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 다시 퇴고를



# 퇴고란 무엇인가

시문(詩文)을 창작할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거나, 문장을 갈고 다듬는 일을 퇴고(推敲)라고 한다.
퇴고라고 하는 말은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다>의 ‘밀다(推)'를 ’두드린다(敲)'로 바꿀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그의 조언으로 ‘두드린다'로 고쳤다는 고사에서 추고(推敲)가 아닌, 퇴고(推敲)가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당대를 풍미했던 문장가였다. 통속적인 언어 구사와 풍자에 뛰어났으며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詩風)은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로 유명하다. 그의 자(字)는 백낙천(白樂天)으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으며, 시문집에 ‘백씨 문집(白氏 文集)'이 있다.

이 얘기는 백낙천과 얽힌 에피소드의 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하루는 백낙천이 이웃 친지들, 즉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을 불러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 칠현금(七絃琴)을 뜯어가며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연구 등을 위한 이 모임에서 한 제자가 백낙천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화선지에 붓만 대시면 절창(絶唱)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선생님은 퇴고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퇴고는 무슨 놈의 퇴고! 자고로 시란 즉흥적(卽興的)이고 즉물적(卽物的)인 게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는 것이지. 모름지기 시란 순간의 포착이 중요한 것이야. 순발력이 없으면 아예 시를 짓거나 흉내내려고 덤비지 말아야지."

술잔이 여러 순배 돌고 흥취가 일 만큼 거나해진 백낙천이 화장실에 간 뒤였다. 백낙천이 깔고 앉은 방석이 유난히 도도록 불거져 있었다. 시회에 참가한 문하생(門下生)이 백낙천이 깔고 앉은 그 방석을 들추자 아뿔싸! 그가 깔고 앉은 방석 밑에는 그날 발표한 백낙천의 시문 초벌 원고(草稿)와 무수히 개칠을 거듭했거나 고쳐 쓴 흔적이 역력한 파지(破紙)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백낙천도 남몰래, 그리고 무수하게 퇴고를 했다는 일화 한 토막이다.



‘오발탄(誤發彈)' ‘학마을 사람들’의 작가 이범선(李範宣·1920~1982)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작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키 높이 만큼의 습작 원고를 써야 한다"고. 그만큼 절차탁마(切嗟琢磨)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칼' ‘들개’ ‘금오벽학도' ‘황금비늘' ‘장수하늘소' 등을 발표한 작가 이외수(李外秀)씨는 유창하고, 아름답고, 적확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장편소설 한 편이면 대략 1200장 내지 1500장의 원고지가 소요되는데, 그는 장편소설 한 편을 막 탈고(脫稿)하고 나면 그 소설의 내용을 토씨(助詞) 하나도 안 틀리고 다 외운다고 한다. 낮에는 주로 자고, 밤에만 작업하는 야행성(夜行性)인 그는 소설의 플롯을 짜고 얼개를 얽은 다음 집필에 들어가면 일반 사람은 엄두도 못낼 고통스런 공정을 되풀이한다고 한다. 소설 집필 첫날 밤 10장을 쓰고 나서 그 다음 날 집필할 때는 앞서 쓴 10장을 다시 베껴 쓰면서 문장을 다듬고 윤문(潤文)을 하면서 새로 10장을 보태고, 세째 날 역시 앞에 쓴 20장의 원고를 베껴 쓰면서 또 문장을 다듬고 새로운 스토리 10장을 보태고, 소설 집필 네째 날은 먼저 쓴 30장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 또다시 글발을 지우고 고치는 등 퇴고를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스토리 10장 추가하고…. 이런 식으로 1200장 혹은 1500장 분량의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작업 과정에서 문장의 부호 하나, 어휘 하나하나까지 갈고 다듬는 것은 물론 자연스럽게 줄거리 전체까지도 술술 외워진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외롭고 고통스런 글쓰기 작업을 통해 이외수씨는 끝내 ’아름다운 문장'을 성취해내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소설문장은 바로 시'라고 평가하는 비평가의 지적은 빈 말이 아님을 입증하는 예가 될 것이다.


이렇듯 문장은, 특히 시문학은, 백낙천이 말한 ‘즉물적인 것'이거나 ’순간의 포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즉물적 발상법이나 직관적(直觀的) 어프로치(접근)가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고치는 무수한 퇴고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한 편의 시조는 완성되는 것이다. 일단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을 통해 발표한 작품이라도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있거나 흡족하지 않을 경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발표 당시의 정서나 분위기가 바뀔 경우 평생 두고 고치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썼다지 않은가.

