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찬비 지나가고 나면 훨씬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많다. 가을바람은 냉담하다. 가을바람은 옹색하다. 한 채의 빈집 같다. 그러나 가을바람은 으스스하긴 해도 흐리터분하지는 않다. 흐린 정신을 바로 세운다. 가을바람은 서리처럼 흰빛이다. 이처럼 가을이 기울어져 지나가고 나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로 차림차림이 간편해지고, 숲의 살림은 더욱 단출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무와 숲의 본래 면목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있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길을 떠났던 사람이 그 행로를 되짚어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듯이.
이제 해는 일찍 떨어진다. 가을의 주위는 점점 일찍 어두워진다. 행인들은 이리처럼 점점 사나워지는 날씨 속에 있다. 그러나 안온하게 감싸주는 이가 없지만은 않다. 내 바로 맞은편을 지나가는 가을의 얼굴을 본다.
Beethoven - Piano Sonata No. 8 in C minor,
Op. 13 'Pathetique'
: II~I~III
1798년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타는 베토벤 초기의 소나타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선율 때문에 지금도 많이 연주 되는 곡이다.
비창이란 표제는 베토벤 자신이 붙여 놓은 것으로,
표제처럼 1악장은 장중하고 비장하며,
2악장은 느리면서 서정적인 아다지오로 평화로워지다가
3악장에서 깊고 엄숙하게 마무리 지어진다. 건반위의 사자, 독일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박하우스, 젊은 시절 그의 연주는 용맹스러운 사자에 비유되었으나 갈수록 정신세계가 고양된 연주를 들려준다는 평을 받는다. 1959년의 이 녹음은 이미 오래전 부터 각광을 받아온 녹음으로 알려 졌다.
가을이 아니어도 코스모스 너는 꿈꾸어도 좋다 빛나는 비늘 온몸에 달아줄 한이 깊어서 숱이 많은 지느러미 풀어라 강물에 긴 머리카락처럼 뜨거운 살갗에 감겨오는 추운 물살 껴안고 흘러라 물줄기는 달라도 감꽃 오돌께 소문이 분분한 고향 빨래터에서 씻어라 네 슬픈 눈을
코스모스 꽃밭
도종환
코스모스 꽃길을 걸으면 나는
코스모스꽃보다 더 설레인다
연분홍 꽃잎 빛깔로 얼굴 붉어진
열일곱짜리 제자들과 팔짱을 끼고
출렁이며 꽃밭에 들어서던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몇 살의
젊은 국어선생이던 내가 떠오른다
코스모스 꽃길에 들어서면
나는 코스모스꽃보다 더 엷은 꽃이 된다
순박한 빛깔 꾸미지 않은 수수한 향기의
이런 꽃들이 가득가득 피어 있는
교실에 들어서면
나는 다시 스물몇 살의 선생이 되어
꽃밭에 서 있는 착각을 하곤 한다
큰길 가엔 코스모스 사라진 지 오래여서 그런지
설렘을 잊은 지 오래인 삶 때문에 그런지
* 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
김영남
하얀 꽃들이 내 오른쪽을, 빨간 꽃들이 내 왼쪽을
응원한다. 분홍 꽃들은 앞과 뒤를 분홍으로 응원한다.
이들은 바람이 불면 고개를 흔들면서 서로를 응원한다.
응원하다가 이내 바람개비처럼 돈다, 오색으로.
그 부력에 이 지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붕 뜬다.
나는 그걸 뒤에 붙이고 뻗은 길을 한없이 달려본다.
청군인 내가 백군 대표인 '순'이와 손잡고 달려본다.
수평선 끝 푸른 하늘이 구부러진 곳까지 달려본다.
그 끝에서 부력을 떼고 다시 출발선을 뒤돌아보면
할머니, 어머니, 풍선장수, 해남 아저씨, 바지게,
복슬 강아지
고향 운동회 한구석이 박수를 치며 일어선다.
* 푸른 밤의 여로, 문학과 지성사
코스모스
송찬호
지난 팔월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와
코스모스 가을 신상품을 소개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가늘고 긴 꽃대와 석청 냄새가 나는 꽃은
밀교에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헌데 나는 모가지가 가는 꽃에 대해서는 오래 바라보다
반짝이는 조약돌 하나 얹어두는 버릇이 있다 코스모스가 꼭 그러하다
가을 운동회날 같은 아침 조무래기 아이들 몇 세워놓고
쉼없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저 근육 없는 무용을 보아라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 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코스모스 면사무소 첫 출근날
첫 일과가 하늘 아래 오지의 꽃밭을 다 세는 일이었던,
스물한 살 지방행정서기보
바람의 터번이 다 풀렸고나 가을이 길어간다
대체 저 깊고 푸른 가을 하늘의 통점은 어디인가
나는 오늘 멀리 돌아다니던, 생활의 관절
모두 빠져나간 무릎 조용히 불러 앞세우고
코스모스길 따라 뼈주사 한 대 맞으러 간다
코스모스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규리
몸이 가느다란 것은 어디에 마음을 숨기나
실핏줄 같은 이파리로
아무리 작게 웃어도 다 들키고 만다
오장육부가 꽃이라,
기척만 내도 온 체중이 흔들리는
저 가문의 내력은 허약하지만
잘 보라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도
똑같은 동작은 한 번도 되풀이 않는다
코스모스의 중심은 흔들림이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중심,
중심이 없었으면 그 역시 몰랐을 흔들림,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마른 체형이
저보다 더 무거운 걸 숨기고 있다
* 뒷모습, 랜덤하우스
코스모스
고영
억지로 등 떠밀려
앙거주춤 길 나서는 고향집 앞
몇 울 남은
물 빠진 꽃잎마저 다 떼어주고
앙상한 손 흔드는
외줄 꽃대
어여 가. 어여!
