알려져 있는 절이다. 천불 천탑이란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불탑을 가리키는 말로,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하룻밤 사이에 배의 돗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91구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이 남아 있지만 야트막한 구릉과 벼랑,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게 되는 서민들의 얼굴을 닮은 미륵불들은 당시 서민들의 미륵 세계에 대한 염원과 지상적 존재로서의 슬픔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운주사에서 불탑들과 불상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미륵세계에 대한 비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단 한 단 탑을 쌓아 저 너머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염원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 그리움의 장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고 그 돌 위에서 자고 돌 위에서 깨어남으로써 그들의 아름다운 소망을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에게 운주사는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인간의 비원을 형상화한 거대한 예술작품인 셈이다.
    주왕산 가을 역시 인간 존재의 슬픔과 비원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나 이제사 알겠네

    상처와 상처가 어울리면
    깊은 상처가 더 깊은 상처를 끌어 안으면
    따뜻한 이웃이 되고 정겨운 마을이 되는 것을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그대로 선혈을 쏟고 마는
    담쟁이 덩굴 그 붉은 울음 위에
    영혼이 맑은 가을 물소리가 머물다 가네
    늦가을 잘 익은 햇살 한 줌도 머물다 가네

    잘 아문 상처는
    여운이 길어 오래 남는 징소리처럼
    따뜻한 노래로 오래 오래 남을 수도 있다네


      첩
        첩

    단풍 단풍 단풍
           ―가을 周王山

    주왕산은 기암 절벽으로 유명한 산이다. 시인에게 이 기암 절벽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이상세계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그 상처로 인식된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은 지상 세계를 벗어나 이상 세계로 향하는 인간의 욕망과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선혈을 쏟는 담쟁이 역시 기암절벽과 등가적으로 결합되어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염원과 몸부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 도달하려는 이 몸부림은 끝내 좌절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던 절벽들은 끝내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골짜기, 골짜기를 이루며 상처를 드러내고 만다. 절벽을 오르던 담쟁이가 선혈로 쏟아낸 것들이 단풍이다.
    여기서 주왕산은 저 너머 세계를 지향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원과 슬픔을 간직한 거대한 수도원으로 변하게 되고 주왕산의 아름다운 단풍은 지상적 세계를 벗어나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과 한계를 형상화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하영의 시는 비극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인간은 지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천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하영의 많은 시들은 이러한 이원적 존재로서 인간의 비극과 슬픔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하영의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슬픔이 인간의 운명적 비애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유마경에 보살의 병은 슬픔이라고 했다. 보살은 이미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불가의 말이다. 슬픔은 깨달음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으로 인해 생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고 깨달음을 얻으면 더 큰 슬픔으로 중생들의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 활동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노래하는데서 나아가 더 큰 슬픔을 깨닫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천착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적극적으로 저 너머의 세계로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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