어디 한번 상상을 해보라. 소설 한 편을 두고 20번도 아니고 200번을 고쳐 쓴다는 일을. 웬만한 사람은 똑같은 작품을 세번만 고쳐 쓰라고 해도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나고 신물이 난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텐데 200번이라니! 웬만큼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을 헤밍웨이는 해냈으며, 그런 끈질기고 피나는 절차탁마의 노력, 더 나아가 200번에 걸친 퇴고 작업 덕분에 영광의 노벨문학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는가.



# 퇴고의 실제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핏집 울리는 죽비 소리 남기고.

등이 허전하여 등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는 앞산,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오고 밀려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불리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파릇파릇 핏줄 돋는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가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놓고….

- 윤금초의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저자(著者)가 1999년 문학사상사 주관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가람시조문학상 선고위원회(최승범 박철희 권영민)는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으로 윤금초씨의 <할미새야, 할미새야> 외 2편을 선정한다. 윤금초씨는 시조의 격조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적 실험을 지속해온 시조시인으로서 특히 사설시조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다양한 기법적인 추구 작업에 몰두해 오고 있다. 문학사상사 가람시조문학상 선고위원회에서는 윤금초씨가 도달하고 있는 사설시조의 새로운 미학이 한국 시조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여,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본상을 윤금초씨에게 수여하며 그동안 쌓아 올린 시적 성과에 찬사를 드린다'고.


심사를 맡은 최승범 교수는 심사평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 말 그대로, 난상토의 끝에 윤금초씨를 수상자로, 수상작은 <할미새야, 할미새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하회탈 양반의 눈웃음> 등 3편을 올리기로 하였다. 윤금초 시인은 시력 30여년에 이른다. 그동안 꾸준한 작품 창작으로 시조시의 문학성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시조시의 저변 확대에도 많은 기여를 하여 왔다. 지난 1년에도 의욕적인 작품 발표와 더불어 젊은 시인들에게 시조시의 길을 넓힌 사화집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번 수상작으로 올린 3편에서 시조시를 위해 그동안 기울여 온 윤금초 시인의 실험의식과 노력의 결정미(結晶美)를 볼 수 있다. 사실, 그동안 그는 시조시형의 전통성을 어떻게 이어 가꿀 것인가. 자유시가 추구하고 있는 현대성이나 표현 기교 문제를 시조시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많은 고심을 하여 온 시인이다. 윤금초 시인은 사설시조 시형의 연작(聯作)이나 평 엇 사설시조 시형의 연첩(連疊)에서 현대시조의 활로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도 평 엇 사설시조형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율격의 묘미를 그 각각의 시형마다에 잘 살려냈다(시조의 율격을 정형(定型)이 아닌 정형(整形)이라는 가람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윤금초 시인의 시어 선택도 매력적이다. 어느 말엔 옛스러운 느낌이다가도 다시 보면 그 말에 겨레의 마음결이 일고 반작거린 새 정이 돋는다. 그가 취한 제재나 표현 기교 또한 현대 자유시의 어느 기준에 못미치고 퇴색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윤금초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박철희 교수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 윤금초의 시는 다양한 리듬과 대담한 실험성이 특색이다. <할미새야, 할미새야>가 보여 주듯이 시조적 세련을 거친 그 분방한 가락은 시조를 낯설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사는 내면(아픔)을 새로이 경험케 한다. 그만큼 타령과 육자배기, 잡가와 가사 그리고 민요의 장단을 두루 어울리게 하여 울려 주는 가락과 사설 속에 이 땅의 역사와 서민들의 애환이 정의되어 있다. <할미새야, 할미새야>가 단순히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회한으로 머물지 않고 훼손된 우리의 삶과 도덕적 감수성의 시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일찍부터 스스로 노래하는 지휘자요 창(唱)하는 감정의 조율사임을 자임하여 나섰다. 한결같이 시조의 확장과 변화의 실험에 그의 인식은 움직여 왔다. <하회탈 양반의 눈웃음>이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질라래비 훨훨> 등은 탈놀이, 사물놀이와 같은 민중연희의 변이요, 변주다. 그러면서도 ‘시조성'의 핵이랄 수 있는 형식은 변함이 없다. 더구나 <사설·인터넷 유머> 연작의 구절들이 보여 주듯이 거의 체질적으로 지녔다고 해야 할 입심이 돋보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서정성 속에 녹여내는 능력도 범상이 아니다.'