무거운 발길 보채면서도
행여 소식 끓을까
어머닌 연신 손을 귀에 대고
전화 받는 시늉을 한다
자꾸만
뒤돌아보는
아련히
먼꽃
*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코스모스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코스모스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서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코스모스
김진경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 송이 팽그르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 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 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코스모스
최종천
고독을 푸른 하늘로 이고
투명한 계절의 입김에
약속도 없이
罰처럼 피어야 하는
흔들리는 神話
* 罰 : 벌 神話 : 신화
* 눈물은 푸르다
코스모스가 코스모스에게
조하혜
<제 3세계>음악을 들으며 '희망'이라는 말을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펴다 반복해봅니다
부도난 아버지에게서 친척집으로 우편물처럼 맡겨진 시절, 발가락 동상처럼 간지럽던 시절입니다 눈물날 때 먼 산, 먼 하늘 바라보며 깊고 길게 숨 한 번 쉬고 나면 먹먹한 것들이 이내 환부에 물파스 칠한 것처럼 따갑게 박히다가 잠들곤 했습니다
<제 3세계> 음악을 듣다가 문득 삼십이 넘은 내가 '희망'이라는 말에 무너집니다
점령군에서 아군으로 아군에서 다시 적군으로 나에게서 나에게로 나는 얼마나 많은 경계를 떨어져 나온 것일까요?
* 도넛, 비어 있음으로 존재한다
코스모스
이형기
자꾸만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 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채 - 희망도 절망도
불 타지 못하는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라미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호올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 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나의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코스모스
조정권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高士慕師)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을 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꽃이옵니다
*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문학동네
코스모스로 가는 길
마종기
과연 어리석은 자들만
만져지는 것을 믿는가.
우리가 지나온 연옥의 도시들,
다시 깊은 잠속에 빠져들고
누가 죽음의 기적을 부끄러워하랴.
몸의 부드러움이 우리를 떠난 후에도
신음하며 살아가는 기억 속의 아픔이여,
흔적 없이 완전히 죽는 것은 세상에 없다.
떠나온 꽃밭의 길은 어디였던가,
우리가 찾던 도시는 보이지 않고
달콤한 비가 천천히 주위를 적신다.
정다운 돌이 땀을 흘리며 나온다.
빛 같은, 또는 어두움 같은, 그 중간
어리석은 자들만 땅에 숨어서
보이고 만져지는 것만 믿고 있구나.
알렐루야, 알렐루야.
* 이슬의 눈, 문학과 지성사(1997)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 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 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 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 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 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 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 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 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 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가족, 가을 나들이
이준관
교외선 기차에서 내린 딸은 코스모스꽃을 향해 달려간다. 코스모스꽃의 허리를 가진 딸은 꿀벌의 물빛 날갯짓에도 흔들린다.
아들은 염소처럼 매해해 운다. 염소의 선량한 뿔이 되고 싶다는 아들. 그 뿔에 들꽃이 걸린다.
하늘빛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아내는 낯선 집 장독대에 핀 맨드라미를 보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장독대 위 낮달의 손톱에, 여름에 물들인 봉숭아꽃물이 아직도 엷게 남아 있다.
길가에 알밤이 떨어져 있다. 아들은 알밤을 주우며 이 알밤도 우리 가족이야, 하고 말한다. 저 가을 하늘 울타리가 파랗다.
꽃밭에서
박영희
봉선화 분꽃 피어 있는 꽃밭에서 스무 살 시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온통 꽃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을 생각하니 피어 있는 꽃들이 나이를 닮았습니다 진분홍 봉선화는 나비를 부르고 코스모스는 잠자리를 부릅니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쓸쓸하게 흘러가는 마흔 마흔을 생각하니 옛사랑의 그림자가 꿀벌들처럼 잉잉거리며 꽃밭 주변을 맴돕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쉰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예순이 되어버린 나는 꽃보다는 씨앗에 눈이 먼저 가는 겁니다 꽃 지는 건 두렵지 않으나 씨앗들 썩을까봐 장마가 염려되는 겁니다
오늘은 이렇듯, 꽃밭에서 한세상을 다 살아버렸습니다
꿈꾸는 가을노래
고정희
들녘에 고개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나는 저녁이 좋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어스름을 앞세우고 어둠은 갯가의 조수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딸네집 갔다오는 친정아버지처럼 뒷짐을 지고 오기도 하는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벌레와 새들은 그 속의 어디론가 몸을 감추고 사람들도 뻣뻣하던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가며 하늘에는 별이 뜨고 아이들이 공을 튀기며 돌아오는 골목길 어디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돌아다보기도 하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안다 나는 날마다 저녁을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는 누구나 건달처럼 우쭐거리거나 쓸쓸함도 힘이 되므로 오늘도 나는 쓸데없이 거리의 불빛을 기웃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