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 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 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 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 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길 벚꽃이 피어 꽃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아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성 거려 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작 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쩔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번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두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은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눈부시다.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다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봄날은 갔네/박남준
봄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전주 근교 지인의 집들이에 초대받아 차와 술로 차곡차곡 지난밤을 새웠던 터였다. 봄꽃들이 피어있었는데 먼저 일어나 처마 끝에 앉아 있던 선배가 중얼거렸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마루를 내려서다가 들은 그 소리에 나는 감전된 것처럼 멈칫거렸다. 지리산 자락 집으로 돌아오는 길 쌍계사로 가는 화개골짜기는 그야말로 벚꽃이 피어 꽃사태였다. 반짝이는 섬진강과 연둣빛을 휘날리는 버드나무와 하얀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풍경 속을 걷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선배의 말투를 되뇌었다. 무언가 내 안을 스치고 가는 것이 있었다. 메모장을 꺼냈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꽃그늘 아래 앉아 받아쓰기를 시작했다. 청춘의 언젠가 쑥부쟁이꽃이 피어난 섬진강길을 걷다가 하염없었던 날들과 이제는 반백의 머리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덧대어 그려 넣었다. 「봄날은 갔네」라는 시가 나왔다.
전주 한옥생활체험관 개관기념행사에서 처음 이 시를 낭송했다. 반쯤 남은 소주병을 소도구로 사용하여 퍼포먼스적인 시낭송을 하려고 시의 첫 행을 읊는데 앞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니 아이들하고 같이 왔는데 무슨 시 낭송을 한다고 하면서 욕을 다 하느냐고 저런 것이 무슨 시냐고, 시도 아니다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깔깔거린다. 술상이 이렇게 푸짐하고 지랄이냐고, 안주는 자꾸 갖다 주고 지랄이냐고. 시가 아름다운 시어로만 쓰여 있어야 하는 것은
201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낸 첫 시집이 이성복 시인의 일곱번 째 시집『래여애반다라』입니다. 시인이 10년 만에 펴낸 시집인지라 그 사실만으로도 문단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지요. 수필체의 언술로 인해 시가 맞긴 한 것이냐는 작은 얘깃거리도 있었고요. 장석주 시인은 추천사에서 “무엇을 써도 시가 되는 경지에 들어섰구나, 하는 느낌이다. 사물의 구체성은 명징하고, 묽은 슬픔과 괴로움은 갑자기 까칠해지고 날카로워진다. 그 명징과 묽음이 만나 아득한 생의 풍경을 이룬다"라고 했습니다. 독특하면서도 낯선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신라 향가의 한 구절로, 이 여섯 음절의 이두는 '오다, 서럽더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위해 쉼 없이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고야 마는 것(羅)"이 바로 우리들의 부박한 삶이라 말합니다. 3년 전 이순을 맞은 시인은 모두 여든두 편의 시를 여섯 개의 장에 나눠 실은 시집에 자신의 육십 년 인생과 이미 발표한 여섯 권 시집의 자취를 고루 담아내려 했다고 합니다. 시집에 실린 시들에 촘촘히 박힌 시어들 사이와 이야기의 숲을 거닐다보면 사람들이 왜 그의 시에서 '충동과 좌절감'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고향인 상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이성복은 반에서 1등을 도맡아놓고 했다고 합니다. 워낙 똑똑하기도 했겠지만 무엇이든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작문에 소질을 보여 각종 백일장에서 상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주초등학교에는 아동문학가 신현득, 김종상 선생 이 글짓기를 지도하였고, 하청호 선생이 같은 학교에 계셨던 스승이었습니다. 5학년 2학기 때 이성복은 동경해마지 않았던 서울로 올라가 효창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고모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에서 '아버지가 원하시던 학교'란 바로 경기고를 지칭하는데, 그는 서울중학교를 거쳐 '딴 이름의'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경기고를 진학한 가장 큰 이유는 ‘출세하기 위해 유력층의 자제를 사귀어야 한다는 덜 영근 시근없는 생각 탓’이라고 했습니다. 내게도 자식을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진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머저리 같은 자식, 차홍국이 아들은 서울의대에 단박에 붙었는데...'라시며 친구의 아들과 비교하며 못난 자식을 구박하던 아버지였습니다. 어쨌거나 나도 이 시를 읽으며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추억할 수 있었습니다. 앨범의 사각 사진 사이 미로를 따라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과거와 과거의 과거를 넘실대다 아버지와 단 둘이서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홍채 안으로 빨려 들어왔습니다.
이제 곧 아버지 가신지 27년, 얼핏 원 없이 자유분방하게 사신듯하지만 생각하면 가련한 대목이 없지 않습니다. 평생 하급공무원으로도 너무나 거침없고 호방하셨던, 나와는 코드고 스타일이고 무조건 달랐던 아버지. 당신은 그 자식이 몹시 마음에 안 들어 툭하면 '머저리'란 함경도식 욕을 퍼부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한때 아마추어 사진작가랍시고 누드촬영대회에서 찍은 사진을 지갑에 넣어다니기도 했습니다. 마구 찍어댄 필름 값의 추정액만으로 아버지를 비위공무원쯤으로 의심하기도 했지요. 내 사진은 본 일이 없지만 방실대는 손자 사진은 지갑 안에 곱게 담아 다니셨습니다. 그 아이들이 서른을 훌쩍 넘겨 제 새끼를 가진 놈도 있지만, 가끔 밉상으로 보이는 이즈음에서야 문득 혈연의 윤회와 업이 두렵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