또한 권영민 교수는 ‘윤금초씨는 시조의 전아한 기품과 격조를 파괴하는 데에서 오는 긴장을 잘 살려낸다'고 전제하고 ’사설시조의 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그의 시적 상상력은 <할미새야, 할미새야> <질라래비 훨훨> 등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심사평에서 밝히고 있다. ‘적절한 어구의 반복, 자연스런 리듬 의식의 재현, 시적 심상의 확장과 응축 등은 윤금초씨의 시조에서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시조의 미학이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을 지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적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종적인 수상작 선정에서 심사위원 모두 윤금초씨의 작품을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지목하는 데에 동의하였다'고 평가했다.


사설시조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당초 ’가을비 한나절' 혹은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제목으로 초고(草稿)를 잡은 것이다.

1997년 우리 사회에 몰아닥친 IMF라는 대형 경제변란(經濟變亂). 경축 국치(庚丑 國恥)라고 불리는 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외환위기사태에 몰린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조선일보에 몸 담고 있었던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8년 2월 우대퇴직이라는 이름 아래 20년 동안 청춘을 다 불태웠던 그 직장을 뒤로 한 채 마치 한 마리 노숙(露宿)하는 할미새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등걸잠 자는 할미새>는 바로 평범한 소시민 윤금초로 읽어도 될 것이고, 서울역 지하도나 광화문 지하도, 서소문 공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름 모를 홈 리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고 제목을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를 상징하는 ‘가을비 한나절'이나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는>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생각에서 사설시조 한 수(首)를 구상한 것이다. ②에서는 초고 ①보다는 시적(詩的) 화자(話者)를 좀더 객관화시키고 어떻게 하면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게 되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번민 끝에 ①의 초고에 한 수를 더 얹기로 한 것이다.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 역시 시적 자아(自我)로 보아도 좋고, 고향을 벗어나 직장생활을 하는 어느 소시민을 떠올려도 될 것이다.

③의 제목 ‘햇볕이 계실까요'는 이 작품을 구상할 당시의 시대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햇볕정책'라는 화두(話頭)가 그 무렵 정치적 수사(修辭)의 차원을 뛰어 넘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이데아로 자리잡아가고 성숙되어가는 분위기였다. '햇볕'은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그리하여 비에 젖어 등걸잠 자는 할미새나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까지도 아우르고 껴안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준다는 의미로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③에서는 이미지를 명료하게 부각시키는 데도 신경을 썼다. 가령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저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을,>이라는 대목을 통째로 드러냈다. 이 대목을 통째로 드러내도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시란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시나 시조 짓기 작업은 군살 빼기 작업과 같은 것이다. 군더더기를 가차없이 걷어내는 것, 필요없는 너스레나 수다스럽게 지껄여 이미지를 산만하게 하는 요설(饒舌)을 삼가하는 것이다. 생략과 압축, 상징과 응축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 시조 짓기 작업의 요체(要諦)가 아니던가. 특히 사설시조에서는 필요 없는 수다나 너스레 때문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본전'을 못 찾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③에서는 둘째 수 종장 <정동진 불 타는 바다>를→ <물안개 거두어내는>이라고 수정했다. ‘물안개'가 ’정동진'보다는 더 구체적 적시라는 점과 ‘정동진' 하면 해돋이를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정동진의 해돋이 분위기는 이제 이미 낡고 너무 흔해 빠진 정서가 되어버렸고 포괄성을 띠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물안개 거두어내는>이라는 이미지를 끌어옴으로써 희망의 메시지, 무엇인가 다양한 뉘앙스가 풍기는 결구(結句)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④에 이르러 제목을 ‘할미새야, 할미새야'로 바꾸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할미새…'는 작자(作者)의 자설적(自說的) 진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시조다. 누구나 창작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바겠지만, 시나 시조는 작자의 체험 요소가 많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사사로운 체험을 가공(加工)하고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보편적 체험으로 확대촵재편했을 때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20년 직장을 하루 아침에 그만 두고 거리로 밀려난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마치 한 마리 노숙하는 할미새가 된 느낌, 그 억장 무너지는 충격적 사건은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와 다를 바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목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작자가 체험한 IMF 환란(換亂)의 충격적 사건을 간접 화법(間接 話法)으로 토로한 자기 고백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처럼 사설시조 두 수로 이루어진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네 차례의 개작(改作) 과정, 달리 말하면 네번의 퇴고 작업을 거쳐 비로소 마무리한 작품이다. ’할미새…'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시간적 개작 순서를 열거하면 ①→②→③→④로 나뉜다. 여러 차례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개칠을 하는 등 퇴고와 퇴고의 되풀이과정 끝에 탄생한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기록상 네 차례의 퇴고 과정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시조'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착상(발상)→플롯 설정→얼개짜기→시어의 취사선택→이미지의 전개→서사(敍事) 구조 얽기→군더더기 제거 작업→시적 화자의 진술 등 작품 창작 배경을 설명하자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퇴고 과정'을 거친 것이다.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피집 울리는 죽비 소리만 남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家長처럼 앞 산은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후비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내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햇볕이 계실까요'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똬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더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피집 울리는 죽비 소리만 남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앞 산은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다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모아 제 몸 불려가는 강물, 다리품 팔고 귀동냥하고 한 짐 남루를 지고 오는 저 강물아.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저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을,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정동진 불 타는 바다,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햇볕이 계실까요' 혹은 ’가을비 한나절'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앞 산은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다 둘러봐도 곤곤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모아 제 몸 불려가는 강물, 다리품 팔고 귀동냥하고 한 짐 남루를 지고 오는 저 강물아.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정동진 불 타는 바다,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가을비 한나절' 혹은 ‘햇볕이 계실까요’



