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기택(1957년 1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입니다. 짬짬이 동시를 썼고 동화를 번역해 펴내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경희대학교대학원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두산 식품 구매팀 팀장으로 일하였습니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0), 미당문학상(2004), 지훈상(2006)를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등단하기 전까지 시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10년간 홀로 습작 기간을 가진 후에 33살에 등단하였고, 20년간 회사원과 시인의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시를 따로 쓸 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시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거의 길에서 시를 쎴다고 합니다. 나도 처음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설교 준비를 거의 거리에서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말에는 욕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욕망의 말들이 많지만 시란 자기속에 진정한 한마디를 내 뱉는 것이기에 시는 우리들의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기택 시인의 시에는 바로 그런 순수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독특하고 세심하고 따뜻합니다. 쉽게 스쳐가는 일상의 작은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잘 조율된 악기의 현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긴장된 힘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건조해서 불면 먼지가 날 것 같은 머리와 가슴. 도저히 시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그래도 시가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몸을 물고 늘어지며 뒤척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압력이 강제로 상상력을 분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의 언어는 정확히 요소요소에 배치돼 있으며 이미지는 야단스럽지 않게 숨어서 은은한 빛을 발산합니다. 어휘와 어휘 사이엔 틈새가 거의 없으며 행과 행, 연과 연 역시 긴밀하게 맞물려 구조적 긴박감을 자아나고, 그의 시가 내장하고 있는 힘은 강렬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적절히 갈무리된 채 기다리고 있는 힘이다. 억제되어 있는 그만큼 그 힘이 보유한 잠재적 폭발력은 더욱 배가되며 태풍 전야의 고요처럼 조만간 다가올 어떤 파국적 결말을 예감케 합니다.
그의 시의 파국적 결말이 그의 시 속에서 항상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생명체의 죽음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문명의 종말을 암시하기도 하고, 모든 움직임이 정지해버린 냉각상태를 지향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어떤 새로운 질서, 새로운 힘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파국의 도래가 아니라 파국을 향한 존재의 지칠 줄 모르는 기다림이며 참아냄인 것입니다. 이 점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 이미지들이 야성적으로 활동하는 모습보다는 가만히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시인은 힘의 방출보다는 힘의 응집에 더 큰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부동의 존재 속에 깃들인, 혹은 그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위태로운 균형을 포착하는 데 집요한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김기택의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문학 독자들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시킨 <꼽추>라는 작품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인은 꼽추 노인이 새 생명으로 부활, 혹은 재생하는 과정을 시화하고 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그의 등에 '알'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그 알은 종일 빛을 받아 부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날 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온갖 고난과 절망 속에서 결코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재생의 이미지를 시화함으로서 자신의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는 2005년에 네 번째 시집 <소>를 출간됐습니다.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 '소'라는 시를 실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제목을 <소>로 정했습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던 '소'는 시인의 문학세계의 변화 과정을 반영합니다. 시집 <사무원>에서부터 도시적 삶의 생태를 그려왔던 시인은 이번 책에서도 도시화로 인해 변화된 삶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선은 도시화되어 번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연의 모습으로 향합니다.
그의 네 번째 시집 『소』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명명(命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인의 지극한 사랑에 의해 사물들은 기존의 낡은 존재를 벗고 다른 존재로 거듭 태어납니다. 시인은 사물의 편에 서서 사물을 자라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물들은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바꾸며 부풀리게 되고, 그만큼 세계는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과 명명은 거꾸로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은유적인 반성을 동반합니다. 시인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을 관조합니다. 도로 위에 길게 이어진 두 줄기 타이어 자국, 검붉은 얼룩과 흰 스프레이, 만원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가지 못하는 노파, 텔레비전을 꺼야만 귀에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 초록의 경이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생명의 작용. 그동안 동물이나 인간의 생태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인은 초록의 놀라운 역동성에 주목합니다.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 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손익관리대장경 과 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스화기에다가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는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을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갚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입 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 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칠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용맹정진 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 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지듯 그렁그 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 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 에서 꺼내어 다시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 어 짓이긴다.