# 담금질 거듭해야 시우쇠가 된다


다음은 옴니버스시조를 시도한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보자.


<1>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풋풋한 활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에 노역의 햇살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 눈 돌하루방이 부릅뜬 눈 굴리고 굴리는
꽃멀미 부르는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한숨 짓는 것도 같고
웅웅웅 울음 우는 것도 같은
이어도 노랫가락 소리,
그렇게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파도 뚫고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 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상상의 눈에는 언제나 선 명한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의 섬,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나고 나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 리게 되는 구원의 섬, 그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아직 아무도 없 는 섬, 그런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썰물 때만 잠시 잠깐 모습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쌀쌀한 마파람이 마른 낙엽 몰고 가는 어느 겨울날
눈앞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넘어가버리고
억새풀 산등성이만 하얗게 하얗게 물들이고….

<2>
<리드(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햇살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이 부릅뜬 눈 굴리고 굴리는
꽃 멀미 부르는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
나직한 목소리로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는 것도 같은 이어도 노랫가락 소리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파도 뚫고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 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상상의 눈엔 언제나 선명한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게 되는 구원의 섬, 그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분명하게 증언할 이는 아직 아무도 없는 섬, 그런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썰물 때면 건듯 건듯 등 모습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수면 아래로 뉘엿이 가라앉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날
눈앞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3>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돌하루방 퉁방울눈 부릅뜬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
나직한 목소리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짖는 것 같은, 이어도 이어도 노랫가락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상상의 눈엔 훤하게 훤하게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섬, 구원의 섬이어라.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영영 다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또렷이 증언할 이 아무도 없는 섬,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등 모습 드러내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
꿈길처럼 떠오른 섬, 훌쩍 수평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4>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짖는 것 같은, 이어도 이어도 노랫가락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다금바리 오분재기
상한 그물 손질하며
물길 급한 물질 하며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상상의 눈엔 언제나 언제나 훤하게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섬, 구원의 섬이어라.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또렷이 증언할 이 아무도 없는 섬,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등 모습 드러내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
꿈길처럼 떠오른 섬, 훌쩍 수평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5>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다금바리 오분재기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캄캄한 침묵의 수렁,
산호초 덤불 숲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입에서 입으로 굴려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구원의 섬,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는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6>
<전문 생략>

등지느러미 나풀대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입에서 입으로 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구원의 섬,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는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7>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지느러미 나풀거리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노래로 노래로 굴려온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접고 나면 저승 복락 누리는 섬, 한번 보면 이내 가서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오지 않는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 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굽은 산등성이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윤금초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문학사상’에 발표할 때 이런 시작(詩作) 노트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오늘의 시조문학은 ‘윤회’만 있지 ‘변화’는 없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외중내졸(外重內拙). 밖을 중시하면 속이 쪼잔해진다. 형식에 치중하면 내용이 치졸해진다는 말이다.

사설시조를 기피하는 몇몇 인사의 사설시조 부정론이 거센 줄 알고 있다. 내가 외면하니까 너도 하면 안 된다? 이만저만한 논리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시조 형태 가운데 사설시조 엇시조가 엄존해 왔음에도 굳이 평시조만을 고집하는 것은 사설시조 부정론자의 아킬레스건을 호도하기 위한 비겁한 술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표현의 다양성을 짓누르는 것은 가치 중립의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술의 가장 큰 적인 도식성을 멋지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윤회'가 아닌 ’변화'를 꿈꾸는 일이다. ‘이어도 사나…'는 이른바 옴니버스시조다. 시조의 각종 형식미학을 두루 아우르면서 서사구조를 갖추는 등 ’윤회'가 아닌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사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는 보기 드물게 형식실험을 모색한 작품이다. 하나의 소재 및 주제를 가지고 평시조+양장시조(2장시조)+엇시조+평시조+사설시조+평시조+사설시조 등 일곱 수로 마무리한 혼작(混作) 연형시조(連形時調)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의 <1>과 <7>, <2>와 <6>, <3>과 <5>… 등 글의 변천 과정(퇴고 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라. <1>과 <7>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와 수정·가필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도 사나…’의 일곱 번에 걸친 변천 과정을 순서대로 열거했지만, 여기에 나타나 있지 않은 수정작업과 퇴고작업이 무수히 뒤따랐다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대장간에서 다루는 쇠붙이만 담금질을 거듭하고 연찬(硏鑽)을 거듭하면 시우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학도 마찮가지다. 얼마만큼 끈기를 가지고 연찬작업을 거듭했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박목월(朴木月) 선생은 일단 탈고한 시 작품을 원고지에 정서(淨書)한 다음,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시어(詩語)의 생사 존망(生死 存亡) 문제를 따졌다는 것이다. 이 시어가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인지, 이 조사(助詞)가 여기에 꼭 있어야 하는지 일일이 따졌고, 필요 없는 군더더기나 조사(토씨)는 가차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솎아내고 잘라냈다는 것이다.



# ‘기다림의 미학’ 터득해야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소설 ‘닳아지는 살들’을 집필할 때였다. 소설의 도입부(導入部)를 20장 정도 초안하고 나서 더 이상 다음 줄거리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상상력이 바닥나고 영감(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의 고갈 현상에 부딪쳤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가며 끙끙거렸지만 ‘줄거리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고 이야기의 진척이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설 집필을 중단, 초고 노트를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난 후에 문득 ‘닳아지는 살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마치 신 들린 것처럼 소설의 가닥이 술술 풀려 나갔다. 책장 서랍 깊숙이 묵혀 두었던 초고 노트를 다시 꺼내 단숨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저 유명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거머쥐게 된 동인(動因)이었고, 그 작품이 바로 ‘닳아지는 살들’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작가 이호철 선생이 고백한 대로 소설은 물론 시나 시조 등 문학작품의 주제·소재에 대한 충분한 취재 및 방계 자료(傍系 資料) 수집을 게을리 하거나, 쓰고자 하는 ‘그 무엇’ 즉 내용이 청국장처럼 충분히 곰삭는 숙성(熟成)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집필(執筆) 작업은 힘 겨울 수밖에 없고 작품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요, 좀체 창작 진척에 가속도가 붙을 수 없는 노릇이다.

판소리 ‘심청전’에 나오는 아니리 한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사람의 설움이 어지간 해야 눈물이 나오는 법이지, 기가 차고 멱이 꽉 차면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법이렸다.’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쓰고자 하는 시조작품이 충분히 곰삭아서 저절로 ‘꼭지가 떨어지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해야 하는 일이고, ‘인내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대상(시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숙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취사 선택한 주제나 소재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지고 방계 자료를 찾고, 때로는 관련 책자를 읽고 때로는 관련 영화나 비디오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며, 꿈 속에서 헛소리를 하며, 입술이 다 부르트는 산고(産苦)를 겪으며, 그것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좀체 실감을 못할 수도 있다. 글쓰기란 하얀 원고지를 메워야 하는, 피 말리는 작업이라 하여 ‘백색 공포’라고 했을까.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인ㆍ작가는 모니터의 깜박이는 커서가 마치 “빨리 글을 쓰라고 재촉하며 윽박지르는” 강박감마저 느끼는 수가 있다.