김기택 시인이 직접쓴 시작 노우트입니다. “나는 수다쟁이가 부럽다. 몸속에 저장된 말을 아무리 꺼내어 써도 남아 도는 말들. 그 말들을 빠르고 정확 하게 혀에 전달하는 순발력. 귀가 감지한 상대방의 말을 순각적으로 해석 하고 정확한 대답을 골라내는 민첩성. 말을 살아 있게 만드는 다양한 표정과 음악 같은 운율과 웃음 또한 한탄과 제스처의 신비한 조화 처음 보는 사람 아무나 하고도 십년지기인듯 대화하는 말의 달인들을 보는것만으로도 즐겁다. 할 말이 빈약 하고 전달하는데도 서툴러서 입이 달린지 사십여년이 되도록 소처럼 말이 어눌한 나는 마술 구경 하듯 그저 입만 벌리고 바라볼 뿐이다.”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1-4행 : 생명의 본래적 모습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멸치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존재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 5-13행 : 생명의 박탈 과정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14-21행 : 본래적 모습 회복의 욕망
사람의 말에는 욕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욕망의 말들이 많지만 시란 자기속에 진정한 한마디를 내 뱉는 것이기에 시는 우리들의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기택 시인의 시에는 바로 그런 순수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독특하고 세심하고 따뜻합니다. 쉽게 스쳐가는 일상의 작은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잘 조율된 악기의 현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긴장된 힘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건조해서 불면 먼지가 날 것 같은 머리와 가슴. 도저히 시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그래도 시가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몸을 물고 늘어지며 뒤척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압력이 강제로 상상력을 분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의 언어는 정확히 요소요소에 배치돼 있으며 이미지는 야단스럽지 않게 숨어서 은은한 빛을 발산합니다. 어휘와 어휘 사이엔 틈새가 거의 없으며 행과 행, 연과 연 역시 긴밀하게 맞물려 구조적 긴박감을 자아나고, 그의 시가 내장하고 있는 힘은 강렬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적절히 갈무리된 채 기다리고 있는 힘이다. 억제되어 있는 그만큼 그 힘이 보유한 잠재적 폭발력은 더욱 배가되며 태풍 전야의 고요처럼 조만간 다가올 어떤 파국적 결말을 예감케 합니다.
그의 시의 파국적 결말이 그의 시 속에서 항상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생명체의 죽음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문명의 종말을 암시하기도 하고, 모든 움직임이 정지해버린 냉각상태를 지향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어떤 새로운 질서, 새로운 힘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파국의 도래가 아니라 파국을 향한 존재의 지칠 줄 모르는 기다림이며 참아냄인 것입니다. 이 점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 이미지들이 야성적으로 활동하는 모습보다는 가만히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시인은 힘의 방출보다는 힘의 응집에 더 큰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부동의 존재 속에 깃들인, 혹은 그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위태로운 균형을 포착하는 데 집요한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김기택의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문학 독자들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시킨 <꼽추>라는 작품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인은 꼽추 노인이 새 생명으로 부활, 혹은 재생하는 과정을 시화하고 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그의 등에 '알'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그 알은 종일 빛을 받아 부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날 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온갖 고난과 절망 속에서 결코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재생의 이미지를 시화함으로서 자신의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는 2005년에 네 번째 시집 <소>를 출간됐습니다.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 '소'라는 시를 실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제목을 <소>로 정했습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던 '소'는 시인의 문학세계의 변화 과정을 반영합니다. 시집 <사무원>에서부터 도시적 삶의 생태를 그려왔던 시인은 이번 책에서도 도시화로 인해 변화된 삶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선은 도시화되어 번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연의 모습으로 향합니다.
그의 네 번째 시집 『소』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명명(命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인의 지극한 사랑에 의해 사물들은 기존의 낡은 존재를 벗고 다른 존재로 거듭 태어납니다. 시인은 사물의 편에 서서 사물을 자라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물들은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바꾸며 부풀리게 되고, 그만큼 세계는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과 명명은 거꾸로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은유적인 반성을 동반합니다. 시인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을 관조합니다. 도로 위에 길게 이어진 두 줄기 타이어 자국, 검붉은 얼룩과 흰 스프레이, 만원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가지 못하는 노파, 텔레비전을 꺼야만 귀에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 초록의 경이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생명의 작용. 그동안 동물이나 인간의 생태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인은 초록의 놀라운 역동성에 주목합니다.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 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손익관리대장경 과 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스화기에다가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는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을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갚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입 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 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칠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용맹정진 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 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지듯 그렁그 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 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 에서 꺼내어 다시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 어 짓이긴다.
김기택 시인이 직접쓴 시작 노우트입니다. “나는 수다쟁이가 부럽다. 몸속에 저장된 말을 아무리 꺼내어 써도 남아 도는 말들. 그 말들을 빠르고 정확 하게 혀에 전달하는 순발력. 귀가 감지한 상대방의 말을 순각적으로 해석 하고 정확한 대답을 골라내는 민첩성. 말을 살아 있게 만드는 다양한 표정과 음악 같은 운율과 웃음 또한 한탄과 제스처의 신비한 조화 처음 보는 사람 아무나 하고도 십년지기인듯 대화하는 말의 달인들을 보는것만으로도 즐겁다. 할 말이 빈약 하고 전달하는데도 서툴러서 입이 달린지 사십여년이 되도록 소처럼 말이 어눌한 나는 마술 구경 하듯 그저 입만 벌리고 바라볼 뿐이다.”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1-4행 : 생명의 본래적 모습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멸치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존재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 5-13행 : 생명의 박탈 과정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14-21행 : 본래적 모습 회복의 욕망
출처 : 열방제자교회andc8000
글쓴이 : 강한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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