개인에 따라, 그 작품의 주제 및 소재에 따라 천차만별 시차(時差)가 있게 마련이지만, 시조 한 편을 구상하여 손을 털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1주일도 걸리고 한 달도 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조 한 편을 하룻밤 사이에 완성, 쾌재를 부르는 수도 있으나 대체로 1주일 혹은 한 달, 심하면 1년도 가고 2년도 간다. 그러면서 그 작품이 완전히 곰삭아서 꼭지가 떨어지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내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불안ㆍ초조ㆍ조바심 때문에 버둥대는가 하면, 때로는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다.

인스피레이션이 떠오르고, 떠오른 이미지가 숙성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에서, 혹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무수한 정보(情報)를 입력(入力)하고 수정·가필(加筆)하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작품을 줄줄 외우게 마련이다.

드디어 마지막 탈고했을 때의 희열이란! 밤을 꼬박 새워도 성취감에 젖어 절로 신명이 나고 창작 복무 때문에 겹친 피로가 한꺼번에 가시는 것이다.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를 이런 때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기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퇴고와 관련, 이우걸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기로 하자.



● 외우면서 퇴고하기 / 이우걸

<1>
내게도 비밀한 나만의 시조작법이 있다. 그것은 외우기이다. 시조에 접하게 된 계기도 외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외우면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외우는 것이 어떤 면에서 좋은 방법이 되는가. 또, 외우면서 무엇을 고치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2>
나는 초 중학교 시절에 늘 어머니를 위해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야 했다. 어머니는 그걸 외우시는 것이 당신의 낙이었다. 그 낙은 마치 옛 여인들이 기구한 그들의 한을 노래에 실어 물레를 잣듯 시간을 자아가며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시조 두루말이는 그 당시 우리 집에선 어머니의 교과서로 여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교과서를 외우시는 어머니 곁에서 우리 식구들은 혹시 어느 구절이 틀리나 하고 듣고 있었지만 틀리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 나 스스로도 시조를 외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조를 자꾸 외우다 보면 3장 12음보의 형식미를 자연스레 알게 될 뿐 아니라 그 작품이 그려보이는 정경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시조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시조감상 방법대로 지금은 내 시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 감상 과정에서 문제점이 생기면 손질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의 퇴고 방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얘기해야 할 순서가 된 것 같다.

첫째로는 형식에 대한 점검이다. 시조는 두루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형시다. 특히, 자수로 해결되지 않는 운율의 미학을 시조는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수는 맞으나 시조가 아닌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수로는 넘쳐나는 듯한 데도 시조의 형식미를 잘 갖춘 시조가 있다. 이에 대한 감식안은 시조를 많이 외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법이 아닌 비법이다.

두번째로는 동원된 언어에 대한 점검이다. 가령, 격을 낮춘 비어를 발견했을 때 이 비어를 동원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된다. 또 모음의 지나친 반복이나 받침 사용의 문제점, 동어반복의 문제점 등을 따지는 것이다. 지나치게 율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 가벼운 서정시로서는 장점이 될 것이고 무거운 서정시의 경우는 단점이 될 것이다. 또 모음의 반복이 리듬감을 살리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받침의 경우 발랄한 서정시의 분위기를 필요로 할 때는 어휘를 바꿀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로는 내용에 대한 점검이다. 여기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구조의 완결성이다. 시조는 초, 중, 종장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초, 중, 종장은 서로 관계해야 한다. 또, 연시조의 경우 첫 수와 둘째 수 혹은 샛째 수는 독립해 있으면서도 서로 한 시세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서로 관계없는 연시조라면 함께 묶어 같은 제목을 붙일 이유가 없다.



<3>
이제 나의 시조 쓰기 방법을 보이기 위해 몇 편의 작품을 들어보고 싶다.

어릴 때 누나는 창녕에서 자랐고
자라서 누나는 파주에서 살지만
당신은 우리 누나를 욕하지 못한다.

강도 산도 해도 달도 산 자의 인연일 뿐
핏줄처럼 엉켜붙은 잡초들을 후벼파다가
사변이 나던 이듬해 밤차를 타고 떠났다.

이따금 엽서에다 누나는 소식을 쓴다
성한 그, 다리로는 밟지 못할 고향땅에
어머니 추우실까 봐 털옷도 짜 보낸다.

‘우리 누나 - 6·25'

유월 어느 날이었다. 반공 구호가 신문이나 방송 채널에서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이나 TV 채널의 도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에 식상해서 몸서리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시인인 나는 6·25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시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글을 써 본 사람이면 경험하곤 하지만 정말 막막했다. 그 때 얼른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릴 때 아랫동네 한 처녀에 관한 것이었다. 즉, 그 처녀는 6·25 이후 너무 가난해서 거리의 여인이 되어 파주에 살고 있는데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고향 땅 발 못 디딘다."고 외치던 그 처녀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에 노랑머리 남자 아이와 얼굴이 검은 아이를 데리고 몰래 밤에 고향에 왔다가 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6·25의 참상 중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가장 아픈 사건은 바로 죄 없는 이 처녀의 인생사다. 따라서, 실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우리 누나'의 일로 바꾸어 써 본 것이다. 처음엔 제목을 ‘6·25'로 했다가 다시 '편지'로 했다가 최종적으로 '우리 누나'로 바꾸었다.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서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 ‘비’

어느 가을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어떤 사람에게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한번도 부치지는 못했다. 그 때 내가 하숙한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그 지붕 끝에 양철 물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지면 실로폰 소리 같은 게 났다.
대학 2학년 어느 가을날, 나는 다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시조를 썼다. 비상과 하강의 이미지 배치, 그리고 사랑의 감정 - 어쩌면 가을에 내가 만난 비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완성되지 못한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은 씌어진 것이다. 제목도 ‘편지', ’가을 비', ‘비'를 두고 많은 시간을 보낸 뒤 ’비'로 정했다. 고심한 덕분으로 이 작품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4>
이제 다시 좋은 시조를 쓰는 방법으로 돌아가서 얘기해 보자. 나는 그 비법으로 외우기를 들었다. 그렇다. 시조는 특히 외우면서 퇴고해야 한다. 퇴고 기간은 길게 잡을수록 좋다. 어떤 작품의 경우는 창작할 때부터 수작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많은 모순을 안고 태어난다. 그 모순은 퇴고라는 작자의 애프터 서비스를 통해 말끔히 지워지게 된다. 어제까지 몰랐던 작품의 문제점을 오늘 다시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잘 고치면서 느끼는 희열 또한 작은 것이 아니다. 과작이라도 좋다. 시인은 완결된 한편의 작품을 묘비명에 새기기 위해 생애를 투자하는 사람이 아닌가!


외우면서 퇴고한다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시조시인 백수 정완영(鄭椀永) 선생 같은 분은 시상(詩想)의 발상에서부터 탈고(脫稿)까지 전과정을 머릿속에서 외우면서 처리한다고 한다. 그 시조에 걸맞는 시어(詩語)를 취사선택하고 이미지를 풀어내는 언어의 조립, 짜집기, 군더더기 제거, 결구 작업 등 모든 창작 공정을 머릿속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컴퓨터 두뇌처럼 머릿속에서 정리·정돈한 글을 원고용지에 옮겨 적는 정서 작업을 끝내면 한 편의 완결된 시조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완영 선생은 ‘컴퓨터 두뇌'로, 당신이 창작한 모든 시조를 줄줄 외운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창작한 모든 작품을 줄줄 외운다고 하여 천재시인이나 ‘위대한 문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컴퓨터 두뇌 백수 선생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중국 당나라 중엽의 시인 이백(李白 자 太白)은 천성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한 나머지 흥이 나면 곧 시를 창작하는 천재 시인이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을 읊었다고 하니 천재는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태백이 놀았던 당나라 때와 오늘의 21세기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백낙천과 방석에 얽힌 에피소드나,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쓴 헤밍웨이의 이야기, 그리고 작가 이외수, 시조시인 이우걸의 창작 비결(秘訣)은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시나 시조를 포함하여 모든 문학작품을 창작한다는 일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시조의 미진한 대목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꿈속에서도 시조와 씨름하는 절차탁마의 노력 없이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얻어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퇴고, 다시 퇴고를!’ 이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출처 : 짓거리시인의 시세상
글쓴이 : 짓거리 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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